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유익? 방언은 과연 성경적인가?
행복님.....
방언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유익한지 질문을 한것에 대해서 행복님의 고민을 들었습니다.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행복님 진짜 문제는 방언을 하는 사람의 신앙상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명예훼손이 되겠지만 온누리 하목사나 여의도 조목사나 큰믿음 모목사같은 경우에 그들이 추구하는 방언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가운데 방언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느끼고자 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곧 하나님의 뜻에 의한 방언이 아닌 자기확신을 위한 방언인것입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확실한 구원의 확인방법이라는것에 인간의 그 부족함을 이겨보고자하는 생각에서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방언을 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으로 삼고자 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방언의 개인적 유익은 그 방언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을 준다는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유익일 뿐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이 될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은 방언을 통해서 얻을수 있는것이 아니라 방언이 아닌것으로도 얼마든지 얻을수 있는 것임을 아셔야 할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얻는 방법은 하나님을 의지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방언을 의지하는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닌것입니다. 방언을 의지해서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것은 자기가 옳다는것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것입니다.
조목사가 자기가 방언을 하니 하나님의 사람임이 확실하다 변목사가 자기가 방언하니 내가 하나님의 사람임이 확실하다. 하목사가 방언을 하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임이 확실하다. 하는식으로 자기 확신을 위해서 방언이 수단이 되는것입니다.
방언을 하나님의 은사의 한부분으로 보지 않고 방언을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방법이 맞다는것을 주장하기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적 유익이면 유익이겠지만 결국은 방언을 하는 사람이 비성경적으로 성경에 반하는 일을 하더라도 자기의 성경해석이 옳고 하나님이 나에게 방언을 주셨으니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것이 무조건 틀리지 않다고 말하는 경우를 쉽게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과 성경해석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방언이 하나의 은사인것처럼 지혜와 지식도 하나님의 은사중에 하나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구별되어 있다는것을 생각하셔야합니다. 방언은 모든 은사중 맨 마지막에 나오는것으로서 지식과 지혜의 은사에 미치지 못하는것입니다. 지식과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밀리는것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표적을 추구하는 까닭입니다.
행복님!
행복님은 방언을 해서라도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싶으십니까? 만약 그런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를 낳을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내가 갖는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면 이미 구원얻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자들만이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진짜 우리 아버지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방언을 달라고 조르면?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방언을 주실수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가짜들도 방언을 가짜로 할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사단도 속이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즘 공부하는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끼양과 어린양의 구별입니다. 새끼양/어린양은 구별하기 힘듭니다. 이걸 구분하는 방법이 바로 언약과 구원론입니다. 행위구원론자들은 새끼양을 믿는 자들이고 은혜구원론자들이 어린양을 믿는 자들입니다.
행위구원론자들이 방언을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고 은혜구원론자들은 방언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행위구원론자들은 자기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받고 싶어하고 그것의 표적이 바로 방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구원론자들은 행위의 옳고 그름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음을 인정하기에 방언으로 확인받지 않고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것으로 믿음의 확신을 얻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짖는 우리의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믿는것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해서 뭔가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들 정말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방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불쌍한 사람들중에 한사람입니다. 방언한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정말 더더욱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아도 그것을 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방언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더욱더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제 이 기독교안에는 새끼양을 믿는 자들과 어린양을 믿는 자들로 나뉘어 있습니다. 행복님은 참 어린양되시는 예수님 우리를 보혈의 피로 깨끗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그 나라를 얻을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을 북방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이스라엘을 북방땅에서 구원하여 인도하실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본향으로 향하게 하신것처럼 북방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복지로 향하게 할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부르짖을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땅에 재림하실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그 백성의 소원으로 말미암음입니다.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르고 찾을때 하나님이 이땅에 오실것입니다. 그날이 가까웠습니다.
행복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언약의 사자가 되어 우리를 유대인과 하나되게 하시기위해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성령님은 바로 우리를 유대인과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아야 할것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자들이 반유대주의자들이고 반유대주의자들은 천주교 로마의 신앙을 가진자들입니다. 로마교에서 주는 세례는 짐승의 표를 받는것이고 짐승의 표를 받는자들은 세례명을 통해서 구별되는데 바로 새끼양을 믿는 자들은 이렇게 구별되는것입니다. 새끼양과 어린양은 구별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분방법은 유대주의를 반대하느냐 아니면 유대인들을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반대하시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택한 백성들중에 하나되게 하신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었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자랑하여 이스라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것을 성경에서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보다 나을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한백성들과 하나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행복님!
방언은 하나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이단자들이 자기의 논리를 맞추기 위해서 방언을 추구하는것입니다. 천주교도 방언하고 불교도 변음을 합니다. 정신을 잃고 중언부언하는것이 방언이고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지껄이는것은 결국 아무런 유익이 없는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더라도 너무 기뻐하지마시고 골방에서 조용히 기도하시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우리말로 사람들과의 기도에서도 우리말로 해야 할것입니다.
그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방언보다 예언을 기뻐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요! 유익한 말로 다섯마디 하는것이 일만마디 방언하는것보다 더 유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