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회 총회 보고서 pp. 411 ~ 431
빈야드 운동에 대한 우리의 입장 (신학적, 성경적, 실천신학적측면에서 조사)
1. 序論(빈야드 운동 문제 제기)
2. 빈야드 운동이란 무엇인가?
3. 빈야드 운동과 John Wimber. ·존 윔버는 어떤 人物인가?
4. 빈야드 운동의 현상 1) 토론토 부레싱 사건 2) 빈야드의 영적 체험 현상 3) 빈야드 예배 현상
5. 빈야드 운동의 韓國敎會에 소개된 배경
6. 신학적인 면에서 빈야드 운동의 문제점 l)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의 배경과 신학기초 2) 성경해석의 문제 3) 성령論의 문제
7. 빈야드 예배의 문제점 1) 社會文化的 관점 2) 예배신학
8. 빈야드 운동이 왜 관심이 되고 있는가? 1) 목회 탈출구 2) 교회성장 모델 3) 예배 文化 4) 성령체험
9. 결론
序 論
韓國敎會와 우리 교단은 선교 2C에 접어들면서 그 동안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바탕하여 부흥 성장하는 活力이 넘치던 급성장의 熱氣가 식어지고 성장이 둔화되고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牧會일선에 선 救會者들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전도 운동이 活性化되고 지속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 하고 效果的인 牧會方法을 찾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內)교회 내에서 일어나 세계로 퍼져가는 “제3의 물결”이란 이름으로 시도되는 은사 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보는 빈야드 운동에 韓國敎會와 牧會者들은 새로운 救會갱신의 대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운동은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적, 신유, 귀신축출, 죽은 자를 살리는 일 등 초자연적인 것과 초대교회에 번성했던 방언, 예언, 통역 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계속 된다고 믿는 것이다.
빈야드 운동에 참석하고 매료된 牧會者들은 이미 빈야드 교회의 목회방식을 능력의 목회로 적용하고 있고 교회의 예배를 빈야드 예배로 바꾼 이도 있다. 갑작스런 예배 갱신의 충격과 혼란으로 기존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상당수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그것을 모방하기를 원하고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목회와 신학 1995. 6월호)
그 동안 우리 교단은 성경계시 중심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바탕에서 성장 발전하면서 복음을 앞세운 비복음적인 운동의 오염을 방지해 왔다. 이장림의 시한부 종말론, 김기동의 귀신론, 예태해씨의 넘어짐, 류광수의 다락방 운동 등을 하나씩 검증 정리했다.
이제 한국 교회에 제3의 물결로 파도쳐 오는 빈야드 운동을 아무런 검증없이 성급하게 능력의 목회 대안으로 앞서 신학부에서는 성경적인 면과 신학적 실천신학 입장에서 그 실상을 밝혀 보고자 한다.
本 論
1. 빈야드 운동이란 무엇인가?
빈야드 운동은 우리 말로 옮기면 “포도원을 세우는 운동”이다. 빈야드 운동이라고 하면 어떤 이들은 세계 빈야드 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애너하임 빈야드 교회 집회나 세미나 시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격식 없는 프로그램化 되지 않은 단순한 예배 절차, 찬양과 치유사역, 넘어짐, 방언, 전율, 중보기도, 예언사역 등을 연상하기도 하고 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포트 빈야드 교회 예배와 세미나 시간에 일어나고 있는 거룩한 웃음들, 넘어짐, 기이한 짐승 소리(사자, 개, 닭)등을 연상하기도 하고 또는 John Wimber가 제창한 능력전도, 능력치유, 능력牧會, 교회성장 등을 연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빈야드 운동의 특징적 여러 단면을 보여준 것으로 빈야드 운동 전체를 말한다고 하기는 힘들다.
훌러 신학교 선교 대학원 교회성장학 Peter Wagner교수는 20C에 들어와서 기독교 안에 세 가지 성령운동 물결이 일어났다고 보고 제1의 물결은 19C말에서 20C초엽에 일어났던 五句節운동이요, 제2의 물결은 1960년대에 개신교 여러 교파로부터 일어나서 천주교에까지 미쳐진 은사 운동이요, 제3의 물결은(미래 학자 칼빈 토플러에 의해 창안되었다. 훌러 신학교의 P.W교수가 물결 은사운동에 적용하면서 기독교계에서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John Wimber에 의하여 발생한 빈야드 운동이라고 하였다.
윔버牧師는 “능력전도”, “8장 성령의 역사, 새로운 물결”에서 ‘나는 와그너 박사가 “제 3의 물결”이라고 지칭한 것이 하나의 새로운 물결이라기보다는 은사 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운동은 오순절운동과 은사 운동처럼 예수님과 초대 교회에 있었던 강한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즉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에 오셨던 성령의 오심과 역사들 이적, 병 고침, 귀신축출, 죽은 자를 살림 등의 초자연적인 이적들과 초대교회 선자들에게 나타났던 방언, 예언, 통역 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고 있다.
이 운동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기대와 찬양 그리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사역방식을 다시 활용한다. 빈야드 운동은 근본적으로 성령운동과 성령운동에 의한 복음 전파와 교회성장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1) 사도행전적인 성령 역사의 표적과 기사를 동반한 복음전도
2) 교회의 숫적성장의 方法論을 추구함이요
3)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예배 행사를 통하여 기사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능력전도와 빈야드 찬양이며 증거이다. 기존의 복음전도는 단순히 설교를 통하여 영적인 각성에 호소하였으며 分明한 회개와 告白과 함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빈야드 복음전도는 설교에 의존보다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간증과 기적의 행사를 전시함으로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기사화 하려는 방법을 쓴다.
Wimber는 지금까지 전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도록 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이제는 표적과 기사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는 능력전도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성장해 가는 방법이라고 했다.
빈야드 운동이란 Peter Wagner 교수는 20C에 기독교 안에 일어난 세 가지 성령운 동 물결 즉 오순절 운동을 제1물결, 은사 운동을 제2물결, 그리 고 빈야드 운동을 제3물결이라고 규정했다.
존 윔버는 Wagner 박사가 제3의 물결이라고 규정한 것이 하나의 물결이라기보다는 은사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빈야드 운동을 정리하면 존 윔버를 中心으로 국제 빈야드 교회(협의회)에 소속된 교회와 牧師들이 주창하는 표적과 기사를 통한 사역을 행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운동이라고 보아진다.
Peter Wagner 교수는 Wimber 牧師를 통한 치유 은사를 체험한 后 빈야드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확산시키는 일 뿐만 아니라 또한 빈야드 운동의 신학적 세우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제1의 물결인 오순절 운동은 교단을 형성하였지만 제2의 물결인 은사 운동은 1970-1980년대에 오순절 운동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신 오순절 운동”(New Pentecostalism) 이 라고 불려지기도 하는데 이 운동은 교단을 형성 하지는 않았지만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는 물론 심지어 카톨릭 교회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제 제3의 물결 은사 갱신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나타난 표적과 기사를 통한 사역으로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빈야드 운동은 현재 약 2000명의 한인 牧師들이 미국 애너하임 빈야드 교회나 캐나다 토론토 에어포트 교회의 집회나 세미나에 참석하였으며 그리고 약 2000명의 牧師 및 평신도가 빈야드 운동 세미나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牧師와 평신도가 참석 하게 될는지 그리고 이 운동이 새로운 교단으로까지 발전하게 될는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2. John Wimber
빈야드 운동은 국제 빈야드 교회협의회에서 주창하는 표적과 기사를 통한 사역 운동이라고 했는데 John Wimber는 은사 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라고 했다. 모든 빈야드 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애너하임 빈야드 교회 창설자이며 국제 빈야드 교회 협의회(빈야드 교회 교단 총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존 윔버 牧師를 제쳐두고는 빈야드 운동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배경을 알 수 없다.
1) 존 윔버는 어떤 人物인가?
1934년 불신자의 가정에서 출생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청소년 시절 재혼한 어머니와 의붓 아버지 슬하에서 보냈다.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을 좋아하므로 음악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1954년 졸업 후 1960년대 인기를 끌었던 록 음악 그룹인 Righteous Brothers 보컬 그룹을 만들어 라스베가스의 쇼에도 관여하였다. 1962년말 아내와 이혼 직전에 아내와 함께 뜻하지 않은 계기를 통하여 퀘어커 교도들이 인도하던 성경 공부에 참여하여 공부하면서 뜻밖의 개인적인 회심, 체험을 통하여 부부가 함께 기독교 신앙에 열렬하게 헌신하게 되었다. 회심 후 음악계를 떠났고 그 동안 모은 재산을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공장에서 일하면서 성경 공부와 개인전도 사역에 헌신됐다.
l970년에 퀘이커교단 소속인 요르바 린다 포랜드(형제 교단)교회에서 收師안 수 받은 후 1970년에서 l973년 사이에 아주사 퍼시픽 성경 대학에 편입하여 신학공부 를 하였다. 1974년 풀러 신학 대학원에 가서 선약학교수 G. E. Ladd의 하나님의 나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선교 대학원에서 풀러 복음전도 및 교회성장 연구 소 설립에 관계하게 되었고 이 연구소의 분과 책임자 및 (1982) 교회성장학 조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교회성장학에 깊이 관여하면서 교회성장학 교수들인 Peter Wagner, Donald A. Mc Gavvran, Charles Kraft, Russel Spltter의 강의와 그들의 제3세계 선교보고 등을 통해서 지금 이 時代에도 예수님과 사도 시대에 있었던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들이 동반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영국의 五句節 王義 신학자 Donald Gee의 저서 “Concerning Spiritual Gifts” ( 영 적 은사에 관하여 ) 와 Marton Kclscy의 “Healing and christianity ( 치유와 기독교)를 통해 오늘날도 성경적인 치유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복음서 연구를 통해 이들의 가르침을 옳다고 믿고 개인적으로 표적과 기사와 치유 등이 동반하는 복음 전파 능력전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7년 요르바 린다 갈보리 채플을 설립하였고 치유와 은사 운동으로 급격한 교인 수 증가를 체험했다.
그 후 1982년 Peter Wagner의 주선으로 풀러 신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표적과 기사와 교회성장”을 강의하면서 제3의 물결 운동을 주도했다. 그 동안 풀러에서 배우고 깨닫고 체험한 바를 牧會에 직접 접목시키는 일을 시작하였다. 1983년 갈보리 교단에서 탈퇴 Kenn Gullikson의 예수운동에 소속되어 있던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빈야드 교회 펠로섬에 加入하였다. 빈야드 교회는 John Wimbr 牧師의 탁월한 지도력과 그가 제창한 빈야드 운동 하나님 나라 운동을 오늘 우리 시대에 재현하자는 운동에 의해 13년이 지난 1996년 현재 약 550개의 소속 교회로 윔버가 개척한 애너하임 빈야드 교회는 현재 약 6000명이 회집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2. 빈야드 운동의 현상
1) 토론토 블레싱사건
빈야드 운동은 토론토 블레싱이란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1994년 1월 26일 캐나다 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한 자그마한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교회(빈 야드 교회에서 일이) 아르노토 收師는 빈야드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랜디 플라크 救師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갖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회에서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에 압도되어 넘어지기도 하고 거룩한 웃음을 웃으며 방언의 역사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쓰러지는 일과 웃는 현상, 짐승 소리와 같은 괴성을 지르는 현상이다. 빈야드 운동이 크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 바로 이 토론토 블레싱 이었으며 거기에 나타난 표적과 기사는 바로 넘어짐과 거룩한 웃음이란 은사의 형태로 보는 것이다. 토론토 블레싱의 사건은 빈야드 운동의 또 하나의 영적 사건으로 간주되었고 오순절 운동과 신유 은사 운동에 관심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적 물결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2) 빈야드의 영적 체험 현상
빈야드 주의자들은 개혁 주의자들이 성령의 일반 은사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특이한 현상 또는 육체적인 체험 신앙을 필수 요건으로 간주한다.
성령의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육체적인 체험 현상은 다음과 같다.
① 몸의 진동과 떨림이다.
몸의 떨림에는 신체의 일부나 전체에 나타날 수 있고 땀을 흘리거나 숨을 깊이 쉬거나 맥박이 빨라지는 현상이 수반될 수 있다고 한다. 이 떨림에는 평온한 진동과 격렬한 진동이 있는데 평온한 진동은 “영적 갱신이나 목회 사역을 위해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시는 일”과 관련이 있고 격렬한 진동은 “성령께서 악령과 대치하는 경우 또는 어떠한 심각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죄나 마음의 상처’ 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치유능력 355p)
② 고꾸라지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성직자들에게 나타나기도 하고 규칙적으로 머리를 땅에 짓찧기도 하는데 이를 체험하면 새로운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고 Wimber는 주장한다.(능력치유 366p)
③ 술 취한 듯한 행동이다.
이 현상은 하나님의 은총을 새로이 깨닫는 것이다.
④ 몸부림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에는 뛰어 오르내리거나 손발을 움츠리면서 개발처럼 만들거나 얼굴을 찌푸리거나 몸이 경직되는 여러 형태가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주로 성적인 범죄로 인한 內的인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에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⑤ 웃거나 흐느껴 우는 현상이 있다.
갑자기 껄껄대거나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여 몇 시간동안 때로는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는데 이러한 경우는 정서적인 치유가 필요하거나 새롭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 한데서 오는 반응(흐느낌) 또는 그분의 은총을 체험한 데서 오는 반응(웃음) 일수도 있다고 한다.(능력치유 362p)
⑥ 장시간 걸쳐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행위가 있다.
이런 경우 “방언의 은사를 받는 일과 관련되어 있으며 성령의 능력을 새로이 부여받았다는 징표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했다.(363p)
3) 빈야드 예배 현상
빈야드 세미나와 예배에는 먼저 기타, 하모니카, 키보드 등 악기로 젊은 사역자들이 맨발에 반바지를 입고 껌을 씹으며 악기를 다룬다. 빈야드에서는 빈야드 찬양을 해야 한다. 한얼山에서는 한얼山에 맞는 찬양을 오산리에서는 오산리 성격에 맞는 찬양을 해야 성령을 받고 빈야드 집회에서는 빈야드의 찬양을 해야 은혜를 받는다(Paul Mim 牧師)고 한다. 빈야드 집회에서는 빈야드 찬양을 해야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치유가 가능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다고 한다.
세미나 강사가 자신이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려고 했는데 문에 들어오는 순간 성령께서 “겸손”을 강의 하라고 해서 겸손이란 제목으로 즉흥적으로 했다.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때의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하면 된다는 것이다. 평범한 여신도가 거룩한 권세 성령의 권세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더라는 것이다. 그 소리를 거룩한 권세(성령의 권세)라고 믿게 되었고 감사했다고 했다. 사역 시간, 능력 받는 시간에 몇몇이(목사, 기도원장) 개처럼 쭈그리거나 누어서 개처럼 꽁꽁거리며 개의 흉내 그 모습이 개의 모습이었다. 어떤 남자는 권투 선수가 혹을 맞아 앞으로 꼬꾸라지는 몸짓으로 훅 하고 몇 마디 이야기하고 또 고꾸라지고 훅훅하면서 반복된 짓을 하자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P牧師도 멀쩡하다가 강단에 올라와 이야기만 하려하면 먼저 훅훅 하고 고꾸라지는 짓을 했다.
빈야드 예배에서는 기도가 없다. 대중 기도 및 목사의 축도도 없다. 죄의 告白과 사도신경의 告白도 없다. 오직 빈야드 찬양, 광고, 헌금, 설교 그리고 사역이다. 빈야드 교회 예배는 형식과 의식을 초월한 무형식의 형식이다. 가존 교회의 예배는 인도자가 담임목사로 정해져 있고 정장을 하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드린다. 그런데 빈야드 예배는 인도자와 예배하는 회중의 복장이 자유롭다. 예배의 시작은 있지만 끝이 分明치 않다. 형식이 전혀 없는 것 같지만 그들 나름의 형식이 있다.
예배 인도자가 사회하는데 중앙 무대에서 기타, 키보드를 연주하며 찬양 팀과 함께 빈야드 찬양을 리드하는 음악 전문 사역자이다. 준비된 악단 형식의 밴드에 의해 모두 일어나 무용을 곁들인 찬양을 약 1시간 부르는데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찬양이라고 한다. 이 찬양은 가스펠 송의 형태거나 그들이 만든 빈야드 찬송이다. 찬양을 부르는 동안 회중은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고 양손을 펴 들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고조되면 리더가 간절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이들 몸을 떠는 이들 이러한 자유스러운 행위 가운데서 성령의 내재하심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무질서가 지나간 후에 광고하고 헌금하고 간증하고 간증이 끝나면 항상 기도하여 쓰러지게 한다.
그 다음 설교가 진행되는데 집회 설교는 목사가 할 때도 있으나 세미나 중에는 평신도가 주도했다. 설교는 20-30분 정도로 짧다. 설교가 끝나면 빈야드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능력의 사역이 시작된다. 사역이란 은사를 체험하는 능력 받는 시간이다. 기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앞 무대로 나와서 전문사역 자들을 함께 동반하고 사역자들은 인도하게 한다. 이 사역자들은 평소 훈련된 빈야드 운동의 능력을 행사하는 평신도 기도자들인 이들에 의해 성령의 역사와 여러 가지 은사적 현상들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순서는 빈야드 예배의 절정을 이루는 시간이다. 병자들과 안수기도 받고자 하는 자 능력 받기를 원하는 자는 한 손은 머리 위에 한 손은 손을 잡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능력(표적과 기사)이 나타나기를 위한 기도이다. 이때 설교한 목사는 권능의 손으로 손을 흔들거나 치유의 은사를 경험하러 나온 자 앞에서 손으로 밀며 뒤로 넘어지며 쓰러뜨린다. 넘어질 때까지 계속한다. 안 넘어지면 “믿음 없다. 나무막대기 같다.”고 한다. 계속해서 넘어지도록 주문을 외듯 기도하고 안 넘어지면 손으로 이마를 밀고 귓부분을 누른다.
가슴에 손을 대고 밀기도 하고 최종 방법으로 두발로 양쪽 발가락을 밟기도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거의 모두가 넘어지게 된다. 바르르 떠는 사람들은 방언을 하며 거룩한 웃음을 터뜨린다. 어떤 사람은 전기에 감전된 듯 사지를 떨고 종아리를 비비며 팔딱팔딱 뛰게 되는데 사역자가 이상 야릇하게 웃으며 충만, 충만을 반복하자 높이 더 빨리 뛰게 되었다.
빈야드 운동의 주일예배는 이런 행위의 반복으로 진행되며 빈야드 예배는 찬양과 경배라는 예배에다 표적과 기사의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의 행위를 혼합해 놓은 거룩한 무질서의 형식과 의식을 초월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3. 빈야드 운동이 한국 교회에 소개된 배경
빈야드 운동이 처음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80년 후반 온누리교회 하용조 牧師의 동생 하스데반이 온누리교회 찬양곡 70여곡을 빈야드 교회 존 윔버에게서 얻어와서 경배와 찬양팀을 결성하여 목요일 저녁이변 서울시에 청소년들을 불러 모아 온누리에 찬양이라는 것을 부르게 한 것이 그 시발이었다. 본격적인 종교 형태로는 1988년 “능력 전도”와 1991년 “능력치유”라는 존 윔버의 책자를 이재범 牧師에 의해 번역함으로써 처음 소개된 듯 하나 그 본질적인 것은 거의 같은 무렵 예태해 목사(79총회에서 불건전한 신비주의 내지 이단성의 혐의가 있으므로 강단 교류를 금하고 일체 교제를 금하기로 결정함)가 기독교 장로회 소속의 서울 남성교회 조원길 목사와 백봉산기도원을 중심으로 성도 쓰러뜨려 넘어지는 것을 성령이 권능으로 임할 때 나타나는 현상 즉 “성령의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전개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Francis Scott MacNutt의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라는 책을 예태해 목사의 형인 한신 대학원장 예영수 씨가 번역하였는데 “성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며 그렇게 되면 사자처럼 부르짖거나 개처럼 짖거나 자제할 수 없이 웃는 것 같은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이므로 그대로 수용하라는 것으로 이를 지지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이 책의 저자인 Francis Scott MacNutt는 牧師가 아닌 미국 천주교 도미니칸 司祭이며 미국 천주교 은사 운동에 이 같은 기현상을 도입 한 장본인 인 것이다. 빈야드 운동이 韓國敎會에 공식 논란으로 등장한 것은 牧會와 신학이 1993년 4월호에 ”제3의 물결“이란 제목으로 논평 없이 소개한 것을 계기로 1995년 6월 호에 “능력 牧會의 파도가 몰려온다.”라는 특집과 대담을 통해 본격적으로 교회와 신학의 주요 논제가 됨에서부터이다.
빈야드 운동이야 말로 오늘날 韓國敎會가 당면한 침체의 늪에서 나오는 출애굽 운동이라고 이재범 牧師는 추켜세워 극찬했다.
예태해씨의 형인 한신대학원 교수 예영수 씨는 토론토 블레싱은 어거스틴과 성 프란시스 케더린, 쿨만 멜데리와 같은 人物들이 체험한 바 있는 교회사적인 사건이므로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된다고 바른 검증이 없는 일들을 열거하여 변호했다.
숭실대학의 김영한 교수는 워필드와 패커의 사상을 비판하면서 은사 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미국 빈야드 애너하임 교회의 한인교회 담임 민병길 목사는 빈야드 운동 공개 강의에서 서두에 창조도 물결 위에 서 있는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고 오순절의 성령운동도 물결 운동이었다. 오늘날 빈야드에서 전개하고 있는 물결 운동도 오직 성령이 하는 것으로써 이는 절대적으로 성경적이며 복음적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신학자들의 무비판적인 평가, 찬양 가운데 존 윔버가 주관하는 L.A 빈야드 세미나에 참 석한 韓國人牧師 800명 평신도 200명 여기다 캐나다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 세미나에 참석한 숫자를 합하면 약 2000명이 된다고 한다.
이 세미나에 참석하여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어떤 교회는 기존의 예배 방식을 빈야드 식으로 바꾸어 순서 없이 진행하고 또 다른 교회는 예배를 치유 집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 韓國교회는 성장이 멈추고 감소 현상으로 (매년 4%) 목회자들이 고민하고 있다. 그 동안 교파를 초월하여 많은 효과를 보았던 순복음교회의 五旬節 성령운동, 은사 운동도 감소 현상으로 매력을 잃어 가고 있다. 제자 운동, 평신도 운동, 성경 공부도 힘을 잃어 가고 있다. 그래서 너도나도 救會者들은 교회 부흥 성장에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다.
이러한 때에 빈야드 운동이 소개되어 교회 부흥 성장을 위한 대안으로 생각하고 빈야드 운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운동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하는 우리 시대의 도구로 삼는다면 비록 적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성경의 교훈을 따라 자기 정화의 길로 나아가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제3의 물결이 저 바다에 한 번 몰려왔다 사라져 버리는 물결처럼 교회사에 작은 상처의 할퀴고 간 흔적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4. 빈야드 운동의 문제접
1 ) 존 윌 버의 빈야드 운동의 배경과 신학기초
① 신학적 기초
빈야드 운동의 존 윔버의 신학은 사도행전의 은사들이 역사 속에서 연속된다는 신학적 전제에 기초한다. 그는 “표적과 기사는 결코 종식될 수 없는 것으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 이야말로 성경과 교회사가 공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능력전도 167p) 고했다.
이러한 은사들이 目的은 치유이며 치유를 통하여 모든 질병과 연약함만이 아니라 죽음까지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278p) 말씀만으로 믿지 않는 자들도 치유 이적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에 돌아올 수 있으며 치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했다. 이 같은 전제에 기초하여 영적인 체험을 강조하는데 그 체험은 몸의 진동과 떨림, 꼬꾸라지는 행위, 예언과 방언, 계시, 투시 현상이다.
② 퀘이커교의 신령주의적 배경
윔버는 퀘이커교도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했고 거기서 牧師 안수 받고 (프렌스 교단-퀘이커교회)퀘이커교회는 기성 교회들이 객관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다가 內的인 빛의 사역을 제한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떠났다고 주장하여 영국의 조지 폭스란 신령 주의자에 의해 세워졌다. 內的인 빛은 퀘이커의 가장 중요 주제이다.
그 빛은 양심이나 이성과 혼돈해서는 안되고 인간들에게 직접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人間內部에 있는 하나님의 빛인 것이다. 그 빛은 양심을 깨우쳐 이성에게 다시 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內的인 인도에 귀를 기울이는 경험은 신비적이고 공동적인 성격을 지니며 실재적인 것이다.(요 1:9-18)에서 말한 內的인 빛만이 그리스도께 갈 수 있는 길이며 성도를 순수하게 이끌어 갈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도와 형식에 매인 교회를 무시한다.
신앙의 절대적 권유가 계시인 성경의 가르침이나 계시의존 사색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內的인 빛”이라고 한다. 성경계시의 객관성과 절대성을 부인하고 환상이나 직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는다는 主體的 體驗, 신비적인 것을 신앙의 기초로 삼았다.
윔버는 신령주의적 퀘이커교에 사상에 기초하여 “분별의 은사”들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분별의 은사로 구성되었는데 모든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부여해 주는 은사들로 그것들을 통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사물을 파악하시듯이 사물을 파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特定한 상황에 지혜와 통찰력을 계시해 주시는 것.”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상황에 정보나 사실을 계시해 주시는 것.” 영분별의 은사란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동기를 유발하는 요인이 人間的, 신 적 혹은 마귀적인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말한다.(능력치유 321-322p) 이같이 윔버는 主體的인 직관을 신학의 원리로 삼았는데 이러한 內的인 빛을 체험할 수 있는 方法으로 영감, 꿈, 환상, 성경귀절이 있다고 했다.(322p)
윔버에게는 內的인 인상이나 투시는 최고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다. 퀘이커의 직관이나 윔버의 투시 현상은 기독교의 판단의(기준이) 근거가 될 수 없다. 사단은 人間의 상상력이나 공상을 통해서 그런 모든 기만을 形成한다. 이 방법은 마귀가 가장 즐거워하고 마귀는 어리석고 기만당하는 심령에 보금자리를 튼다.
③ 體,驗中心
개혁 주의자들과 우리 교단은 성경을 통하여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의 사역인 이적 기사를 이해하고 성경을 벗어나 직접 계시, 主體的인 체험을 신학과 신앙의 中心으로 삼지 않는다. 윔버는 성경을 신학의 기초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상황을 출발점으로 감았다.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 근거로 삼지 않고 개인 체험이나 이성이 판단 기준이 될 때 거짓된 사상이 출현했다. 윔버는 이러한 主體主義的인 신학은 위험한 사상이다. 퀘이커의 직관에 기초하여 치유 즉 질병, 가난을 사단이 주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치유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핵심이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설교보다는 치유사역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그 사역의 대부분을 할애하셨다고 했다.(능력전도 85p) 病과 가난을 罪값으로 보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치유 제한으로 성경을 해석 한다.
④ 치유 신학의 혼합주의
윔버의 신학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역(능력의 목회)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기사, 표적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된다는 주장을 변호 증명 合理化하기 위하여 성경을 이용한 것이다. “나는 치유 특히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나 있는 치유 사역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치유에 관한 기독교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내가 그렇게 했던 것은 병든 자를 위하여 효과적으로 기도 할 수 있는 방법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교인들 모두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무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능력치유 102p)
그는 성경대로 病든자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오랄로-버츠의 五旬節모텔,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의 성례 전적 모델, 치유 훈련을 강조하는 산 오순절 모델, 마귀 축출 방법, 상처와 원한의 치유에 관심 두는 심령적 영적 모델, 內的치유 모델을 참고하여 치유 신학을 발전시켰다고 한다.(능력치유 309-311p) 이러한 모텔로부터 배운 바를 빈야드 기독교회에 적용하였다.(능력치유 284p) 윔버의 치유 신학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나온 것으로 성경을 교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여러 참고서로 사용 발전시킨 인위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2) 성경 해석학적 문제
빈야드 운동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과 그의 사역, 메시아적 그들의 사역, 이적, 병고침, 귀신축출, 죽은 자의 살림 등 초자연적인 이적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나타났던 방언, 예언, 통역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고 있다.
성경을 지나치게 모범적으로 접근하여 예수와 사도들과 그들의 사역은 물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들을 오늘날에도 재현해야 하는 모델로만 보려는 것은 성경 저자들이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강조하고 있는 주제들 기독론, 구속사, 종말론적 주제들을 약화시키거나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규범화, 모델화, 모방화 하고 있다. 사도들도 예수님의 人格 신분 사역을 모방할 수 없다. 예수님, 사도를 모텔로 보고 오늘날에 그대로 재현하려는 행위는 잘못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모든 표적들과 관련하여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요 2031)고 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였으나 예수님의 표적들을 우리가 그대로 모방해야 할 모델로 제시된 것이 아닌 예수님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녹 l:1-4에서도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님의 행적과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目的은 그들의 人格과 사역을 닮아야 할 모델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데오빌로에게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人格과 사역 그리고 사도들을 통한 성령의 사역이 구원의 토대요 기독교의 뿌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려함에 있다. 빈야드 운동의 지나친 모방주의는 사람들의 관심을 성경 자체가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人格과 사역에 두기보다 오히려 自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표적과 이적 그 자체에 관심을 두게 할 위험이 있다. 빈야드 운동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가들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지나치게 특정한 은사를 규범화, 모델화할 뿐만 아니라 그 은사를 발휘할 수 있도록 사역자 훈련을 실시한다. Wimber목사는 능력의 치유”(283-385p)에서 오늘날 사역자들(성도, 목사)도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치유사역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빈야드 운동의 치유 모델과 5단계 치유 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1단계 : 면담으로서 “어디가 어떻게 아픈가?”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는 과정이다. 2단계 : 진단을 내리는 일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명확하게 찾아내는 일이다. 진단은 이 사람이 왜 이러한 病을 앓고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 어 내는 과정 이다. 3단계 : 기도의 선택하는 일로서 이는 이 사람을 돕기 위해 어떠한 종류의 기도가 필요한 가? 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는 과정이다. 4단계 : 기도의 시행으로서 이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효과적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얻어지게 된다. 5단계 : 기도가 끝난 후의 취하는 후속 조치로서 이는 이 사람이 치유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 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제공한다.
Wimber목사의 치유모델과 5단계는 규범화, 교리화되어 있다.
은사의 모방과 은사의 사역 훈련은 은사가 우리의 노력과 훈련에 의하여 조정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오해를 벗어나기 어렵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사도나 선지자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다 치유나 예언 방언 등의 은사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전 2:28-31) 신약성경에 어느 곳도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제시하는 치유사역의 모델이나 치유사역 단계 훈련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없고 훈련시켰다는 기록도 없다.
개혁주의자들은 은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주의를 반대한다. 신비나 이적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와 이적주의를 배척한다. 계시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은사주의를 배척한다. 기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은 은사나 이적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 經驗論의 문제
빈야드 운동가들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經驗論을 지나치게 (복음서-사도행전) 누가에게 의존하고 있다. 편협하고 획일적인 성경 이해로 성경을 한편으로 자신들의 프로그램 경험, 체험 등을 정당화시키는 방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모델을 이끌어 내는 방편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과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빈야드 운동가들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가들과 꼭 같이 신약 성경 저자들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신약성경 안에 나타나 있는 성령의 가르침에 대한 구절들을 획일적으로 뽑아서 그 구절들을 자신들의 특정한 신학이나 신앙 경험이나 교리나 운동을 변증하고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지나치게 은사와 능력 위주의 聖靈論을 주장하는 빈야드 운동이 韓國敎會가 지향하여야 할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빈야드 운동은 성령을 받음으로 오늘도 우리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구호 아래 모든 것을 성령께 의존하려고 한다. 예배의 진행까지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기 위해 빈야드 교회는 예배순서지를 만들지 않는다. 지나치게 성령에 의존한 나머지 빈야드 교회나 집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현상들을 너무 쉽게 성령의 역사로 돌려버린다. 신약성경 안에서도 그 실례가 없는 비 성경적인 현상들을 최근에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웃음, 뒤로 넘어짐, 이상한 짐승 소리까지도 성령의 역사로 간주한다.
개혁 주의자들이 성령의 일반 은사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빈야드 주의자들은 특이한 현상, 육체적인 신앙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한다. 성령의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육체적인 체험 현상은 1) 몸의 진동과 떨림이다. 2) 고꾸라지는 현상이다. 3) 술 취한 듯한 행동이다. 4) 몸부림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 5) 웃거나 흐느껴 우는 현상이다. 6) 장시간 열렬하게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행위이다.
Wimber는 그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지만 적절하지 못하다. 넘어지는 현상이 은혜 체험의 현상이라고 하면서 에스젤 1:28을 인용한다. 그러나 에스겔이 엎드린 것은 성령이 임해서 엎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 앞에 스스로 엎드린 것이다. 고꾸라지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를 잡으러 온 군사들(요 18:6), 무덤을 지키던 파숫군(마 28:4), 귀신이 고꾸라진 것(막 9:20)을 제시했지만(능력치유 359p)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으므로 성령의 증거와 무관한 것이다.
Wimber는 거룩한 웃음을 예증하가 위해 사라의 웃음을(창 21:6)을 거론했다.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의 約束에 대해 믿지 못하는 가운데 웃은 것이다.
Wimber의 성경 인용은 자신의 사역의 목표에 맞추는 것이지 성경의 본의와는 관계가 먼 것이다. 성경 해석도 성경적인 근거나 신학적 배경도 없는 자신의 主體的인 체험에 근거한 것들이다.
1978년 4월경 “존은 방을 돌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했는데 믿을 수 없는 能力이 그의 손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가 사람들을 건드리면 그들은 바닥에 뒹굴었다. 마치 전류처럼 영적인 능력이 존의 손으로부터 나왔다.”(제3의 물결을 타고 56p)고 했다. 윔버 부인은 윔버를 은혜의 통로로 간주하고 있다. 제3의 물결을 주장하는 이들은 성령의 능력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지 않고 사람의 손끝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처럼 말하면서도 인간을 이적의 근거로 설명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기 위해 손으로 밀기도 하고 넘어지지 않으면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계속 기도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인위적인 작용은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감화와 작용과는 무관한 것이다. 韓國교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행위를 믿음으로부터 은사를 윤리로부터 분리시킬 위험이 다분한 빈야드 운동은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점이 있다 해도 내일의 한국 교회를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제3의 물결 운동의 문제점은 성령의 사역을 총괄적으로 균형있게 접근하지 못하고 성령의 카리스마적 사역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데서 오해와 역기능들을 야기 시킬 수도 있다. 기존 신자들마저 계속 7l적만을 추구하려는 신앙에 빠지게 할 수 있으며 보다 성숙하고 영적인 삶을 살게 하는 성령의 윤리적 사역을 평가 절하하거나 소홀히 할 수 있다고 본다.
5. 빈야드 예배의 문제점
빈야드 예배는 찬양과 경배의 예배로 표적과 기사의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의 행위를 합쳐 놓은 것 이라 할 수 있다.
1) 사회 문화적 관점
빈야드 운동이 생겨나고 예배가 이루어지는 환경은 다양한 民族X化가 현존하는 美國X化的 배경을 가지고 있다. 빈야드 예배는 기존 교회의 形式과 의식을 초월하고 있다.
기존 교회의 예배들이 형식과 틀, 의식에 매여 있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만남을 느낄 수 없었던 것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그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하여 느껴 보려는 욕구는 당연한 것으로 본다. 現代과학 · 文明이 지배하는 인위적으로 가공된 사회에서 신적인 특별한 느낌을 갖고자 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갈급한 심리로 생각된다. 그 어떤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의 직접적으로 주도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려는 의도는 기존 교의식적인 모습에 사로잡힌 것을 볼 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경험한다.
빈야드 운동에 심취한 이들이 미국이 가장 번성하고 번영과 자유를 누리던 시대에 출생한 자로서 그 들의 자유스러운 생활 습관은 예배에 임할 때 자유로운 복장과 태도 찬양과 경배로 키보드, 드럼, 밴드를 동원한 빈야드 음악, 가스펠 송이 이 시대의 X化的인 성향과 맞물려 왔다. 아무리 사람들의 욕구에 충족되고 성향에 맞는다 하더라도 예배의 형식과 의식 없이는 그 어떤 예배도 하나님과의 만남도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표현할 때 도구를 사용한다. 그 도구는 化따인 것과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예배에서 복장은 의식과 형식을 무시한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시대의 스타일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빈야드 운동에서는 모든 신앙과 사역의 초점을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에 맡기고 순종한다는 것인데 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 “능력 사역”(행 1:8)이라 한다.
[1] 능력 사역의 의미
主의 일을 하는 일꾼을 사역자라 하고 사역에는 두 가지 사역이 있다. 즉 말씀 사역과 능력 사역, 말씀 사역은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성경 공부) 전파(설교)하는 것이다.(마 433) 능력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병자를 고치는 사역이라 한다. 말씀 사역은 들리는 使彼(사역)이라 한다면 능력 사역은 보이는 복음(사역)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이 두 가지 사역을 다 행하셨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말씀(들리는)사역과 능력(보이는)사역에 다함께 역사하심이다. 모든 사역이 다 능력 사역이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그러므로 빈야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말씀 사역이 있는 뒤에 반드시 그 말씀과 관계되는 능력 사역이 뒤따른다. 천국 복음이 전파하고 실제로 천국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이러한 사역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역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2] 능력 사역의 목적
예수께서 행하신 3년 동안이 사역은 천국을 전파하는 사역이었고 우리를 천국으로 가게 하는 사역이요 천국을 이루는 사역이었다. 예수님의 마4:17 “회개하라 천국이가까웠느니라”하신 첫 번째 설교는 예수님의 3년 사역의 目的이다. 우리의 능력 사역은 인간 구원과 사회 구원과 교회 부흥에 멈출 수 없다. 천국을 이루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3] 능력 사역의 방법
主께서 행하시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必몇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主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실 때 그의 임재 속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변화시키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시다. 그분이 능력 사역을 행하신다고 한다.
빈야드 교회의 예배에는 주보도 없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예배를 드린다.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질서에 따라 은혜스럽게 예배를 드린다. 예배의 시작 시간은 있으나 끝나는 시간이 없다. 순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와 역사에 맞추기 때문이다. 예배드리며 박수치고 기도하는 모습도 각각 다르다. 성령의 인도와 역사가 체험되는 대로 자유스럽게 표현한다. 어떤 形式의 기준이 없다.
2) 예배신학
빈야드 예배는 시작은 있지만 끝마침이 分明치 않다. 기존 교회의 만남, 말씀, 봉사는 정해진 형식에 의해 진행되는데 빈야드 예배는 찬양, 말씀, 치유라는 나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악기의 사용으로 진행되는 경배와 찬양으로 회중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이끌어 가기를 원한다. 긴 시간 찬양을 통해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은혜스러운 분위기를 경험하도록 하고 있다. 그 다음 계속되는 기도는 감사와 찬양을 동반한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구한다. 그리고 말씀은 20-30분 하는데 성령의 역사와 기적을 통한 치유의 역사에 관련된 본문이 사용되고 설교도 주로 성령의 직접적인 은혜의 체험에 대한 간증 형식으로 전제된다. 빈야드의 신학이 표적과 기사를 예전에는 직접 경험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에 상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엔 공식 에전은 회중으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께 죄를 告白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빈야드 예배는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빈야드 예배는 선학적으로 성령의 강조는 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관련된 화해의 신학적인 표현이 결여된 예배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 예배의 내」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를 받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로 상징화된다. 기독교 예배의 모든 순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직접적인 표현이거나 간접적인 표현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개신교의 예배나」心은 설교에 두는 것이다. 말씀 中心예배는 단순히 설교뿐 아니라 예배의 모든 순서가 말씀에 기초하여 표현되어야 한다. 빈 야드 예배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과의 관계에서 추구되는 A格的인 만남으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표적과 기사란 성령의 가시적인 영적 체험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경험을 예배의 中心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의 역사와 전통에서 벗어난 예배의 모습으로 전환된 것이다.
예배는 성령과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말씀 가운데 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영적 시간으로 인식해야 한다. 빈야드 예배는 성령의 직접적인 경험을 가시화하려고 기도 사역의 순서에서 안수와 방언의 기도, 치유와 귀신축출 등의 신유적인 형태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고 예배 중에 거룩한 무질서를 행하는 것이다.
빈야드 예배는 치유의 은사와 방언과 쓰러짐과 거룩한 웃음 등으로 굉장히 소란스럽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느껴지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요 어지러움이나 무질서의 예배 형태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한다. 과도한 음악과 찬송 부르기를 통하여 감정이 고조되는 그것이 성령의 직접적인 경험과 동일시한다면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오늘날 경배와 찬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예배의 형태들도 바로 그 자체를 은혜 경험의 매체로 보는 것이 문제가 된다.
종교개혁은 말씀과 성례가 은혜 받는 수단이라고 했으나 Westminst신조와 장로교 헌법에는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고 제시되어 있다. 빈야드 운동과 예배는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과 方法論추구에 도전과 혼란을 일으키고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예배는 성령으로 임재하는 하나님을 통한 기적과 은사를 경험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성령으로 임하신 하나님과 교제하여 마음과 뜻을 나누며 하나님을 사랑 하고 섬기는 일이며 삶에 必要한 영적인 힘을 공급받는 은혜의 사건으로서 文化的 도구들을 사용하여 준비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교회의 영적 사건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인격성을 무시한 공적인 수단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
6. 빈야드 운동이 왜 이렇게 관심이 되고 있는가?
빈야드 운동은 1980년대 말에 빈야드 운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John Wimber의 책들이 한국교회에 소개되면서 또 미국 홀러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을 공부한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강의나 저술을 통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운동은 과거 한국의 주류 교단인 장로 교단이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의 극단성에 대해 이단시 하던 것과는 달리 교회적면에서 복음주의나 개혁주의적인 입장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기성 교회 특히 보수 교회 안에 파고들 수 있었다. 빈야드 교회가 한국에 소개된지 몇 해가 못되어도 그 열기는 지금까지 소개된 그 어떤 세미나보다 더 뜨겁다.
1994년 빈야드 교회 사역 팀이 한국을 방문하여 루디아 자매 선교회의 主管으로 산곡기도원에서 약 400여명의 牧會者가 참석했고 1995년 6월말과 7월초에 경기도 광림수도원과 전주 한 일신학대학 세미나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광림수도원에서의 세미나는 고액이었고 주 말인데도 1000여명의 목회자가 참석했다. 이 세미나 후에 성령의 능력과 사역에 대한 모든 것이 더 확실해졌고 찬양과 기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있었으며 목회자 자신의 목회 소명과 목회 사역 자체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목회와 신학 1995.6)
한국 교회 목회자 안에 빈야드 신드롬이 불같이 휘몰아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교리적인 면에서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에 거리를 두던 보수 교단 목사들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1) 목회 탈출구
목회者속에 있는 어떤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영적으로 피곤하고 너무 공허해 계속 목회를 해야 하느냐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Wagner 박사의 제3의 바람을 읽고 빈야드 교회를 다녀오면서 分明히 회복을 맛보았다고 했다. 빈야드 운동에 참여하게 된 목회자들이 단순히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제3의 물결이 말하는 기사와 이적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목회 상황에 대한 새로운 좌표 설정에 목말라 하는 외침의 발로라고 본다. 좌절감과 패배 의식 상실감에서 목회자의 자기 정체의식에 강한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기존의 모든 형식과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엄청난 변화를 제시하는 빈야드 운동은 보수적인 목회자들에게 새로운 탈출구로 보여진 것이다.
2) 교회 성장의 모델
교회성장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교회성장을 위해서라면 물, 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다 보니 기존의 형식과 질서를 벗어난 빈야드 운동 사역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3) 禮拜文化的 입장
빈야드 운동이 생겨나고 예배가 이루어지는 환경은 서구적이며 미국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빈야드 예배의 기본 구도는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복장도 자유롭다. 예배 인도자도 담임 목사로 제한되지 않는다. 기존의 형식과 의식 틀에서 벗어난 초월적 예배로써 현대인들에게 기존의 예배가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고 의식에 사로잡힐 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 형식 없는 빈야드 예배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4)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려고
빈야드 운동에서는 성령의 직접적인 경험을 가시화하려고 한다. 신약의 성령의 은사적인 나타남의 현상을 재현함으로써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성령의 가시적인 경험 때문에 기도 사역에서 안수 방언의 기도, 치유와 귀신축출, 신유적인 형태로 거룩한 무질서가 행해진다. 성령의 나타난 현상을 체험하려는 관심에서다. 이상의 관점에서 관심이 집중되지만 빈야드 운동이 교회성장에 미치는 영향보다는 목회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욱 심각하다. 빈야드 운동이 현실적으로 성장보다는 오히려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고 때로는 분열되기도 한다.
結 論
1. 빈야드 운동에 대한 입장과 대안
빈야드 운동은 제3의 물결이라고 지칭하는 하나의 새로운 물결이라기보다는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처럼 예수님과 초대교회에 있었던 강한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 은사 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보고 있다.
(Wimber 능력전도 8장 성령의 역사 새로운 물결)
존 윔버를 비롯한 빈야드 주의자들은 內的으로 들려오는 음성이나 투사, 직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하여 신앙을 주관화하고 진동이나 넘어짐 낄낄대며 하루 종일 웃어대는 웃음, 몸부림치는 것과 같은 육체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영적인 체험으로 간주하여 체험만이 신앙의 기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윔버의 신비주의적 은사 운동은 18C중반 대 각성 운동 이후 조나단 에드워즈 체험한 미국 교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꼬꾸라지는 현상, 술 취한 듯한 현상, 몸부림을 치는 행위, 웃거나 슬퍼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비록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적인 체험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앙을 主體化하거나 체험주의화 하는 것을 반대한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대신 체험이 신앙의 온전한 판단기준이 된다면 기독교가 계시종교가 될 수 없고 모든 판단 기준이 결국 인간 자신이 된다. 체험을 강조하는 王體主義는 부패한 죄성의 영향을 받는 자율주의로 나가게 되고 자율주의는 극단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고 있다.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는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그것이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한 것이라고 한다. 존 윔버는 극단적인 체험주의로 나가는 토론토 빈야드 교회를 그들의 모임에서 제명하였는데 이는 빈야드 주의자들의 신학이 가지는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단인 우리 교단의 신학에서는 신앙의 主體的인 성격을 강조하지만 객관적인 면을 중요시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가시적인 현상의 체험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가는 삶의 체험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성령의 사역성을 강조하면서도 말씀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Calvin은 신학의 원리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통한 성령을 내세웠고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신학적인 전통에 서서 말씀만을 강조하여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고 성령만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 하는 실수를 犯하지 않으려 했다.
2. 빈야드 신학이란 무엇인가?
빈야드 운동의 존 윔버는 Peter Wagner의 제3의 물결 운동으로 규정한 것이 새로운 물결 운동이라고 하기보다 은사 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빈야드 운동은 존 윔버의 체험적인 신앙이 기독교의 교리로 설정되어 있다.
1) 불신자를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이 신학 정립의 目的으로 보고 있다. 신학의 주제가 선교이고 모든 성경의 신학 주제들은 그것을 위한 보조 신학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빈야드의 전 교리는 선교에 편중되어져 있다고 보아진다.
2) 선교의 최상의 방법은 먼저 음악으로 대중을 사로잡는다. 존 윔버는 대중음악의 그룹멤버였고 경배와 찬양이라는 대중음악에 곧잘 적용하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찬양 예배를 만들었다.
3) 영적인 체험을 망하는 이들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신학의 으로 성령의 능력의 역사로 간주한다.
4)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보다 구별되게 자신들의 사역을 성경적이고 복음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빈야드 교회 연합에서 발표한 “신학적 철학적 선언”을 보면 개신교의 복음주의 신학 사상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가들은 표면적인 것은 복음주의를 말하고 있으나 실질적 행위는 신비적 체험 행위를 답습하고 있다. 성경은 그들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사역을 변호 증명하는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과연 그들의 주장과 사역이 복음주의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에 치중한 신학 사상이 계시 의존 사색이 아닌 자의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실행 재현되어지는 오늘날 우리를 신앙의 모델로 주어진 것인가? 넘어뜨림이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 안에서의 안식인가? 빈야드 운동을 교회에 그대로 접목시키려다 교파가 분열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성취시키기 위한 수단인가?
짐승 소리, 기이한 현상, 웃음 이런 것들이 성령의 역사로 단정하는 그들의 행동을 그들의 사역은 성경적인 것도 신학적인 것도 아직 검증된 일이 없다. 또한 성령의 역사라고 확실하게 말하거나 단정한 것은 그들 자신들이나 추종자들 뿐이다.
다만 韓國교회 아니 세계 교회 우리 시대의 교회가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이 침체에 빠져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상황에서 또한 목회 일선에서 능력 있는 목회로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목회자들에게 수요와 공급의 거래가 맞아 떨어지듯이 체험적 능력의 가시적 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이러한 새로운 물결이 재철 성수기를 만난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지금까지 성경의 진리가 역사 속에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대마다 물건을 모방한 유사 모조품이 교회와 성도들 목회자들에게까지 악성 전염성처럼 퍼져 고난을 당했던 것이다. 유사종교, 유사복음일수록 전면에 복음을 내세우고 복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내면의 교리가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빈야드 운동이 새로운 은사갱신이란 이름으로 또 21C를 제3의 물결이라고 한 알빈 토플러의 신조어를 신속히 도입하여 시대 정황과 젊은 세대에게 새롭게 개혁되어 가는 매력적인 운동인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운동의 본질이 성장계시의 본래적 큰 진리를 벗어난 보조적 부수적인 것을 본 진리로 바꾸어 놓고 그것을 성경에서 찾아 보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 온전히 바탕한 진리로서 일어난 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 지난 94총회 시 예태해 목사의 넘어지는 사건이나 96총회 시 류광수 목사의 다락방 운동도 본래의 성장의 진리 운동으로 사역한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갔으나 그들의 사역의 내부 진상을 조사해 본 결과 자기들의 사역을 주 목적으로 하고 성경을 그들의 주 사역을 변호 증명하는 보조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성경적 이요 성경이 보증하고 있다. 그런데 근본 진리를 벗어나 부제를 주제로 바꾸어 놓은 격이었다.
빈야드 운동은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 층에게 호응하는 은사 운동의 새로운 물결로이 거센 물결을 전면에서 가로막아 내기에는 우리 교단과 韓國교회에 파장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계속 더 조사 연구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써 우리 교단의 성경적신학적 실천 신학적 면에서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더욱 분명하게 걸려질 때 까지 경계 금지해야 될 것이다.
▣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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