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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연구/이 단 연 구

正統과 似而非 사이

正統과 似而非 사이

 

정 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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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한국인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했다.  그는 안수기도 중 신자들을 쓰러트리는 신비한 능력과 은사로 유명했다.  호기심이 동했다.  집회 중 본문을 정해 읽었지만 본문의 일부 단어만 갖고 그는 설교하기 시작했다.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간단히 무시됐다.  이것 외에 설교 내용은 그리 문제 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사실 하나가 있었다.  자신이 성경 말씀을 가장 잘 해석하고 전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자신은 성령이 해 주는 말씀만 오로지 전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아울러 자신이 받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대단하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에서 몇 가지 내용이 계속 반복되었다.  예수님만 구세주이며 그의 십자가와 피와 부활만 우리를 살린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그렇게 예수님과 그의 속죄 사역의 신비성(神秘性)을 강조하며 듣는 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의미가 암시되었다.  예수님의 신비한 속죄 사역과 역사를 체험했다고 그는 은근히 강조했다.  자신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말했다.  설교 중 자신에 대한 자랑스런 간증이 점점 많아졌다.  서서히 교인들은 그를 신령한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자신의 말만 듣고 따르면 성령을 체험할 수 있다고 강조하여 말했다.  안수기도를 통해 신자들을 쓰러트리는 신비한 능력이 이를 증명하는 듯 했다.  건장한 러시아 청년도 일분 정도 지나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를 성령 체험으로 이해한 교인들은 감동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그 목사가 한결같이 목 뒤에 손을 놓고 안수 기도했음이 기억났다.  다른 선교사도 자신이 주목한 바를 말했다.  예배 후 그를 수행한 두 장로들도 안수기도를 해 주었다.  이 때 그들의 손가락이 이마 위의 특정 부위에 놓였음을 그는 지적했다.  급소와 같은 곳의 혈류(血流)를 30초 이상 누른다면 아무리 건장한 청년도 쓰러질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충격적이었다.

 

이 순간 정통과 사이비 사이 차이는 종이 한 장 정도임을 깨달으며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절)

 

신비주의 성향이 강한 목회자들은 겉으로 보아 성경을 아주 열심히 전하는 충실한 그리고 겸손한 메신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인용하는 성구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에 맞춘 것들이다.  자신을 자랑하는 간증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증하거나 역으로 자신의 간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신령한 사자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그러나 실상은 사람들의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얻고자 함이다.  이를 위해 이들은 신비한 능력이나 은사를 보이려 한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의 보혈이나 속죄 능력을 자주 강조하며 마치 만사형통을 보장해 주는 보증수표처럼 설명한다.  그렇게 이들은 예수님의 보혈과 속죄 능력을 재앙을 물리쳐주는 신비한 부적같이 이용한다.  기복적인 설교 내용을 교인들이 좋아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들이 교인들에게 아부하는 설교를 잘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까지 얻은 명성과 영광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이들이 신애(神愛)보다 자애(自愛)에 의해 이끌린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사이비이단의 원인이다.  이들은 신(神)이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로 보냈다는 강한 착각과 믿음 때문에 강한 자기애(自己愛)에 빠진다.  이들에게 영적 권위의식 즉 카리스마가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쳐 이들에게서 겸손과 경건성은 찾기 힘들다(마7:16-20절).  이들이 함부로 말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영력(靈力) 위조(僞造)의 분명한 증거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 목회자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신애와 자기애 사이도 마치 종이 한 장처럼 지극히 작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자나 성경 진리를 많이 아는 목회자일수록 쉽게 ‘자기애’에 빠질 수 있다.  사이비이단의 교주들이 대부분 이런 목회자나 신자들이다.

 

그럼 이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첫째 성경 계시의 시대가 사도 시대로 말미암아 이미 끝났음(엡2:20, 3:5절)을 이들은 무시한다.  새로운 계시를 받은 것처럼 보여 사람의 증거를 얻으려 함이다(요2:24-25절).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쉽게 무시된다.  헛된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은 성경의 진리와 자신이 해석한 성경 진리 사이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 말씀은 영원한 진리로 남는다.  그러나 이를 해석한 목회자의 설교는 영원한 진리일 수 없다.  설교는 듣는 자로 하여금 성경 진리를 잘 깨닫도록 도와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는 이들은 자신의 성경 해석을 하나님 말씀처럼 강조하며 그 결과 성경 진리가 또한 쉽게 무시된다.  이 점에서 다락방의 ‘내가복음’도 사이비의 증거이다. 

 

셋째 이들의 성경 해석은 항상 한 쪽으로 치우친다.  구원을 현세적인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보며 그리고 이들의 성령론은 은사로 치우친다.  이들은 성령 하나님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비인격적인 능력으로 취급하는 불경죄를 자주 범한다.  이들에게서 신앙의 성숙을 찾을 수 없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의’보다 ‘자기 의’를 더 좋아한다. 

 

이 때문에 이들에게도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보였던 남다른 열정과 열심이 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절)  이들의 열심은 성경의 건전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애에 있기 때문에 문제이다.

 

처음 출발선에서 정통과 사이비 사이 차이는 거의 없다.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나타난다.  그 차이는 결국 누구를 사랑하는가에 있다.  자기냐 아니면 예수님이냐?  부활 후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수에서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는가 세 번 물었다(요21:15-17절).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주로 고백하며 사랑하는 목회자만이 참으로 경건한 목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살찌기 위해 양들의 것들을 탈취하는 삯군 목자가 된다(겔34:3-4, 요10:10-14절).  그러나 이 사이도 겨우 종이 한 장 차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