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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성 경 공 부

[스크랩] 하나님의 언약과 공예배 / 이광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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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언약과 공예배

 

이광호 박사(홍은개혁신학연구원 교수)


1.서론

 

우리 시대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행위는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나아가 다수의 현대 교회들은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예배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순종의 행위이며, 인간들의 즐거움을 위한 종교적 축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를 위해서는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치중해서는 안된다. 올바르고 참된 예배에 대한 승인은 인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 가운데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즉 인간들의 정성이나 자기 취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요구된다. 죄로 가득 찬 인간의 정성은 그것 자체로서 예배를 위한 기본 바탕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예배의 중심 자리에 인간들의 취향이 가미된 종교 행위 자체가 두드러지거나 인간적인 목적을 추구하려는 의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적 공간이나 예배시간 자체를 화려하게 꾸미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그것은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인간들 자신의 종교적 만족을 꾀하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그와 동일한 관점에서 즐거워하시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들은 노래 가락과 춤사위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들이 꽃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그런 것들을 좋아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한 분만을 기쁨의 대상으로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화목제물로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성도가 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인간적인 결단이나 정성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때문이다.

매주일 하나님께 공 예배를 드릴 때 요구되는 중요한 외형적 요소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경건한 자세이다. 그것은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을 배경으로 한다. 각종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개발된 종교적 요소들을 첨가하는 것은 인간들의 죄악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교훈하고 있는바 의미들을 살펴 그에 기초하여 올바르게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애써야 한다.

 


2.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오해를 했던 예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했다. 그러나 무지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요구를 뒤로 한 채 자신들의 인간적인 열정과 정성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다. 우리는 비신앙적인 그런 사건들을 면밀히 살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음으로써 그와 같은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 시내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경배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있었던 여러 재앙들을 직접 경험했으며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넜다. 그리고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바라보는 가운데 살았다. 나아가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계심을 확인하며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이 아니라 저들의 판단과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며 증오하시는지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해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부르셨다. 모세가 시내산 위로 올라간 후 백성들은 산아래서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저들이 예상하던 시기가 되어도 모세가 돌아오지 않자 조급증이 생겨났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의 판단과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준비를 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의 핵심에는, 저들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데 모세가 늦게 내려옴으로 말미암아 그 일이 중단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심중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열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조급증으로 인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모세보다 훨씬 헌신적이며 화려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했다. 이는 그동안 모세가 행하던 경배 방법에 대한 불만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백성의 장로들은 모세 다음의 지도자였던 아론을 찾아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가장 화려한 방법을 동원해 하나님을 경배하자고 제안했다.

 

아론은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금붙이들을 가지고 오도록 했다. 아론 역시 장로들의 판단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할 때 애굽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금붙이들이 많이 있었다.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신앙행위라 선전했을 것이 분명하다. 무지한 백성들은 아론과 장로들의 요구에 그대로 순종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론은 그 금붙이들을 모아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야 할 바는 그들이 우상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금으로 된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지금까지 저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가시적인 방편으로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가시적인 형상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금송아지를 다 만들고 난 아론은 그 이튿날을 '여호와의 절일'로 선포했다. 여호와의 절일로 선포된 이튿날이 되자 백성들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축제를 벌였다. 저들의 마음이 매우 즐거웠을 것은 틀림없다. 자기들이 바친 금붙이로 만든 가시적인 형상을 가진 금송아지 앞에서 번제와 축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그들의 마음이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원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금붙이를 바치고 하나님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하나님은 마땅히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민감한 요구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판단과 취향에 따라 종교적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저들에게 기쁨과 만족이 충만했던 것과는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자기를 버리고 악을 행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산에서 내려가 그들이 만든 우상을 파괴하도록 명령하셨다. 물론 모세는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산 아래서는 백성들이 잘못된 경배행위를 하며 종교적 만족에 취해있을 때 산 위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증스럽게 보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당시의 신앙적인 또 다른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것은 아론과 백성의 장로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방편으로 집에 있는 금붙이들을 가져와 바치도록 요구했을 때 그에 순종하는 것이 과연 옳은 신앙자세였던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성도라면 그들의 요구에 저항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모든 백성들이 기쁨으로 금붙이들을 바칠 때 그에 거부하는 자들이 있었다면 저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함께 상당한 갈등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기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들의 결단이나 취향에 따른 종교행위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참된 예배인지 분명한 확인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즐거워하고 만족스러워하는 것은 자칫 가증스런 종교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신약시대의 예배

 

우리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 사도교회 시대의 예배 형태를 주의 깊게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의 몸이 지성소에 바쳐졌음이 입증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십자가 사역 이후에도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가 여전히 살아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물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서 의미는 완성되었지만, 성전의 구속사적인 의미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으며(행 2:46), 베드로와 요한은 정해진 시간에 성전을 방문했다(행 3:1).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기도 했다(행 21:26).

 

이러한 사실은, 사도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언약적 의미를 기억하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전 세계의 이방지역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 역시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예루살렘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 본질적인 의미와 더불어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행 2:46)라고 기록된 부분의 ‘성전’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며 ‘집’이란 예배를 위해 특별히 모이는 성도들의 가옥으로써 오늘날의 예배당을 뜻한다. 사도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였던 것은 정례적인 집회를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도리어 성도들이 때에 따라 성전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집’에서 모인 것은 예배를 위한 모임이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독립건물로서 예배당은 없었다. 성도들은 약속된 성도의 집에 모여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여기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말은 성찬의 나눔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찬미했다’는 의미는 성경에 기록된 언약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미했을까? 오늘날 우리처럼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을까? 그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하신 구원 사역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임을 고백적으로 노래했던 것이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말씀을 나누며 기억했을 것이며, 그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인해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노래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하고 공유적인 삶을 나누었던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에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세례 받은 성도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온전히 힘썼음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는 단순한 교육차원이 아니라 교회에서 그것이 지속적으로 선포되고 상속되어 가야 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주 구약성경의 내용과 사도들의 가르침이 지속적으로 선포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나누며 온전한 기도에 힘썼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오늘날 우리시대에 만연한 개인 혹은 집단적인 욕망 채우기로 변질된 기도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기도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이 세상을 포기하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그 안에서 살고자 하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한다.

사도교회 시대에 성도들을 통한 많은 이적들이 일어났던 것은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음과 연관된다. 그들은 사도들을 통한 모든 이적들과 가르침들을 배경으로 하여 올바른 예배를 드렸을 때 저들의 신앙적인 삶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그렇게 했을 때 교회의 칭찬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교회 시대의 공 예배는 직분과 더불어 점차 안정된 형태로 발전해 갔다. 사도들의 수가 줄어들고 교회의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안정된 공예배의 형태가 갖추어져 갔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에 대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교회로 모여 떡을 떼며(고전11:18-34), 찬송시(讚頌詩)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며 다양한 은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여기서 우리는 사도교회 시대의 예배절차와 내용에 관한 것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절차와 질서가 있었다. 즉 무질서하게 생각나는 대로 행동했던 것이 아니라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질서 있게 예배가 진행되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예배절차 역시 성경에 기록된 사도교회 성도들의 본을 따라 정해진 것이다. 이는 직분의 기능과 더불어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예배의 근본이다.



4. 보편교회 시대의 예배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사도교회 시대가 끝이 나고 보편교회 시대가 도래했다. 이때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완성되고 모든 계시적 은사들이 종료되었다. 그러므로 예배의 형식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갔다. 사도교회의 예배 시에 있었던 모든 절차들 가운데 특별은사와 연관된 내용들 은 말씀과 성령으로 통합되었다. 사도교회에 있었던 예언, 방언, 통역의 은 사 등이 더 이상 예배 절차 가운데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즉 보편교회 시대의 예배에서는 말씀선포, 성찬, 기도, 시편찬송, 언약에 대한 상속의 확인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보편교회의 예배 가운데는 구약시대의 모든 예배와 사도교회 시대 예배의 의미가 총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성전예배와 절기예배, 안식일을 통한 상시적 예배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사도교회 시대의 특별 은사적인 예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예배와 관련된 모든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의 공 예배 가운데 드러나게 된 것이다.

보편교회 시대의 예배는 오로지 성경과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다. 이는 단순히 관념적인 말이 아니다. 교회는 성경과 성령을 통해 예배를 드려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가운데서 매주일 되풀이되는 공 예배를 통해 역사적 교회의 상속을 이어가게 된다. 즉 매주일 행해지는 공 예배를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역사 가운데 상속되어 가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세속적인 가치로 인해 예배가 오염되는 것을 정신 차려 방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교회에는 유년주일학교, 소년부, 청년부, 장년부 등의 각종 교육기관들이 있다.

교회의 교육기관은 단순히 종교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리고 비슷한 연령 대에 있는 교인들을 따로 모아 분위기를 활성화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교회에 교육기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주일 공예배에 참여해야할 의무가 있다. 다른 교육기관이나 각종 부서들의 모임은 원리적으로 보아 예배 모임이 아니라 교육을 위한 모임들이다.


특히 한국교회의 유년주일학교나 중고대학생들의 모임이 마치 예배모임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한 모임은 예배모임이 아니라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말씀을 공부하는 교육적인 모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것으로서 예배를 대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적으로 시정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인 집회인 수요모임이나 금요모임, 새벽기도 모임 등 역시 주일 공 예배에 연관되어 있다. 그런 모임들은 교회의 공 예배 모임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성도들이 교회적인 약속에 따라 기도회를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신앙적인 삶들은 근본적으로 참다운 공 예배를 위한 목적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매주일 시행되는 교회의 공 예배에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거기에는 나이 어린 영아들과 유아들 뿐 아니라 태중에 있는 아이들도 참여해야 한다.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자들로 인정된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유년주일학교를 비롯한 그 보다 높은 연령 대에 속한 모든 학생들도 마땅히 진지한 자세로 공 예배에 참여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것을 위해 성도들은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익히며 별도의 모임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피게 된다. 즉 그런 모든 모임들을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법을 배워 익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외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성찬의 의미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5. 결론


교회의 공 예배를 회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도들의 모든 삶은 공 예배에 그 끈이 매여져 있기 때문이다. 공 예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면 교회가 아무리 외형적 성장을 이루어간다 할지라도 사상누각(沙上樓閣)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공 예배는 개별적이며 자의적인 종교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숙한 성도들은 자기의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려는 종교적인 태도를 버리게 된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적 반응이어야 한다. 잘못된 인본적인 예배는 인간들에게 만족감을 제공하고 종교적 자부심을 느끼게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도리어 욕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말씀선포와 성례, 권징사역이 없는 공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앞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진심으로 ꡐ여호와의 절일ꡑ을 선포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욕된 행위였을 따름이다. 그들이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생각하고 모든 정성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우상숭배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아래서 하나님을 경배한다며 종교적인 즐거움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산 위에서 진노하셨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ꡐ하나님의 이름ꡑ을 부르며 성전제사에 충실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생각하며 종교적인 행사에 최선을 기울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ꡐ독사의 자식ꡑ들이라며 독설을 뿜어내셨던 것이다. 그들은 종교적 경배행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급을 기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더러운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이러한 예는 구약시대 제사행위자들 뿐 아니라 신약시대의 교회 역사 가운데서도 수없이 있어왔다. 성경을 통한 충분한 교훈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이제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 시대는 인본주의적 사고가 교회 가운데 넘쳐나는 매우 악한 시대이다. 어린 교인들은 자기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면서,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종교적 분위기 속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통해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전에 과연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대로 예배가 준비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참된 예배의 목적은 인간들이 즐거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들이 아무리 즐겁고 만족스러워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현대교회에 만연한 대중화된 예배 형태를 극히 경계해야만 한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옛.믿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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