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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은 사 주 의

영성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필요성

영성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필요성

 

수도원의 설립 움직임에서부터 레노바레 운동같은 가벼운 형태의 것까지 개신교에서도 영성운동,영성형성이라는 내면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운동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정작 그안에 들어가 보면 여러가지 생각할 여지들이 많이 있음에도 이러한 문제점들이 제대로 지적되거나 논의되지 아니한채 하나의 유행이기 때문에 그대로 나아간다는 사실이 아쉬움이 남는다. 

   

  소견으로는 영성운동이라는 오늘의 유행이 반드시 거처야 할 세가지 시금석이 있다.

 

 첫째, 지나치게 개인적 측면의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경향을 극복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영성운동은 공교회와 같이 나아가야 하며, 공교회의 틀안에서 존재하여야 한다. 수도원운동의 예를 들자면 초기의 수도원운동이 기성교회의 문제점의 지적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교회가 없이 수도원이 있을 수 없다. 매주간의 예배공동체와 일상의 삶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지나친 현세 부정적 시각은 문제가 있다.  현실의 교회에 문제가 많은 것은 교회의 탄생때부터 그러했고 파루시아까지 그러할 공동체가 안고갈 과제이며 이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모순된 현실의 현장에서 헤쳐나가며 살아나가는 것이 신앙이다. 언제까지나 변화산에 머물수는 없고 산에서 내려와서 도시에 거주해야 하는 것이 신앙의 과제이다. 도시는 신앙의 현장이다. 진정한 영성가들은 사막에만 머물지 않았다.  

 

둘째, 특정한 문화적 또는 개인적 성향에 치우치지 말고 교회사를 통해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기독교신앙의 원류에서 영성운동의 발판을 찾아야 한다. 개인적이고 주관적 신앙행태의 운동들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배경이나 특정한 지도자의 배경에 있는 개인적 성향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수도원제도를 예를 들더라도 이 제도가 교회의 귀한 전통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가능한 제도일 것이며 오늘날 이를 재현한다는 것은 의미와 내용이 달라질 수 밖에는 없다. 예를 들면 노동이 더이상 육체노동만을 의미하지 아니한 변화된 세상에서 육체노동만이 영적인 훈련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리고 타 종교의 신앙행태가 어떤 경우에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행태와 비슷하게 보인다고 하여서 이를 그대로 포섭하여 수용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지극히 동양적 사고이다. 한정된 사고에 머물고 있음에도 그것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분파주의 운동의 하나에 불과하다.

  

셋째, 영성운동에도 신학적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즘의 영성운동이라는 것들은 몸에 좋은 것을 다 섞어서 만든 약이 좋은 약이라는 식의 혼합주의적인 경향이 너무도 강하다. 일관된 방향성이 없이 좌충우돌하고 있으면서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찾고 있다고 보인다는 점에서 관상적 삶을 지향한다는 추구가 오히려 마르다의 활동적 삶으로 보인다. 신학적 차이란 무시한다고 해서 무시되는 것도 아닌데 신학을 너무 경시하는 것 같다. 몸에 좋은 것이라도 잘못 섞으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신학이다. 특히 동양문화권에서 토착화된 기독교안에서 살아온 우리들은 아직까지도  한약(?)에 대한 관심들이 너무 많은데 불필요한 관심이라고 생각된다. 저 유명한 관상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자신이 신앙상담을 한다면 영성가보다는 신학자에게 하겠다고 담대히 말했다. 신학은 영성훈련을 통해서 산출된 재료를 정련하는 도구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주관화된 문화 풍조 속에서 객관적인 추구를 가능케하는 신학은 더욱 필요한 신앙의 도구이다.

 

 그리고 위와같은 시금석은 산에 들어가서 개인적 수도생활만을 지향하고자 하는 분들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영성운동의 또 다른 경향으로서 영성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서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용도에 사고 팔게 되어 버린 구미의 교회들에서 말하는 영성운동 내지 영성형성이란 흐름 역시 위와같은 시금석을 피할 수는 없다.

개인적이고 감성적이면서 주관적인 성향을 가지면서  궁극적인 목적이 영성을 추구하는 한 개인에게 집중된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와 세속주의는 일치되는 접촉점을 가질 수 있다. 위의 시험을 통과할 때에 정도를 벗어난 양극단으로 나아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개신교가 잃어버린 수도원전통을 매우 아쉽게 생각하고 있으며 교회 역사의 다양한 신앙전통을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삶은 일상의 현실가운데서 교회공동체안에서 이루어져 나간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이미 주어졌다면 너무 특이한 것을 찾고자 헤메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공동체 가운데 속하여 있으면서  매주일의 삶의 현장가운데서 기도하면서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던가?

 

2007.2.25. 수난주일 첫주일 주일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