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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알 파 코 스

이성과 신화 사이에서

이성과 신화 사이에서
      (요한복음1:14,요한일서1:1)

김명수 목사(2007/4/20) (경성대학교 신학과 교수)


요한복음의 서문에 해당하는 1 1-18절을 “로고스 찬가”(Logos Hymnus) 라고 한다.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가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로고스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이 서문에만 등장한다는 점이다.

“로고스 찬가”는 요한복음 전체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로고스는 창조의 매개자요, 구원의 매개자이며, 동시에 육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 그 골자를 이루고 있다.

 

     [1] 로고스’(logos 理性) ? 뮤토스’(mythos 神化)?

 

예수가 태어나기 400년 전 그리스 아테네에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살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아테네 시민들의 의식은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인 신화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호머(Homer)의 작품들인 오디세이(Odyssey)와 일리아드(Iliad)에 등장하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 그리스인들의 정신풍토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그리스 사회에는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흉내 내거나,

니면 마치 자기가 신이나 된 것처럼 행동하고 예언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행동은 아테네 시민들의 건전한 시민의식을 마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분열시켰다.

이러한 아테네 시민사회의 아노미(anomy) 현상을 플라톤

신화의 가치나 전통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신화가 지배하게 될 때 그 사회는 이성과 합리성을 잃게되고, 혼돈과 무질서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사회는 무엇이었는가?

로고스’(logos 理性)에 의해서 ‘뮤토스’(mythos 神化)가 통제되는 사회였다.

이성에 의해서 신화가 통제되어야 그 사회가 질서를 회복하고 건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다름 아닌 철학자가 정치를 해야 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플라톤의 로고스 사상은 요한복음의 로고스 기독론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예수보다 20년 정도 앞서 출생한 디아스포라 출신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히브리 사상을 희랍사람들에게 번역하고 소개하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는 히브리 성서에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참여했던 소피아(sophia)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희랍어의 로고스(logos)로 선택하여 번역하였다.

요한복음 저자는 플라톤과 필로로 이어지는 희랍사상의 보편적 개념인 로고스를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2] 로고스’(logos 理性)와 요한복음

 

‘로고스’(logos)는 원래 ‘말하다’를 뜻하는 희랍어 동사형인 ‘레게인’(legein) 의 명사형이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 말을 한다는 점에서다.

말은 무엇인가? 일종의 소통(communication) 도구이다.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때 말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바가 서로 소통이 되려면, 말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 어야 한다.

 

말씀(로고스)은 곧 이성이고 합리성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들이 믿고 따르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이 로고스의 화신(化身)이라고 선포하였다.

우리가 신앙하는 나사렛 예수가 다름 아닌 육이 된 로고스인데,

그분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신 분이며

그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최종적으로 편집된 시기는 언제인가?

기원후 100년경이다. 영지주의가 기독교 안에서 세력을 뻗어가던 시기였다.

영지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육이 아니라 순수 영적인 존재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순수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몸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인간의 모든 희노애락애 오욕은 바로 몸을 가졌기 때문에 생기게 된다.

몸이 없다면, 고통을 당할 수 없고 죽을 수도 없을 것이다.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도 그들에게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단지 ‘~처럼’ 보였을 뿐인 가현사건(假顯事件)에 불과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예수사건을 몸이 없는 순수 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종의 ‘신화’(神話)로 만들어버렸다.

 

예수사건의 신화화 작업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분열을 부추겼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요한 교회공동체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사활을 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한복음 서문의 “로고스 기독론”은 바로 이런 위기상황에서 나오게 된 중요한 신학선언이다.

 

요한복음 1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살았다”

(kai ho logos sarks egeneto kai eskenosen en hemin)고 선언한다.

 

‘에게네토’는 ‘기노마이’(ginomai)의 단순과거 완료형인데,

독일어의 ‘werden, 영어의 ‘become’ 또는 ‘come into being’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사건은 단지 “-처럼 보인” 허깨비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가운데 일어난 몸 사건이며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logos tes zoes)에 관하여는 우리가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예수사건은 신화가 아니라, 로고스가 육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살았던 사건이요,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사건은 몸 사건이요 이성 사건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로고스(logos)가 뮤토스(mythos) 위에 있어야 하고,

이성(理性)이 신화(神話)를 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예수사건을 이성으로 깨닫고, 이성으로 믿고 이성으로 따를 때, 신앙이 바르게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발이 허공에 떠 있어서는 안 되고, 발을 땅에 딛고 서서,

머리를 하늘로 향하는 성육신(incarnation) 사건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땅과 무관한 하늘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요한교회는 땅에 묻힌 하늘, 땅이 된 하늘 이야기를 한다.

땅과 하늘은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둘도 아님을 증언하는 것이 성육신 신앙이다.

 

 

[3]  동학에서도 보이는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와 성육신 사상

 

요한일서를 기록한 장로 요한은

예수사건을 신화로 만든 영지주의자들을 향하여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한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4:2-3)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잣대로 무엇이 제시되고 있는가?

예수가 육체로 온 것을 시인하는가, 그렇지 아니한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예수사건을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이성’으로 파악한 요한교회의 성육신 사상은

동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학은 수운 최제우에게서 시작된다.


그는 1824년 경주에서 몰락한 유학자 최옥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유교를 체계적으로 학습하였다.

17세에 부친을 여읜 수운은 19세에 울산 박씨와 결혼하였는데,

이듬해 집에 불이 나서 가세가 기울게 되자 20세쯤 집을 떠나 14년간 조선팔도를 주유한다.

그 후 떠돌이 생활을 접고 고향인 경주 용담으로 돌아와 오두막집에서 칩거하며

도를 닦는데 전념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수운이 기도하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가 마음을 가다듬고 “넌 누구냐”하고 물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라, 인간들이 이것을 어찌 알겠느냐”(吾心卽汝心 人何知之).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요, 하늘님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친 순간

수운은 득도(得道)하게 된다. 그의 나이 36세 되던 해인 1860 45일에 생긴 일이다.

 

하늘과 땅, 하늘님과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울려 소통(communication)하는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동학이 시작된 것이다.

1년이라는 칩거기간을 거쳐 수운은 자신의 득도체험을 사람들에게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몰려들어 제자가 되었다.

그 중에는 용담골 건너 마을 검등골에 사는 최경상(1827~1898)이라는 일자 무식쟁이가 있었다.

그분이 후에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된 해월 최시형이다.

 

바울의 생업이 텐트를 만드는 ‘텐트 메이커’(tent maker)였다면,

해월의 생업은 멍석을 짜는  ‘스트로 매트 메이커’(straw mat-maker)였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해월은 새끼를 꼬아 멍석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관군을 피하여 전국을 돌며 접주(接主)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그는 항상 새끼 꼬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꼴 새끼가 없으면 풀어서 다시 꼬았다.

이를 본 제자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하늘님은 쉬는 법이 없는데(至誠無息-중용), 내가 어찌 쉬겠는가” 라고 대답하였다

 

수운의 설법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된 사람 중 수련하면서

21자 주문(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을 외우는 가운데 

‘하늘의 소리’(天語), 곧 방언을 받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입신의 경지에 들어서 방언을 하며 천어를 들었다고 하는 제자들은 이를 자랑하고 다녔다.

 

해월도 천어를 들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는 스승을 찾아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 천어를 들을 수 있습니까?” “두문불출하고 한 자리에 앉아

수심정기하여 주문을 계속 외워보게.” 수운의 대답이었다.

 

많은 무리가 모여들자 예수께서 자리를 피하셨듯이,

소문을 듣고 전국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수운은 아무도 모르게 몸을 피하였다.

전라도 남원 근처 교룡산성의 선국사(善國寺)라는 절로 피신하여, 은적암(밀덕암)이라는 암자를 빌려

그곳에서 5개월동안 피신생활을 했다. 동경대전이 이 때 쓰인 작품이다.  

 

수운이 잠적한 후 해월은 천어를 듣기 위해 화전리 꼭대기에 앉아서 한겨울 두어 달동안

거적을 쳐놓고 밤낮없이 수련정진하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그 어떠한 천어도 들리지 않았다.

답답한 나머지 해월은 동짓달 한 밤중에 발가벗고 개울에 풍덩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찬물에 급히 뛰어들면 몸에 해로우니라.

 

그 이듬해 봄이 되자,

전라도 남원으로 몸을 피했던 수운은 아무도 몰래 경주로 돌아와 곽대오라는 사람 집에 머물고 있었다.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했던 해월이 어느 날 우연히 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 갔더니 뜻밖에 스승이 계신 것이 아닌가. 절을 올린 다음 자리에 앉자마자 수운이 그에게 물었다.


“그래, 자네는 그동안 하늘님의 소리를 들었는가?

“예, 듣긴 들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찬물에 들어가면 몸에 해롭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언제쯤인가?

“동짓달 어느 날입이다.

“몇 시쯤이었는가?

“새벽 한시쯤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수운을 무릎을 탁 치며,

“옳다. 내가 그날 그 시에 그 말을 했느니라. 추운 겨울 한 밤중에 도인들이 수련한답시고

밖에서 찬물 끼얹는 소리가 들리기에 문을 열고 큰 소리로

‘급히 찬물을 끼얹으면 몸에 해로우니라’(동경대전 修德文) 하고 외쳤다.

그때 그 소리를 네가 들었구나.

 

수심정기(守心正氣)하면, 곧 마음을 지극히 가다듬고 기운을 바르게 하면,

시공을 초월하여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운의 소리가 해월에게 까지 들린 것이다.

 

해월이 들었다는 하늘의 소리는 무엇인가? ‘갑작스레 찬물에 들어가면 몸에 해롭다.’는 것이다.

해월은 특수한 신비체험 속에서 천어(방언)를 들은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이성의 소리하늘의 소리가 결코 둘이 아니었다.

 

[4] 무엇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해월의 이러한 이성적인 하늘님 체험은 세상만물이 하늘을 모시고 있으니

서로를 하늘님처럼 섬겨야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이나,

우리 안에 모시고 있는 하늘을 배양하여 길러야 한다는 양천주(養天主) 사상에 이르러 더욱 확대된다.

 

모든 식물에 하늘이 스며있으니 식사(食事)는 곧 하늘이 하늘을 먹는 이천식천(以天食天) 사건이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식사는 성찬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해월의 이러한 이성적인 하늘님 체험은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로 이어지는 ‘삼경사상’으로 발전하여

동학의 역동적인 생태실천윤리로 자리를 잡아간다.

해월에게서 성()과 속()은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서로 소통된다.

성 속에 속이 있고, 속 가운데 성이 있다(Oneness of cosmic life).

 

요한 교회공동체는 영지주의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이고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요한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영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론적 물음의 대상이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오늘 나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요한은 묻는다. 해월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늘이 무엇이고 하늘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내 안에 있는 하늘님을 모시고 기르며 산다는 것이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요한 교회공동체가 역사적 이성인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다면,

해월은 일상세계와 우주적 이성 속에서 하늘님을 체험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의 성육신(incarnation) 사상이

해월의 삼경사상에서 우주 만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화는 인간의 지적 능력(the intellect)을 마비시키고,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술이나 주술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신화가 부정되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과 삶을 주도해서는 안 된다.

물론 신앙생활에서 이성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신앙을 주도해야 한다.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이 없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물위를 걷고, 1 더하기 1 100이 되고 1000이 된다는 식의

허황된 환상을 심어주는 신화적 신앙이 아니라,

1 더하기 1 2라는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이 한국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이성적인 신앙이 근본바탕이 되고, 그 위에 신비적인 신앙도 부정되지 않아야 한다.

이성에 의해서 신앙(신화)이 통제되어야 한국교회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신학교육이 바로 서야 한다.

신학은 이성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몰()이성적이고 반()지성적인 신화적 신앙이 판치는 것은

신학교 교수들의 책임이 크다.

신학이 신앙(신화)을 통제하지 못하면 결국 신앙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맹목적이 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독일 신학자 불트만은 복음의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를 주창하였다.

복음에서 신화는 부정될 수는 없지만, 이성에 의해서 콘트롤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에서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이든지 신화가 이성 위에 군림하게 될 때 파국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불트만은 독일교회의 비이성적인 신앙이 나치의 신화를 가능하게 했고,

나치의 신화는 독일뿐 아니라 유럽세계 전체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사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깊이 반성했던 것이다.   

 

      [5] 성육신 신앙으로 무장

영지주의자들은 방언이나 신비체험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이나 예수를 영의 세계 속에서 영적 체험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와 달리 요한 교회공동체는 일상 속에서 보고 듣고 만져본

나사렛 청년 예수에게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요한 교회공동체는 예수를 신화로써가 아니라 이성으로 만났다.

(바울 역시 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것은 방언이 아니라 이성이라고 말했다(고전14:19).)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상황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신앙이 이성을 상실하고 신화로 되어가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복음이 복 비는 신화로 변질되고, “오직 예수만”을 외치면 안 될 일도 된다는 식의

무속적인 신앙이 강조되는데서 찾을 수 있다.

목사들은 대체로 자기의 말과 행동을 예수와 동일시하며 예수에게 순종하듯이

자기에게 순종하도록 강요하면서 신도들을 신화의 세계에 머물도록 만든다.

몰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속된 말로 장사가 잘 되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병든 현실이 아닌가!

 

모든 생명체는 둘이 아니며 하나님을 품고 있다는 성육신 신앙으로 무장하고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서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 때,

가정 문제, 공동체 문제, 사회 문제, 세계 문제, 지구 생태계 문제는 훨씬 더 쉽게 풀릴 것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의 회복을 통하여 치유와 상생의 교회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이 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