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적 의식을 가진 설교자 칼빈
장경철 교수(서울여대 기독교학과)
서론: 칼빈의 설교와 종말론적 의식
칼빈은 강력한 설교자였으며, 그의 설교는 영향력 있는 설교였다. 칼빈은 회중의 영혼에 영향을 미쳤고 회중의 삶에도 흔적을 남겼다. 칼빈의 설교는 주일에만 간신히 영향을 미치고 평일의 삶을 흔들어 놓지 못하는 설교가 아니었다. 칼빈의 설교는 회중의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 설교였다.
또한 칼빈의 설교는 개인을 넘어서서 공동체와 전체 사회를 새롭게 한 설교였다. 칼빈은 한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사회의 뼈대를 새롭게 하였고 한 시대를 창조하였다. 칼빈의 설교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그의 영향력은 세대를 넘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칼빈 설교의 이러한 능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우리는 이 글에서 칼빈의 힘있는 설교의 배후에 종말론적 의식이 있었음을 살피고자 한다. 물론 칼빈의 설교와 신학을 지탱하는 많은 요소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 사상,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 등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인간의 영혼, 사회, 시대와 역사를 힘있게 변혁한 칼빈 설교의 배후에는 종말에 대한 건강한 깨달음, 곧 종말론적 의식(意識)이 자리잡고 있었다. 종말에 대한 분명한 의식 속에서 칼빈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향한 영성(靈性)을 새롭게 하였으며, 책임적 삶을 향한 윤리(倫理)를 구현하였고, 세계를 변혁하는 역사의식(歷史意識)을 전개하였다.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칼빈의 영성 이해, 윤리적 실천 이해, 역사 이해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었다. 칼빈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가운데 설교와 신학을 새롭게 하였다. 칼빈은 설교를 통하여 영혼과 삶, 시대와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칼빈 설교의 배후에 놓인 종말론적 의식의 내용을 고찰하는 것이 이 글의 과제이다.
종말론적 의식: 시간과 영원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만일 종말론이 단지 역사 마지막에 있을 사건들을 예측하는 것이라면, 칼빈의 주요 관심은 종말론에 있지 않았다. 칼빈은 역사 마지막에 있을 사건들에 대해서 큰 호기심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는가를 알아맞히려는 호기심은 헛된 것이라고 보았으며, 천년왕국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졌던 열광주의자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물론 칼빈은 몸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과 같은 사건들을 설교했으며, 이러한 것들은 칼빈에게 있어서 올바른 종말론의 내용이 되었다. 하지만 칼빈은 종말에 대한 사변적 이해를 전개하기보다는 종말이 온다는 사실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칼빈이 역사 마지막에 있을 사건들에 대해서 별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칼빈에게 종말론적 의식이 없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칼빈의 전체 신학은 종말론적 관심에 의하여 채색되었다.
칼빈의 주요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구원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을 자기 실존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신에게만 생각을 한정하는 것은 건강한 신학이 아니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인생과 역사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 영광의 실현을 위하여 인생과 역사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칼빈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가 이미 종말론적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다스림 가운데 들어간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영혼 가운데 임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사역 가운데 이미 영혼 가운데, 삶 가운데, 역사 가운데 임(臨)한다.
신앙인의 과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향(向)하여 우리의 인생과 역사를 돌려놓는 것, 곧 회개하며 방향 전환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指向)하는 것이다.
칼빈의 종말론에는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숨쉬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인 은혜 가운데 인간의 역사 속에 임재한다. 인간의 모든 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세계 가운데 임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하여 영원은 이미 시간 가운데 임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결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는 가운데 인생과 역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자라간다.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모든 악은 궁극적으로 극복되고, 하나님 나라가 승리할 것이다. 시간은 영원에 의하여, 세계는 하나님 나라에 의하여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이 땅과 현재 가운데 완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요소 안에서 칼빈 종말론의 핵심을 발견한다. 칼빈은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세계 가운데 임재하고 있다고 본 동시에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확고한 기초 위에 세워져서 매일같이 성장하고 진보한다. 그러나 동시에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으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이미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다스림이 부활의 날이 되어서야 완성되리라는 두 가지가 모두 참된 주장이다.
우리는 이러한 칼빈의 종말 이해를 시간과 영원, 또는 역사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이라고 부른다. 칼빈의 종말론에는 시간과 영원, 곧 세계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건강한 긴장이 숨쉬고 있다.
종말론적 의식은 종말론적 영성을 낳는다
시간과 영원, 또는 역사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강조하는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세 가지 영역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적 의식의 영향을 세 가지 문장으로 요약한다. 첫째,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종말론적 영성을 낳는다. 둘째,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책임적 윤리를 낳는다. 셋째,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변혁적 역사 이해를 낳는다.
첫째,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종말론적 영성을 낳는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설파하면서 신앙이 내세에 대한 명상으로 일깨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현재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영성을 추천한다.
이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을 묵상하는 것이며,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시련이 우리에게 다가오건 간에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바라보아야 한다. ... 우리는 깨어서 미래의 삶을 묵상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칼빈의 강조가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종말론적 영성을 말할 때 세계를 부정하고 오직 미래만 사모하는 영성을 머리에 떠올린다.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인생과 역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와 무관하게 오직 하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내세 또는 영생이란 현재와 격리된 삶이 아니다. 미래에 이루어지는 영생의 삶은 현재 가운데 침투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의하여 내가 속한 이 자리에서 임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세계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으며, 이제 순종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는 삶을 살아간다. 칼빈에게 있어서 내세를 명상하는 삶은 이 세계를 버리는 삶이 아니라 이 세계 가운데 세상의 삶과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뜻한다.
칼빈의 종말론적 영성은 그의 성육신적 영성과 일치한다.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이 세계의 변혁을 위하여 이 땅에 찾아오신 구원자의 영성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강조는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세계 속에서 세상의 삶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속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의 삶에 함몰되지 않는다.
칼빈의 종말론적 영성은 세계 부정의 영성이 아니라 세계 긍정의 영성이다. 이는 중세의 수도원적 영성이나 초대 교회 이단인 영지주의적 영성과 대비된다. 수도원적인 영성은 세계로부터 도피하여 수도원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삶을 건설하려는 시도이다.
칼빈의 세계 긍정의 영성은 또한 영지주의적 영성과 구별된다. 영지주의자에게 이 세계는 폐기되어야 하며 떠나야 할 영역에 불과하다. 칼빈에게 이 세계는 버려져야 할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하나님 영광의 무대이다. 이러한 칼빈의 세계 긍정의 영성은 우리를 책임적 윤리로 인도한다.
종말론적 의식은 책임적 윤리를 낳는다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책임적 윤리 의식을 잉태한다. 시간과 영원 사이의 건강한 긴장은 칼빈의 윤리를 세계 도피적 금욕주의와 무절제한 삶의 양극단에서 건져주었다. 책임적 윤리를 지향함에 있어서 칼빈은 세계 도피를 지향하는 금욕주의와 세계 숭배를 지향하는 무절제한 삶을 모두 거부한다.
칼빈은 세계에 대해서 책임적 윤리를 전개한다. 이미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있어서 칼빈으로부터 비롯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결정적 기여를 했음을 지적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계와 역사에 대해서 책임적 역할을 다하는 삶이다.
흔히 칼빈의 윤리를 금욕주의적 윤리라고 평하지만, 이는 세계 도피적인 금욕주의가 아니라 세계 내적인 금욕주의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와 역사에 대해서 무책임한 도피를 일삼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세계와 역사에 대해서 능동적인 참여를 하는 가운데 전개하는 절제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세상만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받드는 무절제한 삶을 비판한다. 칼빈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질식시킨다고 보았다. 때로 칼빈은 강한 톤으로써 세상적인 삶을 경멸할 것을 요청한다. "천상의 삶을 누리도록 창조된 사람들이 전적으로 덧없는 것들을 좇으며 휩쓸리는 것은 ... 참으로 비천하고도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칼빈이 현세의 삶을 무조건 경멸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대한 초월과 경멸을 말할 때 칼빈은 영지주의적 물질 경시를 의도하지 않는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의 삶을 증오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를 가지는 사람이다. "신자들은 삶을 증오하거나 하나님께 배은망덕하지 않으면서 세상적 삶을 경멸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
종말론적 의식은 역동적인 역사 의식을 낳는다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변혁적 역사 이해의 추진력이 된다. 종말론적 의식 속에서 칼빈은 자신의 역사적 단계를 절대화하지 않았으며 칼빈은 모든 시간과 역사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시각에서 고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은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의 운명은 이미 회복되었다. 역사의 목표가 이미 역사 속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의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모든 인간의 저주가 계시되었으며, 죄의 세력이 섬멸되었으며, 인간의 구원이 회복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 세계가 새롭게 되었으며 모든 것들이 질서로 회복되었다.
이제 세계의 운명은 더 이상 같을 수가 없다. 이제 세계는 그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틀게 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시대는 최종적 완성 직전에 놓인 시기로서 긴장이 전혀 없는 기다림의 시기가 아니다. ... 칼빈이 최종적 승리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칼빈은 교회가 어둠의 세력과 전쟁 가운데 있음을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역사적 영역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킨다는 역동적 접근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 세계 가운데 이 세계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세우고 계신다.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말 이해나 열광주의자들의 종말 이해와 구분되며,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현실 안주적 역사 이해와 열광주의자들의 극단적 역사 이해를 모두 거부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영광의 신학을 전개하는 가운데 교회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의 역사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또한 열광주의자들은 교회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극단적으로 대비하는 가운데 말씀과 성령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과하였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말씀과 성령에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을 대망하면서 동시에 현재 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는 종말론을 전개한다. 이러한 점에서 칼빈의 종말론적 비전은 단지 역사의 마지막 순간들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칼빈의 종말론은 역사의 한 가운데서 움직이고 있는 역동적 힘에 대해서 주목한다. 역사의 목표는 역사의 과정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의 목표는 역사 속에 침투해 들어와서 역사에 의미를 주며, 역사의 종착역을 향해 역사를 끌어 다닌다.
이러한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적극적 역사참여를 잉태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변경(frontier)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세계를 정해진 목표와 운명에로 손짓하는 역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칼빈의 종말론적 비전은 현재의 영역에서 믿음과 순종을 향한 결단 요청이다. 칼빈은 단지 호기심에서 종말을 논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는 현재의 싸움을 향한 부르심과 소명의 차원에서 종말을 논한 것이다.
결론: 살아 있는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한다
우리는 흔히 종말론을 강조한다는 명목으로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영성을 전개한다. 예를 들어, 한때 한국 교회에서 유행했던 시한부 종말론은 현실 도피의 종말론과 설교의 모습을 제공했다. 반면에 다수의 교회는 종말에 대해서 무관심하든지, 단지 그저 개인적인 영역에만 묵시론적 관심을 보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동체와 역사를 향한 종말적 현존과 성취는 무관심의 영역이다.
우리가 내세에 대한 묵상을 강조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고 할 때 이는 현실 도피적인 신학을 전개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내세를 많이 묵상하고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을 때 이 세계와 역사를 향한 영향력은 가장 크게 발휘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 나라를 노래할 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가장 증대될 수 있다.
내세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면서 현세를 향한 교회의 영향력도 퇴조하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지 아니하고 교회의 목적을 세상을 위한 봉사에만 한정시킬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노래할 수도 없으며 세상에 대해서 강한 영향을 끼칠 수도 없다.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개인적 차원의 종말론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역사적 차원의 종말론을 포괄한다. 칼빈은 현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다가오는 미래의 영광을 찬양하는 종말론을 전개한다.
설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살아 있는 설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하는 설교이다. 깨어 있는 교회는 설교 사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하며 성령의 종말론적 사역을 재현한다. 살아 있는 교회의 설교는 부활하신 주님을 이 자리 가운데 재현하는 설교이다. 살아 있는 설교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가운데 주님의 사역을 현재로 불러들여 재현한다.
깨어 있는 교회의 설교는 종말에 다시 오는 주님을 재현한다.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의 모습을 주목하지 않으며 다시 오실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주목한다. 살아 있는 교회는 설교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미래에 감춰두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현재로 불러들여 재현한다.
살아 있는 설교 사역을 위하여 종말론적 의식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가운데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적 긴장을 유지하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차원과 미래적 차원을 동시에 강조하는 종말론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과 설교는 우리의 신학과 설교에 좋은 자극과 도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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