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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나의 신앙 간증

진리에 바로서면 신앙이 흔들릴수 없습니다.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기위한 흔들리지 않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흔들릴수 없습니다.  이 진리가 흔들리니 신앙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사고가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리고 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농부가  소를 몰아 밭을 갈때 농부의 기준은  건너편에 있는 큰 나무가 될수 있습니다.  그 나무를 향해 똑바로 가다보면 밭이 똑바로 갈리는 것입니다.  만약  농부가  하늘의 새나  들판의 다른 소나 짐승들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아니면 구름이나 태양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그 밭은 일직선으로 되지 않고 중구난방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헷갈리지 않으려면  진리에 벗어난 기준을  가져다 놓으면 안됩니다.  진리에서 벗어난것은 우리의 기준이 될수 없는 것입니다.   자꾸  우리 기독교가 흔들리고  많은 말들이 난무하고  혼란속에 빠진것은  성경이 수천년의 세월을 건너오면서 많은 부분이 누락되었거나  번역되면서 오류가 생겼거나  단어 하나하나가 약간의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일겁니다.

 

야고보서의 논쟁도  야고보서가 행위구원을 옹호하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전 결단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율법서이긴 하지만  그 율법서라고 불리는 야고보서가  은혜구원을 버리고 행위구원을 가르친다는것은 말도 안되고 만약 그렇다면 야고보서는 성경이 될수 없을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기준 삼아야 할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서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수도 없고 알수도 없고 믿을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을 베풀어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되어 인간을 구원하셨고  구원의 역사에  또한 성령하나님으로 간섭하시어 인간을 중생케 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니 인간은 구원에 관하여 결단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은 변할수 없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와질수 없고  죄가 없어질수 없습니다.  죄로인해 사망의 몸을 입은 인간은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지고 죽어야할 한 짐승  곧 거룩한 하나님의 양이 필요했던것입니다.  율법이 가르치는것은  내 죄로 인해 짐승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그 죽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남으로서 끝을 맺게됩니다.

 

곧 죄의 결과는 사망이고  사망에서 건저낼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뿐임을  율법시대부터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지금 유태인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하며  예수님을 인정치 않고 믿지 않는데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버림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마지막때에 하나님이 선택한 언약의 백성들이 구원을 얻게되겠지만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과거처럼 피흘리는 제사를 드려야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스라엘에서 그런 제사가 드려지고 있다는 뉴스는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위와 은혜가운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가 주안에서 거듭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서 지금 부모님이 우리의 부모님인것은 우리가 부모님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부모님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부모님에게 아버지라고 부를수 없는것은 진리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우리가 주안에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는 문제입니다.  곧 우리의 새로운 생명은 성령님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믿고 그의 의에 동참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행위는 아무 쓸모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아닌 다른 어른들에게  아버지 어머니하고 유산을 상속해달라고 하면?  아마 미친놈 소리를 들을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자녀이면서 하나님에게 천국을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웃으실것입니다.

 

문제는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알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전도라는것은  바로 이런것입니다.  당신의 참 부모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요.  그 품은 행복하고 편하고 아름답습니다.  그 품에 안기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합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유업을 주시기 위해서 몸소 인간이 되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라고 전해야합니다.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수 없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수 없기 때문에 전도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받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해서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이 내 안에 들어갈때  성령님이  내 죽은 심령을 살려주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며 죄를 깨닫게 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유산을 얻을수 있는 자격을 얻게된것입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겠다는것입니다.  그것도 아낌없이 주겠다는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왕노릇 하며 영원히 영생하게 하시겠다는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모든걸 하나님이 다 해놓고 나는 아무것도 안하네? 라고 말씀하시면 하나님이 좀 서운해 하십니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품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찌질거리고 살게된것이 운명인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주신것도  하나님이 이땅을 운행하시는 그 역사속에서 예정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구원하기로 작정한 그 작정안에서 이루어진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수 없던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해서 새롭게 태어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아래서 죽은영혼이고  잉태되지 않은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선택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복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선택할수도 없으니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스스로 선택할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 많은 영혼들이 주를 모른체 죽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 하나님이 왜 저들을 그냥 두실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것은 당연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된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의지와 뜻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이며 은혜인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들에게 효를 다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와 우애있게 지내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부모님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런 행함을 구원이후에 요구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다면?  행함이 없는 자녀라면?  하나님은 어찌할까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그의 마음과 양심을 움직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강제할것입니다.  순종케 하실것입니다.  깨닫게 하실것입니다.  그래도 말안들으면  회초리로 때리기 까지 하실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것입니다.  내 부모가 내 자식이 잘못된길로 가면 훈계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 행하지 않도록 훈계하시며 견책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의 바른 뜻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행함이 필요한것이지  자녀가 아니라면 행함은 필요없는 것입니다.   내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을  잘못한다고 때리고 혼낼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자식 부모에게 어떤 곤란을 당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마귀의 자녀들을 혼내지 않고 고통을 주지도 않으며 때리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의 인생은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인생인것입니다.   마귀의 자녀들은 육적인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법을 행합니다. 

 

이것이 신분의 차이에 의한 행함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법을 사모하느냐?  육적인 죄를 사랑하느냐의 차이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니면  마귀의 자녀인가? 하는 것을 구별지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변목사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혼란에 빠진것은  그가  성령의 법 곧 하나님의 법을 굉장히 강조하는 것에 있습니다.  곧 그가 구원받은 백성/ 하나님의 자녀처럼 행동하는것에서 우리의 혼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란에 빠지면 안되는 것은  마귀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하나님의 법을 너무나 잘알아서  인간을 속이는데 바로 그것이 광명의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위구원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혜법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광명의 천사의 모습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대표적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해탈의 가르침이 바로  죄를 없애기 위한 인간의 노력입니다.  인간은 해탈할수 없습니다.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종교들을 보면 염주를 돌립니다.  대표적 염주돌리는 종교가 바로 천주교 입니다.  천주교는 행위구원을 강요합니다.  루터의 개혁도 바로 행위구원에서 비롯�습니다.  루터의 개혁은  천주교를 개혁하기위한 것이고  실제적 개혁은  칼빈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루터파는 지금 천주교로 다시 복귀하고 있거나 했을 것입니다. 루터는 은혜를 강조했지만  천주교의 교리를 완전히 벗어날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루터에게 은혜를 베풀어 은혜구원을 깨닫게 하셨으니  루터의 개혁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것은 높이 사야할것입니다.

 

행위를 강조하게되면 기독교는 사라지게 됩니다.   불교와 천주교 이슬람교 같은 종교만 남게됩니다.  그리고 그 아류 종교들로 전락하게될것입니다.  기독교는 천주교화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에 성경에 기록된 배도입니다.   지금도 천주교화 되어가고 있는데 바로  천주교화 만드는 프로그램이 셀/가정교회/알파/g12같은 은사주의가 있고 여기에 핵심세력은 신복음주의자들이라는 것은 무시할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벗어나면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구원을 무시하고  행위구원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무시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부모님의 몸에서 태어날수 없으면서, 자기 스스로 부모를 선택할수 없으면서  스스로 잘난척해서 부모를 선택할수 있다고 하는것이니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한심해 보이겠습니까?

 

행위구원/은혜구원의 논쟁은  벌써 오래전에 끝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우리는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것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신앙이고  여기서 한발자국이라도 벗어나지 않기를 정말 간절히 소망하는 바입니다.

 

만약  자신이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자라면?  스스로 의로와 질수 있다고 하는것인지? 한번 돌아보기 바랍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죄의 짐은 예수님에게 맡기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워주시는 가벼운 짐을 지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