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용의 조직신학
김명용 교수(장신대. 조직신학)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
성령론의 바른 길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가난한 자 위한 법과 제도 마련하신 하나님
성서의 하나님은 곤경 속에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는 채무자가 채무로 인해 겉옷까지 담보로 잡혀 밤의 추위를 막을 길이 없는 가련함을 기억하시고 “해질 무렵이면 그 담보물을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그 옷을 덮고 자리에 들며 너희에게 복을 빌어 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의로운 일이다”(신 24:10-13)라고 명하고 계신다. 성서의 하나님은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와 농토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가련함을 기억하시고 “너희가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 들일 때 너는 네 밭의 모서리까지 모조리 거두어 들이지 말라. 그리고 거두고 남은 이삭은 줍지 말라. 네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라. 가난한 자와 나그네가 따먹도록 남겨놓아라”(레 19:9-10)라고 명하셨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성서의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정의했다.
여호와는...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시는도다(시 146:6-9)
성서의 하나님이 하시는 매우 중요한 일이 곤경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일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곤경 속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고 억울한 사람을 위해 신원하시는 분이시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보호해 주시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68편 6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갇힌 자에게 행복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시다. 시편 14:6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피난처로 정의되어 있다.
하나님은 곤경 속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시편기자에 의하면, 왕은 곤경 속에 있는 자의 보호자여야 한다. 왕은 약한 자의 권리를 세워주고(시 72:2), 백성들을 억압하는 자를 쳐부수고(시72:4), 빈민들을 구제해야 한다.(시72:4)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는 일에 상응하는 행위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긴다는 것은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곤경 속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활동에 상응하는 사회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5-17)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를 먹이지 아니하는 교회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 사회 봉사 신학이 살아있지 않은 공동체는 죽은 교회요, 죽은 공동체이다.
구약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법이나 희년법을 살펴보면 가난을 제도적으로 없애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살펴볼 수 있다. 7년마다 한번씩 종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출 21:1-2, 신 15:12-15)이나 빌린 돈을 탕감하라는 명령(신 15:1-2)은 가난의 영속성을 단절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잘 반영되어 있는 규정이다. 또한 7년이 일곱 번이나 지난 다음 해에 오는 희년이 되면(50년째 되는 해)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제 소유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규정 역시 영속화될 수 있는 가난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그 속에 들어 있다. “네 동족 가운데서 누가 옹색하여 제 소유를 팔았을 경우에는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와서 그가 판 것을 되돌려 살 수 있다. 그것을 되돌려 살 친척이 없는 경우에는 그가 나중에 스스로 힘이 생겨 되돌려 살 길이 트이면 판 다음에 지나간 햇수에 해당되는 값을 빼고 나머지를 그 땅을 산 사람에게 물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소유지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되돌려 살 만한 돈이 손에 오지 않으면 그가 판 것은 희년이 오기까지 그것을 산 사람의 손에 남아 있게 된다. 그랬다가 희년이 되어 해약되면 그는 제 소유지로 돌아갈 수 있다”(레25:25-28) “오십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레25:10)
“너희와 함께 사는 너희 동족 가운데 누가 옹색하게 되어 너희에게 몸을 팔았을 경우에 너희는 그를 종 부리듯 못한다. 너희는 그를 품꾼이나 식객처럼 데리고 살며 일을 시키다가 희년이 되면 자식들과 함께 집에서 내보내 자기 지파로 조상의 소유지로 찾아 들어가게 해야 한다” (레25:39-40) 우리는 이상에서 희년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희년법은 가난으로 종이 되어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그 가난의 사슬을 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드신 제도이다. 물론 이 희년법이 역사적으로 거의 지켜지지 못했지만 영속화되는 가난을 제도적으로 막아보려는 하나님의 의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가난한 동족에게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레25:35)는 규정 역시 가난한 자를 보호하고 그에게 살 길을 열어 주기 위한 또 하나의 하나님의 법이다.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살리기 위해 법과 제도를 마련하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회가 개인적인 동정의 차원에서만 가난한 자의 문제를 취급하고, 법적인 제도적 차원으로까지 발전시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신 성서의 하나님의 의지와는 상당한 부분이 상충된다고 할 수 있다. (2006. 2. 18. 크리스천투데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
삼위일체론의 첫단추를 바르게 꿰라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가운데 성도들을 가장 당혹케 하는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세 분 하나님이 한 분이 되고 한 분 하나님이 세 분이 되는 이 이상한 교리는 많은 사람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하기도 하고 또 세 분 하나님을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양태, 곧 양태론적 방식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는 어떤 신비일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떠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일까?
I.삼위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삼위되심을 이해할 때 첫째로 중요한 것은 삼위라는 말의 뜻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이다. 한국 내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삼위되심의 삼위를 세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셋이긴 하지만 세 분이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빨리 버려야 할 사고이다. 많은 경우에 삼위는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은 초대 교회가 이미 이단으로 규정한 사벨리우스 이단, 곧 양태론 이단으로 흐르는 사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되심을 세 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첫 단추를 잘못 꿰고 있는 사람들이다.
20세기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세운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거의 폐기된 삼위일체론을 재건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참 모습임을 밝혀내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하나님의 세 분되심을 바르게 밝히는 데에는 유감스럽게 실패하고 말았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삼위되심을 세 가지 ‘존재양태’라고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독자적 인격체로서의 세 분 하나님을 바르게 표현해 내지 못했다. 바르트의 ‘존재양태’라는 표현은 양태론 이단의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표현으로 빨리 시정되어야 할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르트의 이 ‘존재양태’는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대가인 칼 라너가 이어받아 하나님의 삼위되심을 하나님의 세 가지 존립양태로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바르트의 잘못된 길을 반복하고 말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르트와 라너를 이어받는 신구교의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이 오류는 계속되고 있다.
1.세 분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할 때 그것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일 때는 정확한 말이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삼위를 지칭하는 말로서는 지극히 부적절하다. 구약성서에 기술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 6:4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에서 표현되고 있는“하나”라는 표현은 삼위일체론에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이 “하나”라는 표현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고 참 신이라는 뜻이다. 중동 지방에 수많은 신들이 있지만 그 모든 신들은 거짓 신들이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참 신이시고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 때문에 하나님의 세 분 되심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발생해서는 안된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세 분되심을 뚜렷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책장을 열게 되면 세 분 되신 하나님의 모습은 너무나 뚜렷하게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장면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성서에 계시된 대표적 장면 중 하나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성령이 강림하고 있고, 하늘로부터 성부 하나님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고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예수 위에 강림하신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 하나님의 모습을 뚜렷이 인식할 수 있다.
신약성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세 분 하나님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 신약성서는 아버지 하나님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고 성령이신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이 마태의 가르침에 따라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바로 이 세례를 베푼 자리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이 형성된 삶의 자리였다.
신약성서에는 구약성서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던 세 분 하나님의 모습이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복음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술이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의 사도들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성령의 활동이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사도들은 성부 하나님 외에 다른 두 하나님을 명백하게 경험하고 있었고, 다른 두 분 역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요20:28)이라고 기술했고, 사도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의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라고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했다.
2.성부와 성령은 각각 다른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흔히 발생하는 큰 오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다른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고,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14:16~17)
이 본문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른 분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겠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성자와 성부 역시 다른 분이시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서 밝히 볼 수 있듯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는 다른 분이셨다.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셨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하다면 성자께서 성부께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일이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기도할 때는 자신 곧 성자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이신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이 본문에서도 밝히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은 성부가 아니시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분이시다. 성부와 성령이 같은 분이시라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성부께 기도한다는 이 본문의 내용은 너무나 이상한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는 성부와 성자가 다른 분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잘 나타내 준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는 비장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과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사역을 행하시는 성자는 같은 분이 아니라 다른 분이셨다. 마침내 성자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는 부르짖음을 남기시고 운명하셨다.
이 성자의 부르짖음은 성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성자 예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운명하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부 수난설은 고대 교회에서 처음부터 이단이었다. 삼위일체론을 잘못 이해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이는 정교하게 가다듬어 다시 표현해야 하는 잘못된 표현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성자이시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에 나타난 제2위 성자의 죽음이었다. 몰트만(J. Moltmann)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이를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죽음으로 바로 표현했다. 즉, 십자가는 성부와 성령의 가슴 한 가운데에서 죽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었다.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성부께서 성자를 버리신 사건이었다면 부활은 성부께서 성령을 통해 성자를 살리신 사건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죽었다면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겠는가! 성부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죽으신 아들을 다시 살리셨고, 다시 사신 성자께서는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셨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이 아니시고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성자 하나님이다. 그런 까닭에 사도신경은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은 물론 행7:55의 스데반이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사도신경이 예수를 성부 하나님과 다른 분으로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셨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성령의 시대가 태동하게 되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니라”(요14:26)
그러므로 성령을 또 다른 형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이와 같은 잘못은 삼위일체론에서 삼위 하나님이 각각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기인된 크나큰 오류이다.
3. 세 분 하나님의 동격성을 강조한 고대 교회의 정통 신조들
고대 교회의 정통 신조들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신조는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이 두 개의 신조는 동서교회가 공히 정통 신조로 고백하고 있는 유일한 신조인데 이 둘을 합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고도 한다. 이 두 개의 신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조도 모든 교회에서 공인 받을 수 있는 정통성을 가진 신조는 없다. 이 신조에 필적할만한 서방 교회의 신조로는 사도 신조를 들 수 있다. 이 사도 신조의 현재의 형태는 6~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주후 215년 경에 쓰여진 히폴리투스의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에 질문형식의 신조에 사도 신조의 원시형태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도 신조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방 교회의 신조로서 오늘날 예배 때에 암송되고, 중요한 신조로 추앙받고 있는 사도 신조는 삼위일체론 연구에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신조는 삼위일체론 연구에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이라는 것과 둘째는 이 분이 부활하고 승천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고백이다. 사도 신조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신조이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물론 사도들의 이해이기도 했다. 사도 신조는 크게 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고 둘째는 부활하고 승천하고 다시 오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고 셋째는 성령과 교회와 죄용서와 몸의 부활에 대한 고백이다. 사도 신조는 성령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 각각의 항목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세 분 하나님을 거의 분명하게 드러내는 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 신조 속에는 이 세 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언급이나 그 가능성을 비추는 표현은 전혀 없다.
325년에 확정된 니케아 신조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정통 신조이다. 이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임을 강조하는 신조이다. 이 신조는 아리우스(Arius)파의 주장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지 않고, 성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일종의 피조물로서 시작이 있었고 따라서 한 때 그가 계시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는 내용에 대항해서 성자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다는 ‘호모우시아’(동일본질)를 밝힌 신조였다.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고, 참 신이시며, 참 신 가운데 신이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며…”
위의 니케아 신조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니케아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과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는 결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혼동하지 않았고 이 두 분이 같은 분이 아님도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 하늘에 오르사 성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라고 사도 신조와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다. 니케아 신조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과 위엄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것을 천명한 신조이지, 성부와 성자가 괴상한 방식으로 같은 분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의 발전된 형태인데 특히 성령에 대해 자세한 고백이 들어있다. “…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그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되셨으며…” 이 성령에 관한 항목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주(主)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신성과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요약하면 고대 교회의 전통신조들은 유일하신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도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조들이다. 즉, 고대 교회의 정통 신조들은 하나님이 세 분이심을 고백하는 신조들이다. 그 어떤 고대 교회의 정통 신조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는 고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 분 하나님이 동일한 권위와 신성을 가지신 분들로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Ⅱ. 일체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상호침투와 함께 거하심
요 10:30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성자 예수와 성부 하나님이 하나라는 이 말씀은 이미 삼신론이 잘못임을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성서에 입각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역사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서를 떠나서 사변으로 치달으면 안 된다. 사변으로 치닫게 되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서의 계시에 철저하게 입각된 교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론이기 때문이다.
요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의 ‘하나’를 이해할 때도 사변을 하면 안 된다. 이 ‘하나’라는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이 이 ‘하나’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즉, 성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떠나 괴상한 구조를 끌어들여 사변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사도요한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을 스스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본문을 유념해서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7~11)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라는 사실은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라는 말씀이 아니고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말이다. 성부께서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께서 성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자께서 행하시는 일은 성부께서 성자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시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것은 요한은 어느 곳에서도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가 한 분이라고 말하지 않다는 점이다. 요한의 말씀의 핵심은 성부가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다라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자의 사역인 동시에 성부의 사역이다. 성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서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언제나 성부와 함께 계셨다. 성자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성부는 어디 계셨을까? 성부께서는 성자와 함께 성자 안에서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성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난을 받으셨다. 성자는 자신을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는 고난을 겪으셨고, 성부는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는 고난을 겪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자의 고난인 동시에 성부의 고난이었다.
이와 같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는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때부터 그를 잉태하신 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출생하셨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동안 그 분 안에 계셨고 그 분과 함께 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되는 기괴한 사실을 설명하는 교리가 아니다. 그런 것은 기괴할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없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한 분 하나님 안에 다른 두 하나님이 침투하여 거하시고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한 하나님을 보면 그분과 더불어 다른 두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함께 보게 되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삼신론은 세 분 하나님의 존재만 설명할 뿐 이 하나님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일체성을 전혀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이론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삼위일체론은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에만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골 1:15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는 요한복음 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골2:9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히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후 5:19)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바울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는 말씀과 요 14:10의 요한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그 의미가 완전히 동일하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사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고, 하나님 자신의 사건임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고 깊은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가슴을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것을 말하는 교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한 가운데 있는 십자가이다. 또한 바로 이런 시각에서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고 기술했다.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 온전히 거하셨던 역사는 오순절 이후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온전히 거하시는 역사로 변천된다. 이것은 성령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또 다른 형태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롬8:9)이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롬8:9)이고,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다. 따라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3. 하나의 신성(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
삼위일체론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서에 기초해야 되는 교리이다. 그것은 또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신 하나님 상호 간에 일어나는 신비한 구원의 역사를 바르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교리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삼위일체론은 점차 사변적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 사변적 형태로의 잘못된 발전의 핵심은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 되는 3=1의 괴상한 논리로의 발전이다.
한분이 세 분이 되고 세 분이 한 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라는 괴상한 논리로 무장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론으로 발전하는데, 이것은 주로 서방 교회에서 발전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의 기본 도식은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였다. 이 도식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곧 세 분이신데 같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325년의 니케아신조가 성부와 성자와 신성의 동일성을 언급했고,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의 동일성을 천명한 것이다. 이 정신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영향을 미쳐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세 분 하나님의 신성의 동등성이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이다.
325년의 니케아회의의 주역이었던 아타나시우(Athanasius)는 성자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성부의 신성에 비해 성자의 신성의 열등성을 주장했던 아리우스(Arius)파에 대항하는 싸움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 싸움에서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분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고 상식적인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부와 성자는 두 분이신 신이지만 태양에서 빛이 나올 때 그 빛은 태양의 빛과 속성이 동일한 것처럼 아버지의 신성과 아들의 신성은 같은 하나의 신성이고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샘에서 물이 흘러 하천을 이룰 때 샘물의 속성과 하천물의 속성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은 동일하고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런 까닭에 아타나시우스는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과 동일하다고 했다.
삼위일체론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동방 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은 서방 교회 일각에 나타나고 있었던 삼위일체론의 양태론적 경향을 언제나 비판했다. 고대 교회에서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이 역동적 단일신론이든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든지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다. 몰트만(J.Moltmann)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정통 신조를 만들어낸 동방 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이었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하나님이 상호간의 사귐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사귐의 삼위일체론을 뜻한다. 이 사귐의 삼위일체론 가운데 독특한 것 중 하나는 나치안스의 그레고리(Gregory)가 언급한 가족형 삼위일체론이다. 나치안스의 그레고리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상적 유비는 아담-하와-셋의 가족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드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갑파도키아 교부들의 맏형격인 가이샤라의 바실(Basil)은 세 분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갑파도기아 교부들은 세 분이 한 분이 되고 한 분이 세 분이 되는 괴상한 논리는 상상할 수 없었다. 원래의 삼위일체론의 도식인 하나님의 한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는 세 분 하나님을 명백히 전제하면서 이 세 하나님이 한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 있다. 즉 세 하나님의 신성에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없고 동일한 신성을 공유하고 있고, 이 신성의 교류를 통한 하나됨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였는데, 이런 의미에서 세 분 하나님은 하나이시지 한 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본질(우시아)을 실체와 동일시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한 분인 동시에 세 분이 된다.
4. 한 하나님(One God)의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과 세 하나님들(3 Gods)이 있다는 말을 같은 말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은 세 인격체(3 Persons)를 지칭하는 말이지 삼신론을 의미하는 세 신들(3 gods) 혹은 세 하나님들(3 Gods)로 생각하면 안된다.
삼위일체론을 형성시킨 신학의 교부들은 하나님이 세 분(3 hypostasis)이라고 언급했지만 세 하나님들이 있다고는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타나시우스와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하나님들이 있다는 표현에 대해 한결같이 반대하면서 오히려 한 하나님(One God)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 한 하나님이란 말의 뜻이 무엇일까?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침투와 공재(共在)를 통해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삶과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과 역사는 언제나 하나이다.
그리고 한 분의 삶과 역사 안에 언제나 세 분의 삶과 역사가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성부의 영광인 동시에 성자의 영광이고 성령의 영광이다. 즉, 하나의 하나님이란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신 전체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2006. 3. 30. 크리스천투데이)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
‘오순절 영성운동’, 정열적이지만 사회의식 결여
한국교회 안에는 수많은 영성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살리는 길이 영성운동에 있다고 믿고 영성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고 있다. 성도들의 영성을 계발하기 위한 특별한 모임이나 단체들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영성이냐’ 하는 점에 있다.
영성운동 혹은 영성이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지만 무엇이 영성인지 정확한 개념을 잡기는 쉽지 않다. 영성이란 말만큼 오늘날 한국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용어도 드물다. 영성운동을 일으키는 지도자들마다 방향이 일치하고 있지 않고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한국 교회 안에는 다양한 영성운동과 영성이 존재하고 있다.
무엇이 바른 영성이며 바른 영성운동일까? 우리는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먼저 한국교회 안에 존재하는 영성운동을 그 흐름별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한국교회 안에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영성운동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크게 세 가지의 중요한 흐름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 중 첫째는 오순절적 영성운동이고 둘째는 가톨릭적 수도원 영성운동이고 셋째는 해방의 영성운동(혹은 민중의 영성운동)이다.
Ⅰ. 한국교회 안의 영성운동의 흐름
1. 오순절적 영성운동
한국교회 안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영성운동은 오순절적 영성운동이다. 오순절적 영성운동은 성령을 받는 것에 초점이 있는 영성운동이다. 성령을 받아서 능력 있는 일꾼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이 운동의 목적이다. 영적이고 능력이 충만한 사람은 곧 성령의 사람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자도 고치는 능력의 사람이다.
영적이고 영성이 충만한 목회자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목회자인 동시에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까닭에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은 영적인 권능의 목사인 동시에 영성이 깊은 목사라는 등식이 거의 형성되어 있다.
오순절적 영성운동은 물론 처음에는 순복음교회를 비롯한 오순절 계통의 교파에서 중심적으로 시작된 운동이지만 현재는 한국의 거의 모든 교파에 영향을 미쳤고, 거의 모든 교파 안에서 이 흐름의 운동을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영성운동의 예배나 집회는 대단히 뜨겁고 정열적이다. 기도를 할 때에는 손을 하늘로 올리고 주여 삼창을 전체가 큰 소리로 한 후에 큰 소리로 정열적으로 기도를 드린다. 대단히 뜨겁고 정열적인 반면에 상당히 시끄러운 단점도 있다.
조용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상당부분 거부감을 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하나님이 귀가 머셨나라는 비판을 자주 듣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성운동은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인다”는 신념에 기초해 있다.
오순절적 영성운동은 정열적이고 뜨겁고 또한 무언가 얻으려고 하는 영성운동이다. 이 영성운동은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건강을 얻고, 가난에서 해방되어 부를 얻고, 명예도 얻고, 기적도 행하고, 죽어가는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다. 이 영성운동은 성공에 대한 소망과 많이 결부되어 있고 축복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대중성을 갖고 있고 다수의 대중을 모으는 힘을 발휘했다.
반면에 이 영성운동은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고, 다른 형태의 영성운동에 비해 사회의식이 많이 결여되어 있으며, 개인적 욕망과 욕심이 영성과 결탁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니라”(마 6:24)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늘 유념해야 할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가톨릭적 영성운동, 금욕 중시하지만 율법주의화 쉬워
2.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한국의 개신교회 안에 오순절적 성령운동에 식상한 사람들이 대안적인 영성운동으로 도입해서 많이 확산시켰는데, 현재는 하나의 중요한 영성운동의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운동을 도입한 사람들은 오순절적 영성운동은 상대적으로 저급하다고 생각하고 고상한 형태의 영성운동을 추구한다는 자부심이 내적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영성운동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악을 억제하고 죽이고 성화에 이르려고 하는 운동이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보면 이 운동의 중요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명상하면서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이르고자 하는 영성운동이라는 것이다.
오순절적 영성운동이 뜨겁고 정열적이고 반면에 시끄러운 특징이 있는데 이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대단히 조용한 특징을 갖고 있는 운동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주간 동안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명상하면서 성화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한다.
또한 오순절적 영성운동이 무언가 얻으려고 하는 영성운동인데 반해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오히려 버리려고 하는 영성운동이다.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명예에 대한 욕심도 버리려고 하는 영성운동이다.
가슴을 세상적인 욕심으로 가득 채우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가난함에 이르고자 한다. 청빈을 중요한 삶의 덕목으로 생각하고 가난한 마음 속에 진정한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영성운동이다. 이 영성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성 프랜시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엇가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한다.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외견상 불교적인 영성과 닮은 점이 있다. 명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이나, 세상에서 초연해지려고 하는 특징이나, 모든 것을 버리려고 하는 것들이나, 내적 욕망을 억제하고 죽이려는 노력 등은 불교 승려들의 수도적 삶을 연상케 한다. 이 영성운동의 문제점은 종교개혁자들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근본이유와 언제나 결부되는데 율법주의의 폐해 및 복음의 기쁨과 세상의 중요성의 상대적 약화 등이 언급될 수 있다.
3. 해방의 영성운동
해방의 영성이라는 개념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자들에 의해 주창된 개념이다. 억눌려 있는 사람들, 불의로 신음하는 사람들, 제1세계의 제국주의적 지배질서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제3세계의 사람들, 이들을 억누르고 있는 잘못된 질서를 타파하고 이들을 해방시키는 역사 속에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영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이다. 이 해방의 영성운동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교회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구체적인 정치적 운동으로 나타난 바 있다.
한국의 교회 안에서도 해방의 영성운동은 과거의 독재정권 치하에서 그리스도교의 인권 및 정의와 민주화 운동 속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히 한국에서는 민중 신학이 발전하면서 해방의 영성은 민중의 영성과 결합되었고, 민중을 의식화시키고 민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주체의식을 갖게 하고 역사를 바꾸는 영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민중주체의식은 민중의 영성의 하나의 상징적 개념이다.
해방의 영성운동은 오순절적 영성운동이나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이 인간의 내적 영역, 종교적 영역과 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반해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는 운동이다. 즉, 이 운동은 사회적 역사적 차원의 영성운동이다. 이 영성운동은 정치운동으로 변질될 위험이 언제나 상존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영역이 단지 인간의 영적 영역, 종교적 영역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사회적 역사적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큰 장점이 있는 운동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한국 교회 내에서는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적, 혹은 복음적인 교회가 그다지 반기지 아니하는 영성운동이다.
그러면 위의 세가지 영성운동 가운데 어떤 영성운동이 가장 바람직한 영성운동일까? 위의 세 가지 영성운동은 모두 그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영성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순절적 영성운동은 성령의 능력과 믿음의 역사에 그 초점이 있고, 또한 바로 이 점에 큰 장점이 있고, 가톨릭적 수도원적 영성운동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닮으려는데 큰 장점이 있고, 해방의 영성운동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는 영성운동이라는데 큰 장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영성운동의 장점들을 잘 살리는 영성운동이 우선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영성운동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무조건 위의 세 가지를 합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영성운동은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신학적 근거가 너무 다르고, 또한 서로를 배격하고 있는 구조가 있기 때문에 쉽게 합쳐지지 않는다. 또한 이 세 가지 영성운동은 이미 일부 지적된 것 속에서 느낄 수 있듯이 상당한 문제점도 합치는 것이기 때문에 바른 해결책은 아니다.
우리는 바른 영성운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우선 개혁파 신학의 영성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개혁파 신학의 영성은 하나님 중심의 삶(God centered Life)이다. 개혁파 신학은 세상과 역사에서 이탈하는 가톨릭의 수도원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개혁파 신학의 영성은 탈역사적인 것이 아니었고 세상 속에서 빛나는 영성이었다. 또한 개혁파 신학은 열광주의나 신비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개혁파 신학은 광적인 영성을 바른 영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언제나 말씀 중심적인 영성을 생각했다.
개혁파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진정한 영적인 삶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이 개혁파 신학의 영성이 갖고 있는 건전성과 깊이와 중요성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개혁파 신학의 영성의 기초 위에서 이미 언급한 세 가지 영성운동의 장점을 살리는 바른 영성을 위한 신학적 체계를 형성시키고자 한다.
산에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영성이 없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어떻게 획득될 수 있을까? 영성운동의 지도자들은 영성 획득을 위해 수많은 작위적인 방법들을 사용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요하기도 하다. 그리스도교의 영성 획득을 위해 사용되는 작위적인 방법들은 부분적인 도움은 될지 모르나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해악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들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 획득을 위해 꼭 필요한 본질적인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성서와 신학
20세기의 위대한 인물 가운에 슈바이처 (A. Schweitzer)박사가 있다. 그는 긴 세월을 두고 신학공부를 했고 특별히 역사의 예수를 깊게 연구했다. 그는 성서를 연구하고 예수를 깊이 연구한 끝에 ‘예수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의 핵심은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이다’고 결론을 맺게 되었다. ‘생명 앞에서의 경외’(Ehrfurcht vor dem Leben)라는 표현은 슈바이처의 가르침의 핵심이자 슈바이처가 성서와 예수의 정신을 연구한 결론이었다.
여기에 이른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죽어 가는 흑인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흑인들의 생명을 구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의학을 공부했고, 의학공부를 마친 슈바이처는 주저하지 않고 1913년 흑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의 ‘가봉’이라는 나라의 오고웨 강변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세운 슈바이처는 그때부터 흑인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시작했다. 1952년 슈바이처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이때 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그는 나환자 마을을 만들었고 나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시작했다. 슈바이처는 이렇게 일생을 살고 하나님 앞에 갔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슈바이처는 세속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세속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는 결코 아프리카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영적인 사람이었고 깊은 영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슈바이처의 영성이 무엇일까? 슈바이처의 영성의 핵심은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이었다.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은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영성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런데 슈바이처는 이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어디서 얻게 되었을까? 슈바이처는 성서를 통해, 그리고 신학공부를 통해,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연구한 끝에 그 영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서 시작되고 성서와 신학공부를 통해 깊어지게 된다.
영성은 산 속에서 신비적으로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사고를 빨리 고쳐야 한다. 산 속에서 신비적으로 얻는 영성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상당부분 괴상해져 있다. 산 속에서 신비적으로 받는 괴상한 영성은 결국 교회를 괴상하게 만들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일이 일어난다.
영성은 성서연구와 신학공부를 통해 얻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그리스도교의 영성의 기둥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의 영성의 영원한 모법(母法)이다.
민중 신학자 안병무 교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민중교회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스승인 안병무 교수를 통해 민중을 사랑하는 정신을 배웠고 그 정신으로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선교에 초점을 두고 있는 복음주의 신학은 복음주의적 영성을 형성하고 선교 중심적인 복음주의 교회를 만든다.
칼 바르트(K.Barth)는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 양태를 언급했다. 역사의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와 교회의 설교가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신학은 성서와 설교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해서 설교를 바르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둥이다. 바르트의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의 영성 이해에도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기둥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와 신학과 교회의 설교가 그리스도교 영성의 원천이 된다.
우리가 영성을 얻게 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성서이고 신학이고 교회의 설교이다. 성령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의 방편들을 통해 크게 역사하시고 그들을 성령의 사람으로, 영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스교의 영성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와 신학과 설교이다. 성령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의 방편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이 하나님의 말씀의 방편들을 떠나서 얻어지는 영성은 그리스도교의 바른 영성이 아니다. 깊은 영성과 바른 영성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과 방편들과 깊이 접맥되어야 한다. 또한 영성 훈련을 지도하는 지도자들 역시 이 하나님의 말씀의 방편들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바른 영성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와 신학과 설교라고 할 때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약점은 위의 것들이 영성의 결정적인 원천이라는 점을 잘 알지 못하는 것과 위의 것들 중 신학의 중요성을 거의 모르는데 있다. 신학공부의 결여는 바른 영성 획득의 실패로 나타난다. 최근 환경 신학은 교회에 자연 사랑의 영성을 심어 주고 있다. 환경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는 깊은 차원의 자연 사랑의 영성이 획득되지 않는다. 신학은 교회의 영성을 깊게 하고 바르게 하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영성은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얻어진다’
2. 교회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일반적으로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얻어진다.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교 영성의 원천이다. 복음주의적 교회는 선교적 영성을 성도들에게 심어 주고 사회봉사적 교회는 섬김의 영성을 성도들에게 심어준다. 또한 오순절적인 교회는 오순절적 영성을 성도들에게 심어준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을 양육하는 성령의 도구이고, 이런 까닭에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인 동시에 성도들의 영성의 원천이다.
교회의 설교와 예배와 교육은 성도들의 영성을 직접적으로 형성시키는 성령의 도구이다. 설교가 성도들의 영성의 중요한 원천이라는 것은 이미 언급했지만 설교 뿐만 아니라 예배 때의 찬양을 포함한 모든 것이 성도들의 영성의 원천이다. 성도들은 찬양을 통해 영성이 깊어지고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난다.
교회의 교육과 친교 역시 성도들의 영성을 형성시키는 결정적인 중요한 성령의 도구들이다. 교회의 바른 교육은 바른 영성을 심어 주고 거룩한 성도들과의 사귐은 거룩한 꿈을 갖게 하고 거룩한 삶을 사랑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어느 날 갑자기 산 속에서 불을 받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산상집회 같은 것이 영성 형성에 어떤 계기를 마련해 줄 수는 있어도 그 이상으로 높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산상집회는 잘못된 영성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점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바른 영성은 교회의 바른 설교에서 시작되고 바른 교육에서 체계화 된다. 그리고 거룩한 성도들과의 사귐이 영성이 활성화 되고 깊어지는 통로라는 점 역시 깊이 인식해야 한다. 순교자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영성이 살아 움직였던 공동체였다.
3. 기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성서라는 객관적 표준에 대한 깊은 이해와 교회라는 공동체의 도움과 개인의 기도생활이라는 개인적 경험히 결합되어 형성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고 거룩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일을 할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얻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에 대한 깊은 확신에 이르게 된다.
명상은 기도생활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명상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깊이를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이르기 위한 영적인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고난 속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오늘의 세계와 역사적 현실을 깊이 명상하면서 자신을 찾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명상은 영적인 깊이를 더하게 하는 중요한 영성생활의 일부이다.
개혁파 신학은 듣는 것(명상)과 요구하는 것(얻으려는 것)의 균형을 개혁파 영성의 중요한 두 개의 기둥으로 생각했다. 기도생활에는 듣는 것과 요구하는 것의 균형이 중요하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이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만남은 언제나 상호간의 대화이기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전해야 한다.
‘믿음과 사랑이 진정한 영성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의 구체적 모습이 무엇일까? 영성이란 대단히 막연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 막연한 영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무엇일까?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의 두 가지가 그 핵심이다.
1. 믿음의 영성
광림교회의 김선도 목사의 일화 가운데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다음의 것이 있다. 그가 광림교회를 개척할 때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압구정동의 어떤 땅을 하루에 일곱 번씩 돌면서 이 땅을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일곱 번을 돌았을 때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가 함락된 것을 기억하면서 그 믿음으로 김선도 목사는 그 땅을 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현재의 광림교회라는 한국의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가 우뚝 서 있다. 광림교회의 김선도 목사는 최근에 담임 목사직 세습문제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인 목회자였고 영성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깊은 영적인 능력으로 오늘의 거대한 광림교회를 만들었다. 그러면 그의 영적인 능력의 핵은 무엇일까? 그의 영적인 능력의 핵은 믿음이었다.
믿음은 그리스도교의 영성의 핵이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히11:29~30). 믿음은 홍해를 가르고 마귀를 몰아내고 마른 땅에서 샘물이 흐르게 하는 능력의 원천이다.
막 4:35~41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지나고 계셨다. 이 때 광풍이 불어오고 파도가 거치어지면서 배는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고 예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셨다.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너희들은 믿음이 없느냐”(막4:40)라고 꾸짖으셨다. 진정한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광풍이 불어오는 바다 속을 유유히 지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영성은 믿음이라는 놀라운 능력과 결부되어 있다.
2. 사랑의 영성
그리스도교의 영성의 두번째 중요한 측은 사랑이다. 1997년 세상을 떠난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는 지난 세기의 인류의 어머니로 존경 받을만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해서 인도에서 그녀를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 것은 20세기의 기적 가운데 하나였다. 어떻게 힌두교의 나라에서 한 가톨릭의 수녀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국장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었을까! 테레사 수녀는 힌두교도를 감동시켰고 힌두교도들의 통곡 속에서 눈을 감았다.
“우리 가운데 굶주린 자가 있는 것은 우리가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테레사 수녀의 말은 지금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움직이고 선한 일로 이끄는 위대한 가르침이다.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의 집은 거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유지된다. 자원 봉사자들은 새벽기도회 때 테레사 수녀가 전하는 말과 기도를 들으며 영적인 힘을 얻었다. 테레사 수녀의 영적인 힘이 무엇이었을까? 테레사 수녀의 영적인 힘의 핵은 사랑이었다.
아프리카 성자 슈바이처의 영성의 핵도 사랑이었다. 생명 앞에서의 경외라는 슈바이처의 영성은 사랑의 영성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미하엘 벨커(M. Welker)에 의하면 사랑은 성령이 역사하는 통로이자 성령이 역사하는 장이다. 사랑은 세상에 평화를 만들고 전쟁과 죽음을 몰아내고 생명의 세계를 만든다. 성령은 믿음 속에서도 역사하지만 사랑을 통해서도 강력하게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믿음이라는 중요한 축과 사랑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을 갖고 있다. (2006. 5. 13. 크리스천투데이)
성령론의 바른 길
개혁교회의 성령론에 관하여
20세기에 개혁교회와 오순절 교회 사이에 성령론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이 갈등의 중심에는 방언이나, 신유, 기적과 같은 문제에 대한 이견이 존재했다. 또한 두 교회 사이에는 성령세례론에 대한 이견도 있었다. 오순절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하지만 개혁교회는 성령의 사역을 무시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했지만 반면에 오순절 교회는 너무 열광주의적이고 성령에 사역에 대한 대단히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우리는 개혁교회의 성령론과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을 분석해서 이 두 교회의 성령론의 모습과 구조를 명확히 하고 이 두 성령론의 장점과 문제점을 밝힐 것이다. 이 논구에서 두 교회의 성령론 모두 완전하지 못하고 상당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밝힌 연후에 통전적인 성령론을 제시할 것이다. 이 통전적인 성령론은 두 교회가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른 성령론이다.
Ⅰ. 개혁교회의 성령론
1. 개혁교회 성령론의 개요
개혁교회의 성령론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의 다섯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고 인식되고 있다.
1) 개혁교회의 성령론에 의하면 성령은 우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영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이 연합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연합이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중생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중생과 칭의는 성령의 역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중생과 칭의의 영이라고 일컬어진다.
2) 성령의 두번째 사역은 성화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을 성령에 의한 삶으로 인식했고 이런 시각으로 성령론을 발전시켰다. 성화는 성령의 압도적인 역할에 의해 이루어진다. 칼빈에 의하면 부르심, 회개, 중생과 칭의만이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 성화가 성령의 사역이고 성령의 사역이 중심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에 의해 시작되고 새로워지고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성화된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는 영이시다.
3) 개혁교회의 성령론에 의하면 성령의 사역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영역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 속에도 성령의 사역이 존재한다. 성령은 세계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영이다. 이런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 없다면 세계는 이내 혼란에 빠질 것이고 인간성은 야수성으로 변할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에 의하면, 인간과 사물들을 유지시키고 재능을 부여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예술가들의 재능이나 특별한 전문가들의 능력 역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심지어 성령은 한 국가에 기술과 예술적인 재능을 부여하기도 하고 또한 그것을 거두어 가시기도 하신다. 칼빈에 의하면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다. 칼빈의 관점에 의하면 예술과 수학과 과학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을 무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칼빈은 성령의 우주적 차원을 강조했는데 이는 성령론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것이다.
후대의 개혁신학자들은 영적인 구원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특별은총과 피조물과 인간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일반은총을 구별하는 교리를 발전시켰다.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칼빈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통적으로 모든 피조세계에 활동하는 성령의 사역을 언급하고 강조했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교회 신학은 피조물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는 성령론을 발전시켰다.
4) 성령의 넷째 사역은 말씀에 대한 증언이다. 개혁 교회의 성령론에 의하면 우리는 성령의 증언을 통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게 된다. 성경의 권위와 본질에 대한 복음적 이해를 위한 칼빈의 가장 훌륭한 공헌은 성령의 내적 증거의 교리를 발전시킨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들은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지 않는 한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 가운데 믿음을 창조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의 내적 증거가 없으면 기록된 말씀이나 선포된 말씀 그 어떤 것도 효력이 없다.
칼 바르트(K.Barth)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의 증언 없는 기록된 말씀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비록 성경이 자체적으로 권위가 있는 책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내적인 사역이 없이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성경의 신비와 위엄은 성령의 증언을 통해서 드러난다.
5) 교회론과 성례론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는 개혁 교회 성령론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칼빈은 교회론과 성례론을 성령론적 시각으로 강조하고 가르쳤다. 칼빈이 초대 교회의 교부인 키프리안(Cyprian)의 유명한 말인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머니이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유한한 육체의 의복을 벗을 때까지 어머니인 교회가 그녀의 젖가슴으로 우리를 먹이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어머니인 교회의 보호와 돌보심을 받지 않고서는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이는 수단이다. 성령은 어머니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천성으로 인도하기 위한 성령의 기관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성령의 성례전적 기관이다. 교회는 성령께서 인간을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눈에 보이는 인간적 도구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라는 사회적 실존을 통해 나타나신다. 교회의 실존이 없다면 오늘의 역사 속에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오늘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성령의 기관이다.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으로 성경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와 성례를 강조했다. 성례 역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의 보이는 표지이다. 성례는 성령의 보이지 않는 은총의 역사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 개혁교회의 교회론과 성례론은 성령론적 시각에 의해서만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기 위한 성령의 보이는 도구들인 것이다.
개혁교회 성령론의 장점에 관해
2. 개혁교회 성령론의 장점
1) 개혁교회의 성령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에 의해 시작되고 계속된다. 성령이 우리를 중생시키고, 의롭게 하고 성화시킨다. 이러한 개혁교회 성령론의 가르침은 성경적이고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거듭난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5~6)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근거는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의 전이고,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생애이다. 개혁교회의 성령론이 그리스도인의 전체 구원의 여정을 성령의 역사라는 빛에서 본 것은 훌륭한 점이다.
2)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의 깊은 연관성을 개혁교회 성령론이 강조했다는 점은 또 하나의 개혁교회 성령론의 강점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성령은 성경의 말씀을 수단으로 해서 성도를 인도하신다는 점을 언제나 강조했다.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이라면 성령은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이다.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성령과 역사적 예수 사이와, 성령과 문자로서의 성경 말씀 사이와, 성령과 제도적 교회 사이의 연계성의 매듭을 풀거나 느슨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직통계시나 열광주의적인 교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개혁교회에서는 오순절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예언 같은 것은 쉽게 찾기 어렵다.
3)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과 비교해 볼 때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상대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갖고 있다. 헤셀링크(I.J.Hesselink)에 의하면 “개혁신학은 오순절주의를 비롯한 그 어떤 전통보다도 성령의 능력과 사역에 대한 깊은 이해와 평가가 있고, 폭넓고 균형잡힌 성령의 능력과 사역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갖고 있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에는 성령세례는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지만 성만찬은 거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중요하게 취급되지만 성령의 자연적 은사들은 거의 제외되고 있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을 포함해서 수많은 성령론들이 성령의 우주적 사역을 거의 알지 못하지만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이를 매우 잘 인식하고 있다.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인간과 피조세계와 우주를 보존하고 인도하는 성령의 사역을 언제나 가르쳐 왔다.
또한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교회와 성례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성령론적 이해를 발전시켰다. 우리는 개혁교회의 성령론 속에서 세례(유아세례 포함)와 성찬과 성경과 설교와 교회의 직제들에 대한 풍부한 해석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에 집중했는데 반해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오랫동안 성령의 사역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헤셀링크는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과 개혁교회의 성령론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그에 의하면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너무 많이 얘기한 것이 아니고 너무나 적게 얘기했다. 오순절주의 성령에 대한 이해는 너무 좁고 편협하다….” 그러므로 은사운동의 학자들은 폭넓게는 개혁교회의 전통으로부터, 좁게는 칼빈으로부터 성령과 피조세계와의 관계, 성령과 성경과의 관계, 성령과 교회 및 성례와의 관계, 성령과 전통과의 관계,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과의 관계에 대해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
비록 개혁교회의 성령론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뜨겁고 역동적인 측면의 강조에 다소 약점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의 사역에 대해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폭넓은 측면을 많이 밝히고 있다는 점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개혁교회 성령론의 단점에 관해
3. 개혁교회 성령론의 단점
1) 칼빈의 신학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풍요로운 많은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혁주의 전통에서 성령론은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 수많은 중요한 개혁교회의 신학자들의 책들 속에 성령론에 대해 쓴 장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책들에서 성령론은 구원론의 보조적인 기능을 할 뿐 독자적인 영역이 확보되지 못했다.
1963년 장로교회의 신학자 멋쥐(L.Mudge)는 개혁주의 전통의 신앙고백이나 신조들이 성령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강조에 상응하는 고백서를 만들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이 잘못의 결과는 성령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듣지도 못하고 성령의 활동을 보지도 못하는 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개혁교회의 교리 속에서의 성령론의 소멸은 성령의 사역을 바르게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초래했고 그 결과는 교회가 굳어지고 선교와 봉사사역의 약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2) 개혁 교회의 성령론의 거대한 실수는 기적이 멈추었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에서의 기적의 의미는 방언, 신유, 예언과 같은 초자연적인 성격을 지닌 은사들을 주로 지칭하는 말이다.
칼빈은 “신유의 은사는 기적적인 다른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주께서 한시적으로만 존재하기를 원하셨던 은사인데, 지금은 사라졌는데 그 까닭은 복음에 대한 새로운 설교가 놀랍게 빛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수세기 후의 미국의 장로교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 역시 기적은 사도시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미국의 칼빈신학교의 교수였던 후크마(A. A. Hoekema)가 기적은 멈추었음을 재삼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기적적인 은사들은 사도들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한 의도로 주어진 것이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설득력이 결여된 잘못된 주장이다.
3) 개혁교회의 성령론에서 성령은 개인의 구원을 위한 영으로 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는 영적인 구원이었다. 성령은 영적인 중생과 성화의 영이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도 개인의 영혼의 새롭게 함과 관련되어 있는 사역이었다. 개혁교회의 성령론에서 성령의 사역과 우주적 차원 역시 창조세계의 보존과 주로 관계된 사역이었다.
오웬(J. Owen)에 의하면 성령의 직무는 “창조세계를 보존하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성령론의 문제점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나 경제적 곤핍으로부터의 자유 등의 문제들은 모두 해방하는 성령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차원의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채, 성령의 사역을 개인의 영혼과 교회의 영적 활동 속에서 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이 성령론의 문제점이다.
헤셀링크가 개혁교회 성령론은 폭이 넓은데 장점이 있다고 언급했지만,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폭이 넓은 장점이 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폭넓은 성령론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폭넓은 성령론으로의 발전은 개혁 교회의 신학 속에서 20세기 후반에 몰트만(J. Moltmann)의 성령론이 등장하면서 가능해지게 되었다.
오순절 교회 성령론의 특징
Ⅱ.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
1.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개요
개혁교회의 성령론과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에 의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알게 하고, 죄를 인식시키고, 하나님의 의와 심판을 알게 한다. 또한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다.
성령에 의한 칭의의 사역 후에 성령은 신자들을 성화시키고 육의 소욕을 억제케 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한다. 또한 성령은 신자들을 보호하고 위로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하도록 인도한다. 이와 같은 오순절 교회의 성령에 대한 가르침은 개혁교회의 성령론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이런 차원에서 두 성령론은 유사하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독특한 특징은 성령세례론에 있다. 오순절 교회에 의하면, 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사건 이후에 나타나는 분명하고 독특한 체험이다. 성령세례의 목적은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온다. 일반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최초의 증거는, 다른 증거들도 있을 수 있지만, 방언이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조건은 회개, 구원에 대한 확신, 물세례, 완전한 복종, 사모하는 마음(성령의 세례를), 의심없는 믿음 등이다.
방언 이외에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신유의 교리이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사역과 신유는 깊이 연결되어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구약의 이사야 53장의 유명한 구속의 장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질병까지 짊어지셨다는 것을 밝히 밝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에서 육체적 질병과 고난과 고통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통해 해결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질병과 가난과 고통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은 우리를 모든 육체적 질병과 가난과 고통에서 해방시키신다.
성령 재발견한 오순절주의, 한국교회 성장의 원동력
2.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장점
1) 오순절주의자들이 전통적 교회의 영적인 무관심을 공격하고, 이 점에 큰 도전을 준 것은 훌륭한 일이다. 네덜란드의 개혁파 신학자 베르크호프(H.Berkhof)에 의하면, 성령론은 전통적 조직신학에서 무시되고 있었다. 그의 유명한 책 『성령론』의 서문에서 “성령론은 조직신학에서 무시되고 있었던 영역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성령론이 신학의 매우 중요한 영역이라는 점을 오순절주의자들이 강조한 것은 잘한 것이다. 오늘의 세계 여러 교회에서 성령론이 발전하고 성령론의 중요성을 교회들이 인식한 것은 상당부분 오순절 운동에 영향받은 바 크다. 오순절 운동이 전통적 교회가 성령의 폭발적인 능력을 재발견하도록 도와준 것이다.
2)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으로 채워진 삶을 원한다. 성령으로 채워진 삶에 대한 욕구는 오순절 성령운동의 상징적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오순절 교회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이 넘치는 생동감은 상당부분 성령으로 채워진 삶에 대한 오순절 교회의 강조와 관련이 있다.
전통적인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칭의론과 성화론을 주로 성령의 활동과 관련해서 강조했을 뿐 성령으로 채워진 삶에 대한 충분한 강조는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은사로 채워져야 한다. 교회의 성장은 성령으로 채워지는 성도들의 삶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으로 채워지는 삶에 대한 강조는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장점이다.
3) 복음의 세상성에 대한 강조는 오순절 성령운동의 큰 장점이다. 오순절 교회가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복음의 세상성의 강조와 관련이 있다. 오순절주의는 세상 속에서의 곤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의 피는 죄를 도말할 뿐만 아니라 병과 가난의 도말과도 깊이 관계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와 가난과 질병을 위해 죽으셨다. 오순절주의에 의하면 세상 속의 곤경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이의 기독론적 연관성이 있고 이것이 세상적 구원을 향한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확고한 기반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구원이 육체 속에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했다. 질병과 가난은 성령의 능력이 구체화되는 영역이다. 성령은 질병과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육체와 세상 속에서 구원을 가져오는 영이다. 이와 같은 오순절 교회의 가르침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희망으로 나타났고 20세기에 오순절 교회의 성장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4) 방언이 성령의 은사이고 오늘의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가르친 점도 바른 가르침이다. 워필드(B. B. Warfield)나 후크마(A. A. Hoekema)를 비롯한 수많은 개혁교회의 신학자들은 방언이 사도시대를 끝으로 사라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잘못이고 방언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의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방언을 심리적인 혼란의 상태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방언을 하는 대다수의 성도들의 일상생활은 건강하다. 그들을 심리적인 비정상적인 상태로 평가하는 것은 방언의 은사에 대한 부족한 인식에 기인한 것이다. 20세기의 한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 배후에는 방언도 상당한 기능을 했다. 일반적으로 방언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고 이런 까닭에 매우 헌신적으로 교회에 봉사했다.
5) 기적과 신유에 대한 갈망은 오순절주의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믿고 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다.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는 초자연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흐름이 강하게 있었다. 19세기의 개혁교회의 신학도 이 영향 속에서 매우 이성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20세기의 오순절주의의 등장과 발전은 기독교 신앙의 초자연적 요소의 재발견이었다.
만일 신앙이 합리적인 영역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종국에 가서는 과학이 신앙을 대치하게 될 것이고, 신앙이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은 자꾸 줄어들 것이고,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이시다. 20세기의 오순절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앙을 설교했다.
적극적 사고와 기적에 대한 설교가 좌절과 절망의 한 가운데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희망을 갖도록 만들었다. 한국의 대형교회의 다수의 지도자들도 적극적 사고와 기적에 대한 믿음을 설교했다. 이 설교가 한국에서 대형교회를 만든 매우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오순절교회, 성령세례와 방언에서 오해’
3.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단점
1) 오순절 교회 성령론의 첫째 문제점은 “소위 성령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는 다른, 그 이후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보는 오해에 있다. 이 오해는 행 2:1~4, 8:14~17 및 19:2~7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석 때문이다. 누가는 중생과 구별되는 두번째 성령의 세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도는 이방인까지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이 말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다. 누가의 이 의도는 사도행전 첫머리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다(고전12:3).
중생과 성령 세례와의 일치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바울과 누가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성령의 세례는 중생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를 중생과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인 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이다”라고 쓴 빌리 그래함(B. Graham)의 말은 옳은 말이다.
2) 방언에 대한 과대평가는 오순절 교회 성령론의 또 하나의 오류이다. 방언이 성령의 은사임은 확실하다. 바울 역시 방언이 성령의 은사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지고한 은사도, 중심적 은사도, 첫째가는 은사도 아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보다도 말씀의 은사를 반복해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 14:6).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9). 바울에 의하면, 이성적인 말씀의 은사가 불분명한 방언의 은사보다 귀중하다.
이와 같은 바울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말씀을 강조한 개혁파 신학이 방언에 강조점을 둔 오순절주의 신학보다 더 성령의 사역에 깊이 밀접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이 방언을 높이 평가하고 성령 받은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표증으로까지 이해한 것은 큰 잘못이다. 방언은 단지 하나의 성령의 은사일 뿐 없어서는 안될 중심적인 높은 은사는 아니다.
미하엘 벨커(M. Welker)에 의하면 이와 같은 오순절 교회의 오해는 “하나님의 영을 특이하고 신비한 어떤 일을 일으키는 영으로 보는 견해” 때문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신비하고 특이한 감정과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오순절주의자들의 오해 때문에 오순절 교회는 불가피하게 신비한 은사와 경험이 교회의 삶과 경건의 중심에 놓이게 되는 신비주의적 교회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오순절주의자, 사랑을 성령의 은사로 취급하지 않아”
3)오순절 운동 속에서는 소위 기적이 일어났다는 수많은 주장들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주장들의 신뢰성에 관한 것이다. 오순절 운동 속에서는 이따금씩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주장도 들을 수 있다. 발터 홀렌베거(W. Hollenweger)는 다음의 사실을 보도했다.
“미국 침례교 목사였던 브랜햄(William Branham)은 자신이 예언한 대로 1965년 성탄절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죽었다. 이 사고는 브랜햄이 차를 몰고 갈 때에 술에 만취한 젊은이가 차를 몰고 와서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듬해 1월 25일에 엄청난 기적적인 복음화 물결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에 의해 예언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1월 25일에 그가 부활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을 썩지 않게 기름을 바르고 냉동보관했다. 그런데 1월 25일에 부활하지 않아 1966년 부활절까지 날짜를 연기했다. 유럽의 오순절주의자들이 브랜햄이 죽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몰랐던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1966년 부활절에도 브랜햄이 부활하지 않자 비로소 그의 장례가 치루어졌다.”
한국에서도 한 교회에서도 죽은 소녀가 부활했다는 소녀부활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순절 교회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보고되고 있지만, 매우 의심스러운 것들이 많다.
20세기 한국 오순절 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신유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신유와 기적에 대한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교회를 찾았다. 그러나 최근 10여년 동안 신문이나 TV와 같은 많은 언론매체의 기자들이 신유와 기적의 사실성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이를 밝혔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최근에 한국의 오순절 교회의 성장은 멈추었다. 한국의 교회에 대한 불신이 한국인의 가슴 속에 깊어지고 있다. 이 불신 때문에 전체 한국교회의 성장도 멈추어져 있다.
4)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의 능력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성령론이다. 능력전도나 능력목회 같은 표현은 오순절 운동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표현들이다. 이러한 능력의 대한 강조는 오순절 교회의 초자연주의의 특징의 일환이다. 그런데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강조는 강하지만 성령의 최고의 은사인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수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랑을 성령의 은사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성령론이 특이하고 신비한 어떤 것만을 은사로 보는 편향된 경향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모두 성령의 은사인데 그 중에 제일가는 은사는 사랑이다(고전12~13장).
사랑은 율법의 핵심적 정신이고 예언자들의 가르침의 정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의 기둥도 사랑이다. 사랑은 이웃에 대한 책임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내포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 역시 사랑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벨커에 의하면 사랑이 하나님의 능력이 현존하는 공적 영역이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장소”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은 십자가의 사랑의 무능 속에 존재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랑이 성령께서 걸어가는 길이고 성령의 가장 귀한 은사라는 점을 더 깊이 배워야 한다.
5)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은 방언, 신유, 예언과 같은 은사에 주로 집중하는 성령론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비판과 질문이 제기된다. 이 비판과 질문의 핵심은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역사성의 결여이다. 몰트만은 그의 1997년에 출간된 최근의 성령론의 ‘삶의 원천’에서 다음과 같이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을 비판했다.
“정치나 평화운동이나 환경운동 같은 오늘의 일상의 삶 어디에 오순절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오순절 운동은 구체적 역사적 현실로부터 개인적 종교적 희망의 세계로 도피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성령운동이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 세계의 곤경을 해방하는 하나님의 해방운동과 관련을 맺지 못하면 그것은 사적 종교적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비정치적, 사적인 종교로 변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성령의 활동과의 관계가 매우 약해지게 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성령 안에서의 삶의 표준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고 또한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치나 평화운동이나 환경운동 속에서 예수의 제자도를 실천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은 보기가 매우 어렵다.
“바른 성령론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초점 맞춰”
Ⅲ. 성령론의 바른 길
바른 성령론은 통전적 성령론이다. 여기에 통전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시키지 않고, 개인을 사회로부터, 인간을 전체 세계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론은 영적인 영역에만 제한되어서는 안되고 사회와 분리된 개인적인 영역에만 제한되어서도 안된다.
성령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닌 인간 전체의 구원을, 개인의 구원 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와 피조세계를 구원하는 영기기 때문이다. 통전적 성령론의 핵심은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영이라는 데 있다. 성령은 개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전체 피조세계를 구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다. 바른 성령론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성령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 성령론이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이나 개혁교회 교회의 성령론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성령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는데 실패했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 초점을 두고 있는 성령론은 20세기 후반 몰트만(J.Moltmann)에 의해 본격화 되었고, 벨커(M.Welker)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1.성령과 개인의 구원
성령은 개인을 구원하는 영이다. 그런데 개인의 구원 역시 통전적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개인의 영적 중생이나 성화에 초점을 두고 있는 전통적 개혁교회의 성령론의 폭은 넓혀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구원하기 때문이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신유의 교리는 성령의 구원의 사역의 육체적 측면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개혁교회의 성령론에 비해 장점이 있다. 성령의 해방하는 능력은 육체적 질병의 영역 속으로 파고든다. 이와 같은 성령의 사역은 병든 자들을 고친 예수의 사역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
부활은 성령을 통한 육체적 구원을 표현하는 정점이다. 성령은 그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낼 것이다. 신약성경이 영혼의 불멸을 가르치고 있지 않고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는 점을 유념해야 하다. 몰트만에 의하면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 부활의 선취적 사건이다. 질병은 죽음의 세력의 도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의 세력의 도구들이 파괴되는 장소에서 동터 오른다.
성령은 심리적, 도덕적, 영적 질병에서 뿐만 아니라 육체적 질병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건강한 인격을 만드는 영이다. 영혼과 육체를 구분해서 세상에서 이탈되는 영혼의 종교를 만들면 안된다. 성령은 가난과 질병과 소외와 불안과 고통과 죽음에서부터 인간을 건지고, 풍요로운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인간에게 선사하는 영이다.
“성령의 핵심적 항목은 정의를 위한 해방사역”
2. 성령과 하나님의 나라
1)성령과 정의
눅 4:18~19은 오늘의 성령론을 위해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이 본문은 성령론의 사회적 차원을 우리에게 밝히 가르쳐 주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위의 본문은 사61:1~2의 인용이다. 이 본문에서 주의 영은 눌린 자를 해방시키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영이다. 특히 이 본문에서 주의 은혜의 해가 희년을 의미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희년은 종살이 하던 자들이 해방되고, 토지를 상실했던 사람들이 다시 옛 조상들의 땅을 되찾는 사회적 해방의 해이다. 그러므로 이 해는 땅을 잃은 사람들, 종살이 하던 사람들과 같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문자 그대로 기쁨의 해이다. 이 해는 사회적, 경제적 해방의 때이다. 여기에서 주의 영과 사회적, 경제적 해방과의 깊은 연관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령과 정의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본문은 마12:18~21이다. 이 본문은 사 42:1~4의 인용이다. 이 본문에서 성령이 임한 주의 종이 정의를 선포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의가 이방인들에게 희망임을 선언하고 있다. 사 42:1~4에 의하면 성령이 임한 주의 종은 하나님의 정의의 보편적 확대와 확립을 성취하는 자로 언급되고 있다.
또 하나의 성령과 정의와의 깊은 관계를 가르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본문은 사 11:1~5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 할 것이요 그 위에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시리니 …. 그가 가난한 자를 판결해 주며, 땅의 가난한 자를 위하여 판결하여 정당함을 가져다 줄 것이며, 입술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
여호와의 영은 땅에 정의를 수립하고 악을 없애고 힘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정당함을 돌려주는 영이다. 이 여호와의 영의 활동으로 마침내 세상은 평화와 정의로 가득차게 된다.
성령은 사회적 정의와 해방의 근거이고 원천이다. 성령은 세상 속에서의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불의를 몰아내고 공평과 정의로 빛나는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생각할 때, 우리는 먼저 불의와 압제와 차별과 강탈로 고통하며 울부짖는 자들을 보호하고 해방하는 정의의 영인 성령을 언급해야 한다.
개혁교회의 성령론과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에 공히 정의에 관한 항목이 없다는 사실은 이 두 성령론 모두의 문제점이다. 몰트만과 벨커에 의하면 정의를 위한 성령의 해방하는 사역은 성령론의 핵심적 항목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마르틴 루터 킹 목사와 로메로 대주교 같은 사람들은 성령으로 가득찬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들이 성령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무지이다.
교회는 정의를 위한 성령의 해방하는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한국의 가톨릭 교회의 최근의 성장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독재정권 시절의 정의구현 사제단을 비롯한 가톨릭 교회의 정의를 위한 노력과 장애인이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톨릭 교회의 노력이 그 중심에 있는 이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민들은 가톨릭 교회를 신뢰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가 이 신뢰를 얻은 것은 그 교회가 사랑과 정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장은 교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샤머니즘적 신앙과 이해하기 매우 힘든 병고치는 일들과 직통계시와 종말론과 이웃 사랑의 결여와 분파정의의 활동으로 국민적 신뢰를 잃은 것이다. 반면, 한국의 가톨릭 교회는 한국 사회 속에서 정의를 수립하고자 하는 성령의 활동을 행하는 교회였던 것이다. 성령의 일을 바르게 행하는 바른 교회가 성장하고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성령의 핵심적 역할은 전인류, 전세계의 평화와 창조”
2)성령과 평화
성령의 열매는 평화이다(갈5:22).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라”(마5:9).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성령은 정의 뿐만 아니라 땅 위에 평화를 수립한다. 증오심과 전쟁과 살인과 죽음의 역사를 땅 위에 몰고오는 마귀의 활동에 반하여, 성령은 생명과 사랑의 평화를 땅 위에 수립하는 영이다.
아돌프 히틀러(A. Hitler)에 의해 6백만 유대인이 살해당하고 있을 때 마귀는 어디에 있었겠는가? 마귀는 6백만 죽은 유대인의 시체 위에서 춤추며 웃고 있었을 것이다. 요8:44에 의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라고 예수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마귀는 어디에 있었겠는가? 마귀는 배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들과 그들의 정치를 주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성령의 사역을 오직 영적인 영역에서만 인식한다면, 정치적, 군사적 영역에서의 성령의 활동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교회의 정치적, 군사적 책임의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지금까지의 성령론이 살인과 전쟁과 죽음으로부터 사람과 세계를 보호하고 평화를 수립하고자 하는 성령의 활동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세상에 평화를 수립하는 것은 성령의 활동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성령의 활동을 내적, 영적 세계로 제한시키면 안된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이 질병을 죽음의 세력으로 보고 질병과 죽음에서의 해방과 성령의 사역을 연결시킨 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 성령론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성령의 사역의 사회적, 정치적 연관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점이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의 사역을 개인적 차원 속에서만 주로 이해했지 하나님의 나라라는 시각에서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영역으로 넓게 인식하지 못했다. 성령은 정치, 경제, 군사, 사회, 질병의 모든 영역에서 죽음의 구조를 파괴하고 평화와 생명의 질서를 만드는 영이다.
3) 창조의 영인 성령
창조의 영인 성령에 대해서는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이 더 많이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창1:2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창1:2에서 창조의 영인 성령에 대해 분명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다. 창조의 영인 성령에 대한 더 나은 인식을 위해 우리는 욥기와 시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기운으로 이루셨도다”(시33:6).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6).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33:4).
이 구절들을 통해서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을 세계를 보존하는 영으로 인식했다. 구약성경에는 건축과 예술 및 창조세계에 관한 지혜와 성령의 은사를 연결시키고 있다. 개혁교회의 성령론이 성령과 창조세계와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성령론의 장점이다. 칼빈을 비롯해서 아브라함 카이퍼(A.Kuyper)같은 신학자들은 성령론의 우주적 측면을 인식했던 훌륭한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통이 창조세계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일반계시 영역에서, 또한 창조세계의 보전이라는 관점에서만 인식한 것은 미흡한 이해였다. 이 경우 창조세계에서의 성령의 활동은 성령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배경을 형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1895년에 출간된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전환점이 된 책이었다. 이 책에서 몰트만은 우주적 성령을 발전시키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창조세계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배경만이 아니다. 오히려 전체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세계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의 역사는 전체 창조세계의 구원의 한 부분이다. 성령은 전체 창조세계를 죽음의 힘에서부터 해방시키기 원한다. 바울에 의하면 피조물이 허무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하고 있다.(롬8:21)
전체 창조세계는 성령의 해방의 사역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사11:6 이하의 본문은 성령의 해방사역의 우주적 차원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창조세계의 종말론적 이미지는 평화이고, 동물들간의 살해로 인한 고통이 없는 모든 피조물의 해방의 세계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사역의 완성은 인간의 구원만으로 종국에 도달하지 않는다. 성령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평화와 영광이 빛나는 세계를 만드는 영이다.
성령이 없는 디아코니아는 진정한 봉사가 아니다”
4) 성령과 사랑과 생명의 세계
바울에 의하면 성령의 제일가는 은사는 사랑이다(고전 12:31). 갈 5:22에 의하면 성령의 열매 역시 사랑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출발점이다. 가난하고 곤경 속에 있는 자에 대한 긍휼은 성령의 은사이다.(롬12:8). 따라서 성령은 가난하고 곤경 속에 있는 자에 대한 디아코니아를 일으킨다. 디아코니아를 교회의 영적인 과제에 속하지 않고 세상적인 어떤 일로 생각하는 것은 치명적인 영적인 오류이다.
그런데 이런 오류를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오류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성령의 역사가 너무 종교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디아코니아는 성령에 의해 일으켜지는 성령의 역사로 교회의 본질적 과제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성령의 활동에 바르게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디아코니아를 개인적인 동정이나 사적인 자비의 차원으로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 바른 디아코니아를 위해서는 정의와 자비의 법이 필요하다. 정의와 자비의 법을 제정하는 것은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을 계속적으로 보호하는 자비의 구조를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은 구조적 보호가 없이는 결국 비인간화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따금씩 주어지는 동정적 행위로는 이들이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과 자비의 세계는 사회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랑과 자비의 법의 제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성령은 정의와 자비의 법의 근원이다. 성령의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 대해 민감한 교회이고 정의와 자비의 법을 사회 속에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이고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것을 막는 교회이다. 정의와 자비의 사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교회는 정의와 사랑의 세계를 세운다.
성령은 정의와 자비의 세계를 세울 뿐만 아니라 생명의 세계를 건설해 나가는 영이다. 생명에 대한 사랑은 성령의 사역의 핵이다. 성령은 죽음의 모든 도구를 파괴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의학의 발전은 성령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성령은 암과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그들에게 생명과 삶을 부여하기를 원한다. 암을 정복하고 에이즈를 정복하기 위한 의학자들의 연구와 고투는 성령의 사역과 관련이 있다.
병을 고치는 성령의 능력은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의학적 발전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목사와 의사는 죽음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손 잡고 나란히 일할 수 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의사는 병든 자를 고치면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의사들의 활동을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에서 제외시키면 안 된다. 의사들 역시 생명의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성령의 중요한 도구들이고, 바로 이곳에 의사들의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의 소명이 있다.
생명의 성령은 땅 위에 생명의 문화를 확장시킨다. 냉소주의는 생명의 문화와 관련이 없다. 청소년들은 절망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문학과 음악은 생명의 문화의 적이다. 청년들을 무의미한 혁명에 생명을 희생시키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 역시 생명의 문화의 적이다. 금욕적인 종교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색과 회색만 있는 문화 역시 생명의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생명의 문화는 색깔이 영롱하고 찬란하고 기쁨이 넘친다. 생명의 문화는 영롱하고 찬란하고 의미 있는 창조세계에 대한 감각과 정서와 관련이 있다.
어거스틴(Augustinus)은 ‘고백론’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는 무엇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 없으며 … 세상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음색을 지닌 달콤한 멜로디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고백론Ⅹ,6,8). 그러나 이 유명한 어거스틴의 고백에 반대해서 몰트만은 그의 최근의 성령론인 ‘삶의 원천’에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나는 움직이는 것들의 리듬을 사랑하며 눈동자의 빛남과 포옹할 때의 느낌과 감정을, 영롱한 창조세계의 색깔과 향기를 사랑합니다.” 생명의 문화는 삶의 기쁨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이다. 그것은 육체적 삶을 억압하고 영혼만의 경건을 목표로 하는 문화가 아니다. 성령은 영롱하고 찬란하고 기쁨과 의미로 가득찬 세계를 만드는 영이다.
“성령 사역의 종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5)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감사로 가득 찬 세계와 성령
성령은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영이다(사11:2), 사11:1~5에 따르면 성령은 정의를 세우고 악을 없애고 가난한 자를 돕고 하나님의 의가 가득 찬 세계를 만든다. 그러나 의로 가득 찬 세계가 성령의 사역의 끝이 아니다. 성령은 세계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차기를”(사11:9) 바라는 영이다. 하나님의 의의 세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깊이 서로 연계되어 있다. 이 둘은 독립적으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성령은 하나님의 의와 평화와 생명의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는 세계를 만드는 영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된 세계는 하나님 나라와는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다. 성령은 만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영이다.
신약성경은 성령의 활동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놀랄만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진리의 영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실 것이라”(요15:26).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영이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시작되는 삶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성령의 활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사역이 깊게 뿌리박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행1:8)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K. Barth)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알게 되는 모든 지식은 이교적이고 일종의 우상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자비와 평화와 생명에 대한 지식은 모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얻게 된 하나님에 대한 의는 참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참 하나님을 알게 하는 영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롬8:9)이자 그리스도의 영(롬8:9)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공동체를 만들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영이다.
성령은 온 세계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기를 원한다. 성령의 사역의 종국적 목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지식과 감사로 가득 찬 나라이다. 인간 개개인의 구원이 성령의 사역의 종국이 아니다. 또한 피조물이 구원과 세계의 평화가 성령의 사역의 종국이 아니다. 성령의 사역의 종국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관한 지식을 근거로 영원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세계이다. (2006. 8. 22. 크리스천투데이)
바른 신학과 바른 목회
“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의 유형과 장단점”
바른 목회는 바른 신학에서 시작된다. 신학은 교회의 뼈이며 목회의 뼈이다.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은 보수적 근본주의 교회를 만들었고 진보적 급진주의 신학은 진보적 급진주의 교회를 만들었다. 최근의 교회성장주의 신학은 교회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교회를 만들었다.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며 어떤 목회가 바른 목회일까?
바른 교회와 바른 목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한국교회 내의 신학적 전통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신학적 전통이 어떤 면에서 교회를 긍정적으로 이끌었으며 또한 어떤 면에서 부정적이었는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바른 목회를 만들고 바른 목회를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의 현상을 분석하고 평가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평가의 틀 위에서 우리는 바른 교회를 위한 신학적 관점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바른 목회는 여기서 찾아진 바른 신학적 관점들을 실천하는 것일 것이다.
Ⅰ. 신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의 유형과 장단점
1993년 김종렬은 예장 바른목회실천협의회 주관 전국 목회자 수련회에서 행한 강연에서 한국교회의 목회현상을 신학적 관점에서 크게 네 가지 흐름으로 구분했다. 그 네 가지는 1.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2.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3. 문화 자유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4. 실용주의(및 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성장주의적인 목회였다.
이 네 가지 흐름 가운데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 진보적 급진주의 신학전통,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은 유동식이 ‘한국 신학의 광맥’이라는 책에서 구분한 바 있다. 여기에다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성장적 신학적 흐름을 첨가할 수 있는데 이는 현재 매우 적절하고 한국교회 목회와 신학을 이해하고 평가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상당수의 한국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지향하면서 자신의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노력하는 목회자들의 목회 신학이 이 네 번째 흐름에 속하기 때문이고, 이런 흐름을 분석하고 평가하지 않고는 오늘의 전국 교회의 목회와 신학과의 관계를 바르게 분석,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흐름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흐름이 현재 한국교회 내에 존재하는데, 이 흐름은 복음적 에큐메니칼적 신학전통이다. 이 복음적 에큐메니칼적 신학전통이 무엇인지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를 설명하면서 밝히겠다. 왜냐하면 이 복음적 에큐메니칼적 신학전통은 과거에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1.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김종렬에 의하면 “이 신학전통은 오늘날 대부분의 예수교장로회가 이어 받고 있는데, 이러한 신학전통을 세운 이는 길선주와 박형룡 두 사람이다. 이 신학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성이 강조되며 그의 말씀인 성경의 절대성이 또한 강조된다. 성경의 무오설이 이 신학사상의 대전제가 된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비판적 연구를 배격한다. 성서의 비판적 연구 위에 전개되는 진보적 신학이나 자유주의를 배격함으로써 배타적인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은 교회의 비정치화를 낳게 하였으며, 민족의 구원을 개인의 영적 구원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민족적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개인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부흥집회를 통한 구령운동을 활발히 하였으며 정신적인 위로를 받으면서 위기와 고난을 극복해 나갔다.
이 같은 신학을 바탕으로 한 보수적인 목회가 한국 교회성장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오늘날 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가진 고신측, 합동측과 통합측이 대부분 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 위에 서서 목회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은 최근에 와서는 상당한 변천을 겪고 있다. 우선 이 신학전통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예수교장로회의 통합측의 현재의 신학적 상황은 이 신학전통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없다. 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은 이종성, 박창환 같은 신학자들의 가르침이 영향을 미치면서 근본주의 신학전통과는 상당한 간격을 띠게 되었는데, 그 핵심은 종교개혁자와 정통주의의 복음적 신학의 유산을 이어받으면서도 오늘의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에 대해 개방성을 띤다는 점이다.
이 복음적 에큐메니칼적 신학은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에큐메니칼적 신학의 사회적 역사적 책임성과 이에 대한 공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학이다. 이렇게 에큐메니칼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을 상당부분 수용하고 있는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신학은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은 예수교장로회 고신측과 합동측이 주축이 되어 오늘날 그 신학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을 예수교장로회 고신측과 합동측이 주축이 되어 이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을 문자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교회와 신학자들은 많지 않다. 다수의 교회와 신학자들은 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의 토양 위에 20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된 복음주의 신학의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근본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은 신학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부분적으로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신학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의 신학은 모두 반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이고 성서의 무오성을 강조하고 교회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반대하는 등 대단히 많은 영역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고, 상당수의 교회와 신학자들이 근본주의적 특징과 복음주의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범주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에 와서 상당부분 복음주의 옷을 덧입고 있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는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을까?
보수적 근본주의 목회의 장점과 단점’
1)장점
(1)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의 장점은 우선 이 교회는 성서를 사랑하고 성서의 권위에 복종하려 한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사상 중 하나인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의 정신이 이 교회 속에 거의 그대로 살아 있다.
(2) 성서의 권위가 살아 있는 것은 성서의 교훈을 지키고자 하는 생활과 분리되지 않는다.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 속에는 다른 신학적 흐름의 교회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세속화되어 있고 경건한 생활에 힘쓰는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3)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는 대체로 영혼구원을 교회의 지상 최고의 과제로 삼고 전도에 힘쓰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전도가 교회의 절대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전도에 힘쓰는 것은 우선 긍정적인 장점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2)단점
(1)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가 성서를 사랑하고 성서의 권위에 복종하려 하는 점은 장점이지만 그들의 성서에 대한 이해가 근본주의적 축자영감설이라는 점에 큰 문제가 있다. 이런 근본주의적 축자영감설은 오늘의 발전한 성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경시할 위험이 있고 결국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실패한다는 것은 곧 바른 교회와 바른 목회에 결정적인 문제점을 야기시킬 수 있다.
(2)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 속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속의 이원론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이분하는 이원론은 인간을 전인(The Whole Man)으로 보는 성서의 정신이나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 속에는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이분하는 성속의 이원론은 없다.
(3)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교회는 교회의 역사적 책임에 실패하고 있는 결정적 문제점을 일반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의 교회의 중립은 얼핏 보기에는 옳은 것 같지만 실상은 바른 신학적 결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세력이 약한 자를 폭압적으로 억누를 때 중립이라고 외치는 것은 결국 불의한 세력이 약한 자를 폭압적으로 완전히 죽이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때의 중립은 사악한 방조이고 결과적으로 불의한 세력에 결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의 교회의 입장은 한편이 현저하게 악할 때에는 약한 자와 연대하는 당파성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있을 때는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진보적 급진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2. 진보적 급진주의(사회 참여)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김종렬에 의하면 “이 신학 전통은 오늘날 기독교장로회가 이어받고 있으며, 윤치호와 김재준 두 사람이 이 신학 전통의 초석을 놓았다. 이 신학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복음의 핵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강조한다. 이들의 관심은 망해가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며 민족을 구하는데 있었고, 상실된 인권의 회복과 모든 사회악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사회 정의를 외치는 예언자적 참여의 신학을 전개시키게 되었다. 이같은 신학 전통의 정서 때문에 70년대의 정치신학 내지 해방신학을 쉽게 수용하게 되었으며 서남동과 안병무가 중심이 되어 한국 민중신학을 창출해 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장교회가 이같은 진보적 급진주의 신학 전통 위에 서서 목회를 수행하고 있다. 이들의 목회가 교회 성장을 가져오는 데는 크게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70년대부터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 정의와 인권 회복을 위하여 투쟁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그러면 이와 같은 신학 전통은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을까?
1)장점
(1)진보적 급진주의 신학 전통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전통에 서 있는 교회를 역사책임적 교회로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이 전통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인 김재준은 한국의 역사책임적 신학의 아버지가 되었고, 이 신학 전통은 개혁교회의 신학 전통의 중요한 정신인 역사책임적인 신학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 대단한 장점이 있다.
(2)진보적 급진주의 신학 전통은 한국 장로교회 내에서 성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본격적으로 열게 했다는 점에 또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큰 장점이 있다. 이것은 근본주의적 축자영감설에 빠져서 성서를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을 받고 있었던 한국 장로교회에 바르게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점인데 이는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3)진보적 급진주의 신학전통은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이라는 데 장점이 있다. 이 신학 전통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학적 흐름에 가장 가깝게 존재하고 있고, 제1세계와 제3세계의 신학전통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대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고, 교파신학적인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는 점에 장점이 있다.
2)단점
(1)진보적 급진주의 신학 전통은 사회 참여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복음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길 없다. 진보적 급진주의 신학 전통의 또 하나의 대표적 신학자였던 안병무 사상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인 성자도 아니고 그의 죽음이 만민의 죄를 속량하는 속죄의 죽음도 아니다. 그의 죽음은 민중운동을 하던 사람의 억울한 죽음이었고 그의 부활은 그의 정신이 갈릴리 민중들에게 부활한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전태일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고, “전태일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는 기도가 가능해질 위험이 있다.
(2)진보적 급진주의 신학 전통은 사회 참여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서를 넘어서려고 하는 대단히 위험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신학 전통이 한때는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70년대 이후에 와서는 탈성서화까지 등장하면서 성서의 권위를 상대화시키는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탈성서화의 대표적 신학자는 서남동이었다.
(3)진보적 급진주의 신학 전통은 사회 참여에 있어서 방법론적 문제점을 많이 노출시켰다. 교회가 사회책임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훌륭하지만, 사회책임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못지 않게 어떻게 사회책임적인 교회가 되느냐는 방법론의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전반적으로 좌파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나 사회학적 분석과 해답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나 폭력의 허용 가능성과 역사 발전에 있어서의 민중주체이론 등은 주제에 따라서 논쟁의 여지는 있으나 한국 교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3.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는 목회
김종렬에 의하면 “이 신학 전통은 오늘날 감리교회가 이어받고 있으며, 최병헌과 정경욱 이 두 사람이 이 신학 전통을 수립하였다. 여기서는 기독교의 보수적 서구 전통에 매이지 아니하고 한국의 전통사상과 기독교 전통사상과의 조화를 모색하려는 토착화 신학운동이 윤성범과 유동식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이들의 관심사는 수시로 변천하는 현실사회를 넘어선 민족적인 문화적 전통과 기독교의 진리와의 만남에 있다.
과감하게도 이들은 한국의 재래종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의 문제를 신학의 중요한 과제로 다룬다. 이같은 신학전통 때문에 다른 교단에 비하여 감리교는 오늘날 기독교 신학계에서 많이 논의가 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자유롭게 ?변선환이 이 문제로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논의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성장학에 바탕을 둔 몇 개의 감리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감리교회는 이같은 신학전통위에 서서 목회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신학전통에는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을까?
1)장점
(1)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 전통은,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 전통이 정의, 인권, 민주화 등 주로 정치적 측면에서의 교회의 책임을 강조한 데 반해, 문화적 영역에서의 교회의 책임을 강조했다는 점에 장점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오랫동안 강조해왔던 JPIC(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 속에도 문화적 영역은 결여되어 있다. 이에 반해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문화적 영역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고 그 결과 큰 성과를 얻은 바 있다.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은 한국의 진보적 급진주의(사회참여) 신학전통이 크게 관심을 쓰지 않았던 문화적 영역에서의 교회의 책임을 인식했다는 점에 장점이 있다.
(2)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은 토착화신학을 부르짖었고 이 영역에서의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는 점에 장점이 있다. 교회와 신학의 토착화는 매우 중요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다수 교회는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에 매달려 서구 선교사가 전한 교리와 서양적 문화를 절대화한 우를 범했는데, 이를 비판하고 과감하게 토착화를 부르짖은 것은 명백한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3)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 전통은 타종교와의 대화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도 장점이 있다. 타종교를 마귀시해왔던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에는 큰 충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와의 대화는 21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다원주의이고 이것이 종교적 영역과 결합하면 종교다원주의로 나타난다.
2)단점
(1)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이 토착화신학을 부르짖은 장점은 있으나 가톨릭교회가 토착화를 추진해서 성공한 것과 같은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켰고 상당수의 교회가 토착화에 반감을 갖게 되는 문제점을 남겼다. 이는 윤성범의 성(誠)의 신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설득력이 결여된 언어유희적인 신학은 전개한 것이나 성찬식을 막걸리로 하는 것과 같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심성에 강한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도발적으로 행한 방법론상의 문제점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2)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은 최근에는 종교다원주의와 결합하면서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종교다원주의를 선전하는 신학 흐름으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변선환에게서 나타나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상대화시키는 문제점을 그 핵심에 품고 있다. 이는 과거 한국의 토착화신학의 선구자들에게 나타나는 복음이 문화를 변화시키는 의미에서의 씨앗과 토양과의 관계가 퇴조하고, 모든 문화와 종교를 같은 평면에서 이해하는 혼합주의 신학, 상대주의 신학이 그 자리를 대치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토착화를 추진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가톨릭의 토착화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터전 위에서 행해진 것이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3)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전통의 종교다원주의 신학과의 결합은 교세 감소를 필연적으로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전도를 불필요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에게 전도는 기독교 제국주의의 확산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종교다원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미국의 감리교회의 급격한 교세 감소도 우리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성장주의적인 목회”
김종렬은 실용주의(및 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성장주의적인 목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설명했다.
지난 70년대부터 한국의 경제 성장과 함께 교회 성장의 열기는 대단하였다. 여기에 더욱 부채질한 것은, ‘하면 된다’라는 내용을 담은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책을 써서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킨 바 있는 노르만 빈센트피일(Norman V.Peal), 그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배워 미국에서 ‘수정교회’를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로버트 슐러, 이 슐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교회를 세계 제일의 교회로 성장시킨 서울의 순복음중앙교회의 조용기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교회성장학을 한국에 소개한 이는 서울의 광림교회 김선도이다. 그는 ‘교회성장세미나’를 개최하여 미국의 교회성장학자인 맥가브란(Donard A.McGavaran)과 와그너(C.Peter Wagner)와 헌터(George G.Hunter)의 교회성장학 이론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주의 몸인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병이 들었거나 죽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교회는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떻게 성장하느냐가 문제이다. 교회답게 바르게 건강하게 아름답게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 성장이 결코 교회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교회 성장이 문제로 야기된 것은, 교회 성장이 우리 목회자들의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교회 성장이 목회의 목표가 되고, 목회 성공의 척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회 성장에 필요한 목회 기술을 배우러 다니기에 분주하다. 교회성장에 효과가 있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목회에 적용시키는 일로 인하여, 교회의 순수성과 복음을 변질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토록 지금 우리들의 현장에서는 목회의 ‘최고선’이 되어버린 ‘교회 성장’이라는 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고 목회 과정을 무시하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파행적이고 변칙적인 목회를 하게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실용주의(및 심리학)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성장주의적인 목회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
1) 장점
(1) 이 흐름의 목회의 장점의 첫째는 설교자가 신자들의 영혼을 적극적으로 희망적으로 바꾼다는 점에 있다. 이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심리를 치료해서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인간으로 바꾸는 것인데, 복음이 근본적으로 희망을 의미한다는 점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복음은 절망적인 사회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적인 인간의 심리로 구원한다. 특히, 이 흐름의 교회 가운데 오순절주의 계통의 교회가 많이 있는데 오순절주의 운동이 20세기 초엽의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그늘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운동이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2) 이 흐름의 목회의 또 하나의 장점은 이 흐름이 지향하는 목적인 교회의 성장이 실제로 많은 곳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는 살아 있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명제에서 볼 때 교회의 성장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3) 이 흐름의 목회는 교회 성장에 필요한 수많은 아이디어나 방법들을 과감하게 목회에 적용하고 있는 데 또 하나의 장점이 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교회가 예배의 조그마한 순서하나 바꾸지 못하는 데 반해, 이 흐름의 교회는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욕구들을 때로는 혁명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과감하게 흡수해서 현 시대의 사람들의 종교적 갈증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예배나 교회의 환경과 조직을 바꾸고 있는 데 장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교회음악과 새로운 예배 형태는 대개 이 흐름의 교회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2) 단점
(1) 이 흐름의 목회의 가장 큰 장점은 교회의 성장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회 성장이 과연 바른 교회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있다. 물론 예배의 환경에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다든지 절망 속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치료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든다든지 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교회 성장에 기여하는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흐름의 교회 성장 가운데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을 설교해서 교회를 성장시킨 경우도 상당부분 존재하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상당수의 교회는 신비주의와 결탁하고 있다.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이나 신비주의는 바른 교회를 위해서는 척결해야 할 대상이다.
(2) 이 흐름의 목회의 또 하나의 큰 문제점은 전체적으로 ‘제자의 길’에 대한 설교가 약하거나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값싼 은혜로 전락할 위험과 결부되어 있는데, 기독교 신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고난의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이 흐름의 신학 속에는 발견하기 쉽지 않다. 고난과 실패와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차원 높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결여는 교회를 차원 높은 고귀한 교회로 만드는데 실패할 가능성과 결부된다.
(3) 이 흐름의 교회 속에서 자주 눈에 띄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이 흐름의 교회 속에서는 특정 인물이 우상화되는 경향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 특정 인물의 사유화되는 경향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특징들이 이 흐름의 교회 속에 일부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런 우상화를 막을 수 있는 신학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개혁교회 신학의 핵심 정신을 목회자에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계속> (2006. 10. 17. 크리스천투데이)
김명용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Th.M.)졸업
독일 정부의 아데나워(Adenauer) 재단 초청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
독일 튀빙엔 대학교 신학부에서 신학박사 학위 취득
반석교회 담임목사 역임
미국 프린스턴(Princeton)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역임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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