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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가 정 교 회

가정교회, 쟁점과 과제

가정교회, 쟁점과 과제

 

이성구 박사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변화와 갈등

존재하는 것은 늘 문제를 만난다. 개인이나 가정,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도 늘 크고 작은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 어쩌면 아무 문제가 없는 때가 오히려 심각한 상황이 형성되고 있는 시점인지도 모른다. 개인이나 공동체 모두 문제가 있다면 일찍 노출되는 것이 좋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조기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루라도 빨리 문제점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흔히 병은 자랑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야 서로 알고 있는 치료법을 나누고, 이름난 의사나 병원에 대한 정보를 더 빨리 얻을 수 있다.

        

‘가정교회’ 운동이 자칫 파문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적어도 고신교회 안에서는 당분간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될 것 같다. 부산노회는 ㅊ 교회가 ‘가정교회’로 전환하면서 발생한 내부 갈등이 사건화 되어 노회가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노회의 중재로 문제가 조용히 해결될 것을 기대했지만 갈등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자칫 개교회 문제가 노회를 거쳐 총회로 확대될 위험이 있고, 그러다간 교회의 본질, 성격, 조직 등과 관련하여 성경적 신학적인 토론이 필요한 일이 감정적, 정치적 사안으로 변질될 우려가 없지 않다. 조기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성급하게 사건을 처리하려다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고, 필요 이상의 갈등과 긴장, 혹은 분란을 일으킬 수 있음을 교회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본질과 성격에 관하여 의문이 생겨난다면 마땅히 총회의 의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개혁장로교단(CRC)이 여성안수 문제를 두고 20년 이상 토론을 거쳤던 것처럼, 교회가 무슨 일을 섣불리 시행하려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새로운 시도를 저지하려해서는 곤란하다. 교회와 같이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확실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새로운 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터무니없이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정당한 절차와 심도 있는 검토와 토론을 거쳐 보다 나은 결론을 도출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사안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현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일방적인 비방이나, 근거 없는 왜곡은 금물이다.

        

교회에 논쟁이 발생하면 저마다 ‘진리’, ‘말씀’, ‘개혁주의 신학’ 등등의 가장 정통 보수적인 원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상대방을 ‘비 진리’, ‘탈 성경’, ‘반 개혁주의자’로 매도하기 일쑤다. 그래서는 안 된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비판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도전적인 이론과 현장 앞에 선 사람들의 고민에 동참하려는 자세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막 논란이 시작되는 ‘가정교회’. 정보의 부족, 소통의 부재, 상호 이해 부족으로 소모적인 논쟁에 빠지기 전에, 10여 년 전부터 한국교회에 소개되고 도입되기 시작한 ‘가정교회’ 운동의 핵심 쟁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본격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필자에게 주어진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정교회의 이론을 습득하고, 현장을 바르게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가정교회에 대한 이론을 분석하거나, 사역 현장을 속속들이 들여다 본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관계로, 우선 필자의 눈에 비치고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문제점을 일단 제기하고자 한다. 가정교회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게 되면 보다 구체적인 분석과 진단이 이루어질 것이다.


가정교회,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

오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정교회’ 운동은 자주 미국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최영기 목사와 연결된다. 그러나 가정교회 운동은 70년대에 랄프 네이버가 주창한 셀교회로 부터 추적해 보아야 한다. 2005년에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랄프 네이버는 70년대 조용기목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고백한 바 있는데(http://kr.blog.yahoo.com/ lodemtrees/2291), 그는 능력 있고 성경적인 교회의 모델을 찾아 결국 셀교회를 그 대답으로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셀교회 운동을 한걸음 더 신약성경적으로 발전시킨 운동이 가정교회라는 것이 가정교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볼프강 짐존, 가정교회, 2004). 교회는 본래 대그룹모임과 소그룹 모임으로 이원화 되어 있었고, 그러한 두 날개를 통하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였는데,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과 380년 테오도시우스 주교와 그라티안 주교의 친기독교적 명령에 의해 가정중심 교회가 화려한 성당중심의 교회로 변질되면서 핍박받던 초대교회 시대에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가정교회는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프로그램 중심으로 지나치게 화려해져 오히려 역동성을 잃어버린 오늘의 교회를 이전의 초대교회의 모습인 가정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러한 가정교회 운동이 주창하고 있는 특징들에 관하여서는 앞으로 여러 논자들이 소개할 것으로 여겨지므로 필자는 여기서 가정교회운동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는 ‘가정교회의 완전한 독립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가정교회 권위자인 짐존이나 풀러신학교 교수인 뱅크스(Robert Banks, 교회, 또 하나의 가족, 1999)는 셀교회와 가정교회의 차이를 셀교회가 각 셀을 조율하고 통제하는 본부개념의 조직을 중시하는 데 반하여 가정교회는 자율적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셀교회는 여전히 피라미드 구조와 프로그램 중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반면, 가정교회야 말로 단층구조로 되어 있는 가장 신약적인 교회라는 입장이다. 교회를 부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할 때 각 가정에서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 역시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잘못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초대교회가 가정에서 모인 증거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행2:46; 고전16:19; 몬1:20 등) 언뜻 보아 딱히 가정교회를 거부할 명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가정교회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가정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성급함

가정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발생하는 이유들이 여럿 발견된다. 우선 가정교회를 지향하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지나치게 성급한 변화를 요구하는 점이다. 95년 방한한 적이 있는 랄프 네이버는 전통적인 교회를 셀교회로 바꾸는 데는 적어도 25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성급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열린 예배의 도입을 그 예로 들면서 미국교회에서도 성급한 변화를 시도하여 실패한 경우가 적지 않음에 유의할 것을 촉구 하였다. 실제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흐름을 소개받게 되면 즉시 개 교회에 도입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필요이상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쉽게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교회는 진리추구와 상관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일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워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가능한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도록 목회자는 시행하고자 하는 일의 목적과 방향을 구성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획일화

가정교회는 그룹 인도자를 목자와 목녀, 예비목자, 대행목자 등으로 부르고, 소그룹을 목장이라고 한다. 물론 기존 교회들도 감리교가 시작한 구역모임을 다락방, 사랑방, 순, 셀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데 가정교회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체 교회의 틀을 가정교회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가정교회의 대표격인 휴스턴 서울침례교회가 시행하고자 하는 가정교회 네트워크 등록양식에 따르면 가정교회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동일한 용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한 지역의 가정교회에서 생활하다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이 동질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자칫 가정교회라는 틀이 우선시되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한 때 한국교회에 광풍을 안겨주었던 다락방 운동 역시 ‘앞으로 모든 교회는 다락방이 될 것이다’는 식의 획일화의 위험에 빠져들어 결국 이단시되고, 다른 교회들로부터 배척을 받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구조적 변화를 겪어왔다. 가정에서 모이기 시작하던 교회는 점차 감독교회로 고착되었다. 교황 제도, 계층적 성직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1053년에 이르러 동서방교회로 나누어지긴 했지만 감독교회 형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교회는 차츰 전통을 성경의 권위에 버금가는 것으로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고, 중세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교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학적으로 비성경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제거할 뿐 아니라,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교권의 폐해를 경험한 교회는 교회 정치구조를 혁신적으로 바꾸었다. 철저한 감독교회에 정면으로 반발하여 아예 개교회가 독립적이며 완전하다는 입장을 가진 회중교회 운동이 생겨났다. 그러나 지나친 독립성이 가져다 줄 위험성에 대비하고, 예루살렘 공회로 대표되는 교회의 회의를 무시하지 않으며, 이미 초대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장로의 회’를 고려한, 감독교회와 회중교회의 중간쯤에 자리한 장로교회 제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가정교회 운동은 교회 정치적으로는 회중교회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이미 수백 년에 걸쳐 확립된 역사를 가진 장로교회의 반발을 살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오랜 전통 속에 익혀온 교회의 용어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면서 일어나게 되는 괴리감도 적지 않은 장애거리가 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전통적 교회와의 단절

개혁주의 교회는 전통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이루어 온 전통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권위를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교회가 역사적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가정교회는 개체의 독립성을 강조함으로써 주일 낮 예배는 가정교회 연합예배로 칭하여 진다.

 

지역교회의 단일성보다는 가정교회의 독립성이 강조되고 거기에 주력하다 보면, 전통적인 모임이 불가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령 일부 가정교회는 남전도회, 여전도회 등 기존의 기구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가정교회 활동에 집중하게 되면 성도들이 시간적으로 다른 모임에 여유를 가지기 힘들어 자연히 가정교회 이외의 조직은 무게를 가질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있다.

        

이러한 조직의 단절은 개 교회에 내부 문제로 그치지 않고 노회나 총회단위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된다. 다른 교회나 노회단위의 기관들과도 교제할 대응기구가 사라지면서 가정교회 중심의 교회는 결국 철저하게 개별단위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교회나 교제단위와의 연결방안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교회는 보편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말이다. 가정교회가 침례교회와 같이 개교회의 독립성과 완전성을 바탕으로 하는 회중교회에 적합한 개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직분과 사역의 괴리 발생

전통적인 교회가 가정교회 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부딪힐 수 있는 어려움 중에서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역시 교회의 기존 직분과 직분에 따른 역할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일 것이다. 장로교회에서 장로, 혹은 장로들의 회인 당회의 역할은 지대하다. 대의정치 제도를 채택하는 장로교회는 장로의 회에서 예배와 관련된 영적인 일들과 기본적인 재산에 관한 일을 관리하고 필요한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가정교회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면 자칫 장로의 직분과 역할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가정교회는 교회의 주된 활동이 개별 가정교회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다. 목원이 목자를 선택하여 그룹을 이루게 되면서 교회의 모든 활동은 그야말로 개개 성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다. 장로나 당회의 역할은 수렴된 의견을 종합하는 기능을 할 뿐 대부분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가정교회 목자를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과연 장로나 당회가 굳이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지 회의를 느낄 수 있다.

       

가정교회에서 전통적인 직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목자 목녀 목원등의 호칭을 사용하게 되면 전통적인 장로 집사 권사의 호칭이 의미를 잃게 된다. 많은 경우 아예 한국교회 안에서 특별하게 발달한 직분명을 이름 대신 부르기보다는 아예 서로 형제자매로 호칭하도록 하여 그야말로 한 가족 됨을 느끼게 만드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렇잖아도 권위의식에 젖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온 전통적인 교회의 직분은 점점 더 권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만약 기존의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가 사정상 가정교회의 사역에 헌신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현재 가진 직분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흐름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어 그 괴리감은 심각해질 수 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사역에 헌신적인 사람들이 직분을 받게 되어 정상화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직분과 역할의 괴리로 인하여 심각한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가정교회가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파악하고 몇 개의 목장을 아우르는 ‘초원’과 같은 조직적 보완을 하고 있지만, 가정교회의 본래 의도는 철저하게 자발적이고 독립된 소그룹중심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전통적 직분 개념이 의미를 잃을 수 있는 개연성이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가정교회의 과제

위와 같이 현재 행해지고 있는 가정교회에 대한 단편적인 분석은 결국 ‘가정교회의 독립성과 완전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분명히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와 성전에서 모이는 교회로 이루어졌다. 가정교회와 가정교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지역교회를 두 축으로 초대교회가 움직여갔던 것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여기서 각 지역 교회는 대그룹과 소그룹의 두 가지 형태를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원리를 세울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각 교파나 교단을 불문하고 바로 이러한 두 그룹의 조화를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소그룹인 가정교회가 과연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처럼 독립적이어야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초대 고린도교회 내에 이미 가정교회 간의 분파적 갈등이 발생하여 바울이 화해를 위해 애를 썼던 것을 볼 때(고전1:10-17) 가정교회를 엮어낼 교회의 존재는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교회 운동을 두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두 그룹 가운데 지나치게 소그룹, 즉 가정교회 중심으로 교회를 움직여가려 하는 것 아닌가라는 의혹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교회를 ‘독립적이고 완전한 교회’로 간주하게 될 때, 그래서 심방 교제 섬김 훈련 등 대부분의 일들을 가정교회 중심으로 움직이게 될 때, 대그룹으로 모일 때에 필요한 장로나 당회의 역할이 점차 사라지게 될 것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당회원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정교회를 위하여 헌신할 수 없는 경우, 심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맛보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개연성은 목회자가 조금만 유의하면 실재화 할 가능성은 적다.

        

아직 가정교회가 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구체적인 문제를 야기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자연스러운 접촉의 장소로서의 가정교회의 역할을 강조하여 전도의 실제적인 장으로 삼아간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다만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현재의 교회가 분열을 겪게 된다면 즉각 멈추어야 할 것이다.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결코 성령의 사역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그룹으로서의 교회가 겪는 교제, 섬김, 봉사의 소수 독점, 혹은 다수의 방치를 방지하고 전도의 역동성을 강화시키는 방안으로써 각광받고 있는 가정교회가 또 하나의 프로그램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 때문에, 지나치게 가정교회의 완전성이나 독립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유의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