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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적 은혜 서론 박발영목사 지난주에는 예수님이 자기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즉 제한적 속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 사역의 효력이 가항력적인가? 아니면 불가항력적인가? 하나님의 은총이 택한 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불가항력적 은혜로 또는 유효적 소명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알미니안 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항력적 은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1.양대 주장( 칼빈과 ,알미니안)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해보면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를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 중에 소수만이 복음을 받아드리고 대다수는 거부합니다. (8대2정도로 믿는다.) 똑 같은 복음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안 믿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주장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1)즉 알미니안주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완전 타락한 것이 아니다. 부분적으로 타락하였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과 자유의지가 있다. 그래서 죄 있는 인간은 하나님께 향하는 능력도 있고 신의 은총을 반항하는 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 자유의지로 자신이 예수를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런 뜻입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해 부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자연인)은 이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갈빗대 3개가 부러지고 다리가 다친 상태로 비유한다. 그래서 사람은 아직은 살아있고, 또한 상처는 입었으나 의식이 있어서 의사를 부르며 구원을 요청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억지로 몸을 끌고 전화를 걸어 살려달라고 도움을 요청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의사가 달려 와서 도와주는 것처럼 인간도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죄를 회개할 수도 있고 또 예수를 믿을 수도 있기 때문에 구원도 사람이 예수님께 나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기의지에 따라서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는데 사람 편에서 의지적으로 예수를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에 구원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문제는 전적으로 사람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사람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은 사람의 반항에 의해 거부 될 수 있다고 하여 이것을 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2)그러나 칼빈주의의 주장은 다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허물과죄로 죽어있다고 주장합니다. 2층에서 떨어져 병들고 불구가 된 상태가 아니라 100층 꼭대기에서 떨어져 완전히 죽어버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윈 팔머는 「인간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떨어져 박살난 존재와 같다」 그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은혜로 살리셨도다."(엡 2:1) 고 한 것입니다. "죽을 뻔"했던 인간이 아니라 "죽었던" 인간을 은혜로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를 회개 할 수도 없고 스스로 예수를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도 결정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구원에 관해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려달라고 구원을 요청합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구원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살려줘야 사는 것이지 어떻게 자기 스스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어 살리실 때 살아나면서 감각을 느끼고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입니다. 죽은 “영”이 말씀을 듣다가 뽈딱 살아나면 그때부터 생명의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깨달아 지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선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회개하게 됩니다. 죽은 나사로를 예를 들어 말씀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어떻게 살려달라고 구원을 요청합니까? 죽은 사람은 살려줘야 사는 것이지 어떻게 죽은 자가 살려달라고 구원을 요청합니까? 죽은 사람은 살려줘야 사는 것이지 살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실 때 나사로가 살아난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실 때 주님이 생명을 주시면서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 난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 날 때 나는 살기 싫습니다! 라고 반항할 수 있습니까?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자랄 때 저항하면서 자란 아이가 있습니까? // // // 나올 때 // 나온 // // ? 그리고 죽은 나사로가 “나좀 살려 주십시요!” 라고 구원을 요청했습니까? 죽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구원을 요청했다면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이 아니지요 성령님이 예수의 생명을 불어넣어 살리시면 그냥 살아지는 것입니다. 갑자기 일어 날 힘이 생기고 걸을 힘이 생기고 볼 수가 있고 들을 수가 있게 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은 능동태가 아니라, 전적으로 수동태입니다. 전혀 거역 할 수 없는 상태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났다고 해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하고, 또 주님이 부르시면 부르심대로 주님께 반듯이 나온다고 해서 “유효적 부르심”라고 합니다. 또 주님께서 손 마른 자에게 “손을 펴라!” 하실 때도 손을 펼 힘을 주시고 손을 펴라고 하셨기 때문에 손을 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 할 때도 성령님이 일어나 걸을 힘을 주셨기 때문에 일어나 걸을 수 있었습니다.
‘불가항력적’이란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강제로 납치하거나 유괴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억지로 강요해서 인간의 뜻을 거스려 역사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해서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이란 바른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이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택자들의 심령 속에서 예수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의 영혼이 자연스럽게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큰 기쁨이고 큰 감격입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는 회심했을 때의 자기 경험을 이렇게 표현한다. “주님께 잡혔을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 (『예기치 못한 기쁨』) 나의 간증 : 내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을 때 그 때가 가장 행복했다. 저는 너무 좋아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그 경험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2.성경의 주장 성경을 보면 칼빈주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2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5) 여기서 "내게로 올자" 자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선택한 자들-입니다. 선택된 자들은 주님이 부르시면 반듯이 주님께로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엔 능력이 있습니다. 부르면 반듯이 주께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효적 부르심”라고 합니다. 양과 목자의 비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들음 잃은 양을 다른 우리 안에 가서 찾을 때 목자가 부르면 자기양은 고개를 쳐든다고 함. 양은 자기 목자를 알아보고 반듯이 목자에게 가게 되어 있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 또는 유효적 부르심의 교리를 설명해 주는 뛰어난 예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사건이다. 행16:14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본문은 세 가지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들었다’는 사실과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었다는 사건과 루디아로 하여금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을 루디아가 듣게 된 사건을 곧 ‘외적 부르심’이라 합니다. 이를 소위 전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 부르심인 전도자의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한결같이 복음에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만이 반응합니다. 선택받은 자만이 복음을 긍정적으로 받습니다. 여기서 루디아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청종했다’라고 하는 부분이 바로 ‘내적 부르심’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전해들은 여인들은 루디아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럿이었습니다. 문맥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루디아만이 여럿 중에서 유독 홀로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었을까요?. 현실적으로 뭐가 특별한 면이 있어서일까요? 결과적으로 이런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청종할 수 있게 된 것은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요6:65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고전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전도자 바울이 루디아의 귀에 전한 것은 외적인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에 하신 말씀은 불가항력적 은혜의 내적인 부르심이었던 것입니다. 바울: 바울은 기독교에 적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기 위해서 쫓아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울아! 사울아! 하고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뉘시오니까? 그러자 주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죽었던 바울의 영이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적대적이였던 사울이 반항 한마디 못하고 사울이 바울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이것이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베드로: 베드로는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주님이 찾아왔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들이 잡힌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는 주님을 감당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베드로는 그물을 남겨놓고 생계 문제를 전혀 걱정하지 않고, 온전히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어부인 베드로가 고기 잡는 일을 그만두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문제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쁘게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효적 부르심이라 합니다. 나의 간증: 인간의 본성은 본래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나도 원래 기독교를 참 싫어 하였습니다. 우리 가정은 어머니 혼자 교회에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는 문제로 아버지와 늘 갈등이 있었고, 가정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옆에서 볼 때 어머니만 교회 안나가면 가정이 편안할 텐데, 왜 교회 나가셔 가지고 가정불화를 일으키실까? 그래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도 싫고, 교회도 싫고, 교인들도 보기 싫고, 하나님도 다 싫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셨고, 나를 부르시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 20일 금식- 주님의 사랑을 경험함.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역사하는 큰 힘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인간의 의지(본성적으로 복음을 거부함) 2. 마귀의 의지(구원활동을 방해함) 3. 하나님의 의지(성령을 보내어 생명을 불어 넣으심)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승리하게 될까요 ? 가장 강한 분이 승리할 것입니다. 누가 가장강합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17세기의 퓨리탄인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의 전차를 타고 정복하신다… 그는 마음의 교만을 꺾으시고, 그의 은혜에 굴복하게 하신다. 그는 돌 같이 굳은 마음을 변하시켜 눈물을 흘리게 하신다. 아, 얼마나 강력한 부르심인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항복할 수밖에 없도다.
3.결론 구원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가장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1) 전적타락에 나타난 은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은혜로 살리셨도다."(엡 2:1)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405장 1-2절 가사 해설 (2) 무조건적 선택에 나타난 은혜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인데,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였는데,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였는데, 아무런 조건 없이 죽어 마땅 할 죄인을 조건없이 사랑하여 구원해 주신 은혜가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410장 1절 206장1절 (3) 제한적 구속을 통해서 나타난 은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선택하여 구속해 주신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무엇이간데 그 많은 사람가운데서 특별히 나를 택하여 구속하여 주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은혜입니다. (4) 불가항력적 교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은혜 우리의 본성은 악하여서 하나님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속해 주시니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410장3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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