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있나니
우리는 여기 이 진술에서 하나님께 채움을 받은 결과와 그 작용을 봅니다.
앞서 10장에서 개설한 계요에 따라(마음이 가난한 자=긍휼히 여기는 자, 애통하는자=마음이 청결한 자, 온유한 자=화평케 하는 자)우리는 이 복이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과 부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인의 생활과 기능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의 생활이나 기능과 모든 점에서 전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강조하고 싶어하신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전혀 다른 나라(천국)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앞의 장들에서 살펴 본 대로 자연인이 팔복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태롭고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습관처럼 말하기를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것을 연구하며 사람들이 실천하도록 서로를 설득하는 일뿐이다. 교회의 저주거리가 된 신학은 안된다. 필요한 것은 이 아름다운 윤리적 교훈, 여기 산상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신기한 도덕의 개선책 뿐이다'라고 합니다. 그들이 성경에서 산상설교를 좋아한 까닭은 산상설교가 비신학적이며, 교리나 교의나 기타 쓸데 없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이 영광스러운 대목에 대한 그와 같은 견해가 철저할 정도로 어리석고 무익한 것임을 상기합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복된 것입니까? 그 대답은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과 절대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다시 신학과 교리속으로 돌입하게 되는 셈입니다.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세상에는 어째서 전쟁이 있는 것입니까? 세계문제와 국제긴장은 어째서 변함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까?
본문에 의하면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단 하나, 곧 죄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죄입니다. 여기에 다시 신학이 대두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람의 정욕과 탐욕과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성입니다.
평화를 위해 모인 모든 국제회의들, 유엔이 실패하는 것 같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치적인 것도 아니요 경제적인 것도 아니요 사회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 대답은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것이요, 교리적인 것입니다. 만일 문제의 원인이 시내물의 근원인 샘에 있을 때 물의 상태를 고치기 위해 시내물 속에 화학약품을 집어 넣는다면 시간과 돈과 에너지의 낭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 원인으로 향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원인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에서 발견되는 과오일 뿐 아니라 교회 자체 안에서도 발견되는 과오입니다. 교회가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에게 설교할 때에 인간적인 노력과 열심만을 보여주고 말은 일이 얼마나 허다했습니까? 이것은 성경교리에 배치됩니다.
성겅에 의하면 문제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으며, 새 마음, 새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이 문제를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설교가 인도주의자들이 항상 애호하던 성귀였음은 분명하지만 이 산상설교처럼 인도주의와 이상주의를 철저하게 정죄하는 것도 성경에 다시 없다고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한 표면을 조작하는 일만으로는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부정적인 면에서 살펴봅시다.
오늘날 세계는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모두 화평케하는 사람들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두통거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화평케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분명히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생래적 성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안일무사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화평케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안이하고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화평하려는 사람은 공정과 정의감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온 세상이 이런 원리에 입각하여 이런 사람들에 의해 움직였다면 오늘보다도 형편은 더 악화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평하는 사람은 유화주의자가 아니라고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유화적으로 전쟁을 지연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부정과 불의한 것을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화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화평케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우리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수동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그가 평화로운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싸움 좋아하는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능동적인 의미에서 이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평화를 능동적으로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현상 유지하는 일에 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평화를 욕구하며 평화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합니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룹과 그룹 사이에, 국가와 국가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할 필요를 적극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한다는 사실에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암시합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전혀 새로운 전망의 필연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새 성품을 의미함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새 마음, 깨끗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이 문제들에는 하나의 논리적인 순서가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뿐입니다. 그 까닭은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깨끗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 시기와 질투와 이와 비슷한 것들로 가득차 있는 마음의 소유자는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살펴보았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기에 앞서 그는 전적으로 자아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밝히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이것입니다. 즉 화평자는 반드시 자기에게 가져오는 결과에 비추어서만 만사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질상 이것이 우리에게 온통 문제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점을 고려해서 만사를 살핍니까?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는 필연코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 까닭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다툼과 불화의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만사를 자기 중심적 관점에서 봅니다. '이것이 내게 공평한가? 나는 내 권리와 몫을 받고 있는가?'라고...
그러므로 화평자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은
첫째, 그가 자아에 대해 전혀 새로운 견해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보았고 어떤 의미에서 이 비참하고 비열한 자아는 그것으로하여 괴로워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심령의 가난함을 보았고 자신의 검은 마음 때문에 애통하였고 여러분 자신을 보고 의에 주리에 목말랐다면 여러분의 귄리나 특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은 자아를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참 크리스챤인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최선의 시금석의 하나는 바로 '나는 나의 생래적 자아를 미워하는가?'라는 것을 시인할 수 없겠습니까?
둘째, 기독교인은 그 속에 두 사람, 곧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옛 사람을 미워하며 그에게 '가만 있어! 상관마! 나는 너와 절교다'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이느 새 생활관을 가집니다.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새 견해를 가짐을 의미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그는 그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며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들을 보려고 애를 씁니다.
셋째, 그것은 또한 전적으로 새 세계관을 갖게됨을 의미합니다. 화평자는 오직 한 가지 관심만을 가지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도 이것이었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 관점과 함께 다음의 관점이 뒤 따릅니다. 즉 화평자는 자기를 낮출 준비가 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화평을 촉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악행과 불의를 당할 준비마저 되어 있습니다. 화평자는 자기자신과 자기이익과 자기관심하고 결별한 사실을 압니다. 화평자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사람들에게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것을 위해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 고난을 감내합니다.
이상은 이론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떠합니까? 이것이 매우 중요한 까닭은 화평자가 되는 것은 연구실에 앉아 이 원리를 이론적으로 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이루어 집니까?
무엇보다도 이것은 여러분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혀를 제어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는 불화가 훨씬 적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여러분의 친구에게 다른 사람이 그에게 한 불친절한 말을 해 준다면 여러분은 그의 참 친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가짜 우정입니다.
다음으로 말씀드리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을 놓고 보든지 그것을 항상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쟁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직면할 때에는 말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서 적용해 주기를 바라는 원리는 이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이제 적극적인 자세가 되어 평화를 이룰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언된 축복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으리라'입니다. 이것은 '소유된다'는 뜻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소유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들을 소유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그의 자녀로 소유하시려 합니다. 이 말씀은 화평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의 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반복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가 평화의 하나님이시며, 이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화평을 이루셨습니까?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위하여 그가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신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 평화를 가져야 함을 의욕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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