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을 보이라! 알파코스의 주말수양회에 부침
김동미 2007-06-01 277
오늘날 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성장 침체를 맞아 성장에 대한 열망은 대단하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효과가 있다하는 프로그램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성경적이며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유익한 것이냐를 검토할 여지도 주지 않고 마구잡이로 도입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성해 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 이러한 성장을 꾀하기 위하여 현재 한국 교회들에 유행처럼 불어 닥치고 있는 것은 보여주는 이벤트적 프로그램들이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의 대표적인 예가 알파코스와 뜨레스디아스 라고 할 수 있다. 알파코스의 주요한 포인트는 초신자를 감동시키기 위한 외양적 보임에 의한 이벤트적 섬김과 성령의 표적 보여줌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근원이 카톨릭인것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이벤트적 섬김과 표적이 참으로 성경적이냐하는 문제를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벤트적 섬김은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초신자 및 불신자들)의 즉흥적 감동을 불러 일으킬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이벤트적 섬김이 그리스도의 참 희생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 이끌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전시적 보여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드러내려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큰 역사를 보여줌으로서 부흥을 꾀하려는 의도는 은사주의적(오순절주의적)교회들이 지향하는 바이다. 실제로 한국의 C목사의 S교회 같은 은사주의적 교회들이 이러한 보여줌을 추구함으로서 양적인 성장을 일궈냈으며, 한국의 수많은 개신교회들이 기존의 개혁적 교리를 버리고 이러한 C목사의 경향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알파코스는 이러한 시류에 맞게끔 짜 놓은 은사주의적이며, 이벤트적 보여줌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서, 천주교, 성공회, 은사주의를 추구하고 천주교에 친화적인 리더들의 적극적인 옹호와 물량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확산 일로에 있다. 또 그들의 공통점은 에큐메님적이며 종교다원적임에 주목하여야 한다.
알파코스의 클라이막스는 주말 수양회를 통하여 성령 세례를 받게하고, 성령의 표적들을 전시적으로 보이고 하나님(성령)의 존재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여기에 사역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보고 전력을 질주한다. 이 주말 수양회에서 개신교들은 교인들의 기존의 개혁적인 체질을 오순절주의적(순복음주의적)체질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즉 성령론에 대한 기존의 교리를 180도 전환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리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체질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분별있는 교인들의 반발을 일으키며, 개혁교리에 입각한 기존의 신앙에 갈등을 일으킴은 물론이다. 이 주말수양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수양관을 집회장소로 선택한다
2) 교회의 가능한 모든 음향 시설을 동원하여 찬양의 극치를 조성하고 감정의 흥기를 고무한다
3)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하더라도
성령세례를 다시 한번 받아야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한다
4) 집회시 방언등을 격려한다. 방언 따라하기도 실시된다.
5) 가계의 저주를 끊는 축사를 실시한다
6) 집회참석자를 나오게 하거나 있는 자리에서 선채로 쓰러뜨린다.
성령터널을 만들어 터널을 지나면서 쓰러지게도 한다
7) 쓰러진자들이 소리를 지르고 떨고 울고 뒹굴기도 한다. 실신하기도 한다
8) 아말감 이빨을 금이빨로 은이빨이나 금이빨을 백금이빨로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
9) 짝짝이 팔과 다리를 교정시키는 일을 한다
10) 목사의 예언과 입신에 대해서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언급한다.
11) 안수를 조심스럽게 취급하지 않는다
12) 인도자(목사)가 특정한 병을 명명하며 그 병이 나았음을 선포한다
13) 목사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며, 목사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이 임재하게 한다.
14) 이외의 많은 감성적이며 무속적 현상들
물론 위의 것들중 부분적으로 실시하기도 하고, 어느 교회들은 많은 부분들을 수정하여 실시하기는 하지만, 성령의 체험으로 달려나가다 보면 애초의 절제와 수정의 의지는 퇴색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알파코스의 기원과 그 운동 성향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알파코스는 빈야드 운동과 합력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알파코스와 빈야드 운동가들과 긴밀히 협력한 증거가 충분하고, 빈야드 운동가들이 실시하고 있는 것들이 그대로 알파코스의 주말 수양회에서 실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빈야드 운동은 곧 신사도 운동과 상통함을 갖는다. 신사도운동은 오늘날도 목사들이 사도들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각종 표적을 실시한다고 믿는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의 빈야드 운동 교회들은 대부분 이 알파코스를 적극 실시하고 있다. 빈야드 운동은 우리 개신교 교단들 대부분이 이단성이 있는 것으로 결론지었으며, 도입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교단이 이러한 발표를 하였다하더라도 개교회들은 이런 지침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살고 있다. 성령의 표적은 믿는 사람들 속에서 항시 일어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영접함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후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표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에 유의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1) 표적의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성령의 표적은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고 사도들의 표적은 사도됨과 사도들의 복음을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누군가(목사)가 이러 이러한 표적을 실시하겠다고 의도하여 드러내는 표적은 성령의 표적이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예수님은 이 시대에 누군가(선지자등)가 표적을 실시하고 표적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3) 성경은 말세에 거짓 선지자의 특징의 하나로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을 지칭하며, 경계하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4) 표적은 보여지기 위하여 누군가에 의하여 행사되는 형태가 아니라, 성령님의 주관에 의해서 표적이 매우 필요한 선교적 상황에서 믿는 자에게 따르는 것이다.
<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 (막 8:12)
<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 (마 16: 3-4)
<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39)
<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 마 7: 22-23)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신13:1-3)
<......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
(계 19: 20)
<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
(계 16: 13-14)
< 사랑하는 자들아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 (요일 4:1)
<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 (요일 2:18)
<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 (벧후 2:15)
<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 (딤후 4:4)
<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 (딤전 4:1)
<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 ( 살후 2:9-10)
<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라 > ( 골 2:8)
<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 갈 5:20-21)
<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 (갈 1:6-8)
< 만일 누가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 고후 11:4)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 고후 11: 13-15)
<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 (요 10: 12)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게 하리라 > (마 24:24>
<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마 24:11-12)
<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
(마 23:18)
<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마 7:15)
위의 성경 말씀에서 보듯이 성경은 누군가에 의하여 행사되는 표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분위기이며, 경계하여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적에 대하여 그 전권을 성령님에 맡기고 있는지 살펴야 하며, 설혹 인간적인 의도와 불순한 동기가 개입되어 있는지 매우 매우 유의하여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표적을 실시하는 현장이 잘못하면 사탄이 준동하는 미혹의 장이 될 수 있으며 불법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지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알파코스의 주말 수양회가 이런 표적의 행사와 능력을 좇음에 있어서 불법적인 요소들이 있는지 면밀히 살피고, 또 살펴야 할 것이며, 우리 개신교는 개혁주의적이며 성경에 충실한 선교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전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전용재
은사주의자들의 오해는 하나님의 영을 특이하고 신비한 어떤 일을 일으키는 영으로만 보는 견해 때문이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신비하고 특이한 감정과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꿈, 환상, 방언, 황홀한 감정, 기적, 입신등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치닫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은 말씀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들은 마귀의 손길이 뻗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할 위험성에 항상 직면하고 있다. 반면에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말씀을 강조한 개혁파 신학이 은사에 강조점을 둔 은사주의 신학보다 더 성령의 사역에 깊이 밀접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결코 그 사역함에 있어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말씀으로 시작해서 은사로 나아갔다가 다시 말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이라면, 은사주의는 은사로 시작했다가 말씀으로 좀 나아갔다가 다시 은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의 범주를 이탈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단이다. 즉 은사주의는 이단과 기복신앙과 신비주의로 변화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소지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알파코스가 은사주의적 성령론에 근거한 것이고, 그의 원리를 그대로 추구한다면 위험한 운동일 수 밖에 없다.
정찬우
역사적으로 볼 때,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이 신비주의에 치우쳐 있었는가 생각해 볼일이다. 그들은 모두 표적적 은사의 행사보다는 사랑의 은사를 사용한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의 전철을 따른 사람들이다. 복음이 사도들에 의하여 확정된 이후로 선지자나 누구를 매개로 하여 표적을 드러내는 일은 없다할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기도하는 누구에게도 기적을 베푸실 수 있다. 특별히 누구에게 능력을 주어서 기적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박현진
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뭔가 부디치는 것--더 이상 통하지 않고 막히는 것--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는 --좀 이상합니다.
김영주
요즈음 우리 교단의 많은 교회들이 알파코스를 통하여 순복음교회처럼 되어가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장로교목사들이 C목사에게 무릎꿇으며 과거 C목사를 비판했던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C목사는 미국의 빈야드운동가들, 신사도운동가들, 종교다원주의자들과 아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다지요. 최근에는 종교다원주의적 발언을 함으로서 그의 속면모를 어느정도 드러냈습니다. 이 C목사는 알파코스를 한국교회들에 파급시키기 위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펴고 있군요. 장로교회들이 장로교 기존의 교리들을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알파코스에 뛰어드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교인수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느냐는 심사인 것 같습니다
김영주
교리는 교회 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역은 이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요그런데 알파코스는 우리 장로교들이 가지고 있던 개혁 교리의 변혁을 요구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알파코스는 빈야드 운동이나 신사도 운동이나 가계저주론을 인정하는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 장로교는 이러한 빈야드, 신사도, 가계저주론을 이단 및 사이비로 결정하고 있습니다. 알파코스의 원리에 충실하게 알파코스를 진행하려면 교리의 전환은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 100년을 통하여 우리 장로교는 교리의 급선회는 없었는데, 알파코스를 통하여 교리의 혁명이 이뤄져야 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이는 교단뿐만 아니라 장로교인들 전체에 심각한 문제입니다.
박현진
김동미님 너무 판사같다고 하지 마셔요. 댓글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좀 탱탱한 도전도 있고 그래야 맛이 있지 않습니까. 4가지 문제점을 님의 글에서 지적하고자 합니다. 1.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아 우리가 잘못되었구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요. 2. 유익성이 없는 것을 마구잡이로 하는 것도 편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 될 것이구요. 3. 이벤트성이라는 것도 돈이 많이 들고 이벤트해서 효과가 없으면 목사가 독박쓴다는 것을 잘알고 있는데 쉽게 할리가 있습니까. 4. 오순절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편견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미님의 말이 어느 정도 동의가 필요한 것은 아무래도 프로그램을 너무 쉽게 도입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는 성공을 할수 없다는 점입니다. 신앙이 깊음위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지적한데로 외양적인 것에 치우칠 수 있음은 맞습니다. 본질에 충실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니까요. 본질에 충실하면 목회는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맞습니다.
김동미 2007-06-01 277
오늘날 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성장 침체를 맞아 성장에 대한 열망은 대단하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효과가 있다하는 프로그램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성경적이며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유익한 것이냐를 검토할 여지도 주지 않고 마구잡이로 도입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성해 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 이러한 성장을 꾀하기 위하여 현재 한국 교회들에 유행처럼 불어 닥치고 있는 것은 보여주는 이벤트적 프로그램들이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의 대표적인 예가 알파코스와 뜨레스디아스 라고 할 수 있다. 알파코스의 주요한 포인트는 초신자를 감동시키기 위한 외양적 보임에 의한 이벤트적 섬김과 성령의 표적 보여줌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근원이 카톨릭인것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이벤트적 섬김과 표적이 참으로 성경적이냐하는 문제를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벤트적 섬김은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초신자 및 불신자들)의 즉흥적 감동을 불러 일으킬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이벤트적 섬김이 그리스도의 참 희생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 이끌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전시적 보여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드러내려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큰 역사를 보여줌으로서 부흥을 꾀하려는 의도는 은사주의적(오순절주의적)교회들이 지향하는 바이다. 실제로 한국의 C목사의 S교회 같은 은사주의적 교회들이 이러한 보여줌을 추구함으로서 양적인 성장을 일궈냈으며, 한국의 수많은 개신교회들이 기존의 개혁적 교리를 버리고 이러한 C목사의 경향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알파코스는 이러한 시류에 맞게끔 짜 놓은 은사주의적이며, 이벤트적 보여줌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서, 천주교, 성공회, 은사주의를 추구하고 천주교에 친화적인 리더들의 적극적인 옹호와 물량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확산 일로에 있다. 또 그들의 공통점은 에큐메님적이며 종교다원적임에 주목하여야 한다.
알파코스의 클라이막스는 주말 수양회를 통하여 성령 세례를 받게하고, 성령의 표적들을 전시적으로 보이고 하나님(성령)의 존재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여기에 사역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보고 전력을 질주한다. 이 주말 수양회에서 개신교들은 교인들의 기존의 개혁적인 체질을 오순절주의적(순복음주의적)체질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즉 성령론에 대한 기존의 교리를 180도 전환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리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체질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분별있는 교인들의 반발을 일으키며, 개혁교리에 입각한 기존의 신앙에 갈등을 일으킴은 물론이다. 이 주말수양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수양관을 집회장소로 선택한다
2) 교회의 가능한 모든 음향 시설을 동원하여 찬양의 극치를 조성하고 감정의 흥기를 고무한다
3)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하더라도
성령세례를 다시 한번 받아야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한다
4) 집회시 방언등을 격려한다. 방언 따라하기도 실시된다.
5) 가계의 저주를 끊는 축사를 실시한다
6) 집회참석자를 나오게 하거나 있는 자리에서 선채로 쓰러뜨린다.
성령터널을 만들어 터널을 지나면서 쓰러지게도 한다
7) 쓰러진자들이 소리를 지르고 떨고 울고 뒹굴기도 한다. 실신하기도 한다
8) 아말감 이빨을 금이빨로 은이빨이나 금이빨을 백금이빨로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
9) 짝짝이 팔과 다리를 교정시키는 일을 한다
10) 목사의 예언과 입신에 대해서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언급한다.
11) 안수를 조심스럽게 취급하지 않는다
12) 인도자(목사)가 특정한 병을 명명하며 그 병이 나았음을 선포한다
13) 목사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며, 목사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이 임재하게 한다.
14) 이외의 많은 감성적이며 무속적 현상들
물론 위의 것들중 부분적으로 실시하기도 하고, 어느 교회들은 많은 부분들을 수정하여 실시하기는 하지만, 성령의 체험으로 달려나가다 보면 애초의 절제와 수정의 의지는 퇴색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알파코스의 기원과 그 운동 성향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알파코스는 빈야드 운동과 합력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알파코스와 빈야드 운동가들과 긴밀히 협력한 증거가 충분하고, 빈야드 운동가들이 실시하고 있는 것들이 그대로 알파코스의 주말 수양회에서 실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빈야드 운동은 곧 신사도 운동과 상통함을 갖는다. 신사도운동은 오늘날도 목사들이 사도들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각종 표적을 실시한다고 믿는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의 빈야드 운동 교회들은 대부분 이 알파코스를 적극 실시하고 있다. 빈야드 운동은 우리 개신교 교단들 대부분이 이단성이 있는 것으로 결론지었으며, 도입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교단이 이러한 발표를 하였다하더라도 개교회들은 이런 지침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살고 있다. 성령의 표적은 믿는 사람들 속에서 항시 일어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영접함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후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표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에 유의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1) 표적의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성령의 표적은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고 사도들의 표적은 사도됨과 사도들의 복음을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누군가(목사)가 이러 이러한 표적을 실시하겠다고 의도하여 드러내는 표적은 성령의 표적이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예수님은 이 시대에 누군가(선지자등)가 표적을 실시하고 표적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3) 성경은 말세에 거짓 선지자의 특징의 하나로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을 지칭하며, 경계하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4) 표적은 보여지기 위하여 누군가에 의하여 행사되는 형태가 아니라, 성령님의 주관에 의해서 표적이 매우 필요한 선교적 상황에서 믿는 자에게 따르는 것이다.
<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 (막 8:12)
<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 (마 16: 3-4)
<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39)
<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 마 7: 22-23)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신13:1-3)
<......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
(계 19: 20)
<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
(계 16: 13-14)
< 사랑하는 자들아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 (요일 4:1)
<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 (요일 2:18)
<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 (벧후 2:15)
<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 (딤후 4:4)
<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 (딤전 4:1)
<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 ( 살후 2:9-10)
<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라 > ( 골 2:8)
<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 갈 5:20-21)
<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 (갈 1:6-8)
< 만일 누가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 고후 11:4)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 고후 11: 13-15)
<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 (요 10: 12)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게 하리라 > (마 24:24>
<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마 24:11-12)
<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
(마 23:18)
<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마 7:15)
위의 성경 말씀에서 보듯이 성경은 누군가에 의하여 행사되는 표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분위기이며, 경계하여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적에 대하여 그 전권을 성령님에 맡기고 있는지 살펴야 하며, 설혹 인간적인 의도와 불순한 동기가 개입되어 있는지 매우 매우 유의하여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표적을 실시하는 현장이 잘못하면 사탄이 준동하는 미혹의 장이 될 수 있으며 불법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지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알파코스의 주말 수양회가 이런 표적의 행사와 능력을 좇음에 있어서 불법적인 요소들이 있는지 면밀히 살피고, 또 살펴야 할 것이며, 우리 개신교는 개혁주의적이며 성경에 충실한 선교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전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전용재
은사주의자들의 오해는 하나님의 영을 특이하고 신비한 어떤 일을 일으키는 영으로만 보는 견해 때문이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신비하고 특이한 감정과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꿈, 환상, 방언, 황홀한 감정, 기적, 입신등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치닫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은 말씀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들은 마귀의 손길이 뻗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할 위험성에 항상 직면하고 있다. 반면에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말씀을 강조한 개혁파 신학이 은사에 강조점을 둔 은사주의 신학보다 더 성령의 사역에 깊이 밀접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결코 그 사역함에 있어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말씀으로 시작해서 은사로 나아갔다가 다시 말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이라면, 은사주의는 은사로 시작했다가 말씀으로 좀 나아갔다가 다시 은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의 범주를 이탈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단이다. 즉 은사주의는 이단과 기복신앙과 신비주의로 변화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소지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알파코스가 은사주의적 성령론에 근거한 것이고, 그의 원리를 그대로 추구한다면 위험한 운동일 수 밖에 없다.
정찬우
역사적으로 볼 때,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이 신비주의에 치우쳐 있었는가 생각해 볼일이다. 그들은 모두 표적적 은사의 행사보다는 사랑의 은사를 사용한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의 전철을 따른 사람들이다. 복음이 사도들에 의하여 확정된 이후로 선지자나 누구를 매개로 하여 표적을 드러내는 일은 없다할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기도하는 누구에게도 기적을 베푸실 수 있다. 특별히 누구에게 능력을 주어서 기적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박현진
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뭔가 부디치는 것--더 이상 통하지 않고 막히는 것--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는 --좀 이상합니다.
김영주
요즈음 우리 교단의 많은 교회들이 알파코스를 통하여 순복음교회처럼 되어가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장로교목사들이 C목사에게 무릎꿇으며 과거 C목사를 비판했던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C목사는 미국의 빈야드운동가들, 신사도운동가들, 종교다원주의자들과 아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다지요. 최근에는 종교다원주의적 발언을 함으로서 그의 속면모를 어느정도 드러냈습니다. 이 C목사는 알파코스를 한국교회들에 파급시키기 위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펴고 있군요. 장로교회들이 장로교 기존의 교리들을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알파코스에 뛰어드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교인수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느냐는 심사인 것 같습니다
김영주
교리는 교회 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모든 사역은 이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요그런데 알파코스는 우리 장로교들이 가지고 있던 개혁 교리의 변혁을 요구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알파코스는 빈야드 운동이나 신사도 운동이나 가계저주론을 인정하는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 장로교는 이러한 빈야드, 신사도, 가계저주론을 이단 및 사이비로 결정하고 있습니다. 알파코스의 원리에 충실하게 알파코스를 진행하려면 교리의 전환은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 100년을 통하여 우리 장로교는 교리의 급선회는 없었는데, 알파코스를 통하여 교리의 혁명이 이뤄져야 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이는 교단뿐만 아니라 장로교인들 전체에 심각한 문제입니다.
박현진
김동미님 너무 판사같다고 하지 마셔요. 댓글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좀 탱탱한 도전도 있고 그래야 맛이 있지 않습니까. 4가지 문제점을 님의 글에서 지적하고자 합니다. 1.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아 우리가 잘못되었구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요. 2. 유익성이 없는 것을 마구잡이로 하는 것도 편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 될 것이구요. 3. 이벤트성이라는 것도 돈이 많이 들고 이벤트해서 효과가 없으면 목사가 독박쓴다는 것을 잘알고 있는데 쉽게 할리가 있습니까. 4. 오순절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편견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미님의 말이 어느 정도 동의가 필요한 것은 아무래도 프로그램을 너무 쉽게 도입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는 성공을 할수 없다는 점입니다. 신앙이 깊음위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지적한데로 외양적인 것에 치우칠 수 있음은 맞습니다. 본질에 충실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니까요. 본질에 충실하면 목회는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맞습니다.
'신세계운동 > 알 파 코 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파코스를 이해하려면 성공회부터 이해해야 (0) | 2007.06.11 |
---|---|
알파코스주의자들에게 고함 (0) | 2007.06.10 |
알파코스 교회본질 회복운동인가 (0) | 2007.06.08 |
알파코스)그런거 우리에게도 있는데 -신완식목사님글 (0) | 2007.06.08 |
안타까운 알파코스..... (0) | 2007.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