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공부/산상수훈강해집

제 10장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제 10장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란 말씀의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경외감과 자기가 완전히 부적격하다는 감을 가지고서만 이 말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진술은 처음으로 발설된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주의를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문에 대한 그 많은 저작과 설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본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파악하는 최선책은 본문의 중심되는 의미와 강조된 것의 일부를 파악해 보는 것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본문을 본문의 배경에 비추어 살펴보고 다른 팔복에 대한 관계에서 연구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명코 팔복에는 일정한 사상의 연결이 있습니다. 그 연결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가능한 방법으로 다음의 방법을 제의하는 바입니다.


대답되어야 할 첫번째 질문은 어째서 이 말씀이 여기에 위치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본문이 마땅히 맨 처음에 와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전 종교의 목적입니다.


저는 6절이 설명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6절은 중앙에 옵니다. 6절을 분수선으로 간주한다면 이 특정진술이 어째서 이 지점에 오게 되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세 복은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의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가난한 심령과 우리의 죄성때문에 애통함, 인류의 생활을 파멸시킨 자아와 자아 중심성에 대한 참된 이해의 결과로서의 온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 위대한 욕구충족의 진술, 곧 하나님께서 이렇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필요를 인식할 때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가 배부르게 채워질 것이라는 놀라운 대답을 가지고 오십니다.


이 때로부터 계속해서 우리는 만족의 결과, 곧 가득히 채워진 결과를 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긍휼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는 자가 됩니다. 그 후에는 이 모든 일의 결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에의 접근방식입니다.


처음 세 복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산의 한 쪽 측면에 오르는 셈입니다. 제 4복에서는 정상에 오르며 그런 다음 다른 쪽 측면으로 내려가는 셈이 됩니다.


우리는 이 특정 지점에서 강조된 영광스러운 진술에서 강조된 것이 약속이 아니라 순결한 마음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의 본질임은 물론입니다.


이것을 살펴보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들이 강조된 용어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말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반복해 말씀드리거니와 여기에 복음의 특색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음에 관계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은 온통 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복음서의 기록을 읽어보면 주님이 내내 마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계심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것을 강조하신 것은 틀림없이 바리새인들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반대하신 까닭은 그들이 잔과 주발의 겉에만 관심을 가졌고 속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주의 가르침의 중심이었는데 이렇게 강조하신 사실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살펴봅시다. 주님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의 신앙는 궁극적으로 교리의 이해와 지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것을 다시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교리와 지적이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무서운 것은 우리가 여기서 그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이 외형과 행위보다 마음을 더 강조하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독교는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용어는 무슨 뜻입니까?


성경의 관용법에 의하면 마음은 <인격의 중심>입니다. 마음은 단순히 감동과 감정의 좌소만이 아닙니다. 마음은 다른 모든 것이 흘러 나오는 샘입니다. 마음은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포함합니다. 마음은 전인입니다. 마음은 우리 주님이 강조하신 그것입니다. 마음의 온갖 활동의 근원이 순수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마음은 이처럼 깊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복음은 항상 이것을 강조하며 복음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둘째로 본문은 마음이 항상 우리의 모든 문제거리의 좌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나쁜 생각이 항상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가 타락한 것은 낙원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변화시킨다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어떤 문제의 원인에는 사람의 비열하고 무가치한 욕망에서 나오는 것을 항상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교육만으로는 사람을 선하고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이 최고의 교육을 받고도 철저히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중심에 있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용어를 살펴봅시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팔복이 교리로 꽉 차 있는 것을 다시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깨끗할 때에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람됨은 이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란 말을 정의해 봅시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함을 어떤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한뜻은 위선이 없다는 뜻이고 '성한'이란 뜻입니다. 즉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성한 것'과 부합합니다. 이 말은 아무 것도 숨겨진 것이 없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신실, 진실이라는 말로 서술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일편단심, 진심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분할된 마음입니다. 나의 일부는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고 찬양하지만 다른 부분은 다른 것을 원합니다. 이것은 또한 정화된, 흠이 없는 뜻도 포함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깨끗한 것은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으신 완전하고 흠 없고 순결하고 온전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말하면 완전한 표현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좀더 분석해보면 하나님을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며 분할되지 않은 사랑을 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고만 관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더욱 축소시켜서 말하면 우리는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삶의 최고 의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를 알고자 열망하며 그를 사랑하며 섬기고자 의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최고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을 보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볼 수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역기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곧 성결, 깨끗한 마음, 혼합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격하시켜 예의 범절, 도덕, 또는 교리에 대한 지적 관심 정도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 인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영적 영역에서는 빛과 어둠, 검은 것과 흰 것,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금도 혼합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닮은 사람들만이 그를 볼 수 있고 그의 존전에 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기에 앞서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문제에 관해서도 장구한 교회사를 일관해서 많은 글이 쓰여졌습니다. 이것이 객관적이며 가시적인 것인가? 아니면 순전히 영적인 것인가?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며 증거를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신체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모습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보는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역사의 일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봅니다. 하지만 그를 안다는 의미에서 또는 그의 가까우심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그를 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 속의 영상같이 희미하게 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어떻게 깨끗해 질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 수 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온 대 주제가 다시 나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곧 승려가 되어 이 세상과 결별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전임직업'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만일 이 깨끗한 마음을 가지려면 내게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도원 제도의 견해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비성경적이며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바 모든 것은 여러분과 제가 타고난 마음이 검다는 것을 알고 다윗이 하던 기도에 참여하여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할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지만 생애 끝에 가서는 시작보다 더 검은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습니다. 정결한 마음을 가지는 오직 한 길은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깨끗케 하시는 일입니다. 오로지 그의 내주하심과 역사만이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으며 우리 속에 활동하셔서 우리로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게 하심으로써'하십니다.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