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여, 이제 홀로 서십시오
목회자에게 의존 말고 스스로 말씀 묵상하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3~15)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적 신앙행위에 대해서는 사악함의 본보기로 많이 인용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교인은 선생 된 그들보다 배나 지옥 자식이 된다는 사실은 간과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 잘못된 것을 가르친 자가 죄질이 더 나쁠 것으로 생각하지만, 본문의 말씀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더 사악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근거로 저질 목회가 난무하는 오늘 한국교회의 실상을 생각해볼 때, 잘못된 것을 배워도 깨닫지도 못하는 저와 같은 평범한 교인들의 처지가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집니다.
신앙에 있어서 바른 진리를 깨닫고 가르치며 배우는 문제는 이렇듯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시대의 가르침은 왜 그토록 바리새인과 같으며 모든 성도가 진리를 깨닫는 것에 이토록 무감각한 것일까요?
1. 인본과 신본의 두 세계관
창세기 3장 6~7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잘못된 행위의 결과를 기대와 다르게 긍정적 결과가 일어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누가복음에도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 24:31)
이 두 구절에서 눈이 밝아진 것을 단순히 물리적 시력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보는 안목(세계관)이 바뀌었다는 의미, 다시 말하면 왕권 또는 다스림의 권위가 어떻게 전향되었는가의 의미로 보아야만 이러한 표현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에덴동산(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때 왕 되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현상을 생각하지만 금단의 열매를 먹은 이후에는 하나님 없이도 세상을 이해하는, 아니 더 나아가 이제는 하나님을 거침이 되는 존재로 여깁니다. 이것을 성경은 “눈이 밝아”라고 표현합니다.
에덴동산이라는 객관적으로 동일한 실체와 현상을 이해하고 접근할 때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먹기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자신의 이성만을 의지함으로 동산의 주인과 같은 느낌을 경험합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원리로 십자가 사건을 실패한 사건으로 오해하던 제자들이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도우심을 힘입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 사랑의 클라이맥스로 바르게 이해하게 되는 것을 역시 성경은 ‘밝아진’ 거라고 누가복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자들로 대변되는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만 그분의 다스림 속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밝아져’라는 수동적 표현이 나타나며 관점이 전향되었다는 것은 두 사건이 같은 이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약해보면 인간의 정신 현상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형성되는 그분 중심의 세계관과 자기의 소견에 좋은 데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 중심(인격적인 존재의 하나님이 없다)의 세계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계적 속성과 결합하여 삶의 질(본질적 의미에서 선악을 결정하는 삶)을 결정하는 가치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함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관념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성도라면 누구나가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가치관을 동시에 향유한다는 것과 성도에게 이루어진 이러한 필연적 실제로 인한 두 가지 기준이 삶에 있어서 혼란스러운 가치 판단의 원인이 되어 잘못된 가르침과 배움을 촉발한다고 생각합니다.
2. 회색지대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
성경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을 죽은 자로 말합니다. 거듭 확인하지만 그들의 세계관은 인본의 사상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은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성도를 쓴물과 단물을 내는 존재로 말합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1)
쓴물만을 내는 비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성도는 쓴물과 단물을 동시에 내는 이상한 존재라고 언급하며 그것이 합당하지 않음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이러한 교훈은 성도가 예수 믿기 전의 인본의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엠마오 제자들과 같이, 믿음 후에 오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라가면서 형성되는 왕 되신 그분 중심의 가치를 동시에 지향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공유하는 인본과 신본의 가치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회색지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성도에게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하게 합니다.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가 하는 문제로 그 내면이 몹시 갈등하게 되고, 더불어 이러한 모호함에서 하루 빨리 안정되기를 갈급해 합니다. 그래서 아직 말씀으로 구축된 가치판단에 의하여 신앙적 결단을 할 수 없는 연약한 성도라면, 앞서 믿은 인도자나 목회자의 모습을 보면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가치관은 짧은 시간에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 사도가 인본과 신본의 가치를 공유한 자신의 모순을 보고 통탄한 것처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나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1~25)
자신을 감싸던 인본의 가치가 상실되면서 그에 따른 정체감이 사라지는 아픔을 감내한 후에야 비로소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와 같은 성숙한 성도됨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러한 경험은 마치 육신에 있어서 성장통과 같은 것으로 모든 성도가 이러한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데 바르고 성숙한 목회적 가르침을 받는다면 혼란과 아픔의 정도가 가벼워질 것입니다.
3. 외적 변화에 집착하는 목회 사역
기술한 바와 같이 성도는 인본과 신본의 두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는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막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성도는 하나님과의 더욱 깊은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본능적 속성을 따라 그 속에서 일어나는 말씀에 대한 갈망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라 사는 것이 어떠한가에 대하여 성령의 인도하시는 데로 감각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분의 공급하시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에 대하여 가치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자기 소견에 좋은 데로의 삶 즉 인본의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삶 속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려하면서 성도는 자신이 왕 된 삶에서 누렸던 권력과 소유함의 교만을 내려놓아야 하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에서 오는 가치의 다름으로 인하여 연약한 성도는 가치 혼란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신본의 가치가 정립되기까지 기나긴 시간을 잘 인내할 수 있도록 성도는 마땅히 성숙한 목회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르는 삶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이전의 세속적 가치를 이해하고 분별하면서, 성숙한 모습의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양육은 바리새적인 목회자의 입장에서 가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도를 섬김에 있어서도 바울의 고백과 같은 해산의 수고를 하기보다는 성화 과정에서 인본으로 신본처럼 표현되는 '변화'라는 개념을 강조해 손쉽게 교인들의 종교심을 자극함으로 사역의 성취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의 삶을 걸어가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초신자가 진리의 본질을 깨달아가는 것, 다시 말해서 그 내면의 질서가 인본(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의 가치가 무너지고 신본(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의 가치로 그 질서가 서서히 형성되는 과정을 ‘성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의 성장은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인본의 속성이 신본의 속성으로 변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성도의 내면에 이스마엘(인본)적 속성이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장성한 이삭(신본)으로 단번에 변화된 것 같은 착각을 준다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이스마엘을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이삭이 장성하기까지는 이스마엘에게 희롱을 당하며, 장성한 후에라야 이스마엘을 쫓아낼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내면의 모순을 보면서 통탄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 모든 성도에게서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심리적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가르침은 아직 어린 이삭을 양육하지 않고, 이스마엘이 이삭처럼 변화되기를 종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의 도덕적 성향과 종교심을 자극하여 마치 이삭인양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본질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이러한 변화를 요구 받거나 신앙적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성도라면, 인본의 배움으로 안 교양적인 도덕이나 윤리를 따르는 것으로 이러한 요구에 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분별없는 목회로부터 칭찬 받는 이러한 신앙의 외적 형식은 성숙한 성도의 모습과 차이 없어 보이지만, 그 내면은 비극으로 달려갑니다.
인본의 것으로 신앙을 드러내는 종교적 성향의 성도는 그 내면에 진리가 주는 참다운 자유함이 없으며,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내면세계는 점점 황폐해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인본의 원리는 ‘give and take’(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즉, 주는 만큼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질이 끊임없이 신본의 수준인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를 종용받는다면 더는 퍼낼 것이 없게 되고 지친 성도의 정신은 결국은 고갈되고 황폐해지게 됩니다. 또 고갈의 깊이만큼 증폭되는 받고자(take) 하는 갈증은 교인에게 가시적 성과에 더욱 집착하게 하며 다른 성도와의 차별성을 교묘히 나타내면서 결국은 자기 영광을 구하므로 고갈된 심령을 채우려 합니다.
이를테면 구복적 신앙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직면한 문제를 가지고 문제 해결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성도가 있다고 할 때, 그 교인이 소원했던 것과 같은 기도 응답이 지체되거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목사의 경우 그 교인에 대하여 기도의 동기 등과 같은 여러 측면을 말씀을 따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원인을 기도자의 정성과 열심이 부족한 것으로 해석하고 그에게 더욱 열심을 내게 합니다. 그래서 그 교인은 실제로 더욱더 열심을 내어 시간과 헌금 등 종교행위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인이 인도되는 것은 기도의 결과가 실제로 이루어지든 아니든 간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만일 기도자의 의도대로 그 결과가 이루어 졌다면, 그 응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교인의 개별적 주관적 체험으로 이해하면서 성경을 통하여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함에도 가시적인 신앙 결과에 목마른 외식적 목회자는 이러한 경험을 일반적인 신앙 현상으로 간주하면서 모든 교인들에게 자신의 문제들에 대하여 경험자와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게 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응답이 없는 교인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거나 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말씀이 서야 할 자리를 개별적 신앙체험이 중요한 신앙요소로 자리하게 되며, 말씀을 통하여 들어나는 하나님의 다스림은 가치 없어 보이게 되어 가르침과 배움에서 가벼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 풍토는 자연스럽게 자기 열심이 중요하게 되고 이러한 잘못된 길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성도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자기 영광을 구하고 얻기 위하여 더 열심히 종교행위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러한 외식적인 성도를 향하여 찬사와 더불어 하나님나라의 상급의 교리를 더하게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경쟁과 독선에 사로잡힌 비극적인 종교행위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본질을 경험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목회자는 성도의 외적 모습에 집착하며, 변화된 성도됨의 척도로 가시적인 신앙 기준을 구하게 됩니다. 교회 출석률은 어떠한가, 누가 몇 명을 전도했느냐, 헌금은 얼마나 어떤 명목으로 하느냐, 얼마나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는가의 외적인 것들로 신앙의 잣대로 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러한 도표의 결과로 목회 성과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기준은 교인들을 독려하고 관리하기에 좋습니다. 각종 통계와 자료를 기준으로 신앙을 비교하는 이러한 풍토는 비록 성숙한 성도라 할지라도 그래프에 그려진 결과가 없는 경우에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으로 여겨져 교회 안에서 영향력과 활동반경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항변이라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불순종하는 성도로 매도됩니다. 즉 그들은 바리새적인 권위를 지향하고 이것을 지키기 위하여 규격화된 틀을 제시하며 교인들이 이러한 틀 속에 순응하기를 바랄 뿐, 자유하게 하시는 진리를 깨닫고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성도의 성장은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숙함이란 그가 권위를 내려놓는 것과 관련되며, 이를 위해서는 인본의 자아가 죽어야 하는데 그들은 이러한 사망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본의 사망은 본질적 의미에서 그가 하나님처럼 왕과 주권자가 되어 누리면서 느꼈던 권위와 권력 그리고 소유함이라는 교만을 내려놓는 견디기 힘든 아픔을 감당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4. 성숙함은 인내가 필요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본능으로 그 마음에 말씀을 사모하는 소원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자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는 이러한 소원을 따라 약속하신 나라와 왕 되신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해가는 성장이라는 힘들고 수고로운 길을 가야합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목회자에게 의존하는 편리함을 버리고 스스로 말씀을 묵상합시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히 5:8~9)
아들이시면서도 종의 형상을 입어 겸손을 배우시고 모범을 보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르는 멀고 험한 길을 나서야 합니다. 지치고 낙망할지라도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품을 생각하면서 다시 일어서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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