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살인자였는가? 회원의 질문과 운영자 답변
심상용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크리스찬트리뷴(http://www.kctn.net/)이라는 신문 기사를 통해 “칼빈과 칼빈 추종자들의 광란의 역사”라는 대제목의 기사와 소제목의 “칼빈과 그의 망나니 칼빈니스트들은 무슨 이유로 사람을 죽였나”라는 제목의 글에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을 살인자로 몰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있는 예정도 철저하게 부정하는 인물로 한국교계에서 이단으로 지목한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와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심상용 씨는 과연 누구인가? 심상용 씨의 약력을 보면,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사회학과 전 협성신학대학교 강사, 현 현대종교 편집위원, 원주개운성결교회 목사, 월드 크리스챤 성경학 연구소 소장 등으로 나타나 있으며, 한국교계에서 이단으로 지목하고 있는 성락교회의 김기동 씨가 운영하는 '주일신문'의 사장 출신으로, 크리스챤신문 전면 광고로 통해 ‘칼빈주의는 칼빈이 마귀와 원조교제를 해서 만든 사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제네바에서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에 불만이 많았던 반대 세력들이 사건의 진실을 왜곡시켜 비판했던 책들을 근거로 기사를 썼습니다. 또한 그는 전 감리교신학대학 교수였던 조찬성 씨가 집필한 “기독교 죄악사”(평단문화사, 2000)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조찬성 목사는, 로마카톨릭이 예루살렘에 파송하여 대학살을 자행했던 십자군과 십자군 전쟁을 우리 기독교(개혁파)가 범한 것으로 왜곡시켜 놓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책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심상용 씨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 카페에서 감리교가 프리메이슨들이 만든 것이라고 논한바 있습니다. 이상하게 종교개혁자들과 성경을 공격하는 자들의 뒤를 추적하다가 보면 각종 이단들과 프리메이슨들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기독교정보학회의 운영자 반론
아직 중세시대의 유럽 상황을 바르게 이해를 못하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재의 유럽 북서부에 있는 네달란드의 화란은, 벨기에와 하나로 합쳐친 단일국가로 로마 카톨릭의 국가인 스페인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전 유럽의 실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던 로마 카톨릭은 수 많은 종교개혁자들과 그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을 붙잡아 처참한 고문을 가하여 죽였습니다. 이러한 박해를 피해 성도들은 양심의 자유를 찾아 현재의 화란인 북부 네덜란드에 모여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40년간의 로마 카톨릭의 세력이었던 스페인과 전쟁 끝에 마침내 기독교 국가를 세웠습니다. 중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개혁을 주도했던 곳은 어디나 로마 카톨릭의 대 학살을 피해 모인 곳이었습니다.
한편 칼빈의 종교개혁 무대였던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와 이태리의 교역 중심지로 사보이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초반 프라이브르그와 베른의 도움으로 독립을 하였으며, 1534년 부도덕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던 로마 카톨릭의 주교를 추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는 로마 카톨릭과 어려운 힘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기냐에 따라 신앙과 생명을 내 주어야 하는 긴박에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 기독교 신자였던 파넬(G. Farel)이 실권을 장악하여 로마 카톨릭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로마 카톨릭의 위협은 여전했습니다.
이러한 찰나에 칼빈은 그곳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파렐은 칼빈과 같은 인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곧 칼빈을 찾아 가서 종교개혁에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이 나이도 어리고, 소화불량도 심하고, 종교개혁의 뜻도 없고, 학자가 되고 싶다는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파넬은 '네가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저주 할 것이라고'하면서 심판과 저주를 퍼부었다. 나중에 「시편주석」에서 칼빈은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파넬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까지 퍼부어 가면서 나를 권면했다. 나는 파넬의 저주의 음성을 듣고, 넉다운 당해서 계획했던 여행을 표기했다. 그러나 나는 본성이 수줍고 겁이 많아 어느 특정한 직책 수행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의 중심 역할을 맞게 된 칼빈은, 로마카톨릭 세력을 물리치고, 겨우 세운 제네바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제네바는 기독교 국가로 의회가 오늘말로 말하면 국회입니다. 그러니까 의회의 결정은 칼빈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구상의 존재하는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다양한 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자국인은 그 법률에 따라 처신 해야합니다. 자국의 법을 어긴 범법자에게 제네바 의회가 자국의 법률을 적용하여 처벌을 한 다양한 방식의 형벌을 모두 칼빈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칼빈이 제네바 법원에서 4년간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동안, 제네바 법원은 58명에게 사형을 언도했으며, 76명이 추방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아버지를 때린 소녀에게는 교수형이 내려졌고, 제네바 법원을 능멸하고, 하나님과 칼빈에게 도전했던 쿠르트는 반역죄와 불경죄가 성립이 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 가운데 '폐의 혈액순환 기능'을 발견한 자유 사상가이며, 의사였던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세 머리 가진 괴물'이라고 말하고, 성경의 예정론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서 칼빈과 제네바 의회를 공격하였습니다.
제네바 의회는 그를 국가 질서를 흔드는 반역죄로 간주하여 고발이 되었으며, 제네바 의회는 그에게 화형시킬 것을 언도하였습니다. 칼빈은 감옥에 갇혀 있는 그를 여러차례 찾아가 제네바 의회를 능멸하는 견해를 철회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마침내 제네바 의회를 통해 화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때도 칼빈은 그를 찾아가서 화형은 너무 고통스러우니 교수형을 택하라고 권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 마져도 거절했던 것입니다.
칼빈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제네바 의회가 법률에 따라 죄를 선고하고 처벌한 것을 모두 칼빈에게 돌립니다. 물론 세르베투스 사건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중세시대의 제네바의 정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로 무식한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세기 제네바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되어진 국가였습니다. 제네바 시민의 구성원들도 종교개혁에 동참했던 사람들과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제네바에서 로마 카톨릭 세력이 실권을 잡으면, 당시 전 유럽의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 카톨릭과 연대하여 종교개혁을 했던 사람들과 그들을 따르는 수 많은 사람들은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네바의 상황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엄격한 법 질서가 필요했던 것이며, 그것이 국가의 장래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중세시대의 교리 논쟁은 단순하게 오늘날의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 논쟁이나 기독교의 여러 교파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는 어떤 교리가 승리를 하느냐에 따라 죽고 사는 문제가 결정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당시에는 세상의 권력 위에 교회가 있었으며, 교회의 정치가 오늘날의 국회입니다. 유럽의 의회 민주주의와 정신도 종교개혁자들이 그 기틀을 놓은 것입니다. 특히 법률가였던 칼빈을 제외 놓고는 유럽의 의회 민주의의를 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정신은 종교 개혁자들에게서 나온 산물입니다.
중세시대의 제네바를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비교한다면, 지난 과거에 공산주의 사상과 민주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와 같았습니다. 그 당시 전 유럽의 실권을 쥐고 있던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는 세력의 교리가 승리를 하면,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수 많은 제네바 시민들이 대학살을 당해야 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중세시대의 제네바 의회를 논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입니다.
과거나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세계 각국의 법이란? 그 나라의 국민의 의견을 수립하여 만든 국민들의 공동 약속에 따른 공동법률인 것입니다. 어느 개인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법 적용은 갑이라는 사람이 죄를 범하면, 을이 처벌하고, 을이 죄를 범하면, 갑이 처벌하는 것입니다.
당시 제네바 법원이 정한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하고, 죄를 선고하여 집행 한 것을 모두 칼빈에게 돌리는 것은 한 마디로 무식한 소리입니다. 심지어 제네바 의회는 칼빈도 쫓아냈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그 시대의 교리 논쟁은, 오늘날과 같이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생명과 재산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세력이 이기면, 종교 개혁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대 학살극을 피해 모인 곳이 제네바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단순하게 제네바 의회와 칼빈의 견해를 반대하여 대학살을 감행한 것으로 이해 해서는 매우 곤란합니다. 이런 논리는 법원에서 범법자에게 사형을 언도했다고 하여, 그 책임을 모두 대법원장이나 대통령에게 돌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제네바 의회는 칼빈이 혼자 좌지우지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제네바의 국법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람들을 모두 칼빈이 죽였다는 말은 그 만큼 그 당시의 법과 상황을 모르는데서 오는 무지의 소리입니다. 오늘날도 중동(이슬람국가)에서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은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남의 물건을 훔치는 절도범에게 손목을 잘라 버리는 엄한 형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술을 마시고 운전했을 경우, 현장에서 사살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넘어갈 것은 우리 장로교는 칼빈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장로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운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 "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라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장로교(장로의 회)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입니다.
다만 칼빈과 중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그 시대에 맞는 철학과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들이 고백했던 신앙고백은 우리가 믿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지구상에 온전한 인간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밝혀지지 않은 개인의 허물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중세시대는 모든 것이 오늘날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관, 문화, 법, 종교 등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그러합니다.
18세기만 해도 의사들이 피를 많이 흘린 사람들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느끼고 가축이나 동물들을 끌어와서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하려고 했으나, 동물이 가만히 있지 않아서 사람으로 대신하게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준으로 그 시대를 평가해 버리는 것은 단순한 논리에 불과합니다. 칼빈은 천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인물로 평가하는 사학자들이 많습니다.
필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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