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성령운동의 역사적 배경 | ||||||||||||
[심층기획] 현대 성령운동 진단 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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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식 / 한국성서대학교대학원장
1.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성령론
성령론은 삼위일체론 적 근거에서 볼 때 기독교 신학 상 신론과 기독론 그리고 성령님으로 대별할 수 있는 동시에 기독교의 3대 교리 중 하나이다. 성령론은 특정한 신학에 근거해서 주장되고 발전 내지 보편화된 것이 아니다. 성령론은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그의 교훈의 일부로 성령에 관해 말씀해 주신 내용을 정리한 교리이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치실 무렵 제자들에게 작별인사에 해당하는 교훈을 하시면서(요 14:-17:) 천국(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지만 제자들(장차 제자들의 교훈을 듣고 중생 할 기독교인을 포함)에게 너희를 위해 있을 곳을 준비할 것인데 준비가 끝나면 다시 와서 너희들을 ‘나 있는 곳(하늘나라)’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3). 그럴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떠나시는 것은 제자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떠나신 후 제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께서 하신 일 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을 예언하셨다(요 14:12~13).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상황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의 사역도 육체적인 한계나 시간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성령이 오셔서 내재하시는 사건이 실현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세계 어느 곳, 그리고 어느 때든지 성령의 힘을 입어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게 될 것을 예상하시고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 라고 예언하셨는데, 이러한 사건이 가능한 것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그 이유를 밝히셨다. 뒤를 이어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6~18).
이상 예수님의 말씀의 내용을 분석하면 첫째, 성령은 독자적으로 성취해야할 일이 있어서 오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 세상에 남겨질 제자(예수를 믿는 성도를 포함)들을 도와 예수께서 하셨던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뜻이다. ‘다른 보혜사(άλλον παράκλητον: 알론 파라크레톤)’라고 번역된 문구 중 ‘다른(άλλον)’은 유사어 ‘ετερος(헤테로스)’와 구분되어 이해돼야하는 단어이다. 헤테로스는 다른 종류를 의미하는 반면 알론은 본질은 같으나 품성 상으로는 다른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여지는 단어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성령을 가리켜 “다른 보혜사”라고 ‘알론(άλλον)’을 사용하신 것은 자신과 교대해 와서 자신이 도성인신 하신 상태에서 수행하시던 사건을 계속하실 ‘(다른)분’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보혜사 성령이 예수의 사역과는 상관없는 다른 목적을 위해서 오실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여 완성하실 분으로 오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론을 신론과 기독론으로부터 분리 내지 격리시켜 마치 성령께서 독자적으로 행하시는 역사로 취급하는 것은 예수님의 예언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둘째, 이렇게 보내심을 받을 성령께서는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은 원문에 의하면 제자들의 신앙상태나 세상의 변화 등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 성령께서는 교회시대가 끝날 때까지 항상 함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 문구를 18절에 언급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해석할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보혜사 성령께서는 항상 성도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이다.
셋째, 이렇게 보내심을 받을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했다. 은하계 중 자그마한 태양계에 속해 있는 보잘 것 없는 행성인 지구에 섭생하고 있고 지극히 제한된 시야를 가진 인간, 게다가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아 부패되고 왜곡된 판단력을 가진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영접할 능력이 없다고 지적하시면서 성령께서만이 우주 만물의 근원, 존속 및 궁극적인 처리 등에 관한 사실을 보여주는 진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현대 신학계의 동향에 적용하는 경우 모든 세상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동등하게 다루어 사람은 누구에게나 영성이 있어 이 영성을 개발하고 훈련만 시켜주면 영성이 회복되어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제쳐놓은 사뭇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예혁명의 여파로 자연주의가 근대 문명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는데 자연주의의 정수는 진화론이다. 자연주의적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는 하나 그 본질상 자연과 동일하다(Coextensive with Nature)고 주장한다. 자연과 동일하다는 말은 자연의 일부인 육체로부터 구분하는 영혼이란 허상에 불과한 종교적인 술어로 실제로는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연주의를 신학적으로 정리해낸 것이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이다.
과정신학을 채택하는 경우 궁극적인 실체는 자연, 즉 물질 뿐이고 물질을 초월한 초자연의 세계나 형이상학의 세계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과정신학의 이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연법은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섭리란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생명은 단순히 생화학적 작용에 의해 발생되고 존속되는 것임으로 생명을 물체로부터 구분할 수 없고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갈 뿐 죽은 후에 영혼이 있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는 것은 허위요 거짓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과정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로마가톨릭 신학이나 80% 이상으로 추산되는 개신교 신학 그리고 (인간의)신앙의 체험/경험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여 성령의 권위를 소홀히 하는 오순절/순복음 신학도 궁극적으로 분석하면 과정신학을 채택했거나 자연주의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는 그 본질상 계시의 종교이다. 자연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의 세계로 볼 뿐 자연을 궁극적인 실체로 보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는 초자연주의에 근거했다. 자연을 초월하여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궁극적인 실체로 존재하고 계시고 이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으로 파괴된 하나님과 인류 및 우주와의 관계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도성인신케 하시어 대속의 역사를 통해 인간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의 내재하심을 받아 궁극적인 진리를 받아들여 알 수 있게 하시고 또 그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게 하신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노선의 신학이 되었던 중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영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거나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 그리고 성령, 즉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그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성령을 거론할 수 없고 성령을 옳게 받아들였다는 주장은 더욱 할 수 없다.
1960년대로부터 1990년대까지 전 세계를 휩쓸었던 성령(은사)운동은 본질적으로 신앙의 경험 운동이었다. 참으로 성령의 침례 및 충만함을 받은 현상인지 지나친 갈망과 반복되는 찬송 및 기도로 인해 자기 최면상태에 빠졌던 것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지만 이러한 은사운동의 유행은 요한복음 14장 16절로부터 18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는 거리가 먼 현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요 14:16~18의 내용에 의하면 성령을 영접할 가능성을 세상 사람들과 대조하여 제자들에게 국한시켜 계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나간 과거에는 성령이 “너희와 함께” 거하셨으나(πα ρ uμιν μένει: 엔 휴민 메네이) 장래에는 “너희 속에 계시겠다”(εν uμιν εσται: 엔 휴민 에스타이)고 함으로 성령의 위치를 명확히 구분하셨다. 이 상황에서 과거 (구약시대)에는 성령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함께 하심이 가능했으나 오순절 사건으로 교회시대가 도래하면 성령이 믿는 자들의 속에 거하게 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구약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는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등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계시면서 역사 하셨다. 특정한 개인에게는 필요한 기간에만 곁에 계시면서 도우셨을 뿐 영구적으로 그 사람 속에 내재하시지는 않았다. 이러한 과거와는 달리 앞으로는 성령의 내재하시는 역사가 실현될 것이요 이렇게 내재하시는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이 이론에 대한 부수적인 사실은 성령의 내재하심은 사람의 신앙상태나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엄하신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영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실현될 사실이다. 따라서 몇 일간의 훈련이나 개발운동을 통해 영성을 회복할 수 있다거나 성령의 내재하시는 역사가 인간들의 노력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교훈과는 상반되는 오류이다. 이상의 인용구 중에 ‘εσται(에스타이)’는 Be 동사 ‘ειμί(에이미)’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 삼인칭 단수이다. 따라서 성령의 존엄하신 결정에 의해 내재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 성령의 내재하심을 강요한다거나 조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2. 성령론은 기독교를 분열시켰다
A.D.325년에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소집되었던 니케아 공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본질이 하나님의 본질과 같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 성령의 본질이나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발진(Process)에 관해서는 언급도 하지 못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을 정리한 회의라기보다는 삼위일체론을 표면에 끌어 올려 논쟁을 시작하게 했던 회의에 불과했다. 니케아 공회의에서 콘스탄틴의 압력에 의해서였던 것으로 분석되기는 하나 기독교의 공식 신앙고백으로 아타나시우스의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이 신앙고백 중 성령에 관한 문구는,
“그리고 (나는) 성령을 (믿는다)주시오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아버지에게 발진하시며
이 신앙고백에 의하면 발진설상 아들에 관한 언급이 빠졌고 계시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선지자들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는 일처럼 되어 있어 선지자들의 사역의 종식여부, 성령의 계시의 현존성 여부에 대해 논쟁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이렇게 니케아 공회의에서 숙제로 남겨놓았던 성령론은 700여 년 간 논쟁을 계속하는 과정 중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발진한다는 입장을 선택했고 동방교회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들을 거처 발진한다는 입장을 선택했는데 이 발진설 문제로 여러 번 회의를 했으나 이 교리상의 차이를 좁히는데 실패했고 결국 1045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영구적으로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발진설 논쟁(Filioque Clause Controversy)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방교회 내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운동은 시대적인 문명의 형태와 체제상의 변화에 힘입어 성공하기는 했으나 성령론에 관해서 만은 또 다른 양상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개혁운동의 초점이었던 죄인의 구원문제에 있어 성령의 관여하시는 역사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가 발생했다.
칼빈과 그의 신학을 추종했던 칼빈주의자들은 이중 예정설과 함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교리로 확정했다. 예정은 구원과 멸망을 다 포함한 하나님의 결정으로 하나님께서 천국에 갈 사람은 구원받도록 예정하셨고 지옥에 갈 사람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론의 논리적인 결과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도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에게만 국한되었고 성령의 책망하여 믿게 하시는 역사도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대속의 혜택 권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국한되었다는 제한된 대속론이 제시됐다. 따라서 성령의 죄를 책망하시는 역사가 임하면 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가 주장된 것이다. 한마디로 죄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교리였다.
이러한 교리에 대해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은 칼빈주의를 국교 화 했던 네덜란드에서였다. 15세기 네덜란드 제국은 유럽에서 제일 발전됐던 지역이었다. 유럽 대륙과 영국제도 그리고 유럽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알프스산맥 남부 라틴제국에서 12세기 이래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던 르네상스의 여파가 네덜란드를 거처 북부 유럽에 도입됐고 알프스산맥 북부의 튜턴 족들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종교개혁운동의 물결이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일대에 흘러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됨으로 문예혁명 세력과 종교개혁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따라서 칼빈주의 내에서의 수정작업은 불가피한 상태가 되었는데 문예혁명이 가져온 인본주의 사상과 칼빈주의적 종교개혁 사상이 몰고 온 신본주의 사상을 조화시켜야 할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신학자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는 레이든 대학교(University of Leyden)의 신학 교수였다. 그는 탁월한 학식뿐만 아니라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로 존경받는 교수였는데 네덜란드에서는 알미니우스의 신학을 추종했고 덧치 개혁교회(Reformed Church)를 발전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알미니우스는 칼빈주의 중 완전 타락설은 받아들였으나 이중 예정설을 부인했고 제한된 대속론, 불가항력적인 은혜, 그리고 성도들의 견인도 부정했다. 칼빈주의 신학에서 성령의 역사로만 죄인이 구원받는다는 단일론(Monergysm)을 주장했던 것에 반해 알미니우스는 성령의 역사는 우주적으로 누구에게나 임하는데 이를 영접하여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받고 이를 거절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성령론상 협력론(Synergism)을 주장했다. 협력론이란 성령의 책망하시는 역사가 임했을 때 모든 인간은 적어도 의지 면에 드리웠던 타락의 영향을 제거 내지 무력하게 함으로 인간 스스로 결정하여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여 구원을 받든지, 믿지 않기로 작정하여 지옥에 가든지 양자택일하여 자신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성령의 책망하시는 역사를 통해 타고난 죄의 성품이 약화되거나 제거되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 언급된 성령의 책망하시는 역사(요 16:7~9)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새로 형성된 신칼빈주의(개혁교회)는 사실상 칼빈주의의 핵심적 요소에 대한 일대 수술을 감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신칼빈주의는 원래의 칼빈주의와 그 사상과 형태를 약간 수정하여 새로운 신학으로 발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체제상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신학체제를 수립했던 것으로 보아야한다.
원래의 칼빈주의는 완전타락설, 이중 예정설, 제한된 대속론,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들의 견인을 확고부동하게 믿었던 것에 반해 신칼빈주의는 완전타락설, 타락 중 예정설, 우주적 대속론, 우주적 성령의 책망하시는 역사, 그리고 구원받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계속되는 역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원래의 칼빈주의 신학노선은 일부 루터란 교회, 일부 구장로교회, 특수 침례교회, 일부 회중교회 등에 의해 지지되어 왔고 알미니안주의 신학노선은 나머지 루터란교회, 신장로교회, 그리고 일반침례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및 오순절/순복음 교회에 의해 지속되어 왔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던 교리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 중 마지막에 속하는 성도들의 견인이다(Perseverance of Saints). ‘성도들의 견인’이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시는 역사가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관해 칼빈은 성도들이 한번 구원을 받았으면 스스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음으로 성령의 도우심은 필요치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알미니우스는 구원받은 성도라도 구원받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같이 서로 절충할 수 없는 각기 다른 주장으로 인해 개신교 내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영구적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번 구원을 받았으면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칼빈의 주장은 그의 영재론(Spiritual Presence Theory)에 근거한 것이다. 영재론 이란 성찬의 떡에 관한 이론으로 하나님은 본질상 영이시나 실체이신 까닭에 존재상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이다(Extra Calvinicum). 따라서 성찬의 떡이나 잔이 점령하고 있는 공간에 이중적으로, 복합적으로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의 떡이나 잔의 가장자리까지만 점유할 수 있을 뿐 이중적으로나 복합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성찬을 받았을 때 영적인 의미로 그리스도의 살이나 피를 먹었다는 뜻이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에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안수 받은 신부가 합법적으로 집례 하는 경우 성찬의 떡은 그리스도의 살로 그리고 성찬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주장했다(화채설). 루터는 화채설을 부인하고 동재설을 주장했는데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존재하시기 위해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까닭에 성찬의 떡이나 잔이 점령하고 있는 공간에 합법적인 교회에서 말씀이 전파된 후 안수 받은 목회자에 의해 집례 되는 경우 성찬의 떡과 성찬의 잔 안에 하나님의 본질인 영이 이중적으로 복합적으로 존재함으로 성찬의 떡과 잔을 먹을 때는 그 떡과 잔의 분량만큼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Infra Lutheranum). 이와 같은 이론에 반대하여 성찬의 떡이나 잔은 단순히 상징적인 물체로 성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시면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남겼던 사실을 기념하는 행사일 뿐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는 이론이 쯔빙글리에 의해 주장됐다.
성찬의 떡이나 잔이 점령하고 있는 공간에 하나님께서 이중적으로 복합적으로 존재하실 수 없다는 칼빈의 이론(Extra Calvinicum)을 받아들이면 성령의 내재하시는 역사나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내재하시는 사실을 부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성령은 외부에서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신다는 이론은 가능하나 내재하셔서 성도들의 생각 및 신앙을 도우실 수 있다는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이유에서 한번 구원을 받았으면 그 구원받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성도들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나온 것이다.
루터주의 신학에서는 동재설을 주장함으로 성령이나 삼위의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수용할 수 있었으나 멜랑톤 등 이성주의자들에 의해 성령의 역사를 이성의 기능과 착각함으로 역시 성령론을 사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알미니우스는 이상의 신학적 논쟁에서 성령의 역사에 있어 이성주의로 변질되기 이전 원래의 루터주의를 선호했던 듯하다. 그래서 성령의 내재하심은 물론 내재하시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신앙상태를 도와주심으로 정상적인 신앙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성도들의 견인에 대한 정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이렇게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성령론이 결과적으로 개신교 진영을 칼빈주의와 이에 반대되는 알미니안주의로 분열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칼빈주의 신학노선을 채택한 신학자들은 칼빈주의에서 철두철미하게 강조해온 성경의 궁극적인 권위라는 원리 원칙에 근거하여 그들의 성령론을 성서적인 원리에 의해 수정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저명한 신학자들이 이 같은 간단한 해결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성령론을 수정할 수 없는 것은 성령의 내재하심을 인정하면 성찬의 영재론을 부인하고 동재설 또는 기념설을 받아들여야하는 부담을 갖게 되는 동시에 칼빈주의가 루터란으로 흡수되던지 쯔빙글리의 복음주의 교회로 흡수됨으로 칼빈주의는 신학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Berkhof나 Hodge 등 칼빈주의 신학노선을 따르는 조직신학자들은 칼빈주의의 전통에 따라 그들의 조직신학 책에서 성령론을 따로 취급하는 대신 구원론의 일부로 다루면서 은혜의 수단을 구원받는 비결로 세례와 성찬 그리고 성령의 책망하시는 역사 등을 나열하여 간단히 설명하는 것으로 끝였다.
성령론의 회복 운동
루터란은 인본주의자였던 멜랑톤이 사실상 루터의 후계자와 같은 위치에서 활동한 결과 문예혁명의 근본 요소 중의 하나였던 이성주의를 받아들임으로 구원에 있어 성령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칼빈주의는 교회의 체제상 성령론을 취급할 수 없는 함정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루터란 신학의 영역에서 일종의 성령의 회복 운동이 발생했다.
1. 경건주의 운동
루터란 교회는 원래 루터가 개혁을 하기 위해 개혁했다기보다 로마교회의 문제점을 수정하자는 루터의 제의에 대해 로마교회가 극단적인 반응을 보임으로 개혁운동을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같은 루터의 자연발생 및 반응에 의한 개혁운동에는 뚜렷한 신학체제가 결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루터란 신학으로 이성주의가 끼어 들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따라서 루터란은 그 교단이 형성되자마자 원래의 개혁정신은 질서유지의 필연상 제도화하고 의식화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원래의 개혁정신을 떠나 로마교회와 별 차이가 없는 의식과 제도화 된 교회에 대해 불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있던 루터란 신학자들 중에서 경건주의 운동(Pietistic Movement)이 일어났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스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8) 였다. 스페너는 루터란 교회의 목사였는데 탁월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루터란 교회가 루터의 의도를 따라 경건한 신앙을 유지하는 교단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의식화 내지 제도화 되어갈 뿐만 아니라 계시로서의 성경을 버리고 이성주의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자기 집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는데 이 때는 독일어가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원어(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해 성경공부를 했는데 이렇게 시작되었던 성경공부가 결국 할러대학(University of Haller)으로 발전했다. 스페너는 이 때 후랭크훨트-암-마인 (Frankfurt-am-Main)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이 교회를 중심으로 성경공부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성경공부에 참여한 사람들과 더불어 ‘모든 중생한 성도들의 영적 제사장직의 수행’과 ‘신앙의 실제 생활화’ 등을 강조함으로 성례주의로 경직화 되어버린 루터란 교회, 그리고 교리주의로 경직화되었던 칼빈주의에 대해 원래의 개혁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만인제사장론을 처음 주장했던 것은 루터였다. 로마가톨릭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눈치를 살피느라 루터란 개혁운동에 뛰어들지 못하고 있던 독일제국의 제후들로 하여금 성경의 원리에 근거하여 각 개인의 구원문제는 그 사람의 신앙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목사나 신부 그리고 교단이 주관할 수 없는 문제임으로 로마교회의 눈치를 봐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만인제사장론은 이론적으로 교단의 불필요 또는 안수 받은 목사나 신부의 특권-성례 집행권 등-을 박탈하는 결론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루터가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했고 성경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라고 명백히 언급된 교리이지만 기성 교회 제도의 무용성과 직관된 교리임으로 개신교 신학에서 이 문제를 충분히 거론하여 발전시키기는 고사하고 제창된 직후에 덮어버린 교리였다. 따라서 성경이 신앙과 행위 그리고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권위임을 확신하고 있던 스페너는 만인제사장론의 실천을 들고 나왔다.
신앙의 실천은 성령론과 직관된 교리이다. 신앙의 실천이 중요하나 신앙의 실천은 각 개인에게 맡기는 경우 방종할 수는 있어도 일관된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앙의 실천은 필연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성령의 가르치시는 역사에 의존해야 된다. 따라서 스페너의 경건주의 운동은 안트(Johan Arndt, 의 저자), 그로스케 바우어 (Theophilus Grossgebauer, (1611)의 저자) 등에 의해 정리됐고 할러대학을 중심으로 많은 지도자를 내어 독일, 스칸디나비아 제국 및 스위스 등으로 경건주의 운동이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개신교 내에서 외국 선교부를 설립하여 선교활동에도 나섰다. 할러대학을 중심으로 탁월한 성경학자들도 여러 명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 신약성경 학자였던 진젠도르프(Count Von Zinzendorf; 1700~1760)는 스페너의 양아들로 후에 모라비안 교회를 창설하여 중생, 신앙의 체험, 성도 상호간의 사랑과 이해 등을 중요한 신조로 채택하여 교세를 확장했다.
본래 경건주의 운동은 개인의 감정이나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한편 성례주의적 경직화나 교리주의 적 경직화를 반대하는 운동이었으나 성경보다는 개인의 신앙적 체험을 강조함으로 경험주의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신학자가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진 슈라이엘마커(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였다. 슈라이엘마커는 모라비안 교회에서 성장했던 인물로 중생이나 신앙의 체험을 강조한 나머지 신앙의 본질은 느낌(Feeling)에 있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권위가 아닌 인간의 기능-느낌-에 신앙의 근원이 있다고 주장함으로 신학을 인간중심인 인간학으로 변질시켰고, 이로 인해 근대신학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받게 되었다. 원래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론으로 개인의 신앙과 신앙적 체험을 강조하던 중 성경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경험 중심적인 신앙으로 인본주의 화 해버렸던 것이다.
2. 미국신학의 경험주의
미국에도 독일계 경험주의자들의 이민으로 경건주의 운동이 도입되었다. 이들은 교리나 의식 절차보다 헌신적 신앙생활을 강조했는데 신학적인 뒷받침이 없고 비교적 교육수준이 낮았던 사람들 중에서 경건주의 운동은 순수한 경험주의로 변질되는 성향을 보였다. 메노나이트(Mennonites), 덩컬스(Dunkers), 스펜크휄더스(Schwenkfelders) 그리고 모라비안(Moravian) 등이 그 대표적인 그룹들이었다. 좀 더 확립된 교단으로 경건주의를 도입했던 교단은 독일개혁교회(German Reformed Church), 독일 루터란 교회(German Lutheran Church), 더치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등이었다.
후레링휴센(Theodore J. Frelinghusen; 1691~1748)은 미국의 루터란 교회의 아버지로 알려진 인물인데 뮤른 경건주의자로 사실상 할러대학의 경건주의 운동을 미 식민지에 전파하는 사명을 가지고 미국에 왔고 이민 인구의 주류였던 앵글로색슨족들에게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독일계 이민들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미국의 독일 개혁교회(German Reformed Church in America)는 슈레더(Michael Schlatter; 1716~1790)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슈레더는 본래 경건주의자로 실제적인 신앙의 체험과 경건한 생활을 강조했고 이 같은 배경을 근거로 독립적이고 부흥운동에 치중하는 연합형제교회 (United Brethren in Christ) 및 복음교회(Evangelical Church)등이 형성되었다. 영국 성공회의 목사였던 웨슬리도(John Wesley; 1703~1791) 모라비안들과의 접촉을 통해 경건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앵그리칸 내에 부흥운동을 주도했고 후에 감리교회의 발생을 가능케 했다.
3. 오순절 운동
미국에서 발생한 성결/오순절운동(Holiness Pentecostal Movement)은 이상에 지적한 경건주의 운동을 배경으로 발생하여 성장한 운동이다. 특히 오순절 운동(Pentecostalism)은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성장한 미국 특유의 신앙운동이라고 알스트롬(Sidney Allstrom)은 주장했는데,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에 미국에 산업혁명, 여명기 운동 및 진화론의 보편화 등으로 온 세계는 낙관적인 희망에 싸여 지상낙원 건설의 가능성 또는 기독교문명의 세계 지배 등의 기대에 들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배경으로 각종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웨슬레의 부흥운동은 감리교회의 형태로 뉴잉글랜드 일대에 지배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루터란 교회나 칼빈주의 신학에서 강조했던 칭의의 개념에 성화의 개념을 첨부하여 신앙의 체험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점차 ‘두 번 째 축복(The Second Blessing)’으로 성령의 침례(세례)를 받음으로 방언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게 됐다. 이 같은 경험주의적 성향이 농후했던 신앙노선은 특히 웨슬레 감리교회(Wesleyan Methodist Church), 자유 감리교회(Free Methodist Church), 나사렛교회(Church of Nazarene) 등에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후에 역시 같은 계열의 교단으로 하나님의성회 (The Church of God), 기독교 선교연맹(Christian Missionary Alliance) 등이 발생했다. 기독교 선교연맹은 원래 장로교회 목사였던 씸슨(A. B. Simpson)에 의해 1887년에 창설됐다.
1900년대 초 발생한 오순절/은사운동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미국 캔사스(Kansas) 주 토페카에 있는 벧엘 성서대학(Bethel Bible College)에 재학 중이던 오즈만(Agnes N. Ozman)이라는 여학생이 1901년 1월에 방언하는 능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사실상 경험주의 노선의 신학으로 기울어져 있던 벧엘 성서대학에서 이를 사실로 수용하여 지지하고 선전함으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방언하는 은사를 받음으로 근대 은사운동이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두 번 째 이론은 같은 벧엘 성서대학의 학생 씨무어(W. J. Seymore)라는 흑인 청년이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아주사 거리 선교원(Azusa Street Missions)에서 1906년에 여름 봉사활동 중 설교를 했는데 이 때 성령의 침례(세례) 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운동은 미 서부지방을 위시해서 전 미국-주로 남서부 지방에 확산됐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는 비슷한 유형의 교회가 여러 개 형성됐다. 그 중에 현재 제일 큰 교단은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로 테네시의 클리브랜드에 그 본부가 있다.
1970년에는 전 세계에 800만의 교인 수를 가진 교단으로 성장했는데 대부분이 북미 오순절 친목회(Pentecostal Fellowship of North America)에 소속되어 있다. 이 단체는 1914년에 창설됐고 그 본부는 알칸사 주의 리틀 락(Little Rock)에 있다. 현재 이 조직에 소속된 대표적인 교단은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 오순절 연합교회(United Pentecostal Churches), 미국 오순절 하나님의 교회 (Pentecostal Church of God in America) 등이다. 본래의 오순절교회의 교리적 특성은 성령을 받으면 방언 하는 것, 신유의 은사가 현존하는 것, 그리고 개인적인 경건한 신앙생활 등으로 독일에서 발생했던 경건주의 운동이 약간 변질되어 경험주의적 신학노선을 채택한 형태이다.
4. 신 오순절 운동(Neo Pentecostalism)
1960년대에 신 오순절 운동이 발전했다. 이 운동은 의도적으로 교단을 초월한 운동으로 발전했고 급성장했다. 개신교 내부만이 아니라 로마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은사운동에 참여하여 1967년에는 듀케인 대학(Duqegne)에서 성령의 침례(세례) 하시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해졌고, 노틀담대학(Notre Dame University) 및 뉴욕 시내에 위치한 훨담 대학(Fordam University) 등으로 은사운동이 확산되었다. 이에 힘입어 노틀담 대학에서 전국 오순절 부흥운동협회(National Conference on Charismatic in Catholic Churches)가 조직됐다.
원래 오순절 운동은 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들이 아닌 평신도 운동으로 발전됐는데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샤카리안(Demos Shakarian)이라는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목장주인이 1951년에 순복음 경영인 친목회(Businessman's Fellowship)를 형성하고 교단을 초월한 오순절 운동을 확산하는 일에 앞장섰다.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던 샤카리안은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은사운동을 확산시키는 일에 성공했는데 순복음 경영인 친목회는 1972년에 30만 명의 회원을 자랑할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900여 개의 지회(支會)를 확보했다고 보고 되었다.
1968년에 전 감리교회 목사로 안수 받았던 오순절 성결교 노선의 라디오와 TV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오랄 로버트(Oral Roberts)는 전파 망을 통해 신오순절운동을 확산하는 일에 기여했고 베� (Dennis J. Bennett)은 캘리포니아주의 벤누이(Van Nuys)에 있던 에피스카폴 교회의 목사였는데 1968년에 ‘오순절의 체험’을 했다고 공표함으로 신 오순절 운동에 참여했다. 따라서 신 오순절 운동은 로마가톨릭교회, 장로교회, 루터란 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더치 개혁교회, 형제교회(United Brethren) 등 초교파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최근에 잘 알려진 ‘생명의 말씀운동(World of Life)’이나 ‘포도원 운동(Vineyard)’ 그리고 토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 등은 다 신 오순절운동에 해당한다.
이상에 열거한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북미에서 성장한 오순절 운동의 공통점은 근본주의적 신앙을 강조하며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실제 면에 있어서는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데 특히 성령의 침례(세례) 등을 가장 중요한 체험으로 강조한다. 따라서 신 오순절 운동은 계시의 현존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정경의 완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이적의 현존성을 강조함으로 성경에 언급된 기사나 이적 그리고 표적들을 역사적으로 특별한 목적이 있어 일어났던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어야하는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발생하여 성장한 오순절 운동은 청교도들에 의해 출범했던 ‘새 시온운동’의 연장체라는 역사적인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새 시온운동이란 무천년설적인 신앙노선을 따르고 있던 청교도들이 북미대륙으로 이주해 올 때 북미대륙을 인류의 마지막 전초지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생각했고 이 땅에 이주해온 청교도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 이유는 미국을 통해 천국을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사상이었다.
무천년설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해야 할 의무나 사명이 성도들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는 총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교회시대가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하나님의 존엄하신 결정에 의해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역사적인 상황에 근거하여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교회나 성도들이 메시아 왕국을 지상에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라는 명령은 전혀 없다. 오히려 메시아 왕국은 하나님의 결정사항임으로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에 관해서 관심을 보이는 대신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에 의거해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된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럼에도 무천년설을 믿었던 청교도들이 미국에 이민 왔을 때 그들은 요단강에 해당하는 대서양을 건너왔고 애굽에 해당하는 영국과 바로의 제사장에 해당하는 대주교 라우드의 마수를 벗어나 새 가나안 땅인 미 대륙에 왔으며 자신들의 정착을 방해하는 미국의 원주민 인디안들을 가나안 7족속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북미 대륙에 자신들이 건설할 새로운 나라는 새 시온성, 새 이스라엘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선민사상은 서방기독교의 종말사상 중에 깔려있던 ‘문명서천(文明西遷)설’과도 접목되었는데 문명서천설이란 하나님께서 원래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섭리를 실현하셨는데 후에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을 버리고 헬라로, 헬라를 지나 로마로, 로마를 떠나 서부 유럽으로, 서부 유럽에서 다시 영국으로, 영국에서 북미주로 섭리의 중심부를 옮기셨다는 이론이다. 통일교에서는 북미를 떠나 현재는 한국으로 섭리의 중심부를 옮기셨음으로 한국에서 제 2의 재림주가 나타났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신학사상은 신학사상으로만 교회 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뿌리를 내린 사회사상으로 정립됐고 남부 물질주의의 형태로 남부 및 서부 진출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여 마침내 태평양 바다가 앞을 막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됐을 때까지 미합중국은 확대를 계속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미국의 서남부를 완전히 장악했던 남부 물질주의 사상은 현실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의 온상으로 최적의 지역이었다. 따라서 교단이나 종족을 초월하여 불길처럼 확산하여 지배적인 신앙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상의 이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오순절 운동은 개신교 보수 진영을 근거로 일어난 운동이다. 따라서 개신교 종교개혁의 제 1 원리였던 성경의 영감 및 무오설을 강조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중생이나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와 인간의 경험이 어느 때나 일치되거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성경과 경험이 충돌될 때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성경의 원리를 선택하면 개신교 보수주의 신앙노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반면에 경험을 선택하면 인본주의 신학자로 슈라이엘마커가 걸어갔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방언이 되었던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치유하는 은사, 또는 귀신(악령)을 축출하는 능력 등 그 무엇이던지 간에 성경에 근거하여 시비를 가려야한다.
따라서 처음에는 성경의 권위를 약간 소홀히 하고 경험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성서적인 진리보다는 각 개인 또는 집단체험을 더 중요하게 취급함으로 이단으로 변하게 된다.
그 좋은 예로 1990년대에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토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를 들 수 있다. 토론토공항 빈 야드 교회는 원래 오순절 계열의 평신도 교인으로 신학교에는 발도 들여 놓은 일이 없는 아르�(John Arnott)에 의해 설립됐던 교회로 세인트루이스의 빈야드 교회 부흥사였던 크락(Randy Clark)을 초청하여 일주일 계획으로 부흥집회를 가졌었다. 1994년에 있었던 이 집회에서 성령의 불이 떨어졌다고 주장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원래 약 300~350명에 불과했던 토론토교회가 이 집회의 성공으로 수 천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고, 1995년 1월 20일에 소집됐던 부흥집회에는 약 4000여 명이 모이는 대 집회였다고 알려졌다. 따라서 교회를 토론토 공항 인근에 방치됐던 창고로 옮겨 밀어닥치는 사람들을 수용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뉴욕, 시카고, 그리고 시애틀 등 미 북부를 연결하는 항공 노선이나 분주한 세계 교통 노선으로부터는 동떨어져 있어 세계인들의 관심 밖에 있던 토론토로서는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관광객들을 유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따라서 월간 <토론토 라이프>에서는 “토론토의 축복(Toronto Blessing)” 이란 기사로 빈야드 교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졌고 이 사실을 참관하기 위해 온 세계에서 몰려와 1994년에 가장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한 사건이었다고 보도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Sept., 11, 1995)에도 그 표지에 이 사건을 게재했을 뿐만 아니라 10여 페이지(pp.22~32.) 에 달하는 기사를 통해 토론토 빈야드 교회의 사건을 게재함으로 기독교계의 세계적 사건으로 대두됐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에 기사를 쓴 베버리(James A. Bebverley)는 1906년 아주사 선교원에서 발생했던 은사운동과 비슷한 성령의 역사일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토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의 원로목사 아르�(John Arnott)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능력이 있으심을 믿는 동시에 사탄이 이를 방해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한다”고 말한 사실을 인용하고 있다.
토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의 사건에 관해 일부에서는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반면 다른 은사운동가들 특히 60~80년대 은사운동을 주도했던 현재 오순절 운동의 지도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지도자들 중 방언을 강조하는 그룹들은 토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에 방언이 없었던 사실을 지적하여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사탄의 역사라고 비평했다. 원래 토론토 빈야드 교회의 교인이었던 탐슨(Steve and Chery Thomson) 부부는 “현재 토론토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악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평했다.
기독교 연구회 (Christian Research Institute)를 대표하고 있는 해내 그래프(Hank Hanegraff)는 그의 책 <기독교의 위기(Christianity in Crisis)>에서 토론토 빈야드 교회에 초청강사로 와서 불이 떨어지게 했다는 부흥사 크락크(Randy Clark)를 안수했던 인물인 하워드 브라운에 관해 “브라운은 남아공 출신으로 미국 남부지방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며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는 능력을 가졌고 자신은 신약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20여 개의 은사 전체를 받았음으로 안수하여 그 일부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한편 오순절 운동의 대표자 중의 하나로 TV 사역을 해서 빈 야드 교회의 명성을 정립한 것으로 알려진 베니 힌은 토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에서 성령을 받은 근거로 짐승소리를 낸다든지 교회 벽에 소변을 본다든지 교회 바닥에 누워 뒹구는 사건들은 있으나 방언이 없는 것을 이유로 토론토 빈야드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하여 빈야드 교회에서 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토론토 빈야드 교회의 목회자 중의 한 사람인 콜린스(Dave Collins)는 세계 복음화 대회 참석 차 서울에도 왔었는데 빈야드 교회는 현재 특별집회가 아닌 경우 500명 내지 1000명씩 모인다고 말했다고 알려졌다.
결론
이상에서 오순절 운동 중 이단시비가 자체 내에서 일어났음을 지적했는데 그 근본적인 문제는 노선상의 표준에 있다. 오순절 운동이 경험주의 노선을 선호하는 동안은 노선상의 표준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자체 내의 이단시비는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교회의 인준을 이미 받은 강한 그룹은 약하고 새로 발전하는 그룹을 비위에 맞지 않는 경우 자신들의 노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단시 할 것이다. 소위 말하는 다수의 횡포에 의해 건전한 신학 발전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 운동에도 진로(進路)를 결정할 때가 이른 것 같다.
종교개혁의 주제였던 ‘성경이 모든 신앙과 행위의 궁극적인 권위’임을 재확인하고 자연주의 신학에 근거한 경험주의 신앙노선을 탈피하던지 아니면 개신교의 대열에서 이탈할 것을 각오하고 자연주의에 근거한 경험주의 신학노선을 택하고 로마가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제 3의 기독교’임을 선포하여 태도를 분명히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선택 중 후자를 선택하는 경우 개신교의 정통 노선을 선호하는 신학의 입장에서는 오순절 등 성령 운동에 몰두하고 있는 교단에 대해 동류가 아닌 다른 교단으로 인식하여 그 존재 자체에 대해 시비를 논할 필요는 없으나 신학적인 타협이나 협조를 구하는 잘못된 태도는 깨끗이 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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