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공부/성 경 공 부

[스크랩] Re: 현대방언 성령의 역사인가? 악령의 역사인가?

  이 운영자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방언에 은사에 대한 모든 기록들을 원어 성경 등을 통해 전반적으로 검토한 결과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의 은사는 다양한 국제적인 언어(사람의 말)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이 운영자와 견해를 같이 하는 글이기 때문에 여기에 소개를 합니다.

 

  참고로 이 운영자는 청소년 시절에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마치 다국어를 말하는 것처럼 아주 다양한 방언을 하여 그 부흥회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는 체험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세계어 각국어에 대한 상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현대의 신비주의 방언이었는지 아니면 세계의 각국어를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하는 소위 현대의 신비주의 방언이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의 은사인가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어느 개혁주의 신학자가 인정을 하고 있거나,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그런 체험을 하였고, 현재까지도 그런 방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방언을 주장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기록은 개인의 체험과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므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 방언의 은사라고 한다면, 가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래의 글을 모두 아래의 사이트에서 퍼온 글입니다.     

필레오~~

 

http://www.jesusoflove.org/article/read.php?table=mission&sn=40

http://www.jesusoflove.org/article/read.php?table=mission&sn=40

현대의 방언, 성령인가? 악령인가?


[성경적인 교리, 교회관을 위한 글] Ben Byrd(벤 비이드 박사)


  옛적부터 세상은 샤머니즘(Shamanism)과 정령(精靈)신앙의 영향으로 신비주의 사상이 사람들의 생각에 쉽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 온 그 바탕 위에 복음이 전해지자 오늘날에는 성경에서 벗어난 신비적 신앙 형태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소위 현대 방언(方言)이란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방언이 성령 받은 증거라고 하면서 가르치기도 하고 또 방언을 연습하거나 훈련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신비주의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방언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여러 나라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나라말을 모르는 사도들을 통해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던 하나의 외국언어(사용하고 있는 외국말)였습니다.


처음으로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던 때는 예수님 부활 이후 첫 오순절 절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의 소식을 모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16개국에서 흩어져 살다가 오순절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 왔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향하여 외국언어를 배운 적이 없는 120명의 제자들의 입을 통해 특별히 역사하셔서 그들이 살던 그 나라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것입니다.


* 16개국 = 바대(Parthians), 메대(Medes), 엘림(Elamites), 메소보다미아(Mesopotamia), 유대(Judea), 가바도기아(Cappadocia), 본도(Pontus), 아시아(Asia), 브루기아(Phrygia), 밤빌리아(Pamphylia), 애굽(Egypt), 구레네(Cyrene), 리비야(Libya), 로마(Rome), 그레데(Cretans), 아라비아(Arabs)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각 나라의 말)으로 하나님의 큰 일(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부활하셨다)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기도할 때 가장 잘 할 수 있는 자국어로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래 말이란 사람이 사람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만든 하나의 약속의 수단이자 표현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의 의사를 정확한 말로써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方言)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지역언어(방언)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특별한 은사였습니다.

  이러한 방언(외국 언어)의 은사는 교회가 세워지면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교회들에게 허락하신 은사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고 안정되어 가면서 이러한 방언(方言)은사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헬라 지역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서는 신비주의 주문같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Unknown Tongue-KJV)를 성령의 역사로 인한 방언으로 오인하고 뜻없이 되풀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훈계했습니다.


  사도시대의 방언 은사는 성경이 기록되면서(온전한 것-성경 고전 13:10) 점점 폐해졌습니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방언(Unknown Tongue)기도는 뜻없는 신비주의 주문에 가깝습니다. 그런 방언들은 불교도, 힌두교도, 회교도, 심지어 티벳의 신비승들까지도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Unknown Tongue)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과 성령님의 빛을 받아 참된 방언(方言)의 의미를 바로 알고 미혹의 영(요일서 4:6)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소위 성령운동을 한다는 은사주의자들이 로마 카톨릭 사제(신부)들과 합동 집회를 자주 갖는 것은 현대의 방언하는 이들의 영이 성령이 아니라 바벨론의 영이라는 것을 증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오랄 로버츠를 비롯 짐 베이커, 펫 로버트슨, 지미 스와가트 등이 로마 카톨릭과 자주 성령운동집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방언을 한다고 떠들어대지만 수많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종교재판으로 죽인 로마 카톨릭과 함께 성령께서 역사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한국에도 은사주의로 유명한 조○○ 목사도 그들과 자주 집회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1. 오늘날의 방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언의 은사"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면서도 가장 오해하고 있는 은사중의 하나입니다. 오순절 교단 (예,순복음교회)중심의 성령은사 운동을 하는 은사주의자들은 오늘날도 방언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언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오직 성경에 권위를 두는 것이 옳습니다. 방언(方言)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결코 배운 적이 없는 언어이지만 그 나라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은사로 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외국 언어가 아닌 신비한 언어로 간주하고 성령이 충만한 신자에게 주는 은사로 생각하거나 심지어 구원받은 성도의 외적인 표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방언(an unknown tongue)의 은사를 못 받은(?) 사람들에게 심한 영적인 열등감을 갖게 하여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구하려고 엄청난 헛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게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결코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각기 다른 형태로 주님께서 필요에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한편 이와 달리 오순절 교단이 아닌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이나 복음주의자(Evangelical)들은 마가복음 16장을 인용하여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 곧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외국어 방언이라고 말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New tongues)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여기에 나오는 새 방언은 외국어 방언을 통한 복음 전파가 그 목적이며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첫 오순절날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방언 은사는 약 1세기 경까지 지속되다가 점점 사라졌으며 현대에는 필요가 없는 은사가 되었습니다.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현대 오순절 계통의 방언을 사단적이고 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오순절 교단 계통의 성령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성서의 중심적 은사로 보고 구원을 위한 중요한 체험단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하는 사람을 못하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방언은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외국어 방언이 아니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도무지 인격적이고 이성적인 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소리"입니다. 그것도 무의식중에 내뱉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그들은 방언으로 하는 기도를 강조하기 위해 유다서를 인용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praying in the Holy Spirit-KJV)"(유다서 1:20)에서 "성령으로 기도하며"가 바로 "방언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praying in the Holy Spirit-KJV)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praying in the unknown tongue)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은사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의 흐름을 나누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의 또 다른 방언기도의 근거로는 로마서 8장과 고린도 전서 14장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의 기도"를 곧 "방언기도"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성령의 기도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고린도 전서 14장의 말씀을 그들의 편리에 맞게 사사로이 풀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2절의 말씀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자가 그 영으로 비밀(mysteries), 즉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의 전체적인 상황을 볼 때 사도 바울은 지금 두 가지 방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외국어 방언(Tongues-이성적이고 인격적인 언어)이 있고, 또 하나는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가 아닌 다른 영에 의한 방언(an unknown tongue)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방언(tongue)의 은사를 적극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있으면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하지 말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에 의해 나의 영이 드리는 기도와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기도가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은사주의에서는 유창한 방언기도를 더욱 사모합니다. 그러나 유창하지 못한 기도와 유창한 기도의 차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기도의 외적인 화려함과 속도보다는 기도하는 자의 진실된 영의 자세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이상과 같은 방언기도에 대한 이해 또는 오해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평범한 성도들은 판단하기 어려워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의 혼란이 그대로 현대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2. 고린도 교회에는 알 수 없는 신비주의 방언(an unknown tongue)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고린도 전서가 그 동기와 목적상 신앙의 모범이 되는 교회를 보여주는 지침서의 기능보다는 잘못된 교회의 표본을 보여주어 바른 교회로 교정시키기 위해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임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장에서 바울은 우선 그들의 무지로 인해 많은 분파가 일어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바울이 그들 교회의 미숙함과 육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어지는 뒤의 장들에서도 고린도 교회의 많은 오해와 잘못된 신앙생활의 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중요한 무역, 상업 중심지였던 이 고린도 도시는 이교주의와 신비주의에 의한 전통적 습관이 깊숙이 배어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곳에 살고 있었던 고린도의 성도들은 그들의 생활 습관 속에 헬라지역의 특수한 신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러한 습성들이 교회까지 혼합되어 들어왔던 것입니다.


고고학, 역사 자료 등에 의하면 고린도 교회가 있었던 이 도시는 초대 교회 당시 이교도 신앙, 사단적 신비주의가 범람했고 그런 이교 신비주의에서는 현대의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과 같은, 뜻모를 소리들의 주문과 기도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고린도에서 수마일 떨어진 델피(Delphi)는 거대한 신전이 있는 그리스의 최대우상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우상숭배는 다름 아닌 바벨론 사단숭배의 신비주의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그 신전에는 신탁(信託, Oracle-계시를 받는 사람, 또는 그 장소)이 있어 그들 신(사탄)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데 그 신탁은 여사제로 구성됩니다. 물론 그 신전(Shrine)에서 그들은 사악한 우상숭배를 행하여 왔습니다.


 델피의 신전에서 여사제와 상담하려는 사람은 먼저 양이나 염소나 수퇘지 그 밖의 다른 동물로 희생제사를 행합니다. 그 때 예언과 징조가 좋으면 그들은 신전 안쪽 밀실(Adytum) 또는 아폴로 신전으로 들어갑니다. (이 과정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부터 성막에 들어가서 희생제사를 드리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흡사합니다. 사단은 항상 하나님을 모방하여 왔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반복적인 주문을 소리내며(이를 통역하는 자들도 있었음) 모종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들은 대개 애매모호한 표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델피 신전에서의 신탁은 당시 그리스에 보편적인 것이며 사도 바울 시대에도 팽배했던 우상숭배 행위였습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인 주후 394년경에 와서 델피의 신전은 파괴되고 몰락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의 혼란상에 대한 경고는 바로 이 델피 신전에서와 같은 뜻모를 주문을 받는 버릇이 교회에 침투한 것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델피의 신탁에서 얻어진 주문은 때마침 고린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자 "예수를 저주한다"는 내용들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방언 기도하는 자들의 소리에 "예수를 저주한다"는 사악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입니다.


3. 성경은 방언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1) 마가복음 16장 17-20절의 방언(tongues)


이 부분은 은사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으로 방언과 병자에 대한 안수기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6장 17절의 "새 방언(New tongues-KJV)"이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지상 명령을 주시면서 들어보지도 못한 각 민족의 방언들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실 것임을 뜻합니다.


이 구절에 쓰인 "방언"에 해당하는 헬라어 성경의 원어는 "글로사이(Glossai)"입니다. 그 뜻은 전 세계에서 쓰는 민족의 언어를 뜻하는 것으로서 "글로사이(Glossai)"는 1개 이상의 언어를 가리키는 복수명사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은사주의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기도(Unknown tongue)와는 그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2) 사도행전 2장, 사도행전 10장의 방언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행전 10장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안에 임한 성령의 역사와 함께 마가 복음 16장의 명령과 예언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장은 첫째로 이스라엘에서 교회의 탄생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에 쓰인(행 2:8-11, 10:46) 방언은 헬라어로 디알렉토스(Dialektos)입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쓰이고 있는 각 민족의 언어를 가리키며 흠정역(KJV)에서는 "텅스(Tongues)"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적대관계였으나 위 두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3) 사도행전 19장의 방언


이 부분 역시 사도행전 2, 10장에 이어서 세 번째 성령의 역사입니다. 침례 요한의 침례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19:2-3)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안수하니 성령의 침례를 받아 방언과 예언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구약의 속죄의식만 알던 에베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메시아로서의 의미를 모르고 단지 침례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는 상태였기에 바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침례는 회개의 침례를 뜻하는 것에 불과하나 성령의 침례는 회개는 물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심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의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침례 요한의 사역으로 국한되나 성령의 침례는 신약 교회시대에 전체적으로 유효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tongues)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물론 이 방언 역시 복음전파를 위한 외국어 방언입니다. 여기에 쓰인 "방언"(19:6)의 헬라어 원어는 해태라이 디아렉토스(Heterai Dialektos)로 "다양한 민족의 언어"라는 뜻입니다.


이 성령 침례의 사건이 일어난 에베소 지역은 그 당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드는 국제 무역 도시였기 때문에 다양한 종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러한 외국어 방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4)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은사주의자들이 잘 인용하는 방언기도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이지 우리의 입술로써 뜻모를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라는 용어는 성경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고 하여 성령께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주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훈련으로 이뤄지는 은사주의자들의 방언기도는 로마서 8장 26, 27절의 성령에 의한 기도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 자신에 의한 기도는 성령 스스로 하는 기도이지 결코 인간의 소리로 표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5) 에베소서 6장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이 구절에서 은사주의자들은 "성령 안에서 기도(Praying in the spirit)"를 방언기도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의 기도가 "성령의 도움을 받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즉 기도의 방법과 요령이 무수히 많지만 그 모든 기도는 성령을 무시한 인간적, 인본적, 이기적인 기도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도가 세속적이고 육신적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뜻에 따르는 기도가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달리 말하면 "성령의 권능과 능력 안에서의 기도"(In the power and energy of The Spirit)를 뜻하는 것입니다.


(6) 유다서 1장 14-20절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은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은사주의자들이 "방언기도"라고 하는 곳이 바로 "성령으로 기도하며"입니다. 그러나 유다서의 이 부분의 문맥은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며, 당을 지으며, 육에 속하며, 성령이 없는 자들"과 달리 "그리스도 위에 믿음을 건축해서 성령의 권능으로 살라"는 것이지 방언기도를 하는 것으로 비약될 수는 없습니다.


4. 방언(方言-tongues)은 각 나라의 언어였습니다.


지금까지 위에서 살핀(4), (5), (6)의 로마서, 에베소서, 유다서에서 말한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성령의 권능 안에서의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unknown tongue)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로마서, 에베소서, 유다서는 모두 고린도 전서가 쓰여진 후에 나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고린도 전서 12-14장에 나오는 방언의 내용들이 방언 기도를 권장하는 것이라면 로마서, 에베소서, 유다서에도 방언기도를 권하는 것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결코 고린도 전서 12-14장의 문제를 재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은사(恩賜)를 총체적으로 언급한 로마서 12장에는 예언, 섬김, 가르침, 권위함, 구제함, 다스림, 긍휼을 베푸는 은사가 언급되었어도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고린도 전서 12-14장을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전술하였듯이 고린도 교회는 언쟁과 분쟁이 많았고, 이교풍습과 신비주의가 만연되어 있어서 이 교회의 혼탁함을 교정시키기 위해 쓰여진 "교정의 서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모범적이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먼저 고린도 전서 11장에서는 그들이 갈등을 벌이던 공중예배, 교회 안에서 여자의 수건 쓰는 문제, 그리고 성만찬 문제를 교정시키고 12장으로 넘어 갑니다. 12장에서는 여러 은사와 지체의 원리에 대해 설며하면서 성령은 하나로되 은사는 다양하며 직임도 여러 가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은사를 말하는 중에 "각종 방언(different kinds of tongues-다른 여러 가지 종류의 언어-KJV)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10)라고 하였는데 "각종 방언"은 헬라어 원어로 글로사이(Glossai)로서 이방인들의 여러 언어를 가리킵니다.


12장 28절에도 "각종 방언(varieties of tongues-KJV)"이라 하여 역시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the tongues of men-KJV)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고전 13:1)에서의 "방언" 역시 사람들이 사용하는 외국어를 말합니다. 13장 8, 9, 10절에도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에서 "방언"은 역시 글로사이(Glossai)로 외국어 방언을 뜻합니다.


14장 2절에서는 은사주의자들이 "방언기도"의 증거 구절이라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방언(an unknown tongue: 알 수 없는 언어-KJV)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Mysteries)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이 구절은 방언을 하나님께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문맥이 아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의 사이비 방언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한다고 하는 잘못된 방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쓰인 방언은 그 원어가 글로사(Glossa)로서 앞에서 나온 방언들인 글로사이(Glossai)의 단수형입니다. 흠정역(KJV)에는 이 방언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각국 언어가 아닌 "알 수 없는 언어-an unknown tongue)"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복수형인 글로사이(Glossai)는 이방인들의 언어들을 가리키나 이 단수형인 글로사(Glossa)는 뜻 모르는 중얼거림,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가리킬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 이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 흘러 들어온 이교도 신비주의와 델피 신전 사제들의 주문과 같은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글로사이(Glossai, 고전 12:10, 13:1, 8)는 "외국어 방언"이고 글로사(Glossa, 고전 14:2)는 "뜻모를 소리"라는 것을 바울이 엄격히 구별한 것은 그가 외국어 방언들과 이교주의의 "알 수 없는 소리"를 구별한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14장 2절의 방언을 "이교 신비주의 방언"으로 구체적으로 번역하여 대입시켜 해석해 보면 문맥이 보다 분명해집니다.


"이교도(델피신전)의 신비주의 방언(주문, 알 수 없는 언어)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성경이 말하는 외국어 방언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 하나니(자기들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 하면서 알 수 없는 신비주의 방언을 말하나) 이는 그들의 헛소리를 알아듣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한다고 하며 은폐하는 것이다"


14장 3절 역시 14장 2절과 비교하면서 그런 사이비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우지만(자신이 무슨 신령한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내세우지만) 예언의 은사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므로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니 될 수 있으면 예언하기를 적극 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낱말이 바로 "예언하다(prophesy-KJV)"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예언의 의미를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알아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물론 그런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언하다"의 뜻은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의미로 기록되었다면 예언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점쟁이들이 더 잘할 것입니다. 이 예언하는 은사는 바로 기록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풀어서 해석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당시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잘 해석해서 그것을 가르치는 능력을 예언하는 능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4장 3절에서 "예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때문에 교회의 덕을 세우고 사람들을 권면하고 안위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방언(알 수 없는 소리: an unknown tongue-KJV)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이 말씀은 "사이비 방언하는 자들은 신령한 척, 뜻모를 소리를 중얼거림으로 자기의 교만을 드러내지만(과시하지만) 예언하는(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이는 자기 과시가 아니라 교회를 돕고 교회의 덕을 세운다"라는 뜻입니다.


14장 5절의 "나는 너희가 다 방언들을(tongues-KJV)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에서의 "방언"은 다시 Glossai, 복수형으로 외국어 방언을 뜻합니다. 따라서 외국어 방언의 은사는 누구나 다 받기를 원한다는 바울의 희망인 것입니다.


5. 방언은 믿지 않는 자와 외국인들을 전도하는 수단과 표적이었습니다.


한글 번역 성경에는 14장 2, 4절의 "방언(an unknown tongue-KJV)"과 14장 5절의 "방언들(tongues)"은 그 의미가 틀린데도 "방언"으로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큰 오해를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14장 5절은 "복음 전파하는데 쓰도록 누구나 외국어 방언들(Glossai: tongues-KJV)을 하기를 원하노라"는 뜻입니다.


14장 6-9절까지는 뜻모를 소리로 지껄이는 당시 고린도 교회의 혼란상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비록 그것이 외국어 방언이라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모국어로 말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할 것"(14:9),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4:19)고 강조합니다.


14장 13-17절의 말씀은 얼핏 보기에 매우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방언을 권장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전체적인 문맥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an unknown tongue-KJV)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알 수 있는 말로 해야 하리니) 내가 만일 방언(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an unknown tongue-KJV)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내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무슨 뜻인지 모르기에 아무 영적 유익함, 결실(열매)이 없느니라)"


14장 15절은 "그러므로 이와 같이 결실되는 것이 없으면 어찌 되겠느냐?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뜻모를 방언 기도하는 자들은 이성(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영과 기도하는 마음이나 생각이 일치되어야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18, 19절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들(tongues-KJV, 외국어 방언을 뜻함)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일만 마디의 방언(an unknown tongue: 단수형, 알아들을 수 없는 말)보다 분명히 뜻을 알 수 있는 다섯 마디가 더 낫다"라는 뜻입니다.


14장 21절은 이사야 28장 11, 12절을 인용하면서 불신의 유태인들에게 외국어 방언의 은사를 통해 그 표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만 완악한 유태인들이 순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14장 22-23절은 "그러므로 방언(외국어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고 예언(말씀을 해석해서 전달하는 능력)은 믿는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온 교회가 전부 방언으로만 말한다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너희를 미쳤다고 말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말씀을 풀어서 전달하는 능력)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 25)


14장 26절은 모임 안에서 찬송, 가르침, 방언, 방언통역의 은사를 각자 받은 대로 하되 교회의 덕을 세울 것을 강조합니다.


14장 27-32절에서는 방언은 반드시 통역을 세울 것과 순서대로 할 것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은 잠잠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14장 33, 34절은 지금까지 열거했던 방언을 비롯해서 여러 은사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사이비 방언(an unknown tongue)의 남용, 혼란, 무질서를 제거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34절은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잠잠함과 순종만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여자들은 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여자들에 의해 주도된 신비적, 사단적 방언요소를 제거하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델피 신전의 여사제들은 그들의 제사의식에 의해 신전에 오는 남자들과 동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사제들은 결국에는 창부에 불과한 여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여자들의 주문같은 언어를 교회 안의 여자들이 신령한 척 모방하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요 기만인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37절에서는 "예언(말씀을 풀어서 전달하는 능력)하기를 사모하며 방언들(글로사이(Glossai): tongues-KJV, 즉 외국어 방언을 가리킴)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전서 14장에서는 방언(글로사(Glossa): an unknown tongue-KJV, 알 수 없는 소리, 사이비 방언)과 방언들(글로사이(Glossai): 외국어 방언)이 구분되어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방언, 알 수 없는 언어(an unknown tongue)는 금하여도 복음 전파를 위한 외국어 방언들은 인정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 방언은 세 가지 기원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성령에 의한 방언(tongues, 외국어)


이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위해 전도자로 하여금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여러 나라의 언어를 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이는 신앙적, 영적 성숙이나 능력의 외적인 징표로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라 오직 복음 전파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는 본인의 의지, 노력, 욕망에 의해 자유자재로 되풀이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은사는 초대 교회 이래 흔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현대에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는 나타날 수도 있는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워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2) 사단에 의한 방언(an unknown tongue)


인류학자, 역사학자, 언어학자에 따르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이교도들, 신비주의 밀교주의자들이 약물에 의해 흥분된 상태에서, 또는 우상신, 조상신에 대한 숭배의식에서 이상한 소리를 중얼대는 방언 현상이 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회교도, 힌두교 등에서는 제사의식의 한 부분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교도의 영향이 강했던 고린도 지역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고린도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왔던 것입니다.


(3) 심령술에 의한 방언


영, 혼, 육으로 창조된 인간은 처음에는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이루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의 영은 죄로 오염되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인구가 늘고 지적능력이 발달하자 사단은 인간의 혼(Soul)을 개발하여 영적인 힘을 얻는 방법을 인간에게 전달했습니다. 이것이 심령과학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최면술, 강신술, 영매술, 초능력, 기(氣)를 사용하는 능력, 정신력 개발 등입니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 복술(卜術)을 하지 말며 술수(術數)를 행치 말며"(레 19:26)


성경은 이렇게 복술과 술수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이는 바벨탑 사건이래 세계적으로 점술, 점성술, 신접술 등이 행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바벨탑 사건과 관계되는 니므롯이 이러한 사단에 의한 심령술을 개발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초능력과 심령술로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이고 그것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자신들도 속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최면, 무의식 상태에서 알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영적인 기운을 발산하여 심령치료, 계시, 독심술 등을 행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마법사와 무당들 중에도 그러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도 환자에게 안수하며 영적 에너지를 이용하여 환자를 치료합니다. 안수하여 병을 고치는 심령술사나 무당들은 이러한 능력을 행하고 나면 영적 에너지가 빠져나가는데 은사주의자들도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심령술에 의해 능력을 받은 자는 다시 그 능력을 재충전하기 위해 더 깊은 영적 상태로 빠져 들어갑니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더 강력한 마약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의 방언의 상당수는 바로 이러한 심령술의 혼미한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중얼거림이 많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상적 기도와 뜻모를 소리로 중얼거리는 방언기도(an unknown tongue)의 차이를 요약하여 봅시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인격적인 생각과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집중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방언기도는 자신의 생각과 뜻이 없으며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외쳐댑니다. 이와는 약간 대조적인 방법이지만 마음의 평정을 넘어 자신의 의지를 망각하는 단계까지 도달하는 TM(초월명상, Transcendental Meditation)에서 행하는 기도와 유사합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정신력의 통제를 상실하는데서 오는 무의식적인 언어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러한 은사주의자들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an unknown tongue)은 에큐메니칼 모임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동질화시키는 방법으로 많이 이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방언집회로 하나가 되는 것은 사단의 기만술입니다.


오늘날의 로마 카톨릭도 오순절 은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쇄신 운동"이란 이름으로 방언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소위 방언(an unknown tongue)을 받고 나면 예수님의 단번속죄를 부정하는 "미사"에 더 충성하게 됨을 봅니다.


 그들이 말하는 방언은 성령의 역사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 운동하는 신부들과 오순절 성령운동 하는 자들 중에 오랄 로버트, 짐 베이커, 케더린 쿨만, 펫 로버트슨 등이 연합으로 집회를 열었고 한국에서도 이름난 성령운동가인 모 목사도 그 신부들과 같이 은사집회를 하였으니 어떻게 이것이 성령에 의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날카로운 말씀으로 현대 방언이 성령으로부터 왔는지, 사단으로부터 왔는지를 시험해야 할 것입니다.


7. 현대 방언에 대한 결론


(1) 방언(Tongues)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의 뜻은 분명하며 인격적인 것입니다.


(2) 사이비 방언(an unknown tongue)에 자신을 맡길수록 사단에게 더 강력하게 사로잡히기 쉽고 깊은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됩니다.


(3) 방언(an unknown tongue)을 최고의 은사로 강조하는 은사주의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같이 매우 위험한 신앙상태로 접어들게 됩니다.


(4) 방언은 중독적, 습관적 요소가 강합니다. 그것은 마치 심령의 마약과 같이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습니다.


(5) 방언(an unknown tongue)으로 기도하는 것이 영적인 성숙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권하는 곳은 없습니다.


(6)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오늘날의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주시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은사를 더욱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7) 방언의 은사, 또는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이제는 오직 기록된 말씀 속에서 죄사함의 확신을 얻고 예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출처 : 한국기독교정보학회
글쓴이 : 필레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