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돌아가자
정성구 교수<총신신대원·한국칼빈주의연구원장>
제8차 아시아칼빈학회 개회 메시지
오늘의 세계는 정보화 사회로 말미암아 급변하고 있고 인본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세속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교회도 세속화하여 힘을 잃어 가고 신학도 종교 개혁자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신학에서 점차 멀어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기에 아시아 각국의 칼빈 학자들이 모여 대회를 열게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어거스틴 이후에 교회는 점차 성경에서 떠나 의식적 종교가 되었고 로마 가톨릭이라는 유사 기독교로 변질되어 약 1200년 동안 암흑시대로 있었다. 밤이 깊으면 별빛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듯이 성경에서 떠난 의식주의, 형식주의 종교에 환멸을 느꼈던 요한 위클리프, 윌리암 틴델, 얀 후스 등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 가톨릭의 비성경적인 것에 도전했으나 그 철옹성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후스가 화형으로 순교의 잔을 마신 지 꼭 100년 만인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했고 그로부터 20년 후에 요한 칼빈이 1536년 <기독교강요>를 출판함으로서 12세기 동안 단절됐던 성경적 기독교로 되돌려 놓았다. 병약한 몸을 가진 청년 칼빈이 이룩한 위대한 작품 <기독교 강요> 한 권이 세상과 교회를 새롭게 했다. 그리고 1559년에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는 말 그대로 유럽의 종교개혁의 센터였고, 선교의 센터였다.
칼빈은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자이기도 하지만 그는 셍 피에레 교회의 목회자요 설교자로서 평생을 보냈다. 칼빈의 종교개혁은 교리적 체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 설교하는 방법을 통해서 교회를 교회되게, 말씀을 말씀되게, 은혜들 은혜되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공헌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우리에게 심어 준 것이다. 칼빈은 성경에 의지해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고, 성경의 충족과 권위를 확고히 믿고 고백했다. 그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라는 데서 멈추었다. 또한 칼빈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 사상 또는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본 속표지에는 이 책을 경건의 대전(Summa Pietatis)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칼빈은 신학과 신앙과 삶 모두를 하나님의 면전(Coram Deo)에서 살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의 공헌은 신학적 체계를 바로 잡아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신학은 어거스틴 신학의 부활이지만 하나님 주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의 교리, 성화, 예정론 등은 칼빈주의 신학의 든든한 기초를 놓았다. 또한 칼빈은 장로교회의 정치 틀을 세웠지만 그마저도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했다. 그리고 그는 시민사회에 관련된 정치제도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정치(Bibliocracy)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정치 형태가 되었든지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고 국가의 최우선적 의미는 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16세기 칼빈의 신학과 신앙의 틀은 신학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등 어디든지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이것을 다시 재발견한 사람들이 네덜란드의 흐룬 반 프린스터나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 목사가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운 후 첫해 160여명의 학생들이 왔고 10년 후에는 1600여명의 학생들로 불어났다. 제네바 아카데미야말로 역사이래 가장 완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성경적 교육기관이었다. 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들이 각기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로마 가톨릭과 싸워서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세웠다. 낙스에 의해서 스코틀랜드에는 장로교회가 세워지고 영국에는 청교도이 만들어지고, 프랑스에는 위그노파(Hugnote)가 생기고, 네덜란드, 독일, 헝가리, 스위스 등은 이른바 개혁교회로 이름지어졌다. 제네바에 시작된 개혁운동은 1세기가 못 가서 유럽 각 나라에 개혁 교회가 세워지면서 독일에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네덜란드의 벨직 신앙고백서(1563), 스위스의 제2헬베틱 고백서(1566), 네덜란드의 도르트 신경(16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8) 등이 발표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교리에 반해서 1619년에 제네바 아카데미 출신의 요하네스 보겔만이 중심이 되어 이른바 칼빈주의 5대교리가 제정됐고 그 즈음에 로마 가톨릭이 개혁교회에 대한 반격과 박해가 점점 심해 갔다. 바로 그때 로마 가톨릭은 이그나시우스 로욜라를 앞장세워 이른바 예수회를 만들어 성경적인 기독교를 교묘하게 박해하면서 이른바 반동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때 프랑스 위그노파 성도들과 헝가리 개혁교회 성도들에게 모멸감과 욕설을 퍼부었는데 그때 쓴 욕설이 “너희 놈들은 칼빈주의자”였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개혁 교회들은 칼빈주의자들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후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서 1620년에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고, 1628년에 네덜란드 개혁교회 성도들이 그 뒤를 따랐고, 1700년을 전후해서 독일 개혁교회, 프랑스 개혁교회 성도들도 미국으로 건너갔고, 맨 나중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성도들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장로교회를 세웠다. 18세기에 유럽에 불어닥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18세기 19세기의 미국 교회도 유럽 교회처럼 자유주의 사상으로 쇠약해 버렸지만, 19세기에는 웨일즈의 부흥운동,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부흥운동 등의 영향은 미국을 크게 자극했고, 19세기 중엽을 전후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성도들과 네덜란드 개혁교회 성도들, 헝가리 개혁교회 성도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미국의 장로교회는 새 힘을 얻고 부흥했다. 그 여파로 아시아 각 나라에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대거 파송되고 우상숭배와 거짓 종교에 빠져 있던 아시아에 복음이 들어왔다. 한국에도 1884년 이후에 미국 북장로교로부터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받았다.
한국 교회의 성장을 종교 현상학적으로 다루거나 이른바 사회학적, 정치적, 경제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다. 예컨대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뿌리깊은 샤머니즘이 있었다든지, 또는 한국전쟁과 같은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었다거나 또 일본 제국주의자들로 말미암아 나라를 빼앗겼던 것 때문이라는 등의 설명이다. 그러나 샤머니즘은 한국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모든 나라들이 똑같고, 전쟁 경험이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것도 한국만이 아니었다. 한국 교회의 성장은 단순히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 현상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한국 교회 성장은 바로 종교개혁의 정신 즉, 칼빈주의적 신학과 신앙의 토양 위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는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박형룡, 박윤선, 한상동 목사 같은 신학적, 신앙적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신학과 신앙, 설교와 글들은 한결같이 초기 선교사들이 전해 준 대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었고 특히 칼빈이 그토록 외쳤던 신학과 신앙의 내용을 강단을 통해서 구체화했다. 물론 우리에게도 이원론적 세계관 등 비판적인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교회 120여 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확실히 한국 장로 교회는 영혼 구원 뿐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고 제도를 개혁하고 민족 개화에 앞장섰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 우리 시대는 참으로 다원화된 시대이고 물량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이른바 기독교 이후 시대(Post-Christian era)에 살지만, 우리가 세계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바울과 어거스틴과 칼빈을 이어온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성경만이 우리의 신학과 신앙의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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