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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연구/빈 야 드 운 동

웃음 부흥을 배격하는 9가지 이유

 

웃음 부흥을 배격하는 9가지 이유

 

*  이 글은 '도서출판 두루마리'에서 출간한 「오순절 표적 부흥의 실체: 펜사콜라, 빈야드, 아주사 신드롬」를 옮긴 것입니다. 성도님의 유익을 위하여 여기에 올린 것이니 무단 복제를 하지 마시기 바라며,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판사와 책 이름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친구 여러분, 웃음 부흥의 정체가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음은 성경대로 믿는 우리가 오순절/은사주의의 웃음 부흥을 배격하는 이유들이며, 이 중 단 한가지만으로도 문제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는 웃음 부흥이 성경에서 나타난 현상과 정반대가 되므로 이를 배격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성경은 우리의 신약 교회를 위해 허락하신 유일하며 충분한 권위이다. 하나님이 이 책을 주신 것은 속임수와 오류를 막기 위함이며,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은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보다 더 확실하다(벧후1:18-21). 또한 신약 성경에 드러난 양상과 형식만으로도 우리가 교회를 운영하는데 충분하다. 디모데에게 교회를 향한 교훈을 준 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서신을 마치고 있다.

"모든 것을 살리시는 하나님 보시는 데서와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선한 고백을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내가 네게 명하노니, 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6:13,14)

교회에게 주신 명령을 우리는 다 지켜야 한다. 우리는 결코 새로운 종류의 교회를 만들 권한이 없으며 또한 성령님께서 초대 교회에서 운행하셨던 것과 다른 식으로 혼동을 동반하며 운행하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성경은 이 시대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완전한 계시로,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고 성도들에게 단 한번 주신 믿음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크리스천의 믿음과 행실을 위한 완전하고도 충분한 표준이 된다.

그런데 도대체 성경 어디에 웃음 부흥이 있고 개 짖는 소리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땅바닥에서 동동 구르며 웃어대는 대언자들이 성경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과연 예수님께서 웃음 부흥을 일으킨 적이 있단 말인가? 과연 사도들이 성령님을 붙잡아서 사람들 위로 던지고 교회 회원들의 배를 만져 낄낄거리며 거룩한 웃음을 웃게 한 적이 있는가? 도대체 사도들이 마귀 들린 자들 앞에서 낄낄거리고 웃은 적이 있는가? 도대체 초대 교회 성도들이 "주여, 더 주시옵소서"하고 계속해서 외치며 "영 안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영으로 취해서" 이리 저리 비틀거리며 넘어져서 설교도 하지 못하고 일상생활을 하지도 못한 적이 있단 말인가? 이런 것들은 한 마디로 비성경적인 넌센스이다. 이런 것에 현혹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료한 말씀과 가르침과 본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황급히 말씀을 벗어나 육적 욕망과 마귀의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이다.

2. 우리는 웃음 부흥으로 인한 혼동 때문에 이를 배격한다.

"이는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이심이라."(고전 14:33)

비디오 테이프를 보거나 실제로 모임에 가서 거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한마디로 혼동 그 자체이다. 이런 혼동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같은 혼동과 오류를 지적하면 그들은 곧장 우리가 성령님을 상자 안에 가두어 두려 한다고 비난한다. "성령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친구 여러분, 이미 성경은 성령님께서 어떻게 행하실는지 다 기록해 놓았다. 성령님은 결코 자신이 영감을 불어넣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그 어떤 것을 행하시지 않는다. 또한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든 것을 입증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살전 5:21).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들고 모든 영과 교리와 교사와 종교 현상을 입증해 보아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많은 영적 은사와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의 오류로 인해 그들을 책망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이는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이심이라."(고전 14:33)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 동일한 일을 행하실 것임을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미국에 있는 교회나 아시아 혹은 아프리카에 있는 교회나 1세기의 교회나 20세기의 교회나 하나님의 성도들의 교회에서는 동일하게 혼동이 없이 일을 행하실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집회에서 드러난 혼동으로 인해 방문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한 곳에 모여 모두 타언어들(방언)로 말하면 배우지 못한 자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3)

바로 이 점이다. 웃음 부흥 비디오 테이프를 볼 때 바로 이런 생각이 내게 떠올랐다. 이 사람들은 미친 것이다!

3. 우리는 사람들을 무의식 상태로 몰아가서 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드는 "영 안에서 죽는 현상"(입 신현상)으로 인해 이 웃음 부흥을 배격한다.

신약 성경은 은사주의자들이 경험하는 이른바 "영 안에서 죽는 현상"이 초대교회에 없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땅에 엎드려지는 일이 있었다.

1. 성도들은 예수님께 경배드리기 위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넘어졌다(마 2:11; 18:26; 눅 17:16; 요11:32; 고전14:25).

2. 변화산 사건의 경우 제자들은 무서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넘어졌다(마 17:6)

3. 사울(사도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주님이 나타나자 땅에 넘어졌다(행 9:4)

4. 사도 요한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리스도의 발에 넘어졌다(계 1:17)

그런데 신약성경에 기록된 이런 사건들 속에서 사람들이 엎드러진 것은 현대 오순절 웃음 부흥에서 이루어지는 이른 바 "영 안에서 죽는 현상"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단 한번도 사람이 쓰러지기 전에 안수를 한 적이 없다. 또한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조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중간 매개 역할을 한 적도 없다. 또한 몸이 마비되거나 소위 "성령 끈끈이 풀"이라는 현상에 의해 사람이 바닥에 달라붙어 일어나지 못한 적도 없다. 쓰러지라는 명령이나 가르침도 없고, 쓰러지기 위해 줄을 선 경우도 없고, 계속해서 똑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불러 사람들을 쓰러뜨린 예도 없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영 안에서 죽는 현상"이나 억제할 수 없는 웃음 혹은 기타 이상한 현상들을 다 거부한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더러 거짓 영과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를 대적하는 자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깨어 있으려면 우리의 의식이나 경계 태세를 무너뜨리는 경험에 우리 자신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4. 우리는 웃음 부흥이 "영적으로 취한 상태"를 가져오므로 이를 배격한다.

위에서도 몇 차례 언급했듯이, 웃음 부흥에서는 사람들이 술에 취한 듯이 취하는 현상이 발생하며, 심지어 웃음 부흥의 선구자 하워드-브라운은 자기를 가리켜 '성령 바텐더'라 부르며, 자기가 성령의 새 술을 나누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은 비틀비틀 거리며 넘어지고, 차를 몰다가 다른 사람의 차나 쓰레기통을 들이받고, 집으로 가는 길도 몰라 헤매며, 침대를 찾지도 못하고 여러 가지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 터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의 지도자 세브루(Guy Chevreau)의 부인은 처음으로 웃음 부흥을 경험한 뒤 이틀 동안 취한 상태로 지냈다. 그 48시간 동안 몇 사람들이 식사를 하러 그 집을 방문했으나 그녀는 질서 있게 그들을 대접하지도 않았고 상에다 뜨거운 고기를 내던지고 상 가운데다 프렌치 프라이를 쏟아놓고는 각 사람에게 조금씩 나누어주었다. 물론 그 시간에 그녀는 계속해서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며 웃어댔다.

하워드-브라운의 집회에 참석한 한 부부도 성령의 새 술에 취해 자기의 아기도 잊어버리는 바람에 옆에 있던 사람이 엄마에게 다치지 않도록 아기를 받아 보호해야만 했고, 그 뒤에도 이 부부는 한참동안 새 술에 취해 지냈다.

성경에는 성령의 새 술에 취하는 축복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웃음 부흥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사도행전 2장을 예로 들며 사도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 안에서 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실제로 "제자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사도들이 행한 방언의 기적을 무시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도들이 비틀거리며 땅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사용된 여러 언어로 사도들이 말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 것이었다. 이 같이 사도들을 조롱하려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아주 분명하게 사도들이 결코 취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지금은 세 시밖에 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가 짐작하듯이 이 사람들이 술 취한 것이 아니니라."(행2:15)

만일 사도들이 현대 웃음 부흥의 형태로 새 술에 취했다면, 이들은 결코 복음을 선포하거나 증거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4-40절에 기록된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보라. 그는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그것들을 분석하고 지금 일어난 상황에 적용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술 취하지 않은 설교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 웃음 부흥에서 취한 사람들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차를 운전하지도 못하며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어도 답변조차 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머뭇머뭇하며 한 두 마디 정도 말하거나 심지어 대답하는 중에 넘어져서 움직이지 못하는데, 이 같은 경험은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것과는 정반대가 되는 일이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술 취하는 것과 성령 충만을 대비해서 보여 준다. 사실 술 취한 사람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술이라는 이물질에 지배를 받는다. 반면에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다. 앞 뒤 문맥으로 보아 이 같은 해석은 아주 적절한 것이며, 성령님의 지배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웃음 부흥에 빠진 사람들은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또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예를 근거한 것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 당시에 그 어느 누구도 웃음 부흥에 빠진 사람들처럼 비틀비틀거리며 넘어지고 쓸데없는 말을 중얼대며 필요한 일들을 수행하지 못한 적이 없다. 또한 우리는 성경 말씀이 술 취하지 말고, 항상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기 때문에 웃음 부흥을 거부한다(벧전 5:8)

5. 우리는 웃음 부흥의 지도자들이 성경적 조사를 거부하기 때문에 이를 배격한다.

이들은 성경에 근거해서 웃음 부흥을 검토하는 것 자체를 조롱한다. 하워드-브라운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가 분석하고자 하면 아무 은혜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하지도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기 바랍니다."

터론토 빈야드 교회의 아르놋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 즉 영 안에서 죽거나 데굴데굴 구르거나 넘어져서 웃거나 하는 은사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라도 속지는 않을까 하고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은혜를 받으려면 이런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들은 언제나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결코 성령의 일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근거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면 안 된다. 이 같은 부흥을 성경의 교리에 근거하여 판단하게 되면 성령의 불이 꺼진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독자는 존슨(Phillip Johnson)이 윔버의 빈야드 교회를 방문한 뒤 기록한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www.gty.org:80/~phil/articles/laugh.htm).

또한 이들은 성경을 근거로 자기들의 부흥을 조사하는 사람들은 불일치의 씨를 뿌리는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어라고 이야기하는가? 사도행전 17장 11절에서 베레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가르침이 정말로 그런가 알아보려고 성경을 찾아 대조함으로 고귀한 자들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삼가라."(살전5:21,22)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으로는 약탈하는 이리니라.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모으며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모으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변질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마7:15-18)

"베레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욱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것들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그리스 사람인 귀부인들과 남자들 중에서도 적지 않게 그리하더라."(행17:11,12)

"주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인지 입증하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하라."(엡5:10,11)

성경의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백성들이 모든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고 분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6. 우리는 웃음 부흥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므로 이를 배격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이름 자체가 거룩하며 지존하시다(시111:9) 우리는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분에게 접근하고 그분께 말씀을 드려야 한다. 그런데 웃음 부흥에 관련된 사람들은 결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지 않는다. 우선 이들은 웃음 부흥을 가리켜 "파티하는 시간"이라고 주장하며, 이 파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상한 현상들과 새 술에 취해서 자제하지 못하는 것과 혼동을 주신다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고전도 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한 말로 경고했다.

"이는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이심이라."(고전 14:33)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할지니라."(고전 14:40)

이 두 구절만으로도 웃음 부흥이 틀린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웃음 부흥 지도자들의 태도는 아주 불손하다. 하워드-브라운은 자기가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사 자기에게 손을 대지 않으면 자기가 위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손을 대겠다고 기도했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자기 삶에 들어오도록 자기가 허락했으므로 나중에 천국에 가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너는 내 뜻대로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 그분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하나님, 내 잘못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허락했습니다.' 라고 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이들은 또한 무례하게도 하나님께 명령을 내려 사람들에게 임하라고 한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께 명령한다. 도대체 그가 명령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만 결코 우리가 명령한 것을 행하는 분은 아니시다. 또 다른 웃음 부흥 지도자들 역시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명령을 하는데, 이것은 결코 성경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웃음 부흥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무시하고 있다. 한번은 하워드-브라운이 지옥에 대해 설교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청중들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웃음 부흥에서는 수많은 경우에 웃음으로 인해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선포할 수 없다. 웃음 부흥의 지도자들이 이런 명백한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며, 웃지 않아야 할 때에 웃지 못하게 만드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준다. 심지어 설교자마저도 성령의 새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강대상 밑에 주저앉으니 과연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7. 우리는 웃음 부흥이 여자 지도자들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를 배격한다.

오순절/은사주의의 역사와 최근의 웃음 부흥을 통해 우리는 여자들이 선두에 나서서 진두지휘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영국 런던 홀리트리니티 브롬튼에 웃음 부흥을 가져온 장본인도 여자였으며, 터론토 빈야드 교회 아르놋 목사의 부인도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웃음 부흥 경험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펜사콜라 부흥의 킬패트릭 목사의 경우도 그 부인이 직접 터론토까지 가서 웃음 부흥을 체험하고 교회로 돌아와 기도팀을 만들고 웃음 부흥을 일으켰다. 또한 브라운스빌 교회에서는 한 십대 소녀가 전체 교회 앞에서 말을 하고 예언을 함으로써 웃음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것은 비디오로 녹화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배부되었다.

성경은 분명히 여자들이 남자위에 서서 가르치거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내가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히 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뒤에 이브가 지음을 받았으며또한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법하였음이라."(딤전 2:12-14). 이 같이 성경이 명백히 금하고 있는 것을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8. 우리는 웃음 부흥 안에 절제가 없기 때문에 이를 배격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할지니라."(고전14:40) 그런데 웃음 부흥에는 이런 품외가 전혀 없다. 거기에는 질서도 없고 절제도 없다. 대부분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 여자들이 뒤로 넘어지며 치마가 벗겨지고 하체가 드러난다. 남자가 여자위로 쓰러지고 여자가 남자 위로 쓰러지며, 심지어 킬패트릭 목사의 경우 여자 신도가 그에게 쓰러져 안기기도 한다. 이 같이 부적절한 일들이 집회마다 일어나고 있는데, 실로 성령님은 이런 식으로 행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분명히 성령님은 여자들이 절제하며 품위있게 행하기를 원하시며, 남자들도 이런 일에 빠지기를 원치 않으신다.

9. 우리는 웃음 부흥이 거짓 교리를 조장하므로 이를 배격한다.

성경은 성령님을 가리켜 "진리의 영"이라고 한다(요 14:17; 15:26; 16:13; 요일4:6). 그러나 오순절 웃음 운동의 열매는 진리가 아니라 교리의 오류이다.

(1) 이들은 먼저 크리스천이 완전한 건강을 누릴 수 있다고 거짓 주장을 편다.

비록 그들이 아사야서 53장 5절을 인용하며 예수님의 속죄로 인해 완전한 건강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구절이 가르치는 치유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죄로부터의 치유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불법으로 인함이라. 그가 징벌을 받으므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53:5), 이에 대해 베드로전서 2장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맞대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셨으니, 이는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2:22-25)

(2) 이들은 말세에 "늦은 비" 기적 부흥이 있을 것이라고 거짓 주장을 편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20세기 오순절운동의 가장 큰 교리 중 하나는 주의 재림이 있기 전에 전세계적으로 표적과 기적 부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웃음 부흥" 지도자들 역시 이 점을 무엇보다도 강조하면서 "웃음 현상"이야말로 말세 기적부흥에서 생길 "늦은 비"의 첫 번째 방울이라고 믿고 있다. 이들은 대개 사도 행전 2장 17-21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자기들의 주장을 편다. "보라.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이 복음 전도, 즉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은 그들이 자기들의 기적 및 표적 부흥을 지지하기 위해 이 구절을 문맥과 상관없이 해석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살펴보도록 하자.

"오히려 대언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마지막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딸들은 대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며,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내 종들과 여종들 위에 부어 주리니 그들이 대언할 것이요"(행 2:16-18)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이적들과 아래로 땅에서는 표적들을 보이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저 크고 주목할 만한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9-21)

우선 사도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이 자기 때에 오순절 사건과 함께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그는 분명히 자기들이 목격한 사건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말로 방언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대언자 요엘이 예언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엘의 예언이 두 부분 즉 예언 부분과 하늘에 있을 표적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요엘의 예언 부분이 초대 교회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성경과 인류역사를 통해 뒷부분 즉 하늘의 표적 부분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예수님의 재림 때에 다 이루어질 것이며, 계시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

사도행전 2장 17,18절의 예언은 오순절 날 발생한 방언 및 예언과 관련이 있으며 특히 사도들의 사역과 관련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이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0-22절에서 분명히 방언이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위한 표적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형제들아, 깨닫는 일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될지라도 깨닫는 일에는 어른이 될지니라.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을 가진 사람들을 시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한 곳에 모여 모두 타언어들로 말하면 배우지 못한 자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0-23)

사실 이 구절은 이사야서 28장 11,12절을 인용한 것으로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이 사도 시대의 기적 방언 곧 유다인들을 위한 표적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민족전체가 이 같은 표적을 거부하였고,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으로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제 유다인들을 향한 방언은 그 기능을 다 완수했으므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사도시대의 위대한 대언/예언 사역 역시 그 기능을 완수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확증하시기 위해 기적을 행하셨으며(행 2:22), 사도들은 자기들의 사도 됨을 보여주기 위해 기적을 행했다(고후 12:12). 그런데 성경의 완성과(계 22:18,19) 사도들의 죽음 이후로 표적과 이적은 말씀의 계시와 더불어 사라지게 되었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대언자들 즉 말씀을 받아 하나님 대신 전하는 자들과 사도들이 우리의 믿음을 위한 기초가 된다고 말하며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라고 말한다. "너희는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우심을 받은 자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으뜸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기초란 한번 놓으면 또 다시 반복해서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초는 단 한번 놓이며 그 위에 건물의 다른 부분이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대언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위한 기초를 놓았으므로 그들은 더 있을 필요가 없고 반복해서 다시 나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순절/은사운동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나아갈 방향을 지도하신다는 사실을 마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꿈과 이상 등을 통해 직통계시를 받는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전체를 인도하심을 확실히 믿지만, 꿈이나 음성 등을 통해 직통계시를 주심을 믿지 않는다. 실로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현대 오순절 "웃음 부흥" 지도자들은 성경을 통해 자기들의 교회의 전통과 미신을 내세우며 자기들의 주장만을 편다. 예를 들어 빈야드 교회의 목사인 라일(James Ryle)은 사도들이 죽은 이후에도 직통계시를 받을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카톨릭 교회의 거짓 교사인 어거스틴, 제롬, 아퀴나스, 성 베네딕트, 성 니콜라스 등의 사례를 들고 있다. 심지어 그는 기독교의 위대한 인물인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이 성경 이외의 계시라고 주장하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유명한 찬송가의 저자 존 뉴턴과 위대한 침례교 목사인 스펄전의 꿈 이야기를 거들먹거린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번연이나 뉴턴 혹은 스펄전 등이 단 한번도 빈야드/펜사콜라 웃음 부흥에서 주장하는 이상한 계시와 현상을 지지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직 성경만을 전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웃음 부흥의 "표적과 이적"이 결코 사도 행전 2장 17-21절을 성취한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3) 이들은 개인적으로 오순절 체험을 해야만 한다고 거짓교리를 가르친다.

오순절 신학의 토대는 신자라면 누구나 개인적으로 사도행전 2장에 있는 것 같은 경험을 체험해야만 한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의 세이모어나 현대 웃음 부흥의 지도자들이나 한결같이 개인적인 오순절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하워드-브라운은 극도의 혼란을 동반하는 하나님의 불이 임하는 것이야말로 1993년부터 시작된 "웃음 부흥"의 전조라고 말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같은 경험을 거부하며, 초대교회의 오순절 사건이 단 한번만 필요한 사건으로 또 다시 재현될 필요가 없음을 천명하는 바이다.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바로 그 때에 성령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인 교회에게 임하셨던 것이며, 그분께서는 결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그 곳에 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그 때에 그 곳에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임하셨으며, 유다인들의 연례 명절인 오순절에 그 곳에 모인 유다인/크리스천들이 분명한 다른 나라 말로 말한 것 역시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고전 14:20,21 사 28:11,12)

그렇다면 현시대의 그리스도인과 성령님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단 말인가? 우리가 복음을 들고 주 예수님을 신뢰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치심을 받는다(엡1:12,13). 서신서에는 우리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오순절 체험을 구해야 한다거나 성령님을 구해야 한다거나 성령침례를 구해야 한다거나 어떤 특별한 종류의 영적 체험을 구해야 한다는 내용이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만일 이런 것이 필수적이었다면,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오순절 "웃음 부흥" 지도자들이 성령님에 대한 거짓 교리와 '체험적 기독교'라는 잘못된 교리에 입각하여 이런 주장들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경험을 주장한다는 것은 곧 그들이 믿음대로 행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반드시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롬 10:17; 히 11장).

(4) 이들은 성령 침례에 대해 거짓교리를 가르친다.

오순절 웃음 부흥 지도자들은 마태복음 3장 11절을 인용하며 성도라면 누구나 성령님과 불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나는 너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려고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있으시매 나는 그분의 신을 드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물론 이 구절에서도 오순절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는 1세기의 크리스천들이 불 침례를 받았으니 20세기의 크리스천들도 불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짓 교리란 항상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데서 나온다. 이 구절에서 침례자 요한은 두 부류의 유다인들에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선 믿음을 가진 유다인들은 오순절 날에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불침례가 신자를 위한 축복이 아니라 불신자를 위한 경고라는 점이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침례자 요한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사, 자신의 알곡(신자, 성렴 침례 받은 자)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쭉정이(불신자, 불 침례 받는 자)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마 3:12)

얼마나 명확한가? 다시 말해 성령님의 침례는 신자를 향한 것이요, 불 침례는 불신자를 향한 경고로 예수님께서 돌아오사 영원한 형벌로 불신자를 벌하는 날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왜곡해서 자기의 교리에 꿰어 맞추려 하는 사람들을 늘 경계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경고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뱀이 그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 같이 너희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변질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도다."고후(11:3,4)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능력과 거룩함과 열심을 필요로 하며, 우리의 집과 교회와 직장에서 예수님의 성결케 하시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성경에 따라 간구해야 하며 결코 우리의 생각이나 체험에 의거하여 간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은 단 한 번도 우리더러 이상한 체험을 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할지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이 젖으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은혜로우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있다.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 8:9) 이외에도 엡 4:30, 고후 1:21,22, 요일 2:27 등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를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또한 신뢰하였으며, 또한 그분 안에서 믿은 뒤에 저 거룩하신 약속의 영으로 인치심을 받았나니"(엡 1:13)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함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신 고로 아직 성령님을 주시지 아니하셨더라.)"(요 7:38.39)

구원받는 과정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님께서 그 사람을 인치신다.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아 성령님을 소유하면 더 이상 성령님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도들은 단 한번도 교회더러 성령을 구하거나 성령 침례를 구하거나 성령님의 축복을 구하라고 한 적이 없다. 다만 우리는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라는 명령만 받고 있을 뿐이다(엡 5:18). 이 말은 하나님의 영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림으로 그분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함을 의미하며 결코 이상한 체험을 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단 한번도 성령을 체험하라고 권유한 적이다. 그가 가르친 것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라는 것이었다.

(5) 이들은 방언이 현재에도 필요하다고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

"웃음 부흥"에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방언을 할 것을 강조한다. 하워드-브라운은 심지어 방언을 개인기도 방언과 공중기도 방언으로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방언이 옳지 못한 것이며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a. 성경의 방언은 교회의 설립을 위해 유다인들에게 주신 표적으로 교회의 설립이 끝난 이후에는 사라졌다.

b. 성경의 방언은 사도들의 지침에 따라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방언을 해서는 안되며, 남자들의 경우에도 순서대로 해야 하고,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만 한다. (고전 14장 참조)

c. 성경의 방언은 한결 같이 이 땅에서 다른 민족이 쓰는 말을 가리킨다.

d. 성경은 방언을 하려고 노력할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방언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에 의해 주시는 것이다.

e. 방언은 은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은사이다.

f. 심지어 초대 교회에서도 누구나 다 방언을 한 것이 아니다.

g. 교회에서 여자들은 결코 방언을 해서는 안 된다(고전 14:34,35).

h. 방언은 결코 성령 침례나 성령 충만의 초기 증거가 아니다.

i. 방언은 하는 방법을 배우라는 지시가 성경에 없다.

j. 오순절/은사주의에서는 학습 방언을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이다.

(6) 이들은 기적이 믿음을 가져다준다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

빈야드 운동에 근거를 둔 웃음 부흥은 표적 및 이적이 믿음을 만들어 낸다는 이상한 주장을 굳게 편다. 윔버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을 치유하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가 쉬워진다." 그는 플러 신학교의 강의에서도 기적을 동반하는 복음 전도가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고 거듭 거듭 외친다. 그러나 성경은 이 같은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이집트와 광야에서 하나님의 기적들을 체험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이 믿지 않았으며(히 3:7-12),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믿지 않았다(요 6,66). 이런 거짓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표적과 기적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들은(즉 표적들은) 믿으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고 믿게 되리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그들이 다시 그분을 잡고자 하였으나, 그분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요 10:37,38)

"진실로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인내와 표적과 이적과 능한 행위로써 사도의 표적들을 행하였도다."(고후 12:12)

"하물며 우리가 이 같이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으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이요,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뜻에 따라 표적과 이적과 다양한 기적과 성령님의 선물들로써 그들을 증거하셨으니"(히 2:3,4)

이들은 또한 성경만으로 충분하며 그 안의 기적 및 표적들로 충분함을 부인한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들을 기록함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이들은 또한 성경이 기적들에 대해 아주 평범하게 보여 주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분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아니하리라."(마 12:39)

"그가 말하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 하니, 아브라함이 말하되, 그들이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확신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0,3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요 20:29)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게 할 때에 교묘히 꾸며 낸 우화들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존엄하심을 눈으로 본 자들이라.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에게 나기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나온 것을 들은 것이라. 또한 우리에게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으니, 너희 마음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이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의 어떤 대언도 결코 사적인 해석에서 난 것이 없나니, 이는 대언이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을 통해 감동을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16-21)

(7) 이들은 성령님에 대한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

이들은 성령님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분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 그분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내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분께서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하였노라."(요16:13-15)

성령님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기에게로 사람을 모으지 않는다. 신약성경을 보면 사도들이 성령님께 기도하거나 경배 드리거나 성령님을 높이려 한 일이 없음을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단 한 차례도 성령님께 기도했다는 예가 없다. 오직 성령님은 예수님을 드러내고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께 집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웃음 부흥 지도자들은 예수님 대신에 성령님을 높이며 성령님께 기도하고 있다. 베니 힌 같은 엉텅리 목사는 「안녕하세요 성령님」같은 책에서 자기가 성령님께 기도하며 성령님을 구하고 있으며 성령님을 초청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0. 우리는 웃음 부흥이 종교 통합을 추구하므로 이를 배격한다.

웃음 부흥의 큰 핵심 사항 가운데 하나는 종교 통합이다. 그들은 교리를 무시하고 오직 사랑과 경험, 일치만을 강조한다. 1997년 11월호 「카리스마」잡지에 따르면 웃음 부흥 선교사 하워드-브라운은 필라델피아에서 1200명의 천주교인들에게 웃음 현상을 가져다주었다고 보고했다. 그의 주도하에 천주교인들도 하나같이 히스테리성 웃음을 터뜨렸으며,그 교회의 윌쉬 사제(Vincent Walsh)는 자기 교회에서 웃음 부흥이 1994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터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의 아르놋 목사는 1998년 3월에 프랑스를 방문하여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종교 통합을 조장했는데 아르놋이 주관한 회의에는 오순절주의자, 은사주의자, 프로테스탄트, 카톨릭 지도자들이 모였다. (「카리스마」 1998년 6월호)

터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의 경배와 찬양 지도자중 하나는 루이스(David Ruis)인데 그는 빈야드 노래를 많이 만든 인물이다. 그가 작곡한 "(교단의) 담을 헐자"라는 노래는 종교 통합을 추구하고 있으며 현재도 웃음 부흥에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참으로 흥미 있는 것은 "웃음 부흥"의 목표가 "약속 이행자 운동"(Promise Keepers, PK)의 목표와 같다는 것이다. 다 아는 대로 PK의 가장 큰 목표 역시 종교 통합으로, 이들은 심지어 몰몬교까지도 연합시키려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첫 번째 이유는 올바른 교리의 확립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라."(딤후3-16, 17).

그런데 이들은 교리의 담을 헐고 참과 거짓이 하나 되는 일에 앞장서자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일을 계속 하라고 말하면서 교리적 차이를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게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를 따르기에 힘쓰고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마케도니아로 갈 때에 네게 간청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명하여 다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며"(딤전 1:3)

"또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이름 중 하나는 "진리의 영"이다(요14:17; 15:26; 16:13; 요일4:6).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임하실 때는 진리를 동반하신다. "웃음 부흥"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는 이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리와 진리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웃음 부흥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아주 능력 있는 종교적 체험을 할지도 모르며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가고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혼동과 혼란의 창시자가 아님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