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주도홍 교수(기독신학대학원)
<가장 바울을 닮은 사람 >
21세기를 바라보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사표가 될 만한 교회사의 인물은 없을까? 순간 우리는 바울의 음성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를 떠올리게 된다. 역사적 인물을 우리가 따라가야할 구체적 표상으로 삼는 일은 참으로 귀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무엇보다도 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 힘이 있어지기때문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감히 미국 대각성운동의 기수였던 18세기의 에드워즈를 소개하고 싶다.
바울처럼 55세의 생애를 산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 칼빈주의자, 가슴의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 열정과 능력의 복음 설교자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J.I.Packer)이며, 또한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많은 점에서 사도 바울을 닮은 사람으로도 그려지고 있다(D.M.Lloyd -Jones). 아무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드물게 몇 안되는 인물중 한 사람이며,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지성이며, 보물과 같은 미국의 철학자로서 평가되기도 하는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Connecticut) 주에 위치한 윈저(Windsor)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디모데 에드워즈(Timothy Edwards)은 그 곳에서 약 60년 동안 목회를 하신 목사로서 독자 요나단이 1758년 3월 세상을 뜨기 직전 다행스럽게도 앞서서 1758년 1월에 89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아버지의 신앙은 매우 경건하였으며, 실천적이었다. 어머니 에스더(Esther Stoddard)는 노쓰앰톤(Northampton)에서 죽기까지 목회를 하셨던 목사(Solomon Stoddard)의 딸로서 매우 영적인 분이었다. 이러한 가정의 영적이며, 지적 분위기 가운데서 요나단은 성장하였다. 요나단은 벌써 어린 7-8세의 나이에 친구들과 함께 기도모임과 경건모임을 가진 것으로 훗날 회상하기도 하였다. 요나단은 벌써 1716년 13살의 나이에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에 들어가서 존 로크(J.Locke)와 뉴톤(Newton)의 사상을 알게 되었고, 1720년 17세 때 졸업하였다. 그 후 뉴 헤븐(New Haven)에서 2년간 더 신학을 공부한 후 1723년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잠시 임시목사로 뉴욕에서 교회를 섬긴 그는 1724년 21살의 나이로 예일대학교의 강사로서 2년 동안 후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1727년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는 노쓰앰톤 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던 중 1729년 외조부의 사망과 함께 26세에 담임목사가 되어 1750년 까지 23년 동안 이루었던 목회를 쫓게가듯 마감하여야만 하였다. 이유는 에드워즈가 세례 때에 세례받는 자들의 공개적 신앙고백을 지금까지의 교회의 전통과는 다르게 강조한 점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발단으로 교회는 목사 신임투표를 하게 되었는 데, 에드워즈는 230:23으로 불신임을 받게되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뜻밖의 결과를 바라보는 20세기 영국 교회의 그 유명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러한 일을 바라보며 목회에 있어서 그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동역자들에게 하며 용기를 주었다.
사실 에드워즈는 이 교회의 목회자로서 세계 교회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Movement)을 그 유명한 부흥설교자인 영국의 죠지 위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함께 이끌었던 것이다. 이 때에 행해진 그의 유명한 설교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있기도 하다. 이 교회에서 행한 그의 마지막 설교(Farewell Sermon)는 1750년 7월 1일 고후1:14의 말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을 본문으로 선포됐다. 결코 변명하거나, 그 누구를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던 담대하고 떳떳한 에드워즈의 겸손과 사랑넘치는 인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 마지막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훗날 역사는 그의 고별설교를 명설교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에드워즈 목사는 끝까지 틀림없는 설교를 성실히 하나님 앞에서 감당한 것이라 하겠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
바람직한 목회란 목회의 처음과 끝이 일치하거나 아니 더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더 좋은 결과란 무엇보다도 성도와 목회자 사이에 맺어진 신실한 그리스도적 인격적 관계를 확인하는 말이다. 진정한 목회자 에드워즈의 마지막 「고별 설교」를 접하게 될 때도 이러한 진한 감동을 더욱 가슴 뭉클하게 실감하게 된다. 노쓰햄톤 교회에서 그는 마지막 설교(Farewell Sermon)를 1750년 7월 1일 고린도후서 1장 14절을 본문으로 선포했다. 이 설교에서 그는 결코 변명하거나, 그 누구를 탓하지도 그리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에드워즈의 겸손과 사랑넘치는 인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러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그 마지막 설교의 한 부분을 소개하면 더욱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제가 이 교회와 여러 성도들의 목회자로서 주의 사역에 몸담은지도 벌써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 본인은 여러분들의 영원한 축복을 위하여 사역에 최선을 다했고 제 인생의 가장 귀한 황금의 기간을 여기에 투자했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한 일에 여러분은 저의 증인이 되십니다. ... 저는 목회 사역을 위해서 제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밤과 낮으로 일했으며,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났고, 그리스도께서 부족한 저를 부르시고 지명하신 거대한 사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참으로 신실한 주의 종을 여러분들을 위해 보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바로 알며, 철저하게 죄를 경고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을 지혜롭고 사려깊게 주시하여 영원한 축복의 길로 여러분들을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기억하십시다. 주의 그 거대한 날에 이루어질 미래의 그 거룩한 우리의 만남을 결코 잊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그 날은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이며, 영원하고 불변의 심판이 행해지는 날입니다. 아멘."
이제 에드워즈는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야만 했다. 사실 다른 대책이 없이 많은 식구들과 함께 그 어디엔가로 가야만 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저 멀리 스코틀랜드의 친구들은 대서양을 건너와서 함께 동역을 해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의 사역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사양한 그는 1750년 12월 초 노쓰햄톤에서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는 스탁브리지(Stockbridge)의 인디언들을 위한 작은 한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1751년 8월 초 비로소 모든 가족이 노쓰햄톤을 떠나 이 곳 스탁브리지에 도착했다.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며 턴벌(Ralph G. Turnbull)은 "모든 교회가 그들 최고의 지성을 잔인하게 광야로 추방했고, 그 우울한 날들은 개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라고 썼다.
스탁브리지의 교회는 에드워즈에게 최소한의 일을 맡겼고, 보다 많은 시간을 이제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그리고 연구와 저술활동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가운데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탁브리지에서 인디안 선교와 저술활동에 정열을 쏟고 있던 에드워즈는 1757년 뜻밖에도 지금의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아 1758년 1월 취임을 하였다. 물론 그는 처음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자신의 여러 가지의 부족을 내세워 영광스러운 초빙을 겸허히 거절하였다: "저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이러한 일을 떠맡게 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저를 지목하셨다는 게 분수에 지나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에드워즈는 계속해서 연구와 저술에 박차를 가하고 싶었다. 이제 에드워즈는 영광스러운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에 취임하었다. 그의 취임설교는 그리스도의 불변성에 관하여 2시간 동안 행해졌으나 그 어느 누구도 지루해하지 않았으며 대단한 집중력으로 경청하였다. 하나님의 임재를 만끽하면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마지막 시간들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연두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1758년 3월 22일 55세의 아직 한참 일할 성숙한 나이로 3개월간의 총장재직을 뒤로하고 아깝게도 일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에드워즈에게 인생의 황혼이 너무 빨리 찾아온 뜻을 우리는 아직 이해할 수 없으나, 여기에 분명 하나님의 뜻은 있었을 것이다.(97.7.1.Seoul)
비로소 영원을 옷입히기 시작한 설교자
미국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장본인 에드워즈 목사의 설교는 어떠했을까? 그는 무엇보다도 탁월한 설교자로서 설교에 있어서 특별한 은사를 소유했었다. 당시 그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의 말을 생생한 음성으로 들을 때, 그의 설교는 일반적인 웅변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영적 웅변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웅변때문에 우리 도시에서 유명해졌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그는 세련된 목소리도 아니었으며 강한 목소리로 강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거의 제스처를 쓰지 않고 똑바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고 상상력을 매혹시키기 위해 자기의 우아한 스타일이나 잘 생긴 용모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웅변의 힘으로 청중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전파하였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완전히 압도하는 주장과 강사의 온 영혼을 주장하는 설교 마디 마디에 쏟아 붓는 강렬한 감정으로 설교한 결과 전체 청중의 건전한 관심을 시종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지워질 수 없는 감동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 본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웅변가였습니다."
에드워즈는 구원을 신(神)과의 합작품으로 서술하는 아르미니안주의를 정죄하며, 이성의 힘에 의존하는 계몽주의(Enlightment)의 본질을 반신적(反神的)으로 규명하면서 오직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설교로 그러한 잘못된 시대사조에 강력히 맞서므로 미국 『첫번째 대각성 운동』(First Great Awakening Movement, 1735-37)의 도화선이 되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 것이며, 그 분의 긍휼과 사랑만이 이미 지옥의 멸망에 떨어졌어야 할 죄인들을 선택함을 입은 백성으로 품으신다고 선언하였다.
에드워즈는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전적 순종과 의존을 강한 어조로 요청하는 말씀의 선포를 한 것이다. 그는 탁월한 칼빈주의자였으나, 과격한 예정론을 멀리하였다. 구원을 향한 인간의 존엄성은 언급될 수 없으며, 그로인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인간이 참여할 수 없음을 완벽하게 선언하였다. 곧 인간의 자유의지가 구원을 향하여서는 전혀 작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설교자였다. 결국 그의 설교는 오직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설교는 자신의 강조처럼, 감동적이었고, 열정적이었으며, 강력한 설교였다. 또한 설교란 그에게 있어서 따뜻해야 하고, 진지해야하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한마디로 묘사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핵심적 메시지를 발견한 후 거기에서 설교가 출발되는 쉽게 전하는 강해설교였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그 설교를 듣는 회중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후 분명한 적용을 잊지 않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언제나 본문과 자신의 말을 신실하게 나누어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설교와 논문발표 그리고 강의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았다.
당시 에드워즈가 외친 설교의 영향을 목격자의 음성으로 생생히 들어 보는 것은 실감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얼굴에 ... 영원을 옷입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랑과 경배와 놀라움과 기쁨과 감격과 겸손의 모습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볼 때 그것은 하늘나라의 모습과 같은 것이었다 ... 노인들은 이전에 없었던 복음의 능력을 강하게 느꼈고,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토록 민감하게 깨달았던 때가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졌던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97.7.7)
정서와 지성을 조화시킨 설교자
요나단 에드워즈의 저술중에서 저자의 특징적 사상을 가장 잘 제시하는 작품은 43세 때 쓴 『신앙과 정서』(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 1746)이다. 본 저서는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는 데, 제 1부에서는 정서들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그러한 정서들의 중요성을, 제 2부에서는 진정한 은혜에 의해서 오는 신앙적 정서의 진위는 무엇으로 가려지는지, 제 3부에서는 진정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을 구분하는 표식들은 무엇일까를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저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최선을 다해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분간하여 그 분별력을 정립하고 확정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신앙의 대부흥들이 단순한 일과성 현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들'의 본질과 표지들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열정적인 영적 정서와 깊은 지성을 균형있게 조화시킨 에드워즈는 설교에 있어서 정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그 누구보다도 확실히 인식했다. 그 정서란 오성으로 인한 깨달음(Understand)과 실천으로의 의지(Will) 사이에 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깨달음은 나아가서 인간을 감동시켜야 하며, 감동을 받을 때 사람들은 의지를 가지고 행위에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머리를, 감동은 가슴을 그리고 의지는 사람들의 손과 발을 요구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설교에 있어서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의 주도적이고, 본질적 좌소가 바로 마음이기에,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설교, 그리고 의지의 결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끝나는 설교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제시하지 못하는 공허한 지적 전달로 결코 바람직한 성도의 삶을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물론 에드워즈는 흔하게 일어나는 무분별한 인위적 감정의 문제점들을 강렬한 어조로 지적한다. 이러한 인위적 감정은 성령이 함께하는 진정한 바람직한 정서와 구별이 된다.
에드워즈는 성경에서 가장 잘 거룩한 정서를 보여주는 인물로서 구약의 다윗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도 한다: "첫번째로 주목할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시편을 통해서 자기 신앙의 생생한 모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겨 놓은 그의 거룩한 노래들은 다름아닌 경건하고 거룩한 정서들의 표현이요, 속삭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겸비하고 뜨거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과 놀라운 행사들에 대한 찬탄이요,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간절하게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즐거움과 기쁨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과 충분성과 신실하심 안에서 영혼이 거룩하게 승화되고 승리한 것의 표현이요, 성도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즐거움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정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가까이 접근하려는 성향과 싫어하며 멀어지려는 성향이다. 전자에 해당되는 바로는 사랑, 기쁨, 소망 등의 감정이며, 후자에 해당되는 것들로는 죄에 대한 혐오감과 미움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거룩한 감정들이 일어나는 설교를 에드워즈는 행했고,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에드워즈야말로 열정적인 경건과 심오하고 통합된 지성을 명료하게 조화시킨 탁월한 하나님의 종이었다고 기꺼히 평가를 받는다(D.M.Lloyd-Jones).(97.7.7.Seoul)
명설교: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일반적으로 에드워즈의 설교와 강의는 시대적으로 셋으로 나누어 이해되고 있다. 첫째로, 1720-23년으로 그의 예일대학교 졸업 이후 뉴욕 장로교에서의 사역시절 그리고 예일대학교 강사시절에 행해진 것들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것들로는 '기독교인의 행복', '영광스러운 은혜', '사악한 사람의 죄의 노예' 등을 들 수 있다. 둘째로, 그 다음은 1726-50년 까지인데, 그의 노쓰햄톤에서의 23년간의 목회중에 행해진 것들이다. 대표적인 설교들로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관한 16회의 설교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장례식 설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쓰햄톤교회를 떠나면서 행했던 '고별설교'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로, 마지막으로 분류되는 설교와 강의로는 1750-57년에 행해진 설교로서 스탁브리지에서 인디안 선교사로서 행해진 것들이다. 아울러 짧은 기간이지만 예일대학교의 총장으로서 행해진 것들도 포함된다.
그러한 설교와 강의 가운데서 에드워즈를 기억케하는 가장 두드러지는 역사적 명성을 누리게 하는 작품은 다름아닌 그의 설교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을 우선적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설교의 한 부분을 들어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설교의 제목과 직접적 관련이 되는 대목을 들추어 낼 것이다:
"육적인 자들은 지옥 구덩이 위에서 하나님의 손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불타오르는 구덩이에 들어가야 할 마땅한 자들이며, 그러한 판결은 이미 선고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해 실제로 지옥에서 모진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을 향하신 분노만큼이나 큼니다. 그들은 그 하나님의 분노를 조금도 누구러뜨리거나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악마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지옥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삼킬듯한 불꽃은 그들을 집어 삼키고야 말 것입니다. 그 불꽃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으며, 그들은 어떠한 중보자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 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들은 하나님의 뜻과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의무에 구속되지 않는 몹시 분노하신 하나님의 인내에 의한 것입니다."
이 설교는 38세의 에드워즈 목사가 1741년 7월 8일 미국의 엔필드(Enfield)에서 선포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 Movement)의 중앙에서 행해진 설교로서, 당시 이 설교를 들은 수 많은 회중들에게서 통곡과 눈물이 함께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에드워즈가 메사추세츠주의 노쓰앰톤에서 주목할만한 목회를 시작한지 벌써 14년이 되는 해였다. 대각성운동이 1734년 에드워즈의 탁월한 영적 설교에 의해서 시작된지 벌써 7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이러한 영적으로 성숙한 분위기와 에드워즈의 개인적 영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뜨겁게 선포되어진 설교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 무언가 역사적 작품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한 합작품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생각해 본다. 물론 무엇보다도 그 설교의 주인되신 성령 하나님의 강렬한 역사가 함께 해야 함을 우리는 기억한다.
특기한 점은 2000년 교회사 가운데 이 설교처럼 하나의 설교가 명성을 떨친 경우는 처음이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기독교 역사상 사도시대 이후 가장 뛰어난 설교자"(John H. Gerstner)로서 불리우는 에드워즈의 이 설교는 그의 설교 가운데 최고의 설교이면서 동시에 그 어느 누구의 설교보다도 감동적인 위대한 설교로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이 설교에 대하여 "너무 강렬하고 충격적이다"는 혹독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보다 더욱 진리의 빛을 비추어서 그들의 진상에 의해서 두려워한다면 이는 전적으로 잘한 정당한 일입니다"라는 에드워즈의 답변에는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97.7.7)
에드워즈가 만난 인물 브레이너드
29세의 너무도 짧은 일기로 한 생을 마감해야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는 에드워즈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브레이너드는 일반 교회사에서는 단지 미국 식민지 시대의 한 인디언 선교사로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굳이 그를 말할려고 하는 이유는 에드워즈가 편집을 하고 서문을 써서 출판해낸 그의 일기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의 지속적이고 경건한 영향력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 저서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1984년 출판되어 신학생들의 경건훈련를 위한 중요한 필독서 중의 하나로 애독되어지고 있다.
딸의 약혼자였던 브레이너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에드워즈의 평가는 자신의 가장 큰 관심이기도 했던 주제 곧, 냉철한 지성과 아울러 바른 신앙적 정서를 균형있게 조화시킨 인물이었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를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통찰력을 지닌 인재였고, 명쾌한 사고력과 정확한 판단을 할줄 아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 그는 바르고 경건한 신앙과 광신을 철두철미하게 분별했다. 어떤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이 사리에 맞고 분명한 데 기초를 두고 이루어진 것인가, 성경적이고 합리적인가, 아니면 원기가 왕성한 나머지 해괴망측한 상상을 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하는 문제에서 인간의 감정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브레이너드를 향한 넉넉한 평가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자신의 저서 『신앙과 정서』가 거의 같은 시기인 1746년에 세상에 나온 것을 감안할 때 이 점에서 에드워즈가 어떠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주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에드워즈는 너무도 빨리 시들어버린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바라다보며 그의 결함아닌 "결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그의 결함을 찾아본다면, 그가 고생하는 면에서 너무 지나쳤다는 점이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수고를 한 것에 비하여 마땅히 돌보아야 했을 건강을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촉급한지를 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그의 건강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과 그가 처한 형편은 너무도 고생스럽고 피곤했지만,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당시 참으로 고생스러웠던 선교사들의 삶이 생생하게 부각되는 실감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브레이너드는 1718년 4월 20일 커넥티커트의 헤이담(Haddam/Connecticut)에서 5남 4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9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도 14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어릴적 양친을 잃은 데이비드는 온순했지만, 우울해지는 경향이 있었는 데,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성인이 되어서도 에드워즈의 눈에도 확인되고 있다: "그의 풍부한 감정은 우울증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 그는 때로 우울(melancholy)과 경건한 슬픔(godly sorrow)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하곤했다." 물론 우울증은 일기 가운데서도 보여지는 그의 특징적 내면성임을 우리는 또한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성도라면 영적 우울증이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것이이라!
영국을 영적으로 새롭게한 존 웨슬리는 모든 설교자들이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무엇보다도 브레이너드의 일기는 참되고 진정한 헌신과 바른 기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브레이너드를 향하여 "기도로 숨쉬었고, 기도로 움직였고, 기도로 선교하다가 기도가운데 숨을 거둔 사람"(김명혁)이라고 평가함은 적절하다 하겠다. (97.7.29.Seoul)
대각성 운동의 동역자 죠지 휫필드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일어난 교회를 새롭게 하는 영적 『대각성 운동』은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2회에 걸쳐 계속되었는 데, 1차 대각성 운동은 1734-1735년에, 2차 대각성 운동은 1740-1741년에 일어났다. 나중에 일어난 2차 운동은 영국 출신으로서 웨슬리의 동역자이기도 한 당시 26세의 젊은 부흥사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의 "천둥번개와 같은" 열정적 설교와 더불어 성령의 강력한 역사(役事)가 잠자는 교회를 깨워 뒤흔들며 새롭게하는 신앙부흥운동(Revivalism)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역사가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에드워즈는 이미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휫필드는 폭발시켰다"라고 적절히 묘사하였다.
에드워즈가 시무하던 노쓰햄톤의 영적 상황을 보며 휫필드는 도착날 쓴 자신의 일기에 감동적인 내용을 기록하였다(1740년 10월 17일):
"빛이 비치자 곧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일어났던 하들리에까지 퍼져 나갔다. 최근 하나님의 백성들이 첫사랑을 상실해 가며 무감각한 상태에 있음을 한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앞서 미리 사역하신 점들을 들려주었을 때,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 같았다." 또한 계속되는 일기에서 우리는 노쓰햄톤 교회의 목회자 에드워즈 목사의 당시의 모습을 가정과 함께 그리는 대목도 만나게 된다: "그 곳의 목사는 바로 요나단 에드워즈이다. 그는 충실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현재 건강이 별로 좋지 못하다."
계속되는 휫필드의 일기를 보면, 휫필드와 에드워즈의 신앙적 교제를 우리는 피부로 느끼게 되고 에드워즈의 풍부한 감정도 만나게 된다: "에드워즈의 요청에 의해 그의 어린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에 그들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10월 18일). "오늘 아침에 설교하니 훌륭한 에드워즈는 예배 시간 내내 흐느꼈다. 다른 성도들도 감동을 받았으며, 오후에는 능력이 더 강하게 역사했다"(10월 19일, 주일). 우리는 이 일기 가운데서 휫필드의 에드워즈를 향한 각별함을 또한 보는 데, 다름아닌 에드워즈의 이름 앞에 붙이는 격조높은 존경의 표시인 형용사들인 "신실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 "훌륭한 에드워즈"등을 주목할 때이다.
두 사람의 친분은 이미 1년전 1739년 11월에 뉴욕에 와 있던 휫필드의 편지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편지에서 휫필드는 에드워즈의 『제1차 대각성운동』의 소식을 뉴욕의 상인 노블(Th. Noble)에게서 듣고 언급하며, 자신의 유럽에서의 활약도 소개하기를 잊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휫필드는 에드워즈 목사와의 북미에서의 동역(同役)을 이 편지를 통하여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 향한 목사님과 노블씨의 신실한 사랑의 소식이 저로 하여금 이 편지를 당신께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많은 영혼들을 위해 노쓰햄톤에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인하여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저도 몇 달 만이라도 가서 그 일들을 보고 싶습니다. 신문을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당신은 유럽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추수할 때입니다"(11월 16일). 이 편지가 제대로 에드워즈의 손에 전달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에드워즈도 거의 같은 기대를 가지고 같은 해 영국의 휫필드에게 첫 편지를 보냈다: "목사님께서 계획하시고 있는 내년 여름 뉴잉글랜드 지방의 여행 중에 노쓰햄톤을 방문해 주시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요청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보고 말씀을 들으려는 바램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님을 알아 주십시오"(12월 12일). 1740년 이 두 사람의 역사적 만남은 교회사에 펼쳐질 『제2차 대각성 운동』을 향하고 있었다!
에드워즈의 주요 저작들과 신학사상들
에드워즈의 본격적 저술활동은 23년의 열정적 노쓰햄톤 교회 목회를 정리하고 인디언 선교사로서 체류했던 1750년 이후 보다 여유로운 스탁브리지의 6년동안에 이루어졌다. 이 기간은 에드워즈의 55년 동안의 전생애를 두고 볼 때 1758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끝자락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의 사상적 탁월성과 독특성을 보여주는 저작들이 대부분 이 기간에 세상에 나왔다. 1754년에 「의지의 자유」, 1755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종말에 관하여」와 「진정한 덕의 본성」이 그리고 1758년에 「원죄」가 쓰여졌다.
에드워즈를 지성과 감성이 균형있게 갖추어진 독특한 사상가로 평가케 한 결정적 저작 「신앙과 정서」가 1746년에 노쓰햄톤 목회시절 쓰여진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또한 그의 전생애가 글을 쓰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일관되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벌써 19살 되던 해 석사논문 「존재에 관하여」을 시작으로 그는 일기를 그리고 그외 많은 저술활동을 본격화하였다. 20살에 「거미에 관한 연구」를 내어놓았고 또한 「계시록에 관한 글」을 시작하였다. 22살에 「우주의 아름다움」을, 25살에 「거룩한 것들의 이미지」를, 34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관한 신실한 설명」을 당시 일어난 부흥운동을 변호하기위해 계몽주의적 비판에 맞서 저술하였다. 이러한 저술활동은 목회사역에서 행해진 다양한 설교집과 더불어 끊임없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저술들을 내용별로 보면, 먼저는 신학적 내용 그리고 개인적 관심에 의해서 쓰여진 다른 주제의 사적 내용으로 크게 분류될 수 있다. 신학적 내용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설교들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교리를 주제로 한 저작들과 아울러 에드워즈의 탁월한 신학적 사고(思考)의 진수를 보여주는 신학적 저술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의지의 자유」는 알미니안주의가 가지는 잘못된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를 겨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지나친 칼빈주의(Hyper-Calvinism)가 갖는 비복음적 운명론적 태도를 공격한다. 「원죄」는 테일러 박사(J. Tayler)와 논쟁하면서 2천년 전통의 거대한 기독교 교리를 확신있게 변호한다. 또한 「은혜론」은 「신앙과 정서」그리고 「의지의 자유」의 자매작품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약간은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사적 관심에 의해 쓰여진 글들이란 물론 대부분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이기도 하지만 출판과 공개를 염두에 공개성을 띈 작픔은 아니었다. 사적 경건과 헌신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을 담고 있다. 「일기」, 「삶의 결단들」, 성경을 묵상하면서 그때 그때 기록하였던 「메모들」 그리고 13권 분량의 「잡기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자신을 점검하고,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에드워즈는 인생의 지표 70가지를 설정하였다. 1722년에는 24가지를, 1723년에는 34가지의 생의 지침을 완성하였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의 지침을 죽음에 이르는 일주일 전까지도 점검하였다. 특히 인상깊은 19살 때 시작된「잡기들」(The Miscellanies)은 목회생활 전반을 포함하여 35년동안 그때 그때 상황을 진솔하게 숨김없이 기록한다. 미국의 위대한 사상가요, 목회자이며, 신학자였던 그가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영적 성숙을 향해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였는지를 오늘 우리에게 숨소리와 함께 들려주고 있으니 그 어찌 보배롭지 않으리요! 에드워즈 목사를 친히 만나는 착각을 들게하는 생명감넘치는 글들임이 분명하다. 마감하는 20세기가 18세기의 에드워즈를 만나는 타임머신은 바로 이러한 저술들이 아닐까.
에드워즈가 모으고 읽었던 책들
이제 역사에 부여된 특권을 가지고 18세기 에드워즈의 서재를 부담감없이 마음껏 들여다 볼 것이다. 그의 일기장을 들추어본다 할지라도, 역사가의 마땅한 할 일로 존중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의 일기장을 들추는 일을 할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가 모으고 사랑하고 읽었던 책들이 어떠한 책들이었고, 또한 얼마나 큰 기쁨과 애착을 가지고 책수집과 책읽기를 즐겨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에게 붙여진 또다른 이름들인 '독서광', '책벌레' 그리고 '수집광'은 과연 얼마정도의 타당성을 갖는 것일까?
책모으기에 최선을 다했던 에드워즈의 모습을 자신의 편지들은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1737년 8월 8일 그는 원하는 책을 갖고저 무척이나 간곡한 편지를 한번도 아닌 두 번이나 썼다: "존경의 마음을 품고 편지를 드립니다 ... 저는 용기를 얻어서 전에 「의회판 백과사전」을 보내주십사고 요청했었고, 송구스러운 마음이지만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조심스럽게 저의 요청이 수락되었는지 아니면 거부되었는지를 매우 알고 싶습니다. 만약 당신께서 그 책을 보내주셔서 제가 겨울이 오기 전에 받아볼 수 있을거라 기대해도 된다면 편지배달부에게 말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조금은 다른 내용이지만 1748년 8월 31일 에드워즈는 책선물을 받은 후 큰 기쁨과 함께 감사가 넘치는 편지를 동료 목사인 어스킨(J. Erskine)에게 보냈다: "저는 테일러의 책 두권을 얻게 되어 매우 기쁨니다. 원죄에 관한 테일러의 책을 전에 빌려 읽은 적이 있었는 데, 제 것이 생기니 너무나 기쁘군요. 당신께서 그 책을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그것을 구하기가 쉼지 않았을 것입니다 ... 살아있는 한 이 책들은 제게 유용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마치 원하던 책을 받아들고 기뻐 어쩔줄 모르는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함을 연상케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당시로서는 책구하기가 오늘날처럼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에드워즈가 욕심쟁이처럼 그저 책수집 자체에만 목적을 두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광적이라 할 정도의 집착어린 책수집 배경에는 숨길 수 없는 진리의 보물을 찾아해매는 에드워즈의 열정적 독서열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사무엘 홉킨스는, "그는 모든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 데 특히 신학서적을 읽었으며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그의 지식추구에 있어서 독서를 통해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 그러므로 그의 생전에 모든 나날은 바쁜 벌과도 같이 활짝 핀 모든 꽃에서 꿀을 수집하듯, 실제로 달콤한 지식 더미를 저장했다. 그리고 해가 더하고 지식이 더함에 따라 그는 진보를 더했고, 그럴수록 그의 펜은 점점 더 바빠졌고, 그의 손은 갈수록 더 빨리 원고를 써내려갔다"고 묘사했다. 참으로 에드워즈는 독서의 유익을 그 누구보다도 확신하여 깊은 독서에 빠졌으며, 그 독서에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보다 깊이있는 신학과 사상에로 그리고 폭넓은 목회사역에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그의 서재에는 과연 어떠한 책들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500개의 항목으로 분류된 43쪽 분량의 그의 책 카타로그는 가로 세로 약 20CmX16Cm의 크기로 되어있는 데, 주제뿐 아니라, 제목, 저자, 논평 그리고 메모와 묵상이 첨가되고 있다. 여기에 등장되는 책들중 에드워즈에게 친숙했던 몇몇 저자들을 일컬어 보면,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을 위시하여 마틴 루터, 윌리암 에임즈, 리차드 박스터, 토마스 굳윈, 휴고 흐로티우스, 토마스 홉즈, 존 로크, 찰스 오웬, 존 오웬, 윌리암 퍼킨스, 리차드 십스 그리고 초대교회의 터툴리안, 요셉푸스, 그리고 어거스틴도 보인다. 그의 손떼묻은 서재에는 당시로서는 결코 적지않는 천권 가까이의 책이 꽃혀있었다.(97.8.9, Seoul)
그의 부인 사라와 가정
에드워즈 부부는 새로이 결혼을 준비하는 많은 젊은 남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대설교자 조지 휫필드가 아직 총각시절 에드워즈 부부를 방문한 후, 영국으로 돌아온 즉시 결혼을 작정하였다. 참으로 축복받은 정겹고 사랑스러운 에드워즈 목사의 부부를 바라보며, 휫필드는 그의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특히 사모 사라의 모습은 휫필드로 하여금 축복된 아내의 만남을 생각하며 자신의 결혼을 준비케 하였다. 휫필드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정다운 부부였다 ... 그녀는 온유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다감하면서도 확신있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도 그런 내조자였으며 나로 하여금 여러 달 동안 기도를 드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지금의 내 아내 아브라함의 딸을 얻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물론 타국 먼길을 오랫동안 홀로 여행을 해야만 했던 부흥사 휫필드는 때때로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로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도 거룩하게 서로를 정숙하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에드워즈 부부를 볼 때, 결혼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어떠한 것인지를 더욱 실감났던 것이다. 이러한 격찬은 휫필드에게서만은 아니었다. 작가 사무엘 홉킨스(Samuel Hopkins)도 에드워즈의 가정을 방문하고 나서 "그들이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고, 온전한 화목을 이룬다는 사실"에 경이로운 찬탄을 숨기지 아니했다. 이러한 거룩하고 축복스러운 가정과 부부애는 에드워즈의 수고도 크겠지만, 탁월한 사모 사라의 역할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오래전 20세의 뉴헤이븐에 거주하던 대학생 조나단이 13세의 소녀 사라를 보며 묘사하는 말은 더욱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당시 대학생 조나단이 사용했던 헬라어 문법책 앞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는 소녀 사라를 향한 한편의 시는 거룩한 느낌까지를 갖게 한다:
"그녀의 머리에는 남모르는 향기로움이, 그녀의 가슴에는 하나밖에 없는 순결이 있어 그녀의 행위가 지극히 올바르고 양심이 선해, 온 세상을 전부 준다해도 그릇된 일이나 죄된 일을 하도록 설득할 수 없으리 ... 그녀가 때때로 즐겁게 노래부르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 언제든지 기쁨과 즐거움으로 넘치는 것같이 보이나 어느 누구도 무엇때문인지 모른다네. 그녀는 들판과 숲속을 걸으며, 홀로 있기를 즐겨하며, 기쁨과 환희에 심취해 있으며, 항상 대화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분을 모시고 있는 것 같도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생활화하고 있는 어린 소녀 사라를 향한 청년 조나단의 시선은 남달랐고 많은 기대로 가득찼던 것을 실감하게 된다. 4년 후 조나단이 24세, 사라가 17세 되던 어느 날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한 쌍의 젊은 남녀는 결혼을 하였다. 당시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고상한 인격을 소유한 젊은 숙녀였다.
에드워즈 목사부부는 세아들과 여덟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니까 11명의 자녀를 포함해 총 13명의 대식구가 함께 사랑 안에서 오손도손 살았다. 에드워즈의 사위로서 전기작가이기도 했던 드와이트(Dwight)는 그들 가정의 다정다감했던 모습을 아름다운 대화의 신앙공동체로 묘사하고 있다. "저녁 식사 후 거실에 앉아 약 한 시간 동안 힘든 공부에서 벗어나 자녀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으며 즐겁고 다정한 대화로 긴장을 풀었다. 자주 위트와 유모어가 폭발하며 흥겨운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다시 공부하러 들어가기 전에 점점 진지해져가는 대화를 나누며 큰 관심과 사랑으로 자녀들에게 구원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 아름다운 성도의 가정을 충분히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위트와 함께유모어가 폭발하는 여유를 목사의 가정에서 잃지 않으며 아울러 깊은 신앙의 대화가 끊이지 않았던 에드워즈 목사의 가정이야말로 오늘의 성직자의 가정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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