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운말씀/은혜 로운 말씀

행위로 믿음을 증거하라고 강조하시는 분들에게......

빛의열매 2010. 1. 4. 17:40

님들의 글은  뜬 구름잡기입니다.  선한행위가 믿음을 증거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삼손은? 선한 행위를 얼마나 했을까요?

다윗은 얼마나 선한행위를 했을까요?

솔로몬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선한행위라고 할때의 그 행위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부터 알아야 하는것입니다.

 

믿음에 의해서 행해지는 선한행위는 인간의 판단에서 오는 착한 행실을 의미할까요?

물론 그것도  맞는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에서 오는 착한 행실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착한 행실이 아닌것입니다.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우리가 판단할때  아 저사람은 착한 사람이니? 구원받은 사람!

믿음있는 사람!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니 저사람은 믿음없는 사람 구원얻지 못한 사람!

이렇게 판단하게 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욕을 좀 많이 합니다.  그러면 저는 구원받은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 악한 자로서 악한 행위를 하는 자일까요?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보면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글을 쓸때는 항상  무엇이 선한 행위인지를 염두해 두어야 하는것입니다.

삼손의 행위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악한 행위입니다. 왜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는 선한 자였습니다.

다윗의 행위는 어떻습니까?  그도 만만이라고 부를만큼 살생을 많이 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를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을때에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선하다고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곧  믿는자들의 가장 큰 선한 행위는  바로  회개인것입니다.

회개한자는 곧 믿는 자이며  믿는자는 마땅히 회개하게 되는것입니다.

 

자기의 행위로는 절대로 선한 행위를 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곧 회개하여 우리가 하는 행위가  우리의 선한 행실이 아닌 그리스도의 행위가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곧  복음이라는 것이  죄에대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의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자들로서

우리의 행위는 나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행위가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가 은혜를 더하고자 죄에 거하는것은 그리스도를 또다시 십자가를 지게 하는것으로서

그렇게 할수는 없는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한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선한행위를 자랑하는 자들을 모른다고 했고

오히려 선한일을 행한적이 없다고 한 자들을 향해서 형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때의 선한행위가 어떤것인지를 설명하지 않으면서

행위로 믿음을 증거하라고 하는것은  한마디로말해서 정죄인것입니다.

 

당신의 행위는 악하지  당신에게 믿음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판단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 자격을 주지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한다는것은

결국 나는 선한행위를 하고 있고 당신은 아니니 당신이 구원받은 자로서 증거하라고 하는

일종의  협박이며 정죄인것입니다. 

 

진정 참된 선행이 어떤것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악한자인지를 바로 알고 이웃의 눈에 티를 빼려고 하지 않고

내눈의 들보를 빼려고 하는 자들만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것입니다.

 

행위로 믿음을 증거하라는 그 글의 내용에  과연 선행이 어떤것인지 무슨 기준에 의한것인지?

설명이라도 제대로 하셨습니까?

 

무조건 선행? 착한행실? 이  믿음의 증거인냥 말하고 있지만 실상 하나님앞에서는 그것이

구원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앞에서 구원의 증거는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는가! 라는 것입니다.

곧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대해서 산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죄와 의를 제대로 판단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악한것이 죄라고 하겠지만 선한것이 죄가 될수도 있다는것을 아십니까?

나의 선행이  남에게 정죄가 되어서는 안되는것입니다.

나의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악행이 될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선행이 될수 있듯이!

나의 선행이 어떤 이에게는 선행이 될수 있지만 또한 어떤이에게는 악행이 될수 있는것처럼.....

 

선행과 악행의 판단기준을 우리는 확실히 가져야 하는것입니다.

그리서 성경에서는 선행과 악행의 판단기준을  정확히  확정짓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열매라고 말할때의  그 열매는 행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곧  눈에 드러나는 행위로서의 열매는 믿음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는 어떤것입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오래참음과 절제입니다.

 

이것이  드러나는 열매일까요? 

 

그래서 성경에서  착한 행위를 설명할때  오른손이 하는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는것처럼...

드러나지 않는 착한 행실이 얼마나 많은지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믿음을 가지면 마땅이 가져야하는 열매입니다. 죄와 단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와 단절을 선언하는 회개는 드러나는 것입니까?

남들이 알지못하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의 부분까지 걸고 넘어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자라?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기 이전에 먼저 회개했는지부터 돌아봐야 할것입니다.

나는 회개했는데 왜 당신은 회개하지 않느냐?

회개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건 하나님과의 관계이니 제3자가 파고들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조언의 차원이면 거기까지 해야합니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대라!  오리를 가달라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

오래참고  절제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는것이 바로  신앙인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남들이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쌓이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소금이 그 맛을 감추지 못하고  빛이 그 빛을 감추지 못하듯이......

 

아 저사람은 참 온유한 사람이야!  저사람은 오래참는사람이야....저사람은 절제할줄 알아...

저사람은 참 선한 사람이야  저사람은 참 충성된 사람이야! 한결같이 변함없어.........

 

그런데  이것을 알수 있는건 관계입니다.  사람이 관계를 맺지 않고는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한번 만나서 판단할수 없고  두번 만나서 판단할수 없으며  수십번 만나서 하나하나 판단해 나가는것이

바로 관계인것입니다.  이 관계를 통해서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되는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도 없이  무조건  행위없이 믿음없고  구원이 없다는 식의 말을 하는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허공에다가  외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는것입니다.

 

이런 글을 쓰기 이전에  우리의 선행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먼저  같이 소통하고 나누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삶에서 느끼는  것들을 나눔으로서  그것이 서로 소통이되고 하나가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로이드 존스의 글들이나  훼퍼의 글들  웨슬레의 글들이  나를 유익하게 하는데는 소용이 있지만

남을 유익하게 하는데는 별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글을 남들에게 권하고 읽게하는것은 좋지만

그 글을 읽고 내가 감동받아서 그 감동으로 남에게 얘기 해주는것은 별로 남에게 감동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차라리 그럴바에  로마서에서 감동받은 성경구절 한구절 적는것이 더 유익할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감동받은 성경구절 한구절 적는것이 더 유익할것입니다.

 

그들의 글을 읽고 감동받았다면  그 감동으로 말미암아 내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적는것이 더 유익할것입니다.

내 삶이 이러했는데 이렇게 바뀌었다! 

나는 골초였는데 담배를 끊었다던지  아니면  여자를 보면  성욕을 느꼈는데 이제는 여자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보인다던지.......나는 술만먹으면 마누라를 팼는데  이제 술을 끊고  아이들을 사랑하게 됬다는지......

 

그들의 글을 통해서  변화된 내 모습을 발견하는것이  더  이웃과 소통하는것이며

사람들과 감동을 나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골초였는데  예수님믿고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지만 조금씩 줄이고 있다든지 하는 글을 쓰면...

얼마나 많은 분들과  공감을 갖게되며 유대감을 느끼게 될까요?

내가 성질나면  전에는 내 주먹이 그냥 가만히 안있었는데  지금은 성질나면 조금 참고  인내하게되었다는것.....

얼마나 유익한 감동이 될까요?

 

저는 이런 경험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늘 하는 말중에   나는 선하게 살았다! 라는 말을 이제 하지 않는것이 바로 내가 변한것이라는 겁니다.

옛날에는 내가 선하게 살았다는 말을  자주했는데  그것이 결코 이웃에게 소통이 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담배도 안피우고  술도 안먹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고  금욕하며  오래참으며 살아왔는데.....

이제보니  그것이 자랑은 아니었더라!!  왜냐하면  그건 당연한것이기 때문에....당연한것을 왜 자랑했을까?

그런데  이 당연한것을 못하는 자들에게  자랑하니  그들을 향해서 내가 정죄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것입니다.

 

담배 안피우는것이 당연한것인데  피우는 분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요?  안피우는것은 당연하지만 피운다고 죄는 아닙니다.

술을 안먹는것도 당연한것이지요.  그러나 술을 먹는다고 그것이 죄는 아닙니다.  외 그게 죄가 될까요?

그 이후의 것이 죄가 되는것입니다.   열받아서 성질날때 담배피우면서 오래 참는것? 그것이 오래참는것은 아니지요.

담배의 마취성분을 이용한 것이기에  성령의 열매와는 다른 것입니다. 

 

곧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희락안에서  기쁨으로 인내하고  견디고 절제하는것이지....

또다른 도구를 이용하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의지하고 술을 의지하는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것이 더

옳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믿음이 연약하면 담배도 술도 의지할수 있지만 이 빈도수가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빈도수가 담배와 술을 의지하는 빈도수보다 높아져야 하는것이지요......

 

이것이 성숙입니다.  변화인것이지요!  이 변화가 바로 믿음인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았다고  믿음이 없다? 

옛날에 하던 버릇때문에  지금 당장 그것을 끊지 못하니  차라리  하나님을 안믿는것이 낫겠다고 포기하고

옛날로 돌아가자!!  왜? 이런일들이 벌어질까요? 

 

하나님이 원하는 행위  참된 행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이 이웃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의 천사인  사단........그는 하나님과 똑같은 빛을 가진 자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단의 명령아래 많은 거짓빛이 활동하고 있는데  불교부터.......그것을 하나님은 선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악한 종교소리 듣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선하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안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우리가 악하다는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악한곳에 두지 않고  날마다 변화시켜  나아갈 것입니다.

하루하루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으로  날마다 새로와지는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하루아침에 뚝딱 선한 사람을 만들어내는것이 아니라 

십년 이십년 삼십년.......변해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  수십년을 변함없이 사는 자들은?

저도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

한번 자기를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조금이라도 변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더욱더 하나님앞에 설때까지  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어  그리스도가  내안에서 살아  그리스도의 참된 향기가 나타나...

세상이 아름다워질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변해가려고 하는 노력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와 함께계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정말 어렵지 않는 삶을  살아갈수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쉬우면서도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