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주재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구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땅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살고 농사짓고 있는 땅은 조상들의 살과 뼈가 섞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터전으로 주신 이 땅에서 많은 선조들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이 이 땅을 영원히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농사짓고, 집 짓고, 삶의 공간으로 사용한 후에 우리들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공간으로 잘 이용한 후 후손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의 땅을 죽음의 땅으로 파괴하고 논밭을 불모의 땅으로, 탐욕의 땅으로 소유권 등기를 해서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하며 땅값과 집값이 오르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영원히 소유하겠다는 타락된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이런 탐욕의 마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순리를 역행하는 죄악의 마음입니다.
엔트로피 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양은 일정합니다. 그 에너지를 우리 세대가 다 사용해버려 고갈한다면 다음 세대는 에너지 부족으로 생명체 자체가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삶이 더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우리가 공생적인 생활이 아니라 투기적이고 약탈적인 생활이 구조화된다면 결국 사회적 약자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소외되고 결국 굶어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버는 것은 생산적인 부가 아니라 약탈적인 부가 되는 셈입니다. 정부 투자 기관의 은행장이 수십억의 연봉을 받는다면 그건 일종의 국민들의 재산을 약탈한 행위이고 죄악입니다. 국민들의 예금과 혈세가 지출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브랜드 목사의 연봉이 억대라면 그것도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거룩하게 약탈해간 것입니다. 물론 생활비 등등의 최소한 돈은 있어야 하겠지만 그런 기준은 일용할 양식의 수준을 넘어서는 곤란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빌미로 호의호식 호거호차하는 것은 헌금을 삯꾼 목사에게로 이동하는 행위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작은 교회로 또 다시 헌금이 이동하여야 합니다. 대기업의 귀족 노조가 데모를 해서 연봉이 올랐다면 하청기업들의 근로자의 연봉을 약탈해 간 것입니다. 스포츠 선수들이 연봉이 수십억 가져간다면 결국 해당 기업의 상품 최종 소비자의 돈이 이동해간 것입니다. 내가 더 많이 가진다면 결국 다른 사람들의 지갑에서 합법적으로 혹은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으로 가져간 것입니다. 결국 부동산 투기와. 고급 정보를 이용한 부동산 투기, 부녀회 단합 아파트가격 올리기 등도 합법을 가장한 도둑질이고 서민들의 호주머니 돈을 약탈하는 강도 같은 행위입니다.
목사는 소유 욕구를 버리라
목회란 말 그대로 양을 좋은 목초로 꼴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목사란 구약의 율법적인 제사장의 개념이 아닙니다. 구원의 중보자가 아닙니다. 단지 직업을 가진 교인들을 대표하여 신학 교육을 받아 전임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은사와 섬김의 기능적으로는 다르지만 구원 받은 존재적으로는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공동체에서 위임 받은 리더의 역할만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의 가장 큰 문제는 구원 받은 존재의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하기보다는 상하 수직 계급 관념으로 교인들을 소유하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은사가 다를 뿐인데 이를 통치적인 직위로 인식하여 소유 의식으로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비가시적인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시적인 하나님의 존재로 우상화하려고 합니다. 마치 불교에서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 부처(불성)보다 보이는 부처상을 우상화하듯이 말입니다. 절에 움직이지 않는 부처상 대신에 교회에서는 움직이는 목사를 우상화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볼 일입니다.
소유 의식으로 가득 찬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어느 정도 교회가 성장하면 명예를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런 소유 의식의 극대화의 유혹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한국교회 목사들의 현주소입니다. 내놓으라는 부흥사와 브랜드 목사들은 돈과 명예에 약하다는 지적의 목소리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들의 명예욕은 하나님 종으로서의 신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서 보겠다는 오만한 동기에 불과합니다. 이런 교회 내 추잡한 잡음들은 결국 대외 공신력 추락에 원인이 되었으며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뿌리 채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12제자를 선발하시고 복음의 이치를 가르치는 과정에 그들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들을 구원의 존재로, 하늘나라운동의 동지로 생각하시고 가르쳤습니다. 바울 사도도 그렇습니다. 복음의 동역자로 많은 일꾼을 세웠지 소유하고 통치하고 감투를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소유와 영광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고난의 연속인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협회나 소아시아 연합회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총회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해외선교회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보조금을 지원할 때도 생색을 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구원받은 존재로서 예수님 이외의 어떤 인간으로부터 어떠한 중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주체적이고 존재적인 차원의 관계 설정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목사로 세움을 받았지만 역시 죄성을 가진 인간입니다. 평교인과 동일한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동역하는 자세로, 교인을 대표하는 자세로, 섬김의 자세로 목회를 하여야 합니다. 교인들이 원하지 않을 때는 언제라도 목사 가운을 벗겠다는 존재적 각오로 사역을 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교회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기업처럼 보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이미지로 인해 복음은 실종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취재되는 교회의 각가지 병리적인 모습을 보면 분노가 치밉니다. 이런 비상식적인 교회의 병리적 현상이 전체 교회의 이미지로 도매금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성장이 정체되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교회가 탐욕적인 소유의 구조로 똘똘 뭉친 사회를 교정하지도, 빛과 소금이 되어 구원하지도 못하고, 교회스스로 복음의 정체성을 소멸해버리고 바람 앞에 꺼지는 촛불의 신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적인 소유의 복을 빌미로 목회 성공하려는 유혹을 떨쳐버리고 더 이상 소유 지향적 신앙생활을 지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 지향적인 삶이 목회의 지침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될 때에 불신자들로부터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세속적 탐욕의 태풍과 회오리바람이 불어와도 요동하지 않는 등대가 되어 빛이 비추어질 때 소유의 탐욕과 어둠의 죄악에 있는 죄인들이 존재의 복음으로, 희망의 복음으로, 생명의 빛이 비추이는 교회로 찾아올 것입니다.
모든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돈으로 교회당을 짓고 인간의 이름으로 소유권 등기를 하였지만 궁극적이고 존재적인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교회가 시끄럽고 분쟁이 계속되는 것은 존재적인 소유권을 망각하고 인간들끼리 탐욕적인 소유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유욕을 모방한 거룩한 욕심이 지배하기 때문에 서로 다투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적 소유 구조가 지배하는 교회 안에는 사람을 죽이는 율법만 있고 생명을 주는 복음은 없습니다. 이런 유형 교회는 차라리 사라져야 합니다. 죄악을 연출하는 교회 때문에 복음의 존재 이미지가 추락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복음은 세상과 충돌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존재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투기를 하고 뇌물을 받고 부동산 폭등으로 번 돈, 부정하게 번 돈은 삭개오와 같이 되갚거나 사회에 환원하는 운동을 벌여나가는 것이 제2의 평양부흥운동의 뇌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존재적인 소유에 대한 변화 없이 탐욕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 소유 구조를 하고서 소리만 크게 외치는 부흥운동은 한낮 이벤트성 행사로 전락하게 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교회의 존재 의미를 곰곰이 짚어봐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예배는 무당굿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속삭이는 존재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요란한 반주 속에 고성방가식의 찬양은 카타르시스를 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찬양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남대문시장에서 외치는 상인들의 고함 소리식의 통성기도는 사라져야 합니다. 이런 통속적인 교회의 분위기에 식상한 불신자들은 산속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절로 가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 사람이 몰리고 있습니다. 법정 같은 스님들이 쓰신 ‘무소유’와 ‘오두막 편지’ 등 생활 속에 인간의 존재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도 목회에 성공하신 브랜드 목사들의 책을 읽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잔잔한 감동을 줄 책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서적이 불신자들에게 읽히어지는 책은 전무합니다. 이게 요란한 한국교회와 브랜드 목사들의 한계이고 이불 속에서 만세를 부르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통 탐욕으로 가득 찬 소유적인 가치관과 물욕적인 가치관으로 자기들과 동일한 세속적 언어와 이상한 나라의 방언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들이 갈망하는 청량한 메시지와 생활 속에 존재의 삶에 대한 궁극적 답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불교의 사찰 명상 수련회 같은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한국교회 위상과 전도 활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게 될 날이 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조용한 산속을 시끄럽게 만드는 기도원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무당굿과 같은 집회를 하는 기도원이 미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한국교회가 소유에 대한 갈망에서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 전환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과 같은 탐욕적이고, 율법적인 소유가 아니라 복음적인 존재의 삶의 방식이 더 행복하고 풍성한 삶의 방식임을 증명하는 것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첫 단추이자 제2의 평양의 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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