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코스주의자들에게 고함
오늘날 알파코스나 빈야드 운동의 집회를 통하여 성령의 놀라운 치유와 표징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들은 사도 시대와 같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체험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인간이 기획한 프로그램이나 원리에 따라 자신을 임재하여 사역하시는 분일까. 성령님은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도우시는 분인데 그들은 성령님을 조종하여 그분의 능력을 쏟아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도 사도시대에 행해졌던 모든 표적이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하며 집회시에 표적을 쏟아내기에 안간힘을 쏟는다. 그래서 나온 것이 아말감 이빨이나 은이빨을 금이빨로 바꾸는 표적을 그들의 대표적 표적으로 모든 집회 때마다 등장시킨다.
실제로 사도시대에 사도들이 행한 표적은 다양하고 현저하였다. 그들은 오늘날도 사도 시대에 행해졌던 표적들을 목사님들이나 평신도들도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도시대에 행하여 졌던 표적들이 가능하다면 예수님 공생애 동안 베풀어졌던 표적들도 가능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이나 예수님이 베푼 모든 표적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블에 힘입어 그렇게 한다고 비난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성령을 훼방하는 자”로 정죄하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표적도 성령의 역사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이후 사도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기간이나 드러낸 모든 표적들은 동일한 성령님의 역사인 것이다. 사도 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기간 동안의 드러낸 모든 표적들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예수님 공생애 기간과 사도시대에 사도들이 행한 표적은 다양하고 현저하였으며 빈도가 많았다. 이를테면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셨다. 바다위를 걸었다. 죽은 자를 살렸다. 벙어리를 말하게 했다. 태어나서부터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다. 중풍병자가 그 자리에서 걸었다. 문둥병자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다. 독사에 물렸는데 아무 조치를 하지 않고도 살았다. 무화과 나무 잎들이 한마디의 저주에 의하여 갑자기 시들어졌다. 소경이 그 자리에서 눈을 떳다. 각종 외국어(방언)로 말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소위 성령의 표적이라하며 드러내는 것들은 다양하지도 못하고 현저하지도 못하고 빈도도 약하다. 일부 신비주의자들에 의하여 이러한 다양하고 현저한 표적들이 시도되기는 하였지만 모두 사위적인 것들로 밝혀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최근에 알파코스나 빈야드 운동 집회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금가루 표적이나 금이빨 표적도 그 사위성이 드러난 예가 많이 있다. 미국의 집회에서 집회 인도자가 안수하면 안수 받는 머리에서 금가루가 퍼져나오는 표적을 보였는데 한 집회 참여자가 그 금가루를 수거하여 시험소에 의뢰하여 분석한 결과 금가루가 아니라 플라스틱 성분으로 밝혀진 예가 있다. 금이빨로 변화된 것에 대하여는 이전에 이미 금이빨로 한사람이 금이빨로 변화되었다고 한 사례도 여러번 밝혀졌다. 한 언론기관이 금이빨로 변화된 사람들에게 설문을 돌려 그들의 과거 치과 기록을 제출해 줄것을 요청하였으나 이에 응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아말감(주석 +수은 합금)이 금으로 변한다는 것은 원소가 바뀐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뒤엎는 놀라운 표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님이 베푸신 표적에 에러가 있을까. 더구나 하나님께서 하필 금을 주실까 ? 차라리 완전한 칼슘덩어리를 주시는 것이 완전한 표적이 아닐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금을 주시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임을 성경의 도처에서 발견한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금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들은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금에 대한 성경 말씀들
하나님께서 부정하시는 금
1. 가증한 물건 : 계 17:4
그 여자은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2. 망할 금 : 계 18:12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3. 진노의 금대접 : 계 15:7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4. 우상의 금
계 9: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 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출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왕상 12 :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단 2: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5. 파멸시키는 금 (약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6. 탐욕의 금 (수 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7. 의지하지 못할 금 ( 욥 31:24)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금
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금 (계 21 :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같더라
2. 동방박사의 예물 (마 2:11)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3. 성전 장식과 제사를 위한 금
출 25 :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출 28 : 13, 14
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정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찌니라
출 36:34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에 띠를 꿸 금고리를 만들고 그 띠도 금으로 쌌더라
성도들의 영적인 금
1. 연단의 금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아라
2. 천국에서의 금면류관
계 4:4
또 보좌에 둘러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3. 기도를 담은 금대접
계 5: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성경에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금은 전부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금을 긍정적으로 기술한 말씀은 한군데도 없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금을 우리에게 금이빨 표적으로 주실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차라리 금이 아니라 칼슘 덩어리로 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알파코스나 빈야드 운동에서 자신들이 드러내는 소위 성령의 표적들은 사도시대의 표적들보다 다양하지도 못하고 현저하지도 못하고 빈도도 많지 못하다. 그들이 현저하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표징의 하나인 금이빨 변화는 성경적이지 못하고 더욱이 에러가 심하기 때문에 성령의 표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표적이 사탄의 사술이거나 사탄의 기적이 아닌가 의심해봐야 한다.
오늘날 은사주의 집회에서 죽은자를 살린다든지 태어나서부터 앉은뱅이인 자가 일어났다든지 물위를 걸었다든지하는 현저한 표적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가끔 신비주의자들이 그런 표적이 있다는 소식들은 있었지만 전부 사기성이 드러났다. 오늘날 은사주의 집회에서 죽은 자를 살렸다든지 하는 현저한 표적이 이뤄지고 이것이 참인 것이 드러났다면 세계적으로 매체를 통하여 보도되었고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을 것이며, 이로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참임을 모든 열방에 알리는 호기로 삼아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표적의 흐름에 대하여 읽어야 한다. 구약의 표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목적 하에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도 이러한 표적에 길들여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고 복음을 확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표적들을 드러내셨다. 그때의 표적들은 정말 현저하였고 다양하였으며 빈도가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표적들이 사도시대에 오면서 그 현저성과 다양성 빈도수가 줄어들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사도시대의 현저한 표적이라면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과 죽은자를 살리는 것 중풍병자를 일으키는 것에 국한된다. 다양성이 매우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빈도수에 있어서도 12명의 사도들이 한 것들이 예수님 한분만 한 것에 비해 훨씬 줄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와 바울외의 사도들의 표적에 대하여 성경상에 구체적으로 기술된 것은 없다. 사도들 자신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됨과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을 확증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이러한 표적들을 보여주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사도됨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이러한 표적들을 드러냈다. 성령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만 표적이 드러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사도행전을 보면 12제자들의 행전이 나오고 그다음 이어 사도 바울의 행전이 펼쳐지는 데 12제자들의 표적들에 비해서 사도바울이후의 표적들이 현저성과 빈도성에서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사도행전의 사역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으로 옮겨갈수록 표적의 현저성과 빈도성이 줄어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상황은 또한 사도들의 복음이 확정이 마무리 되어가는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복음이 거의 확정된 이후 그리고 사도의 시대가 지난 이후 오늘날에는 병고침이 은사의 한 형태로 남았으며, 병은 또한 기도로 치료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도 시대 이후 복음이 확산하게되는 큰 이유는 성령께서 열방들에게표적을 보여주심으로가 아니라, 사도들의 희생과 순교적 삶을 살아가며 복음을 전파하며 전파한 복음을 그대로 실천함에 있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의 순교적 삶을 보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가운데 복음을 열방에 확산한 것이다. 복음 확산의 원동력은 성령의 표적에 의하여 확정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12제자들이 모두 순교적 삶을 살았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 대한 민국이 세계 선교 제 2위국의 자리에 있기 까지에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에 참여함과 순교가 바탕이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가운데 기적과 축복을 주시고 치유하시고 하는 것은 복음의 전파라는 사명에 있어서는 부수적(따르는)문제이지 주제적 문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전파의 원동력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의 실천과 희생적이며 순교적 삶을 살려는 의지로부터 찾아야 한다. 오늘날 사역자들의 발상의 전환이 매우 시급한 시점이 와 있다할 것이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오늘날 없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성령님은 전적인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의하여 필요한 곳에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신다. 성령님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동안 그리고 사도들의 시대동안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증하고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필요한 표적들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오늘날도 예수님 공생애기간이나 사도 시대와 똑같은 방법으로 성령께서는 역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이 땅에 육체적 생명체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님은 이제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으로 여기시며 기도와 확증된 복음 가운데 있는 각사람의 성전에 임하여서 놀라운 역사들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합당한 기적을 베푸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치유로 우리의 생을 이끌어 가신다. 우리는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해야 한다. 사도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기간동안에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증하고 사도의 사도됨과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필요한 그러한 류의 표적들을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실 이유가 없다.
은사주의자들은 2000여년전에 성령께서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똑같은 표적들을 오늘날도 달라고 떼를 쓴다. 그리고 표적들에 너무 집중하여 달라 달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은사주의자라고 한다. 은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은사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표적을 구하지 말라”고 한 이유를 정말 진지하게 새겨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시며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알파코스의 문제는 사도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 나타났던 류의 현저하고 다양하고 많은 표적들을 추구하고 있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표적은 믿는 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성도의 생활을 통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따라오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그 인생의 여정가운데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은혜로서 내려주시는 체험을 한다. 때로는 그가 아무리 구하여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을 때도 있다. .한 귀한 생명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는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가신다. 성도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의 기도와 말씀의 거룩한 생활 가운데, 각 성도들에게 합당하고 필요한 기적들을 성령님께서는 베푸시는 것이다.
모월 모시 어느 장소의 집회를 정하고, 음향과 외양적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장시간 찬양을 하고, 감정을 흥기시키고, 성도들이 집합적으로 장시간 소리쳐 기도하여, 성령을 불러내서 이러 이러한 기적(쓰러짐, 신유, 금이빨 표적)을 달라고 달라고 한다 ? 이러한 집회라야지 이렇게 불러내야지 성령은 오시는가 ? 마치 아프리카 한 부족의 제사 모임에서 정령을 불러내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의 표징을 드러내신단 말인가 ?
음향이나 외양적 준비를 하지 않고도, 감정의 흥기를 조성하지 않고도, 오직 말씀과 찬양과 경건을 가지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운데 성령님은 역사하시리라. 그것이 한사람이든, 두 세사람이든, 수백명이든, 골방이든, 길거리든, 교회든, 산속이든, 바닷가이든, 그곳에 성령님은 역사하시리라. 은사주의자들의 집회에는 인위적으로 어떻게 하여 성령님을 강림하게 하려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기어코 어떤 표징을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쓰러지고 뒹굴고 울고 웃고 하는 각종 가시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즉석에서 현저한 표적이 나타나고.... 그래서 이런것이 없으면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다고 하고, 은혜롭지 못했다고 허전해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날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각자의 성전가운데 임하시며, 각자의 생활과 형편과 건강과 재능에 따라 은혜를 베푸신다. 그 은혜가 기적이어도 좋고 기적이 아니어도 감사할 따름이다. 성령님은 성령님이 직접 쓰신 말씀을 가지고 우리 인생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운데 우리의 세계가운데 역사하신다. 그분의 사역은 말씀을 벗어나는 일은 절대 없다. 우리는 그분에게 이렇게 해달라고 구할 수 있지만 그분을 이러이러하게 강림하게 하여서 이러이러하게 하도록 조정할 수는 없다.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조정한다는 말인가 ?
하나님은 우리가 기획한 어떤 프로그램을 따라 프로그램의 안내에 따라 강림하셔서 프로그램에 있는 어떤 일을 행하시도록 요청되어 일하실 분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자리는 기도와 말씀이 있는 자리이다. 성령께서는 알파코스의 루트를 따라 오셔서 더 강하게 역사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이 알파코스를 통하여 성령께서 놀랍게 역사하신다고 선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령은 삼위의 한분으로서 우리와 같이 지와 정과 의의 신격체이다. 그의 사역은 이 세가지 신격적 요소중 어느 한 요소에 편중하여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알파코스나 빈야드 운동가들은 성령님께서 주로 감성적으로 임하실 것이라는 편견과 비성경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령의 표징은 감성적이기도 하지만, 이성적이기도 하며 의지적이기도 하다. 성령은 자신의 열매로서 인내와 절제란 덕목을 지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성도들은 슬프지만 슬픔을 억누를 때도 있고, 소리지르고 싶지만 안으로 삭힐 때도 있고, 사랑을 표현하고 싶지만 그 표현을 일부러 절제할 때도 있는 것이다. 춤추고 싶도록 기쁘지만 그냥 기쁨의 눈물로 돌려야 할 때도 있다. 알파코스나 빈야드 집회에서 보이는 감정의 무절제한 표출은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지 성령의 표징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알파코스나 빈야드 집회에서 드러나는 “토한다 실신한다 혼절한다 쓰러진다 낄낄거린다.....”는 현상은 전혀 성령의 표징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전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표적을 보여야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으로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사역하실 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표적들을 보이며 자신의 메시아 됨을 증거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무수하고 엄청난 표적들을 보고도 자신들의 메시아를 빌라도 법정에 몰아 결국 그가 십자가형을 받게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한 모세의 엄청난 표적들을 보았음에도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를 순종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우를 범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일 것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표적을 구하지 말라고 하며 거부하셨다. 알파코스에서는 “하나님 여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형제(자매)가 와 있습니다. 하나님 이 형제(자매)가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주세요. 아말감이빨이 금이빨로 변하게 해주세요. 그가 이 표적을 보고 믿을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것이다. 이런 기도에 대하여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말하신 것과 동일하게 응답할 것이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표적을 구하지 말라”
알파코스의 문제점은 그들의 정형화된 도식에 따라 불신자를 이끌어 들일 뿐 아니라 이 불신자에게 성령의 인도하심과 임재도 정형화된 도식에 따르게 하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는 성령님의 예정한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따라 성령님의 자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파코스는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를 그들은 도식화하여 성령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며, 성령이 이러이러하게 역사하는 것을 바라며 집회를 유도한다. 여기에 성령이 임재하실까 의문이며, 오히려 집단 체면같은 심리학적 술수가 기승을 부리고 거짓 기적과 감정의 분출만 난무하는 광란의 도가니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알파코스는 또한 프로그램을 정형화하여 상품을 판매하는 방법으로 온세상에 전파하고 있다. 알파 로고가 있는 깃발이 온 세상의 교회들에 나부끼게 하려고 한다. 알파코스의 본부 지침에 따라 세상적인 마켓팅 방법으로 전세계를 제패하려고 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는 자리들에 알파코스가 대치된다. 이런 추세로 나아가면 알파코스는 가히 알파교를 만들 수 있는 상황으로 가지 않을까. 알파코스주의자들이여, 알파코스가 이 시대 영혼을 구원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라고 과신하는데에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혹시 성령님의 길을 막고 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오늘날 알파코스나 빈야드 운동의 집회를 통하여 성령의 놀라운 치유와 표징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들은 사도 시대와 같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체험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인간이 기획한 프로그램이나 원리에 따라 자신을 임재하여 사역하시는 분일까. 성령님은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도우시는 분인데 그들은 성령님을 조종하여 그분의 능력을 쏟아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도 사도시대에 행해졌던 모든 표적이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하며 집회시에 표적을 쏟아내기에 안간힘을 쏟는다. 그래서 나온 것이 아말감 이빨이나 은이빨을 금이빨로 바꾸는 표적을 그들의 대표적 표적으로 모든 집회 때마다 등장시킨다.
실제로 사도시대에 사도들이 행한 표적은 다양하고 현저하였다. 그들은 오늘날도 사도 시대에 행해졌던 표적들을 목사님들이나 평신도들도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도시대에 행하여 졌던 표적들이 가능하다면 예수님 공생애 동안 베풀어졌던 표적들도 가능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이나 예수님이 베푼 모든 표적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블에 힘입어 그렇게 한다고 비난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성령을 훼방하는 자”로 정죄하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표적도 성령의 역사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이후 사도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기간이나 드러낸 모든 표적들은 동일한 성령님의 역사인 것이다. 사도 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기간 동안의 드러낸 모든 표적들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예수님 공생애 기간과 사도시대에 사도들이 행한 표적은 다양하고 현저하였으며 빈도가 많았다. 이를테면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셨다. 바다위를 걸었다. 죽은 자를 살렸다. 벙어리를 말하게 했다. 태어나서부터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다. 중풍병자가 그 자리에서 걸었다. 문둥병자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다. 독사에 물렸는데 아무 조치를 하지 않고도 살았다. 무화과 나무 잎들이 한마디의 저주에 의하여 갑자기 시들어졌다. 소경이 그 자리에서 눈을 떳다. 각종 외국어(방언)로 말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소위 성령의 표적이라하며 드러내는 것들은 다양하지도 못하고 현저하지도 못하고 빈도도 약하다. 일부 신비주의자들에 의하여 이러한 다양하고 현저한 표적들이 시도되기는 하였지만 모두 사위적인 것들로 밝혀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최근에 알파코스나 빈야드 운동 집회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금가루 표적이나 금이빨 표적도 그 사위성이 드러난 예가 많이 있다. 미국의 집회에서 집회 인도자가 안수하면 안수 받는 머리에서 금가루가 퍼져나오는 표적을 보였는데 한 집회 참여자가 그 금가루를 수거하여 시험소에 의뢰하여 분석한 결과 금가루가 아니라 플라스틱 성분으로 밝혀진 예가 있다. 금이빨로 변화된 것에 대하여는 이전에 이미 금이빨로 한사람이 금이빨로 변화되었다고 한 사례도 여러번 밝혀졌다. 한 언론기관이 금이빨로 변화된 사람들에게 설문을 돌려 그들의 과거 치과 기록을 제출해 줄것을 요청하였으나 이에 응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아말감(주석 +수은 합금)이 금으로 변한다는 것은 원소가 바뀐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뒤엎는 놀라운 표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님이 베푸신 표적에 에러가 있을까. 더구나 하나님께서 하필 금을 주실까 ? 차라리 완전한 칼슘덩어리를 주시는 것이 완전한 표적이 아닐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금을 주시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임을 성경의 도처에서 발견한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금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들은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금에 대한 성경 말씀들
하나님께서 부정하시는 금
1. 가증한 물건 : 계 17:4
그 여자은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2. 망할 금 : 계 18:12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3. 진노의 금대접 : 계 15:7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4. 우상의 금
계 9: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 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출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왕상 12 :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단 2: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5. 파멸시키는 금 (약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6. 탐욕의 금 (수 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7. 의지하지 못할 금 ( 욥 31:24)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금
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금 (계 21 :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같더라
2. 동방박사의 예물 (마 2:11)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3. 성전 장식과 제사를 위한 금
출 25 :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출 28 : 13, 14
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정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찌니라
출 36:34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에 띠를 꿸 금고리를 만들고 그 띠도 금으로 쌌더라
성도들의 영적인 금
1. 연단의 금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아라
2. 천국에서의 금면류관
계 4:4
또 보좌에 둘러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3. 기도를 담은 금대접
계 5: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성경에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금은 전부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금을 긍정적으로 기술한 말씀은 한군데도 없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금을 우리에게 금이빨 표적으로 주실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차라리 금이 아니라 칼슘 덩어리로 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알파코스나 빈야드 운동에서 자신들이 드러내는 소위 성령의 표적들은 사도시대의 표적들보다 다양하지도 못하고 현저하지도 못하고 빈도도 많지 못하다. 그들이 현저하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표징의 하나인 금이빨 변화는 성경적이지 못하고 더욱이 에러가 심하기 때문에 성령의 표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표적이 사탄의 사술이거나 사탄의 기적이 아닌가 의심해봐야 한다.
오늘날 은사주의 집회에서 죽은자를 살린다든지 태어나서부터 앉은뱅이인 자가 일어났다든지 물위를 걸었다든지하는 현저한 표적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가끔 신비주의자들이 그런 표적이 있다는 소식들은 있었지만 전부 사기성이 드러났다. 오늘날 은사주의 집회에서 죽은 자를 살렸다든지 하는 현저한 표적이 이뤄지고 이것이 참인 것이 드러났다면 세계적으로 매체를 통하여 보도되었고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을 것이며, 이로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참임을 모든 열방에 알리는 호기로 삼아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표적의 흐름에 대하여 읽어야 한다. 구약의 표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한 목적 하에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도 이러한 표적에 길들여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고 복음을 확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표적들을 드러내셨다. 그때의 표적들은 정말 현저하였고 다양하였으며 빈도가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표적들이 사도시대에 오면서 그 현저성과 다양성 빈도수가 줄어들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사도시대의 현저한 표적이라면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과 죽은자를 살리는 것 중풍병자를 일으키는 것에 국한된다. 다양성이 매우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빈도수에 있어서도 12명의 사도들이 한 것들이 예수님 한분만 한 것에 비해 훨씬 줄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와 바울외의 사도들의 표적에 대하여 성경상에 구체적으로 기술된 것은 없다. 사도들 자신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됨과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을 확증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이러한 표적들을 보여주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사도됨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이러한 표적들을 드러냈다. 성령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만 표적이 드러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사도행전을 보면 12제자들의 행전이 나오고 그다음 이어 사도 바울의 행전이 펼쳐지는 데 12제자들의 표적들에 비해서 사도바울이후의 표적들이 현저성과 빈도성에서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사도행전의 사역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으로 옮겨갈수록 표적의 현저성과 빈도성이 줄어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상황은 또한 사도들의 복음이 확정이 마무리 되어가는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복음이 거의 확정된 이후 그리고 사도의 시대가 지난 이후 오늘날에는 병고침이 은사의 한 형태로 남았으며, 병은 또한 기도로 치료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도 시대 이후 복음이 확산하게되는 큰 이유는 성령께서 열방들에게표적을 보여주심으로가 아니라, 사도들의 희생과 순교적 삶을 살아가며 복음을 전파하며 전파한 복음을 그대로 실천함에 있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의 순교적 삶을 보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가운데 복음을 열방에 확산한 것이다. 복음 확산의 원동력은 성령의 표적에 의하여 확정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12제자들이 모두 순교적 삶을 살았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 대한 민국이 세계 선교 제 2위국의 자리에 있기 까지에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에 참여함과 순교가 바탕이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가운데 기적과 축복을 주시고 치유하시고 하는 것은 복음의 전파라는 사명에 있어서는 부수적(따르는)문제이지 주제적 문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전파의 원동력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의 실천과 희생적이며 순교적 삶을 살려는 의지로부터 찾아야 한다. 오늘날 사역자들의 발상의 전환이 매우 시급한 시점이 와 있다할 것이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오늘날 없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성령님은 전적인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의하여 필요한 곳에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신다. 성령님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동안 그리고 사도들의 시대동안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증하고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필요한 표적들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오늘날도 예수님 공생애기간이나 사도 시대와 똑같은 방법으로 성령께서는 역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이 땅에 육체적 생명체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님은 이제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으로 여기시며 기도와 확증된 복음 가운데 있는 각사람의 성전에 임하여서 놀라운 역사들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합당한 기적을 베푸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치유로 우리의 생을 이끌어 가신다. 우리는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해야 한다. 사도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기간동안에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증하고 사도의 사도됨과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필요한 그러한 류의 표적들을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베푸실 이유가 없다.
은사주의자들은 2000여년전에 성령께서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똑같은 표적들을 오늘날도 달라고 떼를 쓴다. 그리고 표적들에 너무 집중하여 달라 달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은사주의자라고 한다. 은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은사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표적을 구하지 말라”고 한 이유를 정말 진지하게 새겨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시며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알파코스의 문제는 사도시대나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 나타났던 류의 현저하고 다양하고 많은 표적들을 추구하고 있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표적은 믿는 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성도의 생활을 통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따라오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그 인생의 여정가운데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은혜로서 내려주시는 체험을 한다. 때로는 그가 아무리 구하여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을 때도 있다. .한 귀한 생명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는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가신다. 성도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의 기도와 말씀의 거룩한 생활 가운데, 각 성도들에게 합당하고 필요한 기적들을 성령님께서는 베푸시는 것이다.
모월 모시 어느 장소의 집회를 정하고, 음향과 외양적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장시간 찬양을 하고, 감정을 흥기시키고, 성도들이 집합적으로 장시간 소리쳐 기도하여, 성령을 불러내서 이러 이러한 기적(쓰러짐, 신유, 금이빨 표적)을 달라고 달라고 한다 ? 이러한 집회라야지 이렇게 불러내야지 성령은 오시는가 ? 마치 아프리카 한 부족의 제사 모임에서 정령을 불러내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의 표징을 드러내신단 말인가 ?
음향이나 외양적 준비를 하지 않고도, 감정의 흥기를 조성하지 않고도, 오직 말씀과 찬양과 경건을 가지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운데 성령님은 역사하시리라. 그것이 한사람이든, 두 세사람이든, 수백명이든, 골방이든, 길거리든, 교회든, 산속이든, 바닷가이든, 그곳에 성령님은 역사하시리라. 은사주의자들의 집회에는 인위적으로 어떻게 하여 성령님을 강림하게 하려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기어코 어떤 표징을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쓰러지고 뒹굴고 울고 웃고 하는 각종 가시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즉석에서 현저한 표적이 나타나고.... 그래서 이런것이 없으면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다고 하고, 은혜롭지 못했다고 허전해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날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각자의 성전가운데 임하시며, 각자의 생활과 형편과 건강과 재능에 따라 은혜를 베푸신다. 그 은혜가 기적이어도 좋고 기적이 아니어도 감사할 따름이다. 성령님은 성령님이 직접 쓰신 말씀을 가지고 우리 인생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운데 우리의 세계가운데 역사하신다. 그분의 사역은 말씀을 벗어나는 일은 절대 없다. 우리는 그분에게 이렇게 해달라고 구할 수 있지만 그분을 이러이러하게 강림하게 하여서 이러이러하게 하도록 조정할 수는 없다.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조정한다는 말인가 ?
하나님은 우리가 기획한 어떤 프로그램을 따라 프로그램의 안내에 따라 강림하셔서 프로그램에 있는 어떤 일을 행하시도록 요청되어 일하실 분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자리는 기도와 말씀이 있는 자리이다. 성령께서는 알파코스의 루트를 따라 오셔서 더 강하게 역사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이 알파코스를 통하여 성령께서 놀랍게 역사하신다고 선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령은 삼위의 한분으로서 우리와 같이 지와 정과 의의 신격체이다. 그의 사역은 이 세가지 신격적 요소중 어느 한 요소에 편중하여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알파코스나 빈야드 운동가들은 성령님께서 주로 감성적으로 임하실 것이라는 편견과 비성경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령의 표징은 감성적이기도 하지만, 이성적이기도 하며 의지적이기도 하다. 성령은 자신의 열매로서 인내와 절제란 덕목을 지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성도들은 슬프지만 슬픔을 억누를 때도 있고, 소리지르고 싶지만 안으로 삭힐 때도 있고, 사랑을 표현하고 싶지만 그 표현을 일부러 절제할 때도 있는 것이다. 춤추고 싶도록 기쁘지만 그냥 기쁨의 눈물로 돌려야 할 때도 있다. 알파코스나 빈야드 집회에서 보이는 감정의 무절제한 표출은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지 성령의 표징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알파코스나 빈야드 집회에서 드러나는 “토한다 실신한다 혼절한다 쓰러진다 낄낄거린다.....”는 현상은 전혀 성령의 표징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전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표적을 보여야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으로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사역하실 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표적들을 보이며 자신의 메시아 됨을 증거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무수하고 엄청난 표적들을 보고도 자신들의 메시아를 빌라도 법정에 몰아 결국 그가 십자가형을 받게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한 모세의 엄청난 표적들을 보았음에도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를 순종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우를 범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일 것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표적을 구하지 말라고 하며 거부하셨다. 알파코스에서는 “하나님 여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형제(자매)가 와 있습니다. 하나님 이 형제(자매)가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주세요. 아말감이빨이 금이빨로 변하게 해주세요. 그가 이 표적을 보고 믿을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것이다. 이런 기도에 대하여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말하신 것과 동일하게 응답할 것이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표적을 구하지 말라”
알파코스의 문제점은 그들의 정형화된 도식에 따라 불신자를 이끌어 들일 뿐 아니라 이 불신자에게 성령의 인도하심과 임재도 정형화된 도식에 따르게 하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는 성령님의 예정한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따라 성령님의 자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파코스는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를 그들은 도식화하여 성령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며, 성령이 이러이러하게 역사하는 것을 바라며 집회를 유도한다. 여기에 성령이 임재하실까 의문이며, 오히려 집단 체면같은 심리학적 술수가 기승을 부리고 거짓 기적과 감정의 분출만 난무하는 광란의 도가니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알파코스는 또한 프로그램을 정형화하여 상품을 판매하는 방법으로 온세상에 전파하고 있다. 알파 로고가 있는 깃발이 온 세상의 교회들에 나부끼게 하려고 한다. 알파코스의 본부 지침에 따라 세상적인 마켓팅 방법으로 전세계를 제패하려고 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는 자리들에 알파코스가 대치된다. 이런 추세로 나아가면 알파코스는 가히 알파교를 만들 수 있는 상황으로 가지 않을까. 알파코스주의자들이여, 알파코스가 이 시대 영혼을 구원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라고 과신하는데에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혹시 성령님의 길을 막고 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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