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출30:9). 북한 정권이 유사 이래 드문 독재와 학정을 오늘날까지 '깡다구'로 버티며 핵탄 제조까지 가능했던 배후엔 소위 '주체사상'이 있었다. 이 사상을 정립한 장본인인 황장엽 씨가 '지상천국'을 찾아 과감히 탈북 대열에 끼었었지만 정작 '천국'에서까지 찬밥 신세를 당해온 일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상황을 한국교회에 대입해 보자. 일찍이 장대현교회의 회개부흥, 주기철/손양원 목사 등 순교자의 신앙, '깡다구' 같은 새벽기도 전통으로 표현되는 나름의 주체 신앙을 지닌 한국교회는 유사 이래 드문 핵 폭발 부흥을 단 1세기 안에 이뤘다. 이스라엘처럼 작고 작은 한반도를 돌아 보신 하나님의 긍휼과 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과연 한국교회가 이를 하나님의 복과 은총으로 감사하고 있을까. 지금 한국교회는 장대현교회 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전국교회와 해외교회까지 일심단합해 옛 부흥의 재현을 애타게 열망하고 있다. 일견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에페소교회를 촉구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첫사랑을 찾으려는 제스처로도 보인다.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큰 열매와 결과가 내다보이질 않는다. 더 나아가 숫자를 의식한 이벤트성 게임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까닭이 뭘까? 한국교회는 주체 신앙을 잃어버린 지 오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보냐고? 한국교회는 지금 노아 홍수의 거센 물결 같은 외제 영성에 푹 빠져 깊이 잠겨가고 있는 탓이다. '다른 색'을 좇는 한국교회 정보바다인 웹을 뒤져 보라. 지금 한국교회는 찬연한 무지개빛의 '다른 색'을 따라가고 있다. 관상기도/향심기도/수도원 영성 등 소위 '관상 영성'(comtemplative spirituality), '목적 영성' 등으로 그득그득 메워져 가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불과 1세기 안에 세계가 놀랄 성장으로 지구촌 교계를 '제패'한 한국교회의 찬란한 부흥탑은 단지 알량한 기념탑으로 남기 십상이란 게 필자의 추정이다. 그런데도 돌이켜 이 외제 영성을 회개하거나 주체 신앙을 되찾을 생각은 않고, 당초 한국교회 거대성장/거대부흥의 불씨였고 바로 새벽기도 전통을 배태시킨 장대현교회를 향한 '첫사랑' 구호만 안타깝게 부르짖고 있으니 또다른 아이러니다. 장대현 형 '회개운동'을 열망하고 있지만, 정작 이색 영성을 회개할 마음이 전혀 내비치질 않고 있다. 웹사이트를 샅샅이 뒤져봐도 한국교회의 회개 리스트엔 관상영성/목적영성을 뉘우치거나 회개한다는 항목은 없다.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인지, 감히 회개 대상으로 보질 않는 것인지. 어쩌면 한국교회는 지난 날의 거대 성장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후퇴 현상을 겉 모습만의 성장 탓이라고 치부하는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는 과연 현재 세계 제2위의 선교대국임을 진정 감사하고 있을까? 글쎄다. 아무리 하나님이 풍요와 숫자를 보태주셔도 청지기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 부패한 것은 돌아보지 않고, 이제 와서 성장과 풍요, 복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차제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다시 재흥과 재번성을 바란다는 것은 묘한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지난 1세기 동안 분명히 한국교회를 분에 넘치게 복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거기 진정 감사하기보다 그 부흥을 몽땅 싸잡아 소위 '기복주의', '성장제일주의'로 매도하면서 정반대 방향인 수도원적인 내적 관조, 이색 영성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또다시 '부흥'이라니..하나님도 헷갈리실 노릇이다. 수도원적 관조엔 필히 수사적 '청빈'이 따르니 한국교회는 다시 가난해져 갈 수 밖에 없다. 원리가 그렇다. 이미 판도가 바뀌고 흐름세가 기울었다. 패러다임 쉬프트가 이뤄졌다. 거국적 아니 국내외적 '회개운동'의 이름과 허울은 좋지만 정작 회개할 것을 회개하지 않는 한국교회를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주님께서 관조하신 라오디케아 교회의 모습과도 같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을 것을 알지 못하도다." [관상운동은 덥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영성운동이다.] 한국교회는 20세기에 너무 갑작스런 풍요를 누린 탓인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해 이젠 아예 자기중심적 관상, 수도원적 가난을 추구하고 있다. 안으로 안으로만 치우쳐가고 있다. 그런데 관상은 환상이다. 껍질만의 영성이다. 한국교회가 관상에 치우치면 치우칠수록 안으로안으로만 잦아듦으로 밖으로밖으로만 향해도 될까말까 한 교회성장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장대현'형과 '아주사' 형 영성 작금의 한국교회는 참 요상한 성향을 갖고 있다. 회개는 부르짖는데 행전(行傳)적, 오순절적 영성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아주사(Azusa)적 부흥을 원치 않고 일편단심 장대현적 부흥만 추구한다. 스스로 오순절적 영성에 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조용기 목사를 가장 위대한 교계 지도자로 보는 모순도 보인다. 아마도 조목사의 오순절적 영성보다는 그의 리더십과 해외에 널리 알려진 업적과 공로 때문이리라. 한국교회는 한편으로 오순절적 영성을 흠모하면서도 한편으로 강한 거부감을 가져왔다. 이것은 보수계와 진보계에 공통된 현상이다. 그 까닭의 한 가지라면 20세기의 대표적 오순절 영성인 아주사적 영성을 참된 행전적/오순절적 영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행전적/오순절적 영성에 가까운 쪽은 장대현 쪽이 아닌 아주사 쪽이다. 장대현적 부흥은 좀 더 구약적이고 아주사의 부흥은 신약적이다. 장대현적 회개운동은 일찍이 슈무엘(사무엘) 당대의 미즈파 금식기도(슈무엘a 7:6), 요나 때의 니네베 회개운동에 더 가깝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장대현 부흥을 또다른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이라고 애써 표현한다. 과연 그럴까? 오순절 이후의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서로 나누고 서로 돕고 주변사회가 변화되고 전체 교회가 부흥된 장대현적 부흥도 초기교회를 닮은 효과가 있긴 있었다. 그런데 현상적인 의미에서 아주사 부흥은 오순절 강림절 당일과 더 닮아있다. 그 대표적인 '로고'는 바로 방언일 것이다! 장대현 부흥을 오순절 성령 '강림'에 비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성령께서는 2000년전 예루살렘에 강림하신 이래(ever since) 계속 지상에 계시므로 다시 위로부터의 재강림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그 분을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 성령의 파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강력 핵발전소로 존재하기 때문에 거기 송전선만 연결하면 언제나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 권능과 은사가 늘 활용 가능(available)하다는 얘기다. 각 가정에서 전선과 플러그로 얼마든지 전기를 활용하듯 각 교회는 언제나 제대로 전기줄을 잇대기만 하면 성령의 채우심과 은사와 열매 등을 맛볼 수 있고 힘입을 수 있다. 성령의 핵발전소는 '정전사태'란 게 있을 수 없다. 참되고 복된 경건은 성경 그대로의 영성 참 경건의 길은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다. 불교적인 '비움', 호흡, 신과의 '합일' 등 모종의 특정코드를 배우도록 강요하는 이색적인 '관상기도'처럼 복잡하지 않다. 성경적인 영성, 참 영성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영성이다! 말씀과 성령이 제시하신 경건이 곧 참된 영성이다. 사도 파울이 간파한 인간은 영/혼/육의 3차원으로 이뤄진 존재다(테살로니카a 5:23, 히4:12). 속사람이 참 사람이며 참된 자아다. 이 참 자아는 오로지 거듭났을 때만 그 진가를 발한다. 파울은 이 속사람을 일깨우는 긴요한 도구로 방언을 논했다. 방언은 영과 혼을 극명히 구분시킨다(코린토a 14:14,15). 방언은 나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유일무이한 도구이기 때문이다(코14:2)! 기도는 하나님 앞에 살라 올리는 향이다(계5:8). 그 향불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이어야 한다(출30:9, 민26:61). 다른 이상한 불이어선 안된다. 참 기독교적 영성은 내 속의 신을 찾아가는 관상기도가 아니라, 이미 내 속에 계신 성령을 통해 내 영의 비밀을 성부께 아뢰는 방언기도를 통해 얻어진다! 방언기도야 말로 참 영성의 길이며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마련해 두신 모든 영적 풍요와 자산을 활용하는 채널이다. 가장 깊은 기도, 가장 차원 높은 기도는 카톨릭 수사들이 권장한 관상기도가 아니라 사도 파울이 말한 방언기도다. 하나님께 내 영의 비밀을 기도하는 기도는 방언기도 뿐이다. 그러기에 사탄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런데..한국교회의 전반적 대세는 대체로 방언 등 성령의 초자연적 권능과 은사를 좌시/천대해 왔다. 받아서 끼고는 있는데 활용하지 않는다. 챙기긴 했는데 별 쓸모없이 내동댕이 쳐 두고 있다는 말이다. 방언을 언급만 해도 "또 그 얘기냐?"며 외면한다. 또 방언을 하기 시작한 사람들도 대개는 일회용 체험으로 내던져 둔다. 성령의 귀한 선물을 이처럼 박대하는데 무슨 참 영성을 논할 수나 있으리오. 한국교회에선 방언이 금기사항의 일종이다. 극소수의 일부 교회 외에는 정규 예배시간이나 공중모임 때 방언 사용은 절대 금물 또는 절대 사절이다! 알고 보면 이런 현상은 기실 파울의 교훈과는 정반대의 결과다. 파울은 공중에서 통역 없는 중구난방식의 무질서한 '방언'전시를 삼가라고 했을 뿐이지 질서있는 방언, 찬양의 전체방언을 금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사도 파울이 방언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코린토a 14:15,18,26~28,39~40을 유심히 읽어보라. 그래도 파울이 부정적인가? 한국교회의 대표적 혼동 사항 한 가지는 방언을 특정개인만의 몫으로 탠 은사로만 보기. 이것은 특히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빌미잡는 사항이다. 그러나 파울은 명백히 은사로서의 방언과 일반 방언을 구분하고 있다. 개인이 하나님께 영의 비밀을 고하는 방언과, 교회에서 모든 신자의 '덕 쌓기'(원어는 믿음쌓기에 더 가까움)를 위해 다불과 3명이 차서를 따라 하되 통역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 방언과는 분명히 다르다. 은사는 성령께서 특정 개인에게 나눠주시고 개인이 받는 것이지만 일반방언은 "받는" 게 아니라 본인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대명의 일부로 내리신 마르코스복음(맑)16:17에서 언급된 '새 방언'은 분명히 신자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반방언을 가리킨다. 행전에 나타난 방언을 개인마다 달리 주어진 은사라고 보는 사람들은 필자의 다음 설명을 유의해 보기 바란다. 1. 오순절 당일 120성도가 모두 방언을 했다(행2:4). 2. 또 같은 날 페트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다(최소한 결국) 방언을 했다고 봐야 한다. 페트로는 분명히 성령 임재의 증거를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성령은 "보고 듣게" 임하셨다. 3.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은 분명히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눈으로 봤다(행8:18). 방언을 가리킨다. 그랬기에 그는 안수로 성령 받아 방언하게 되는 과정을 돈으로 살려고 했다. 4. 백부장 코르넬리우스의 일가 전원은 방언을 했다(행10:44~46). 당일 방문한 유대인들과 의사/과학자 루카는 성령 부으심을 곧 방언과 및 방언찬양으로 간주했다(위45~47절, 11:16 참조). 그러므로 방언이 은사라면 코르넬리우스 가정만 전원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얘기가 돼버린다. 5. 샤울/파울은 아나니아에게 성령을 받아 방언을 했다(). 바로 당시 기록엔 없지만 파울이 그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6. 아폴로가 돌보던 에페소 교인들을 파울이 안수했을 때 약12 교우들 전원이 방언을 했다.성령을 받을 때 방언은 빼놓고 예언만 하는 예는 없다(여기서 예언이란 초자연적 예언을 말한다). 방언은 신자 누구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방언만 너무 강조하는 듯 보이는가?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자기 영의 비밀을 고해야 하기에 그렇다! 사실 성경은 다른 선물들보다 방언을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다. 다름 아닌 파울 자신이 코린토 성도 그 누구보다 방언을 더 했으며 코린토a 12~14장에서 계속 방언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파울이 필자보다 방언을 더 강조한 셈이 아닌가. 알고보면 방언은 성령침례('성령세례'보다 더 성경적인 용어다)의 우선적 표징이며 개인에게 탠 은사들을 끌어오는 당길 줄 노릇을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영성의 길은 방언기도인 것이다. 파울의 교훈을 지켜 행하는 교회는 늘 성경적 영성과 은혜가 풍성하다. 주의할 일은 그런 교회에도 필수적으로 긴요한 것이 영적 분별이란 것이다. 각종 영적 은사와 권능은 말씀과 질서, 분별에 따라 관리돼야 한다. 단적으로, 한국교회가 성경(코a14:26)에 명시된 초기교회의 이상적인(ideal) 예배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질서로 쉽게 기울어지는 성향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영적 분별과 센스의 결여 문제이지 성령님의 문제는 아니다. 즉 권능과 은사 자체의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관상열차'의 종착역은 뉴에이지 작금의 한국교회는 온갖 허상의 영성에 파묻혀 있다. 관상의 영성은 소위 관상기도, 향심(向心)기도(centering prayer), 호흡기도(breathing prayer)로 불리는 같은 종류의 기도로 대표된다. 관상영성은 뿌리부터 다른 이색 영성이다. 성경에 뿌리를 둔 영성이 아니다. 이 '기도'는 고대 광야수사들에게서 온 것으로 카톨릭 교회박사 '십자가의 성 요한'과 그의 동역자 테레사에게서 확립됐다고 할 수 있다. '성 베르나르도'는 관상을 "인간최고의 예배행위"로 꼽기도 했다. 즉 관상영성은 카톨릭에서 온 것이다. 한국교계의 영성운동은 주로 관상기도에 국한되나 미국 교계의 관상운동은 '크리스천 요가'명상, 미로명상(labyrinth)을 곁들인 예가 많다. 특히 젊은이들의 '떠오름교회'(emergent church)들은 그렇다. 한국교회도 현 추세대로 나가면 궁극적으로 미로명상, 요가명상 등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요가명상, 미로명상은 한국교계로서는 좀 더 이국적이기에 아직 주춤주춤하고 있을 뿐이다. 관상영성은 필연적으로 다원종교적이다. 종교마다 명상의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관상기도에서 강조되는 비움/성취감 등은 불교/힌두교 명상에서도 강조되기 때문에 한국 조계종 등 불교계에서도 한국 신교계의 근래 관상운동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불교언론을 통해 보도하기도 했다. 왜 관심을 가질까? 자기네와 공통점이 있고 맥락이 통하기 때문이다! 20세기 관상기도의 선구자/대가 격인 존 메인, 로렌스 프리먼, 토머스 머튼, 토머스 키팅 등은 모두 종교간 대화/합일/일치에 신경께나 쓴 사람들이다. 머튼은 특히 도교/불교와 카톨릭의 합일을 추구했다. 성상기도에 관해 책 한권을 쓸 정도였던 예수회 사제 헨리 나웬은 딱 한 번 본 머튼을 정신적 멘토로 삼았고 나웬이 가장 아낀 직제자 라벗 조나스 박사는 기독교와 동시에 일본불교에 심취한 사람이다. [확인하고 싶은 독자는 조나스의 사이트 http://www.emptybell.org로 한번 가 보라.] 소위 '수호성인' 등의 이콘을 앞에 놓고 응시/명상하며 하는 성상기도는 정교회/카톨릭은 물론 신교의 수도원 운동에 앞장선 떼제공동체의 고 로제 수사가 적극 보급했던 사항이다. 로제 수사가 미사 집전 도중 정신이상녀의 칼에 찔려 비참하게 피살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배후와 연유가 있었다. 따라서 관상영성은 궁극적으로 다원종교 영성, 뉴에이지 영성으로 합쳐질 운명이다. 장차 모든 종교의 영성이 일치하고 합일될 영성이 뭐겠는가? 다름아닌 관상영성이다! 이미 카톨릭/신교/불교/힌두교계에 일치한 영성이 관상영성이란 말이다. 관상기도는 카톨릭은 몰라도 기독교의 고차원적/영적 기도방식은 결코 아니다. 관상의 영은 뉴에이지의 영과 같은 종류의 영이다. 관상의 영은 성령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관상기도를 교회에 주신 적이 없다. 오순절 당일 보여주셨고 파울이 그의 서신에서 확인한 최 고차원의 영적인 기도는 오로지 방언기도일 뿐이다. 한국교회는 관상영성을 회개하기 전엔 성령으로부터의 부흥/성장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참 경건/영성을 거부하고 헛 영성을 즐겨온 한국교회가 관상영성의 악습/폐풍을 회개하고 버리지 않는 한 장대현적 부흥은 기대하기 어렵다. 종말을 의식하는 영성인가? 이 세상은 반드시 구약 예언서들과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종말을 향해 간다는 것이 성도의 믿음이어야 한다. 이단들이 주장해온 시한적 종말론 탓에 아예 종말을 잊고 사는 신자들도 많다. 지금이 종말임을 부정하려는 본능적인 인간의식 때문이다. 말세다, 말세다 한탄하는데도 정작 신자들 중엔 이른 바 '긍정적' 역사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이 예언하는 말세는 자못 부정적이다. 그 까닭은 현세는 마귀가 지배하고 있으며 예수 크리스토께서 왕의 왕으로 군림하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심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 중엔 마귀의 때를 모르거나 잊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마귀는 자기 때를 알므로 최후까지 최대한 더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가려는 목적을 이뤄가고 있다. 자기 뜻과 목적을 상당량 이루고 있다는 얘기다. 이 말세에 곧 다시 오실 예수 크리스토를 맞이하는 데 최선을 기울여야 할 텐데 정신 차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한 가닥" 해보려는 신자들도 이와 비슷한 심성의 사람들이다. 이상한 영성, 뉴에이지 영성과 손잡으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성경적 말세 의식을 가진 사람들로 보기가 어렵다. |
'신세계운동 > 알 파 코 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파코스가 부흥운동을 일으킨다고? (0) | 2007.06.18 |
---|---|
성령수양회가 너희에게 구원을 준다더냐! (0) | 2007.06.18 |
환장할 노릇이다. 목사라는 인간들이.... (0) | 2007.06.17 |
알파코스를 시행하는 교단들은 에큐메니칼운동에 찬성하는.. (0) | 2007.06.16 |
에큐메니칼 운동에 속한 교회와 반대하는 교회는?? (0) | 2007.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