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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성 경 공 부

개혁주의와 교회의 부흥

개혁주의와 교회의 부흥

 


제5회 개혁주의 4개 신대원 연합 학술제
구송희 전도사 발제

 

 

 


Ⅰ. 서론

 


  한국 땅에 교회가 들어 온지 1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참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 왔다. 비록 최근에 성장이 둔화 6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 세계와 한국 사회에 전체의 관심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80년대 중반이후 교회의 성장은 둔화되기 시작했고, 90년대 들어서 신도수의 정체 혹은 감소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노치준, “90년대 한국교회 교인 증감추세연구.”「목회와 신학」1997년 11월호 되었다고 하지만 기독교인은 천만이 넘는다.

 

교회는 이런 양적 추세를 보았을 때 분명히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오늘날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가 성장과 성공의 기독교만을 외치고 있다. 즉, 기독교가 미국적인 영향 “지금의 한국 교회가…미국복음주의의 부정적인 것들-주관주의, 감각주의, 물량주의와의 대타협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라고 역자 후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마이클 호튼,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김재영역, (서울: 나침반, 1996), p. 385. 앞으로 “미국제”라고 표기함


 너무 많이 받아서 실용주의 기독교 또는 소비자 중심주의 기독교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개혁주의 또는 소위 “장로교회”라고 간판은 붙어 있으나 내용은 과거에 이단으로 정죄 받았던 알미니우스 화란의 법률가인 코른헤르트(1522-1590) “Test”라는 문서를 네델란드 정부에 제출한 일이 있는데, 내용은 벨직 신앙고백이 가르치고 있는 칼빈주의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세우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시장은 아르미니우스에게 코른헤르트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칼빈주의 입장에서 반박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아르미니우스는 그 문서를 읽는 과정에 그의 사상에 옳은 내용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사실은 1603년 레이덴 대학의 교수가 될 때까지 숨기고 있었다. 그의 신학의 문제는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기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김종교 ,“도르트 회의 예정론 논쟁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끼친 영향 고찰,” (안양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1998), pp. 15-17.
의 내용과 미국의 실용주의 신학 마이클 호튼은 실용주의적 복음주의에 대하여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가지만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가 쓰고 있는 도구들을 그 실용성에 의해 평가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심지어 우리의 생활까지도 실용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모조리 평가하고 있다.…캘리포니아 대학 교수인 스티븐 버크(Stephen Berk)에 의하면, 뉴잉글랜드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의 신학을 좀더 세속적인 신학에 맞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와 같은 신세대 목회자들은“그 도전에 응하여 제 1차 대각성 운동이 가지고 있던 초자연주의를 버리고 개량된 실용적 칼빈주의를 만들었다.”“…복음주의 신앙의 실용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는 자기개발 프로그램들과 경합해야한다. 건강과 부의 약속을 해야한다.”라고 말한다.  미국제, pp. 77-98.


 전하는 실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의 교회가 부흥을 외친다는 것은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양적인 관심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몇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복음주의 부흥을 강력하게 외치고 있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긍정적인 부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부흥은 자칫 인간론에 치우쳐질 우려가 많다. 왜냐하면 “회심”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인간의 체험을 중요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부흥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과 그 주권의 표현 방식인 예정론에 핵심을 두게 된다. 언뜻 보기에 예정론과 부흥은 서로가 대립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교회의 참된 부흥이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성도가 어떤 방식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것인지를 올바르게 깨닫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으로서 예정론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참된 부흥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부흥을 말할 수가 없다. 오히려 부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에 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정론을 믿는 교회로서 양적인 논리에 휩싸이지 않고 교회가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고 그 올바른 말씀을 듣는 자가 있고, 말씀을 따라 사는 방식이 회복된 것을 의미한다.


  이제 복음주의의 부흥에 대해서 간략하게 다루고, 개혁주의에 대한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내고, 개혁주의의 참된 교회를 예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언약 가운데서 살피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 가운데 있는 참된 교회의 부흥을 다루고자 한다.            

 

 

Ⅱ. 본론


1. 복음주의 부흥에 대하여


  경건주의적 성향을 가진 복음주의 부흥이 80년대 중반이후로 시작되면서 90년대 중반에는 가장 활기차게 부흥을 외침으로 성공, 성장, 물량주의의 부흥에 반대하여 참된 부흥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적5) 복음주의의 기초적인 원동력은 18세기 중반부터 다소 분명해졌는데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친첸도르프 같은 지도자들이 북 유럽과 북미 교회들을 부흥시키기 위해 활동하게 되면서"복음주의"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마크A 놀, 「복음주의 지성의 스켄들」,이승학역, (서울: 엠마오, 1996), p. 19.  앞으로“스켄들”로 한다. ;종교개혁 당시 쓰여진 복음주의와 뉴 잉글랜드 신학을 통해서 나온 복음주의와 미국에서 1942년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복음주의와는 구별이 필요하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신상길․정성욱역, (서울: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7), pp. 18-26. 앞으로 “복음주의”로 한다.


부흥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회심”에 초점을 두어 인간에게 강력한 경험을 중요시여기고 있다 영국의 역사가 데이빗 베빙톤은 복음주의 주요 핵심 요소를 회심주의, 성서주의, 활동주의, 십자가 중심주의로 밝히고 있다고 마크놀은 언급하고 있다. 마크A 놀,「복음주의 지성의 스켄들」, 이승학역, (서울:엠마오,1996) , pp. 19-20.


그래서 그리스도 십자가아래서 강력한 체험을 강조한다. 따라서 복음주의 부흥은 비록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을 말하지만 동시에(지나치게)인간의 회심을 강조하여 강력한 성령의 체험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자칫 인간론 중심으로 부흥이나, 회심, 체험을 다룰 수 있는 위험성이 내재해 있다. “한국교회 부흥을 다시 생각한다.”「목회와 신학」, 1998년 6월호, pp. 38-90. 여기에서 부흥의 관점을 개혁주의 입장으로 거의 정리가 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복음주의 입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복음주의 부흥은 인간의“회심”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성경과 교리의 관한“정확성”보다는 개인의“경건성”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복음주의 부흥은 인간의 감정과 체험이 중요하다. 이것은 경건주의 신학의 영향 때문에 신앙의 선배들이 과거에 드러내었던 신조(교리)를 중요시 여기지 않고 경건만을 중요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교리의 중요성보다는 개인의 경건을 더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결국 주관주의로 흐르게 된다.

따라서 경건주의에 기초를 둔 복음주의 부흥은 인간론 중심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2.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먼저, 개혁주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많은 성경연구가들이 역사적으로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고백하고 있는 신앙고백서들을 도외시하고 “오직 성경”만을 중요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알리스터 맥그라스) 복음주의자들이…성경이 권위를 갖는 이유에 집중하기보다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오직 성경만을)다루는 신학을 건설하기 바란다.

 

복음주의, p. 378. ; 맥그라스는 이신칭의의 현대적 의미라는 책을 통해서 칭의라는 개념을 현대화하기 위하여 무척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서론 전체를 통해서“이 교리를 선포받는 사람들이 처한 구체적인 정황에 맞게 이 칭의의 교리를 구상화 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이신칭의의 현대적 의미」,김성웅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 pp. 9-23.

그들이 오직 성경만을 외칠 때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정말로 성경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이단과의 논쟁가운데서 참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드러낸 진리를 버리는 셈이 된다. 이런 현상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개혁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개혁주의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먼저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인다.

 

  1) 개혁주의 신학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할 때, 대다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그리고 “오직 성경”을 말한다. 사실 개혁주의 신학을 말할 때 하나님 주권, 하나님의 영광, 오직 성경의 내용을 언급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비록 핵심적인 내용이지만 두가지 정도 생각해 볼 점이 있다.

 

   a)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오직 성경에 대한 부분이다. 하나님 중심, 영광의 신학을 말할 때, 어떤 하나님의 중심인가?, 어떤 하나님의 영광인가? 이런 주제들을 논할 때 이미 우리 앞에 제시된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루터주의가 말하는 그리스도(기독론)중심의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가 있고, 그와는 달리 칼빈주의가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신론)중심의 하나님으로 이해가 된다.

 

즉, 루터는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신구약을 분리하여 그에게는 율법과 복음을 나누어 버리는 일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루터에게는 “신구약의 통일성”이 약화되어서 나중에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물질적인 축복에 머물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칭의가 핵심이며 나중에는 이원론에 빠지고 만다. 결국 이런 이해는 기독론적인(역사적 계시의 점진성으로만 이해) 이해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 이것이 기독론에 뿌리를 둔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오직 성경은 루터와 같은 외침으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말하지만 루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칼빈은 신구약의 통일성이라는 사상을 지니고 있어서 성경의 한 구절이라도 버리지 않으려고 성경 이해방식이 전체성경(tota scriptura)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신구약이 동일하며 율법과 복음이 나뉘어지지 않는 신구약의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은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는가? 물질적인 관심이 아니라 영적이며, 칭의에 관심을 넘어 성화에 대한 관심이다.

 

결국 이런 관점은 신론적(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인 이해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은 자에게 주어진 계시(성경)로 이해하게 되며, 역사적인 계시 기록자의 중심이 아니라 계시의 주체자 중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잘 드러낸 예정론의 독특성을 설명할 수가 있다.

 

   b) 어느 시대나 동일한 진리에 대하여 

   개혁주의를 말할 때 개혁에 대한 의미인데, 대부분 개혁을 말할 때 “시대의 상황에 따라” 개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종교개혁 시대에는 그 시대에 알맞게 루터와 칼빈이 개혁을 감당한 것이고 우리는 이 시대가 16세기와는 다르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 상황에 맞게 개혁의 내용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한가지 놓치는 것이 있다. 절대적 진리가 상대적인 상황화의 논리에 전복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16세기의 진리는 16세기 상황에서 진리이고, 이 시대는 “핵 시대요, 유전자 공학시대요, 전자 공학시대” 이기 때문에 16세기의 진리는 이 시대의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역사적 상대주의에 빠져서 근본적으로 과거의 시대의 인간과 이 시대의 인간이 다르다고 이해하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개혁주의는 신구약 시대에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인간, 오늘날 시대에 활동하는 하나님과 인간은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구약 시대 때 진리는 16세기 때 진리요, 오늘날에도 동일한 진리라고 보는 것이다. 즉, 흑암에 빠져 있는 카톨릭을 대항하여 개혁을 일으킨 칼빈의 내용은 그 시대에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감추어진 진리를 다시 한번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김영규 교수는 한국교회가 회복해야할 내용을 다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 둘째, 장로교의 정치원리는 성직자 개인(uni)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회 자체(unitati)에 있다. 셋째, 언약의 통일성. 넷째, 주일성수와 예배의식들. 다섯째, 유한은 무한을 받을 수 없다. 김영규,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서울: 하나,1998) , pp. 48-60. 이후로“엄밀한”으로 한다.

따라서, 칼빈 시대에 이미 개혁된 내용은 지금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진리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이란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롭고 무조건적인 은혜를 파괴하는 우리 안에 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한, p. 25.

   
3. 개혁주의 참된 교회에 대하여

  개혁주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 주권을 “오직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역사의 현장가운데 재현되었던 진리는 어느 시대나 동일함으로 이미 개혁된 내용을 가지고 현 시대나 미래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그 진리로 드러내야함을 알게 되었다. 이제 교회의 본질을 통하여 교회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부흥은 수적이거나 양적인 것에 있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논하심 가운데 있는 예정하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드러냄으로 비로소 개혁주의 교회의 부흥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교회의 본질

   a)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가운데 있는 교회

칼빈이 말하고 있는 교회란 무엇인가? 루터는 이신칭의를 통해 제도권과 인간적인 것을 비판했지만, 교회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기원한 택자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복음을 듣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의 내용을 넘어서 듣는 능력과 역사도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강조하면서 “교회는 하나님의 택자의 무리이다”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Ibid., pp. 16-17.


즉, 교회는 인간에게 기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하나님께 그 기원을 두고 그분이 주권적으로 역사 하신다. 그래서 17세기 개혁주의자인 하이데거(H,Heidegger)의 정의는“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죄의 상태로부터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은혜의 상태로 부르신 택자들과 부르심을 받은 자들, 믿는 자들로서 사람들의 공동체 혹은 회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알팅(Alting1583-1644)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죄의 상태로부터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은혜의 상태로 부르신 택자들의 공동체로 정의하고 있다. 김영규, “교회론과 종말론,”「서울: 안양대 신대원, 2000」, p. 5.

 

  이렇게 개혁주의자들이 정의한 교회란 “죄의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이 들을 수 있어서 모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가운데 있는 택자의 무리이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들을만한 귀가 있어서 듣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자들에게 베푸신 선물이다. 따라서 교회는 현재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논하심 가운데 있는 “예정하심”에 기초가 되어 “과거에 믿었던 백성, 지금 믿고 있는 백성, 앞으로 믿을 백성” 모두를 포함한 택자의 무리이다.

 

이것은 인간의 고백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선물로서 친히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성화롭게 하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이 모든 일은 삼위일체하나님이 단독적으로 행하신다.

 

   b) 성도는 어느 시대나 동일한 방식(구원의 서정)으로 구원을 받는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부르심과 중생, 신앙과 칭의, 성화와 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이다. 즉, 선택의 기초를 둔 구원의 방식은 모든 악과 사탄의 유혹에서 가장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식이다. 성도는 결단코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구원에서 끊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택자를 예정가운데 두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전능하시고, 영원히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어느 시대나 예외 없이 같은 방식, 즉 같은 구원의 서정에 따라 성령의 의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택을 받는다. 그래서 Alting은 사도신경 그대로 성령론과 교회론, 구원의 서정을 분리시키지 않고 일치시키고 있다. Ibid., p. 8.

    
4. 개혁주의 교회의 부흥에 대하여

  1)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드러난 교회

  앞서 말했듯이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의논하심 가운데 있는 “예정”에 기초를 두어 그 안에서 부름 받은 자들만의 공동체이다. 이 내용은 개혁주의 교회의 기초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분의 강력한 주권을 드러내는 데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흔히 교회가 수적이거나 양적인 것으로 부흥을 논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회심중심의 부흥을 말하게 되는 것은 그 근거에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을 배제하려는 인간의 부패된 심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인간의 시각적 효과, 심리적 효과만을 자극하여 내용 없는 경건심을 주장하게 된다. 즉, 성경과 신앙의 선배들이 고백하던 내용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감성에 젖어서 알맹이 없는 경건만을 중요시 여기게 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본질적인 내용은 없고 현실의 문제만을 해결하려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바빙크는 “실천적 종교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신앙의 총체요, 본체이고 모든 교의의 뿌리이며 새 언약의 본질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가 받는 모든 축복의 원천이다. 그분은 우리의 전 주권의 주된 원천이다.

 

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세례로 받고 그의 이름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요약이다” 라고 말함으로 그 자신도 우리의 고백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론」, 이승구역, (서울: CLC, 1994), pp. 480-486.; 바빙크는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말미암고, 하나님으로 통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p. 485.

바빙크는 “구원사역대해서도 삼위일체적이다” 라고 말한다. 즉, 교회 내에서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을 통하여 고백하였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가르쳐야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빙크는 하나님의 큰일 제 9장에서 신론에 들어가기 전에 서론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있다. 그는“신앙고백 곁에 요리문답을 소유하고 요리문답 곁에 신앙고백을 소유하는 것이 개혁교회와 개혁주의의 매우 귀중한 특권이다.”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의 큰일」, 김영규,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4), pp. 120-129.
이어서 “따라서 성 삼위일체 신앙조항이 우리의 고백의 핵심이요, 기독교 구별의 표요, 기독교인들의 영광이요, 위로이다” Ibid., p. 145.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내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 가르쳐야 하며,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통해서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 교리문답 제1문에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이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G. I 윌리암스, 「소 교리 문답 강해」, 최덕성역,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2000), p. 13.


2)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지키는 교회

  교회가 성경을 유일한 경건과 삶의 규범으로 고백할 때, 성경이 성도의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따라 말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척도이다. 즉, 성경을 교회 내에서 가르치거나 전할 때 성경이 말하는 바 내용을 그대로 전하고, 또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이…조직신학의 모든 내용에 대해서 성경으로부터, 성경 안에서, 성경과 더불어, 그리고 성경으로 말미암아 생각하고 말하여야하되, 지나친 호기심으로 공허한 사색을 하거나 성경이 말씀하시고 있는데도 침묵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김영규, 「조직신학 편람」,(서울: 안양대학교 대학원 강의안, 2000), p. 47.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가 현실적으로 수와 양의 논리에 휩싸여 성경이 말하는 바 내용을 전하지 못하고 있고, 반대로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내용을 전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건과 삶의 규범으로서 성경을 전하는 교회가 성경 아래서 성경을 따라 성경이 말하는데 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데 까지 멈추는 교회로서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과거 종교개혁 당시 칼빈과 그 후계자들은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를 내세우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전 인생을 통하여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성경 아래에서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으로 저항하였다. 칼빈의 저항정신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별하는 표증 인, 거룩한 복음이 순수하고 신실하게 설교되지 않고, 선포되지 않고 지켜지지 않으면 교회의 형태를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칼빈의 개혁이란 하나님의 의에 순종으로 개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pp. 39-40.

즉, 교회 내에서 전해져야할 내용과 듣는 자로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모두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드러냄으로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삼위일체론과 예정론에서“…성경 자체의 진리를 성실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적당한 때에 사용해야한다.”…“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한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강독 上 권 13장」, 김종흡외 삼인공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pp. 206-236. ; 강요3권 21-24장까지 “영원한 선택”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데, 칼빈은 21장 전체를 통해서“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바로 예정론을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제목에서 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제 21 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예정론의 교리는 중요함으로 무례한 논의나 침묵은 불가하다. 1-4) 1. 예정론의 필요성과 그 유익: 호기심의 위험성 2. 예정의 교리는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 3. 둘째 위험성: 선택의 교리에 대해 침묵하는 것 4.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강독3권21장”, pp. 499-506.

라고 언급하는 것은 그 당시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성경관과 예정론을 다루면서 다른 개혁자들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는 “철저한 호기심에 대한 거절”은 칼빈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혁정신이다.

  따라서 오늘날 개혁교회에서 드러내고 가르쳐야 할 내용임을 분명히 인식 해야한다. 시대가 갈수록 소비자 중심주의(청중중심)시대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위기의 상태로 흐르고 있다. 실용주의자들처럼 수와 양의 논리에 휩싸이거나, 반대로 복음주의자들처럼 회심을 강조한 그릇된 경건주의로 흐르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부흥이라고 정의할 수가 없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삼위일체론, 성경관, 예정론을 가르칠 때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가르치고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교회내의 올바른 개혁이며, 참된 부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예정론의 실천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교회   

  오늘날 교회 내에서 예정론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교회가 스스로 예정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정론을 가르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정론이 가지고 있는 성격에 대해서 운명론처럼 생각하거나 성도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정론의 성격은 오늘날 인기 있는 수와 양의 논리를 완전히 배격하기 때문에 교회가 가르치는걸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예정론이 가지고 있는 성격은 경건의 총화로서 성도의 유익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데에 있다.

 

칼빈은 “이 교리(예정론)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경외하기를 원하시며, 경외함으로 찬탄하기를 원하신다.” Ibid., 中, pp. 501-2. 라고 잘 드러내고 있다.


  이제 예정론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몇가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예정론은 보이는 교회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과 동시에 잘 믿는 자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가져다 준다. 김영규, “17세기 신학” (서울: 안양대학교 2000년 2학기 강의안), p. 22.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있다. 잘못된 열심은 믿음이 연약한자를 정죄하는 방식으로 많이 활용 되기도 하고, 교회 안에 성도들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우월의식으로 성도들을 경쟁에 휩싸이게 해서 섬김의 본질을 퇴락 시킨다. 그러나, 예정론이 제대로 가르쳐진다면, 오히려 교회는 비록 믿음이 연약한 성도가 있을지라도, 연약한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인식하여 그들의 연약한 믿음이 성장하도록 권면과 기도를 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좋은 성도들에게는 예정론에 관한 내용이 그들의 심령과 삶에 큰 위로와 격려가 되어서 교회 안과 밖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믿음이 좋은 자와 연약한 자 사이에 경쟁이나 정죄의 내용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 정신을 회복하는데 충분한 내용이다.

  둘째, 예정론은 개척교회의 신실성과 정성(최선)을 제공할 뿐 아니라 내적인 성숙을 가져다 준다. Ibid., p. 22.
실용주의 신학의 눈으로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는 “교회”라고 보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는 어떤 내용이든 최근 유행하고 있는 신학의 논리는 수와 양에만 관심을 가지는 교회이기 때문에 사실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는 그런 논리를 적용하기에는 힘든 상황이며, 성공을 해도 그런 논리에 휩싸인 부흥이라면 교회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예정론의 실천적인 의미로서 부흥은 예정론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소위 회심중심의 부흥이나 성공과 물량주의 부흥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예정론에 입각한 부흥은 대형 교회든, 적은 교회이든, 개척 교회든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가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따라 가르쳐지고 전해지면, 이미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된 교회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개척교회가 대형교회를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맡겨준 성도들을 말씀으로 신실함과 최선을 다해 양육할 수 있다. 그리고 대형교회는 개척교회의 연약한 부분을 섬길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목회사역을 잘 감당할 수가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내적인 성숙을 가져오신다.


Ⅲ. 결론

  교회는 이 땅에서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고, 빛과 소금으로 성도가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종교개혁 당시 회복했던 내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제, 개혁교회의 부흥에 대해서 몇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첫째,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언제나 있어 왔는데, 개혁교회는 현실의 문제에 급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언제나 교회가 최고의 목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는 어린아이나,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도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 내용을 회복해야 한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고백적 차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즉, 강력한 주권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예정론”의 성격을 교회에서 잘 가르침으로, 참된 교회의 본질과 구원의 성격을 통해서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정론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뿐만이 아니라, 어려움과 역경가운데 처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성도로서 살아야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의 연약한 삶을 일으켜 세울 뿐 아니라, 성경과 과거의 선배들의 신앙고백서(신조)를 통해서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강하고 담대하게 전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
  셋째, 첫째와 둘째의 내용이 드러날 때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통해서 목회자와 그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삶의 방식으로 인식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이와는 반대로 개혁을 위해서 과격하게 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은 것이다.

 

즉, 성경 아래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전체가 삼위일체론이나 예정론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어서 지나친 호기심으로 가르쳐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 나라에 장로교회가 타교단과 비교해서 크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외적인 성장만큼 개혁 교회의 올바른 내용이 거의 가르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장로 교회가 영적으로 어두운 세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회심 중심으로 치우쳐진 복음주의에 휩싸이거나 성공과 물량주의에 휩싸여서 수와 양의 논리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칼빈과 그 후계자들이 중세의 어둠 속에서 감추어지고 변질되었던 복음의 핵심을 그토록 힘겹게 드러내었지만(회복했지만), 지금은 드러냈던 그 진리를 중세보다 더 무서운 실용주의에 파묻어 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는 개혁교회의 유산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욕심으로 목회나 신학 방법(지나친 호기심)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모든 인간적인 방법을 거두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제시하여준 내용대로 적정과 절도의 원리를 따라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의 참된 부흥은 말씀을 먹고사는 인생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으로 행하시는 역사를 믿고, 그 방식으로 예정론을 통해서 성도가 구원받으며, 받은바 은혜를 세상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잘 감당하고, 올바른 말씀이 전해지고 듣는 자가 있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의 부흥인 것이다. 

이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기를 기다리고 고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하여 홀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1. 단행본
김영규,「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서울: 하나, 1998)
마이클 호튼,「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김재영 譯(서울: 나침판, 1996)
마크A 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승학 譯(서울: 엠마오, 1996)
알리스터 맥그라스,「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리」신상길, 정성욱 譯(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7)
               , 「이신칭의의 현대적 의미」김성웅 譯(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죤 칼빈, 「기독교 강요」김종흡, 신복윤, 이종성, 한철하 共譯(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론」이승구 譯(서울: CLC, 1994)
             ,「하나님의 큰 일」김영규 譯(서울: CLC, 1994)
G.I 윌리암슨, 「소교리문답강해」최덕성 譯(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2000)

2. 비간행물
김영규, 「교회와 종말론」(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의안, 2000년 2학기)
      , 「조직신학 편람」(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의안, 2000년 1학기)
      , 「17세기 신학」(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의안, 2000년 2학기)
김종교,「도르트 회의 예정론 논쟁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 끼친 영향고찰」(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1998)

 

3. 정기 간행물
「목회와 신학」1997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