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인 지금,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영적 싸움이 중시된다. 온 세상이 통째로, 한없이 캄캄하고 혼탁한 탓이다. 어딜 둘러봐도 칠흑 같이 어둡고, 교계마저도 작금은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진리 등대를 가리켜주는 작은 등불들이 등불 노릇을 못하니, 칠흑 같은 어둠의 파도 속에서 잃은 영들이 아우성치며 죄악과 혼동, 공허 속에 헤매다 익사해 간다.
그런 와중에도 성도가 살아있다는 증거는 영적 싸움에의 임전 태세. 각자 싸워야 할 싸움을 누가 대신 싸워주지 못한다. 물론 성도들이 도고(intercession=중보기도)로 돕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편히 쉬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나 치러야 할 싸움이 영적 전투다! 그래서 영적 전쟁엔 휴전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영적 전쟁 무용론
좀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은 영적 전쟁이란 사실상 허구적 개념이요 따라서 무의미하며, 성도는 그냥 가만 앉아 '영성 생활'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방향으로 오도해버린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모든 상황이 그분 뜻대로 돌아가므로 내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잠잠히 서서 바라보기만 하라"는 식으로 주장해온 사람들도 있다.
크리스토께서 이미 다 따놓으신 승리이니만큼 우리는 싸울 필요 없이 맨날 찬양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마귀 세상,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복잡한 영적 상황 따위는 "몰라도 된다"며 모르쇠주의로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눈에 보이는 물질계/정신계, 제도적 교회의 생활만도 복잡다단하고 안 그래도 맨날 싸울 거리가 많은데, 뭐 영계 싸움까지 신경 쓸 것 있냐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겉으로는 선의로 보이는 이런 생각들이 결과적으로, 스스로 사탄의 고도의 전략에 속아 성도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플래시보(placebo) 효과를 낸다. 밋밋하고 느슨하게, 적당히 살도록 만들어 놓는 사탄의 물에 물, 술에 술 타기 작전이라는 것이다.
가짜 평화, '휴전'과 무장해제는 사탄의 전략
오늘날은 유난히들 '평화'를 힘줘 말한다. 지구촌을 망라하는 P.E.A.C.E. 프로젝트란 것도 있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 보라. 정작 평화의 군주 예수 크리스토가 빠져버린, 빛 좋은 개살구 격 평화가 더 많다. 크리스토의 참 평화는 "무조건 OK" 식 평화가 아니다. "아무 종교나 좋소!" 식, "천주교도 유대교도 회교도 불교도 힌두교도 우리 모두 어깨 동무!" 란 식의 평화가 아니다. 그건 사실상 사탄이 주는 '거짓 평화'다. 모두와 손 잡기 위해 양팔이 아래로 꺾인 십자가 로고의 평화.. 그런 '평화' 담론을, 요즘은 기독교인들까지도 참여하고 적극 수용한다. 그런 범종교적 평화가 마치 지구촌의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양..
반면 크리스토의 평화는 오직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님만을 크리스토로 받아들일 때 성령을 통해 임하는 영적인 평화다. 독자는 주님 말씀, 기억하는가?
"그대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 말게. 평화가 아닌 검을 주러 왔다네."(마11:34. 이하 성구는 사역)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나? 내가 자네들한테 말하는데 그게 아니라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네."(�12:51)
주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게 아니라 믿는 성도의 심령 깊은 곳에 참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다. 주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유엔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지구촌 평화와는 다르다. RW가 추구하는 P.E.A.C.E.와도 다르다. 그럼, 주님의 평화란 어떤 것인가?
"내가 평화를 그대들에게 남겨 두네. 내 평화를 그대들에게 주는 거지.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같지 않아! 그대들은 마음에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게."(요14:27)
주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다르다'는 말은 주님의 평화만이 참 평화라는 얘기다. 왜? 주님이 곧 평화의 군주시니까. 바로 이 점에 귀착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과 사탄에게 속는다. 속기 십상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주님의 이 참 평화가 없는 사람은 영적 전쟁에 임할 수가 없다.
작금 지구촌이 종교를 서로 '초월'하자는 다원종교운동, 종교혼합운동, 종교일치운동, 종교통합 등 온통 화해 무드 속에 마냥 "평화롭다"고 생각하여 마귀한데 무장해제를 당하는 판국에 교인들이 새삼스럽게 무슨 영적 전투를 위한 하나님의 완전무장을 갈구하겠으며 싸우려는 전의인들 있을손가?
사람들은 종교와 신앙을 초월, 합심하여 지구촌 가난도 해소하고 에이즈 문제도 해결하자고 외치는 굵직굵직한 지도자들의 입심 좋은 평화 발언에 완전히 뿅~ 가버리니, 거기 유일한 평화의 군주이신 예수 크리스토의 [세상과 다른(!)] 참 평화가 스며들 자리나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오로지 크리스토께서 남겨두고 가신 참 평화를 영 속에 지닌 신자들만 성령 안에서 영적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결론이다.
영적 전쟁이 대체 뭐기에?
사실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란 직접적인 낱말 자체는 성경엔 없다(바로 이 점을 갖고 영적 전쟁 개념 자체를 트집 잡는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선한 싸움'이라는 낱말에서도 감지하듯, 이 개념은 성경 속에서 너무나 확연하다! 한번 살펴보자. 다음은 고도의 기술(記述)로부터 단순한 싸움의 개념까지, 간접적/직접적으로 영적 전쟁을 묘사한 성구들이다.
눅14:31, 요18:36, 로7:23, 코린토A9:26, 코B 7:5, 10:3,4, �6:10~18, 티모테A 1:18, 6:12, 팀B 4:7, 필리포1:30, 테살로니카A 2:2, 히10:32, 12:4, 페트로A 5:9, 유다1:3, 계12:7, 17:14, 19:11..
[구약의 관련 성구들은 대부분 신약 영적 싸움의 그림자이지만, 다니엘 10:12,13,20,21 등은 성도의 기도와 천계의 영적 전투와의 밀접한 연계성을 시사해 준다.]
위 성구 가운데서 특히 다음 구절들은 영적 전투의 개념을 명증해준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몸으로 걷지만, 몸을 따라 싸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투용 무기들은 육적인 것이 아닌,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권능적 무기들입니다. 우리는 이론을 끌어내리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슬러 도전하는 모든 오만을 끌어내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크리스토께 굴복시킵니다."(코린토B 10:3~5)
"끝으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 분의 권능의 힘으로 튼튼해지시오. 하나님의 완전무장을 갖추어 마귀의 속임수에 맞설 수 있게 하시오. 우리의 싸움은 몸과 피에 맞서지 않고, (어둠의) 통치권들과 맞서고, 권력들과 맞서고, 이 세상 어둠의 지배자들과 맞서고, 하늘의 영적인 악의 세력들에 맞서는 싸움입니다."(�6:10~12)
위 두 성구에서 분명해지는 사실: 영적 싸움이 세상 전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말싸움/몸싸움/육박전(=육탄전)이나 기계전, 레이저 광선무기를 동원한 '별들의 전쟁' 따위가 아니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악령들을 상대로 한 전투라는 것이다. '귀신 잡는 해병대'란 말과는 달리 총탄이나 대포알로 귀신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그러나 전쟁 양상은 물적/육적 싸움이나 영적 싸움이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적을 알아야
중국 춘추시대 오 나라의 명전략가 '선 우'(=손무/孫武, 자호=장킹)가 있었다. 훗날 동서양에 널리 알려진 '손자병법'(孫子兵法. 손자/'선 지'는 높임이름)이란 책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 병법서의 핵심 문구는 다음과 같다.
故曰 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敗
(고왈 지피지기 백전불태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패)
"이를테면, 적군을 알고 아군을 알면 백번 싸움에도 위태롭지 않을 것이요, 적을 모르고 자신만 알면 승패가 반반씩, 적도 자신도 모른다면 매번 지게 된다"는 뜻이다. 흔히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이긴다)으로 간추려 쓰인다.
그런데 지상병법을 배우신 적도 없는 '기묘자', '모사'(전략가/조언자)이신 예수 크리스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는 어떤 임금인들 딴 임금과 전투를 하러 가려면, 우선 앉아서 일만 명으로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한테로 오는 그와 겨룰 수 있을지 어림해 보려고 하지 않겠나?" (�14:31).
'선 우'는 자못 특수한 전법처럼, 예수님은 더 평범한 상식적 차원으로 접근하신다. 그런데 상식적으로도 게임이 안될 싸움을 치르는 신자들이 대다수라 할 수 있다. 오직 극소수만 "이것이 그런가?" 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싸움에 제대로 임한다. 독자는 대다수에 속하는가, 극소수인가?
그럼 과연 우리의 적군은 누굴까?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과 그의 세력들이다. 혈육을 지닌 인간이 우리의 적이 아니다. 조지 W. 부쉬가 겨냥한 눈에 보이지 않는 테러집단도 우리의 진짜 적은 아니다.
헤아림=분별
적을 아는 데는 치밀한 산정과 판단이 필요하다. 주님은 전투에 앞서 분명히 어림해야,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 상식임을 시사하셨다. 어림/헤아림이란, 자신의 영적 지식을 통한 분별을 뜻한다. 실은, '선 우'의 지피지기도 여기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것. 현대전으로 말하자면 '헤아림'은 적진의 동태를 망원경/안테나/레이더/위성 등으로 살펴본 결과에 따라 작전참모회의에서 아군의 현황과의 비교를 통해 승패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는 것이랄 수 있다.
헤아림을 위한 망원경/안테나/레이더는 중요한 전투 준비 무기다. 거듭난 각 신자는 기본적으로 주신 분별력을 성경 말씀을 통해 최대화할 수 있으며, 또한 성령의 뜻에 따라 지정하신 특정 신자에게만 내리시는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 교회의 분별력이 강화된다.
신호나팔=경고
"또 나팔이 또렷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겠습니까?"(코A 14:8).
영적 분별만으로는 전투에 임하기가 어렵다. 영적 분별의 결과에 따라 경고해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임전태세이려면 신호 나팔소리를 또렷이 불어야 한다. 경고나팔/진군나팔을 잘 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대한민국 군부대에선 나팔수가 사라져 버렸지만 영적 군대는 나팔수가 있어야 한다.
너와 내가 맨날, 매 시간, 매 순간 치러야 할 싸움이 바로 이 영전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도 그때그때 기회가 닿는 대로 계속 쓰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성도가 살아있다는 증거는 영적 싸움에의 임전 태세. 각자 싸워야 할 싸움을 누가 대신 싸워주지 못한다. 물론 성도들이 도고(intercession=중보기도)로 돕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편히 쉬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나 치러야 할 싸움이 영적 전투다! 그래서 영적 전쟁엔 휴전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영적 전쟁 무용론
좀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은 영적 전쟁이란 사실상 허구적 개념이요 따라서 무의미하며, 성도는 그냥 가만 앉아 '영성 생활'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방향으로 오도해버린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모든 상황이 그분 뜻대로 돌아가므로 내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잠잠히 서서 바라보기만 하라"는 식으로 주장해온 사람들도 있다.
크리스토께서 이미 다 따놓으신 승리이니만큼 우리는 싸울 필요 없이 맨날 찬양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마귀 세상,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복잡한 영적 상황 따위는 "몰라도 된다"며 모르쇠주의로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눈에 보이는 물질계/정신계, 제도적 교회의 생활만도 복잡다단하고 안 그래도 맨날 싸울 거리가 많은데, 뭐 영계 싸움까지 신경 쓸 것 있냐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겉으로는 선의로 보이는 이런 생각들이 결과적으로, 스스로 사탄의 고도의 전략에 속아 성도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플래시보(placebo) 효과를 낸다. 밋밋하고 느슨하게, 적당히 살도록 만들어 놓는 사탄의 물에 물, 술에 술 타기 작전이라는 것이다.
가짜 평화, '휴전'과 무장해제는 사탄의 전략
오늘날은 유난히들 '평화'를 힘줘 말한다. 지구촌을 망라하는 P.E.A.C.E. 프로젝트란 것도 있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 보라. 정작 평화의 군주 예수 크리스토가 빠져버린, 빛 좋은 개살구 격 평화가 더 많다. 크리스토의 참 평화는 "무조건 OK" 식 평화가 아니다. "아무 종교나 좋소!" 식, "천주교도 유대교도 회교도 불교도 힌두교도 우리 모두 어깨 동무!" 란 식의 평화가 아니다. 그건 사실상 사탄이 주는 '거짓 평화'다. 모두와 손 잡기 위해 양팔이 아래로 꺾인 십자가 로고의 평화.. 그런 '평화' 담론을, 요즘은 기독교인들까지도 참여하고 적극 수용한다. 그런 범종교적 평화가 마치 지구촌의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양..
반면 크리스토의 평화는 오직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님만을 크리스토로 받아들일 때 성령을 통해 임하는 영적인 평화다. 독자는 주님 말씀, 기억하는가?
"그대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 말게. 평화가 아닌 검을 주러 왔다네."(마11:34. 이하 성구는 사역)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나? 내가 자네들한테 말하는데 그게 아니라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네."(�12:51)
주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게 아니라 믿는 성도의 심령 깊은 곳에 참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다. 주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유엔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지구촌 평화와는 다르다. RW가 추구하는 P.E.A.C.E.와도 다르다. 그럼, 주님의 평화란 어떤 것인가?
"내가 평화를 그대들에게 남겨 두네. 내 평화를 그대들에게 주는 거지.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같지 않아! 그대들은 마음에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게."(요14:27)
주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다르다'는 말은 주님의 평화만이 참 평화라는 얘기다. 왜? 주님이 곧 평화의 군주시니까. 바로 이 점에 귀착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과 사탄에게 속는다. 속기 십상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주님의 이 참 평화가 없는 사람은 영적 전쟁에 임할 수가 없다.
작금 지구촌이 종교를 서로 '초월'하자는 다원종교운동, 종교혼합운동, 종교일치운동, 종교통합 등 온통 화해 무드 속에 마냥 "평화롭다"고 생각하여 마귀한데 무장해제를 당하는 판국에 교인들이 새삼스럽게 무슨 영적 전투를 위한 하나님의 완전무장을 갈구하겠으며 싸우려는 전의인들 있을손가?
사람들은 종교와 신앙을 초월, 합심하여 지구촌 가난도 해소하고 에이즈 문제도 해결하자고 외치는 굵직굵직한 지도자들의 입심 좋은 평화 발언에 완전히 뿅~ 가버리니, 거기 유일한 평화의 군주이신 예수 크리스토의 [세상과 다른(!)] 참 평화가 스며들 자리나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오로지 크리스토께서 남겨두고 가신 참 평화를 영 속에 지닌 신자들만 성령 안에서 영적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결론이다.
영적 전쟁이 대체 뭐기에?
사실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란 직접적인 낱말 자체는 성경엔 없다(바로 이 점을 갖고 영적 전쟁 개념 자체를 트집 잡는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선한 싸움'이라는 낱말에서도 감지하듯, 이 개념은 성경 속에서 너무나 확연하다! 한번 살펴보자. 다음은 고도의 기술(記述)로부터 단순한 싸움의 개념까지, 간접적/직접적으로 영적 전쟁을 묘사한 성구들이다.
눅14:31, 요18:36, 로7:23, 코린토A9:26, 코B 7:5, 10:3,4, �6:10~18, 티모테A 1:18, 6:12, 팀B 4:7, 필리포1:30, 테살로니카A 2:2, 히10:32, 12:4, 페트로A 5:9, 유다1:3, 계12:7, 17:14, 19:11..
[구약의 관련 성구들은 대부분 신약 영적 싸움의 그림자이지만, 다니엘 10:12,13,20,21 등은 성도의 기도와 천계의 영적 전투와의 밀접한 연계성을 시사해 준다.]
위 성구 가운데서 특히 다음 구절들은 영적 전투의 개념을 명증해준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몸으로 걷지만, 몸을 따라 싸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투용 무기들은 육적인 것이 아닌,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권능적 무기들입니다. 우리는 이론을 끌어내리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슬러 도전하는 모든 오만을 끌어내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크리스토께 굴복시킵니다."(코린토B 10:3~5)
"끝으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 분의 권능의 힘으로 튼튼해지시오. 하나님의 완전무장을 갖추어 마귀의 속임수에 맞설 수 있게 하시오. 우리의 싸움은 몸과 피에 맞서지 않고, (어둠의) 통치권들과 맞서고, 권력들과 맞서고, 이 세상 어둠의 지배자들과 맞서고, 하늘의 영적인 악의 세력들에 맞서는 싸움입니다."(�6:10~12)
위 두 성구에서 분명해지는 사실: 영적 싸움이 세상 전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말싸움/몸싸움/육박전(=육탄전)이나 기계전, 레이저 광선무기를 동원한 '별들의 전쟁' 따위가 아니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악령들을 상대로 한 전투라는 것이다. '귀신 잡는 해병대'란 말과는 달리 총탄이나 대포알로 귀신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그러나 전쟁 양상은 물적/육적 싸움이나 영적 싸움이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적을 알아야
중국 춘추시대 오 나라의 명전략가 '선 우'(=손무/孫武, 자호=장킹)가 있었다. 훗날 동서양에 널리 알려진 '손자병법'(孫子兵法. 손자/'선 지'는 높임이름)이란 책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 병법서의 핵심 문구는 다음과 같다.
故曰 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敗
(고왈 지피지기 백전불태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패)
"이를테면, 적군을 알고 아군을 알면 백번 싸움에도 위태롭지 않을 것이요, 적을 모르고 자신만 알면 승패가 반반씩, 적도 자신도 모른다면 매번 지게 된다"는 뜻이다. 흔히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이긴다)으로 간추려 쓰인다.
그런데 지상병법을 배우신 적도 없는 '기묘자', '모사'(전략가/조언자)이신 예수 크리스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는 어떤 임금인들 딴 임금과 전투를 하러 가려면, 우선 앉아서 일만 명으로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한테로 오는 그와 겨룰 수 있을지 어림해 보려고 하지 않겠나?" (�14:31).
'선 우'는 자못 특수한 전법처럼, 예수님은 더 평범한 상식적 차원으로 접근하신다. 그런데 상식적으로도 게임이 안될 싸움을 치르는 신자들이 대다수라 할 수 있다. 오직 극소수만 "이것이 그런가?" 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싸움에 제대로 임한다. 독자는 대다수에 속하는가, 극소수인가?
그럼 과연 우리의 적군은 누굴까?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과 그의 세력들이다. 혈육을 지닌 인간이 우리의 적이 아니다. 조지 W. 부쉬가 겨냥한 눈에 보이지 않는 테러집단도 우리의 진짜 적은 아니다.
헤아림=분별
적을 아는 데는 치밀한 산정과 판단이 필요하다. 주님은 전투에 앞서 분명히 어림해야,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 상식임을 시사하셨다. 어림/헤아림이란, 자신의 영적 지식을 통한 분별을 뜻한다. 실은, '선 우'의 지피지기도 여기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것. 현대전으로 말하자면 '헤아림'은 적진의 동태를 망원경/안테나/레이더/위성 등으로 살펴본 결과에 따라 작전참모회의에서 아군의 현황과의 비교를 통해 승패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는 것이랄 수 있다.
헤아림을 위한 망원경/안테나/레이더는 중요한 전투 준비 무기다. 거듭난 각 신자는 기본적으로 주신 분별력을 성경 말씀을 통해 최대화할 수 있으며, 또한 성령의 뜻에 따라 지정하신 특정 신자에게만 내리시는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 교회의 분별력이 강화된다.
신호나팔=경고
"또 나팔이 또렷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겠습니까?"(코A 14:8).
영적 분별만으로는 전투에 임하기가 어렵다. 영적 분별의 결과에 따라 경고해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임전태세이려면 신호 나팔소리를 또렷이 불어야 한다. 경고나팔/진군나팔을 잘 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대한민국 군부대에선 나팔수가 사라져 버렸지만 영적 군대는 나팔수가 있어야 한다.
너와 내가 맨날, 매 시간, 매 순간 치러야 할 싸움이 바로 이 영전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도 그때그때 기회가 닿는 대로 계속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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