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장로교회의 핵심 교리인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 문답을 한번도 공부하지 않은 장로교인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장로교인이나 감리교인이나 침례교인이나 별다른 차이점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또한 '왜 나는 장로교인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체성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장로 교회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신학적 관점에 따라 개혁주의와 알미니안 주의로 크게 두 갈래의 길을 가게 되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칼빈의 개혁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반면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의 의지를 첨가하는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후 개혁주의는 영국의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형성된 장로교회(prsbyterian church)와 화란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혁교회(reformed church)로 발전했다. 그러나 장로교회나 개혁교회는 칼빈의 개혁 사상에 근거한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별개의 노선을 정립한 것이 아니다. 단지 영국의 전통을 가지면 장로교회로, 유럽의 전통을 가지면 개혁교회로 나누어 호칭할 뿐이다(물론 광의적 의미에서 그렇다).
그 중에서 장로교회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 소요리 문답에 기초한 교리를 고백한다.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은 영국 왕조와 분리된 의회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신학자 총회를 소집하여 영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의식, 권징, 정치를 할 수 있는 보다 완전한 개혁을 단행하여 가까이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나 대륙의 개혁 교회와 일치케 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통해서 작성되었다. 참석자들은 151명으로 30명의 평신도 사정관과 121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이 장로교 소속을 갖고 있었다. 이 외에 감독교회파와 독립교회파와 에라스티안파 등이 있었다.
대요리문답은 주로 성인과 목사의 교리 교육과 설교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특히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의 각 조항을 더욱 자세하게 주석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소요리문답은 대요리문답의 주제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아이들의 교육용으로 작성되었다.
이 요리문답서들은 1647년 가을에 심사와 승인을 받기 위해 의회로 보내졌으며, 에딘버러 총회는 1648년 7월 20일에 대요리문답을, 7월 28일에는 소요리문답을 각각 승인하면서 이 두 요리문답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교회 정치에 위배된 것이 전혀 없다"라고 선언했다. 이 결정 사항은 1649년 2월 7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비준을 받기도 했다. 이와 같이 개혁주의 장로교회에서는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과 요리문답를 표명하면서 교리로서의 기독교와 생활로서의 기독교 사이에 선택의 자유를 엄히 거절하고 오직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따라 전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지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장로교회에서 그 표준 문서로 채택한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과 요리문답들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장로교는 장로교회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교회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목사들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라도 교회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각성하고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 소요리 문답을 가르침으로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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