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은혜로운말씀/개혁해야할신앙

잘못된 교회 정치와 복음

잘못된 교회 정치와 복음

이세령 교수님



교회 정치는 교회를 세우는 질서이다. 그렇기에 교회정치는 세상 정치와 다른 교회적인 논리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교회적인 논리는 바로 복음이다. 세상의 적자생존, 경쟁, 힘의 논리등과 다른 것이 바로 교회 정치의 논리이다. 섬김과 잃어버림과 낮아짐 그리고 거룩함의 보존이다.

오늘 고신교회가 격고있는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교회를 움직이는 교회정치의 논리에 세속적인 방식이 너무 깊이 자리잡음이다. 현재의 시점으로부터 거슬러서 짚이는대로 나름의 연결을 구하되,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피려한다.

1. 현재의 고려학원 관선이사 해결노력


교회가 수익기관을 둘수 있는가의 기본적인 물음 제기가 계속되고 있는가운데, 고신교회는 이렇게 답을 하고 있다. 일단 살리고보자. 그리고 살리기 위해서 예배당도 저당잡히고, 교회를 봉사하기 위해서 세운 기관들의 건물도 저당잡히고, 더우기 선교사들의 후생과 관련된 비용들도 저당잡힌다. 그리고 성도들은 헌금을 계속하라고 홍보를 한다.

만약에 신학적으로 교회가 수익기관을 두는 것이 옳지않다고 결론이 난다면 이 모든 노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신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병원을 살려야 하는가? 오히려 병원을 끊고나면 신학교가 참되게 사는 방식이 있지 않는가?

이즈음에 경제논리가 동원된다. 저 웅장한 건물이 아쉽고, 다시 건물을 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라고 질문한다. 과연 교회가 헌금을 할 것인가를 의문시한다. 교회는 자신을 인도할 목자를 위해서 지금도 헌금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의문시한다. 어리석은 질문이 아닌가? 교회는 지금도 신학교를 위해서 헌금하고, 목사를 양성하는 일이 중요하고 이일만은 교회가 할일이라고 여기고 사람을 기르고 후원하고 상회비를 기꺼이 내고 있다. 그런데 그 돈을 전부 병원살리는 일에 집어 넣고 있다.

병원이 살면 신학교가 살것이라고 누가 보장해 주었는가? 진리와 순결한 거룩함 그리고 잃어버림 때문에 교회와 신학교가 살수 있는 길이 있음을 왜 재산으로 환원시키는가?

교회가 가진 복음의 논리로서 오늘의 문제를 정확히 보려고 하지 않는다. 회계의 손익은 볼수는 있어도 교회가 생존하는 논리는 잃어버리고 있다. 교회와 신학교는 진리와 거룩함을 붙잡기 위해서 즉 나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자리에서 더 안전한 자리매김이 가능하다.

섣부른 정치논리와 경제감각으로 교회문제를 다루지 말자. 교회는 무어라해도 복음의 부요함이 있다. 다시 한번 논의를 시작하자. 교회가 과연 수익기관을 가지는 것이 옳은가? 그리고 이것을 살리기 위해서 교회의 헌금을 이렇게 부어넣어도 되는가?

2. 이성구 교수 학위 논문에 대한 총회 결정과 동대구 노회의 목사 제명


이성구 교수의 학위 논문에 대해서 오경의 영감을 부정하는 입장이라는 교회의 판결을 내렸다. 교회가 결정하면 전부 옳은가? 결정에 진정성이 있는가? 신학교의 교수회의가 문제가 없다는 결정을 하여서 받은 것을 그리고 총회가 주석을 쓰는 것으로 문제를 정리한 것을 다시 소총회를 열어서 뒤집고, 본인에 대한 공회의 소명기회도 한번 없이 교회가 결정을 했다. 여기에 타락한 교회 정치적인 논리가 없는가?

세상정치의 추악한 면이 이데올로기로서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 현실에서는 빨갱이로 대표되는 메카시 방식이 존재했다.

정치적인 행위에 분명한 잘못을 지적하고 도의적이며 실증적인 죄목으로 교수의 자리를 내어놓게 해야한다. 근거도 없이 신학적인 문제로 사람을 잡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교회 정치는 교회를 압살하고 진리를 가리운다. 개혁교회의 성경관을 좀 더 검토해보자. 독자의 선입견으로 채워서는 안되는 구약학의 학문적 논리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정치라는 수의 논리로 표결해 버렸다.

마찬가지의 한 측면이 동대구 노회가 목사를 연속해서 3명이나 제명한 일이다. 주일과 십일조에 대한 입장이 신대원 교수들과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문제가 없음이 확인되어도 정치적인 논리에 의해서 제명을 한다. 이단은 아니지만 함께 할수 없다는 것이 정치적인 논리가 아닌가? 교회의 헌법은 해석의 외연이 시대에 따라서 적용하는 과정에서 제고될 수 있다.
교회의 전통이 진리와 양심을 질식시켜서는 안된다.

같이 할수 없어서 제명한다.
무슨 패거리 정치집단이 교회나 노회인가? 서로 부족하기에 함께 격려하며 같이 가야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 집단이 아니기에 진리에 위배되지 않으면 서로 안고 이해하고 가야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 아닌가? 교회 정치가 복음을 밀어내고 있다.

4. 신대원 독립과 개혁파의 정치적 오류


신대원을 전문대학원으로 전환하자는 이야기는 오래되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진행했던 분이 신대원 원장었다. 실제로 총회가 이를 결정하려는 분위기로 갔다. 그러나 이에 결정적으로 제동을 걸었던 흐름이 개혁파의 세력이었다.

당시 원장의 논리는 교회가 신학교를 직영하는 것 외에 다른 수익기관과 교육기관을 가지는 것을 반대한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개혁기관들은 교회의 성도들이 운영하는 일이지, 교회가 직접 운영하는 일이 아님을 밝혔고, 이러한 신학적 교회적인 논리에 근거해서 신대원을 고려학원 법인에서 독립하기를 요청했다. 더욱 국가에서도 전문대학원 제도가 신설되어서 여건이 조성되었다. 수도권이라는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시도는 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다양한 반대 의견속에는 고신 대학은 남이냐는 여론을 몰았다. 그리고 교회 정치적인 논리를 가지고 두개의 학원 이사회를 조직하여 정치적인 자리나눔을 하려고 한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지웠다. 결국은 교회의 본질적인 이해속에서 교회를 역사적인 형태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은 정치 논리와 현실 논리에 의해서 물거품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 비록 관선이사 직전 총회가 분리를 결정했지만 그러나 시기가 늦어져서 이제 고려학원의 세기관은 한배를 탄채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현재 신대원만을 살리자는 논리가 결코 성립될수 없는 자리에 이르지 않는가? 결국은 신대원에 자연과학부가 올라오며, 대학은 신급과 관계없이 학생을 모집하자는 안이 나온다. 결코 신대원이 홀로 안전한 지대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신대원의 분리 결정이 너무 늦었다. 왜 그때 바른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논리로 분리를 하려고 할때 이를 개혁파를 비롯해서 교회는 거절을 했는가? 정치논리의 결정적 함정이다.

현재에 개혁파가 그 실질적인 지도력을 상실한 이유로서 바른 교회적인 논리로서 교회를 세우고 이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닌 것을 말하는 것과 온전한 것을 견인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으로 함께 가야한다. 병원과 관련된 많은 부정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신학교를 세우는 긍정을 했었어야 했다.

3. 고신대학 인가와 속임


고신대학을 인가받기 위해서 교회의 결정없이 인장을 도용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대학은 공익법인이었던 복음병원을 수익기관으로 변경하였고 오늘에 이르렀다. 병원은 커졌고, 대학도 발전했지만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터지기 직전이다.

이것은 이사회를 거짓으로 조직한 일의 연속선 상에 있다. 도대체 신학교나 그 건물과 재산이 얼마나 귀하기에 교회는 스스로 가진 복음의 권세를 포기했는가? 코람데오는 누구를 위한 슬로건이었던가?

4. 환원과 신학교


합동이 잘못되었으므로 환원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그렇듯한 논리이다. 그러나 왜 합동이 잘못되었는가? 졸속이었을수 있지만 오랜 역사의 서구의 교회와 달리 한국 교회는 피선교지였고, 전쟁을 격고난 어수선한 한국 교회가 자신의 방식과 필요에 의해서 한 교회됨을 이루었다. 몇가지의 합동을 위한 조건들이 있지만 그 무엇보다 한 교회 됨은 중요하다. 분리를 만들었던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는 이를 서로 부둥켜 안고 받았다.

그리고 나서 정치적이던 혹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인지는 모르지만 합동측은 합동조건과 달리 고려신학교를 페교시키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표시하였고 이에 당시 고신은 하나된 교회를 다시금 깨뜨리고 환원을 하였다. 하나된 교회를 유지하는 일에 절대적인 걸림돌은 고려신학교라는 유무형의 재산이었다. 합동측에 박윤선 박형룡 교수가 있었다. 합동측이 자유주의 신학이기때문에 환원했다고 말할 수 없다. 즉 고려신학교가 진리 그 자체일수 없다. 복음은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다. 한시대의 진리의 상징은 참된 교회앞에 사라지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나면 그 의미를 후일 역사가 설명하고 교회가 말해 준다.

하나된 교회를 만들면서 고신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자는 복음의 논리를 가졌다. 그러나 환원하면서 우리는 정치적인 공세에 정치력으로 맛섰다. 복음이 가진 잃어버림의 실제가 고려신학교일수는 없었을까?

글을 마치면서


거듭 교회의 위기는 복음의 논리를 잃어버리고 세속화된 교회정치의 논리에 휩쓸릴때 일어난다. 지금도 문제를 수습하는 논리가 타락한 정치 논리와 산술 논리에만 집착하면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다. 현실이 유지되는 것이 진리가 아니다. 급한 것처럼 보였던 수습은 벌써 일년을 지나고 있다. 그동안 논의를 제기했지만 급하다는 현실에 논의조차 해보지 못했다. 바른 교회의 논리로 수익기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다루고 문제 수습방안을 찾는 지혜를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시고 이를 믿음으로 수용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