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적 경향의 신학 학파들
[신비주의와 경건주의]
1. 합리적 이성주의
실천적 경향의 신학학파는 보통 이성주의라고 요약할 수 있다. 13세기부터 시작된 유명론적 경향은 자연이나 경험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눈에 보이는 것, 또는 실제로 경험하는 것들을 통해서 객관적 진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 또는 실제로 경험하는 것들을 통해서 객관적 진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이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반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의 대표자는 데카르트인데 경향은 다르지만 같은 계열에다 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흄과 칸트이다.
데카르트는 종교개혁 이후 신앙에 기초하지 않고, 철저히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진리를 증명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러므로 객관적 증명을 시도했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런 시도를 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방법적으로 증명한 사람은 데카르트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을 진리 전개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이런 연유로 그의 증명 방식을 '방법적 회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가 회의적 방법을 사용했다고 해서 신앙을 부정했다거나 하나님에 대해 어떤 불경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육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 속에서 '보다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의심할 것 없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기본 전제로 그의 증명을 전개했다.
하지만 당신의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것을 증명할 때 신앙을 전제하지 않고 인간 이성에 맞춰서 회의를 통해서 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의심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자들의 일부는 이 이론은 틀림없이 이단으로 발전하게 되리라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자 원래 온건한 성향의 인물이었던 데카르트는 놀라서 조국 프랑스를 떠나 스웨덴으로 갔고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기존 신학이나 기독교에 저항하거나 비판적 입장에 서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데카르트의 주장으로 인해 신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이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크게 나타난 부분이 영혼과 육체의 관계성에 대한 문제였다.
원래 데카르트는 전통적 입장의 신학적 전제인 영혼과 육체를 사용해서 영혼은 '생각하는 존재', 육체는 물체를 사용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하고 있지 않았다. 정신이 생각할 때 생각에 따른 결정이 어떻게 영혼으로 전달되는가의 문제에 명확한 설명이나 이론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의 설명으로 되어진 가설이 기회 원인론과 일원론, 또 예정 조화론이었다.
기회 원인론은 네덜란드 출신의 철학자 아놀드 겔링크스와 프랑스 신부 니콜라스 말브랑슈에 의해 주장된 것으로,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육체와 영혼이 직접적으로 서로 교통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중재를 통해서만 연결된다고 주장했다'(곤잘레스, 103) 영혼이 결정하는 '경우'에 하나님께서 곧바로 육체를 움직이시고 육체의 감각과 요구를 따라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움직이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사상은 그렇게 널리 인정 받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 이론에 따르면 육체를 가진 인간과 생각과 영혼을 지배하는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연결되고, 그렇다면 육체의 필요에 따라 영혼을 움직인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에 관해서도 원인 제공자로서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원론은 네덜란드 학자 스피노자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그는 하나 이상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육체와 영혼은 하나라고 주장하므로서 영혼과 육체의 교통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즉 그는 '빨강'과 '둥근' 것이 합해져서 사과라는 실체를 이루듯이 생각하는 것과 육체적인 것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한 실체의 두 속성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마지막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예정 조화론을 살펴보자. 그는 스피노자와는 반대로 완전히 독립적인 실체들인 모나드(단자)가 무수히 존재하는데, 이들은 서로 교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원래의 질서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론 역시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지나치게 기계적이 되어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이해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성주의는 대륙에서 관념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다른 색깔로 발전했다. 그것이 곧 경험론인데 이것 역시 데카르트를 그 출발점으로 한다. 이것의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던 존 로크였는데, 그는 이 세상 질서와 지성의 질서가 일치한다는 데카르트의 기본 주장에는 동의했으나 영혼을 통한 선 지식개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께서 영혼을 창조하셨고, 이 창조 때문에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래서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 경험은 감각을 통한 외부적 경험과 우리 자신이나 지성의 기능을 알게 해주는 내면적 경험이 다같이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 경험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는데, 우리들 자신, 외부적 실재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라는 존재가 경험에 의해서 매 순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이 세가지 차원을 떠나서는 확실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지식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의 지식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개연성'의 지식이다. 이것은 확실하게 증명되지 않으나 이성에 의한 판단으로 나타나는 지식이다. 이는 경험을 통해서 아는 지식이 현실과 연결되어 자신의 판단의 판단이 옳다고 여겨지게 하는 지식을 말한다. 이것은 정확하고 맞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현실생활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있어야 하는 지식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에서 감정이나 개연성에 의존하는 신앙을 '광신적 열정주의'라고 표현하고 이것을 옳지 않다고 주장한 반면, '기독교의 합리성'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기독교는 모든 종교들 가운데 가장 합리적 종교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인데 이것은 이성과 판단을 올바로 사용하기만 하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이성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가장 합리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들은 결국 신을 이론과 합리성을 통해서 즉 이성을 통한 논증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곧 이신론이다. 이들은 자유사상가로 불려지기도 했는데 이론자란 무신론자와 구별하기 위해서 였으며, 자유사상이란 정통적 교리나 설명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신론의 선구자는 하버트라할 수 있는데 그는 모든 진정한 종교는 보편적이어야 하는데, 이는 모두에게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보편 종교의 일반적이어야 하는 교리 다섯을 내세웠는데 하나님의 존재, 예배의 의무, 예배의 도덕적 책임, 회개의 필요성, 이승과 내세에서의 상벌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보편 종교가 가져야 하는 기본 특징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첨가될 수는 있으나 이 기본 원칙에 위배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성을 통해 종교가 '정의'되는데 까지 온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데이비드 흄의 경험론 비판을 통해 인간의 경험은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변하게 된다. 흄은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이 절대적이거나 증명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경험과 지식은 어떤 필연적 결과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 느낌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사과를 먹을 때에 우리가 사과에서 느끼는 맛, 색깔, 무게, 냄새 등 경험을 근거로 우리는 사과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고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사과라는 실체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느끼는 사과와 사과의 실체와 서로 같은 것이고 분명하다고 증명할 수단이나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어떤 것이 가진 '속성'이나 '성질'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의 실체나 본질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 이론에 따르면 실체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이나 '영혼'은 설명할 수 없고,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이나 영혼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바탕 위에서 볼테르나 몽테스큐는 신앙을 부정하거나 증명될 수 없다는 전제를 갖고 이론 전개를 하기 시작했다. 볼테르는 그런 면에서 무신론자의 대표로 꼽힌다.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합리적인 이성을 중시했던 이들이 현대 권력 구조의 전형인 삼권 분립이나 공화정, 민주정을 주장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이권 분립을 주장했던 로크도 이신론의 중요한 학자였던 것을 보면 신앙보다 이성의 우선이 현대 민주정치나 공화정치의 기본 바탕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루소도 마찬가지다. 루소는 '도그마나 각종 종교 조직체들은 인간의 진보를 특징 지은 부패의 일부'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리고 이 바탕 위에서 그는 자연 종교, 내지는 무위 자연설을 주장했다. 이들에게 종교는 이성의 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결국 칸트에 의해 종합된다. 흄의 입장을 발전시켰던 칸트는 극단적 이성주의자였던 볼테르나 몽테스큐의 이론도 비판하고 이성의 한계를 주장하고 아예 하나님과 이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어떤 것을 설명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고 종교는 실천이성, 즉 생활의 도덕적이기 위해서, 보편적 규범을 위한 기본 규범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물론 이것을 통해 칸트는 교회에서 엄중한 경고를 받았고, 칸트는 교회나 신앙과 관련시켜서는 입을 다물었으나 신앙도 이성도 이제는 더 이상 절대적이지 못하고 현실과 모든 사람들과의 조화 있는 삶이 가장 중요한 시대가 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가설들은 종교개혁 이후 나타난 새로운 사상의 조류를 잘 보여 주고있다. 즉 이제 신앙이나 믿음을 통한 이해가 아니라 이성과 합리적 설명을 통한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자신의 명제 전개에서 주어를 '나'로 삼은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즉 그가 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외부적 어떤 존재나 전제 없이 시작과 끝이 모든 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앞으로의 이성주의 내지는 합리주의의 방향이 어떠할지를 잘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나'는 후에 '이성'이 되고 '객관'이 되고 '합리'의 대명사가 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데카르트는 합리주의나 이성주의의 시작점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2.신비주의
학자들과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이성주의 이론들이 발전되는 반면에 신앙인들에게서 새로운 경향의 신앙 성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은 이성이나 합리적 설명의 경향을 따르는 교리나 이론 신학과는 반대로 실천이나 신앙적 체험 또는 생활 속에서의 신앙을 중시하는 경향이었다. 이는 또한 이론 신학이나 도그마적 경향의 신학이 교육받은 사람들이나 상류층의 사람들만에 의해서 이끌어지던 신학과 신학이 대중과 일반 민중에 의해 정리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17, 18세기의 신비주의 운동은 이론이나 도그마적 신학에 식상해 있던 지식인들이나 또는 신앙적 자기 표출의 기회가 거의 없었던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에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신비주의는 그 자체의 특징 때문에 제대로 연구되기가 힘들다. 신비적 경향이나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는 신앙의 모습들은 비밀스럽게 시행되고 전수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들은 보통 아콥 뵈메, 죠지 폭스, 그리고 스웨덴보리 등이다. 이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야콥 뵈메(1575-1624)는 독일 실루지아 지방 태생으로 깊은 신앙의 소유자였는데 당시의 교리적이고 논쟁적인 신학 해석이나 설교에 대해서 식상했다고 한다. 그런데14살 때 제화 견습공으로 들어갔는데 도제를 시작할 때부터 그는 신비한 환상을 보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직장을 쫓겨난 그는 방랑생활을 하면서 구두 수선을 하면서 그는 당시 교회의 지도층이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논쟁의 바벨탑을 세우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이론이 아니라 내면적 경건에 관한 책을 닥치는대로 읽고 공부를 시작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는 세상과 인간 생활에 관한 일련의 결론에 도달했으며 이 결론은 그의 환상을 통해 확인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환상을 글로 남기도록 명하신다고 확신한 그는 자신의 사상을 '찬란한 여명'이라는 책에서 피력했고,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자 한자 그대로 옮겨 적었을 뿐이며, 사용된 것은 단지 하나님의 손에 잡힌 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책이 출판되지는 않았으나 사본 중 하나가 그 지역의 목사의 손에 들어가고 이 목사에 의해 고발 당하게 되었다. 재판을 통해서 종교 문제에 관해 누구도 가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난 그는 5년간 그 약속을 지켰으나 1618년 새로 받은 환상과 추종자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책을 썼는데 그 내용 중 일부가 그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 때문에 그는 다시 고발되고 그가 구두 가게를 살고 있던 괴를리츠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신학자들은 뵈메의 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규명해 보려 했으나 도저히 규명치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기독교 이론 뿐 아니라 점성술, 신지학, 연금술 등 신비하고도 이상한 내용들이 이상한 은유법을 사용하여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자들은 그에게 그의 사상을 더 명확히 진술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중병에 걸린 그는 얼마안가 죽고 말았다.
우리가 뵈메에게 의미를 두는 것은 그가 주장한 내용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 의미를 두는 이유는 그가 당시의 일반적이었던 신앙의 경향, 이론과 도그마를 통해 모든 내용을 규정하려 했던 경향을 부정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그렇다. 성경의 내용을 갖고 따지지 말고 성경을 주신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경의 저자인 성령이 내 속에 있다면 성경 역시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뵈메는 사상이 아니라 실천과 신비적 경향 때문에 소위 '뵈메주의자'라고 불리는 신앙 운동의 일단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조지 폭스의 퀘이커교도들과 논쟁을 하기도 해서 전통 신학이나 교리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서 시작된 신비주의 운동 역시 교리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는데, 이는 어쩌면 교회나 신앙 공동체는 교리라는 테두리가 중요한 근거임을 나타내 주는 지도 모른다.
다음은 조지 폭스와 퀘이커에 대해 살펴보자.
폭스는 뵈메가 죽던 해 영국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가난한 집 출신인 그는 어렸을 때 제화공으로 일하다가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신앙 갱신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성경을 거의 암송했다고 하며, 또 절망과 위로, 또 신비적 체험을 통한 확신 등 수많은 종교적 경험을 하면서 마침내 어떤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당신 영국의 모든 교파들은 잘못된 것이며,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가 보기에 교회라는 건물들은 위선자들의 집합체였으며, 또 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삯군 목사들이 대부분이었고, 찬송, 예배 순서, 설교 성례, 신앙 고백, 목회자 등은 모두 성령의 자유를 훼방하는 인간들의 발명품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예배를 방해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했다. 제도권 교회에서는 그를 막고자 노력했으나 그를 따르는 추종자가 급증하므로, 그의 운동은 사회 세력화 되었다. 그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예배 형식을 만들어 냈는데, 예배에는 그 어떤 형식도 성령의 사역에 방해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침묵에서 시작하고, 누구든지 큰소리로 말하고 싶거나 기도하고 싶은 자는 그렇게 해야 하고 또 설교하고 싶거나 간증하고 싶은 자들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도록 했다. 즉 성령께서 하시도록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들의 교리상의 주장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에게는'내면의 빛'이 주어져 있어서 이 빛의 덕분에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이런 이유로 이교도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런데 양심이나 지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어진 인간의 능력이다.
이런 주장과 신앙 운동으로 인해 폭스는 여러 번 감옥에 갇혔는데, 정부의 사면제안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는 사면을 동의하는 것은 자신이 범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는 이유였다. 퀘이커 분파는 죠지 폭스의 사망 후 영국 귀족의 아들이었던 펜에 의해 미국을 거점으로 발전하게 되고 영국 왕에게서 빚 대신 받은 미국의 땅을 퀘이커들의 신앙을 위한 땅으로 사용하므로서 미국에서 발전의 기틀을 열었다. 여기서 이들은 소위 '거룩한 실험'이라고 불렀던 정책을 실현하고자 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인디언들에게까지 생존의 자유를 준다는 것이었다. 펜실바니아의 초대 총독이었던 펜의 의지에 따라 초기에는 인디언이나 여러 종교들이 우호적으로 어울릴 수 있었으나 나중에 1750년 총독은 인디언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므로서, 펜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퀘이커들은 모든 공직을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펜의 사상은 마침내 미국 헌법에 채택이 되고, 이것을 근거로 '종교의 자유'가 기본권으로 자리 매김 된다. 작은 분파이자, 이단시되는 운동이었지만 이들이 인류역사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임마누엘 스웨덴 보리(1688-1772)는 죠지 폭스와 유사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폭스가 죽기 3년 전에 태어났는데, 폭스와는 달리 그는 귀족 가문 태생이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종교적 신비를 경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연구 중에 영계로 옮겨지는 환상을 보았고, 이 환상 속에서 그는 영원한 진리들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 진리를 근거로 그는 성경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속성의 반영이며,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상응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성경 역시 영계에 들어가 본 사람 만이 진정으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죽은지 12년 후 그의 제자들이 새 예루살렘 교회를 창립했는데, 교인 수는 별로 많지 않았으나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세 사람은 나름대로 활동은 시대와 관련해서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전체 교회와 사회에서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세 지향적이요,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은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를 가질지 모르나 사회를 변혁시키고, 사회의 흐름 자체를 변하게 하는데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한국의 보수 교단이 가지는 한계와 같은 것이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경건주의와 그 분파
경건주의란 신학자들의 교리 우선주의와 철학자들의 이성주의에 대한 응답이었다.
왜냐하면 교리 우선주의나 이성주의 모두가 기독교의 핵심인 살아 있는 삶에서의 신앙과 대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3.독일의 경건주의
독일의 경건주의는 필립 야콥 스페너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경건주의의 아버지'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는 철저한 루터란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어 프랑크푸르트에서 목회를 했다. 여기에서 그는 '경건한 열망'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이 책이 후에 경건주의의 교과서가 된다.
이 책의 내용은 만민제사장설을 주장하는 루터파 교리를 강조하여 평신도와 성직자간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공동 책임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것을 제안하고 잇다. 이는 곧 평신도의 보다 열렬한 경건 훈련과 성경 공부의 시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 소그룹 활동이 효과적이며, 목회자이기 위해서는 깊은 신앙이 기본 전제임을 주장했고, 특히 설교자들이 지나치게 교리적이고 논쟁적인 것을 피하고 하나님 말씀에 충성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목적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스페너는 당신의 기존 교리들 중 아무 것도 비판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교리에 완전히 승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교리가 개인적 신앙의 대상이 아님은 분명히 했다. 그 이유는 신학적 오류가 개인의 생활에서 잘못된 신앙을 가지게 해서 심각한 불행으로 인도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신앙이 교리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기독교의 풍요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그는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미완의 개혁이기 때문에 이제 종교개혁의 완성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신앙인들에게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교회와 정통 신학자들에게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상당히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교리의 세세한 부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성화를 강조했고, 성경을 통한 은혜와 믿음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루터의 강조점인 이신칭의가 약화된 듯이 보였기 때문에 루터파 신학자들은 그를 칼빈주의자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와 전통적 신학자들과의 차이를 요약한다면 신학자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확한 교리와 일반적 사회 규범에 맞는 도덕 생활이라고 주장한 반면, 경건주의자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요구는 전혀 다르며 소위 절대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물론 사회와 서로 편한 관계로 잘 조화하고 있던 제도권 교회에는 상당히 거북한 도전이었다.
스페너의 주장은 그의 제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에 의해 이어졌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기쁨에 대해서 강조했는데, 이러한 기쁨을 그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종교적 신비 체험을 설명하면서, 체험 후에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을 단지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로 부를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중에 경건주의자들은 개인적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경건주의자들이 기독교 역사에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시작이다. 생존 문제에 급급해 선교에 눈을 돌리지 못했던 16세기와는 달리 이들은 선교에 성공할 수 있었다. 선교의 계기는 이 경건주의자들을 깊이 존경했던 네덜란드왕이 인도의 식민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했을 때 바로 할레 대학 교수로 있었던 프랑케에게 그의 제자들 중에서 선교사를 추천해 주도록 부탁했고 이를 받아들인 프랑케가 그의 두 제자들이 인도의 선교사로 갔고 이들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경건주의자들은 전체적으로 선교에 흥미를 갖게 되고 그래서 할레 대학이 개신교 선교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프랑케의 뛰어난 제자 중 한사람이 경건주의를 거점으로 모라비안파를 만들어 낸 진젠도르프이다. 그는 원래 프랑케에게 경건주의를 배우고 드레스텐 궁중 목사로 일하다가 모라비안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원래 박해를 피해 고향 모라비아를 떠난 후스파의 후예였는데, 그들의 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은 진젠도르프는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이들에게 정착할 곳을 마련해 주었다. 후에 그는 목사직을 사임하고 이들과 합류하여 그들을 루터란 교구에 합류시켰다. 그러나 이 여납은 별로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외국인 신앙가들을 정통 루터란들은 별로 좋은 시각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젠도르프가 네덜란드에서 개종한 에스키모인들을 만난 후, 그는 선교열에 불탔으며, 그 결과 1732년 카리브에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수년 후에 아프리카, 인디아,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등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래서 200명 가량의 피난민들로 시작된 이들의 선교 운동은 해외에다 1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정도로 발전했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루터파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서 마침내 서로 재 분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까지도 소수파로 남아 있는데 이들이 교회사에 미친 영향은 선교와 요한 웨슬레에게 준 영향일 것이다.
요한 웨슬레는 모라비안 형제들이 미국으로 전도하러 가는 배에 함께 타고 있었다. 그는 미국 조지아주지사의 초청으로 역시 선교하러 가는 중이었다. 선상에서 모라비안과 교제를 갖고 의사 소통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일기가 악화되면서 배가 난파의 지경에 이르게 되고 배의 돛대까지 부러졌다. 선원들과 웨슬레는 놀라서 정신을 잃을 정도였는데 모라비안들은 평온하게 찬송을 불렀다. 폭풍이 지나간후 웨슬레가 어째서 그렇게 평온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랬다는 대답을 얻었다. 이 대답에 웨슬레는 깊은 신앙적 회의에 빠졌다. 그러나 복음 전도의 열정이 있었던 웨슬레는 미국에서 성실한 전도를 수행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영국으로 돌아간 웨슬레는 자신의 신앙 점검을 위해 모라비안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자신이 신앙이 부족해서 설교할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하자 그의 자문을 맡았던 모라비안 형제는 신앙을 갖기 위해서 설교하고 또 옳은 신앙을 가지면 그 이유 때문에 설교를 계속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설교를 계속했던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중대한 체험을 한다. 그는 누군가가 읽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다가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지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또한 그가 다른 이들이 아닌 나의 죄를 없이 하셨으며, 죄와 죽음의 율법으로부터 바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후부터 그는 신앙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다른 많은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독일의 모라비안 본부인 헤르후트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방문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의 색깔과 다른 것을 발견하고 이들과 점차로 멀어지게 된다.
한편 웨슬레가 시작했던 '신성 클럽'의 회원이었던 죠지 휫필드 역시 당시에 훌륭한 설교자가 되어 있었는데 공업도시 브리스톨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도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사역지를 웨슬레에게 함께 사역할 것을 부탁했다. 웨슬레는 이 초청을 수락했으나 휫필드의 감정적 방법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휫필드의 설교에서는 청중들이 울고, 통곡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기절하는 사람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후에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기쁨에 넘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들 둘은 당분간 함께 사역을 했으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헤어지게되었다. 이들 둘다 원래는 신학에서는 칼빈주의적이었으나 웨슬레는 얼마 안가 알미니안 입장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휫필드는 그후 칼빈주의 감리교를 조직했다. 웨슬레는 그대로 국교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이들은 평신도의 설교를 받아들이고, 평신도와 함께 하는 교회 활동을 만들어 냈다. 또한 이런 평신도 설교자 중에는 여성도 여럿이 있었다. 이런 일련의 발전은 결국 국교와 차별성이 부각되게 되고 마침내는 감리교라는 독립적 교파로 발전하게 된다. 영국 국교는 이들의 집회와 교회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결별은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 더욱 구체화 되었다. 1784년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자 영국 성공회 신부들 대부분이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러자 미국에 있는 성공회 교인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에 성직자 파송을 거부했다. 미국은 영국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한 불법 국가였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성례를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웨슬레는 깊이 번민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미국에 있었던 자신의 추종자 장로의 한사람을 세워서 감독으로 삼아 성례를 베풀게 했다. 이런 것은 실상 웨슬레가 영국 성공회의 결정에 대해 큰 부담을 가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이런 결정 후에도 영국 국교 즉 성공회에 남아 있기를 주장했지만, 어쨌든 이 일 등을 계기로 1787년 자신의 교파를 따로 등록하게 함으로서 감리교의 시작점을 제공하게 된다.
감리교가 성공한 이유는 실상 당시 산업 혁명이라는 현실 문제에 적절한 신앙적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산업화 과정을 겪고 있던 영국은 도시가 급속히 공업화 되어 갔다. 이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제도권 교회의 약점과 한계를 웨슬레가 잘 채워 주었던 것이다. 어쨌든 웨슬레와 감리교는 영성적 지도자들의 조직화의 약점을 극복하고 커다란 성공을 거둔 대표적 지도자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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