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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란 무엇인가? 박발영목사 인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인간이 그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가?, 아니면 이미 결정된 삶을 그냥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자유의지에 대한문제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에 대두된 문제는 아니다. 옛날 인류역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논쟁되었던 것이다 특히 자유의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 된 것은 5C경(412년)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교리논쟁 이였다 그리고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쟁이 1,000년이나 지난 뒤에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의 기수인 루터 사이에서 다시 또 일어났다. 그 후 다시 한 번 칼빈과 알미니안주의 와의 교리적인 논쟁이 있었다. 이 자유의지의 교리 논쟁은 1600년간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는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 자유의지의 논쟁이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자유의지 유무의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기독교의 중대한 교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유의지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자유의지는 절대적 자유의지와 제한적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이 구분은 자유의지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1.절대적 자유의지이다. 절대적 자유의지란 누구의 명령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자기 임의대로 선택하고 결정 할 수 있는 자율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의 명령이나 구속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절대주권을 가지고 자기 임의대로 결정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절대적 자유의지는 절대자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며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 할 수도 없으며 사용 할 수도 없는 단어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하면서 살다보니 마치 인간에게도 이런 절대적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임의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타락이전의 아담에게도 절대적 자유의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라 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아담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며 움직이는 하나님의 종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복 주어 세워주신 삼대언약과 절대적 금언 아래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자유롭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조차 누구인가의 명령, 유혹, 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아담도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명령자가 있고 또 그것을 먹도록 유혹하는 사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실과를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 임의대로 자기 선택과 결정으로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자유의지(권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아담이 어떻게 절대적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절대적 자유의지는 타락 이전도 이후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자유의지의 개념에서 자유는 “하나님에 관한 용어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신성도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신성 모독적인 발상이라고 반박한다. 2.제한적 자유의지 제한적 자유의지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임의로 선택하고 결정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말합니다. 즉 제한된 주권을 가지고 행동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말합니다. 제한적 자유의지는 또 일반적 자유의지와 신앙적 자유의지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1). 일반적 자유의지이다. 사회생활과 인간다운 삶을위한 기본(자연)활동으로서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나누어주시는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한 부분이므로 이것을 편의상 일반적 자유의지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기를 먹을 것인가? 채소를 먹을 것인가? 혹은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음료수를 마실까? 여행을 갈까? 말까? 밥을 먹을까? 말까?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계속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 할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일반적 자유의지가 없으면 인간은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반적 자유의지는 한계성이 있습니다.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사회생활과 인간다운 삶을위한 기본(자연)활동으로서 자유의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그래서 루터도 타락 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일상적 세상 삶, 곧 자연적인 법과 자연적인 덕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유스러우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거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 했다.
즉 불신자 에게도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기위한 일반적 자유의지는 있는것이다. 그렇다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적 기능인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없는것이다.
2.)신앙적 자유의지이다.
① 타락이전의 자유의지(아담)
"동산 각종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이 말씀을 보면 타락이전의 아담에게 무엇을 임의로 결정 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다고 생각 됩니다. 비록 선악과는 먹을 수 없다는 제약이 있는 제한적인 자유의지였지만 선악과외에 낙원 안에 있는 모든 실과는 임으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어거스틴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것을 신약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진리 안에서의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의지 란 진리 안에서만 임으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자율적으로 행동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진리 안에서 자유의지 이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진리를 추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본래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의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한 자유행동은 선(善)의 결과만을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의지로 인하여서 타락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 열매를 먹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진리안에서 자유의지(진리순종) 때문이 아니라 말씀(진리)에대한 불순종 때문이였다. 즉 하나님이 주신 “진리 안에서 자유의지”의 행위를 실천하지 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락한 것은 자유의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자유의지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권고를 받은 이상, 그 명령을 지켜야 했었다. 아담의 불순종이 아담의 타락(墮落)이 자유의지를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이 자유를 회복시켜 나아가야 한다. 잃어버린 자유의지 회복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② 타락이후의 자유의지(불신자)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죽음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래서 엡2:1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은혜로 살리셨도다."(엡 2:1) 고 한 것입니다 죽음과 영적암매 상태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도 당연히 상실 된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상실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죄를 회개할 능력도 없고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리를 쫓아 살 수도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은 죄와 사망의 종이 되어 저주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락 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적 기능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이 상실된 것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변한 것이다. 타락 때문에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잃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또
루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은 이름만 남아있고 오직 죄를 짓는 경향성만 있어서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니 스스로 구원에 이르게 될 아무런 능력도 없다 .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란 의를 이루는 일에나 구원을 얻는데 가장 큰 적이 될 뿐이다 .1)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8:31-36)" 그 후 인간의 삶은 사망과 죄악의 종노릇하는 삶이 된 것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부터 모두다 죄의 종으로 태어나 죄 아래 살다가 죄 아래 죽어갑니다. 아예 악한 죄 아래의 종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죄를 싫어하면서도 죄를 범 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을 내리고 내가 행하면서 살다보니 마치 인간에게도 이런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착각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알게 됨으로 자유의지란 없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비유를 통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 사형수에게 자유가 있는가? 어떤 사형에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참수형을 택 할 것인가? 아니면 교수형을 택 할 것인가? 아니면 총살형을 택 할 것인가? 이렇게 선택하고 결정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사형수에게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여전히 사망아래 있는 것이다. 사형수에게 자유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참자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알콜 중독자에게 자유가 있다고 할 수있는가? 어느 술을 먹을 것인가? 소주? 막걸리? 빽알? 술을 선택 할 수 있는 선택권과 결정권이 있다고 술에서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이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기 전에는 죄와 사망의 종인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생각하고 계흭한 것이 온통 악한 것 뿐이고 롬3:9-18의 말씀대로 의인은 하나도 없고 다 죄인이다. “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 이렇게 인간은 죄 짓는 일 밖에는 할 줄 모르는 존재이다. 죄를 회개 할 줄도 모르고 예수를 믿을 수도 없는 존재이다. 여전히 지금도 죄와 사망아래 있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내가 결정을 내리고 내가 행동하면서 산다고 해서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말하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들 또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백성들이라는 자부심에 가득한자들에게 이 말은 참으로 의아스러운 말입니다. 당장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말하기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하고 항의를 시작합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얻어야 하느냐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우리의 뜻대로 자유롭게 살아왔는데 왜 자유케 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현재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에 항의하는 모습과 어쩌면 이렇게 동일할까요? 예수님은 답변하기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8장)" 라고 답변합니다. 다시 말하면 남의 나라에 머슴을 살아서 종이라는 것이 아니라 죄에게 종살이 함으로 죄를 범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죄의 종으로 사는 것 이지요 당연히 죄의 멍에를 풀러 자유를 제공해줄 구원자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한다면 유대인들은 자신이 자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죄의 종으로 존재한 것입니다. 마땅히 죄에서 해방을 얻어야할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죄가 없다면 모르지만 죄 아래 존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모든 사람은 유대인과 같이 죄의 종임에 틀림없고 자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이란 노예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판단하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 같아도 실상을 알고 보면 주인이 명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판단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먹을까 입을까 우리가 판단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선택하거나 성령의 소욕을 따라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자유의지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아래 있는 불신자들은 자유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③ 중생 이후의 자유의지(성도)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따라 구원에 이른 성도들은 과연 어떠한 상태일까요? 비록 죄의 종으로 세상에 태어났으나 새로운 거듭남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 생명은 하늘로 부터 내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를 소유한자마다 하나님의 아들(양자)이라 칭함을 얻습니다. 죄의 종으로 부터 해방을 얻은 위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얻는 자이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 새 생명을 소유한 성도들은 자유의지가 회복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8:31-36)"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 중생한 신자들은 자유의지가 회복되었다. 진리 안에서 진리대로 살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사망의 종노릇 하지 않고 생명안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진리 안에서 자유의지 ”라고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러나 완전한 자유의지가 아니고 성화가 필요한 자유의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진리 안에서 살도록 힘쓰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8:31-36)" 결론 사람에겐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 자유의지는 타락 전도 중생 후도 없지만 피조물에게 허락한 제한적 자유의지는 있었다. 타락이전에는 진리안에서 자유의지가 있었고 타락과 함께 상실했다가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후에는 회복되었으나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절규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는 온전한 몸으로 회복 될 것이다.
1), 성도는 자유자의 자녀이다, 갈4/28-31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2),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자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3) 피조물도 참 자유를 원하고 있다;;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4) 자유를 받았으니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자가되자,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본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진리를 추구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또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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