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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말씀/개혁해야할신앙

[스크랩] 목회자 윤리를 평신도에게 강요하지 말라

원래 권한이 많으면 많을수록 책임이 그만큼 커질 뿐만 아니라 마땅히 따라야 할 윤리도 그만큼 높아진다. 얼마 전 국무총리가 3.1절에 골프를 쳤다고 국민들의 입방아에 오르자, 청와대까지 나서 국무총리도 개인 자격으로 골프를 칠 자유가 있다고 ‘코드가 맞는, 그것도 능력 있는’ 국무총리를 보호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국민들의 정서는 달라, 결국 그는 총리 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공직을 갖지 않은 일반 시민이 3.1절에 골프를 쳤다면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3.1절에 골프를 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골프를 친 사람이 국무총리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위 공직자에게는 지켜야 할 윤리가 일반 시민보다 더 높고 또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일반 도덕’이 있는 반면에, 또 그 지위와 신분에 따라 요구되는 ‘특수 도덕’이 존재한다. 이 두 종류의 도덕을 구분하지 못하고 많은 공직자들이, 심지어 대통령마저도 “왜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나만 안 된다는 말인가?”라고 억울해 한다. 원래부터 도덕에는 이런 특수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하소연은 상식에 맞지 않는 억지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권한과 지위에 따라 윤리는 달라

또 동일한 행위에 대해서도 그 행위자가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졌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같은 거짓말이라 해도 대통령이 하는 거짓말과 일반 서민이 하는 거짓말은 그 윤리적 평가가 다르다. 실제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도청을 한 다음 ‘도청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탄핵을 받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래서 공직자를 임명할 때 모든 나라에서는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성을 중요한 선발 기준으로 삼고 있다.

많은 능력 있는 인재들이 이 근본 진리를 망각하고 공직에 오른 다음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아 물러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현행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일반 시민의 부동산 투기를 우리는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고위 공직자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기에 동일한 부동산 투기도 공직자에게는 도덕적 하자가 될 수 있다.

이는 비단 사회적 신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일반 기독교 윤리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교회 직분에 따라 요구되는 특수 기독교 윤리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구약의 나실인은 포도주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헌신하기도 다짐한 나실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곧 나실인의 도덕적 의무와 일반인의 도덕적 의무가 다름을 말해준다.

이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디도서에서 장로와 감독의 특별한 자격 기준을 말한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딛 1:7) 이처럼 일반 성도와 달리 감독에게는 더 엄격한 도덕이 적용되었다.

목회자, 더 높은 도덕이 요구돼

구약의 나실인이나, 감독은 오늘날 목회자에 해당된다. 즉, 오늘날에도 일반 평신도가 지켜야 할 윤리와 장로와 목사 등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지켜야 할 윤리는 서로 다르다. 얼마 전 이곳 미국의 한인교회가 분열되어 설교목사를 담당한 적이 있다. 두 달 지난 다음 교회 청빙위원회가 나에게 담임목사 청빙을 정식으로 제안하였다. 목회, 그것도 이민목회를 한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정말로 중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어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그런데 청빙위원들이 한결같이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이곳 미국에서 목회하는 게 한국에서 교수 생활하는 것보다 낫다고 청빙수락을 부탁하였다. 물론 청빙위원들은 좋은 의미로 그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한 나의 결론은 달랐다. 일반 평신도는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직장을 한국이든 미국이든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를 지닌다. 하지만, 임지 선택의 자유를 지닌다 해도, 목회자는 적어도 자식을 위해 자신의 임지를 결정할 수 없다. 주객이 전도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민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교인들로부터 푸대접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입국한다. 목회자 자신은 현지에서 언어 장벽으로 인해 수준 높은 신학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반면에, 자녀들은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할 뿐만 아니라 아주 만족한 학교생활을 한다. 이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나면 자녀들은 이미 미국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게 되어 한국의 입시 지옥을 두려워한다. 사실 미국에 몇 년 살다 한국에 들어가면 중고등학교 교육을 따라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한국에 들어가고 싶지만 자녀들 때문에 미국에 체류하게 된다. 결국 많은 목회자는 특별한 사명이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 더군다나 자녀를 위해 이민목회에 발을 내딛으니 어찌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가? 이는 비단 이민 교회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한국의 목회자가 현재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 역시, 목회자들에게 요구되는 차원 높은 윤리적 의무를 외면하기고 있기 때문이다. 즉, 더 높은, 더 엄격한 윤리가 적용됨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그저 일반 평신도처럼, 아니 비그리스도인과 똑같은 윤리적 잣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목회자의 윤리를 평신도에게 강요해서는 안돼

목회자의 윤리와 평신도의 윤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행위에 대해서도 목회자에게는 더 엄격한 윤리적 잣대가 적용된다. 평신도는 더 많은 돈을 주는 곳으로 직장을 옮길 수 있다. 하지만 목회자가 이와 똑같은 논리로 교회를 옮기는 것은 욕을 얻어먹어 마땅하다. 목회자는 돈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거짓말이나 약속 불이행을 해도 목회자의 경우 더 많은 윤리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많은 목회자들은 목회자 역시 인간으로 프라이버시가 있고 자유가 있다고 응수한다.

이 역시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나는 왜 안 돼?”의 심리와 똑같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위 대형교회 목회자로서 자칭 교계 지도자인 경우 더 엄격한 윤리적 기준이 적용됨을 잊어서 안 된다. 현재 일부 목회자들의 불륜이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것 역시 마찬가지이치이다. 물론 일반 평신도의 경우에도 불륜은 윤리적으로 그릇된 행위이지만, 목회자의 경우, 그것도 ‘기독교계 어른’이라고 자부하는 목회자의 경우 불륜은 더 큰 윤리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목회자의 윤리와 평신도의 윤리 혼동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나는 이처럼 목회자의 윤리를 평신도의 윤리로 평가절하 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평신도의 윤리를 목회자의 윤리로 평가절상 하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목회자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목회자의 윤리를 평신도에게 강요하는 일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사도 바울이 일평생을 선교에 헌신한 것과 사무엘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을 섬긴 것을 예로 들면서, 우리 모두 선교와 교회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증거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의 일은 아무 소용없으니 오직 주를 위해 선교와 교회 봉사에 충성할 것을 강요한다.

일반 직업이 곧 성직이다

물론 선교와 교회 봉사는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사도로서 바울의 의무요, 제사장으로서 사무엘의 의무이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이는 사도로 혹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의 의무이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아니다. 이에 대해 개혁교회의 만인제사장설을 들어 모든 평신도도 이러한 의무를 지닌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만인제사장설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제기된다. 개혁교회가 말하는 만인제사장은 직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제사장을 의미한다.

즉, 만인제사장이란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라는 중보자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용서와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의미이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일평생을 제사장의 직임을 수행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만약 후자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이 없이 교회 헌금으로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구약의 제사장은 땅을 분배받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 음식’을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사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100%를 헌신한 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에 부름을 받았다. 목회만이 성직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성직이라는 종교개혁가의 말처럼, 평신도들은 직장 내지 자신의 일에 헌신할 의무를 지닌다. 그럼에도 교회가 목회자의 윤리를 일반 그리스도인에게 강요함으로 말미암아 좋지 못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소위 믿음이 좋다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직장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선교를 강조하는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선교사로 나가든지 아니면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지구를 떠나라.” 이처럼 선교와 교회 충성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래적 의무라면 당연히 우리는 이 일에 자신의 인생을 투자해야 한다는 결론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목회자의 질’은 높아졌는지 모르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질’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교회봉사 못지않게 직장 일도 중요하다

목회자 윤리를 평신도에게 강요함으로 빗어진 또 다른 병폐는 가정과 직장의 일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소위 믿음 좋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직장 일을 팽개치고 교회 봉사를 우선으로 여기고, 심지어 주부 그리스도인이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교회 일에 매달리기도 한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교회에서 노회가 열려 차량봉사 요원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A 집사는 마침 그날 회사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어 교회에 가지 못했다. 그러면 A 집사를 믿음 없는 자라고 매도할 수 있는가? 그 답은 ‘아니다’이다.

A 집사를 믿음 없는 자로 매도하려면 교회 봉사는 믿음과 연관된 영적인 일인 반면에, 회사 미팅은 이기적 욕망에 따른 세상 일이라는 이원론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이원론은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세상은 속된 곳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직장 역시 성직이다. 교회 일이라고 무조건 영적인 일인 것이 아니며, 또 세상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속된 일인 것이 아니다. 교회 일 못지않게 세상 일도 중요하다. 목회자에게는 교회 일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일반 그리스도인에게는 교회 일보다 직장 일이 얼마든지 더 중요할 수 있다.

목회자의 윤리를 일반 평신도에게 강요함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과 가정에서 보내야 하는 수많은 평신도들이 존재 의미를 삶의 현장에서 찾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이나 가정을 단지 선교와 교회봉사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든지 돈을 벌어 선교여행을 떠나고 또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으로 직장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으로 가정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직장과 가정을 교회보다 열등한 일로 간주하기 때문에, 직정과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윤리의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가 발생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불행이요, 한국 기독교의 병폐이다. 목회자는 교회 성도를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평신도는 직장과 가정에서 만나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불필요한 죄의식 강요

마지막으로 목회자의 윤리를 강요함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필요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사실 요즈음처럼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사업을 경영하거나 직장 생활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회사 일이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교회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목회자의 윤리를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생각이 몸에 베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참다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물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적극적인 일을 하고 싶은 열망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직장이나 가정에 충실함으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 곧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래서 일부 목회자는 평신도들에게 불필요한 죄의식을 심어주어 이를 갚는 길로 헌금을 은근히 강요하기도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종종 듣는, 직접 선교와 교회에 충성하지 못하면 헌금을 드림으로 똑같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물론 성경 속에서는 선교와 성전 봉사에 자신의 전 생애를 헌신한 믿음의 선조도 있다. 구약의 사무엘이나 엘리야, 그리고 신약의 바울이나 베드로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성경 속에는 그저 자기 생활에 충실한 믿음의 선조도 많다. 이삭은 무슨 특별한 일을 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룻이 성전을 위해 무슨 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다만 시어머니를 섬기다가 보아스를 만나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지 않았는가? 한나 역시 가정에 충실하였을 따름이다.

심지어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승천한 에녹 역시 이 땅에서 무슨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장가들과 아들 낳고 이웃과 더불어 산 것밖에 없다. 십계명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면서, “여샛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육일 동안은 자신의 일, 즉 직장이나 가정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일반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윤리적 의무이다. 이제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초점이 달라져야 한다. 목회자의 윤리를 평신도에게 강요하지 말고, 일반 그리스도인이 삶의 현장에서 마땅히 지켜할 할 기본 윤리를 선포해야 한다. 교회에 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생활에 강한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김상득 / 전북대 철학과 교수
출처 :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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