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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알 파 코 스

알파코스)그런거 우리에게도 있는데 -신완식목사님글

내가 신학생 시절 현장실습 과제물 제출용 주보를 얻기 위해 몇몇 친구들과 한 번 가본적이 있는 고국의 어느 교회에서는 최근 ‘알파 코스’라는 프로그램 때문에 심한 홍역을 앓고 있다고 한다. 담임은 이단 시비에 휘말려 있고 교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 방언, 쓰러짐, 금이빨, 가계저주론 등이 갈등의 주요 내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코스는 불행하게도 사방으로 확산되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런 ‘기적’이니 ‘능력’이니 하는 일들이 성령의 이름으로 또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뇌리 깊숙한 곳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어릴 적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곤 한다. 그리고 이내 씁쓸해진다.

<어머니의 신앙 체험>

슬픈 가족사와 개인적인 아픔 때문에 무척이나 마음 고생이 크셨던 내 어머니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담배 골초가 되셨다. 가난하고 병든 농부의 아내이자 육남매의 어머니로서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남편을 대신하여 그녀는 일찍부터 여장부가 돼야만 했다. 농부의 아내인 것 말고도 감장수, 생선장수, 화장품 장수……흔히 말하듯 안 해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해야만 했던 그녀는 본래 성품은 그렇지 않았으나 점차 여걸처럼 변해 갔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천성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법! 가냘픈 육신을 연신 짓눌러 오는 바위 같은 피로와 오늘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한 순간만이라도 잊을 수 있는 건 싸구려 담배 피우기였던 모양이다. 병든 남편도 골초 그의 아내도 골초. 어린 내가 가끔씩 해야 했던 심부름 중에 하나는 바로 ‘새마을’이라는 이름의 담배를 사흘이 멀다 하고 보루 채 사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대왕 골초였던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담배를 끊어버린 것이 아닌가! “어무이, 인자 담배 안 푸요?” “하모. 나 인자 다 끊었다. 인자는 마 쳐다 보기도 싫다 아이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금연 학교에 간 것도 아니고, 집안 살림 생각해서 끊겠다고 혈서를 쓰거나 남편에게 다짐을 한 것도 아닌데 정말 놀라우리만큼 그녀는 담배와 무관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서서히 줄인 것이 아니라 단 한 순간에 정리해 버렸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녀도 결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더 이상 혼자 힘으로 버텨나갈 수 없는 상황을 맞은 그녀는 신앙의 세계에 귀의하고자 어느 유명한 사찰을 찾아갔다. 불교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었고 별다른 인맥도 없었던 그녀였지만 어떤 손에 이끌리듯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산 속 깊은 곳에 위치한 그 고찰의 경내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녀는 마음과 몸에 말로 표현하기 곤란한 묘한 ‘현상’을 느끼게 되었고 그 즉시 담배를 피우고자 하는 욕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한다. 이후 수 년 동안 내가 직접 본 일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골초였던 남편 옆에서 단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별 것 아닌 현상일 수도 있지만 그 일은 그녀가 불심에 깊이 젖어 드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의 부모들께서는 정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분들이셨다. 초등학교라고는 근처도 가보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육남매는 오랜 세월 동안 그분들께서 글씨를 쓰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아버지께서는 끝내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고……그런데 불심에 한 발 한 발 젖어 든 모친에게는 참 묘한 일들이 자꾸 일어났다.

눈만 뜨면 녹음기로 승려들의 염불 테이프를 듣던 그녀가 스스로 한글을 깨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담배를 끊은 일처럼 일순간에 된 일은 아니지만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글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 관자제 보살……’ 하는 국한문 겸용 반야심경을 떠듬거리며 읽어가시던 그녀, 틈만 나면 “야, 막내야. 이게 무신 자고?” 하며 내게 글씨를 읽어달라시던 그녀가 세발 자전거 굴러가듯 글을 읽더니 급기야 오토바이 달리듯 읽어대는 게 아닌가! “어, 어무이. 이게 우짠 일 인교?”  정말 놀란 건 나였다. “그거 참 히안하제. 운제부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글씨가 요래 막 읽어지는 기라……”

내가 교회를 다니기 훨씬 전에 이미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한 어머니께서는 정말 불공을 드리는 일에 헌신적이셨다. 그래서 나는 신학교에 입학하려고 집을 나서는 그날 아침까지 가부좌를 틀고 벽을 향한 채 열심히 기도하시는 그녀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녀는 언제나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하셨는데 기도가 간절해지고 깊어지면 땀과 눈물과 콧물이 범벅 되기 일쑤였고, 몸이 크게 진동하는 것을 빈번히 목도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고 3 수험생이라 늦게 귀가하다 아랫집에 사는 우리 전세집 주인 아주머니께서 불공 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상한 말이다 싶어 잠시 귀를 기울였다 황급히 방에 들어서서는 즉시 어머니께 여쭈었다. “어무이. 아랫집 주인 아지매가 이상한 말로 기도를 하던데 그게 뭔교?” “어, 절에 시님이 그런 걸 뭐라고 캤는데 이름을 이자뿟다마. 우주(宇宙)에 무신 언어라 캤는데 잘 모리겠네.” “그라모 어무이도 그런 거 할 줄 아요?” “하모.” 내가 어머니께 그것을 집요하게 여쭌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일이 있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에 나도 ‘아다다다’ ‘우다다다’ 하는 초보 방언을 받고 신기해 있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나는 어머니를 통해 불교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비한 ‘종교현상’과 ‘체험’에 대하여 심심치 않게 듣곤 했는데, 기독교 계통의 은사주의자들이 그토록 자랑스레 내세우는 방언, 예언, 신유, 축귀 현상 같은 일들이 그 곳에서도 자연스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것들은 평신도 불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기에 불교를 제대로 공부한 고승들은 틈나는 대로 ‘그런 사소한 일들에 한 눈 팔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욱 정진하시오’ 라며 훈계하곤 한다고도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어머니께서는 내가 묻기 전에는 그런 현상들에 대하여 먼저 말씀을 꺼내시거나 자랑하지 않으셨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이다마. 부처님 말씸대로 마음을 올바로 쓰고 살아야 하는 기라” 하신 모친의 음성이 아직도 내 귓전을 맴도는 듯 하다.

<현상 vs 복음>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는 어느 부흥사의 최근 부흥회 전단지를 보니 ‘류머티즘, 관절염, 허리 디스크, 비염, 변비, 두통, 생리통, 혈액순환장애, 불면증, 청력장애, 시력장애, 뇌세포부족, 정신질환문제, 소화불량, 복부불편질환, 산부인과질병’이 치료된다는 문구가 내 눈에 확 들어왔다. ‘문 닫는 의사들 많이 생기겠다’ 싶은 마음이 우선 들었고 그 다음엔 ‘의사들이 교회를 아니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이단교회니 기성교회니 가릴 것 없이 현재 성행하고 있는 각종 부흥회나 교회성장 프로그램에서 약방의 감초같이 등장하는 ‘이적 현상’들은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또한 그런 현상들은 과연 기독교 복음을 확산시키고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얼마만큼 순기능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처럼 드라마틱하고 충격적인 종교적 현상들은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에는 어떨는지 모르지만 종국에는 거의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기독교 복음 증거에 걸림돌로 전락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략 이러하다.

첫째, 내 어머니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타 고등종교뿐 아니라 각종 토속종교와 민간신앙들에서도 소위 ‘은사주의자’ 들이 말하는 그런 ‘이적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고 이단 및 유사 종교에서는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종교 현상’을 강조하면 그럴수록 오히려 기독교 복음은 현저히 가려지고 희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은사운동의 흐름을 추적한 전문가들에 의하면 약 1세기 남 짓 전부터 보다 본격적으로 세계 요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적지 않은 소위 ‘성령운동’에 기독교 복음과 무관하거나 배치되는 이방종교 혹은 불건전한 신비주의 운동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셋째, 다양한 영적 현상들은 성서와 기독교 복음 이해를 위한 통전적 체계에 있어서 결코 결정적이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성서에 나타난 여러 이적 기사는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는 보조수단이자 해석학적 과정을 거친 후 고유한 신학적 의도 하에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이적 그 자체로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넷째,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는 클라이막스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며 이것들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아닌가! 이런 중차대하고 핵심적인 사안들 앞에서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무슨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말인가? 따라서 그런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사안들을 침소봉대하고 확대해 나갈수록 훼손되고 오염되는 것은 예수께서 흘리신 피요 그가 지신 십자가일 뿐이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은사주의에 함몰되는 일은 신앙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불신앙적이 될 소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적을 추구하는 은사주의는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순종할 것은 순종하고 때로 포기할 것은 감사함으로 과감히 포기해야 하는 기독교 복음의 속성을 거스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심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종교적이고 인간적인 욕구의 표출이 아름다운 은사로 둔갑할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숨막힐 듯 진행되는 소위 ‘성령 및 은사운동’의 현장에서는 정작 성령 하나님은 온 데 간 데 없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마음 조급한 인간군상들만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다른 데는 없는 것에 열중하자>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불교 세계의 종교현상과 별반 다름없는 일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예수와 기독교 복음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에 싸여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모습을 보니 답답한 마음 심히 금할 길 없다. 그런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종교행위들이 마치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고유한 ‘이적’인양 떠벌려지면 주위에서 쓴웃음 지을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은 해보았는지. 그런 현상들에 목을 매면 맬수록 정작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역사는 현저히 왜곡되고 뒤틀릴 수 있음을 심각하게 고민은 해 보았는지.

우리는 치과 의사는 줄 수 없고, 내과 의사는 엄두도 낼 수 없으며, 최면술사는 상상도 못하는 오직 교회만이 줄 수 있는 바로 그것,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증거하는 일에 정성과 마음을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인데 왜 자꾸 기독교 복음을 마치 텅 빈 수레로 전락시키려 드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어머니께서는 이런 말씀도 내게 하셨다. “그라고 말이다, 공부 제대로 하시고 깊이 수행하신 진짜 시님들은 그런 거 몬하게 야단 야단 하신데이……어데든지 가짜들이 시끄럽게 설치는 뱁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