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기도(祈禱)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門)을 닫고
은밀(隱密)한 중(中)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祈禱)하라
은밀(隱密)한 중(中)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장 6-8)
또 기도(祈禱)할 때에 이방인(異邦人)과 같이
중언(重言)부언(復言)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求)하기 전(前)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중언부언 하는 것을 싫어하시고
말을 많이 하는것이나 길게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간단명료하게 그리고 짧게 말씀드리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돌 부처>나 우상에게 기도한다면 그 돌이 알아들을 때까지
중언부언하게 되겠지만 우리가 말하기 전에 알고 계시는 분께
길게 말하고... 크게 말하고... 오래동안 말하고... 같은 말을 계속하고...
거기다가 덧붙여 또 말하고... 하면
하나님께서도 짜증나지 않겠습니까 !
그 동안 우리나라 소위 부흥사라는 사람들이
기도를 많이하고.....
길게 하고 ...
크게 하라고....
엉터리로 가르치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할 것을 기도는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하고 명료하게 하고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쉽게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허락이나 음답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합당하고 적절 때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인격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을 포기하고
무슨말을 하는지 잘 알지도 허구한 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거나 하는
신앙이 어린시절 <방언>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어린시절 학창시절이 그리울 수도 있고
그 때 그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있을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와서 더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폐하지 않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고
주님의 <계명>을 배우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다만 주님과의 대화와 관계와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노우호 목사님 말씀중에서...........
------------------------------------------------------------------
인간은 말하는 존재이다.
이는 다른 어느 동물도 가지지 않고 가질 수 없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당신의 구원을 계시하심으로써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이다.
성경에는 일반언어 이외에 방언에 대한 기록이 여러군데 나온다.
방언의 목적은 무엇이며 왜 인간에게 일반언어 이외에 방언이 필요했던가?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방언이 필요한가,
방언은 언어의 일종이다.
즉 인격적 의사표현이다.
동물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괴성이나 소리를 지름으로써 의사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언어와 다르다.
인간 역시 언어가 아닌 소리를 동시에 낸다.
그 소리를 통해 감정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언어와 다르다.
그러므로 의사표현이나 감정표현을 하느냐의 여부가 곧 언어인가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언어란 인격자들 상호간에 나누어지는 대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인격을 가진 자가 자기 의사를 설명하여 표현할 때 상대방도 언어를 통해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갓난아기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아기의 소리는 미성숙한 언어라 할 수 있다.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소리에 지나지 않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른 동물들의 소리와는 엄연히 다르다.
즉 동물들의 단순한 소리와는 다른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방언이 언어라는 점이다.
즉 단순한 소리가 아니며 의사전달 방법이다.
성경에는 오순절 성령사건이 있었을 때 방언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사도교회 시대에 교회 안에 방언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방언들은 모두가 특별한 언어로써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방언이 있는 목적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방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이다.
즉 은사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있었던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이러한 방언들이 있었던 것은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이전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강하게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것이었다.
이는 사도교회 시대에만 있었던 여러 가지 이적들과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방언의 목적은 개인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서 있었던 은사가 아니다.
비록 개인 성도들이 받은 은사대로 활용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위한 은사였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방언은 단순히 개인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교회의 세움을 위해 주어졌던 것이다.
비단 방언을 말하는 성도들에게 그 은사로 인한 커다란 즐거움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차적으로 개인 성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속한 전체적인 각 성도들과 교회를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우리시대에는 더 이상 방언이 필요한가?
<완성된 계시의 성경말씀>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주어진 후에는
더 이상 방언을 필요한 것인가.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말씀과 성령의 조명으로써
모든 것이 완전히 충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가운데는
방언을 말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어느 순간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고
그것이 주는 기쁨이 엄청 나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방언이 누구를 위해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물론 우리가 더욱 깊이 생각을 해 볼 때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만은 않다.
예를들어 지금도 신구약성경이 완전히 번역되어 있지 않은 지역의 교회들 가운데서
과연 방언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신학적으로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씀을 통해 신앙을 확인하는
교회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 방언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종교들에는 방언이 있다.
그들에게는 방언 뿐만 아니라 방서(方書)도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 있는 방언들은 거의가 교회가 견제해야할 대상이다.
어쩌면 많은 방언들은 이방종교들에서부터 기독교 안으로 들어오는지도 모른다.
즉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된 종교성이 교인들 가운데 불건전한 방언을 말하게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교회가 말씀의 원리에 올바르게 서있지 않고 타락하게 되면
이방종교에서부터 들어온 방언이 기독교의 행세를 하며 교회를 어지럽힐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방언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불편한 것이 있는가?
방언을 통해 특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을 노래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
우리 에게는 방언이 있지 않아도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방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말씀>을 통해 확인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말씀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혹 누가 통역한다고 해도 그것 또한 말씀으로 확인할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온전한 방언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직접 확인 가능한 것들만 <진리>라고 믿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출처:기독교 개혁신보 rpress@rpress.or.kr
은밀(隱密)한 중(中)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祈禱)하라
은밀(隱密)한 중(中)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장 6-8)
또 기도(祈禱)할 때에 이방인(異邦人)과 같이
중언(重言)부언(復言)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求)하기 전(前)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중언부언 하는 것을 싫어하시고
말을 많이 하는것이나 길게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간단명료하게 그리고 짧게 말씀드리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돌 부처>나 우상에게 기도한다면 그 돌이 알아들을 때까지
중언부언하게 되겠지만 우리가 말하기 전에 알고 계시는 분께
길게 말하고... 크게 말하고... 오래동안 말하고... 같은 말을 계속하고...
거기다가 덧붙여 또 말하고... 하면
하나님께서도 짜증나지 않겠습니까 !
그 동안 우리나라 소위 부흥사라는 사람들이
기도를 많이하고.....
길게 하고 ...
크게 하라고....
엉터리로 가르치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할 것을 기도는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하고 명료하게 하고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쉽게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허락이나 음답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합당하고 적절 때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인격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을 포기하고
무슨말을 하는지 잘 알지도 허구한 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거나 하는
신앙이 어린시절 <방언>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어린시절 학창시절이 그리울 수도 있고
그 때 그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있을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와서 더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폐하지 않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고
주님의 <계명>을 배우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다만 주님과의 대화와 관계와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노우호 목사님 말씀중에서...........
------------------------------------------------------------------
인간은 말하는 존재이다.
이는 다른 어느 동물도 가지지 않고 가질 수 없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당신의 구원을 계시하심으로써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이다.
성경에는 일반언어 이외에 방언에 대한 기록이 여러군데 나온다.
방언의 목적은 무엇이며 왜 인간에게 일반언어 이외에 방언이 필요했던가?
그리고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방언이 필요한가,
방언은 언어의 일종이다.
즉 인격적 의사표현이다.
동물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괴성이나 소리를 지름으로써 의사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언어와 다르다.
인간 역시 언어가 아닌 소리를 동시에 낸다.
그 소리를 통해 감정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언어와 다르다.
그러므로 의사표현이나 감정표현을 하느냐의 여부가 곧 언어인가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언어란 인격자들 상호간에 나누어지는 대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인격을 가진 자가 자기 의사를 설명하여 표현할 때 상대방도 언어를 통해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갓난아기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아기의 소리는 미성숙한 언어라 할 수 있다.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소리에 지나지 않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른 동물들의 소리와는 엄연히 다르다.
즉 동물들의 단순한 소리와는 다른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방언이 언어라는 점이다.
즉 단순한 소리가 아니며 의사전달 방법이다.
성경에는 오순절 성령사건이 있었을 때 방언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사도교회 시대에 교회 안에 방언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방언들은 모두가 특별한 언어로써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방언이 있는 목적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방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사이다.
즉 은사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있었던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이러한 방언들이 있었던 것은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이전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강하게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것이었다.
이는 사도교회 시대에만 있었던 여러 가지 이적들과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방언의 목적은 개인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서 있었던 은사가 아니다.
비록 개인 성도들이 받은 은사대로 활용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위한 은사였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방언은 단순히 개인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교회의 세움을 위해 주어졌던 것이다.
비단 방언을 말하는 성도들에게 그 은사로 인한 커다란 즐거움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차적으로 개인 성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속한 전체적인 각 성도들과 교회를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우리시대에는 더 이상 방언이 필요한가?
<완성된 계시의 성경말씀>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주어진 후에는
더 이상 방언을 필요한 것인가.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말씀과 성령의 조명으로써
모든 것이 완전히 충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가운데는
방언을 말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어느 순간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고
그것이 주는 기쁨이 엄청 나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방언이 누구를 위해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물론 우리가 더욱 깊이 생각을 해 볼 때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만은 않다.
예를들어 지금도 신구약성경이 완전히 번역되어 있지 않은 지역의 교회들 가운데서
과연 방언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신학적으로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씀을 통해 신앙을 확인하는
교회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 방언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종교들에는 방언이 있다.
그들에게는 방언 뿐만 아니라 방서(方書)도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 있는 방언들은 거의가 교회가 견제해야할 대상이다.
어쩌면 많은 방언들은 이방종교들에서부터 기독교 안으로 들어오는지도 모른다.
즉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된 종교성이 교인들 가운데 불건전한 방언을 말하게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교회가 말씀의 원리에 올바르게 서있지 않고 타락하게 되면
이방종교에서부터 들어온 방언이 기독교의 행세를 하며 교회를 어지럽힐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방언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불편한 것이 있는가?
방언을 통해 특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을 노래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
우리 에게는 방언이 있지 않아도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방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말씀>을 통해 확인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말씀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혹 누가 통역한다고 해도 그것 또한 말씀으로 확인할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온전한 방언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직접 확인 가능한 것들만 <진리>라고 믿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출처:기독교 개혁신보 rpress@rpress.or.kr
'성경공부 > 성 경 공 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전투의 원리1 (0) | 2007.08.06 |
---|---|
평신도여, 이제 홀로 서십시오 (0) | 2007.08.04 |
은사주의와 방언에 관한 소론 (0) | 2007.07.16 |
개신교의 역사는 천주교의 역사와 다르다. (0) | 2007.06.28 |
'목사 바로 알기' 10계명 (0) | 2007.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