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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의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의 변형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근본주의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극단적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고수하려는 미국의 보수주의적 신학 운동이고, 그 후 이 운동은 교회를 분리하는 갈등을 낳았고, 진보하는 현대 지식 사회의 흐름 속에서 점차 퇴조하면서, 현실과 타협하며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게된 게 이 복음주의라고 본다. 이들은 근본주의를 비판하는데, 근본주의가 고수하는 성경의 절대 무오,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 같은 교리나 신앙적 태도보다는, 그들의 비학문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신앙이라 함은 사회, 문화, 역사와의 관련성이 있어야 하는데 근본주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 교화보다는 개개인과 관련된 복음 활동을 위주로 하며, 회개는 개인이 하는 것이지 어떠한 구조가 하는 것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이 모두 복음으로 변하면 자연히 사회, 정치적인 구조도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문제 해결은 바로 그 민족이 복음화 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의 타협적인 태도나, 교회성장 신학도 여기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변화나 개혁을 요구하는 좌파를 거부하고, 현실 체제를 인정하므로 기독교 우파에 속한다. 이 복음주의 대표적 인물이 세계적인 전도자로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이다. 이 분은 우리나라에서도 73년에 전도집회를 열어, 연 5일 동안 여의도 광장에 3백여 만 명의 인파가 몰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그레이엄과 제리 팔월에 대해, 쉘톤 시미스는, '그 둘은 다 근본주의자들로 시작하였다! 그 둘은 다 큰 성공을 이루었고 국제적 인물로 부상되었다! 그 둘은 다 그들의 사역의 거점을 그들의 근본주의적 기기로부터 보다 넓은 복음주의자들의 서클에로 변경하였다. 표준들과 분리의 원리들은 사라졌다! 타협은 규범이 되었다! (50년대에) 그레이엄에 의해 채택된 에큐메니칼 태도는 이제 리버티 대학교에서 기정화된 방식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진리와 오류는 자유로이 섞인다. 바른 교리는 교제를 위하여 보류된다. 한때 성경적 권위의 강한 목소리가 있었던 곳에, 이제는 적응과 편의의 정신이 우세하다'고 비판하였다. 촬스 우드부릿지 같은 이는 '신복음주의는 가장 치명적인 신학적, 도덕적 타협이다. 그 입장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교활한 공격이다.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 그리스도 교회가 이 보다 더 간교한 위협에 직면한 적은 없다'고 하였다. 부시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목사님(그레이엄)은 내가 놀라운 은총을 발견하게 해 줬다'고 고백한 바 있다. 여기에서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건, 근본주의냐 복음주의냐가 아니라, 오늘 날 '미국의 신학', 또는 현대주의자로 평가받는, 로버트 슐러 같은 대중적인 스타 목사가, 바로 이런 분위기며 토양에서 가능했다는 것이며, 한국의 대교회들도 이런 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그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미국의 신학'은, 그럴 듯한 신학의 옷은 걸치고 있는 듯 하나, 실은 그 나라의 문화, 자본주의 윤리나 가치들을 숭배하는 아주 편리한 하나님, 실용주의적인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나라를 침략하면서도, 그들 식의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가 가능하며, 9.11 테러 같은 재난에 대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참회와 고뇌에 찬 물음보다는, 그런 비상식적인 말을 버젓이 하면서도, 교계의 지도자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참고로, 이들은 다 막대한 부와 명성을 누린다) 나는 그들의 신학에 이미 하나님은 없다고 본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며 저지르는 죄악이며, 이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기독교 우파의 논리에서, 나는 성서의 하나님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위선과 기만이야말로 적그리스도적이다. 기본적으로 신학을 하는 자는, 이런 그들의 실상과 치열하게 자신의 실존 가운데서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그 신학은 무의미하다. 바로 거기에서 정직한 하나님의 복음은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 대중목회자들은 어떠한가. 이미 그들의 인간 유형, 그 본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미국의 신학에 철저히 동화되거나, 먹힌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 아류로서의 운명적인 속성을 지닌다. 이 대중목회자들은, 유학하여 이 나라에서 할 수 없는 하나님과 그 복음을, 새롭게 알고, 더 깊이 천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미국의 신학을 우상시 한 나머지, 자신의 몸에 꼭 맞게 빼 입고, 마치 촌놈이 서울 사람되어 귀향하듯, 아주 의기양양하게 돌아 와, 이제 최고의 신학을 한 소위 일류 목회자 대우를 받으며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유학 가기 전에, 그나마 있던 이 땅에서 복음 사역을 하는 자로서의, 그 희미한 실존적인 고민조차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 이 '미국의 신학'은, 그들에게 신에 대한 경건함과 두려움을 없애 준다. 내가 볼 때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오히려 위에서 신을 내려다보며, 아주 편리하게 이용하면서도, 바로 그런 자신의 의지며 생각이 신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이 '미국의 신학'이다. 대체로 본질이 속물인 이들은, 미국이라는 부강한 나라, 세계를 움직이는 힘, 그 놀라운 풍요로움과 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나라를 하나님이 세웠고, 그 나라의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믿는다. 경의와 부러움과 찬사의 대상이다. 이들이 촌놈의 그 무겁고 답답하기까지 한 고지식한 '신앙의 옷'(이것도 실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걸쳐 준 것이지만)을 훌훌 벗어 던지고, 화려할 만큼 세련되고 편리한, 어느 상황에도 이미 해답을 가진, 매우 합리적이고 정교한 듯한, 실용주의 적인 신학의 옷을 빼 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나타나는 건, 아주 당연한 것이다. 참으로 비극은, 이 나라 이 민족을 복음 안에서 깨우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선지자적인 신학이 절대 요구되는 시대에, 이들의 신학이 이 나라 교회를 주름잡고 있다는 것이다. 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현대인의 입맛과 기호에 맞는 이 '미국의 신학'은, 걸림도 없고, 때도 끼지 않을 만큼 윤기나게 매끄럽다. 아니, 그런 걸림 같은 낭비가 불필요한, 그 사회의 정신과 문화 속에서 진화할 만큼 진화 한, 세속화 된 신학으로서의 '해답'이다. 이들의 근성에 맞는, 잘 팔리는 상품으로서의 신학, 좀 더 고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성장을 위한 '성별된 실용주의 신학'이다. 심하게 말하면, 신학이 매우 그럴듯한 이론을 빌려 세속에 몸을 팔기로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헌데 이 대중목회자들의 정점에 있는, 이 나라 대표적인 A급 대중 목회자 상당 수가 교회성장 신학의 거점이랄 수 있는 미국의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미국 풀러학파(Fuller School)의 교회성장 이론은, 이 나라 교회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받는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교회성장 이론을 만든 풀러학파의 가장 확실한 성장 표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풀러학파의 한 사람이자 교회성장 이론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피터 와그너는 미국의 신학계에서도 타협적이고 실용주의적이란 비판을 받는다. 사실, 기독교의 윤리가 강조하는 것은,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다 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터 와그너는, 때에 따라 실용주의가 성경에 계시된 교리적, 윤리적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교회 성장을 위한 전략에 유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성화된 실용주의, 혹은 성별된 실용주의라 불렀다. 문제는, 그 성경에 계시된 교리적, 윤리적 원리란 게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많고, 역설적이게도 와그너의 그런 신학 이론 자체가 이미 세속화 한, 그런 타협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 교회성장학의 아버지랄 수 있는, 도날드 맥가브란은, 마태복음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복음에 근거해서 교회의 수적(양적) 성장이 하나님의 뜻임을 주장했다. 그래서 새로운 교회성장을 계획함에 있어 통계숫자(統計數字)와 통계표를 중시하며, 교회성장을 위한 목표 설정, 효과적인 전도 이론 및, 전도 원리와 방법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복음이 적극적으로 세속과 타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은 셈이다. 더욱이 교인의 머리 수가 전도의 성과가 되는, 영혼 구원 세일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를 비판하는 이들은, '교회 성장학은 은혜 중심보다 방법 중심이며 성공 위주이며 신학이 결여되었으며, 프로그램 중심이다'라고 지적한다. 마틴 마티는 '세상이 정의하는 방식의 성공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가 아니고 그리고 결코 목표였던 적도 없다. 교회는 순종하고 신실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라고 비판한다. '풀러의 교회성장학은 성경을 연구했다기 보다 이용했다'고 극언하는 이도 있다. 이들은 교회성장학이 수에 치우치며 미국의 실용주의의 산물로 본다. 결국 이러한 교회성장 이론은, 이 나라 교회의 오늘의 실상에서 보듯, 외형은 성장한 듯 보이지만 안으로는 병든, 점차 그 심각한 증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대중목회자들로 인해 교회가 부흥하고, 수만 수십만의 대교회를 세계에 자랑할 수록, 오히려 우리 사회는 더욱 삭막해지고 천박해져 간다. 무슨 게이트만 터지면, 그 핵심적인 인물에 기독교인이 빠지지 않는다. 이런 우리 사회의 흐름이 그러한 신학이 지배하는 교회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대중 목회자들이 스타 대접받는 이 나라 교회에서 공의의 하나님은 떠난 지 오래다. 이 나라 이 민족을 깨우는 광야의 외침같은 예언자적 음성도 멎은 지 오래다. 빈부의 극심한 양극화로 이 나라 일부 계층은 주체할 줄 모르는 부와 소비 향락 문화를 과시하지만, 절대적 빈곤층이 늘어가고 가정이 해체되고, 매년 만 5천 명 이상이 자살하는 현실에서, 이 대중목회자들은 호사스런 삶을 누리며, 말씀을 상품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오히려 이런 공동체의 불행을 극복하려는 논의조차 이들은 불온시 하며, 자식들을 다 외국에 유학 보내고, 좋은 집이며, 수 억대의 예금은 기본인, 이미 기득권 계층인 속물적 가치관이며 신념이 마치 성서의 진리인 양, 아주 버젓이 그럴듯하게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A급 대중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어 본 이들은 알겠지만, 우리 사회의 지성인이라는 학자들도 때론 감동 받고 교훈을 얻을 만큼, 윤리 도덕을 강조하는 신학이며, 연출력이 탁월한 프로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들이 매우 교활하며 영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의 가치관, 욕망, 꿈, 심리까지 파고들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제 웅장한 예배당, 물질적 풍요, 권력화한 교세는, 보통 인간들을 압도하며 눈을 멀게 한다. 눈에 보이는 대교회의 눈부신 성공을,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물신 숭배의 천박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마 세계적으로 이 대중목회자들의 우상 격인 인물은, 미국의 로버츠 슐러 목사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본질적으로 속물인 점에서는 같더라도, 엄연한 격이 있다. 이 나라의 대중 목회자들이, 비굴할 정도로 힘의 질서를 추종하는, 양심과 도덕성에서의 저급함을 여실히 드러내지만, 일단 저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하며, 간음이나 교회 헌금을 빼내는 등의 죄가 드러나면, 그 자리에서 물러날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로버트 슐러 목사의, 미국 현대교회를 상징하는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는, 그 위용의 정점에 있는 교회라 할 수 있다. 매우 정교하게 상품화 한 설교도 그렇고, 유리로 지은 최첨단 기법이 동원된 화려한 예배당은, 속된 말로 뻑 가지 않는 이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이 수정교회 주일 설교는 미국 160여 개의 TV에 방송되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시청한다고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2005년 2월 23일)에도,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해 더욱 유명해진 강남의 광림교회 원로 목사는, 자신이 이 수정교회의 초청을 받아, 예배당을 가득 메운 3천명의 교인 앞에서, 그리고 그 160여 개의 TV방송에 나가는, 그 앞에서 설교한 걸 매우 영광스럽게 입에 올리고 있었다. 이 분의 설교집 몇 권의 표지에는, 로버츠 슐러와 같이 찍은 사진이 실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교회의 이런 현세적 성공의 위력은 사실 대단한 것이다. 여기에 선지자적인 가난한 목회자는 초라한 실패자일 뿐이다. 누가, 그 위세 앞에서 주눅 들지 않겠는가. 누가 감히 이를 복음 아닌, 실은 세속에 영합하는 지극히 신학을 상품화 한 현상이라고 쉽게 입에 올리겠는가. 더욱이, 누가 감히 이것을 아주 교묘한, 본질적으로 속임수이자 교회를 허는 죄악이라고, 선지자처럼 외칠 수 있겠는가. 이들을 부러워하는 목사들이겠는가. 신학을 상품화하는데 앞장서는 신학자들이겠는가. 연방 정부의 대법관이겠는가. 정치인들이겠는가. 이런 미국의 현실에서, 부시의 신앙은 아주 당당하고 당연한 것이다. 이들 대중목회자들의 신학적 논리로는, 부시는 세계 최강인 미국의 대통령이니, 그 만큼 축복을 받은 정치인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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