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교회당과 성경적 교회당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깨달아야 교회가 산다(3)…교회의 적은 교회
지나고 보면 우연이란 없었던 것 같다. 기차의 한 칸, 한 칸이 이어진 것 같이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철거민촌에서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운명의 전환점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회적 기득권 포기하고 낮은 자리로
지금도 가장 힘든 것은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상식과 합리, 사회적인 의식을 중요시한 인생관이었는데 신비한 종교적인 체험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를 시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사도 바울과 같이 이방인들에게, 정치 사회 리더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때로는 힘들 때마다 모세를 생각한다.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나의 모습에 비춰본다면 모세의 처절한 자기 포기의 결단과 믿음은 큰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물론 모세의 의지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강권적인 섭리와 계획이 있었지만 인간 모세의 갈등과 고민을 조금은 이해가 간다. 필자도 한 인간으로서는 쉽지 않는 결단을 내린 경우도 있다.
예를 들자면 집권당의 당 대표가 나의 진로 문제에 대해서 비서실장에게 직접 지시를 했을 정도다. 그런데 그 때 나는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것도 지하 교회였다. 이러한 세상적인 특별한 기회를 한두 번 포기한 것이 아니다. 언급하기가 조심스러울 정도의 사건도 많았다. 아니 포기보다는 주님의 뜻과 강권적인 역사에 엎드러지고, 굴복 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설픈 명예, 대형 교회, 호의호식하고 성공했다는 일부 목회자들이나 성공학을 말한 사역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이 진정한 성공인가? 나는 이렇게 명쾌하게 생각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다 이루는 것. 그런데 세상적인 기준으로 성공을 했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 한때 청와대나 대통령과 고위층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사기를 쳤던 경우와 비슷한 현상이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헌금이나 축복을 강조하는 목회자나 일반일 것이다.
그러한 성공 논리에 반박하자면, ‘나는 그러한 목사들을 만난 것이 사회적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이라고 그들이 답변을 하겠는가. 차라리 내가 사회에서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 정치 사회 리더 그룹들, 사회 경영자 그룹들의 자질이나 인격이 그러한 목사들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탁월하다는 말을 덧붙인다면 기분이 어떠할지 궁금하다. 이러한 글을 써야 하는 자신, 이렇게 불합리한 교회공동체에 함께 있다는 것 자체도 서글프다.
그렇다면 나같이 세상의 권력과 사회적 주류 세계를 포기하고 가난한 자, 기존 교회에서 상처 받고 방황하는 자들, 미안한 표현이지만, 속된 말로 영양가 없지만 주님이 사랑하신 빈 그릇 인생들과 교제하는 사역자는 실패자란 말인가.
수십 년 동안 왜곡된 교회 문화 속에서 왜곡된 복음으로 대형 교회를 구축한 그들, 신도시 몫 좋은 장소에서 많은 교인들을 끌어 모은 그들을 과연 성공이라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더 가관인 것은 그들이 오히려 성경적인 소규모 출석 교회 목회자나 성도들을 실패한 그룹으로 은연중에 설교하는 것을 보면 가증스러울 정도이다.
소규모 교회가 다 정당한 것은 아니다. 잘못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면 늦은 나이에 소명을 받고 개척한 목회자는 성도수의 한계가 있다. 그리고 성도 수에 연연해하지 않고 참된 복음과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것이 목회 성공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는 분도 있을 수 있다. 성도들도 대형 교회보다는 개척 교회나 미자립 교회에서 주님의 사역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데 동참하고자 하는 차원 높은 믿음의 소유자들도 있다.
이들에게 대형 교회 목사가 설교나 책을 통해서, ‘소형 교회는 실패한 교회’라고 은연중에 자기 교만을 드러낸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그렇게 말한 목회자는 인격 파탄자일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보지 않고 무조건 소규모 교회를 무시하는 것은 성도들도 잘못된 생각일 것이다. 오히려 인터넷의 성도들의 의견과 성경의 원칙을 들이대자면 현재의 대형 교회는 인간의 욕심으로 탑을 쌓은 ‘바벨탑 교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기로 하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니라.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이 성경구절은 당시 곤경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설명한 사도 바울의 언급이다. 오늘날 이 성경구절이 적힌 헌금 봉투가 과연 이러한 일에 쓰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주님 안에서 진정한 성공이란
그들이 말한 자칭이든 타칭이든 성공한 목사들보다 더 영향력 있는 사회공동체를 멀리한 나는 그들보다 못한 인생이란 말인가. 막말로 단물 빨고 내몰은 성도, 해먹을 것 빼먹을 것 다 빼먹고 버린 영혼들, 교회에서 상처 받고 주님을 떠난 방황하는 성도들, 나를 만나서 뒤늦게야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치유·회복·복음을 깨달은 그 영혼들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내가 만난 그들은 대부분이 소위 말한 대형 교회 출신 교인들이었다.
물론 대형 교회라는 개인의 익명성이 보장된 환경에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환경의 위기에 닥쳐서 넘어진, 자충수를 둔 성도들도 개인 책임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화려함 뒤의 어두운 단면을 들춰보면 성공이 뭔지 가슴에 손을 얻고 생각해볼 문제다.
이들을 이용하여 목회 성공이라는 미명하에 홍보와 자신들의 사업적 이득을 노리고 부추기는 일부 교회 신문이나 출판업자들도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는 아닌지 의문이 든다. 그렇게 보자면 현재 한국교회의 위기는 총체적인 근본적으로 썩은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다. 총체적인 부실이기도 하다. 결국 피해는 전체 기독교인들이며 결과적으로 이 사업자들은 불황이나 도산에 이르게 되는 자업자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책도 눈앞에 이익 때문에 허황된 잘 팔리는 책을 만들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책을 만들면 생명력이 있고 주님이 도우실 것이다.
거짓 선지자, 은사 자들에게 당할 만큼 당한 영혼들이 주위에 널려있다. 기존 교회에서 망가뜨려 놓은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하는데 드는 영적, 정신적 에너지 소진이 기존 교회 성도들 수백 명 관리보다 힘들 때도 있었다. 사회적으로 그 에너지를 투자하자면 화려하게 성공했을 것이다. 실상이 이런데 무슨 성공 타령인가. 목사들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주님의 뜻과 주님의 사역의 실패일 수도 있다.
가장 황당한 말은 이 점이었다. 정치 사회 리더십을 보는 대다수 교회 목회자들의 관점은 한 마디로 옛날에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보는 어설픈 논리와 다를 바 없음을 늘 발견한다. 때로는 교회 정치 1번지라는 종로광장에서 매일 토론회라도 개최하고 싶은 심정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경험에 의하면 교회의 적이 교회였다. 목회의 적이 목사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개척교회 당시 이야기다. 성도 중에 신학교를 추천해서 보내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신학생이 교단 내에 교회에 전도 훈련을 나갔는데, 그 교회 목사가 나중에 교육전도사로 쓸 수도 있다며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자기 교회로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쾌히 보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자 다시 되돌아왔다. 가보니 말이 다르고 자기에게 밀걸레 들고 청소만 시키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같이 괜찮은(?) 분이 없다”고 했다. 가슴이 아팠다. (4부 계속)
황준배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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