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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프 리 메 이 슨

이 답답함을 어찌하리!!



잘 아는 선배 목사한데 그 교단 모모 인사들의 여차여차한 문제점을 솔직히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난 논쟁은 즐기지 않아" 라고 일언지하에 언질조차 사양했다. 그를 비난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많은 독자들에게, 필자가 하릴없이 비판이나 일삼고, 논쟁이나 즐기며 잘난 체 하는 한심한 식자, 부덕한 사람 정도로만 비친다는 게 좀 유감스럽다. 왜 이리도 답답할까.

"왜 이 필자는 주로 비판적인 글만 쓰나?" 란 의문을 가진 이도 없지 않다. 특히 글 내용이 직접/간접으로 자기 교회와 관련될 경우 그러기가 쉽겠다. 그런데 누구를 비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상대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비판하는 대상을 비평하게 되니 피장파장의 필연적 귀결을 몰고 온다. 그러기에 읽고 듣는 대상에 대한 호불호를 막론하고, 무턱댄 비판과, 비평/평가/판단/논평/분별/검증 등을 어느 정도 가릴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비판불가'란 틀 안에서 [비판=부정]이란 공식의 색맹적 시각으로 볼 게 아니라, 잘 가려봐야 한다. 한 필자가 어떤 목적으로 왜 그런 글을 쓰는지를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검증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비판조차 금하고 무조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면, 온 교계는 삽시간에 썩어빠져 부패해 버리고 통째로 사이비/이단이나 다원종교, 뉴에이지에 삼켜져 버릴 것이다. 무조건 긍정이어야 하고 무조건 비판을 금한다면 왜 이단/사이비/사교 판별은 하는가? 무조건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면 왜 구약 대언자들은 왕들까지도 과감히 비판했는가? 왜 주님께선 요한계시록에서 칭찬과 동시에 책망을 하셨는가? 왜 파울은 페트로를 신랄히 비판했는가?

무조건 '긍정적'이어야 한다면 왜 파울은 그의 서신 도처에서 코린토교회를 비롯, 여러 인사들을 자주 비평했는가? 부정은 긍정보다는 좋지 않지만, 삶 속에 긍정만 필요한 건 아니다. 노먼 빈슨 필 목사(프리메이슨/스카티시라� 33단)가 베스트셀러 '긍정적인 생각의 힘'(일명 적극적 사고방식의 능력)을 통해 20세기에 뿌린 이 무서운 '긍정철학'은, 조만간 전세계에서 비판과 부정적인 견해를 도무지 용서하지 않는 적 크리스토의 신념과 학정의 기반이 될 것이다. 세계시민들의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독재시대가 지구촌에 반드시 도래한다. 제발 부탁인데, 계시록에 예언된 시대를 내다보는 눈들을 가져라.

안 그래도 세계 교계는 지금 이미 뉴에이지를 향한 거보를 내디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한인교계는 지금 이른 바 '가마 솥에 개구리'처럼 다가올 거대한 종말-세계종교단일화-을 내다보지 못한 채 코가 꿴 형국이다.  

그리고 요즘, 늘 남의 '리더'나 되겠다는 사람들, 세계교계의 최고 권위자로 자처하며 세계교회 지도자나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의식을 정말 신중히 체크해봐야 한다. 과거엔 로마 교황청 밖에선 별로 없던 현상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성경에서 누가 리더로 자처하고 초기교회의 누가 '리더십'을 내세웠단 말인가. 페트로인가, 야코보인가, 파울인가? 그들은 성령이 영적 권위를 부여해준 사람들이기에 그랬다. 말 되는 말을 해야지..독자는 RW 등이 성령께 '영권'을 부여받았다고 믿는가? 뉴에이지 방식의 경영 구루에게 20여년간 멘토링을 받은 그가? 측근에 뉴에이저 내지 친뉴에이저들이 들어붙은 그가? 헨리 나웬, 수녀 테레사 등 카톨릭 인사들을 적극 받들고 그들의 '믿음'을 믿어주고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그가? I doubt it.  

보다시피/알다시피 대형교회 목회자라면 모든 분야를 섭렵하여 전 분야에 걸쳐 탁월한 것처럼 나서고 행동한다. 발산개세로 지구촌 교계를 온통 마구 휘잡으려 든다. 어쩌다 이 지경이 돼가는가, 교계가? 왜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의식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누가 당신들더러 세계적 지도자가 되라고 했는가? 하나님이 높이 들어 쓰실 사람은 스스로 낮추는 자, 겸손한 사람일 뿐이다! 자칭 지도자에게 주님 주시는 말씀: "또 그대들은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마라. 그대들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명뿐."(마23:10. 사역).

그런데도 사람들은 크리스토 아닌 그들을 지도자님, 지도자님 하며 잘도 따라준다. 과연 그들이 지도자로 자처하고 그렇게 불릴 만큼 지도자다운가? 어디 한번 살펴보자.

내노라는 세계 교계 지도자라면, 20세기를 화려하게 수놓다가 지금 어디간지도 모를 빈슨 필, 황혼녘의 빌리 그래엄, 은퇴하고도 아직도 "방방" 뛰며 조만간 모교단 초청으로 한국 나들이를 한다는 라벗 슐러, 은퇴를 코 앞에 둔 조용기, 그리고 차세대 지도자라는 릭 워런과 그와 비슷한 또래 등이 있다. 20세기 미국 일세대 중 세계적 지도자라면 단연 필/그래엄/슐러, 셋을 들 것이다.  

그래엄은 필 목사의 절친한 친구였다. 1948년 BG뉴욕전도대회 당시 결신자들의 다수를 그의 칼리지에잇 마블스 교회에 넘겨줬다. 상당수는 라커펠러의 리버사이드교회에 넘겨주고. 앞서 언급했듯, 빈슨 필은 '긍정철학'의 구루였다. '긍정적 생각의 힘'을 애독하거나 긍정철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슐러/조용기/김선도.. RW의 목적교과서가 21세기초를 휩쓸고 있다면, 20세기를 휩쓴 책은 '긍정적 생각의 힘'이었다. 그러나 필은 죽기까지 철저한 메이슨이었음을 잊지마라. 메이슨이면 목사 아닌 목사 할애비라도 결코 참 기독교인일 수가 없다! 궁극적인 이신론자(deist) 내지 다신론자일뿐.

필/그래엄/슐러.. 가히 20세기 교계의 삼총사랄 수 있다. 필의 수제자 격인 슐러는 스승보다 더 긍정철학을 써먹었고 웹을 뒤져보면 알지만 그 역시 고위급 메이슨이 아닌가 란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그는 한 호주 기자가 크리스천이 프리메이슨일 수 있는가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답한 사람이다. 뭘 암시해 주나?
    
이 '삼총사'가 모두 엄청 문제가 많은데도 한국 교계는 그 문제라는 걸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사실상 이들의 정체를 모른다. 아니 알만한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자는 세 원숭이의 모습들이다. 필자 같은 논자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실컷 짖어라, 개야. 기차는 간다"는 식의 냉소적 태도가 주된 반응이다.  

20세기를 필-슐러의 긍정철학이 휩쓸었는가 하면, '40일 목적론'의 발명왕이자 총 기수인 RW는 1990년대를 풍미한 헨리 나웬의 열렬한 숭배자다. 나웬은 토마스 멀튼의 선분에 잇댄 수도원적/관상적 영성을 추구했다. 그는 평생 동성애자로 자임했고 성상(이콘) 숭배를 장려했다. 그의 사랑은 테레사/슈바이처/헬렌 켈러와 별 다름없는 심성적, 휴머니즘적 선행이 본질이었다. 성령을 통한 프뉴마적, 영적 차원의 사랑인 아가페가 아니라 프쉬케적,심적 차원의 사랑이었다. 무엇보다 나웬은 보편구원론자였다. 그런데도 교계는 거의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렇게 교계인사들을 무조건 믿어주는 풍토는 좋게 말해 '과신', 좀 심하게 말해 '맹신'이다. 미국 '복음주의 지도자'라고 앞뒤 볼 것 없이 무조건 따라가는 것은 가히 사대사상 또는 '똘마니' 근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 이렇게밖에 표현 못하냐고 묻는다면, 수년간 누적돼온 필자의 갑갑함과 답답함이 그렇게 만들어왔다고 밖에 답변을 못하겠다.

필/그래엄/슐러를 거의 100% 믿어주던 한국교회가 삼총사가 은퇴한 이제는 RW를 거의 100%(?) 믿어주고 있다. 뭘 보고 그리도 굳게 믿어 주냐면, 미국 대형교회 목회자인 데다 판매고 약 3천만권에 육박하는 베스트셀러 저자이기 때문. 영적으로 좀 깬 한국/한인 교계 사람들이나, 필자나, 미국의 수많은 식자/학자들이 보건대는 RW의 문제가 필/그래엄/슐러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진일보로 엄청 많은데도 they just don't care~. 그러니 필자에겐 사대사상으로 보일 밖에..

아무리 문제점을 지적해 줘도 "아무러나 괜찮아, 그래도 너보단 몇 천 배, 몇 만 배 더 나아~"란 식이다. 독자여, 그런 의식을 뭐라 할 수 있겠나? '실적 위주(outcome-based)의 신뢰도', 줄여서 '실적숭상주의'랄 수 있다. RW가 최대의 아�컴 맨이니만큼 그 표준으로 만사를 평가하겠다는 것. 거기 맞먹는, 또는 최소한 버금가는 아�컴이 없는 이상, 비평가의 말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 아무리 떠들어도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RW를 비평하려면 RW 만큼의 실적을 내놓으란 것이다. RW와 맞장 뜰 테면 빌 하이블스나 조얼 어스틴 정도는 돼야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은 이상 비평은 귓속은커녕 귓불에도 담아들이지 않겠다는 것. 그러니 무명인사에 불과한 김삼 따위가 아무리 떠들어 본들 뭐가 그리 대수겠나. 우이독경에다 마이동풍인 것이다. 김삼이 여우댄스를 추며 몇 만 번 둔갑한다 한들 무슨 재주로 RW의 실적과 맞먹겠는가. 실적 중심~. 그것이 현대 영성의 패러다임이다.

돌이켜보라. 필은 중소형교회 목회자에다 저술가, 그래엄은 목회자도 아닌 패러처치 대표에다 부흥강사, 슐러는 중대형교회 목회자에 저술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교계 지도자가 되려면 그 정도 갖곤 안된다. 최고 명사여야 한다. 모두들 대형! 대형! 대형! 대형! 그리고 동시 최고 베스트셀러 중심 구도다. 아무개도 대형교회 목회자, 아무개도 교회 대형 목회자, 아무개도 대형급 목회자.. 중형급 목회자는 지도자 명함도 못 낸다. 굵직굵직해야 '지도자' 축에 끼워준다. 사실 새들백의 3만 좀 덜 되는 교인수는 한국 교회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미국에서 최대급이라니까 먹혀든다. 게다가 그 엄청난 베스트셀러 3천만권! 이렇게 실적중심이 현대 영성의 길인 것이다.

언제부터 교회가 이렇게 돼 먹었는가? 초기교회부터? 초기교회의 누가 이런 대형급 지도자 행세를 했는가? 사도 페트로? 사도 파울? 파울은 종과 사도였을망정 교계 명사나 지도자로 자처한 적이 없다. God forbid!

명사에 관해 언급한 파울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니, 아폴로는 무엇, 파울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이 각각 맡겨주신 대로 여러분들을 믿게 한 사역자들일 뿐...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든 물 주는 사람이든 아무 것도 아니요, 다만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입니다."(코린토A 3:5~7, 사역)
"유명 인사들에게서는...[그들이 본디 어떠했든 내겐 무관하며, 하나님은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만], 그 명사들은 나에게 달리 더해 준 것이 없습니다.(갈2:6, 사역).

이것이 저명인사-명사들에 대한 파울의 태도다. 갈1:17~2:14을 보면, 파울은 먼저 사도가 된 예루살렘의 페트로/야코보 등 교계 명사들에게 굽신거리거나 아부하지도 않았고, 자기가 받은 지극히 큰 계시로 인해 자고도 자랑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 선배인 페트로의 위선적 처신을 호되게 야단쳐 혼쭐을 내다시피 했다. 단지 하나님 은혜로 그들은 할례자(유대인)들에게, 자신은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도록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따름이라는 덤덤하고 담담한 입장이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 교계는 어떤가? 초기교회와는 정반대다! 은혜와 사명 중심이 아니라 실적과 규모 중심으로 나가고 있다. 실적이 있고 규모가 크면 신앙과 영성도 인정받고, 안 그러면 "어이, 딴 데 가서 알아 봐~"란 것이 오늘날 교계의 풍토다.

지도자만 그런 게 아니라 교인들의 태도도 그렇게 변해간다. "저 분이라면 뭔가 있겠거니~" 하는 대상이 실적위주 인사들. 그래서 문제점을 아무리 알려주고 목놓아 지줄대도 이를테면 "웃기시네, 김삼 양반. 젖이나 좀 더 자시고 오세요. 비평은 무슨 놈의.."란 식으로 대응한다. 그건 긍정적 태도인가? 뭔가 좀 알려주고 분별에 필요한 제보를 하면 "그래, 자네 팔 굵네, [비판을 초월할 만큼?] 덕이나 좀 쌓게~." 식의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부정적 태도가 아닌가?
누가 교계에다 제때 경고나팔을 대신 그럴듯이 불어준다면, 필자마저도 덕을 쌓고 있으련만. '긍정'이란 기치 아래 '덕'을 쌓는 사람들치고 진리의 경고나팔을 불어주는 사람은 별로 못봤다. [진리가 뭔가? 100%의 성경교훈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완전주의자', '이상주의자'로 몰린다.]

왜 교계가 이 모양이 돼가나? 왜 아무리 우짖어도 귓전도 내밀지를 않는가. 그러니 필자가 열 받지 않을 턱이 있겠는가? 현대의 예레미야인 양 통곡해도, 모닝더브처럼 구슬피 울어도 콧방귀도 뀌지 않을 교계가 돼간다. 세상은 물론이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읍곡을 해도 울지 않는 교계가 돼간다는 말이다. 에고 에고~, 그저 답답!

     "그 일을 계획하신 분은 만군의 주님이시다...이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자들을 보잘 것 없이 만드시려고, 이런 계획을 세우셨다."(이사야23:9. 표준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