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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개혁해야할신앙

[스크랩] 교회와 목회자의 구체적 개혁 실천과제/이만열교수

교회와 목회자의 구체적 개혁 실천과제

 


 

이만열 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1. 한국 교회 각성운동의 방향


  한국 교회는 IMF시대를 맞아 심한 자책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다. 지난 날, 우리는 '경제성장'이라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우리 자신을 매몰시킨 채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영적 각성을 점검하는 데에 소홀했었다. 어느 시대에나 종교의 타락은, 다른 현상에서도 그런 것처럼, 정치적인 권력이 주어지거나 물질적인 부가 주어졌으나 이를 수용하여 자기 사회를 성숙시킬 수 있는 정신적인 역량이 결여되면, 반드시 수반되었던 현상이다. 현재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영적인 해이함은 바로 그러한 현상과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교회의 성장과 성숙이 정지되고 오히려 퇴보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IMF라고 하는 경제적인 충격에 의해 가속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위기의 본질이 거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오히려 위기의 본질은 경제적인 풍요가 우리를 나태하게 하고 바알적이고 아세라적인 종교현상으로 물고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위기의 본질을 IMF 한파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해결방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 기독교의 위기의 본질을 한국 교회 100여년의 역사에서 쌓아온 기독교적 정체성의 일탈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위기의 본질을 외적인 환경적 요인에서 찾는 한 그 해결방법이 제대로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의 한국교회의 위기를 타개할 힘은 바로 영적인 재무장을 포함한 한국 교회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보며, 따라서 한국 교회 각성운동의 방향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필자는 <한국 교회 각성운동의 방향>을 현상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그 해결의 실마리를 과거 역사적인 관점에서 점검해 보고 나아가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2. 한국 교회의 상황과 그 성장둔화의 요인


  2-1. 한국 교회의 상황: 최근의 한 복음주의적인 기독교 잡지는 오늘의 한국 교회의 현상을 진단하는 글을 실었다. <교회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라는 제목 아래 'IMF 시대와 한국 교회의 구조조정'이라는 부제를 붙여 시작되는,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한 중견 기독교수에 의해 집필된 이 글의 서두 부분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교회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오늘날 한국이 겪고 있는 위기는 교회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 경제만 파산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도 파산 지경에 빠져 있다. 영적으로도 그러하고 재정적으로도 그러하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올바른 정신을 갈망했을 때 한국 교회는 도리어 한국 사회를 추종하였다. 그 결과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병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전시장으로 화해 버렸다. 한국 사회가 구조조정의 대상이라면, 한국 교회도 마땅히 구조 조정의 대상이다. 이제 나라를 바로 세우고 싶은가? 그렇다면 한국 교회를 바로 세워야 한다. …… 한국 교회가 자본주의적 개교회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많은 통로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박정희 시대의 낡은 정신적 유물인 성공제일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익숙히 알고 있다. 돈과 권력은 대다수의 성직자들에게도 삶의 2대 목표이다. 대부분의 상회조직은 복음보다 목사를 살리기 위해 진력하고 있고, 상당수의 장로들은 교회를 제대로 치리하기 보다는 헛된 명예만을 추구하고 있다. 일반신도들은 패배감과 당혹감에 젖어 있다."



  이 글은, 뒷소문에 의하면, 젊은 목회자들과 선교단체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잡지 편집위원들이 모여 내부토론을 거친 결과 백 교수가 대표 집필하도록 된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이 글의 내용이 집필자인 백 교수의 개인 의견이라기보다는 편집위원들의 의견을 집약한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이 글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알게 해 주는 적절한 사례들을 곁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아서 한국 교회의 영적인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한국 기독교의 현재를 추정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정황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해 주고 있다.


  서론 부분에서 비교적 한국 교회 문제점의 원론부분을 다루던 이 글은 각론 부분에 들어가면 좀 더 리얼하게 한국 교회의 약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들은 돈과 목사와 교회의 일반적인 관행 및 기독교 정권의 문제까지 따지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돈'이라는 것을 이 글은 드러내 주고 있다. 어느 목사가 방송설교에서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신다. 그것도 많은 돈을 좋아하신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한국 교회의 무분별한 확장욕이 돈을 사랑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내 것'주의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성장할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고, 따라서 "한국의 재벌들처럼 한국 교회도 증가하는 부채 때문에 교회의 안정을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진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어느 교회는 건축 때문에 최근 부채가 150억원이 넘어 건축을 중단하였다는 후문이다. 그 교회는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이쯤 되면 교회당을 건축하려던 그 열심있는 신도들도 이제는 마음에 여러가지 갈등을 겪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구의 횡덩그레하게 남아있는 성당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는가. 하기야 어떤 목회자는, 교인들이 떠난지 오랜 그런 교회당들을 관광하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느꼈다면서 우리에게는 그런 거대한 교회당들을 문화유산으로 남길 수 없을까 보냐고 마음먹었다니까 할 말이 없다.



  돈 때문에 일어나는 한국 교회의 비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직분을 돈과 결부시키는 현실을 말하면서, 전경련회장을 뽑는다 해도 매출액의 순서나 선거자금의 액수를 고려하지 않는데, 한국교회는 '성직자들의 대표인 교단장'을 뽑는데 향응을 제공하고 금전을 살포하는 짓거리들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의 '통합선거법'은 이럴 경우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법에 의한 심판을 받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소문이 무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우롱하는' 그 '행위'가 교회법에 의해 치리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막상 자신들은 부정의 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외치는 소리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금전문제와 함께 연관되어 한국 교회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적인 문제다. "어떤 교회의 목사가 자신의 치아를 고치는 데 드는 1천만원을 교회재정에서 지출하라고 요구"하면서, "목사의 몸은 하나님께 바친 몸이니 교회가 뭐든지 다 지불해야 한다고 설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 기윤실에 제보된 교회 목회자들의 7계와 관련된 사례들은 굳이 들지 않겠다. 목회자들 가운데 이러한 분이 있으면 상회는 신속하게 치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노회나 총회들은 점차 목사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이익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한국의 재벌들이 파산 직전에 있는 산하 기업들을 상호보증하면서 끌고 가고 있듯이, 한국 교회의 노회나 총회들은 여기서 쫓겨난 목사를 저리로 보내고 저기서 쫓겨난 목사들을 여기로 보내면서 상호보증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뿐인가. 목회자들이 '목사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주장하는가 하면, '축복권'을 남용하여 교인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글은 교회 장로들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 "시골에 어떤 교회의 장로님 한분은 부채 독촉에 견디다 못해 감옥에 가는 길을 택했고, 다른 한분은 직업을 잃고 이단에 빠져 있으며, 또 다른 한 분은 독직혐의로 기소 중에 있다. 이 분들이 처한 어려움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의 다른 장로님이 내린 평가에 따르면, 다액의 헌금을 선한 일로 강조하는 그 교회의 분위기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한다. 어떤 교회는 뇌물로 밝혀진 헌금을 검찰이 회수하려 하자, 교회에 일단 접수된 헌금은 신성한 것이므로 돌려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러한 경우들에 있어서 교회란 교인들을 초청하여 껍데기를 벗겨 쫓아내는 강도의 굴혈과 다를 것이 없다"고까지 심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같은 한국 교회의 수준이고 보니, 두번이나 교회 지도급에 있는 정치인이 국정을 맡았지만 "가장 실망적인 정부들로 기록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2-2. 성장둔화의 요인: 1990년대 들어서서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성장에 따른 통계가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가 없기 때문에 '둔화 현상'도 엄정한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 보편화된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들에 관하여는 최근 한국 기독교계에서 학술적인 토론을 거친 바 있고 또 연구들도 있어서 그 문제들의 원인과 대책들은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가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종교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비단 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고 종교 일반의 현상이다. 1990년대 한국교회 성장의 둔화 요인은 모든 종교에 해당될 수 있지만, 편의상 이 글에서는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점을 중심으로 거론하고자 한다. 필자는 한국교회 성장둔화의 요인으로 사회 일반적인 점과 기독교회에만 적용될 수 있는 점으로 크게 구분하여 지적하였으나 여기서는 후자만 지적하고자 한다.


   여기서 거론할 수 있는 교회 내적인 요인으로는 첫째 '거품교인'의 증가에 따른 부작용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교회의 대형화 추세에 따라, 양적인 증가에 치중한 한국 교회는 전도에 의한 실질적인 교인의 증가보다는 '수평이동'이나 '거품교인'들을 많이 흡수하게 되었다. '거품교인'에는 이중 삼중으로 등록된 교인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 밖에도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어 교회에 나가는 경우, 기복적 신앙에 의해 믿음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 실리추구적인 측면, 교육의 현장으로서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 친교를 위한 장으로서의 교회의 이용 등 이런 저런 목적으로 출석하는 교인도 거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양적 통계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정부에서 조사하는 개신교인의 수와 각 교단에서 정리하는 통계와는, 때로는 상당 부분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거품교인'들이 경제성장에 따른 여가문화와 다변화된 사회에 관심을 돌림으로 통계상 교인 수는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둘째로 교회의 자기 정체성의 약화를 들 수 있다. 즉 현대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구속받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 봉사와 정의를 나누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공동체인데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점차 상실하고 현실에 영합하여 세속적인 성취를 이룩하는 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자기 정체성과 본래적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면, 신흥 '종교 귀족'을 탄생시키는 기구로서 전락하거나 '종교적 왕국' 구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다.



  셋째로 목회자의 영성 상실을 들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강단에 서기 위해 드리는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매우 분주하다. 그 때문에 기도하는 무릎을 상실하였고 성경을 심도있게 연구하거나 설교준비에 드리는 시간이 그만큼 상실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되어도 그 양심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끔 된 데 있다. 목회자들 중에는 시중에 나와 있는 서적이나 베스트셀러에 매달려 그대로 교인들에게 소개하는 대리자로 전락되고 있다. 심하게는 매주일 설교를 준비하여 공급하는 기관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는 그 기관이 점차 성업중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 속에 생명의 말씀으로 육화(肉化)시키고 실천하는 구도자의 과정없이 그대로 교인들에게 설교자로 나섬으로 목회자 자신은 하나님 말씀의 대리자이기보다는 하나의 종교적 정보전달자가 되어 버린다.



  넷째로 교회의 대형화로 목회자가 교인양육 사역에 큰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목회자가 실지로 양육할 수 있는 교인의 수는 200~300명이 적당하다고 한다. 한국 교회의 대형화는 한 목회자의 감당할 수 있는 양육의 범위를 넘어섰다. 때문에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인격적인 신뢰관계가 형성될 수가 없다. 이것 또한 한국 교회 성장둔화의 중요한 요인이다. 여기에다 한국교회에는 무자격 교역자 양산의 문제가 많다. 그 동안 무인가 신학교의 난립으로 인해 목회자의 자질이 함량 부족이라는 비판이 많았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서열화된 교회 직분구조와 리더십의 부재와, 미래와 후세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 점, 교단분열 및 개교회의 불화 등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특히 한국 교회의 분열과 불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교회의 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일제강점하에서도 말썽이 되어온 한국 사회의 지방색은 일반사회의 지방색이나 파벌 의식이 조장되기 전에 시작되었다. 이것은 일제하의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투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고,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한국 민족 앞에 회개해야 한다.



  1994년 유선 텔레비전 방송국 허가를 당국에 촉구하는 개신교 보수교단들의 성명서가 각 일간 신문지 1면에 발표되었다. 이 때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간판을 가진 105개의 교단이 있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식있는 신자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언필칭 사랑과 화평을 입버릇처럼 외우던 교회가 걸핏하면 분열하여 같은 간판을 건 105개의 장로교단이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1993년 기독교문사 발행의 《기독교연감》에 의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가진 교단만 58개가 등록되었는데, 실제로는 105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합동이 5,123교회, 통합이 5,045교회, 개혁이 1,565교회, 고신이 1,266교회, 합동정통이 1,044교회, 대신이 838교회, 합동보수가 807교회이고 그 밖의 교단은 500여 교회를 가진 교단이 1개, 400여 교회가 2개, 300여 교회가 8개, 100개 이하의 교회를 가진 교단이 16개나 되었다.


  한국교회의 이같은 분열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교리나 신학의 차이라기보다는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분열로 보여지며 이는 비교인들에게는 물론 교인들에게도 교회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하고 종교적 안정을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실망을 주고 있다. 이웃하고 있는 개교회끼리의 갈등과, 각교회 내의 분열, 갈등은 결과적으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갈등을 불러 일으키며 불신자들에게는 전도의 문을 막는 요인이 된다. 담임목사와 장로 및 교회 중직들과의 반목과 질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섬김을 강조하는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 이러한 반목과 갈등을 계속하는 교회는 구성원으로 하여금 이기적인 파당을 짓도록 하며, 사회적으로도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어 교회성장을 둔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사회를 향해 섬김과 나눔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손꼽을 수 있다. 양적 성장의 추세 속에서 그동안 한국 교회는 자체의 물적.인적 자원을 사회봉사나 구제에 활용하기보다는 대부분을 교회당 증축, 기도원이나 수양관 건립, 교회묘지 구입 및 교육관 건축 등 보이는 일, 대형화하는 일에만 치중했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한국 교회 성장을 부추기는 동인이 되기도 했고 성장의 결과로 과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에 치중하면서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한국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는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학생층의 기독교 선호도는 타종교에 비해 월등했으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급격히 하락했다는 견해와 일치한다고 본다.



  이와 함께 목회자 및 교인들의 윤리성 결여로 인해 사회적 신뢰가 실추되는 것도 교회성장 둔화에 큰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갤럽이 1993년 5월에 제주도를 뺀 전국의 20세 이상 성인 남녀 1,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직업인에 대한 윤리수준 평가>에 의하면 정직성과 윤리성이 높다는 평가를 많이 받은 직업인은 천주교 신부(52.7%), 텔레비전 기자(45%), 스님(38.2%), 신문기자(37.4%), 교사(31.2%), 목사(30.9%), 교수(30.1%)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 점은 개신교의 위상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반면 신부와 가톨릭의 위상을 높여 천주교회의 성장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목사의 정직과 윤리성이 다른 종교의 성직자보다 저조하다는 것은 한국 교회 성장둔화의 요인일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각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최근 전 안기부장의 자해소동에서 일어난 기독교 지도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전임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한국 기독신자의 위상을 떨어뜨려 기독교회의 각성을 재촉하는 단서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목회자 중에 이중국적자 혹은 불법이민자가 많다거나 그 자녀 중에 병역 기피를 위해 편법이민자가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를 범법적 집단의 이미지를 갖게 했다.


  그러고 보니 한국 교회는 사이비 종파로 인한 불신에다 최근에는 이단문제로 인한 시비가 끊일 날이 없다. 1991년의 오대양사건, 1992년의 시한부종말신앙, 1993년의 영생교주사건, 최근의 아가교사건 등 사이비 종말론이나 사이비종파의 발생은 물론이고 최근의 이단시비로 인한 교단간의 싸움은 한국교회가 자기 정체성 확립과 엄격한 기독교적 윤리성고양을 위해 노력하지 않음에서 오는 결과라고 할 것이다. 거기에다 최근 MBC 방송에서 터뜨린 한 사건은, 그것이 한국교회의 모습을 왜곡시켰다는 교계 지도자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젊은이들은 오히려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특히 MBC에서 방송이 있고 난 뒤 교계신문에 나타난 한국교회의 집단성 반응은 한마디로 실망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은 한국 교회가 말씀과 실천 중심의 기독교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물량주의, 기복신앙, 반지성주의로 흘러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고, 그 결과 불건전한 도덕적인 시비와 사이비종파들의 독성이 그 속에서 끊임없이 번식해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3. 각성운동의 한국 교회사적 맥락


3-1. 기독교의 수용단계: 한국 교회의 각성운동은 기독교가 수용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던 시대부터 성별(聖別)된 생활을 강조한 바와 같이, 한국 기독교인들은 수용단계부터 성별생활을 통한 윤리적인 각성을 실천하였다. 초기의 전도문서들을 보면, 1890년대 초기에는 대부분의 전도문서들이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기존의 종교들과 어떤 유사점을 갖고 있는가를 강조하였고, 1890년대 후기에는 기독교가 타 종교와 어떻게 다른가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교리상으로 보더라도 초기에는 불교의 극락과 지옥이 기독교의 천당과 지옥으로 유비 또는 대체되는가 하면, 영생 개념이 도교의 장생불로 사상으로 이해되었고, 효도관념은 유교와 기독교가 공통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듯했으나, 후기에 이르면서 점차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수용초기에 뚜렷한 기독교적 윤리의식이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각성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던 기독교는 한국 사회 속에서 점차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초기에 타종교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할 줄 아는 그것이 바로 자기 정체성의 발현이요, 기독교적 각성운동의 단초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 때 나타나는 것이 유일신 사상과 거기에 따른 윤리라고 할 것이다.



  유일신사상은 당시 범심론(汎神論)에 가까운 신관(神觀)을 갖고 있던 한국 사회에 "만물의 제일 원인이며 자존영원(自存永遠)하며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능(無所不能)하여 모든 인간의 아버지임을 강조"하는 한편 그 분 밖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고백하는 전지전능한 유일신 하나님을 소개하였다. 이것은 신관의 혁명이었다. 기독교 수용기의 각성운동의 핵심의 하나는 바로 이 신관의 변혁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기독교적 신관의 확립은 신앙과 윤리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 수용기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주로 경건주의적인 훈련을 받은 분들이었다. 그들은 초기부터 한국 사회의 폐습으로 나타나고 있던 술 담배 아편 도박 축첩 등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당시 한국 기독교인의 생활강령은 예배 성수주일 효도 순결 인가귀도(引家歸道) 근면.정직 및 술.도박.아편금지 등이었다. 이런 것들이 기독교수용기에 보이는 윤리적 각성운동의 실태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이미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과 개인윤리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도 보였다.



3-2. 한말 부흥운동기의 각성운동: 이 점에 관하여는 별도 강의에서 언급될 것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때에 나타난 각성운동은 민족이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그것은 회개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이 때의 회개운동이 중요한 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멸망원인을 조상 때부터 쌓아온 우리 민족의 죄악의 결과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과, 이 때에 와서 비로소 죄를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회개하는 움직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흥운동에서 나타난 각성운동은 개인적인 및 민족적인 범죄에 대한 심각한 회개로서 죄의 문제를 국가 민족의 흥망과 관련시킬 수 있는, 종교적 의식으로 성숙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회개운동과 민족의 운명과를 연결시키면서 다시 그것을 신자들의 사명인 전도와 연결시킴으로, 전도가 곧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3. 일제 강점기의 각성운동: 이 시기 한국 교회의 각성운동은 무엇보다 성경공부의 열심 위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많이 개최되고 있던 사경회의 열심은 바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이 무렴의 한국 교회의 각성운동은 크게 두가지 점에서 돋보인다.



  첫째는 말세 신앙이 대두되고 타계주의 신앙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3.1운동 후에는 이러한 신앙이 부흥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는 3.1운동의 좌절에서 오는 민족적 패배감과 좌절감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 말세신앙은 이 땅에 아닌 저 나라, 고통받고 있는 지금이 괴롭기는 해도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뤄지는 말세의 새 세상이 있다는 소망을 안겨 줌으로써 이러한 좌절감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의미도 부여하게 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타계주의 신앙은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여 이분법적인 '하나님나라'관을 갖고 삶의 목적을, 최권능(최봉석)목사가 외친 바와 같이, '예수 천당'에 두는 신앙행태도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교회 신앙의 중요한 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같은 타계주의 신앙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염세주의적이고 생(生)을 극단적인 촤절과 파행으로 이끄는 측면이 없진 않다. 그러나 삶의 죄종적인 목표를 이 땅에 두지 않는 그 신앙은 오히려 당시의 천황제로서 한국 신자들의 신앙을 파행으로 이끌고 있던 신사참배강요의 무서운 핍박을 이기게 하는 역동적인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 험난한 시기를 경과하고 나서 경험적으로 터득하게 된 진리다.



  둘째로 일제 강점하라는 상황 인식을 통해 신앙을 민족.국가의 문제와 기독교적 각성을 연결시키는 점이 또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3.1운동 같은 민족운동이 기독교도들의 주도하에 이뤄졌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3.1운동 후에는,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타계주의적인 신앙 소지자들과는 다른 형태의 길을 걸으면서 해외의 무장항일운동이나 국내의 절제운동 농촌운동 등에 투신하는 흐름을 계승되었다. 이들 민족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진보주의적인 색채의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민족의식의 충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의 바탕이 현실적인 문제에 있었기 때문에, 일제 말기의 신사참배강요에는 무릎 꿇고 말았던 것이다. 현실문제에 침잠하게 되면서 하늘을 향한 소망을 더 굳게 하지 않았고 또 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는 경건성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겨놓은, 한국 기독교 신앙의 이분법극복의 논리는 한국 기독교사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4. 한국 교회 각성운동의 전망


  한국 교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그래서 대각성운동이 필요하다는 외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특히 나라가 경제적 위기를 만나고 보니 교회는 그 영향을 몇배로 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 교회의 위기의식은 증폭되고 그래서 예언자적 각성의 소리에는 그만큼 귀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는, 과거의 역사에서 보아왔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출하는 기회로 전회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더구나 한국 교회의 각성운동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이 제 1, 2차 각성운동을 통해 교회의 영적 성장은 물론이고 국가적 토대를 마련하였듯이, 한국 교회의 각성운동은 교회의 병폐적인 모습을 개혁하고 교회가 몸담고 있는 한국 사회를 개혁하여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몇가지를 각성운동의 전망으로 개진하고자 한다.



  4-1. 영적 환원운동으로서의 각성운동: 우리 세대가 각성운동이 필요한 것은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였거나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어떤 위치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각성운동의 영적 환원운동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중세의 교회가 부패했을 때에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영국의 국교회와 그 지도를 받고 있던 사회가 타락하였을 때에 웨슬리의 개혁운동이 일어났으며, 미국 또한 그러한 영적 타락을 겪으며 깊은 좌절 속에 있을 깨 요나단 에드워드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개혁운동으로서의 각성운동이 가진 공통점은 근원적인 전제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운동은 영적 환원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각성운동이 어떤 목표나 지향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초대교회라는 이상적인 교회상을 뚜렷한 목표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과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영적 환원운동이며 이 시대의 각성운동의 방법론적인 토대라 할 것이다.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 시절, 나름대로의 각성운동이 이뤄진 것은 선교사들의 입국에 앞서 성경이 번역되었고 그 성경이 열심있는 성도들에 의해 반포되고 열심히 읽혀졌으며 사경회를 통해 바로 가르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의 권위가 떨어졌다. 이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에 있어서의 말씀'이라는 소위 진보주의자들의 성경관의 단계에도 미치지 않는 형편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과거처럼 틀린 것이나 허물되 것, 모자라는 것이나 지나친 것이 모두 성경의 표준에 의해 검증되어 때로는 그 생각과 행위가 심판되기도 하고 포상되기도 하며 그 표준에 의해 문책되거나 격려받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단계에 미치지 못하거나 때로는 벗어나고 있다.


  한편 성경을 통해 초대교회의 이상을 상고하면서 그 이상을 본받아 실현하려는 데에도 또 그 이상에 비추어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는 외침도 용기도 상실하고 있는 단계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 한국 교회는, 과거 종교개혁 때처럼, 성경이 우선인가 전통과 관행이 우선인가 하는 심각한 물음에 봉착해 있다. 이미 한국 교회가 성경과는 무관한 주장과 이론, 제도와 관행을 덕지덕지 붙여놓고 그것을 교회의 참 모습이라 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단연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원론적인 각성운동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4-2. 유일신신앙의 재무장으로서의 각성운동: 과거 한국 기독교의 수용단계에서는 유일신관이 바로 영적인 개안(開眼)의 시발이었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그 이후 한국 기독교회가 유일신관을 포기하거나 거기에 대한 신앙이 흔들려진 적은 없었다고 본다. 적어도 형식논리에서는 지금도 한국 교회의 유일신관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한국 교회는 기독교의 전제가 되는 유일신관 자체의 동요를 경험한 지 오래라고 할 것이며, 이러한 신관의 동요가 오늘날의 각성운동을 필요로 하는 영적 침체에 도달케 되었다고 본다.



  신관의 동요란 우선 20세기 후반에 급격하게 확산된 다원주의적인 요소에 의해 걷잡를 수 없을 정도로 침투하고 있다. 다원주의는 기독교에 침투한 지 오래 되었다. 하나님은 그 '유일신 됨'을 상실하고 다른 신과 상대화되고 있으며 기독교 또한 다른 여타 종교와 다를 바 없이 '하나의 종교'로 전락되고 말았다. 다원주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 될 수 없으며, 더 이상 창조주.섭리자로서 역사지배권도 배타적으로 갖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기독교적 신관은 그들이 날마다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섬기고 있는 행위와의 사이에 괴리감으로 나타난다. 기독교회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언제부터인지 한국 교회는 바알주의와 맴먼이즘(Mammonism)에 물들어 버렸다. 많은 기독 지성인들이 경고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는, 광야에 있던 백성들이 아론에게 다른 신을 요구하였을 때 '지도자' 아론이 재빨리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대신 다른 신 특히 현세적인 복을 보장해주는 신을 요구하고 또 내어놓게 되었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걸어놓고 있지만 성육신하시고 인류의 죄악을 위해 희생하신 그 상징으로서의 십자가의 의미는 사라지고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더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들이 섬기다가 망한 그 바알을 섬기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이스라엘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부와 생산의 상징인 바알을 섬겼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맞아 그 바알이 맴몬이즘과 연결고리를 갖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 교회 각성운동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바로 이 바알과 맴몬을 쳐 부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한국 교회의 각성운동이 지향해야 할 가장 뚜렷한 목표의 하나다.



  성경에는 <바알의 단 곁에 아세라 상>(사 6: 25)이 있다고 하였다. 물질적 풍요와 높은 생산성을 구가하는 바알신은 경제적 풍요가 그 곁에 두고 싶어하는 향락의 신 아세라를 동반하게끔 되어 있다. 한국 교회가 바알신을 가까이하고 있다면, 그 곁에는 항상 향락주의가 뒤따르고 있음도 부인 못할 것이다. 바알주의와 아세라주의는 한국 교회의 영성과 경건성을 무너뜨리는 2대 공적이다. 그것들은 기도하는 무릎을 없애 버렸고 경건 절제하는 생활을 앗아가 버렸다. 교회가 교회 다와지고 기독교인이 교인 다와지려면 바로 하나님의 절대유일하심의 신앙과 그것을 바탕으로하여 이루어진 경건한 윤리생활로 회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회개요 각성운동의 실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러한 죄악들에 대하여 피흘리기까지 대적하지 않고 있다.



  과거 범신론적인 한국 사회에 유일신신앙으로 자기정체성을 확립한 기독교회는 일제의 포학한 천황숭배주의의 산물인 신사참배강요에 굴하지 아니하고 투쟁하였다. 핍박과 수난 속에서도 유일신주의를 고수하였던 한국 교회는 편안한 시대에 이르러서는 물욕을 부추기는 바알주의와 맴몬주의, 향락과 퇴폐를 조장하는 아세라주의 앞에는 꼼작 못하고 무장해제당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각성운동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투쟁의 기치를 높이 올려야 할 것이다. 교회 지도자는 끊임없이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는 바알과 맴몬, 아세라를 가리키며, 자신은 물론 양떼들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인도할 책임을 지고 있다.



4-3. 이원론적인 신앙행태의 극복운동 : 한국 교회가 병들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원론적인 신앙행태에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이원론적 신앙행태를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박하며 바로 그것이 중요한 각성운동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어서 대체로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즉 교회 안에서는 신자인데 교회 밖에서는 신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종래의 사상들이 갖고 있는 이원론적인 구조의 영향으로, 혹은 한국 교회 메시지가 이원론적인 폐단을 인식하거나 극복하는 데에 한계가 있고 때로는 이원론적인 신앙구조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영적인 생활과 세속적인 생활이 분리되고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이 구분되며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가 구분되는 상황에서는,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방향과 의미가 분명하지 않게 되고, 그런 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 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사명은 제대로 수행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인구수만큼 한국 사회를 기독교적인 문화와 윤리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있는 주 원인은 바로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인 신앙행태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각성운동은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인 신앙행태를 극복하고 신앙과 행위,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는 신앙생활을 확립하는 데에 두어야 한다. 어떤 것이 이원론적인 삶의 형태를 극복하는 삶인가 하는 의문을 풀어주는 데는 무엇보다 교회 지도자들의 모델적인 삶이 지극히 필요하다는 것도 첨언해 둔다.



  4-4. 기독교적 복(福) 사상의 확립: 한국 교회는 복을 남발하고 있으며 신자들을 축복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목회자의 축복권은 하나의 특권처럼 간주되고 있어서 심지어는 가정 심방에서도 축복하는 것으로 목회자가 권위를 세우려 하고 있다. 축복을 통해 전달되는 복이나 신앙생활을 통해 기원되는 그 복은 거의 세속적인 복과 구별되지 않으며 지극히 혼합주의적이다. 어느 교단에서는 요삼 2절의 말씀을 삼박자축복으로 이해한다. 이는 지극히 세속적으로 계산된 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물질적인 복과 건강의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물질과 건강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결코 얻을 수 없지마는, 하나님은 필요할 때에는 그것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교회는, 평소 지금까지 나에게 주어졌던 그 물질과 건강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도 빼앗겨질 수 있으며 그럴 경우 그 빼앗기는 것 또한 하나님의 축복임을 가르쳐야 한다. 바울의 경우는 기독교적 복이 어떠한 것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당신의 입으로 친히 8복을 말씀하셨다. 거기서 가르치는 복은 결코 세속적인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의 복이 행 20: 35절에 보이는데, 그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강조해온 복과는 다른,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그 복을 강조하여야 한다.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등에서 가르치는 바로 그런 복이다. 이 복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도 있지만, 대부분 사회적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남과 북이 파산지경에 빠진 지금, 이런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길은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복의 길을 실천하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한국 교회의 각성운동은 바로 이 기독교적 복사상을 확립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두어야 할 것이다.



  4-5. 화해와 일치를 위한 각성운동: 한국 교회가 갖는 갈등 구조나 우리 사회와 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갈등구조도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몸소 보이신 화해와 일치의 진리를 실천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과거 많은 경우 개인적인 동기를 감추고 대의명분을 나타내는 통로로서 흔히 '정통과 진리의 파수'니 '공의의 수호'니 하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나와 다른 자를 포용하는 일에 서투르고 인색하다. 예수님은 죄악으로 나눠진 것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그리고 원수된 것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죄를 죄로 갚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감싸시며, 허물을 허물로 앙갚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다.



  오늘날 사분오열로 찢겨진 한국 교회의 일치는 우리 교회의 각성운동의 중요한 목표요 지향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용납할 줄 알아야 한다. 교회가 일치의 방향으로 나아가 모범을 보여줄 수 있을 때, 한국 교회는 사회를 향해서 갈등구조를 풀고 화해를 예언자처럼 외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위침이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며, 민족을 향해서는 분단을 극복하고 서로를 용납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화해와 일치 나아가 서로가 서로를 위해 헌신하고 나눠주는 과정을 거쳐 민족통일의 목표점에 도달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공동체적인 사명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추진시켜야 할 각성운동의 방향은 바로 이 화해와 일치에 있다.



  4-6. 기독교적 직업윤리의 확립 - IMF시기를 극복하기 위한 기독교적 대안: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쓴 막스 베버(Max Weber)는 근대에 발전하기 시작한 자본주의가 캘빈주의적인 프로테스탄트가 번성했던 곳과 일치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그 이유를 탐구하는 데서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정신을 합리주의 정신과 신용, 근면, 절약의 윤리에서 찾았다. 그와 함께 그러한 자본주의가 왜 캘빈주의가 발전한 지역에서 발전하였는가를 검토한 결과, 캘빈주의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정직과 신의, 근면과 땀흘림, 절제와 절약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과 합치됨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과 일치됨을 알고 연구의 방향을 진전시켰던 것이다.



  자본주의 정신이 정직과 신용, 근면과 땀흘림, 절제와 절약 등 캘빈주의 교회를 비롯할 프로태스탄트 교회가 강조하는 윤리라 할 때,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윤리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소비가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우리 사회에 대하여 기독교도 거기에 묵시적으로 동조한 자세를 반성하고 초기 자본주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쳤던 그 프로테시탄트 윤리를 제시하고 생활화시키자는 것이다.



  동양사회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일 때에 흔히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형태로 수용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이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용어들은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되 우리 동양의 정신에 서양의 기술이나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문화에는 그 문화를 일으킨 정신적 바탕이 있다. 그것을 무시하고 제도만 받아들인다고 할 때 거기에는 문제가 많이 일어나고 그 본질이 훼손당하게 된다. 한국에 수용되어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도 그 정신적인 바탕인 정직과 신의, 근면과 땀흘림, 절제와 절약은 도외시하고 그 외형적이고 기능적인 면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늘의 이러한 난국을 맞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그 경제적인 요인을 거론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정신적인 바탕을 중시하고 그 처방도 경제학자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그 원인을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 교회가 그 동안 사회 경제계의 숱한 모순을 두고 정말 기독교적인 처방의 목소리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1960년대 새마을 운동의 추세와 함께 거기에 덩달아서 물질적인 축복을 강조하고 그 물질의 획득과정상 고려해야 할 요인들-예를 들면 정당성이나 근면성, 땀, 절제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회피해 왔다. 이제 한국교회의 개혁의 방향은, 가령 교회당 건축을 위한 헌금이라 할지라도 부정한 돈은 받지 않는다는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본다. 과거에는 그러한 헌금은 청정(淸淨).부정(不淨)을 가리지 않고 그 다과(多寡)로서 은혜와 신앙의 척도를 가름했던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교회가 한국사회를 향해 정직과 근면 그리고 절제를 외칠 수 있었겠는가. 한국 사회를 정화시키기 위한 한국교회의 노력이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개혁은 공념불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국 기독교가 기독교적인 바른 직업윤리를 가르치는 것이요, 바른 재물관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도 할 것이다.



  교회사를 되돌아 볼 때 교회는 종종 그 영적인 감각을 상실하여 위기에 직면했던 때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 때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종들을 보내어 각성운동을 벌이게 했다. 부패했던 교회가 소성하는 새로운 힘을 얻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렇게 깨어서 영적인 각성운동에 앞장 섰던 많은 선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성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 '적은 무리'(눅 12: 32)를 통하여 각성운동과 개혁운동을 이끌게 하시고 많은 호응자들을 주어 하나님의 교회가 갱신되도록 하였다.



  이 시대에 한국 교회는 영적 각성운동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각성운동에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더 이상 영적인 감각을 상실하고 더 이상 부패하도록 방치하여서는 안된다. 그렇게 둔다면 하나님이 언젠가는 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먼저 책임을 물을 것이다. 우리는 깨어 있는 영력(靈力)으로 혹은 기도하는 무릎으로 이 각성운동에 앞장 설 수 있다. 바람직하기는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이 각성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다. 개혁운동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그랬듯이 각성운동을 지지하고 호응함으로써 이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어떠한 것이든, 앞에 서서 더 적극적으로 각성운동을 이끌어가거나, 뒤에서 호응하고 밀어주는 자세든 각성운동을 일으키고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만큼 한국 교회의 영적 각성운동은 초미를 다툴 정도로 시급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 상태로 나간다면 오늘날 서구 교회가 보여주는 그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결코 단언할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각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먼저 목회자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회개운동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회개운동은 말과 기도와 명상에 그쳐서는 안된다. 과거 얼마나 많은 회개운동이 말에 그치고 말았던가.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선두에 서서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먼저 바꾸고 양떼들에게 따라 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취했던 목회성공의 척도를 수정하여 하나님 중심의 목회, 양떼를 푸른 초장과 물가로 인도하기 위한 공급하는 목회, 그러기 위해서는 양떼와 사회.민족을 섬기는 자기희생적인 목회로 바꾸고, 지도자들이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고전 11:1에서 바울이 담대하게 외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는 말씀이 바로 지도자 한사람 한사람의 좌우명이 되어야 한다.

(이만열)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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