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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관 상 기 도

권명수 교수 관상기도 근거제시 왜곡

권명수 교수 관상기도 근거제시 왜곡

성경의 사실과 다른 관상근거 적용제시 정당성 이탈


본 기사는 2007/05/16/수/16:31:30 <한신대학교>권명수 교수가(이하: 권 교수) <뉴스 엔조이>에 게재한「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를 중심으로 반박하는 글이다.
권 교수는 관상기도 추종자들이‘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며, 마치 관상이 성경적인 것으로 위장을 하지만, 아래 반박에서 거짓이 드러난다. 사실 관상가들이 주장하는 성경의 근거에서 대표적인 성경구절 몇 개를 야심차게 내어 놓았지만 궁색한 변명으로서 실체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미 <뉴스 엔조이>글을 보면 관상기도의 정체성은 숨겨 버린 채, 온갖 미사어로 치장하여 덮어씌우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제 <뉴스 엔조이>에 권 교수가 제시한‘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에 대해서 비판한다.

1. 권 교수의 이사야 30:15 인용 .

관상기도를 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는 무수히 많다. 지면 관계상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 본문을 몇 개 언급하도록 한다. 영성의 분야에서 미국과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유진 피터슨이 <관상적 목회자>란 책에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하여야 한다고 이사야서 30장 15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란 말씀의 예를 들어 책망했다.

반 박 1.

상기와 같이 관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사야30:15 에서 조용히 관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는 내용은 전후 문맥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무지로 인한 임의 해석이기 때문에 이러한 황당무계한 해석이 되었다 본다. 이사야30:15의 뜻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함이 그의 전적인 능력에 의하여 구원을 받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인위적인 해석이다.

2. 권 교수의 시편46:10 인용.

시편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여기서 ‘가만히 있어’의 영어 표현은‘be silent’로서, 침묵 가운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중요한 말씀이다.

반 박 2.

위 성구는 하나님께 의지하여 안식하라는 것이지,‘조용히 관상하라’는 내용은 찾아 볼 수 없다. 문맥을 살펴 보건데 관상기도와 연결되는 근거가 없다.‘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는 말은‘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다양한 하나님의 행적들의 증거를 찾아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보고 믿으라’는 뜻이다.

3.권 교수의 열왕기상19:1-18 인용.

또한 엘리아 선지가가 하나님의 호렙산의 동굴에서‘세미한’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열왕기상 19:1~18)고 성경은 기록했다.

반 박 3.

위 인용문은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임하신다는 것이다.‘세미하다’는 내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나시는 역사하심을 표현한 것이지, 이 말씀이‘엘리야가 조용하여 관상기도를 했다’는 근거 일 수 없다.

4. 권 교수의 마태복음5:3 인용.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는“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산상수훈의 첫 구절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자가 가난한 자이고, 빈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관상사상을 의미하는 구절이 많다.

반 박 4.

위 성구에서 빈 마음은 탐욕, 정욕, 물욕, 등을 갖지 않는 심령으로 사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성도의 겸손한 영적인 상태를 말한다. 마태복음 5:3은 기도를 하는 관상을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권 교수의 주장대로 성령을 받는 조건, 이유, 방법이 관상의 채널을 통하여서만 행하는 것은 성령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훼손할 뿐이다.

5. 권 교수의 요한복음 14:10, 14:20, 17:21 인용.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 등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은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자가 마음을 비워 그곳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이 내주하여 나의 주인이 되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반 박 5.

위 성구는 관상기도를 통해서 동거동행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하나 되는 관계의 단일로서 연합인 사랑을 말한다. 이 말씀에 관상의 의미를 끼워 넣어서 주님이 내주하는 관상기도라는 권 교수의 시도 자체는 자기 합리화로서 기만이다.

6.권 교수의 로마서8:26-28 인용.

로마서 8장 26~28절은 관상기도 하는 신자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데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신다는 구절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성령의 활동을 도와주는 일로서 조용히 침묵 가운데 마음을 비워드리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곧 관상기도다.

반 박 6.

성령님께서 탄식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연약함을 도우시는 중보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한 간구이다. 이 말씀은 성령님의 독자적 불가항력의 은총으로서 은혜이다. 여기에 인간의 인위적인 관상행위가 성령님의 활동을 도와주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관상기도라는 것은 어불성설로서 성경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위 성구는 인간의 관상기도라는 것이 전재된 성령님의 중보 행위를 뜻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7. 권 교수의 계시록 3:20 인용.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수련회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20절.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개역) 여기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다른 생각을 멀리하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반 박 7.

위 성구에서‘문을 연다’는 것이 침묵이라는 문장은 필요 없다. 이 용어 선택은 관상기도를 합리화시키려고 관상가들이 가감하여 끼워서 넣은 것이다. 요한계시록3:20에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말씀)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이지, 관상기도의 행태로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것이 아니다.
권 교수의 주장대로는 주님이 들어오시는데 우리가 침묵하여 도와주는 시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과 편재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사실 관상기도는 이방 종교의 기도 형태로서, 침묵만 하려들고, 거기에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성경의 구절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초월적인 명상행위와 차이가 없는 신비주의, 뉴에이지로서 미래로는 종교다원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


관상기도 추종자는 성경해석과 기도의 방법은 왜곡 행각이다.

지금까지 내용을 살펴 볼 때 권 교수가 성경을 인용한 말씀과 해석은 일종의 기만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더 이상 왜곡하지 말고 모든 종교를 통합할 수 있는 종교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하여서 서로 넘나들게 할 수 있는 영성과 관상이라는 용어 사용은 물론, 관상기도 실천가들의 경우 구체적인 실제의 방법론적인 자기 최면이나 집단최면의 행위로 관상기도의 음성을 의도하는 행각을 버리길 바란다.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듣고자 하는 관상기도의 행각은 성경에 모범이 없다. 이 관상기도는 기도의 생활에 실패한 자들이 선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지 않는 것을 들었다면 마음에 나는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이나, 극단 신비주의나, 직통계시나 무엇이 다른가?

진정한 기도는 믿음으로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


임 헌 원 / 한돌교회 담임목사, 명지대학교와 부설 사회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