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경우와 그 양상
제롬 역시 바울의 디도서를 주석하면서 위와 같은 사실과 어긋나지 않는 말을 했다. 즉, "장로들의 협의와 합의에 의하여 교회들은 다스려져 왔었다. 종교에 있어서 어느 특정 개인들에게 집착하는 것은 마귀의 짓이다. 그런데 각 사람이 자신이 세례 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한 이후 장로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있게 하였고, 이 한 장로에게 교회 전체의 돌봄을 맡겨야 했고 모든 분열의 씨앗을 제거하는 제도가 나왔다".
그러나 제롬은 이 규정을 신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즉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기 때문이다. "장로들은 교회의 관례로부터 자신들이 자신들 위에 세워진 장로에게 순복할 것을 알았듯이 감독들은 자신들이 장로들 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주님이 정해 주신 진리로부터라기보다도 교회의 관례로부터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관례보다는 진리에 입각해서 감독들은 장로들과 더불어 교회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롬이 말한 것은 이 정도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지녔던 고대 헌장으로 돌아가야 하고 인간의 관습이 생기기 이전의 내용에 호소하고 의존해야 한다.
교역자들의 의무들
교역자들의 의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대체로 두 가지에 국한하는데 이 두 가지 속에 나머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 두 가지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과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을 집행하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배를 위하여 회중을 모으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고, 이 말씀의 모든 가르침을 교회를 돌보며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일에 적용함으로 선포된 말씀이 듣는 자들에게 유익을 주게 하고 믿는 자들을 세우는 것이 바로 교역자들이 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역자는 복음과 성경에 무식한 사람을 가르쳐야 하고 권고해야 하고, 게으른 자들과 망설이는 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계속 따르도록 강권해야 한다. 우리 생각엔 이것 역시 교역자의 의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뿐만 아니라 교역자들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하고, 사탄의 여러 가지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이들을 무장시켜야 하고, 범법자들을 견책하고, 과오에 빠져 있는 자들을 올바른 길로 불러내고,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주고, 주님의 양무리로부터 이리를 쫓아내도록 힘쓰고, 사악과 사악한 자들을 지혜롭고도 엄격하게 질책해야 하고, 큰 사악에게 눈짓을 해서도 안 되고 이 큰 사악을 묵과해서도 안 된다. 이것 이외에도 그들은 성례전을 베풀어야 하고 이 성례전을 옳게 사용하도록 가르쳐야 하고 건전한 가르침에 의하여 준비시킴으로 이 성례전을 받게 해야 하고, 신자들의 거룩한 일치를 보존해야 하고 분열을 막아야 하고 복음과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고,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하고 병든 자들과 여러 가지 시험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심방하고 가르치고 생명의 길로 계속 인도해야 한다. 이것에 이어 교역자들은 어려운 일에 처할 때마다 공동체적 금식을 실천하면서 공동체적 기도모임에 참여하고, 교회들의 안정과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그러나 교역자가 이 모든 일들을 더 잘 수행하고 더 쉽게 수행하기 위하여 그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고 영적 서적을 열심히 읽어야 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고 항상 정신차려야 하고 순결한 삶을 삶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어야 한다.
치리(권징)
치리(治理)란 교회 안에 꼭 있어야 한다. 교부들의 시대에도 파문(출교)이 실천된 적이 있다. 그리고 교회적인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곤 하였다. 이 경우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들이 치리를 행사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역자들은 상황(시대성, 사회성, 필요성)에 따라 교회의 건덕을 위한 치리를 행사해야 한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적절히 행하고 영예롭게 행하되 억압과 다툼은 피해야 한다는 법칙을 우리는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의 증언에 의한즉 주님께서 자기에게 교회의 권위를 주신 목적은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함은 아니기 때문이며,54) 또한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아 버릴까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악한 교역자의 말까지도 들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도나티스트주의자들의 오류를 몹시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례전에 대한 가르침과 집례가 교역자들의 삶의 좋고 나쁨에 따라 효력이 있기도 하고 효력이 없기도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55) 주님께서 "(마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사악한 교역자들이 입을 통해서 나오더라도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을 안다. 성례전이란 그리스도의 제정의 말씀에 의하여 성화되기 때문에 비록 합당치 못한 교역자들이 그것을 베풀더라도 믿는 성도들에게 효력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축복 받은 종 어거스틴이 성경에 근거하여 여러 차례 도나티스트들을 반박하였다.
노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역자들을 위해서도 적절한 치리가 있어야 한다. 노회들은 교역자들의 가르침과 삶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교정될 만한 범법자들은 장로들에 의하여 견책 받아야 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되어야 한다. 만약 교정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추방되어야 한다. 마치 참 목자들이 주님의 양무리로부터 이리들을 추방하듯이, 왜냐하면 이들이 거짓 선생들일 경우 결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일들을 위해서 세계 교회의 모든 교회들의 회의들이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교회의 파괴가 아니라 교회의 번영을 위해서 회집한다면 우리는 이 종교회의들을 인정해야 한다.
일꾼은 일의 대가를 지불 받아야 한다.
모든 신실한 교역자들은 선한 일꾼들로서 자신들의 일의 대가를 받아 마땅하다. 교역자들이 봉급 혹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받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과56) 디모데 전서 5장과57) 그 외의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것을 교회가 주고 교역자가 받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세례파58)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짓을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교역활동을 통해서 먹고 사는 교역자들을 정죄하였고 비방하였기 때문이다.
19장.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례전들에 관하여
말씀에 첨가물이 성례전인바 그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말씀의 설교에 성례전들(세례/성만찬)과 성례전적 징표들을 첨가하셨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례전들이란 신비적인 상징들, 거룩한 의식, 혹은 신성한 행동인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 구성요소는 그의 말씀과 징표들, 그리고 이 징표의 대상들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가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엄청난 은혜들을 이 교회 안에서 성례전에 의하여 기억나게 하시고 그의 약속들을 인치시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내적으로 수행하시는 일들을 외적으로 표현하고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성례전들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성령역사를 일으킴으로 우리의 신앙을 자라가게(강화) 하신다. 끝으로 하나님은 이 성례에 의하여 우리들을 모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종교들로부터 구별하고 우리들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헌신하게 하시고 결속하게 하시고 그의 요구를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구약의 예식도 있고 신약의 예식도 있다.
어떤 성례전은 구약백성에게 해당되고 어떤 성례전은 신약백성에게 속한다. 즉 할례와59) 제물을 바쳐지는 유월절60) 양은 구약의 성례전이다. 이 때문에 이것은 세상 처음부터 실시되어 온 희생제물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백성의 성례전의 수
오늘날 성례전은 세례와 성만찬이다. 어떤 이들은 새 백성의 성례전이 일곱 가지라고 주장한다.(로마 카톨릭) 이들 중에서 우리는 회개와 교역자의 안수와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유익한 것인 줄 인정하나 결코 이것들이 성례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견신례(confirm!ation)와61) 종유(extreme unction)62)는 인간적인 날조로서 이것을 제거해 버려도 교회는 손상을 입지 않는다. 사실 역사적 장로교회들은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우리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성례전을 베풀 때에 시행하는 모든 상행위(商行爲)를 싫어한다.
성례전의 창지시
성례전들의 창시자는 어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들은 성례전들을 제정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하나님 예배에 관한 것이요, 이 하나님 예배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을 인간이 수용하여 보존할 뿐이기 때문이다.63) 뿐만 아니라 상징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동반하는 바 이 약속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그런데 신앙이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서류나 편지와도 같고 성례전들은 도장과도 같아서 하나님께서는 서류나 편지에 도장을 찍으신다.
그리스도는 아직도 성례전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례전의 창시자이기 때문에 이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례되는 교회 안에서 계속 역사하신다. 따라서 신도들은 이 성례전을 교역자들로부터 받을 때 하나님께서 이 제도 가운데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성례를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다. 이 경우 교역자의 허물이 있다 해도(그것이 대단히 큰 허물이라도) 그것은 결코 성례전의 효력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이 성례전의 온전성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제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성례전의 창시자와 성례전을 집례하는 교역자는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성도들은 성례전의 집례에 참여 할 때 주님 자신과 주님의 교역자들을 분명히 구별하면서 주님의 교역자들에게서는 외적인 표징을 받고 주님께로부터는 성례전의 본질을 받는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성례전의 본질 혹은 알맹이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성례전을 통하여 약속하시는 바 알맹이는 그리스도 구주이시다. 이것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의 주된 관심사인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례전의 본질이라 부르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례전의 알맹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구주이신 그리스도는 유일무이한 희생제물로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시작할 때부터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우리의 선조들이 그것으로부터 생수를 마셨던 반석이요, 모든 선민이 이분에 의하여 성령을 통하여 손 없이 할례를 받았고 모든 죄에서 씻김을 받았고 그의 참 몸과 피에 의하여 양육을 받아 영생에 이른다.
옛 백성과 새 백성의 성례전의 차이점
성례전의 주된 알맹이 혹은 그 본질에 관하여는 두 백성의 성례전들이 동등하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유일한 중보자요 구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두 백성의 성례전의 주된 알맹이요,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하나님이 두 백성의 성례전의 창시자이기 때문이다. 이 두 백성에게 주어진 성례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인치기 위한 표시와 징표의 역할을 한다. 이 성례전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생각나게 하며 이 은혜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고 신자들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로부터 구별한다.
끝으로 우리는 이 성례전을 신앙에 의하여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이것을 받는 우리는 교회의 결속되고 이것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명령받는다. 이런 점에서 그리고 이와 비슷한 점에서 두 백성의 성례전은 외향적인 표시와 표징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표시에 있어서는 구별해야 한다. 우리의 것은 더 견고하고 더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까지 그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은 본질과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완성되었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성취될 것을 가르쳤다. 이제 우리의 것이 더 간단하고 덜 복잡하고 덜 사치스럽고 덜 의식에 치우쳐 있다. 또한 우리의 것은 더 많은 사람들, 즉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속한다. 우리의 것이 보다 더 탁월하다. 그것은 성령에 의하여 더 큰 신앙을 불붙인다. 따라서 성령의 더 큰 풍요가 있다.
우리의 성례전은 폐기된 구약의 것을 잇고 있다.
참 메시야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나타나셨고 풍성한 은혜가 신약의 백성들에게 부은바 되었기 때문에 옛 백성의 성례전은 폐기되었고 중단되었다. 그 대신 신약의 상징들이 주어진 것이다. 즉, 할례 대신에 세례가, 그리고 유월절 양과 희생제사들 대신에 주의 성만찬이 주어졌다.
성례전의 구성요소
성례전의 구성요소는 구약에 있어서나 신약에 있어서나 3가지이다. 즉, 말씀과 표징과 표징의 대상이다. 전에는 성례전이 아니었던 것을 성례전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례전의 봉헌(하나님께 드려짐)
성례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드려진다. 여기에서 이 성례전을 제정하신 분이 그것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무엇을 성화시켜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일상적인 사용에서 구별하여 거룩한 사용을 위하여 정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성례전을 위해서 사용되는 표징들은 일상적인 것 혹은 외적이고 가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세례에 있어서 표징은 물이다. 교역자는 이 물을 가지고 가시적 씻음을 표시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이란 중생(거듭남)이요, 죄로부터 씻음이다.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있어서 외적인 표징은 떡과 포도주이다. 이 떡과 포도주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은 우리를 위해서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를 위하여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이다. 이는 주님의 몸과 피를 실제로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물과 떡과 포도주는 전적으로 일상적인 것인데, 하나님의 제정과 봉헌에 의해서 성례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역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성례전에 첨가할 때 처음 있었던 주님의 제정하심과 봉헌하심이 다시 새롭게 재현되면서 이 표징들이 봉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화되는 것이 증명된다.
그도 그럴 것이 성례전을 처음 제정하셨고 처음 봉헌하신 이 주님의 성례전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항상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결과 주님께서 최초로 제정하신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례전을 집례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도 바로 저 최초의 봉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례전을 베풀 때에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가 반복되는 것이다.
성례전의 연합
표징들이 대상 혹은 내용의 이름을 갖게 되는 이유는 이 표징들이 거룩한 대상 혹은 내용의 신비스러운 표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표징들이 대상과 연합하는 것은 신비적인 의미 때문이요, 성례전을 제정하신 분의 목적과 뜻 때문이다. 물과 떡과 포도주는 보통의 표징들이 아니라 거룩한 표징들인 것이다. 세례를 위해서 물을 제정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이 세례 받을 때 단순히 물 뿌림을 받아야 하는 뜻과 의도에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만찬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도 단순히 집에서 먹는 떡과 포도주처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신비로움이 있다. 즉 신자들은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에 영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신앙에 의해서 죄 씻음을 받게 되고, 그리스도와 실제적으로 연합하게 된다.
이단들
그러므로 성례전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어떤 특성들과 공식에 의한 것이라고 하든가, 거룩케 되었거나 거룩케 하려는 사람에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든가, 그리스도나 사도들의 말씀과 모범으로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이 아닌 그 어떤 우연한 것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성례전을 성화되었고 효과적이라고 하지 않고 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교회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는 불가시적인 것 때문에 성례전의 가시적인 측면을 경멸하거나 징표들을 전혀 무시하고 대상이나 내용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멧살리아주의자들을 말한다.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은 결코 성례전 안에 갇혀 있거나 성례전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와 표징의 대상이 표징에 그렇게나 긴밀히 속박되어 있고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표징들에 외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관계없이 이들은 은혜와 표징의 대상에 내적으로 참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교리를 우리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례전의 가치가 교역자의 가치와 무가치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성례전의 가치가 전적으로 신앙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순수한 좋으심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될 경우 단순히 내실 없는 말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요, 말들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이 하나님에 의하여 제공된다면 비록 불신자들이 이 말들만 듣고 이해하되, 그 대상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누릴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고 그냥 하나님의 참 말씀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성례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불신자들이 이 성례전에서 표징의 대상 혹은 내용을 수용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표징과 표징의 대상으로 구성된 성례전이야말로 거록한 대상 혹은 내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빌려 표징의 내용을 제공하는 참되고 침해받을 수 없는 성례전으로 남는다. 잘못이 이 성례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도 없이 불법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코 무효화될 수 없다.64)
성례전의 제정의 목적
성례전의 제정의 목적에 관하여는 이미 본 신앙고백서의 처음에서 성례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또다시 언급하는 일은 번거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제 논리적으로 볼 때 새 백성의 성례전을 하나하나 논하기로 하자.
20장. 거룩한 세례에 관하여
세례의 제정
하나님께서 세례를 제정하셨고 성별하셨다. 처음 세례를 베푼 사람은 요한인데 그는 그리스도를 요단 강물로 적셨다. 그 다음 물로 세례를 베푼 사람들은 사도들이었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세례를 베풀라고 분명히 명령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는 유대인들에게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고 대답하였다. 세례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에 세례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입문의 표징이라고도 불리운다.
한 세례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한번의 세례밖에 없다. 한번 세례받아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 족하다. 한번 받은 세례는 평생토록 그 효력을 지속하는 바 이 세례는 우리의 양자됨을 항상 증거한다.
세례받는다고 하는 것의 의미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과 하나님의 가족에로 등록되고 받아들여지고, 수용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유업을 받는 것이다. 즉 세례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좇아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요, 죄의 오염에서 깨끗함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아 그 결과 허물없는 새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란 하나님께서 죽을 인류에게 보여주신 엄청난 은혜를 생각나게 하고 이를 새롭게 재현시키는 것이다.
우리 인생들은 날 때부터 죄로 오염되어 있고 진노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넘치시기 때문에 그의 아들의 피로써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그냥 깨끗게 하시고, 이 아들 안에서 우리를 양자되게 하시고, 거룩한 언약에 의하여 우리를 자신에게 연합시키시고 우리를 각양 은혜로 풍요케 하심으로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세례에 의하여 확인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내면적으로 중생하고 순결해지고 거듭나게 되고 외면적으로 물로써 엄청난 선물을 확인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물은 엄청난 은혜를 대표하고 사실상 우리 눈앞에 이 은혜를 보도록 제시한다.
우리는 물로써 세례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물로써 씻음을 받고 뿌림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내고 뜨겁고 피곤한 육신을 시원케 하고 소생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데, 이는 보여지지 않는 방식으로 혹은 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세례의 의무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례의 상징을 통해서 모든 낯선 종교들과 모든 불신자들로부터 우리를 구별하시어 자신의 소유로 우리를 구별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시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육신을 죽이고, 새로운 삶을 영위해야 할 의무를 명령받는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평생토록 세상과 사탄과 우리 자신의 육신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병사들로 등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례에 의하여 교회의 한몸에 참여케 되므로 우리는 교회의 모든 회원과 더불어 동일한 종교와 상호 봉사를 아름답게 일치시켜 나갈 수 있다.
세례의 형식
가장 완전한 세례의 형식이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받은 형식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완전한 세례의 형식에 그 후에 첨가된 그 무엇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귀신 쫓아내는 일, 타오르는 등불의 사용, 기름과 소금, 그리고 침의 사용, 복잡한 의식으로 일년에 두 번씩 베풀어지는 세례식 같은 것들이 바로 이런 종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회의 한 세례가 하나님의 최초의 제정에 의하여 성별되었고, 오늘날에도 말씀에 의하여 성별되고 저 하나님의 첫 번째 축복에 의하여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세례 베푸는 교역자
교회 안에서 세례가 베풀어질 때 여자들과 산파들에 의해서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가르친다. 바울이 여자들에게는 교회의 의무를 맡기지 말라고 했는데, 바로 세례는 이 의무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세례파 이단
우리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도들의 유아들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가르침에 의한즉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어린이들의 것이요, 이 어린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을 이들에게 주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자가 거룩한 세례에 의해서 하나님과 교회와 관계 맺기 시작하는 것이 왜 안 될 일인가? 우리는 재세례파의 다른 교리들도 정죄한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세례파 사람들이 아니요, 이들과 전혀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21장. 주님의 거룩한 성찬
주님의 성만찬
주님의 만찬은 보통 만찬(주님의 식탁)이라고 불리어진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의 최후의 저녁식사 때에 이것을 제정하셨고, 아직도 이것은 그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요, 성도들이 이 만찬을 통하여 영적으로 먹고 마시기 때문이다.
성만찬의 창시자와 봉헌자
주님의 만찬의 창시자는 천사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인바 이분이 최초로 이 만찬을 교회를 위하여 구별하셨다. 동일한 구별 혹은 축복이 주님께서 제정하신 만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즉 오늘날 성만찬을 베푸는 사람들은 이 성만찬에서 주님의 만찬의 말씀을 반복하면서 그 무엇보다도 한 그리스도를 참 믿음으로 바라보고 성도들은 교회의 교역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받되 사실상 주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처럼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기념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의식에 의하여 그가 죽을 인류에게 보여 주신 엄청난 은혜를 항상 다시 회상시키시기를 원하신다. 즉, 주님께서 그의 몸을 내어주시고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영원한 죽음과 악마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지금은 그의 살로 우리를 먹이시고 그의 피를 우리에게 주사 마시게 하시는바 우리는 참 믿음으로 이를 받아 영생을 위한 양육을 받는 것이다. 주님의 성만찬이 베풀어질 때마다 이 엄청난 은혜는 항상 다시 새롭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성만찬은 또한 주님의 참 몸이 우리를 위하여 찢겨졌고 그의 참 피가 우리의 죄의 속죄를 위하여 흘려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신다.
표징과 표징의 대상
이것은 교역자들을 통해 이 성만찬에 의하여 가시적으로 표현된다. 사실상 이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우리 앞에 제시되나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불가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교역자가 떡을 외적으로 제공하나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떼어서 나우어 먹으라. 그것을 마시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것은 내 피니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이 들린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의 교역자들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은 주님의 떡을 먹는 것이요, 주님의 잔을 마시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요, 이 양육에 의하여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영생에 이르는 참 음식이요, 그리스도 자신이 이 성만찬의 중심 내용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무엇도 이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어떻게 신자들의 음식과 음료가 되며 신자들에 의하여 영생에 이르는 음식과 음료로 받아들여지는지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더 언급하고자 한다. 먹는 다고 하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음식을 입에 넣고 이로 씹어서 위 속으로 삼켜들이는 물질적 먹음이 있다. 언젠가 과거에 가버나움 사람들 중에는 주님의 살을 이런 식으로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는 요한복음6장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살을 물질적으로 먹으면 그것은 추하고 야만스러운 행동이기에 그것은 결코 위를 위한 음식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에고 베렝가리우스'(봉헌에 관하여/의 2부)라고 하는 교황의 칙령에 들어 있는 법조항을 인정하지 않는다. 옛 성도들이든 오늘 우리들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인 입으로 물질적으로 먹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주님을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
다음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먹는다고 하는 먹음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음식 자체가 영으로 변화하는 그런 영적 먹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몸과 피는 그것의 본질과 특성에 있어서 그대로 남아 있으되, 성령에 의하여 물질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바, 여기에서 성령은 십자가상에서 희생된 주님의 몸과 피의 제사에 의하여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주신 그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베풀어 주신다. 이것은 다름 아닌 죄의 속죄요, 해방이요, 영생인데, 이것의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영적 음식과 음료, 곧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신다.
우리의 음식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지탱시키신다.
물질적인 음식과 음료가 우리의 몸에 생기를 공급하고 힘을 주고 계속 살게 하는 것처럼 우리을 위해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과 우리를 위해서 흘려진 그의 피는 우리의 영혼에 생기를 공급하고 힘을 주고 계속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육체적으로 먹고 마실 때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임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이 우리의 체내에 들어와 작용하고 어떤 효력을 일으키는 것처럼 이 음식이 우리 몸 밖에 있는 한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분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해야 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영적음식
이런한 모든 것을 미루어 볼 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의미하는 영적음식이란 결코 상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주님의 참 몸이라는(실제적인 몸)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들은 이 몸을 신앙에 의하여 영적으로 받는다. 결코 육체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구주 자신의 가르침을 따른다. 즉,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가르치신 가르침이다.65)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먹음
이처럼 주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일은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이 일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영적 먹음과 마심은 주님의 성만찬을 떠나서도 일어난다. 즉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마다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왜 너희들은 너희의 이와 위를 위하여 준비하느냐? 오히려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이미 먹은 것이다"라고 하는 어거스틴의 말이 여기에 적용된다.
주님을 성례전으로 먹는다는 것
고차원적인(신비한) 영적 먹음 이외에 주님의 몸을 성례전적으로 먹는다는 것이 있다. 성도는 이 성례전적 먹음에 의하여 영적으로, 그리고 내면적으로 주님의 실제적인 몸과 피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식탁으로 나옴으로 주님의 몸과 피의 가시적 성례전을 외면적으로 받는 것이다. 신자가 믿었을 때 그는 이미 생명을 주는 음식을 받았고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성만찬을 받을 때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해서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기 때문이요, 그의 신앙이 불붙으며 점점 더 성장하고 영적 음식에 의하여 생기를 얻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신앙은 계속해서 자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만찬을 참 믿음으로 외적으로 받는 사람은 표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 자체를(그리스도) 받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주님의 제정과 계명에 순종하고 자신의 구속과 인류의 구속에 대하여 기쁜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신실하게 기억하고, 그가 한 지체인 교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이다. 주님의 몸이 주어졌고 그의 피가 흘려진 것이 단순히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히 각각의 수찬 자격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성찬을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 수찬 자격자에게 이 성찬은 영생에 이르는 음식이요, 음료이다.
불신자들이 성찬을 받을 때 자신들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주니의 식탁에 나오는 사람은 떡과 포도주에는 참여하되 본질적인 생명과 구원의 근원인 성찬의 본질은 받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식탁에서 합당치 못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의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취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요,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66)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참 신앙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요, 따라서 자신들에 대한 저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긴밀히 연결시킨 나머지 떡 자체가 성례전적 방법 이외의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 자체라고 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이 물질적으로 떡 속에 숨겨져 있으므로 떡의 형태로 그것이 예배되어야 한다거나 이 성찬의 표징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그 대상 혹은 내용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시므로 우리의 마음은 빵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늘을 향하여 올리워져야 하고 주님은 결코 떡 속에 갇혀진 체 예배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성만찬을 베풀 때 주님께서는 그의 교회로부터 부재하는(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태양은 우리를 떠나 있으나 우리들 속에 효과적으로 임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으로 임재하고 계신 것인다. 즉 그리스도는 그의 몸으로는 우리를 떠나 하늘에 계시지만 그의 생명 주시는 역사에 의하여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신다. 주님은 그의 최후의 만찬에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성만찬을 받는 것이 아니요, 동시에 교부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던 피흘림이 없는 신비적 성만찬을 받는 것이다.
성만찬의 다른 목적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가 누구의 지체인가를 생각하고,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한마음을 품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고 사악함과 이상한 종교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더럽히지 말고, 우리의 생이 끝날 때까지 참 믿음을 견지하면서 거룩한 삶을 탁월하게 살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성만찬을 위한 준비
우리들이 성만찬에 동참하기를 원할 때에는 사도의 명령을 따라 다음과 같은 측면들에 관하여 자신들을 검토하는 일이 적합하다. 즉,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오셨고, 이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믿고 있는지, 또는 우리 각자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해방 받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에 속해 있는지, 또는 각자는 자신의 악한 삶을 변경시키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참된 종교 안에서 계속 견디어 나가고 형제들과 조화를 이루고 하나님의 해방에 대하여 합당한 감사를 드리기로 결심하였는지를 살펴야 한다.
떡과 포도주 모두를 사용하는 성만찬
우리는 성만찬의 의식과 방법과 형식이 주님께서 처음 제정하셨고 사도들의 가르침이 말하는 바에 가장 가까운바 단순하고 가장 탁월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성만찬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경건하게 기도하는 것, 주님 자신의 행동, 그리고 이 행동의 반복, 주님의 몸을 먹는 것과, 그의 피를 마시는 것, 주님의 죽음을 적합하게 기억하는 일, 신실하게 감사올리는 일, 거룩한 사귐으로 교회의 몸과 일치하는 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들에게 주님의 잔을 주지 않는 것을 거부한다. 이는 주님의 제정을 어기는 일이다. 주님은 "이것을 다 마시라"고 하셨는데 떡에 대하여는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용납하든가 말든가는 논하지 말고 교부시대에 어떤 종류의 성찬이 있었는지 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 두자. 즉, 현재 로마 카톨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미사는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 거부하고 있다. 건전한 행동을 공허한 구경거리로 만들고 공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고 어떤 보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것을 우리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사제가 미사에서 주님의 참 몸을 만들어 그것을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속죄를 위하여, 그리고 이어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영예와 존경과 기억을 위하여 제물로 바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22. 교회의 집회에 관하여
예배를 위한 모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누구나가 집에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고 피차간에 교훈을 통해서 참된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 모이는 일이나 종교적 집회가 꼭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절히 설교되어야 하고, 기도와 간구가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성례전이 옳게 베풀어져야 하고, 가난한 자들과 교회의 경비를 위해서 헌금이 모아져야 하고, 사회적 사귐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시대의 초대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모임이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 의하여 부단히 회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예배를 위한 모임들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모임들을 무시해 버리고 그와 같은 모임을 멀리하는 사람은 참 종교를 경멸하는 사람들이다. 목사들과 신앙이 있는 관원들은 이들을 권고하여 그와 같은 모임에 참석하도록 권고해야 할 것이다.
모임들은 공적이다.
교회의 모임들은 비밀리에 회집되거나 은밀히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원수들과 교회의 원수들이 박해하는 이유로 교회의 모임들이 공적이 되지 못한 것을 예외로 한다면 교회의 모임들은 항상 공개적이 되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이라도 출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로마제국의 황제의 폭군정치 치하에서 초대교회의 집회가 어떻게 비밀한 장소에서 일어났는가를 알고 있다.
품위 있는 집회장소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는 품위가 있어야 하고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적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넓은 건물이나 장소를 택하되 교회를 위해서 적합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모든 내부장치는 단정하고 품위 있게 배열되어야 하고 꼭 필요한 것을 적합한 장소에 놓아야 한다. 예배와 교회의 꼭 필요한 기능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꼭 있게 해야 한다.
교회의 모임들에서 우리는 정숙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 안에 거하시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서 헌납된 장소들이 속된 것이 아니요,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요, 그 장소들이 거룩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장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존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의 현존과 더불어 거룩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점잖고 정숙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교회당 본당이 갖춰야 할 참된 장식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본당과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하는 장소로부터 모든 사치스러운 치장들과 모든 교만과 기독교적 겸손과 훈련과 절제에 적합지 않은 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의 참된 장식은 상아나 금.은 보석으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검소함과 경건함과 덕망으로 꾸며지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일들은 적절하고 정중하게, 그리고 질서 있게 처리되어야 하며 모든 일들이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예배
그러므로 예배를 위한 집회에서 우리는 이상한 방언들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예배시의 모든 일은 이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수행되어야 한다.
23장. 교회의 기도와 찬송과 교회 법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관하여
기도
성도들의 모든 기도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는데 오직 그리스도를 중보로 해야 한다. 즉 주님이 제사장직을 갖는 것이 참 종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있는 성자(聖者)에 대한 기도나 이들을 중보자로 생각하는 것을 금한다. 우리는 국가의 공직자들과 왕들, 그리고 권위의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교회의 교역자들과 교회들의 모든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특히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위하여 우리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기도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억지로 기도하거나 보상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장소에서만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적이라서 합당치 않다. 마치 교회의 본당만이 기도의 처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공중기도의 경우, 그것의 형식과 시간에 관하여 모든 교회들에 있어서 꼭 같을 필요는 없다. 각 교회는 이에 관하여 자유롭다.
공중기도에서 사용되어야 할 방법
다른 일들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공중기도에 있어서도 그것이 쓸데없이 길어지거나 지루해지지 않도록 어떤 표준이 있어야 한다. 예배를 위한 집회의 보다 큰 부분을 우리는 복음 설교를 위해서 할애해야 하고, 누가 기도를 너무 길게 함으로 설교말씀을 들을 즈음에는 지루해서 회중을 떠나 설교말씀과 관계가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처럼 기도가 길어질 경우, 짧은 설교말씀도 길고 지루한 설교말씀처럼 들린다. 이런 이유에서 설교자는 일정한 표준을 가져야 한다.
찬송
예배를 위한 집회에서 찬송을 부를 때에도 공중기도 때나 마찬가지로 절제가 필요하다. 로마 카톨릭이 사용하는 그레고리안 찬트에는67) 여러 가지 어리석은 것들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개신교들이 이것을 거절하는데, 이것은 옳은 일이다. 어떤 교회들이 참되고 정당한 설교는 갖고 있으나 찬송은 갖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이러한 교회들을 정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들이 찬송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송의 역사는 교부들의 증거에 의하면 찬송의 관습이 동방 교회에서 먼저 행했고, 서방 교회에서는 후에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법에 의한 시간
교부시대에는 교회법에 의한 기도 시간이 없었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들을 정해 놓고 기도한다든지, 교황주의자들처럼 기도를 노래로 올리거나 암송으로 올리는 일이 교부시대에는 없었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의 성무일과서(聖務日課書)나 여러 다른 문서들을 통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들이 지닌 모순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회가 그와 같은 것을 제거시킨 것은 옳은 일이다. 교회는 이러한 것들 대신에 하나님의 전교회에 유익한 것들로 대치시켰다.
24장. 거룩한 날들과 금식들과 음식들의 선택에 관하여
예배를 위해서 꼭 필요한 시간
종교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를 배양시키고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시간의 적절한 배열과 조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공중기도와 복음의 설교와 성례전의 집례를 위해서 적당한 시간을 선택한다. 아무도 교회가 정한 시간들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다. 종교생활을 위해서 시간과 힘을 할애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틀림없이 종교로부터 거리가 멀어지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말 것이다.
주일
고대 교회는 교회의 집회를 위하여 주 중 일정한 시간들을 정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시대 이래 주일이 교회의 집회일로 확정되었으니, 이 주일은 거룩한 안식을 위한 것으로 예배와 사랑을 위하여 오늘날까지 옳게 보존된 교회의 실천적 관습이다.
미신
이에 관련하여 우리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과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나머지 날들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날들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자(聖者)들의 절기들
만약 교회들이 기독교적 자유 안에서 주님의 탄생과 할례와 고난과 부활과 그 승천과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일을 기억함으로 축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즉 교리의 바른 내용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절기로 표현하거나 또는 사람들과 성자들을 숭상하기 위한 절기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룩한 날들은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관계된 것으로 오직 하나님을 위한 날들인 것이다. 결국 절기와 성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날들을 우리는 이미 없애버렸는바 이날들은 모순투성이요,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설교를 통하여 성자(선조들)의 회상을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 유익하고, 이 성자들의 모범된 삶을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한다.
금식
그리스도의 교회는 포식과 술취함과 모든 종류의 탐욕과 무절제를 심하게 정죄하느니만큼 기독교적 금식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강하게 권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금식이란 경건한 신앙인들의 금욕과 절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 육신의 돌봄과 징벌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꼭 필요한 일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육체는 그 연료를 빼앗기므로 더 자발적이고도 쉽게 성령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일에 관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금식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 정도 위장을 채우고 일정한 시간에 음식을 멀리하는 것으로 금식한다고 생각하고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선한 일을 성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는 성도들은 금식함으로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고 덕목을 잘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서들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듯이 음식은 멀리하나 악행을 멀리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공적인 금식과 개인적인 금식
금식에는 공적인 것이 있고 사적인 것이 있다. 교회가 박해와 환난과 역경 속에 있었던 고대 기독교 역사에는 공적인 금식들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금시하되 이 시간동안에 기도에 몰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회개에 힘쓴다. 이것은 애통함이나 다름없다. 이에 관하여 예언자들, 특히 요엘(2장)이 자주 언급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금식은 교회가 곤궁에 처할 경우, 오늘날에도 행해져야 한다. 한편 우리 각자는 성령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개인적인 금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우리 각자는 육체로부터 그 연료를 제거시키기 때문이다.
금식의 특징들
모든 금식은 자유롭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행해져야 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행해져야 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호의를 얻기 위해서 금식이 행해져서는 안 되고, 금식함으로 의를 세우려는 의도는 더더욱 금물이다. 육체로부터 연료를 제거함으로 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에 전념하려는 것이 금식의 목적이어야 한다.
사순절(四旬節)
사순절 때의 금식에 관하여는 고대 교부들의 글들이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금식을 성도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이미 초기에도 변질된 금식의 여러 형태와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 교부인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떤 이는 하루만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이틀을, 어떤 이는 그 이상 혹은 40일간을 금식하라고 말한다. 금식에 대한 이러한 다양성은 우리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 시대 이전에 생겼다. 내(이레니우스) 추측으로는 이것이(사순절 금식) 사도시대로부터 전승된 것(금식)을 무시하고 또한 소홀히 여기거나 무식함 때문에 다른 습관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단편집) 3, Ⅰ, 824이하>.
음식의 선택
음식의 선택에 관하여 알아보자. 육체의 욕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육체를 무모하게 하거나 육체를 즐겁게 하는 음식은 무엇이나 삼가야 한다(술, 담배, 마약 등). 그것이 고기든지 양념이든지 훌륭한 포도주이든지 간에 우리는 삼가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사용할 수 있고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절제하는 가운데에 이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다.68)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 역시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고 하며, "(고전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도 한다.
또한 사도는 고기를 먹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가리켜 '악마의 가르침'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딤전4: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는 골로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나친 금욕으로 거룩하다는 평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꾸짖고 있다.69)
이단들
그러므로 우리는 타티안주의자들과 엔크라티스주의자들, 유스타티우스주의자들을 모두 정죄한다. 강그리아 종교회의가 열린 것은 이들의 가르침을 반대하기 위해서 였다.
25장. 세례받을 사람의 교육과 환자의 위로와 심방에 관하여
청소년들을 경건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청소년교육은 유아교육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주님은 그의 옛 백성에게 명령하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구약에서 청소년 교육을 교육해야 하고 성례전의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글에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새 백성의 청소년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막10: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는 말씀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교회의 목사들이 현명하게 목회를 하려면 청소년교육을 일찍이 시작해야 한다. 즉, 목사들은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전에 대한 교리 등을 해석해 줌으로 신앙의 기초를 마련해 주어야 하고 기독교 종교의 기본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믿는 성도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일에 신실함과 근면함을 보여야 하고 자녀교육을 열망할 뿐만 아니라 기뻐해야 할 것이다.
병든자의 심방
사람이 허약함에 시달리고 병들고 영과 육의 병으로 쇠약해질 때 극심한 시험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사들은 교인들이 허약해지고 병들어 누어 있는 상태에 있기 전에 그의 양떼들의 건강을 잘 돌보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사정이 허락하는 한 목사들은 환자들을 속히 심방해야 하고 적절한 때에 환자의 심방을 요구받아야 한다. 목사들은 환자들이 참된 신앙을 계속 유지하도록 위로해야 하고 확신시켜야 한다.
그리고 사탄의 위험한 흉계에 넘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목사들은 필요할 경우, 자신의 집에서도 환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교회의 공적인 집회에서도 환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목사들은 중환자의 경우, 이 세상을 떠날 때 기쁨으로 떠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교황주의자들이 환자를 방문하여 베푸는 종유성사(終油聖事)를70)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이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26장. 믿는 자의 매장과 죽은 자들에 대한 배려와 연옥과 영들의 현현에 대하여
시신의 매장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의 시신이 최후의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 성경의 명령에 의한즉 성도의 시신들은 존중하는 마음으로 땅에 묻되 미신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71) 즉 미망인과 이미 잠든 성도들을 우리는 존중히 여겨야 하고, 유가족들인 미망인과 고아를 위해서 가정적인 모든 경건의 의무들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물론 죽은 자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시신을 무시하거나 부주의하고, 경멸적으로 그것을 땅 속에 묻어 버릴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 관하여 좋은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들의 유족들에 대하여 조금도 관심하지 않는 냉소학파(the Cynics)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에 대한 관심
죽은 자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그리고 터무니없이 관심을 쏟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처럼 죽은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통곡하며,72) 죽은 자들을 위하여 미사(예배)를 올리고 삯을 받고 기도문을 중얼거림으로 사랑하는 죽은 영혼들을 연옥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몸을 떠난 영혼의 상태
우리는 성도들이 육체적인 죽음 직후에 직접 그리스도에게로 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올릴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직접 지옥으로 던지움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위하여 어떠한 예배를 올려도 이들은 이 지옥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연옥
연옥에 관한 로마 카톨릭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 즉, '죄의 용서와 영생을 내가 믿습니다'와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씻음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에 위배된다.
영들의 나타남
죽은 사람들의 영 혹은 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서 어떤 의무 수행을 요구함으로 이 의무수행에 의하여 자신들이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요, 악마의 속임수와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73) 악마는 자신을 빛의 천사로 둔갑시킴으로 참 신앙을 뒤집어엎거나 회의로 바꾸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구약에서 주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진리를 찾지 말라고 하셨고, 죽은 자들의 영과 어떤 교제도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74) 복음서의 진리가 선포하듯이 지옥에 있는 부자는 결코 그이 형제에게로 갈 수 없다.75)
제롬 역시 바울의 디도서를 주석하면서 위와 같은 사실과 어긋나지 않는 말을 했다. 즉, "장로들의 협의와 합의에 의하여 교회들은 다스려져 왔었다. 종교에 있어서 어느 특정 개인들에게 집착하는 것은 마귀의 짓이다. 그런데 각 사람이 자신이 세례 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한 이후 장로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있게 하였고, 이 한 장로에게 교회 전체의 돌봄을 맡겨야 했고 모든 분열의 씨앗을 제거하는 제도가 나왔다".
그러나 제롬은 이 규정을 신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즉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기 때문이다. "장로들은 교회의 관례로부터 자신들이 자신들 위에 세워진 장로에게 순복할 것을 알았듯이 감독들은 자신들이 장로들 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주님이 정해 주신 진리로부터라기보다도 교회의 관례로부터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관례보다는 진리에 입각해서 감독들은 장로들과 더불어 교회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제롬이 말한 것은 이 정도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지녔던 고대 헌장으로 돌아가야 하고 인간의 관습이 생기기 이전의 내용에 호소하고 의존해야 한다.
교역자들의 의무들
교역자들의 의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대체로 두 가지에 국한하는데 이 두 가지 속에 나머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 두 가지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과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을 집행하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배를 위하여 회중을 모으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고, 이 말씀의 모든 가르침을 교회를 돌보며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일에 적용함으로 선포된 말씀이 듣는 자들에게 유익을 주게 하고 믿는 자들을 세우는 것이 바로 교역자들이 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역자는 복음과 성경에 무식한 사람을 가르쳐야 하고 권고해야 하고, 게으른 자들과 망설이는 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계속 따르도록 강권해야 한다. 우리 생각엔 이것 역시 교역자의 의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뿐만 아니라 교역자들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하고, 사탄의 여러 가지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이들을 무장시켜야 하고, 범법자들을 견책하고, 과오에 빠져 있는 자들을 올바른 길로 불러내고,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주고, 주님의 양무리로부터 이리를 쫓아내도록 힘쓰고, 사악과 사악한 자들을 지혜롭고도 엄격하게 질책해야 하고, 큰 사악에게 눈짓을 해서도 안 되고 이 큰 사악을 묵과해서도 안 된다. 이것 이외에도 그들은 성례전을 베풀어야 하고 이 성례전을 옳게 사용하도록 가르쳐야 하고 건전한 가르침에 의하여 준비시킴으로 이 성례전을 받게 해야 하고, 신자들의 거룩한 일치를 보존해야 하고 분열을 막아야 하고 복음과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고,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하고 병든 자들과 여러 가지 시험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심방하고 가르치고 생명의 길로 계속 인도해야 한다. 이것에 이어 교역자들은 어려운 일에 처할 때마다 공동체적 금식을 실천하면서 공동체적 기도모임에 참여하고, 교회들의 안정과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그러나 교역자가 이 모든 일들을 더 잘 수행하고 더 쉽게 수행하기 위하여 그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고 영적 서적을 열심히 읽어야 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고 항상 정신차려야 하고 순결한 삶을 삶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어야 한다.
치리(권징)
치리(治理)란 교회 안에 꼭 있어야 한다. 교부들의 시대에도 파문(출교)이 실천된 적이 있다. 그리고 교회적인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곤 하였다. 이 경우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들이 치리를 행사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역자들은 상황(시대성, 사회성, 필요성)에 따라 교회의 건덕을 위한 치리를 행사해야 한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적절히 행하고 영예롭게 행하되 억압과 다툼은 피해야 한다는 법칙을 우리는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의 증언에 의한즉 주님께서 자기에게 교회의 권위를 주신 목적은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함은 아니기 때문이며,54) 또한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아 버릴까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악한 교역자의 말까지도 들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도나티스트주의자들의 오류를 몹시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례전에 대한 가르침과 집례가 교역자들의 삶의 좋고 나쁨에 따라 효력이 있기도 하고 효력이 없기도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55) 주님께서 "(마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사악한 교역자들이 입을 통해서 나오더라도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을 안다. 성례전이란 그리스도의 제정의 말씀에 의하여 성화되기 때문에 비록 합당치 못한 교역자들이 그것을 베풀더라도 믿는 성도들에게 효력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축복 받은 종 어거스틴이 성경에 근거하여 여러 차례 도나티스트들을 반박하였다.
노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역자들을 위해서도 적절한 치리가 있어야 한다. 노회들은 교역자들의 가르침과 삶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교정될 만한 범법자들은 장로들에 의하여 견책 받아야 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되어야 한다. 만약 교정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추방되어야 한다. 마치 참 목자들이 주님의 양무리로부터 이리들을 추방하듯이, 왜냐하면 이들이 거짓 선생들일 경우 결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일들을 위해서 세계 교회의 모든 교회들의 회의들이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교회의 파괴가 아니라 교회의 번영을 위해서 회집한다면 우리는 이 종교회의들을 인정해야 한다.
일꾼은 일의 대가를 지불 받아야 한다.
모든 신실한 교역자들은 선한 일꾼들로서 자신들의 일의 대가를 받아 마땅하다. 교역자들이 봉급 혹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받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과56) 디모데 전서 5장과57) 그 외의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것을 교회가 주고 교역자가 받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세례파58)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짓을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교역활동을 통해서 먹고 사는 교역자들을 정죄하였고 비방하였기 때문이다.
19장.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례전들에 관하여
말씀에 첨가물이 성례전인바 그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말씀의 설교에 성례전들(세례/성만찬)과 성례전적 징표들을 첨가하셨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례전들이란 신비적인 상징들, 거룩한 의식, 혹은 신성한 행동인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 구성요소는 그의 말씀과 징표들, 그리고 이 징표의 대상들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가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엄청난 은혜들을 이 교회 안에서 성례전에 의하여 기억나게 하시고 그의 약속들을 인치시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내적으로 수행하시는 일들을 외적으로 표현하고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성례전들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성령역사를 일으킴으로 우리의 신앙을 자라가게(강화) 하신다. 끝으로 하나님은 이 성례에 의하여 우리들을 모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종교들로부터 구별하고 우리들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헌신하게 하시고 결속하게 하시고 그의 요구를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구약의 예식도 있고 신약의 예식도 있다.
어떤 성례전은 구약백성에게 해당되고 어떤 성례전은 신약백성에게 속한다. 즉 할례와59) 제물을 바쳐지는 유월절60) 양은 구약의 성례전이다. 이 때문에 이것은 세상 처음부터 실시되어 온 희생제물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백성의 성례전의 수
오늘날 성례전은 세례와 성만찬이다. 어떤 이들은 새 백성의 성례전이 일곱 가지라고 주장한다.(로마 카톨릭) 이들 중에서 우리는 회개와 교역자의 안수와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유익한 것인 줄 인정하나 결코 이것들이 성례전은 아니라는 것이다. 견신례(confirm!ation)와61) 종유(extreme unction)62)는 인간적인 날조로서 이것을 제거해 버려도 교회는 손상을 입지 않는다. 사실 역사적 장로교회들은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우리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성례전을 베풀 때에 시행하는 모든 상행위(商行爲)를 싫어한다.
성례전의 창지시
성례전들의 창시자는 어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들은 성례전들을 제정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하나님 예배에 관한 것이요, 이 하나님 예배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을 인간이 수용하여 보존할 뿐이기 때문이다.63) 뿐만 아니라 상징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동반하는 바 이 약속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그런데 신앙이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서류나 편지와도 같고 성례전들은 도장과도 같아서 하나님께서는 서류나 편지에 도장을 찍으신다.
그리스도는 아직도 성례전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례전의 창시자이기 때문에 이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례되는 교회 안에서 계속 역사하신다. 따라서 신도들은 이 성례전을 교역자들로부터 받을 때 하나님께서 이 제도 가운데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성례를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다. 이 경우 교역자의 허물이 있다 해도(그것이 대단히 큰 허물이라도) 그것은 결코 성례전의 효력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이 성례전의 온전성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제정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성례전의 창시자와 성례전을 집례하는 교역자는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성도들은 성례전의 집례에 참여 할 때 주님 자신과 주님의 교역자들을 분명히 구별하면서 주님의 교역자들에게서는 외적인 표징을 받고 주님께로부터는 성례전의 본질을 받는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성례전의 본질 혹은 알맹이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성례전을 통하여 약속하시는 바 알맹이는 그리스도 구주이시다. 이것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의 주된 관심사인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례전의 본질이라 부르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성례전의 알맹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구주이신 그리스도는 유일무이한 희생제물로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시작할 때부터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우리의 선조들이 그것으로부터 생수를 마셨던 반석이요, 모든 선민이 이분에 의하여 성령을 통하여 손 없이 할례를 받았고 모든 죄에서 씻김을 받았고 그의 참 몸과 피에 의하여 양육을 받아 영생에 이른다.
옛 백성과 새 백성의 성례전의 차이점
성례전의 주된 알맹이 혹은 그 본질에 관하여는 두 백성의 성례전들이 동등하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유일한 중보자요 구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두 백성의 성례전의 주된 알맹이요,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하나님이 두 백성의 성례전의 창시자이기 때문이다. 이 두 백성에게 주어진 성례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인치기 위한 표시와 징표의 역할을 한다. 이 성례전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생각나게 하며 이 은혜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고 신자들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로부터 구별한다.
끝으로 우리는 이 성례전을 신앙에 의하여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이것을 받는 우리는 교회의 결속되고 이것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명령받는다. 이런 점에서 그리고 이와 비슷한 점에서 두 백성의 성례전은 외향적인 표시와 표징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표시에 있어서는 구별해야 한다. 우리의 것은 더 견고하고 더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까지 그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은 본질과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완성되었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성취될 것을 가르쳤다. 이제 우리의 것이 더 간단하고 덜 복잡하고 덜 사치스럽고 덜 의식에 치우쳐 있다. 또한 우리의 것은 더 많은 사람들, 즉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속한다. 우리의 것이 보다 더 탁월하다. 그것은 성령에 의하여 더 큰 신앙을 불붙인다. 따라서 성령의 더 큰 풍요가 있다.
우리의 성례전은 폐기된 구약의 것을 잇고 있다.
참 메시야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나타나셨고 풍성한 은혜가 신약의 백성들에게 부은바 되었기 때문에 옛 백성의 성례전은 폐기되었고 중단되었다. 그 대신 신약의 상징들이 주어진 것이다. 즉, 할례 대신에 세례가, 그리고 유월절 양과 희생제사들 대신에 주의 성만찬이 주어졌다.
성례전의 구성요소
성례전의 구성요소는 구약에 있어서나 신약에 있어서나 3가지이다. 즉, 말씀과 표징과 표징의 대상이다. 전에는 성례전이 아니었던 것을 성례전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례전의 봉헌(하나님께 드려짐)
성례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드려진다. 여기에서 이 성례전을 제정하신 분이 그것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무엇을 성화시켜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일상적인 사용에서 구별하여 거룩한 사용을 위하여 정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성례전을 위해서 사용되는 표징들은 일상적인 것 혹은 외적이고 가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세례에 있어서 표징은 물이다. 교역자는 이 물을 가지고 가시적 씻음을 표시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이란 중생(거듭남)이요, 죄로부터 씻음이다.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있어서 외적인 표징은 떡과 포도주이다. 이 떡과 포도주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부터 취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은 우리를 위해서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를 위하여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이다. 이는 주님의 몸과 피를 실제로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물과 떡과 포도주는 전적으로 일상적인 것인데, 하나님의 제정과 봉헌에 의해서 성례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역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성례전에 첨가할 때 처음 있었던 주님의 제정하심과 봉헌하심이 다시 새롭게 재현되면서 이 표징들이 봉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화되는 것이 증명된다.
그도 그럴 것이 성례전을 처음 제정하셨고 처음 봉헌하신 이 주님의 성례전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항상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결과 주님께서 최초로 제정하신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례전을 집례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도 바로 저 최초의 봉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례전을 베풀 때에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가 반복되는 것이다.
성례전의 연합
표징들이 대상 혹은 내용의 이름을 갖게 되는 이유는 이 표징들이 거룩한 대상 혹은 내용의 신비스러운 표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표징들이 대상과 연합하는 것은 신비적인 의미 때문이요, 성례전을 제정하신 분의 목적과 뜻 때문이다. 물과 떡과 포도주는 보통의 표징들이 아니라 거룩한 표징들인 것이다. 세례를 위해서 물을 제정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이 세례 받을 때 단순히 물 뿌림을 받아야 하는 뜻과 의도에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만찬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도 단순히 집에서 먹는 떡과 포도주처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신비로움이 있다. 즉 신자들은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에 영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신앙에 의해서 죄 씻음을 받게 되고, 그리스도와 실제적으로 연합하게 된다.
이단들
그러므로 성례전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어떤 특성들과 공식에 의한 것이라고 하든가, 거룩케 되었거나 거룩케 하려는 사람에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든가, 그리스도나 사도들의 말씀과 모범으로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이 아닌 그 어떤 우연한 것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성례전을 성화되었고 효과적이라고 하지 않고 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교회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는 불가시적인 것 때문에 성례전의 가시적인 측면을 경멸하거나 징표들을 전혀 무시하고 대상이나 내용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멧살리아주의자들을 말한다.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은 결코 성례전 안에 갇혀 있거나 성례전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와 표징의 대상이 표징에 그렇게나 긴밀히 속박되어 있고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표징들에 외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관계없이 이들은 은혜와 표징의 대상에 내적으로 참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교리를 우리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례전의 가치가 교역자의 가치와 무가치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성례전의 가치가 전적으로 신앙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순수한 좋으심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될 경우 단순히 내실 없는 말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요, 말들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이 하나님에 의하여 제공된다면 비록 불신자들이 이 말들만 듣고 이해하되, 그 대상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누릴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고 그냥 하나님의 참 말씀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성례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불신자들이 이 성례전에서 표징의 대상 혹은 내용을 수용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표징과 표징의 대상으로 구성된 성례전이야말로 거록한 대상 혹은 내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빌려 표징의 내용을 제공하는 참되고 침해받을 수 없는 성례전으로 남는다. 잘못이 이 성례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도 없이 불법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코 무효화될 수 없다.64)
성례전의 제정의 목적
성례전의 제정의 목적에 관하여는 이미 본 신앙고백서의 처음에서 성례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또다시 언급하는 일은 번거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제 논리적으로 볼 때 새 백성의 성례전을 하나하나 논하기로 하자.
20장. 거룩한 세례에 관하여
세례의 제정
하나님께서 세례를 제정하셨고 성별하셨다. 처음 세례를 베푼 사람은 요한인데 그는 그리스도를 요단 강물로 적셨다. 그 다음 물로 세례를 베푼 사람들은 사도들이었다. 주님은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세례를 베풀라고 분명히 명령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는 유대인들에게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고 대답하였다. 세례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에 세례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입문의 표징이라고도 불리운다.
한 세례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한번의 세례밖에 없다. 한번 세례받아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 족하다. 한번 받은 세례는 평생토록 그 효력을 지속하는 바 이 세례는 우리의 양자됨을 항상 증거한다.
세례받는다고 하는 것의 의미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과 하나님의 가족에로 등록되고 받아들여지고, 수용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유업을 받는 것이다. 즉 세례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좇아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요, 죄의 오염에서 깨끗함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아 그 결과 허물없는 새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란 하나님께서 죽을 인류에게 보여주신 엄청난 은혜를 생각나게 하고 이를 새롭게 재현시키는 것이다.
우리 인생들은 날 때부터 죄로 오염되어 있고 진노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넘치시기 때문에 그의 아들의 피로써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그냥 깨끗게 하시고, 이 아들 안에서 우리를 양자되게 하시고, 거룩한 언약에 의하여 우리를 자신에게 연합시키시고 우리를 각양 은혜로 풍요케 하심으로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세례에 의하여 확인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내면적으로 중생하고 순결해지고 거듭나게 되고 외면적으로 물로써 엄청난 선물을 확인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물은 엄청난 은혜를 대표하고 사실상 우리 눈앞에 이 은혜를 보도록 제시한다.
우리는 물로써 세례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물로써 씻음을 받고 뿌림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내고 뜨겁고 피곤한 육신을 시원케 하고 소생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데, 이는 보여지지 않는 방식으로 혹은 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세례의 의무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례의 상징을 통해서 모든 낯선 종교들과 모든 불신자들로부터 우리를 구별하시어 자신의 소유로 우리를 구별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시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육신을 죽이고, 새로운 삶을 영위해야 할 의무를 명령받는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평생토록 세상과 사탄과 우리 자신의 육신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병사들로 등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례에 의하여 교회의 한몸에 참여케 되므로 우리는 교회의 모든 회원과 더불어 동일한 종교와 상호 봉사를 아름답게 일치시켜 나갈 수 있다.
세례의 형식
가장 완전한 세례의 형식이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받은 형식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 완전한 세례의 형식에 그 후에 첨가된 그 무엇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귀신 쫓아내는 일, 타오르는 등불의 사용, 기름과 소금, 그리고 침의 사용, 복잡한 의식으로 일년에 두 번씩 베풀어지는 세례식 같은 것들이 바로 이런 종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회의 한 세례가 하나님의 최초의 제정에 의하여 성별되었고, 오늘날에도 말씀에 의하여 성별되고 저 하나님의 첫 번째 축복에 의하여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세례 베푸는 교역자
교회 안에서 세례가 베풀어질 때 여자들과 산파들에 의해서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가르친다. 바울이 여자들에게는 교회의 의무를 맡기지 말라고 했는데, 바로 세례는 이 의무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세례파 이단
우리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도들의 유아들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가르침에 의한즉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어린이들의 것이요, 이 어린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을 이들에게 주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자가 거룩한 세례에 의해서 하나님과 교회와 관계 맺기 시작하는 것이 왜 안 될 일인가? 우리는 재세례파의 다른 교리들도 정죄한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세례파 사람들이 아니요, 이들과 전혀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21장. 주님의 거룩한 성찬
주님의 성만찬
주님의 만찬은 보통 만찬(주님의 식탁)이라고 불리어진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의 최후의 저녁식사 때에 이것을 제정하셨고, 아직도 이것은 그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요, 성도들이 이 만찬을 통하여 영적으로 먹고 마시기 때문이다.
성만찬의 창시자와 봉헌자
주님의 만찬의 창시자는 천사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인바 이분이 최초로 이 만찬을 교회를 위하여 구별하셨다. 동일한 구별 혹은 축복이 주님께서 제정하신 만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즉 오늘날 성만찬을 베푸는 사람들은 이 성만찬에서 주님의 만찬의 말씀을 반복하면서 그 무엇보다도 한 그리스도를 참 믿음으로 바라보고 성도들은 교회의 교역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받되 사실상 주님의 손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처럼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기념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의식에 의하여 그가 죽을 인류에게 보여 주신 엄청난 은혜를 항상 다시 회상시키시기를 원하신다. 즉, 주님께서 그의 몸을 내어주시고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영원한 죽음과 악마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지금은 그의 살로 우리를 먹이시고 그의 피를 우리에게 주사 마시게 하시는바 우리는 참 믿음으로 이를 받아 영생을 위한 양육을 받는 것이다. 주님의 성만찬이 베풀어질 때마다 이 엄청난 은혜는 항상 다시 새롭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성만찬은 또한 주님의 참 몸이 우리를 위하여 찢겨졌고 그의 참 피가 우리의 죄의 속죄를 위하여 흘려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신다.
표징과 표징의 대상
이것은 교역자들을 통해 이 성만찬에 의하여 가시적으로 표현된다. 사실상 이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우리 앞에 제시되나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불가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교역자가 떡을 외적으로 제공하나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떼어서 나우어 먹으라. 그것을 마시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것은 내 피니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이 들린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의 교역자들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은 주님의 떡을 먹는 것이요, 주님의 잔을 마시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요, 이 양육에 의하여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영생에 이르는 참 음식이요, 그리스도 자신이 이 성만찬의 중심 내용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무엇도 이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어떻게 신자들의 음식과 음료가 되며 신자들에 의하여 영생에 이르는 음식과 음료로 받아들여지는지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더 언급하고자 한다. 먹는 다고 하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음식을 입에 넣고 이로 씹어서 위 속으로 삼켜들이는 물질적 먹음이 있다. 언젠가 과거에 가버나움 사람들 중에는 주님의 살을 이런 식으로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는 요한복음6장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살을 물질적으로 먹으면 그것은 추하고 야만스러운 행동이기에 그것은 결코 위를 위한 음식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에고 베렝가리우스'(봉헌에 관하여/의 2부)라고 하는 교황의 칙령에 들어 있는 법조항을 인정하지 않는다. 옛 성도들이든 오늘 우리들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인 입으로 물질적으로 먹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주님을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
다음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먹는다고 하는 먹음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음식 자체가 영으로 변화하는 그런 영적 먹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몸과 피는 그것의 본질과 특성에 있어서 그대로 남아 있으되, 성령에 의하여 물질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바, 여기에서 성령은 십자가상에서 희생된 주님의 몸과 피의 제사에 의하여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주신 그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베풀어 주신다. 이것은 다름 아닌 죄의 속죄요, 해방이요, 영생인데, 이것의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영적 음식과 음료, 곧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신다.
우리의 음식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지탱시키신다.
물질적인 음식과 음료가 우리의 몸에 생기를 공급하고 힘을 주고 계속 살게 하는 것처럼 우리을 위해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과 우리를 위해서 흘려진 그의 피는 우리의 영혼에 생기를 공급하고 힘을 주고 계속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육체적으로 먹고 마실 때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임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이 우리의 체내에 들어와 작용하고 어떤 효력을 일으키는 것처럼 이 음식이 우리 몸 밖에 있는 한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분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해야 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분 안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영적음식
이런한 모든 것을 미루어 볼 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의미하는 영적음식이란 결코 상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주님의 참 몸이라는(실제적인 몸)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들은 이 몸을 신앙에 의하여 영적으로 받는다. 결코 육체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구주 자신의 가르침을 따른다. 즉,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가르치신 가르침이다.65)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먹음
이처럼 주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일은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이 일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영적 먹음과 마심은 주님의 성만찬을 떠나서도 일어난다. 즉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마다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왜 너희들은 너희의 이와 위를 위하여 준비하느냐? 오히려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이미 먹은 것이다"라고 하는 어거스틴의 말이 여기에 적용된다.
주님을 성례전으로 먹는다는 것
고차원적인(신비한) 영적 먹음 이외에 주님의 몸을 성례전적으로 먹는다는 것이 있다. 성도는 이 성례전적 먹음에 의하여 영적으로, 그리고 내면적으로 주님의 실제적인 몸과 피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식탁으로 나옴으로 주님의 몸과 피의 가시적 성례전을 외면적으로 받는 것이다. 신자가 믿었을 때 그는 이미 생명을 주는 음식을 받았고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성만찬을 받을 때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해서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기 때문이요, 그의 신앙이 불붙으며 점점 더 성장하고 영적 음식에 의하여 생기를 얻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신앙은 계속해서 자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만찬을 참 믿음으로 외적으로 받는 사람은 표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표징이 가리키는 대상 혹은 내용 자체를(그리스도) 받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주님의 제정과 계명에 순종하고 자신의 구속과 인류의 구속에 대하여 기쁜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신실하게 기억하고, 그가 한 지체인 교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이다. 주님의 몸이 주어졌고 그의 피가 흘려진 것이 단순히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히 각각의 수찬 자격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성찬을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 수찬 자격자에게 이 성찬은 영생에 이르는 음식이요, 음료이다.
불신자들이 성찬을 받을 때 자신들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주니의 식탁에 나오는 사람은 떡과 포도주에는 참여하되 본질적인 생명과 구원의 근원인 성찬의 본질은 받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식탁에서 합당치 못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의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취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요,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66)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참 신앙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요, 따라서 자신들에 대한 저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긴밀히 연결시킨 나머지 떡 자체가 성례전적 방법 이외의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 자체라고 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이 물질적으로 떡 속에 숨겨져 있으므로 떡의 형태로 그것이 예배되어야 한다거나 이 성찬의 표징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그 대상 혹은 내용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시므로 우리의 마음은 빵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늘을 향하여 올리워져야 하고 주님은 결코 떡 속에 갇혀진 체 예배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성만찬을 베풀 때 주님께서는 그의 교회로부터 부재하는(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태양은 우리를 떠나 있으나 우리들 속에 효과적으로 임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으로 임재하고 계신 것인다. 즉 그리스도는 그의 몸으로는 우리를 떠나 하늘에 계시지만 그의 생명 주시는 역사에 의하여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신다. 주님은 그의 최후의 만찬에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성만찬을 받는 것이 아니요, 동시에 교부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던 피흘림이 없는 신비적 성만찬을 받는 것이다.
성만찬의 다른 목적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가 누구의 지체인가를 생각하고,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한마음을 품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고 사악함과 이상한 종교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더럽히지 말고, 우리의 생이 끝날 때까지 참 믿음을 견지하면서 거룩한 삶을 탁월하게 살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성만찬을 위한 준비
우리들이 성만찬에 동참하기를 원할 때에는 사도의 명령을 따라 다음과 같은 측면들에 관하여 자신들을 검토하는 일이 적합하다. 즉,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오셨고, 이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믿고 있는지, 또는 우리 각자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해방 받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에 속해 있는지, 또는 각자는 자신의 악한 삶을 변경시키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참된 종교 안에서 계속 견디어 나가고 형제들과 조화를 이루고 하나님의 해방에 대하여 합당한 감사를 드리기로 결심하였는지를 살펴야 한다.
떡과 포도주 모두를 사용하는 성만찬
우리는 성만찬의 의식과 방법과 형식이 주님께서 처음 제정하셨고 사도들의 가르침이 말하는 바에 가장 가까운바 단순하고 가장 탁월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성만찬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경건하게 기도하는 것, 주님 자신의 행동, 그리고 이 행동의 반복, 주님의 몸을 먹는 것과, 그의 피를 마시는 것, 주님의 죽음을 적합하게 기억하는 일, 신실하게 감사올리는 일, 거룩한 사귐으로 교회의 몸과 일치하는 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들에게 주님의 잔을 주지 않는 것을 거부한다. 이는 주님의 제정을 어기는 일이다. 주님은 "이것을 다 마시라"고 하셨는데 떡에 대하여는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용납하든가 말든가는 논하지 말고 교부시대에 어떤 종류의 성찬이 있었는지 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 두자. 즉, 현재 로마 카톨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미사는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 거부하고 있다. 건전한 행동을 공허한 구경거리로 만들고 공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고 어떤 보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것을 우리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사제가 미사에서 주님의 참 몸을 만들어 그것을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속죄를 위하여, 그리고 이어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영예와 존경과 기억을 위하여 제물로 바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22. 교회의 집회에 관하여
예배를 위한 모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누구나가 집에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고 피차간에 교훈을 통해서 참된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 모이는 일이나 종교적 집회가 꼭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절히 설교되어야 하고, 기도와 간구가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성례전이 옳게 베풀어져야 하고, 가난한 자들과 교회의 경비를 위해서 헌금이 모아져야 하고, 사회적 사귐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시대의 초대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모임이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 의하여 부단히 회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예배를 위한 모임들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모임들을 무시해 버리고 그와 같은 모임을 멀리하는 사람은 참 종교를 경멸하는 사람들이다. 목사들과 신앙이 있는 관원들은 이들을 권고하여 그와 같은 모임에 참석하도록 권고해야 할 것이다.
모임들은 공적이다.
교회의 모임들은 비밀리에 회집되거나 은밀히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원수들과 교회의 원수들이 박해하는 이유로 교회의 모임들이 공적이 되지 못한 것을 예외로 한다면 교회의 모임들은 항상 공개적이 되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이라도 출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로마제국의 황제의 폭군정치 치하에서 초대교회의 집회가 어떻게 비밀한 장소에서 일어났는가를 알고 있다.
품위 있는 집회장소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는 품위가 있어야 하고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적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넓은 건물이나 장소를 택하되 교회를 위해서 적합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모든 내부장치는 단정하고 품위 있게 배열되어야 하고 꼭 필요한 것을 적합한 장소에 놓아야 한다. 예배와 교회의 꼭 필요한 기능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꼭 있게 해야 한다.
교회의 모임들에서 우리는 정숙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 안에 거하시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서 헌납된 장소들이 속된 것이 아니요,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요, 그 장소들이 거룩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장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존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의 현존과 더불어 거룩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점잖고 정숙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교회당 본당이 갖춰야 할 참된 장식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본당과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하는 장소로부터 모든 사치스러운 치장들과 모든 교만과 기독교적 겸손과 훈련과 절제에 적합지 않은 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의 참된 장식은 상아나 금.은 보석으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검소함과 경건함과 덕망으로 꾸며지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일들은 적절하고 정중하게, 그리고 질서 있게 처리되어야 하며 모든 일들이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예배
그러므로 예배를 위한 집회에서 우리는 이상한 방언들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예배시의 모든 일은 이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수행되어야 한다.
23장. 교회의 기도와 찬송과 교회 법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관하여
기도
성도들의 모든 기도는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하는데 오직 그리스도를 중보로 해야 한다. 즉 주님이 제사장직을 갖는 것이 참 종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있는 성자(聖者)에 대한 기도나 이들을 중보자로 생각하는 것을 금한다. 우리는 국가의 공직자들과 왕들, 그리고 권위의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교회의 교역자들과 교회들의 모든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특히 교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위하여 우리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기도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억지로 기도하거나 보상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장소에서만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적이라서 합당치 않다. 마치 교회의 본당만이 기도의 처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공중기도의 경우, 그것의 형식과 시간에 관하여 모든 교회들에 있어서 꼭 같을 필요는 없다. 각 교회는 이에 관하여 자유롭다.
공중기도에서 사용되어야 할 방법
다른 일들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공중기도에 있어서도 그것이 쓸데없이 길어지거나 지루해지지 않도록 어떤 표준이 있어야 한다. 예배를 위한 집회의 보다 큰 부분을 우리는 복음 설교를 위해서 할애해야 하고, 누가 기도를 너무 길게 함으로 설교말씀을 들을 즈음에는 지루해서 회중을 떠나 설교말씀과 관계가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처럼 기도가 길어질 경우, 짧은 설교말씀도 길고 지루한 설교말씀처럼 들린다. 이런 이유에서 설교자는 일정한 표준을 가져야 한다.
찬송
예배를 위한 집회에서 찬송을 부를 때에도 공중기도 때나 마찬가지로 절제가 필요하다. 로마 카톨릭이 사용하는 그레고리안 찬트에는67) 여러 가지 어리석은 것들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개신교들이 이것을 거절하는데, 이것은 옳은 일이다. 어떤 교회들이 참되고 정당한 설교는 갖고 있으나 찬송은 갖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이러한 교회들을 정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들이 찬송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송의 역사는 교부들의 증거에 의하면 찬송의 관습이 동방 교회에서 먼저 행했고, 서방 교회에서는 후에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법에 의한 시간
교부시대에는 교회법에 의한 기도 시간이 없었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들을 정해 놓고 기도한다든지, 교황주의자들처럼 기도를 노래로 올리거나 암송으로 올리는 일이 교부시대에는 없었다.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의 성무일과서(聖務日課書)나 여러 다른 문서들을 통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들이 지닌 모순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회가 그와 같은 것을 제거시킨 것은 옳은 일이다. 교회는 이러한 것들 대신에 하나님의 전교회에 유익한 것들로 대치시켰다.
24장. 거룩한 날들과 금식들과 음식들의 선택에 관하여
예배를 위해서 꼭 필요한 시간
종교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를 배양시키고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시간의 적절한 배열과 조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공중기도와 복음의 설교와 성례전의 집례를 위해서 적당한 시간을 선택한다. 아무도 교회가 정한 시간들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다. 종교생활을 위해서 시간과 힘을 할애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틀림없이 종교로부터 거리가 멀어지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말 것이다.
주일
고대 교회는 교회의 집회를 위하여 주 중 일정한 시간들을 정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시대 이래 주일이 교회의 집회일로 확정되었으니, 이 주일은 거룩한 안식을 위한 것으로 예배와 사랑을 위하여 오늘날까지 옳게 보존된 교회의 실천적 관습이다.
미신
이에 관련하여 우리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과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나머지 날들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날들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자(聖者)들의 절기들
만약 교회들이 기독교적 자유 안에서 주님의 탄생과 할례와 고난과 부활과 그 승천과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일을 기억함으로 축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즉 교리의 바른 내용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절기로 표현하거나 또는 사람들과 성자들을 숭상하기 위한 절기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룩한 날들은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관계된 것으로 오직 하나님을 위한 날들인 것이다. 결국 절기와 성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날들을 우리는 이미 없애버렸는바 이날들은 모순투성이요,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설교를 통하여 성자(선조들)의 회상을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 유익하고, 이 성자들의 모범된 삶을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한다.
금식
그리스도의 교회는 포식과 술취함과 모든 종류의 탐욕과 무절제를 심하게 정죄하느니만큼 기독교적 금식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강하게 권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금식이란 경건한 신앙인들의 금욕과 절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 육신의 돌봄과 징벌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꼭 필요한 일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육체는 그 연료를 빼앗기므로 더 자발적이고도 쉽게 성령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일에 관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금식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 정도 위장을 채우고 일정한 시간에 음식을 멀리하는 것으로 금식한다고 생각하고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선한 일을 성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는 성도들은 금식함으로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고 덕목을 잘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서들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듯이 음식은 멀리하나 악행을 멀리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공적인 금식과 개인적인 금식
금식에는 공적인 것이 있고 사적인 것이 있다. 교회가 박해와 환난과 역경 속에 있었던 고대 기독교 역사에는 공적인 금식들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금시하되 이 시간동안에 기도에 몰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회개에 힘쓴다. 이것은 애통함이나 다름없다. 이에 관하여 예언자들, 특히 요엘(2장)이 자주 언급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금식은 교회가 곤궁에 처할 경우, 오늘날에도 행해져야 한다. 한편 우리 각자는 성령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개인적인 금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우리 각자는 육체로부터 그 연료를 제거시키기 때문이다.
금식의 특징들
모든 금식은 자유롭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행해져야 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행해져야 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호의를 얻기 위해서 금식이 행해져서는 안 되고, 금식함으로 의를 세우려는 의도는 더더욱 금물이다. 육체로부터 연료를 제거함으로 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에 전념하려는 것이 금식의 목적이어야 한다.
사순절(四旬節)
사순절 때의 금식에 관하여는 고대 교부들의 글들이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금식을 성도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이미 초기에도 변질된 금식의 여러 형태와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 교부인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떤 이는 하루만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이틀을, 어떤 이는 그 이상 혹은 40일간을 금식하라고 말한다. 금식에 대한 이러한 다양성은 우리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 시대 이전에 생겼다. 내(이레니우스) 추측으로는 이것이(사순절 금식) 사도시대로부터 전승된 것(금식)을 무시하고 또한 소홀히 여기거나 무식함 때문에 다른 습관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단편집) 3, Ⅰ, 824이하>.
음식의 선택
음식의 선택에 관하여 알아보자. 육체의 욕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육체를 무모하게 하거나 육체를 즐겁게 하는 음식은 무엇이나 삼가야 한다(술, 담배, 마약 등). 그것이 고기든지 양념이든지 훌륭한 포도주이든지 간에 우리는 삼가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사용할 수 있고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절제하는 가운데에 이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다.68) 그도 그럴 것이 사도 바울 역시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고 하며, "(고전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도 한다.
또한 사도는 고기를 먹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가리켜 '악마의 가르침'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딤전4: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는 골로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나친 금욕으로 거룩하다는 평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꾸짖고 있다.69)
이단들
그러므로 우리는 타티안주의자들과 엔크라티스주의자들, 유스타티우스주의자들을 모두 정죄한다. 강그리아 종교회의가 열린 것은 이들의 가르침을 반대하기 위해서 였다.
25장. 세례받을 사람의 교육과 환자의 위로와 심방에 관하여
청소년들을 경건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청소년교육은 유아교육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주님은 그의 옛 백성에게 명령하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구약에서 청소년 교육을 교육해야 하고 성례전의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글에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새 백성의 청소년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막10: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는 말씀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교회의 목사들이 현명하게 목회를 하려면 청소년교육을 일찍이 시작해야 한다. 즉, 목사들은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전에 대한 교리 등을 해석해 줌으로 신앙의 기초를 마련해 주어야 하고 기독교 종교의 기본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믿는 성도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일에 신실함과 근면함을 보여야 하고 자녀교육을 열망할 뿐만 아니라 기뻐해야 할 것이다.
병든자의 심방
사람이 허약함에 시달리고 병들고 영과 육의 병으로 쇠약해질 때 극심한 시험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사들은 교인들이 허약해지고 병들어 누어 있는 상태에 있기 전에 그의 양떼들의 건강을 잘 돌보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사정이 허락하는 한 목사들은 환자들을 속히 심방해야 하고 적절한 때에 환자의 심방을 요구받아야 한다. 목사들은 환자들이 참된 신앙을 계속 유지하도록 위로해야 하고 확신시켜야 한다.
그리고 사탄의 위험한 흉계에 넘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목사들은 필요할 경우, 자신의 집에서도 환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교회의 공적인 집회에서도 환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목사들은 중환자의 경우, 이 세상을 떠날 때 기쁨으로 떠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교황주의자들이 환자를 방문하여 베푸는 종유성사(終油聖事)를70)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이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26장. 믿는 자의 매장과 죽은 자들에 대한 배려와 연옥과 영들의 현현에 대하여
시신의 매장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의 시신이 최후의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 성경의 명령에 의한즉 성도의 시신들은 존중하는 마음으로 땅에 묻되 미신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71) 즉 미망인과 이미 잠든 성도들을 우리는 존중히 여겨야 하고, 유가족들인 미망인과 고아를 위해서 가정적인 모든 경건의 의무들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물론 죽은 자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시신을 무시하거나 부주의하고, 경멸적으로 그것을 땅 속에 묻어 버릴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 관하여 좋은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들의 유족들에 대하여 조금도 관심하지 않는 냉소학파(the Cynics)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에 대한 관심
죽은 자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그리고 터무니없이 관심을 쏟는 사람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처럼 죽은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통곡하며,72) 죽은 자들을 위하여 미사(예배)를 올리고 삯을 받고 기도문을 중얼거림으로 사랑하는 죽은 영혼들을 연옥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몸을 떠난 영혼의 상태
우리는 성도들이 육체적인 죽음 직후에 직접 그리스도에게로 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올릴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직접 지옥으로 던지움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위하여 어떠한 예배를 올려도 이들은 이 지옥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연옥
연옥에 관한 로마 카톨릭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 즉, '죄의 용서와 영생을 내가 믿습니다'와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씻음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에 위배된다.
영들의 나타남
죽은 사람들의 영 혹은 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서 어떤 의무 수행을 요구함으로 이 의무수행에 의하여 자신들이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요, 악마의 속임수와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73) 악마는 자신을 빛의 천사로 둔갑시킴으로 참 신앙을 뒤집어엎거나 회의로 바꾸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구약에서 주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진리를 찾지 말라고 하셨고, 죽은 자들의 영과 어떤 교제도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74) 복음서의 진리가 선포하듯이 지옥에 있는 부자는 결코 그이 형제에게로 갈 수 없다.75)
출처 :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글쓴이 : 유토피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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