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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성 경 공 부

[스크랩] 영성이란 무엇인가?

 

1부 역사신학에서 바라본 영성



1. 영성의 역사신학적 정의.


역사란 세기 마다 나타난 사건들을 취사 선택하여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보편적 가치를 제공해주는 근본 가치를 찾는 작업이다. 이런 역사적 입장에서 영성을 본다면 영성은 각 시대마다 신앙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살피고,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영적인 특징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다양하게 정의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매 순간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프란시스 쉐퍼의 정의가 좋아 보인다. 신앙이란 성령을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며,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며, 이런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고하고, 이들을 영성적 삶을 산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영성은 신앙의 다른 이름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을 나의 주관이나 의지 그리고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영성인가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신앙인이란 의미 자체가 지나치게 일반화되어 평가절하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신앙인이란 개념이 인간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사는 것이므로 영성이나 신앙이나 동일한 개념인데, 현대 사회는 기독교 신앙이 거의 보편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 훼퍼가 나를 따르라는 설교집에서 값싼 은혜라는 제목으로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2. 영성의 교회사적 접근


 이 글에서는 교회사적 접근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접근 방법을 택하고 있다. 소위 동시적(同時的) 접근과 통시적(通時的) 접근인데, 동시적 방법은 교회사의 일반적 시대구분인 초대, 중세, 종교개혁 그리고 근 현세 교회사의 각 시대별 영성적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고, 통시적 방법은 이들 각 시대적 특징을 하나로 통일 요약하므로서 시대를 넘어서 일관되게 흐르는 영성을 정의해 보고자하는 것이다.


 동시적 접근에서 살펴보는 영성의 특징은 초대교회에서는 기독교가 형성되고 자신의 고유한 특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으므로 주로 기독교의 내적 외적 모습의 만들어지는 것에 중요한 초점이 있다. 그래서 예배 영성, 공동체 영성, 성찬 영성 등의 특징으로 불리어진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영성은 "형성의 영성"이라는 특질을 갖는다.


 중세교회는 우리가 서방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서방 교회의 특질을 중세 영성에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동방교회도 독자적인 발전을 했으나 따로 다뤄야 하나 이 글에서는 서방교회로 제한한다. 서방 중세교회는 두 축이 교황권과 수도원인데 영적이고 신비적 흐름을 담당한 것은 주로 수도원 쪽이었다. 중세는 중기쯤해서 금욕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영성이 나타난다. 이것은 제도권 교회가 교리나 예전을 통해서 봉건적 질서, 즉 계급적 위계질서로 고착시키려는 노력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 체험이나 성령을 통한 신비적 체험을 중시하는 (현대의 우리들 시각에서 본다면) 신비적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내에 머물지 않고 사회나 집단의 신앙적 흐름으로 나타났다. 교회 개혁운동과 중세 종교운동 등은 이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들이다. 그러므로 중세의 영성은 체험적 사회영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기의 영성은 쉽게 개혁 영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나 좀더 부연설명을 한다면 중세적 예전이나 교리적 틀을 벗어나 성경이라는 전거 속에서 모든 신앙적 문제를 해결하려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으므로 성서영성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말을 만든다면 성경적 개혁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 현세 교회의 영성은 개신교 중심으로 본다면 경건주의나 청교도적 영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통시적 영성으로 본다면 영성이라는 개념은 제도권 특히 교회라는 틀 속에서 발전 되어왔다. 교회 외의 흐름은 대부분 이단으로 판정 받아 무대에서 사라져 갔기 때문에 영성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어쨋든 교회 공동체를 모태로 해서 발전했다. 그래서 통시적으로 중요한 전제는 공동체 영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영성의 주체자는 평신도였다는 사실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통시적 영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특징은 공동체적 평신도 영성이다.



 3. 맺음말과 제언


 영성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있고, 앞으로도 많이 사용될 것이지만 영성의 객관적 실체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영성이 역사의 현장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성이란 사실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부여받은 사명을 구체적으로 순종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역사신학적 입장에서의 영성은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어서 알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고, 이것이 올바른 영성일 것이다.




 2부 기독교 영성에 대한 이해 


1. 서언


영성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하지만 영성은 하나의 유행으로 된다거나 한번 지나가면 끝나는 경향쯤으로 여겨져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뒤에 살피겠지만 영성은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은 곧 기독교인들의 삶의 현실과의 관련성이라면 영성은 유행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현실적 삶의 문제가 되고,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을 정리, 정의 하는 것은 그만큼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 글은 우리 시대에 하나의 화두로 등장한 기독교 영성이라는 개념을 정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영성의 역사와 그 의미, 그 용어의 성서적 배경, 그리고 우리 시대에 영성이 화두가 된 시대적 배경 등을 살펴보고자 하는 개론적 고찰이다.


 2. 기독교 영성의 정의


최근에 나온 기독교 영성에 관한 한 책은 기독교 영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기독교 영성이란 기독교 신앙을 삶 속에서 일반적인 형태로, 또는 보다 특수화된 형태로 실제로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영성은 믿음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종교적 의식과 수행 안에서 믿음이 일으키는 반응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교리와 구분 된다. 또한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모든 행동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의 보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관계가 있는 행동들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기독교 윤리학과 구분된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영성의 정의는 "신앙을 실제로 체험"한다거나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분명한 관계가 있는 행동"과 관계시키므로 실제적 삶과의 연관성을 중시하고 있다. 이것은 영성에 관해서 정의를 시도하는 많은 학자들이 거의 비슷하다. 정용석 교수는 "기독교 영성이란 신앙의 체험, 훈련,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전인적 총체적 삶"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하워드 라이스는 "개혁주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개혁주의 전통에서 본다면 "경건"이라는 단어가 곧 "영성'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주장하면서, 역시 같은 주장, 그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응하여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양식", 을 영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영성의 정의나 의미는 삶의 현장이나 체험과 분리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즉 위의 정의에서도 나온 것처럼 윤리학이나 교리적 접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경험적 차원에서 되어지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 영성은 다양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또한 개인이나 그룹등 구성원의 수와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와 특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영성의 정의는 매우 다양하여 어느 하나를 대표적 정의로 내세울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각기 다른 구성원이나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특성이 나타나므로 기독교 영성의 정의가 서로 다르게 나타날 개연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정의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은 "구체적 삶에서의 하나님 체험"이다. 즉 이론이나 학문적 접근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근거로 해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공통점을 가지고 영성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것은 위에서 공통점으로 지적한 내용에 다름 아니다. 즉 영성이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3. "영성"이라는 용어


3.1. 성서적 배경


원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인 "영성"은 라틴어 스피리투알리타스(spiritualitas)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영어, 블어, 독일어 등 현대 서구어에서 거의 비슷한 형태로 전이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스피리투스"(spititus)이다. 이 단어는 숨, 호흡, 입김이나 대기 중에 있는 공기, 산들바람 등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동시에

신(神)의 입김이란 뜻인 영감(inspiration)의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 단어에서 파생된 형용사형인 스피리투알리스(spiritualis)는 "영으로 채워진", "정신적인", "영적인" 등의 뜻이 있고, 이 단어의 명사형이 우리가 말하는 스피리투알리타스 즉 "영성"인 것이다. 이 단어는 물론 라틴어가 사용되던 라틴 문화권적 배경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신구약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사용됨으로서 신 구약적 배경, 즉 성서적으로도 이 영성이라는 개념을 조사해 볼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즉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어떤 단어가 이 단어로 번역되었는지를 살피므로서 영성이란 개념을 성서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라틴어 성경에 "스피리투알리스" 즉 "영성"이란 단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단어의 뿌리인 "스피리투스"와 형용사형인 "스피리투알리스"는 대단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구약에서는 이 두 단어에 상응하는 단어를 살펴보므로 이 단어의 성서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이 글의 목적이 영성의 성서적 배경을 살피는데 있지 않으므로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것이다. 구약에서 영성, 또는 영적인 것에 상응하는 단어는 두 개다. 하나는 루아흐(   )이고 다른 하나는 네페쉬(   )이다. 이 단어들은 영이나 혼, 또는 영혼으로 번역이 되는데 곧 라틴어 단어 스피리투스로 번역이 되어있는 단어들이다. 단어상의 뜻은 루아흐는 호흡, 기식, 공기, 생명, 바람, 정신, 영혼등의 뜻이고 네페쉬는 원래 목구멍, 식도, 욕구, 욕망, 생명, 개별적인 삶 자체, 또 생명체나 인간을 나타낸다. 이들 단어는 영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을 나타낼 때 혼합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보통 네페쉬는 육신을 말하는 히브리 단어 바사르(   )의 반대 개념이다. 그러므로 네페쉬는 정신, 영혼, 마음 등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루아흐는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숨이다. 원래 이 루아흐의 뜻은 "움직이는 공기", 즉 숨, 호흡의 뜻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보면 루아흐는 만물을 살리는 힘이나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되고, 네페쉬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원래 우리가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단어의 원형인 "스피리투알리타스" 또는 "스피리투스"가 호흡이나 신의 입김을 뜻한다는 것과 의미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영성은 네페쉬보다는 루아흐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이것은 루아흐의 라틴어 번역은 대부분 영혼이나 생명, 공기, 또는 생기로 번역되었다는 데서도 그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이제 신약을 살펴 볼 차례이다. 이것은 구약이 그리스어로 된 구약성서인 70인 역으로 번역될 때 이 루아흐가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를 살피고, 이 단어가 신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여기서도 상세한 설명은 약하기로 하고 간단히 말하면 프뉘마와 프쉬케로 번역이 되어있다. 그리고 루아흐에 해당하는 번역은 프뉘마이다. 그런데 이 프뉘마 역시 바람, 호흡, 생명, 영혼, 그리고 전이적 의미로 영(soul)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이 프뉘마의 뜻이 인간의 생명이나 육체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나 독자적 능력을 갖는 영적 존재에 대해 프쉬케가 아니라 프뉘마가 사용된 것을 보면 (악령을 말할 때 대개 프뉘마가 사용되고 있다) 구약에서의 루아흐의 의미가 신약에서는 프뉘마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은 특히 바울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는 고린도전서 2장 14절, 로마서 8장 5절, 또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 등에서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일을 구별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때 "영적", "성령" 등의 단어가 나타나는데, 여기에 바로 프뉘마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영성"은 성경적 근거를 가지며, 그 단어는 루아흐와 프뉘마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둘째는 이 "영성"이라는 단어는 루아흐와 프뉘마라는 단어의 뜻에 비춰볼 때 공기, 숨, 생명이라는 뜻 외에 어떤 것을 살게 하는 (또는 영향을 미치는) 실체적 존재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어 "영성"에다 나 자신에 의해 길러지고,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외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지는 힘의 근원, 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힘이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성은 그 단어상 외부적 힘에 의해 어떤 능력을 받아 인간이나 어떤 생명체를 살게 하는 힘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에서 우리가 내린 정의인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은 성경적 의미와 관련하여 좀더 구체화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와 교제하되, 그 체험의 주도권, 즉 경험이나 일상적 삶에서의 주체가 나, 즉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성령이라는 것이다. 루아흐나 프뉘마가 사람의 영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야기되는 외부적 힘이라면 이로 인한 기독교 영성은 당연히 성령의 인도나 그의 주체적 역할 아래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3.2. 교회사적 배경


스피리투알리타스(spiritualitas)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5세기 초 리쯔의 파우스투스(Faustus of Riez)가 썼다고 여겨지는 위(爲) 제롬(Pseudo-Jerome)의 서신에 나오는 "영성의 발전을 위하여 행동하라" (Age ut in spiritualitate proficias)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의 뜻은 바울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성령에 따라 살 것을 권하는 말이라 한다. 한편 9세기에 수도사 칸디두스는 이 스피리투알리타스를 코르포랄리타스(corporalitas: 육체)나 마테리알리타스(materialitas: 물질)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하므로 영성이 육체나 물질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전초를 열었고, 그 결과 중세 전체에서 정신적, 이성적 의미로 사용되거나 또는 신비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어 아퀴나스도 이렇게 사용했다고 한다. 그후 17세기부터 프랑스에서 경건한 종교적 삶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원래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한다. 이 단어가 가지는 부정적 인식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다가 유명한 프랑스 신학자 삐에르 뿌라(Pierre Pourrat, 1871-1957)가 신학을 교의(theologia dogmatica), 윤리(th. moralis), 영성(th. spiritualis)으로 분류하면서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고,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최초로 기독교 전시대를 다룬 영성사를 저술했다.그리고 1920년부터 프랑스에서 기독교 영성 연구지가 발간되기 시작했고, 1932년에 기독교 영성 사전(Dictionaire de spiritualite)이 출판되기 시작했으며, 1943년 파리 가톨릭 협회가 영성사 강좌를 개설하고 저명한 신학자 에티엔느 질송을 초청하여 "영성의 신학과 역사"라는 강연을 개최하였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영어권에서도 영성 즉 스피리투알리티(spirituality)라는 단어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사전, 연구서, 전집, 세미나 등 영성에 관계된 여러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한편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에 냉담한 반응을 보여왔고, 영성이란 표현 보다는 경건이나 헌신이란 용어를 선호했으며, 특히 종교개혁자들이 영성을 중세의 펠라기우스적 입장과 같은 것으로 보고 배척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영성이란 말을 열정주의나 신비주의와 연관시켜 생각했으며, 신앙생활에서 도덕적 요소를 무시한다는 의혹을 품어왔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개신교적 입장에서 정리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영성'이란 단어는 많은 개혁주의 개신교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고 전제하는 하워드 라이스는 이것은 영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영성이 없이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고있다.이것은 영성에 대한 이해가 수덕이나 관상 또는 어떤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즉 영성이 영혼과 육체, 물질, 세상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도식 속에서 개인 수덕이나 자기 부정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특별한 소수의 성직자나 종교인의 영적 능력이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가 현대에 와서 점차로 인간 삶 또는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말로 폭넓게 사용되어 사회적, 정치적 영역까지 포함하는 전인적, 총체적 삶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흐름과 함께 오늘날은 한국 기독교 뿐만 아니라 세계 기독교계가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4. 기독교 영성의 내용과 현실적 과제


우리는 위에서 기독교 영성에 대한 정의와 용어, 역사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이 기독교 영성의 내용과 현실적 과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영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와 역사적으로 어떤 모습들로 나타났는지에 관해서 살피고, 현실적 과제에서는 영성이 우리시대에 갑자기 부각되어 나타난 배경을 고찰할 것이다.


 4.1. 영성의 내용


우리는 위에서 영성을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영성에 관해서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신비주의적 입장이나 금욕, 정화, 고난, 사랑, 참여, 성화 등 여러 모습으로 설명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영성이 어떤 본질적 면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면 때문에 타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이 나타나기 전에 거쳐야할 과정이 있다. 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의 첫 단계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체험하는 것은 다르다. 아는 것이 하나님에 관해 정의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체험하는 것은 그를 느끼고 그에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적 반응은 기도와 관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게 됨으로 가능하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느끼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보통 은혜, 또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설명한다. 은혜나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이것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의 생각이나 주관적 의지가 아니라 다른 존재에 의해 그것이 수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바울이 제시하는 성령의 사역과 일치한다.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므로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즉 자신이 아니라 다른 존재인 영이 내 속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이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육에 의한 규정성에서 영에 의한 규정성"으로 바뀌는 본질적 변화를 말한다. 이런 변화는 물론 눈에 보인다거나 겉으로 나타나는 외형적 변화가 아니다. 하지만 변화인 것은 분명하다. 결국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신비적 체험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바뀐다. 이제 하나님의 영이 자신 속에 함께 함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지나치게 자주 좌절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이 가졌던 고민 즉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5)의 의미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2-24)라는 고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영을 좇아 살려는 사람은 자기를 쳐서 그리스도의 영에 복종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 노력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순례"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영혼의 순례, 즉 자신을 그리스도의 영에 복종시키려는 노력은 보통 몇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완성, 즉 성화되어 가게 된다. 이 과정의 설명에는 몇가지 유형이 있으나 수덕적 단계와 신비적 단계의 2단계로 나누는 설명과 정화, 계몽, 합일의 3단계로 보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신비적 단계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뜻하기 때문에 신비적 단계와 합일의 단계는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3단계로 나누는 방식은 수덕적 단계를 정화와 계몽(혹은 조명)의 둘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2단계로 보든 3단계로 보든 어쨌든 이러한 과정은 영적인 성장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과정을 보면 초기 단계에는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이나 금욕적 경향이지만 영적으로 성장을 하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이때는 자신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영에 복종된 상태, 즉 자아가 죽고 육신이 영에 수동적으로 이끌리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정화와 계몽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에 집중하여 그리스도, 특히 그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묵상하는 능동적 노력이지만, 이러한 기도가 진보함에 따라 점점 더 자기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은사에 의해 수동적으로 붙들려지는 관상의 기도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들이 기도를 통해 점점 더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역시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체험의 중심은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끝에 바로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 곧 합일이 있다. 이러한 신비 체험은 종종 삼위일체적 영성으로 표현된다. 즉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도록 인간을 자신에게로 변형시키시고 일치시키는 삼위일체적 삶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될 때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는 바울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더 이상 자기가 중심이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은혜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이 되고,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이웃을 위한 사랑이나 시대적 고난 등 실제적 삶에서 예수를 따르는 삶이 나타나게 된다. 성화의 과정이자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Imitatio Christi)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의 훈련 과정은 자기 부정의 단계에서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하나 하나 마다 독특한 외형적 특질을 나타내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모든 과정은 현실의 기독교나 교회와 연관성을 갖고 외형적 모습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래서 어떤사람들은 극단적인 사막 금욕이나 명상의 모습을 취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이웃사랑이나 평화 등을 주장하게하며, 어떤 때는 현실참여와 투쟁의 모습까지도 영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교회사에서 영성이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4.2. 영성의 현대적 의미


이제 영성이 가지는 현실적 의미 관해 짚어보기로 한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대두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세계적으로 영성운동이 확산된 이유는 20세기 후반의 문명 반전의 패러다임 변환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 문명은 그 태동 자체가 근세에 나타난 이성주의와 과학주의를 모태로 출발했다. 이것은 모든 것을 객관화시켜보자는, 즉 모든 것을 그것자체로 증명해 보이고 가치를 찾아내고자 하는 객관성을 인식의 근본 바탕으로 삼자는 과학주의적 인식론적 전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객관성은 다시 두 개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그것이 진리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는 의미의 과학적 객관성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수긍하고 동의한다는 의미에서의 주관적 객관성인데, 전자는 자연과학을 주도했고, 후자는 정치와 윤리를 주도했다. 이러한 객관성 위주의 과학과 윤리는 본질적이고, 본체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잃게하고 눈앞에 보이는 이익과 편리함만 추구하는 경향을 만들어 냈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전제하에 자신의 소욕과 욕심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현상을 낳았다. 이렇게 해서 학문의 흐름은 존재론적 입장에서 인식론적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래서 인간의 주체성과 능동성은 부각시켰으나 인간밖에 있는 실체는 인정치 않는 경향, 즉 인간 바깥에 있는 객체의 신비를 인정치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생태학적 위기가 인간을 포함한 생명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등장하게 되자 지금까지의 과학적 실증주의의 패러다임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되었고, 자기반성과 수정이 불가피하게 요구되었다. 이는 근세 이후 인간의 역사를 지배해온 계몽주의적 이성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드러내 준 것으로,  지금까지 전통적인 모든 것이 도전받고 해체되며, 모든 것을 다시 세우려는 노력과 도전이 곳곳에서 나타나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것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심대하다. 결과론적으로 영성에 관심을 돌리는 계기도 이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전통적 신학방식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논리와 실증을 통해 컨테이너에 냉동시켜 저장하던 이성주의적 인문주의 방식"에 안주했던 신학이 해체의 때를 맞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신학적 인문주의의 대표격인 역사비평은 문자주의라는 구시대적 신학 방법, 예를 들어 사랑을 느낌이나 감정으로보다는 개념이나 정의로 설명하고자 했던 그 방식이 이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리"와 "신학 지식"에 의존하고, "윤리"와 "사회 개혁 프로그램"에 집중해온 전통적 교회는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한국기독교, 한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기독교 역시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 삶의 문제에 대해 적절한 해답이나 방향제시를 못했던 것이 사실인 것이다. 이는 한국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한국의 "기독교가 그 신앙의 본질성을 상실하고 신앙 없는 기독교, 사랑의 실천과 교회의 역사적 책임성을 망각한 교회, 세속 이데올로기화로서의 신학의 변질 등 현실에의 반작용으로 이해"해야할 것이라는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즉 그 동안 한국교회가 무분별한 물량적 성장만을 중시하고, 서양신학의 무조건적 답습, 정치적이고 외적인 모습에의 집착 등을 통해 기독교 고유의 모습을 찾으려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살았던 결과가 영성에의 관심이라는 측면을 만들어 냈다.현재에 나타난 한국교회 영성 연구 흐름은 두갈래로 나눠진다. 하나는 현실참여를 중시하는 쪽 (김경재, 박종화 등)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적 입장을 중시하는 쪽(오성춘, 이수영, 이후정 등)이다. 그렇다고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신학적 접근의 방향과는 좀 다르게 성령론적 입장에서 실제적으로 접근하는 방향이 박철수 목사를 중심한 "영성 운동"이다. 이러한 세갈래의 흐름이 서로를 보완해 주면서 함께 발전하면 한국교회 영성 운동이 한국교회의 회복에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 된다.


 5. 결어


우리는 지금까지 영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몇가지를 살펴보았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영성은 성경적 근거나 교회사적 근거를 가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기독교적 모습을 갖기 위해서 영성에 대한 관심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특히 영성이 하나님 중심, 삼위일체 신앙의 현실적 체험이 영성으로 이해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위협 받고 있는 기독교가 기독교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으로서 영성이 거론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면에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관심 역시 영성에서 간과해서는 않될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잊어서는 않될 것이다. 앞으로 한국교회에 올바른 영성 운동이 활성화되어 부끄러운 기독교를 만들어낸 한국교회가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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