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교회들마다 Q.T가 경건을 위한 유행으로 강력하게 번지고 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바르게만 교육된 가운데 실행된다면 참으로 유익하고 좋은 운동이 될 것이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이런 Q.T운동은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 내가 Q.T라는 경건 운동에 대하여 심각한 위험이 있다는 식으로 보는가 하면, Q.T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경건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실존주의적 성향 때문에 그런 것이다.
먼저 실존주의에 대하여 말하자면, 실존주의란 진리를 객관성(기록된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찾지 않고 주관성(개인의 양심의 빛에 의한 주관적 해석)에서 찾자는 철학적 성향이다.
이것을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철학적 단편에 대한 후서'에서 실존주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객관적 진리가 인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 내면이 진리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좀 쉽게 말하자면 진리는 객관적일 수 없고 주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에서는 진리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기 보다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될 수 없게 된다.
이런 실존주의적 철학을 신학으로 정립한 사람이 바로 '칼 바르트(Karl
Barth)'이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는 성경의 오류(고등 비평)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오류를 인정하기 때문에 칼 바르트는 개혁주의에서 "Bible is word of God"(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이란 개념과는 다르게, "Bible become word of God"(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라고 가르친다.(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성경 이외의 것에도 주관적 타당성만 준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식으로 흐르게 만든다-종교 다원주의)
즉 이 말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근거가 객관적으로 기록된 그 말씀자체의 권위에 있지 않고, 말씀을 읽는 주체가 영적인(?) 감동에 의하여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성경을 읽는 운동이 바로 Q.T운동이다.(물론 다 그렇게 성경을 묵상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나라 교회의 성도들은 칼 바르트처럼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된 원 의미나 상황과는 관계 없이 자기의 현재 의도와 상황으로만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운동은 결과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기록된 원래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하다 보면,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주관적으로 언약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잘못 해석되어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말씀은 원래 의도와 틀리게 믿었을 경우, 절대로 역사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은 자신이 성경을 주관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적용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심하거나, 성경의 무오성을 의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를 든다면, 욥기서의 말씀에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씀을 문맥의 흐름이나, 본문의 기록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구절만 주관적으로 영적인 응답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흔히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그 전제인 기도에 대한 헌신과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라는 전제 없이 받아들이고 자시의 욕심을 채워주시겠다는 뜻에서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부분 축복(?)을 받지 못하므로 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성경은 우리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과 적용으로 인해 그 무오성에 의심을 받게 된다. 즉 성경의 권위에 엄청난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자동적으로 진리에 대한 혼돈으로 빠지게 된다.
이는 또한 강단의 위기를 맞이하게도 만든다.
왜냐하면 강단에서 설교하는 설교 내용을 회중들이 주관적으로 묵상한 자기 묵상과 비교하게 됨으로 만일 설교자가 바른 본문 해석에 의하여 설교를 했다고 하더라도 회중들이 자기의 묵상보다 더 감동적이라거나 더 영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할 경우에는 그 강단의 설교는 회중들에 의하여 무시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 청년들 가운데 강단의 설교를 우습게 여기는 추세가 나타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이는 강단의 설교가 치밀한 연구가 없이 주관적 묵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인식까지 주게 되었다)
고로 교회 안에서 성경 묵상 운동은 철저한 교육과 바른 성경 해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한다.
그러나 만일 성경 해석에 대한 지식이 없이 주관적으로 해석하도록 방치한다면, 진리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바르게만 교육된 가운데 실행된다면 참으로 유익하고 좋은 운동이 될 것이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이런 Q.T운동은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 내가 Q.T라는 경건 운동에 대하여 심각한 위험이 있다는 식으로 보는가 하면, Q.T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경건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실존주의적 성향 때문에 그런 것이다.
먼저 실존주의에 대하여 말하자면, 실존주의란 진리를 객관성(기록된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찾지 않고 주관성(개인의 양심의 빛에 의한 주관적 해석)에서 찾자는 철학적 성향이다.
이것을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철학적 단편에 대한 후서'에서 실존주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객관적 진리가 인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 내면이 진리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좀 쉽게 말하자면 진리는 객관적일 수 없고 주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에서는 진리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기 보다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될 수 없게 된다.
이런 실존주의적 철학을 신학으로 정립한 사람이 바로 '칼 바르트(Karl
Barth)'이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는 성경의 오류(고등 비평)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오류를 인정하기 때문에 칼 바르트는 개혁주의에서 "Bible is word of God"(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이란 개념과는 다르게, "Bible become word of God"(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라고 가르친다.(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성경 이외의 것에도 주관적 타당성만 준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식으로 흐르게 만든다-종교 다원주의)
즉 이 말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근거가 객관적으로 기록된 그 말씀자체의 권위에 있지 않고, 말씀을 읽는 주체가 영적인(?) 감동에 의하여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성경을 읽는 운동이 바로 Q.T운동이다.(물론 다 그렇게 성경을 묵상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나라 교회의 성도들은 칼 바르트처럼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된 원 의미나 상황과는 관계 없이 자기의 현재 의도와 상황으로만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운동은 결과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기록된 원래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하다 보면,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주관적으로 언약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잘못 해석되어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말씀은 원래 의도와 틀리게 믿었을 경우, 절대로 역사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은 자신이 성경을 주관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적용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심하거나, 성경의 무오성을 의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를 든다면, 욥기서의 말씀에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씀을 문맥의 흐름이나, 본문의 기록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구절만 주관적으로 영적인 응답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흔히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그 전제인 기도에 대한 헌신과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라는 전제 없이 받아들이고 자시의 욕심을 채워주시겠다는 뜻에서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부분 축복(?)을 받지 못하므로 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성경은 우리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과 적용으로 인해 그 무오성에 의심을 받게 된다. 즉 성경의 권위에 엄청난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자동적으로 진리에 대한 혼돈으로 빠지게 된다.
이는 또한 강단의 위기를 맞이하게도 만든다.
왜냐하면 강단에서 설교하는 설교 내용을 회중들이 주관적으로 묵상한 자기 묵상과 비교하게 됨으로 만일 설교자가 바른 본문 해석에 의하여 설교를 했다고 하더라도 회중들이 자기의 묵상보다 더 감동적이라거나 더 영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할 경우에는 그 강단의 설교는 회중들에 의하여 무시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 청년들 가운데 강단의 설교를 우습게 여기는 추세가 나타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이는 강단의 설교가 치밀한 연구가 없이 주관적 묵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인식까지 주게 되었다)
고로 교회 안에서 성경 묵상 운동은 철저한 교육과 바른 성경 해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한다.
그러나 만일 성경 해석에 대한 지식이 없이 주관적으로 해석하도록 방치한다면, 진리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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