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에 대하여
제1강
마 13:1-30
이제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것을 토대로 삼아서 앞으로 교회가 이 세대에서 세워주신 아버님의 거룩하신 뜻이 무엇이며, 아버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바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므로 그런 것을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땅 위에 있는 신령한 이스라엘의 사명이라는 것은, 신령한 이스라엘로 즉 거룩한 교회가 아니면 나타낼 수 없는 것들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 교회에 부탁하사 그 말씀의 능력과 내용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올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개인이 성경에 의해서 자기의 생활에 도덕적인 선택들 그런 것에 의미를 가지는게 아니고, 그러면 그 개인이 도를 해서 잘 도인(道人)이 되면 도덕적인 인물이 되면 될거란 말이오. 교회라고 하는 한개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한, 그러나 본질적으로 신령한 한 그리스도의 지체는 (그것이) 그 구성분자가 여러 인간이라는 인격자들의 집합인 까닭에 그런 여러 인격자들의 집합으로 말미암아서 나타나야 할 특권적인 하나님 말씀의 정신은 그 하나님 말씀 가운데 살아 계시하신 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대권의 구체적인 작용과 발휘를 다른 어디서 보다 교회에서 드러내야 할 것이올시다.
한 정권이나 통치권의 구체적인 작용과 발휘라는 것은 국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국가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오. 국가가 있은 다음에야 그 국가의 주권이 발휘되는 것이오. 주권이 없을 때는 국가도 없는 것이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주권이 존재하는 데 있어서 주권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서 발휘되되 땅 위에서는 교회라는 형식을 취하사 사람들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사회적인 생활의 형식을 통해서, 사회적인 구성의 형식을 통해서 통치의 대권이 발휘되는 것이올시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다 할 때는 개인이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또 개인의 어떤 사명을 생각하고 나간다는 그런 점에 있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이라는 것은 나 개인의 생활 가운데에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사회적인 형식 위에, 동시에 사회적인 형태를 형성한 각 사람의 심령이 한 개의 사회를 형성해서 그 심령의 세계에서 또한 나타나는 것이올시다.
이러한 말씀의 권위를 증시함에 있어서 그 하나님 나라라 할 때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인가 하고서 물으면 성경은 이것이다라고 한두어 마디로 규정해 놓지 아니했어요. 하나님 나라라 할 때 물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대권의 영역과, 대권의 작용과, 통치를 받는 사람들, 혹은 그 영들을 의미할텐데 그렇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참된 유일의 보편적인 교회가 그것이겠지만, 그러나 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는 통치권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교회라는 말을 쓸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과 또 가지고 있는 속성을 표시하려고 할 때에는 교회라는 말, 신령한 교회다는 말을 쓰게 되는데, 이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이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만일 나타나려면 볼 수 있는 형태를 먼저 취하여야 할 것인 까닭에 여기에서 개인이 아니고 교회라는 사회적인 한 집합체, 집합으로 말미암아 구성된 개체, 그런 body에서 나타날 것이오.
그런고로 이러한 하나님의 그 크신 거룩한 도리가, 그 권능의 대권이, 한 분이 구체적으로 땅 위에 나타나는 동시에 그것이 나타나 있는 역사를 땅 위에 건설해 나갈 때 적(敵)이 있고, 그 적들은 나타나서 그 적은 적대로 그걸 방해할 때, 적을 물리치고 적과 더불어 싸우고 필연적으로 여기 하나의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듯한 한 생생한 역사(history)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오. 이 생생한 역사를 만드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잘 보고 거기에 의해서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바로 늘 생각해 나간다는 것이 그것이 심히 중요한 일이오.
교회라는 것이 조그마한 단체로 어떤 기관이 있어서 다른 큰 교회들이 하는 것을 모양 삼아서 보고 또 그대로 따라 나간다 하는 그것이 교회의 하는 일들이 아니고, 사실상 교회라는 것은 작든지 크든지 하나님께서 왜 이 땅 위에 그것을 두셨느냐 하는 것을 아는 데, 알려고 하는 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 것이오.
하나님께서 땅 위에 교회를 두셨다는 거룩하신 뜻을 우리는 먼저 알고 다음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대권을 구체적으로 땅 위에서 드러내사 반신국적(反神國的)인, 반신적(反神的)인 모든 요소와 세력과 대항해서 싸워가면서 전진하는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점을 우리가 본다 할 것 같으면, 반신적인 요소와 그 세력들이 어떻게 움직여 왔으며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또한 우리가 안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반신국적인 요소가 언제든지 이 세상의 여러 정치적인, 문화적인 현실 속에서 강하게 움직여왔다는 것을 다 느끼는 것이오.
그런데 이 역사를 통해서 반신국적인 요소가 움직여 온 그 배후 혹은 이것을 참으로 통재(統栽), 지배하는 그 배후의 세력은 두 말할 것 없이 사탄의 세력이라 하는 것을 늘 생각하는 것이오. 사탄이 영계(靈界)와 혹은 인류사회에 있어서 하나님과 맞서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정당한 말이오. 하나님과 맞서서 싸우는 건 못해요. 사탄이 하나님과 감히 맞서 싸울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닌 것이오.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사탄이 같은, 우리 보기에는 신비하고 거대한 세력을 가진 자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일개의 피조물인데, 일개의 피조물이 적극적으로 대항해서 싸우겠는가? 그건 하나님께 대한 모독인 것이오.
그러나 사탄은 적어도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일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만은 제 힘이 미치는 한 저항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만은 사실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막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이오. 하나님께서 해를 우리에게 비취실려고 하는데 사탄이 일어나서 해를 못비취게 두 팔을 짝 펼치고 있으면 그냥 구름이 껴 가지고서 해가 못비치게 되는 법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시고자 하는데 사탄이 막아서 못 내리는 법은 없는 것이오.
다만 사탄이 작용하는 한계는 오직 하나님을 직접 대상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인 인격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오. 하나님은 대항 못하나 사람은 대항하는 것이 사탄이오. 다른 말로 말하면 처음부터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을 때 그 사람을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게 하려고 할 때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를 막을 수는 없으나 사람이 받고 안 받는 것만은 사탄이 가서 주장질을 하든지 꾀이든지 해가지고 변경을 시킬수가 있었더라 그 말씀이오.
그러므로 사탄이 맨 처음에 한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에 언제든지 접촉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주셨으면서 동시에 사람에게 그것을 취사(取捨)할 수 있게, 버릴 수도 있게 하시고 취할 수도 있게 하신 고유한 자유를 주셨으니까, 요컨대 사람이 버릴 수도 있다는 그 여지를 사탄이 들어가서 유혹으로써 선을 취하지 않고 악을 취하게 만든거라 그 말씀이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그 사람이 고귀한 목적과 고귀한 표준을 향해서 목표를 향해서 행진하여 완성하도록 만드신 까닭에 참으로 저 보다도 더 우수하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소망과 기대와 전제를 가지고 피조된 사람인 까닭에, 지금 자기가 가장 접촉하기 쉬운 경지에 있을 때 떨어뜨리지 않으면, 앞으로 영화(榮化)돼 버리면 도저히 접촉할 수도 없고 손댈 수 없는 걸 아는 까닭에, 사탄은 하루가 늦을세라, 하루라도 더 늦어서 얼른 생명과실을 따먹고 영화의 경지를 향해서 점점 빨리가면 갈수록 자기가 접촉하기 어렵고 자기 힘이 거기 미치기가 어렵게 될 것을 알고 사람이 각자 가진 고귀한 희망, 그런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볼 때 부럽기도 하고 말하자면 시기심, 시기지심(猜忌之心), 질투심 (jealousy)이 나서 사람을 떨어뜨렸다 하는 것이 아마 제일 좋은 생각 방식일 것이오.
질투(jealousy)라는 것, 혹은 시기하는 것 특별히 질투라는 말보다는 시기라는 말이오. 질투라는 말은 거기에 해당 안해요. 그렇게 시기하는 것, 아주 사탄적인 것이오.
사탄의 맨 처음 성격은 시기에서 나타났어요. 사람이 나보다 나아진다는 말이냐, 세상이 또 나보다 낫고, 나보다도 더 훌륭한 것이 이제 앞으로 생겨나겠구나. 어떻게든지 못하게 해야겠다 하고 나섰단 말이오. 훌륭하게 된 다음에는 꼼짝을 못하니 좀 더 훌륭하게 되기 전에 나하고 그래도 교제라도 있는 동안에 떨어뜨려야겠다 하고 떨어뜨렸어요.
첫째는 시기(jealousy), 그것이 사탄의 성격인데, 그 사탄이 jealousy라는 기본적인 욕망, 혹은 성격을 가지고 사람을 떨어뜨렸는데 사람을 떨어뜨려서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수하에 두고 자기가 접촉할 뿐 아니라 마음대로 잡아 흔들 수 있는 발 아래다가 두려고 그러지 자기 보다 높이 올라가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는 것이오. 그러니까 사탄이 항상 적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을 적으로 삼는 것이오.
사탄은 누구를 가장 큰 적으로 삼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식들을 가장 큰 적으로 삼는거요. 세상 사람이야 도덕적이려면 도덕적이거라. 얼마든지 괜찮다. 너는 내 수하에 있고 내가 내 멋대로 너를 할 수 있으니까 네가 좀 더 도덕적이어도 괜찮다. 좀 더 종교적이어도 괜찮다. 너는 힘껏 최상의 예술, 최상의 과학을 다 해도 괜찮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하나님의 법대로 성신에 의지해서 살기만 하지 말아라. 이렇게 하는 날엔 내가 너를 지배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못 갖는다. 너는 내게서 떠나 너는 나를 지배하는 관계로, 말하자면 전도(顚倒)된 관계 가운데 들어갈테니 내가 그를 견딜 수가 없노라 하는게 사탄의 생각이기도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사탄이 항상 복음의 광채는 못비취게 하고 복음의 광채가 비취었을 때는 어떤 선의 목적을 향해 가되 악의 방식으로 가라고 기묘한, 가장 좋은 방식으로 가라고 늘 일러주는 것이오. 즉 그가 죄에 아직 매여 있는 동안에는 걱정할 것 없으나 죄에서 해방이 돼 가지고 마치 아담같이 죄라는 것과 죄의 세력이 그를 지배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아담을 꾀는 방식을 쓴다 그 말씀이오. 그런고로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가 아니고 믿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오.
죄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 일단 낙착을 지은 사람들에게 대해서, 혹은 죄가 저를 지배할 수 있는 그런 죄의 절대의 지배권에 있는 사람이 아닌 까닭에 저걸 내가 어떻게든지 넘어 뜨려야겠다 하는 것이오. 아담을 향해서, 예수를 향해서 사탄이 시험하는 건 무죄한 자를 시험하는 것이고, 죄 있는 사람이야 죄의 지배권에 있어서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라 해서 죄의 종노릇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탄이 가지고 있는 즉 가장 유효한 방식은 사탄이 그 사람을 저가 영화돼서 위대하게 될 것을 볼 때, 이상적인 그 영화의 상태, 고귀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자기가 바라볼 때 그걸 떨어뜨려야겠다 하고 떨어뜨리는데 쓰는 가장 예리한 훌륭한 무기가 속임이오. 역사의 처음부터 흘려 내려온 이 사탄의 무기는 속임이오. 그래가지고서 역사의 처음부터 속임수를 써서 사람을 타락을 시켜가지고, 타락한 사람은 사탄의 꾀임에 빠져서 속아 가지고 자기 자신이 속음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하나님의 징벌과 죄의 형벌과 또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죽음이라는 흑암, 암매의 경지, 즉 죄로 말미암은 본질의 부패, 오염, 또 그 다음에는 죄로 말미암은 형벌들, 죄책으로 말미암은 형벌의 공포 이것들을 지고서 내려왔다 그 말씀이오.
이 비참한 상태, 죄의 오염과 죄책으로 말미암은 형벌의 공포와 또한 지적인 부패에서 일어난 허다한 암매 때문에 일으키는 인간의 모든 비극과 갈등과 고통과 또 정서의 부패와 의지의 부패로 말미암은 인간들의 왜곡된 부도덕한, 불의하고 괴악한 생활방식, 요컨대 사탄이 제 나라를 땅 위에다가 배포해 놓은 것과 같은 그런 현상을 나타내고 그때부터 역사가 쭉 흘러가는 것이오. 한 마디로 속임으로 말미암아서 사람이 타락한 연고로 그렇게 된 것이오.
그러나 이 속임으로 한번 타락한 사람은 그 속임 때문에 받은 고통이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속임을 미워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고 사탄의 꾀임을 받아 가지고 타락한 인간의 그 부패라는 것은 사탄적인 여러 성격을 또한 드러내게 되는 것이오.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까닭에 이제는 자기 자신이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서 자기가 벌거벗은 것을 보았다 하는 식으로 악한 방면에 지혜를 얻게 되었어요. 항상 순진하고 깨끗한 사람이 큰 죄를 범하면, 죄에 물들어 갔다 하면 그 다음부터는 도무지 생각지 않던 악한 방면에 눈이 뜨여 가지고서 악을 행하기 시작하는 것이오.
사람이 양심의 등불이 자기를 비취고 있을 동안에는 자기가 무엇을 해서는 안되고, 또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러나 양심의 불이 꺼져 버리면 상당히 많은 꾀가 생기는 것이오.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싶고 무슨 명예를 가지고 싶으면 이렇게 하면 되겠는데, 그렇게 하려면 사람도 죽여야겠고 도적질도 해야겠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짓을 해야겠다, 어디 그럴 수 있느냐? 못하겠다 하고 양심의 등불이 비취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도무지 생각지 않고 그걸 처음부터 반대라도 하지만 양심의 불이 한번 꺼진 다음에는 사람을 죽이고라도, 남의 생명을 늑탈하고라도, 남의 행복을 희생의 댓가로 지불해 버리고라도 내가 이걸 득하면 되겠다는 꾀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오.
여러분, 양심의 불이 있어서, 빛이 있어서 아직 순진하고 아직 죄악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지하고, 즉 죄악에 대해서는 별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남의 생명을 희생시켜 가면서 자기의 행복을 세운다면 할 수 있는 일이냐 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일단 그가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서 자기의 마음 가운데 악한 지혜가 생기면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지듯이 그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그 품성이 그대로 우리 속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음식을 만들어서 곱게 단장을 하고 다른 사람의 눈을 홀려 사먹도록 만들되 먹으면 그 사람 속에서 무서운 암이 자라든지 독을 붙이든지 하는 것도 아무 상관없이 음식에다가 유독한 염료를 넣고 반죽을 해가지고 우선 당장에 보기에만 좋고 단정하고 편하게 만드는 꾀가 생긴다 말이오.
지금 이와같은 악질적인 식료품 같은 것을 만드는 꾀라는 것이 지금부터 20년 전이나 30년 전에는 생각지 못하던 것이오. 30년이 지난 오늘날은 이와같은 악질적인 일을 얼마든지 하는 것이오. 그리고 어디가든지 악질적으로 사람의 약점을 잡아 가지고 그 약점을 기회로 자기 이익을 따내려고 하는 것은 아주 가장 빈천하고 빈곤한 짓인데, 오늘날은 기독교 사회 가운데서라도 얼마든지 그걸 하고 있다는 말이오. 이것이 옛날, 신앙이 참으로 바로 커서 바르게 살아보겠다 하던 그런 사회에서 있지도 못하던, 생각지도 못하던 일이오.
이러한 죄악적인 일이라는 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매 눈이 곧 밝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게 아니라 자기의 벌거벗은 것을 보기 시작했다 그 말이오. 언제는 뭐 안 벗었던가, 전에는 벌거벗었어도 왜 도무지 그걸 못 봤나? 마음이 순결하니까 그랬다 그 말이오. 순결한 까닭에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말이오. 이제 불의의 심정이 들어올 때에는 이제 눈에는 벌겋게 피가 오르고 벌써 눈에는 다른 피까지 딱 덮어 묻어 가지고서 모든 걸 볼 때에는 자기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 그 말이오.
이렇게 해서 사람이 부패하고 타락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악한 지혜가 발달하는 데 있는 것이오. 이 악한 지혜가 사람의 사회에서 발달하게 되니까 악한 자가 더욱 성해서 저도 속아 넘어가지만 남을 속여 먹기 시작했단 말이오. 이렇게 해서 인류의 역사는 처음부터 마귀가 한번 속여 가지고 인류를 타락시킨 이래로 속임이라 하는 것이 역사의 성격상 현저한 성격의 하나인 것을 늘 주의해야 해요. 왜냐하면 마귀의 특성이라는 것이 첫째는 속임이요. 속임이라는 방법을 써서 죄악과 타락을, 또 불행을 인류 사회에 도입한 까닭에 속임으로 말미암아 불행해진 사람들 속에는 속임이라는 악의 요소가 그냥 퍼져 있어서 그 악으로써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것이오.
이러한 일, 곧 속임은 마귀의 성격, 이름, 호 포네로스(Ò πονηρÓς), 그 악한자, 이 악한 자라는 말에 표현된 그 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데 중요한 방도가 됐어요. 즉 하나님의 완전, 혹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완전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까닭에 항상 악이라든지, 결핍이라, 이 악, 결핍, 이것은 속임으로 말미암아 더욱 조장돼서 이 속임의 중요한 역사적 성격의 하나는, 역사의 총체적인 내용을 한마디로 하면 항상 악이라는 것이 크게 물들어 가지고 있다는 것이오. 인류사회에 악이라는 것이 도도하게 물들어서 거기는 속임이라는 중요한 방식, 중요한 도구가 늘 활용되어 가지고 있어요.
그뿐 아니라 사탄이라는 말 자체가 적이라 하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적이라, 대적이라 하는 말인 것같이 항상 반동적이고 적대적인 이런 심리가 인류 속에서 움직여 나와서 맨 처음 죄를 짓고 난 다음에 다시 두번째 현저하게 역사상 나타난 큰 죄악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인데, 거기에 살인이라는 즉 증오, 사랑이 아니고 증오라는 악의 중요한 현상이 또 하나 있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하니까 “모릅니다.” 자기가 죽여놓고 모른다고 거짓말 했다 그 말이오. 당장에 속여요. 거기서도 거짓말을 당장에 하는 그 상태가, 거기 증오와 기만이라는 것이 거기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니” 이렇게 해서 맨 처음 살인하는 것이 곧 마귀라 하는 걸 나타내요.
사탄이 살인이라는 남의 생명을 도말을 해 가지고 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오. 제가 행복을 얻겠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복을 터득하는게 아니라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불안과 시기를 만족시키고 시기심으로 일어난 불같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오. 이것이 마귀가 사람을 시기해 가지고 떨어뜨리듯이 가인이 아우를 시기해 가지고 죽였다 말이오. 그 시기라는 것이 사람을 죽이기까지 만들었다 그 말이오.
강한 마귀의 성격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인격자에 있어서는 시기라는 것, 그리고 방법은 항상 속임이라는 것,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동적인 심리, 항상 적대 행동을 하는 것, 하나님께 대해서도 적대 행위를 하고 나갔다 그 말이오.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하고서 감히 불쾌한 마음으로 대답했어요. 마귀의 큰 성격들이 거기 드러나 있어요. 시기하고 속이고 반동하고 하나님 앞에 적대하는 행동을 하고.....
이렇게 해서 역사를 통해서 마귀의 작해라는 것은 점점 내려 왔는데 여기 또 한가지 우리가 이제 볼 수 있는 것은, 가인이 아벨을 정의와 도리를 가지고 마땅히 너는 죽음의 형벌에 해당하다고 논란한 건 아니요. 그는 더 의롭고 이는 더 악한데 악한 자가 일어나서 의로운 자를 때렸다 그 말씀이오. 그래 가지고 죽였어요.
악한 자가 의로운 자를 이기는 방식은 최후에 가서 실패할지언정 목전의 길은, 유일의 방식은 물리력(物理力)을 쓰는 것이오. 폭력을 쓰는 것이오. 여기서부터 인류 사회의 역사는 폭력이라는 것이 계승해 왔어요. 폭력으로 말미암아 한번은 전 세계가 홍수로 멸망을 받은 때가 있어요. ‘강포가 땅 위에 가득하니라’해서 홍수로 멸망시켰어요. 이와같이 강포라는 것은 두드러진 역사상 성격인 것이오. 강포의 배경에는 항상 힘이, 물리력의 집적, 즉 물리력을 쌓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가인은 물리력을, 아벨 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이오. 어쨌든지 아벨이 일어나서 대항할 수 있는 틈을 주지않고 재빠르게 아벨을 쳐 죽였으니 폐일언(蔽一言)하고 죽인 자가 죽은 사람보다 언제든지 재빠르게 또 더 악하게, 더 결정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은 분명해요. 누가 힘이 더 세었느냐 하는 건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오. 가령 아벨이 힘이 더 셌다고 할지라도 가인측에서 힘을 더 많이 썼다 그 말이오. 즉 아벨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쓰기 전에 결국 타격을 주어버렸다 그 말이오.
이렇게 폭력의 행사라는 것은 언제든지 유효하게 그 편에서 다른 폭력으로 대항할 여지를 주지 않고 유효하게 사용하려고 하는 거요. 그 큰 역사적 선례(先例)를 우리가 많이 보는데, 이렇게 해서 폭력, 속임, 시기 그리고 증오. 시기가 증오하면 나중에 막 미워하기 시작하는 거요. 폭력이라든지 속임이라든지 증오라든지 또한 반동, 적대행동 이런 것이 그 후에 역사 위에 쭉 흘러서 인류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온 세상이 그 악한 자에 처해 있어서 그 악한 자의 원하는 대로 폭력의 수라장도 되고 시기의 수라장, 또 증오 그런 것이 현저하게 여기저기 나타나는 그런 곳, 그리고 거짓이 여기저기서 현저한 그런 곳이 되고 말았어요.
사람이 문화를 창건해 나가고 사람이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가 다른 나라가 와서 점령하고 그런다고 할지라도 그런 모든 흥망성쇠의 역사는 그건 표면에 나타나는 현상들이고, 배경에 도도히 그 이 세상의 임군과 함께 죽지 않고 수천 년을, 4천 년이나 5천 년을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큰 물결은 아까 말한 대로 속임이라는 것인데, 속임이라는 그 성격이 늘 존재하고 폭력이라는 성격이 늘 존재하고 증오, 시기라는 성격이 늘 끊어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것은 합해서 항상 의와 선과 미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적대 행동을 하는 반신적인 방향으로 늘 행동하고 나갔다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러면 그와같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놓고 오늘날 하나님이 부르사 하나님의 신권정치의 아름다운 것과 능력있는 것과 영광스러운 것을 우리라는 거룩한 교회에서 실현하게 하시려고 역사를 만들었어요. 그 만들어지는 역사라는 건 또한 동시에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온 세상, 폭력과 거짓과 증오와 적대적인 모든 성격이 강력한 이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과 더불어 늘 대립하고 대전하면서, 싸우면서 나간다 하는 것이 우리가 크게 볼 수 있는 우리 현실이란 말씀이오. 그렇게 나타나는 것......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이 시대의 여러가지 현상은 어떠냐 하는 점이오. 오늘날. 여기도 물론 속임이 있고, 폭력이 있고, 증오라는 사실이 있고, 하나님께 대한 적대적인 행위가 있단 말이오. 그런데 그 속임이라는 것은 주로 어떠한 방향을 늘 취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면 이건 사탄이 어떻게 발호(跋扈)해 왔느냐는 것을 성경 역사에서 쭉 뽑아 가지고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할 것이오.
마귀가 어떻게 그 나라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조직적이고 치밀하며, 어떻게 스스로 잘 통재돼 있으며, 어떻게 큰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그는 민활하게 활동하고, 어떻게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궤휼을 쓰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광명한 천사인체 하고 나타나고 어떻게 그 부하들을 땅 위에다가 두고 있으며 어떻게 그 마귀의 자녀라는 것들이 땅 위에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성경이 다 가르친 바요. 그리고 가라지라는 것도 있어요. 교회에는 가라지가 있어서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나타난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이와같이 명백하게 여러가지를 써 왔으니까 이제는 그것을 그렇게 있는 여러가지 원칙들, 재료들을 놓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현실에 무엇이 있는가 돌아다니면서 쭉 조사를 해 보면 ‘아! 이게 뭐구나’ 하는 걸 알 것이 아니냐 하는 것 뿐이오. 또 우리의 시대까지 흘러오고 있는 여러가지 잡다한 것들을 켓취(catch)해서 조사해 보면 ‘아! 이것이 뭐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아니냐 말씀이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결국 마귀가 자기의 부하를 데리고 자기 자식들을 사방에다 교회 안에다까지 심어 놓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고 있는가? 역사와 혹은 전체 인류 사회의 거대한 현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즉 교회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고, 정치 사회에서는 무얼 하고 있고, 문화 세계는 무얼 하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그것이 우리의 적군이니까--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자꾸 알게 될 것이오.
그러면 마귀가 역사 위에서는 어떻게 했는가를 우리가 한 가지씩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마귀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마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마귀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마귀라는 것을 잘 모르면 그것을 공부를 하셔야 해요. 그냥 아는 것같이 지내고 내 버리면 안되고 꼭 공부를 해 가지고 있고 이제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마귀라는 것이 어떠냐에 대한 조직적인 논리적인 공부가 아니고 역사적인 공부요.
마귀는 그러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흘러 일을 해 나가느냐 하는 것을 공부하자는 것이오. 역사적인 공부라는 것이 재미있는 공부인데 역사적인 공부를 하려면 마귀는 무엇이냐를 알고 있어야 하며 마귀의 부하는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것을 대개 알아야 하고 마귀의 자식들은 어떻게 생겼느냐 알아야 역사를 공부해도 그게 마귀다 아니다, 그게 마귀에 속했다, 아니 했다는 걸 차츰차츰 짐작해 나갈 것이오.
이제는 사탄의 역사요. 사탄의 준동한 역사요. 아담 하와 때부터 시작해 가지고 준동해 나오는 역사의 얘기요. 사탄이 몇이나 됩니까? 마귀들린 사람 많이 봤지요? 여럿이요, 하나요? 사탄의 수는 몇이나 되요? 군대, 군대도 있어요. 사탄 군대, 거진 2천 마리나 됐는데, 한 사람 속에 들어갔던 놈이. 막 2천마리 돼지 속에 들어갔어요. (하나요.) 그러면 사탄의 수가 하나이면 어떤 사람이 사탄 들었으면, 미국에 지금 어떤 사람이 사탄이 하나 들려있으면 여기 한국에는 사탄들린 사람 없어요? (사탄 자체가 거기 들어 있으면 여기는 없죠.)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은 뭐요? (사탄의 휘하들이오.) 그러면 사탄이 안 들어가고 사탄의 부하, 사귀가, 귀신이 들어 가지고 병을 일으키는 것 하고 뭐 얼마나 다를 것 없다면 사탄이 들어가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사탄이 반드시 하나야 한다면 하나는 무슨 특권이 있느냐 말이오?
그런 문제에 대해서 그러면 또 한번 물어 보십시다. 옛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려고 성만찬을 하시고 끝났을 때 사탄이 어디에가 있었어요? 그때.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었습니다)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갔지요?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 활동한 얘기는 다 있는데. 유표하게 그 말이 어디에 있어요?
(요한복음 13장 27절) 13장 27절에 있어요. 한번 읽어 보세요.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 갔지요? 사탄이 들어간 사람이 무엇을 했어요? 사탄이 들어가서 가룟 유다가 무엇을 했어요? (예수를 팔았어요) 예수를 팔어? 예수를 잡는 일을 했지요? 예수는 벌써 팔았어요. 가룟 유다는 팔아서 잡아 줄 뜻을 벌써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2절 말씀 “예수를 잡아 줄 뜻을 가룟 유다의 마음에 두었더니.” 이제 떡을 먹고난 후 사탄이 들어와서 이제는 그걸 할 용기도 없고 사실은 할까 말까, 할 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딱 해버렸다 말이오. 최후의 일각, 마지막 장면의 지금 예수 그리스도요. 마지막 십자가에 달릴 장면이요. 이렇게 해서 사탄이 들어 갔을 때는 가장 무서운 것을 한 것이오. 귀신들린 것하고는 다르잖아요?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귀신들린 것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사람은 생각 얼마나 하는가?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해를 끼치는) 하나님 나라에 어떤 모멘트(moment), 어떤 가장 중요한 문제,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계되려고 할 때는, 그러니까 사탄은 일을 보되 사람이 보듯 안 보고 핵심을 뚫어 보고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거냐? 그 놈을 찾자.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귀신들려 돌아다닌다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 아니요? 얼마나 그게 신중한 일이냐 말이오.
사탄이 자식들이 있습니까? 내가 있다고 그랬지요? 그건 또 마귀의 자식들이 있느냐 말이오? 하나님의 자식과 마귀의 자식들을 이로써 갈라 놓는다 해놨지요? 마귀의 자식들은, 예를들면 어떤 경우에 어떤게 마귀의 자식이요? 성경에 있는 얘기로는 비유를 들어서는 어떤게, 무엇을 마귀의 자식이라? (가라지.) 어디 한번 읽어 보세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마 13:38) 가라지는 마귀의 아들들이라고 그랬어요? 악한자라 그 말이오. 가라지. 악한자는 누구요? (악한자는 마귀요) 악한자가 마귀죠? 악한자가 어째서 마귀요? (요일 5:19 - “온 세상은 그 악한 자 안에 처하여 있느니라) 그런다고 마귀는 악한자이냐? 물론 그 악한자요. 아주 정관사를 붙여서 호 포네로스(Ò πονηρÓς) “그 악한자”라고 이름 한 악한자가 있어요. 다 알고 있는 “그 악한자”라 그 말이오. 항상 정관사를 써서 그 악한자(the evil one)를 표시했어요. 그러니까 성격이 악한 사람이 그 악한자라고 하는 것은 아니오.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놈이 됐든지 악한 놈이 악한자라는 말은 아니오. 여기 호 포네로스(Ò πονηρÓς) “그 악한자”라 그 말이오. 그건 이제 마 13:19에 뭐라고 썼어요?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거기도 악한자가 있어요. 이제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 그 놈이 악한 놈인데 그 놈이 곧 가라지, 악이라 말이오. 그리고 요일 5:19절에 있는 “온 세상을 손에다 쥐고 있는 자”라 그 말이오. 그게 악한자요. 그런데 그게 마귀라는 말은 어디에 있느냐 할 때는 막 4:15을 보세요. 눅 8:12에 또 있어요. 막 4:15에는 천국 말씀을 빼앗는 자를 뭐라고 했어요? 지금 마태복음에서는 그것을 “그 악한자”라고 했는데 그 악한자인데 (사탄이라고) 사탄이라고 그랬지요? 거기는 사탄이지요.
눅 8:12절에는 꼭같은 사람은 뭐라고 했어요? 같은 이야기를 해 놓고. (마귀요.) 거기는 마귀라 그랬지요? 이게 한 비유인데, 동일한 비유인데 동일한 비유를 해석하면서 그 해석한 부분을 쓸 때 마태는 악한자란 말을 쓰고, 마가는 사탄이란 말을 쓰고, 누가는 마귀란 말을 써놨단 말이오. 씨를 빼앗는 것은 그건 한 놈인데 그건 마귀도 되고 사탄도 되고 악한자도 되고 그래요. 묵시록 12:9을 보면 ‘용이라고도 하고 옛뱀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 하는자라.’ 이렇게 말을 여러개를, 이름을 붙였어요.
“길가에 뿌린 씨는 밟히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하는 뜻을 해석할 때 ‘이는 곧 악한자, 곧 사탄, 곧 마귀가 그 씨를 빼앗는 것이니라’ 뜻하신 거라 말씀이오. 여기서 “그 악한자”는 곧 사탄이오. 마귀라 그 말씀이오. 또 요일 5:19에서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그 악한자 안에 처한 것이며” 하는 그 악한자도 역시 그것이오. 마귀라 말씀이오. 사탄. 그런데 이 악한자가 마귀인데 마귀의 자식들이 있는 것을 예를들면 가라지라고 그랬지요? 그러면 비유를 해석한 결과 그것은 뭐였지요? 가라지란 뭐요? 가라지란 건 뭐요? 비유를 해석한 결과 가라지는 뭐요? 악한자의 자식들이라고 그랬지요? 거기는 해석했는데. 그러면 알곡은 무엇이요? 천국의 아들들이지요? 그런데 그 비유대로 보면 지금 가라지는 어디에 가 있고 알곡은 어디가 있는거요? 다같이 함께 섞여가지고 있지요? 그래가지고서, 그런데 그 가라지가 어떻게 해서 생겼어요? 밤에 다 잘 때, 조용할 때, 즉 아무도 모를 때, 그러니까 이제 다른 사람 몰래했다 그 말이오.
이건 아무도 모를 때 와서. 원수가 어떤 자요? 아까 말한 원수라는 자. 그것도 마귀요. 또 마귀 원수라고 그러지요? 사탄이라는 말 원수죠? 적이라 그 말이오. 원수가 와서 가만히 뿌렸다 그 말이오. 아무도 몰래 모르는 사이에 어디다 뿌렸어요? 뿌리기를. 그 밭은 지금 누가 있는 곳인데? 천국의 아들들이 지금 살고 있는데 거기에다 뿌렸다 그 말이오. 천국의 아들들이 사실 모여 있는데 뿌렸다 그 말이오. 그 밭이라는 곳은 천국의 아들들 이외에 다른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까?
천국의 아들 이외에 다른 것 엉겅퀴도 있고, 가시덩쿨도 있고, 무화과도 있고 그냥 장미꽃도 있고, 그냥 한꺼번에 있어야 할 자리냐 말이오? (아니오) 꼭 천국의 아들들만 있어야 할 자리죠? 그러면 그건 뭐요? 천국의 아들들만 있어야 할 순수한 자리가 땅 위에서는 교회요. 그런데 그 놈이 속에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가만히 슬그머니 가라지를 뿌려 놓았다 그 말이오. 또 가라지라고 그랬는데 여기 우리 말로. 아까 최선생 물었지만 어디 밀하고 가라지 하고 있는데, 그 팔레스틴에 있는 밀하고 가라지하고 어떻게 흡사한지 몰라요. 도저히 볼 수 없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이제 비유가 뭐요? 그 다음의 비유의 내용이? 어디 그 다음의 얘기는 뭐요? 뿌려 놨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그 다음에 무엇이 있지요? (“싹이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마 13:26-30).
그러면 싹이나고 결실할 때요. 쏙 올라와 가지고 싹이 쏙쏙나고 이제 열매를 맺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가라지도 보였다 그 말이오. 열매 맺을 때까지 보면 대체로 잘 모르나 열매를 맺어 놓으면 그것은 가라지는 가라지로 나타난다 말씀이오. 어떤 사람은 그 가라지가 가라지로 나타난다는 말을 보통 그냥 부흥회 때 흔히 쓰는 말들 있지요? 곡식은 알곡을 가지면 그것이 고개를 숙이지만 가라지는 빳빳하다 한다고, 그런데 노상 그런 것도 아니요. 밀이라는게 이렇게 고개를 숙입니까? (안 숙여요.) 이 나락 농사 짓는 한국서만 생각해 버릇해 놔서, 이건 팔레스틴 땅이오. 다 같이 반듯하게 있지 가라지가 자기가 가라지라는 걸 드러내려고 특별히 이렇게 고개를 빳빳이 하고 고개를 숙일 때 안 숙입니까? 거짓 선지자라도 양의 옷을 입는다고 그랬어요. 껍데기에 있어서는 다를 것이 없다는 거요. 다 다를 것 없으니까 그것 가지고 고개 숙이는데 하나는 빳빳하다 해서 교만하다고 부흥회 할 때는 교만을 찾느라고 아주 묘한 예가 되는 것 같지만 예가 못되요 당초에.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가라지가 나타나는 때는 언제냐 하면 교회가 결실을 할 때인 것을 알 수 있어요.
마귀에 대하여
제2강
막 5:1-20
마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알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들을 행하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먼저 확실히 알고 확신하고 있어야 할 것이고, 그런 것을 알려면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우리가 잘 알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의 일반적인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 이것들을 먼저 잘 알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개별적인 세밀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인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가지고 자기의 발 앞에서부터 나아가야 할, 자기 눈 앞에 놓인 현실을 늘 재보아서 그것이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렇게 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들을 미루어 살핌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성경이라는 하나님이 나타내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를 먼저 가지고 우리 앞에 지금 한 걸음 앞으로 나가야 할테니까 발 앞을 재야 한다 말이오. 발 앞을 재서 이리로 나가야 할건가 저리로 나가야 할건가를 거기서 재야 한다 말이오. 그렇게 하노라면 성신께서 우리에게 확실히 마음에 감화를 주시고 깨닫게 하시므로 “아, 이것은 해야 되겠고 이것은 해서는 아니 되겠다” 이렇게 명확한 판단을 또한 내려 주시는 것이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앞을 재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있어야 하는 것이지 말씀이 없어 가지고는 지금 우리 앞의 일을 잴 수가 없는 것이오.
우리가 우리 앞을 잰다고 할 때에는 우리 앞에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 여러 사실이라는 것이, 그것이 간단한 사실들이 아니고 다 연유가 있고 역사가 있고 유래가 있는 사실이 많이 있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앞에 있는 이런 사실이라는 것은 과거의 결과로 또한 미래를 위한 원인으로 늘 존재하는 것들이오. 과거의 결과라 할 때는 그 과거는 어떻게 했기에 이러한 결과를 (이것들이) 냈는가? 즉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바로 재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근원이나 경과나, 그래서 오늘날 이루어진 상태를 잘 아는 것이, 아는 것으로써, 그걸 바로 그렇게 알기 위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확실히 규명하고 깨달아 알기 위해서 그것들이 관계하고 있는 과거에서부터 흘러온 유래나 역사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잘 알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오.
우리의 눈 앞에 있는 현실이라는 건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의 여러가지 일들인데, 이 세상의 여러가지의 일들을 우리들이 바라보면서 그 유래나 성격을 알아 볼 때는 이 세상의 여러가지 성격과 유래를 가져다 준 장본인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오. 그 장본이라는 것이 이러한 성격, 이러한 유래, 이러한 여러가지 현상들, 그것들이 다만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이외에 사람 보다 훨씬 큰 원인이 되고 큰 능력이 되고 큰 작용이 돼 가지고 있는 큰 원인, 큰 능력, 큰 작용이 돼 가지고 크게 역사하는 한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은 가장 적극적으로, 가장 구체적으로 능력 있고 목적이 명확하고 또 아주 당당하게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작용해 오는 것이 왈(曰) 사탄에 대한 연구올시다.
사탄이야말로 그런 인물이오. 옛날부터 계속적으로 어떤 목적을 향해서 끊임없이 작용해 왔고 큰 능력을 가지고 해 왔고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늘 전진하고 있으며, 그는 다만 자기 홀로 큰 능력을 가지고 활동하는 데 그치는게 아니고 자기의 휘하에 수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 부하를 가지고 역사를, 사역을 해온다 말씀이오. 우리가 사탄이 재미가 있어서 공부하는게 아니라 그것이 한 일들과 하고 있는 일들이, 또한 그것과 관계되어 있는 사건, 사실들이 결국 우리 앞에 헤치고 나가야 할 여러가지 사실들인 까닭에 필연 그것의 유래, 연유를 잘 아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오. 이 공부를.
사탄은 물론 한 개의 인격자로서, 잘 아시는 것과 같이 그 이름 사탄이란 말은 대적이라 혹은 원수라 하는 말로 과연 사탄은 원수요 대적이라고 성경에서 여러 번 가르쳤어요. 사탄이라고 할 때 원수라, 혹은 대적이라 그런 말로 우리가 쓰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해서 사탄을 대적이라 했어요(벧전 5:8). 또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해서 마귀를 원수라(마 13:39절), 그 이전에도 “원수가 이렇게 했구나”(29절)라고 했어요. 사탄이라는 말의 동사 ‘사탄’은 “엎드려서 기다린다”는 말이오. 또 헬라 말에 디아볼로스(διαβολος)라는 말은 마귀라 하는 말뜻인데 이 말뜻도 역시 “대적” 혹은 “참소하는 자”, 이 “참소자”란 말은 묵 12:10절에 “밤낮 너희를 참소하는 자”라고 나와 있단 말씀이오.
그밖에 사탄이는 가지고 있는 여러 이름이 있어요. 그러나 제일 많은 것이 사탄이라는 이름으로 구약에서는 24번 사용했어요. 기타 사탄에 관해서 즉 마귀에 대하여 사용한 이름은 사탄이라, 마귀라는 이름 이외에 시험하는 자라, 바알세불이라, 원수라, 그 악한자라, 벨리알이라, 대적이라, 대적이라는 말은 아까 말한 디아볼로스라는 말보다 여기는 대적, 그것을 또 다른 말로 안티티코스(αντιτικος), 속이는 자라, 또한 용이라, 거짓의 아비라, 처음부터 살인자라, 범죄함이라, 이러한 말로 표시를 했어요. 이렇게 여러가지 말이 있는데 제일 많은 것은 사탄이라는 말, 마귀라는 말이오. 그 사탄에 관해서 쓴 말들 가운데, 가령 83회 가운데 70회는 사탄 또는 마귀란 말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사탄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릇된 개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은혜를 마귀가 막을 수 있느냐 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는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을 제가 방해는 못한다 말이오. 마귀가 감히 하나님을 대적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전쟁을 하는 것같이 많은 책이 그렇게 씌어 있어요. 그렇지만 마귀는 실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서,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향해서,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감히 대들어 싸우는 건 아니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악의를 가진 건 사실이오. 마귀는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자고 악의를 가진 자요. 조금이라도 거기 선이라는 요소를 가지지 않은 자라 말씀이오. 그러기 까닭에 마귀가 가진 이 악이라는 것은 아주 강한 것이오. 강한 것이어서 하나님께 대해서도 악의를 품을 수 있으나 그것을 감히 하나님께 향하여 제가 나타내거나 은밀한 가운데서 조금치라도 하나님을 멸시하거나 절대로 못한다 그 말이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까닭에 두려워하고 떠는 것이오.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지 못한 까닭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식으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떨지도 않지만 오히려 마귀나 영계에 있는 이 악한 영들은, 귀신들은 다 하나님이 여럿 있는 것 아니고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한 분 대주재로 홀로 만사를 통재하시며 창조하신 것을 믿고 알고 떨고 있다 말씀이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너희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아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믿고 떤다 말이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걸...
그러니까 마귀가 항상 강하게 그 힘을 발휘하고 싸우려고 하는 대상은 직접 하나님 당신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말이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을 마귀가 적으로 하고 싸우는 것이 아닌 건 분명해요. 왜냐하면 “온 세상은 그 악한 자에게 처해 있으며”(요일 5:19) 또 “온 세상은 그 마귀의 팔에 누워있다.” 온 세상은 마귀의 팔에 누워 있는 것이오. 그러기 까닭에 온 세상을 제가 상대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이오. “또 아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그) 악한 자에게 처하여 있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속한 자를 상대로 하고 싸우는 것이오. 생각컨대 그건 마귀가 강하게 시기하고 강하게 증오한 까닭에 그렇다 그거요. 마귀는 맨 처음 인생을 볼 때, 죄없고 무한한 희망을 가지고 큰 영광의 소망과 영광의 목표를 향하고 그러한 뜻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을 보았을 때, 마음 가운데 독한 시기가 있어서 그를 넘어뜨리려고 무죄한 그를 꾀어서 마침내 하나님을 배반케 함으로 그가 타락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다 아는 것이 올시다.
마귀가 사람을 넘어뜨릴 때에 쓴 가장 유효한 방법은 오늘날도 그가 쓰고 있는 방법이오. 그건 속인다는 것이오. 속인다. 속인다는 것, 속임이라는 것이 가장 유효하고 먼저 사용되었던 방법이올시다. 속이는 방법으로써 마귀가 사람을 늘 넘어뜨리는 것이오. 그러므로 마귀의 속인다는 것이 재앙을 위에서 내린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해를 가리운단 말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순풍조(雨順風調)하게 내리는 비를 못 내리게 막아 놓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리적인 모든 기관을 주셔서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작용하게 한 육체적인, 자연계의 혹은 생리의 작용을, 과학적인 사실을 마귀가 제멋대로 뚜드려 고친다든지 방해한다든지 그렇게 못하게 만든다든지 그런 짓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이오. 밤에 가는데 갑자기 다리가 딱 들어 붙어가지고 오도 가도 못했다 하는 얘기를 우리가 볼 때 귀신이 그를 꽉 잡아 가지고 오도 가도 못했다 하는데,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다면 별 문제려니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저 덮어 놓고 귀신이 그 사람과 아무 관계 없었는데 그를 붙들어 가지고서는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든다든지 하는 이 자연계의 현상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런 짓을 마귀는 못한다 말씀이오.
마귀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큰 은사를 못 내리게 공중에서 그걸 막고 그대신 재앙을 내리려고, 여러분, 서양이나 동양에 다 그런 얘기가 있어요. 마귀가 귀신부리기를 해서 갑자기 구름이 일고 비가 일고 캄캄한 구름이 천지를 뒤엎고 뇌성벽력으로 막 사람을 혼비백산(魂飛魄散)하게 하고 산에 있는 돌들이 폭폭 날아 가지고서는 그만 적군을 내리치니까 군사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도망을 했다, 이것이 수호지에도 있는 얘기고 서양 얘기에도 있어오. 마귀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말씀이오. 그러나 마귀는 그런 힘이 없는 것이오. 하나님이 바람을 동쪽으로 불게 하신 것을 서쪽으로 제멋대로 못하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비를 제가 딱 날개를 펴 가지고 막지도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비취시는 따뜻한 햇빛을 그가 딱 날개를 펴서 그늘을 지어서 땅 위에 못 비취게도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내신 사람의 자연스런, 과학적인, 생리적인 모든 기관의 작용이라는 것을 마귀가 갑자기 딱 정지한다든지 그것을, 더 무엇을 가해 준다든지 그렇게 못해준다 그 말씀이오.
그러나 마귀의 작용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마귀의 작용은 두 가지 면에서 현저히 나타나요. 단계적으로 첫째는 다만 사람에게 개념을 전달해서 사람의 마음을 제가 사로 잡는게 아니라 첫째는 개념을 전달해서 시작하는 것이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셨을 때,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을 “먹으면 죽으리라,” “먹지도 말라. 만지지도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다고 하니까, 마귀는 어떤 개념을 불어 넣었느냐 하면 그건 먹더라도 결단코 죽지 않는다는 그것을 불어 넣은 것뿐이오. 따다가 주지도 못했고 그를 끌고 그 선악과 앞에까지 간 것도 아니고 단순히 그걸 집어 넣은 것 뿐이오. 그 생각만. 말만 해 줬다 말이오. 마귀의 작용이 이것이오.
그러면 어떤 개념을 불어 넣었느냐 하면 항상 진리와 비진리를 섞어서 집어 넣는 것이오. 결코 거짓말만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넣는 것이 아니라 참말과 거짓말을 뒤섞어 어디가 거짓말이고 어디가 참말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 가지고 거기다 던지는 것이오. 그것이 첫째 단계요. 그래서 그 거짓말에 혹하여 넘어지면, 그 사람이 그 거짓말에 혹해 가지고 마침내 죄를 범하면 마귀는 범죄한 인생의 그 속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오. 모든 범죄한 인생 속에 다 각각 하나하나 일일이 다 들어 가는건 아니지만, 속에 들어갈 수가 있어서 필요에 따라서는 그 속에 들어 가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한번 범죄로 넘어진 사람이 죄의 오염으로 부패와 타락으로 죄와 합심해서 죄를 짓기가 쉬울 때, 마귀는 항상 그 귀에 대고 죄악의 편이 유리한 것을 설득하고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오. 그런고로 사람이 죄를 범하는 많은 경우에 순전히 마귀의 작용에 의해서만 범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당한 생각이오. 사람은 자기의 부패와 자기의 가지고 있는 죄악의 오염으로 왜곡된 인생, 품성 때문에 범죄할 수 있는 것이고 하는 것이오.
그러나 단순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죄의 오염과 부패만을 가지고 죄를 짓는게 아니고 그 사람의 속에 있는 부패한 품성은 선보다 악을, 의보다 불의를 더 확신해서 좇기 쉽게 된 까닭에, 즉 품성이 악한 까닭에, 악에 더 친화력을 가진 까닭에 악의 기만을, 악으로써 속이는 것을, 악으로써 시험하는 것을 사실로 믿고 그쪽으로 따라 가는 것이라 말이오. 마귀는 지금도 그렇게 계속적으로 거짓말로 사람을 꾀어가는 것이오. 어떤 경우에 아주 결정적으로 사람을 넘어 뜨리려고 할 때는,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큰 문제에 대해서 결정을 해 볼려고 할 때에는 마귀는 사람의 속에 들어 갈 수도 있는 것이고 들어 가서 그 사람을 전적으로 사로잡을 수도 있는 것이오.
또한 그뿐 아니라 마귀는 자기 혼자 일을 하지 않고 잘 조직된 권세의 기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마귀의 정권이오. 마귀의 정권은 공중에 있어서 이 세상 만사를 주장하는 권세로 제 목적지를 향해서 끌고 가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가지고 있는 이 큰 기구라는 것, 그것이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와 공중에 있는 악한 신들을 대적함이라”(엡 6:12)는 말씀에서 가르친 대로 정사, 권세, 정사란 말은 정치라는 말보다는 “정치 잡은 자”란 말 뜻이올시다. 이 세상에 있는 정치 잡은 자란 말이 아니고, 마귀가 왕으로 앉았으면서 그 왕, 혹은 황제로 앉았으면서 황제 아래 영계에서 또한 그 권세를 나누어 가진 어떤 공국(公國)의 번방왕, 분봉왕 같은 (군국의) 공국의 군주의 지위, 그것 보고 알카에(αρχαη) 혹은 알케(αρχη)라고, 그런데 알카스(άρχáς) 이것이 정사란 말이오. 권세 또한 권위는, 군주나 주권자 마귀가 자기의 권위를 나누어 주어서 그 권세를 갖다가 쓸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자라 말씀이오. 나라에 있어서는 나라의 원수가 있지만, 그 원수의 권세를 총리 대신이 쓰는 것과 같이 여기도 그런 권세를 가진 자가 있다 그 말이오.
그 다음에 어둠의 세상 주관자라, 호 코스모크라토(ό κοσμοχρατο)라는 말이 있어요. 이것은 이 세상적인 군주로서 불경건하고 불신하는 세계에 있어서의 강력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그 권세자를 가리켜서 코스모크라토라고, 이걸 보고 ‘이 세상 주관자’라고 우리말로 번역을 길게 했는데, 사실상 이 세상 주관자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라, 세상 주관자인데 그건 어두운 자(캄캄한 자)라 그 말이오.
그런고로 이런 것이 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휘하에서 악한 영들이, 또한 공중에 있는 악한 영들이 다 마귀의 군대로 조직돼서 잘 통일한 나라로서 마귀의 명령 일하에 세계 어디서든지 활동을 하게 돼 있어요. 마귀는 결코 저희들끼리 분쟁을 하거나 통일이 안돼 있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오. 눅 11:18에도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희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어요. 사탄은 분쟁 않는다. 막 3:23-26에도 같은 말이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에 있어서도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마 12:26에도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 낸다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고 그리 하고야 저희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해서 제가 저를 내 쫓는다는 그런 일은 없는 것이다. 분쟁 않는다 그 말이오. 잘 통일이 돼 있다. 거기는 분쟁할 수 없고 권위자는 위에 절대의 권위를 가지고 딱 앉아서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잘 지배하고 있어서 이 지배권이 어디에 미치고 있느냐 하면 온 세상에 미쳤어요. 요일 5:19절에 “온 세상은 그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 그랬어요. 또 예수께서는 이 마귀를 가리켜서 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일어 났나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 나리라” 세상 임금이라고 그랬어요. 이 세상 임금이란 말은 헬라어 알콘(ʾάρχων :The prince of this world)으로 이 악한 세상이라 그 말씀이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전 세계를 통치하시고 통재하시는 왕은 물론 하나님이신 것이오. 그러나 (이 악한) 이 세상이라고 하는 악한 이 세상, 그 다음 온 세상이라는 말이 아니고 악한 이 세상 임군은 마귀라 이 말씀이오. 악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라 해서 코스모크라토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라, 어둠의 세상이란 말이 아니고 세상 주관자인데 어떠한 자냐 하면 어두운 자다 말이오. 캄캄한 자다. 아주 시꺼먼 자다. 그런고로 그 암흑한 치세자(治世者)라든지 혹은 세상 주관자라. 그리고 이제 이러한 마귀는 이러한 큰 권세를 가지고 어떤 때는 그가 신인 까닭에 특별한 명사를 붙여서 이 세상 신이라(고후 4:4) 혹은 이 세대의 신이라. 이 악한 세대, 현 세상을 형성해 가는 성격을 표시하고 있는 시대, 이런 것이 마귀의 상이올시다.
그런데 그런 마귀가 사람을 해한다 할 때 마귀의 휘하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이야 제가 들어 가려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오. 꼭 제가 들어갈 필요가 없고 많이는 자기 휘하에 있는 수많은 귀신들을 들여 보낸다 그 말씀이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니까 “군대라.” 성경을 보면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막 5:9절이오.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레기온(Legion)이니, 레기온은 한 연대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단의 병력까지를 가진 것인데 옛날 로마시대의 레기온이란 이름은 일정한 수를, 얼마라고 할 수 없는 것이오.
그러나 로마 시대에 있어서는 ‘레기온’ 할 때는 대체로 한 육천 명까지를 보통 생각했다 그래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 레기온이란 말이 어떤 일정한 수가 아니고 많은 수를 얘기한 것이오. 한 영(營), 열두 영(營) 뭐 이런 영이라고 하는데, 군영, 마 26:53에도 눅 8:30에도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하는 눅 8:30절. 많은 귀신이라고. 많다. 마 26:53절에 “내 아버지께 구하여 열두 영 더 되는 천사,” 열두 영이라고 하는, 군영이란 말을 쓰는데 그게 얼마나 있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어요. 한 영이라고 하면 한 부대, 부대니까 그것을 열두 레기온도 더 되는 천사라. 그러면 이런 큰 군대를 가진 자가 여기 있는데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으니이다”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말기를 간절히 구하니.”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말기를 간절히 구할뿐 아니라 무저갱에 들여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했다고 누가복음에 말씀했지요. 이 사실의 기록이 눅 8:26-39절에 있어요. 마태복음에도 8:28-34절에 있어요. 지금 우리가 읽은 막 5:1-20절 얘기가 누가복음의 기록을 볼 것 같으면 무저갱에 들여 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했다. 그러니 거기 돼지 떼가 이제 산 밑에서 먹고 있으니까 돼지 속으로 들어 가기를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허락 하신데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 하거늘.” 여기 원문을 볼 것 같으면 12절,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누가 간구했어요? (귀신들린 사람이.) 귀신이. 귀신이 몇명이요? 그러니까 귀신이, 2천 마리나 되는 속에 들어갈 귀신들이 소리를 쳤으면 얼마나 큰 소리가 났을까?
여기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여기 또 보이는데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물었다 말씀이오. 예,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그랬지요? 9절에. 거기 내 이름은 군대라는 것이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대명사가. 내 이름이라고 그랬지요? 우리들 이름은 군대니이다 그러지를 않았지요? 내 이름은 군대니이다. 그랬지요? 그래 놓고는 하는 말이 “우리가 많음이니이다”(우리가). 이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많은 까닭에 그렇습니다. 거기는 우리라고 그랬지요. 나라고 했다가 이제 우리라고 해요 금방. 그런데 나중에 이 돼지 먹이는 것을 보고 돼지 속으로 들어 가기를 구하니까 그리로 들어 가기를 허락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척 들어 갔다 말이오. 들어가 가지고 돼지가 제멋대로 다 뿔뿔이 헤어지지 않고 한 일정한 방향을 향해서 전부 통일이 돼서 마치 군대가 호령을 해 가지고서 구령을 불러 가지고 군대가 달리듯이 달려 갔다 말이오.
결코 돼지가 둘도 하나도 다른 데로 비끄러 나간 일이 없지요? 한꺼번에 죽 한 방향으로 가면서 일제히 물속으로 들어가서 몰사해 버렸다 하는 얘기지요? 이건 반드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귀신의 명령 일하에 통제되어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다 말이오. 이 통제된다는 사실이 이 말을 쓰는 데에 나타나 있어요.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10절) 자기를, 자기들이 아니고 그때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씀이오. 항상 뭐냐하면 대표자가 있어요. 여기 그 안에도 대표자가 있어서 대표자가 “예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우리는 많습니다”하고 전체를 대표해 가지고 하나가 대답한 것이오. 예수님께. 그러면 이 군대지만, 귀신들린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 수가 많아도 중구난방으로 제멋대로 다 떠드는게 아니고 하나로 통제하에서 움직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저 차라리 돼지 속에나 들어 가겠습니다.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하니, 아까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했다는 자는 누구냐 하면 ‘자기’라는 자요. 자기를 내 보내지 마십시오. 그러고서는 이에 그 자기라는 자가 간구하여 가로되, 그가 간구했다 그 말이오. 이게 좀 더 원문대로 보면 훨씬 그게 분명해요. 그 사람이 간구했다 그 말이오. 그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그가 간구하기를 ‘우리들을 저 돼지 떼 속으로라도 차라리 들여보내 주십시오.’ 언제든지 대표가 행동했어요. 그러면 이제 보면 그가 허락을 받으니까 자기의 부하를, 수천의 부하, 그러니까 꼭 이천마리의 돼지 속에 한 돼지에 하나씩 귀신이 들어 갔으리라는 생각은 아니오.
이것도 한 돼지 속에 몇씩 들어 갔는지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좌우간 이천 마리의 돼지가 됐든지 어떻게 됐든지 다 들어 갈 수 있을 만큼 수가 많았단 말씀이오.(한 사람 속에) 이천 마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귀신이 한 사람 속에도 있었을 뻔 했으니까, 그러니까 이천 마리 속에 있던 귀신이라는 것은 4천 마리가 됐더면 있을 수 없을뻔 했느냐? 그건 우리가 말할 수 없단 말이오.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없어요. 좌우간 군대요. 거대한 군대가 한 명령자에 의해서 예수님한테 교섭을 하고 간구를 하고 허락을 해 주십시오 하고 허락을 맡은 다음에는 와- 하니 돼지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명령 일하에서 돼지를 막 몰아 가지고서, 일단 돼지 속에 들어 갔으니까, 몰아 가지고서는 막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푹 물속으로 빠져 버렸다 그말이오. 빠지니까 돼지를 먹이던 사람들은 손해를 봤다 말이오. 이렇게 간접적으로 손해를 끼쳐가지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서워하면서도 또 그 양반이 여기 계셨다간 살림이 거덜나겠다고 생각해서 떠나 주십시오. 떠나 주십시오 해서 예수님의 영광스런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막는 유일의 수단이 이것이오.
그때. 이것도 예수님께 허락을 맡아 가지고 “예수님 저희들이 지금 저 돼지 속에 들어 가겠습니다. 그것이라도 허락해 주시지요. 무저갱으로 들여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벌써 때가 됐습니까? 아 심판자시여 때가 됐습니까?” 여기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들 예수여”하고 자기를 괴롭게 마옵소서, 괴롭게 할 수 있는 분이라는 걸 알았다 그말이오. 자기를 고통으로 징치하고 마침내 영원한 형벌 가운데 괴롬을 줄 그 분인 것을 거기서 발견했다 그 말이오. 심판자이신 예수님이신 것을 발견하고 심판주 예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려 절을 하고, 절했다는 것은 경배했다는 말이오. 예배했다 그 말이오.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그래 돼지 속에 들어가 손해를 끼쳤다 하는 얘기올시다.
마귀는 그 수하에 수많은 군대, 잘 조직되고 잘 통재돼서 하나같이 움직이는 이 거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어서 자기의 총사령부에서 번쩍하면 전 세계 어디든지 힘이 미친단 말씀이오. 마귀는 혼자지만 그러나 그는 결코 백 년 살다가 죽는 사람과 같지 아니해서, 영체인 까닭에 영으로 존재하면서 그가 사람의 사회에서 세력을 뿌리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어떤 한 원칙하에서 움직이는데, 그 원칙이란 뭐냐하면 사람의 사회에서 일을 부릴 때는 사람의 사회에 있는 자연현상이나 사회법칙을 제가 쥐고 이렇게 저렇게 흔들고 가는게 아니라 반드시 사람의 형태를 취하고야 일을 하는 게고 반드시 사람을 써서 일하는 것이오.
그런고로 사람의 속에 들어 가든지 사람의 속에다가 자기 생각을 불어 넣든지 해서,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 사회에서는 분명히 육신의 형태를, 형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만을 사용해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 육신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고 공중에서 친히 사람처럼 돌아 다니면서 사람하고 얘기하고 사람하고 무슨 거래를 하면서 나중에 마침내 사람이 하는 일을 막아도 내고 못하게도 하고 그러지 못한다 하는 것을 우리가 늘 주의해야겠다 하는 것이오.
그러나 마귀가 어떻게 해서 사람에게 작해를 하느냐 하면 다른 사람들, 마귀의 감화를 잘 입을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에 거짓과 참을 뒤섞어서 불어 넣어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정당하고 또한 능력있는 전진을 어떻게든지 장해를 하는 것이올시다.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을 주면 사람들의 마음이 변해서 할 것을 못하게 한다 그 말씀이오. 예를들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마귀가 자기의 나래를 벌려 가지고 해를 막아 가지고 햇빛을 사람에게 못 비취게는 못하는 것이다 그 말이오.
암만 마귀라도 하나님께서 내신 거룩한 법칙을 제멋대로 저해 못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사람은 오히려 햇빛이 못 비취게 우산으로 가려 줄 수가 있지만 마귀는 그렇게 우산을 가지고 와서 형체는 안뵈고 손만 뵈거나, 여러분 “바그다드의 도적”이라는 영화를 볼 것 같으면 안 뵈는 무슨 특별한 옷이 있어서 그놈을 둘러 쓰면, 담요 같은 걸 둘러 쓰면 몸뚱이가 안뵈고 다 둘러 썼는데 발을 둘러 쓰지 않은게 발만 층계를 탁탁 탁탁 올라가는 것이 뵈는데 그런 영화 보셨지요? 마귀는 그렇게 손만, 다른 것은 다 둔갑을 해서 안보이고 손만 우산을 딱 잡고 있어서 딱 가려 가지고서는 탁 치워도 꼭 와서 붙고 치워도 그냥 붙고 그래서 해를 도무지 못보게 한다는 그게 요괴스러운 얘기지만, 얘기지 그런 짓을 못한다 그 말씀이오.
그러나 마귀는 별다른 방식으로 그 사람에게 해를 못 쬐게, 꼭 그 사람은 해를 쬐야만 할 사람인데 햇빛을 많이 받아서 햇빛의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을 해를 못받게 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그 사람의 마음에다가 거짓말과 참말을 뒤섞어서 불어 넣어 가지고, 자기가 마음 가운데 스스로 햇빛을 쬐는 일을 싫어하고 오히려 햇빛을 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더 무섭고 교묘한 일이오. 이렇게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감화하고 악으로써 사람의 마음에 불어 넣어 주어,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매일 전진해 나가는 일을 다른 사람의 관계로 저해를, 장해를, 방해를 줄 수 있다 그 말씀이오.
이렇게 해서 마귀의 속임을 듣지 아니하고 마귀의 꾀임을 거절해 버리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의 일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진행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이오. 다른 사람들로. 그러나 그것이 무제한하냐? 만일 어떤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전파하는데, 이것이 위대한 선지자라고 합시다. 선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러 땅에 왔는데 하나님 말씀을 전파해도 그 전파한 말씀의 효과를 내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듣는 사람 속에 마귀가 들어가 가지고서 자꾸 자꾸 사람들의 마음에 거짓말을 불어 넣어 가지고 “저 말 듣지 말아라. 그것 다 쇠통 거짓말이다. 그말 듣지 말아라. 그럴 리 없다. 너에게는 평안이 있고 번영이 있고 안정이 있지, 무슨 앞으로 재앙이 있고 괴롬이 있고, 무슨 포로가 되고 그것 거짓말이다. 믿지 말아라” 이렇게 할 거란 말씀이오. “어떻게 꾀일꼬 할 때 거짓말하는 영이 돼서 들어 가겠습니다”하는 성경의 얘기와 같이 그렇게 꾈 거란 말씀이오.
그러면 실컷 여기서 얘기를 다 해도 선자자의 얘기가 효과가 없으니까 선자자는 일을 못하게 됐다, 이렇게 선자자는 나와서 일을 할래도, 말을 아무리 해도 먹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훤한 들판에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데 가서 혼자만 떠들게 되겠느냐? 여기에 마귀의 일의 한계가 있는 것이오. 하나님께서 어떤 선자자를 보내셨으면 그 선자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도 하나님이 잡아 이끄시는거요.
선자자의 말이 그에게 들어가게 하려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잡아 이끈 사람에게 들어가게 하려고 할 때, 만일 마귀가 적극적으로 그 사람이 그 말을 못 듣게 하고 그 사람이 그 말을 들으러 가는 길을 다른 친구가 와서 “거기는 무얼 가려는가, 들을 것 없으니까 다른 데나 가자”하고 “저기에 얼마든지 좋은 것이 있다”고 꾀어서 가령 간다고 하십시다. 가면 결국 이 선지자의 일이 낭패될 것 아니오?
그러나 마귀가 무제한하게 그것을 하도록 두어 두시지 않는다 그것이오. 무제한하게 다른 사람을 시키거나 자기의 종을 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나 하나님의 사람들의 하는 일, 그걸 무제한하게 방해할 수 있게 두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하는 일은 특별히 언약하신 일, 또 하나님이 이루시려고 계획하사 그 사람을 보내신 일이라면 하나님의 성신이 마귀의 역사를 받은 사람들의 방해를 또한 별다른 방식으로 언제든지 막아 주시는 것이오.
언제든지. 그런고로 하나님의 성신께서 내 속에서만 역사하시거나 내 말을 듣는 사람 속에서만 역사하지 않고 이 주위의 우리의 환경에서도 역사하셔서 마귀의 작해를 늘 방지하시는 것이오. 이런 것이 또한 마귀의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분명한 가름이 될 것이오. 그런고로 진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주위에는 허다한 불안을 가질 요소가 있는 것이오.
우리가 다 내 개인이 아무리 나는 하나님을 신실히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고 있을지라도 나 개인의 문제고 나와 관계된 여러 관계, 관계자들이 반드시 다 평안하리라고 우리가 보장 못하는 것이오. 그 사람들이 불안하고 그 사람들이 불안을 일으키면 나도 불안하게 될 거란 말씀이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평안을 주시려고 할 때에는 나에게만 주시는게 아니라, 나를 불안하게 할 수 있는 다른 요소가 다른 사람 속에 있을지라도 그것도 막아 내신다 그 말씀이오.
이렇게 해서 진실로 우리가 받는 은혜 하나 하나는 하나님이 나에게만 주면 고스란히 그것으로서 끝나지는게 아니고, 내가 그 은혜를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일까지라도 하나님은 관계하시고 계시는 것이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사람과 다 관계돼 가지고 있는 사람인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다 예수를 내가 믿는 것같이 꼭 믿는 것도 아니오. 우리의 식구들이나 우리의 가족이 꼭 나와같이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든지 또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려고 관계를 하심과 같이 꼭 같은 상태 가운데 있는 건 아니오. 가령 백보를 양보해서 나 자신은 잘 믿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평안을 주시려 그러고 하나님의 평안을 내가 듣고 마음 가운데 안심하고 산다고 가정하십시다. 우리가 그렇게 잘 믿어서 모든 일에 대해서 그렇게 불안을 가지지 않고 세욕을 일으키지 않고 나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분수를 알고 조용한 가운데 날을 지낸다고 할지라도 내 가정 사람이 다 그러리라고 어떻게 보장합니까? 나에게 있어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이 다 그러리라고 어떻게 보장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으로 가르쳐도 반드시 다 그런 것은 아닌 거요. 하물며 나의 인아 족척 가운데 안 믿는 사람이 또 얼마든지 있을 거요.
그 사람들이 언제든지 불안을 일으켜 가지고 언제든지 불안을 일으켜 가지고 분란을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오. 내가 원치 않았지만.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평안을 주시고자 나에게는 충만히 주셨지만 내 주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까닭에 말이오. 불안을 일으켜 가지고 불을 일으키고 막 불집을 일으키고 야단을 내면 그 불똥이 나한테도 튀어와 가지고 나도 불안한 것이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평안을 주실려고 할 때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평안을 위해서는 그런 일까지 막아주시는 것이다 그거요. 그런 일까지. 그들이 평안을 받을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가 없을지라도 나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도 평안을 직접, 즉 나의 수하와 나와 관계돼 있는 일을 평안하게 다독거려 놓으셔서 나를 평안하게 하시는 것이란 말이오. 하나님의 평안은 내 마음에만 주시는게 아니라 내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있는 환경을 늘 조성해 주시는 거란 말이오.
이런 환경을 조성하실 때에는 비록 마귀의 작해와 침해를 받을 수 있는 내 주위의 나와 관계된 다른 사람에게까지라도 하나님은 친히 통재하시고 주장하시는 것이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깊고 오묘한 것인지 우리가 알 수 없어요.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디에 불집이 일어나면 나는 불안하다는 걸 다 아는 것 아니오. 지금. 나 자신이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그걸 다 기억하는 것 아니오. 더군다나 관계를 많이 하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알 길이 없어요. 사람 수가 많아놔서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많으니까 그 사람 하나 하나 속에서 언제 누구한테서 무슨 불집이 생전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불집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오.
꿈에도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와서 불집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오. 언제든지 그럴 가능성은 다 있지 않아요? 진실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혜를 믿고 자신의 안전을 믿을 아무 조건이 없는 것이오. 아무리 우리가 안전하다, 튼튼하다 하더라도 언제 스며드는지 알 수 없이 마귀는 들어와서 불안을 일으키고 화전을 쏠려면 쏘는 것이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과 안위를 주시기를 기뻐하실 때 우리가 그걸 받게 되는 때는 우리 자신이 잘나 받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공로로 나뿐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든 것에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는 것이오.
우리는 기도할 때 “아버지여 강한 성이 되시고 방패와 병기가 됩소서”하고 때때로 기도하지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나 혼자만 들어 앉았으면 그만이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당신이 강한 성과 같이 둘러 지킴으로 마귀가 침해를 해 가지고 그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불이 연소되듯이 나한테까지 연소되지 않게 해 줍소서’하는 거요. 이렇게 해서 강한 성으로 둘러 지키면 참으로 거기 안전이 있는 것이오. 이 바깥으로 마귀가 요동한들 여기는 안전하다 그 말이오. 그래서 하나님이 나와 관계된 모든 환경을 지켜 주셔야 하는 것이오. 우리 교회에 늘 평안이 있으려면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강한 성, 성이 되시고 방패와 병기가 되사 지키시는 것이오. 그래서 마귀의 틈을 탈 여지를 안 주셔야 하는 것이오. 우리 자신이 불명해서 혹시 그럴 수가 있지만 그러나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극진하신 사랑으로 늘 보호하시는 거요.
우리 자신이 마귀와의 관계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얼마나 속임을 가지고 사람의 세계에서 사람이 당연히 해야할 것이라는 것을 자꾸 권하고 자꾸 하도록 열심으로 독려하므로 마침내 마귀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인가를 배웠어요. 사람들이 당연히 해야 할 것이란 건 뭐냐? 첫째 중요한 것은 이생의 염려를 당연히 해야할 것으로 늘 가르친다 그 말씀이오. 사람은 자기 앞에 어떤 걱정이든지 생활의 걱정이 있어요. 자기 개인의 걱정도 있고 자기의 인아 족척의, 식구의 걱정도 있고 생존의 걱정도 있고 앞으로 나아갈 미래의 걱정도 있고 어떤 걱정이든지 걱정이 있는 것이오. 하나만 있는게 아니고 둘씩 셋씩 넷씩 겹쳐 가지고 있는 일이 많은 것이오. 한 걱정이 가면 또 다른 걱정이 오고, 한 시름이 가면 다른 시름이 또 오고 그래요. 그런데 그런 것을 풀기 위해서 그 문제에 대해서 늘 착심하고 주의해서 어떻게든지 그것을 해결할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생각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걱정을 해결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면 노력하는 동안에 차츰차츰 걱정이 어느 정도 풀려가는 것이오. 어느 정도 풀려가면 그 걱정이 막 끝나서 이제는 휴-하고 한숨쉬고 좀 평안한가보다 하는 동안에 다른 문제가 와서 그 문제로 내 마음을 사로 잡아 가지고 또 끌고 가는 것이오. 이래서 끝없이 끝없이 나는 결국 이 세상에 살면서 살기 위한 자기의 노력을 계속하도록 만드는 것이오. 살기 위해서 노력하라 그거요. 우리는 살아서 무엇을 하라는게 아니라 그렇게 생존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나이 먹어서 기력이 다하고 목숨이 다하면 가버린다 그 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은 일생 무엇했느냐? 자기 하나 살려고 애쓰다 갔다 그것만 남는거요. 뭐 남을 것 없어요.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살려고 애를 써 가지고서 어떻게 요행히 수명이 길게 오래 살았으면 90살이나 살고 80살이나 살다 죽었다 이거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식을 이 세상에 두셨을 때 그렇게 살기 위해서 두시진 않았다 그 말이오.
그런데 마귀의 큰 속임이라는 것은 너희는 이 세상을 이 세상대로 그렇게 보존하고 살아라, 그것이 세상이요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너희는 인생을 인생대로 보존하고 살아라 너희는 세상을 세상대로 보존하고 살아라 그것이오. 여기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는 왜 세상에 있느냐면, 마귀의 휘하에 있는 이 인류가 전체적으로 세상을 세상으로 보존하고 살려고 하는 그것을 파괴하고 뚜드려 부셔 가면서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해서 너희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사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목적이 있고 사명이 있어서 그것을 위해서 너는 낳은 것이다.’ 그러면 마귀가 묻기를 너는 그러면 네게 걱정이 있는데 생존하기 위해서 이생의 염려가 많이 있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면 대답하기를 이생의 염려라는 것은 성경에 가시덤불이라고 가르쳤다. 사람이 죄를 짓고 나서 땅에는 아담과 하와는 이마에 땀을 흘리도록 노력을 해야 살게 됐고 자기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셨다고. 흙을 파고 땀을 흘려 애를 써서 먹되 그러면 그 땅을 갈기만 하면 곧 열매를 풍성히 반드시 다 주는게 아니라 땅에는 가시덤불과 엉컹퀴가 있다 이런 말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 마음에도 가시덤불이라는 게 늘 있어서 그것이 나를 총생하고 일어난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가시 떨기에 던져졌다는 씨의 얘기를 할 때 그 비유 얘기를 하실 때 가시덤불을 뭐라고 했는고니 그것은 이생의 염려라, 살기위한 염려라 그 말이오. 그 다음이 재리의 욕심과 거기서 한발 더 들어가서 돈 모아서 잘 살아야겠다는 번영의 욕심과 또 기타의 욕심이란 말이오. “일락이니” 그랬다 말씀이오. 혹은 기타의 욕심, 일락이라. “이생의 염려와 재리의 욕심과 일락이라” 그랬다 말이오. 일락은 행복의 추구요. 그러면 그 어느 것도 무리한 얘기라고 할 수 없어요.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에 살기 위해서 염려해야 하지 그 다음에는 자기는 사람이 단순히 먹고만 사는 것이 아닌 까닭에 좀 번영하고 잘되고 보람있게 되려고 또 염려해야 할 것 아니냐, 그래서 다른 욕심을 욕망을 가져야 할게 아니냐, 욕망을 가지되 될수만 있는 대로 대망을 품어야 할게 아니냐, 그 다음에는 일락이라, 그런 다음에는 무엇이 인생의 행복이냐. 그 행복을 추구해야 할 것 아니냐 그것이오.
그런데 (그걸 가르쳐서) 그런 가시덤불이 그 속에 있으면 씨가 떨어져도 진리가 떨어져도 그놈이 함께 자라 가지고 다른건 기운을 막아 버린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도리와 목표와 거룩한 원칙을 알고 나가야 할텐데 그걸 알도 못하게 질식을 시켜버리고 만다 그 말이오. 너, 세상 염려하고 있는 동안 먹고 살려고 염려하고 있는 동안, 또한 너 자신이 번영할려고 이상을 세우고 거기에다 (자기) 영영히 애쓰는 동안, 또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소위 토마스 제퍼슨이 말한 Persuit of happiness, 이것을 네가 가지고 나가는 동안에는 네 속에 진리는 자라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그렇게 가르쳤지... 너는 이생의 염려를 해라, 너는 이상을 세우고 나가거라, 너는 행복을 추구해라고 안 가르쳤단 말씀이오. 세상은 이 세 가지를 하라는 것이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것 하면 그것 하는 동안에 너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아무 것도 할 것 없고, 할 시간도 없고, 할 능력, 여력이 없다. 또 너를 세상에 그렇게 염려나 하고 겨우 자기 생존 유지나 하기 위해서 억지로 세상에 내보낼 이유가 없었다. 너 살으라고 너 이 세상에서 억지로 자기를 유지하라고 내보냈더냐 그거요. 물론 우리는 다 잘 알아요. 사람은 생존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그렇다 그 말씀이오. 실지로 인생이라는 것은 생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오. 그러나 하나님 자녀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살기 위하여 있는 건 아니오. 하나님의 보내신 일을 할려고 있는 것이오. 존재를 위해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이오. 교회를 놓고 볼 때도 마찬가지이오. 교회라는 것은 그것 자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이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타락했느냐 하면 존재하기 위해서 교회란 있게 됐어요. 교회를 만들어 가지고 교회 하나를 유지하는 데다가 전 주력을 다해요. 존재하기 위해서 교회가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그래 가지고 그놈 유지하려고 이러고 저러고 십일조내라 돈 더 내라,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야단내니, 아, 그 귀찮은 일 뭣하려고 그러면 모두 와서 하느냐. 다 안 해버리면 편할 것 아니냐, 왜 귀찮은걸 시작해 가지고서는 내라 그래서 뭐 하겠다는 거냐, 뭐 특별히 하는 것 없어요. 가끔 한번씩 모아 가지고 예배보는 거요. 예배보기 위해서 있느냐 그거요. 이렇게 되면 교회는 교회 자신의 사명은 없는 것이오. 교회는 존재만 하고 있는 것이지.
그럼 문제는 이 땅 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까닭에 땅이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운 진노를 당장에 다 받지 아니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무엇이 어째서 그러냐 하면 그 자녀들이 이 땅 위에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 까닭에 그런 것이오. 그러나 무엇을 못 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은 땅을 심판하시는 것이오. 이는 누구와 같은고 하니 롯과 같은 것이오. 롯이 소돔 고모라에서 자기의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확실히 전파하지 못할 때 롯은 빼냈지만 그 땅은 멸망받고 말았다 그 말씀이오. 거기 의인 열명이 있었더면 멸망하지 아니할 뻔 했는데 롯은 자기와 자기 식구와 나아가서 의인 열명이라는, 그 소돔 고모라가 그냥 보존되기 위해 필요한 수의 의인의 그룹이 거기 생겨나지 않았다 그 말씀이오. 이러한 까닭에 일을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을 못하면 존재의 의의가 없는 것이오. 사실은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의미없는 얘기요. 그게 물론 그래요.
이론은 그런데, 실지로 사는 데는 어디 그럽니까? 그게 마귀의 큰 속임이오. 마귀라는 건 이 세상을 세상대로 보존하려는 것이오. 그러므로 어저께도 말씀드렸지만 중요한 도리는 이것이오. 마귀의 진영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 나라가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고 가는 것이오. 왜냐? 마귀는 세상을 지금 보존하려고 그래요. 세상을 세상 이 상황으로만 나가면 그만이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을 마귀가 보존하고 있는 그 세상대로 두려고 하는게 아니라 거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거요, 자꾸. 이건 침략해 들어온 것과 같이 됐어요. 마귀는 방어하려는 것이고, 자꾸. 세상으로 유지하려는 것이고. 그런고로 마귀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은 너는 세상 사람으로만 남아 있거라, 왜 뭐 다른 것이 되려고 그러느냐, 다른 것 되지 말아라 그거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너는 세상 사람으로 그냥 남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하고 하나님의 것으로서 다시 변화 시키려는 것이오. 이게 누가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느냐면 하나님의 나라가 공세를 취하는 것이오. 마귀는 저희 안에 앉아서 막아만 내는 것이오. 하나님 나라는 자꾸 침략해 들어 가는 것이오.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가, 점점 침노하는 자가 뺏아 가는 것이오. 하나님 나라는 적극적으로 침노해 들어 가야하는 것이오. 하나님 나라는......
즉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뭐냐,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세상을 향해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고 침략해 들어가는 것이니라. 그런 말을 어디가 기억나지요?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고 들어가는 것이다고. 그러나 그 말은 일반적인 원칙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나 정확하게 거기서 하는 얘기는 좀 더 다른 얘기이오. 왜냐하면 시간을 거기는 정했어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은 그 말을. 그건 이제 별 문제고. 그런 까닭에 마귀는 사람을 될 수 있는 대로 그 인생의 생의 목표를 흐리게 하고 만일 목적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의 테두리를 못 벗어나게 하는 것이오. 이 무서운 마귀의 기만.
이렇게 해서 마귀의 그 속임이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일생를 낭비하게 하거나 남비(濫費)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이오. 제멋대로 쓰게 만들어요. 이렇게 일생을 낭비하거나 남비하며는 그것은 마귀의 큰 속임수요. 속임수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오. 그러기 까닭에 어저께 우리가 특별히 그 말씀을 가지고서 생각한 것이 “지금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다”하는 벧전 5:8절인데 그 말이 있기 전에 5:7절에는 먼저 “너희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바로 그 전절에, 왜 그러느냐면 주께서 너희를 자기의 자녀로 쓸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권고하시는 것이다. 자녀로 알고 자기의 식구, 자기 집안 일을 자기가 돌아 보시는 것이다 그 말이오.
권고라. 그러니 너희는 거기다 맡겨라, 그리고 하는 말이 너 그렇게 안하면 참 무섭다, 근신하라, 깨어라 말했어요. “너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근신하고 깨어서 저를 대적하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으니까 근신하고 깨어라 그 말이오.
어떻게 깨어야 되냐? 너희는 저를 대적하라 그랬는데, 어떻게 대적하냐 말이오. 마귀 대적하는 방식은 뭐냐? 마귀란 놈이 이 세상을 세상으로 그냥 유지하려고 할 때 그것 건드리지 않으면 저는 유지하고 살거요.
그러나 이쪽에서는 건드리고 들어가는 것이오. 적극적으로 공격해 들어 가라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대적하라는 것이오. 마귀가 나를 공격하는게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공격해 들어 가는 것이오. 즉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지고서 나가는 거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오. 보장을 했다 말이오. 염려는 나한테 맡겨라 내가 다 돌아 봐 주마. 너는 근신하고 깨라. 네가 염려를 하는 동안 마귀의 속임수에 너는 넘어 가서 너도 자빠지는 것이다. 마귀의 테두리에 너도 얽혀 들어 가는 것이다. 마귀는 두루 다니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누가 오늘 삼킬만한 자인가.
어떻게 하면 마귀한테 삼킴을 당하느냐? 마귀의 가지고 있는 그 영향, 마귀의 가지고 있는 그 계획 가운데 빠져 들어가면 되는 것이오. 즉 인생을 낭비하면 그건 마귀가 떡 삼키고 있는 것이오. 쥐고 있는 거란 말이오. 꿀꺽 마귀가 제것 만들어 버렸다 말이오.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그 말씀이오. 그래 걱정해라. 네 걱정을 해야 사람이 철이든 사람이지 걱정않고 탄성(歎聲), 꼭 어린애 같이 어떻게 살아 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서 살 걱정을 좀 해야 할 것 아니냐 그것이오. 어떻게 살아? 하나님이 생명 주셔서 사는 것이지, 그런데 제 꾀로 제가 잘 다 원해서 사는, 아! 하나님이 다 살 수 있게 지혜를 주시고 기능을 주셨으니까 지혜와 기능을 잘 써서 살아야 한다 이제 이런 이론을 하게 돼요.
우리는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게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 것이오. 살게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어요. 그러나 그 노력하는 것이 목표가 있어야 해요. 왜 이렇게 노력하느냐?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를 더욱 현저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이렇게 목표가 서야지 목표없이 다만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이것한다 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 그저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오. 똑같이 먹고는 사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하나는 자기의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이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델리키트(delicate)한 점이오. 아주 미묘한 점이오.
왜냐하면 성경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라고 그랬다 그 말이오. 먹지 말아라. 마시지 말아라. 너는 그냥 영광스럽게 해라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 방식과 자기가 먹고 산다는 것과는 별 문제와 같이는 따지지 않았다 그 말이오. 그러나 목적 의식이 있어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식대로 나가면 먹고 살면서 영광을 위하지만, 내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 즉 생존하기 위해서만 나가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방식이 반드시 내게 필요없다 그 말이오. 나는 유리한 편만 찾아가면 돼요.
나 먹고 살기에 어떤 점이 가장 유리하냐? 돈 벌기에 어떤게 가장 유리하냐? 그렇게만 찾아가면 그만이오. 나는 먹고 살기에 어떤 것이 가장 유리하냐 하는게 중요치 않고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의 방법이냐 그것 찾는거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굶어 죽으라는 얘기는 아니나 영광을 위해서 살으라 그 말이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냐? 사는 방식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이 내신 그 방법대로 살아가라 그 말이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방식은 가난하고 그런고로 돈 많이 없으니까 남이 수모할 수 있고 남이 그 사람을 깔볼 수 있고, 그렇지 않고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만 노력하는 방식이 있다면 내 기능으로 요길을 채우면 돈도 많이 벌고 남에게도 존경을 받고 돈 많다 그래서 남이 우대도 할 길이란 그 말씀이오. 그때 어디를 취하느냐면 하나님 영광을 위한 방식으로 남에게 수모를 받을지라도 좋다.
나는 이 길을 선택하고 가자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의 방식이고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인 것이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는 말은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 하나님 영광을 위하는 생활에는 또한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그 길을 나가노라면 역시 먹고 마셔야 한다는 걸 가르치는 것이오. 그 먹고 마시는 그것이 어떤 길에 있는 것이어야 하냐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길에 있는 것이라야만 하는 것이오.
그러니까 쳐다볼 때 그리로 가면 나는 먹고 마시는 데는 요족하고 평안하다, 그리로 가면 나는 내 목적에, 가령 보통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목적을 거기 이루는 일이다. 그리로 가면 내가 성경도 가르치는 일이고 내가 충분히 전도도 하는 일이고 또 내가 먹고 사는 것도 요족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그리로 못 가겠다 어느 때는 그런것 까지 결정을 해야할 때가 오는 것이오. 왜? 나는 전도하고 나는 먹고 마셨으면 그만일텐데 왜 그러느냐? 그러나 그것은 바른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를 순수하게 증거하는 길이 아니고 진리와 비진리를 혼탁하는 사회니까 내 그속에 들어가지 못하겠다, 이렇게 해서 요족하고 평안한 길이 있었을 때도 아! 나는 나대로 진리만 전했으면 너 그만 아니냐. 그렇게 후하게 주는데. 그러나 “너는 믿지 않는 자와 짝하지 말라” 하는 원칙이 있다.
같이 멍에를 하지 말라고 하는 원칙이 있다. 신앙이 같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생활의 길에서 거룩하라고, 내가 거룩하니 거룩하라고 했다는 사실은 어디로 가고, 순일성은 어디로 가고 혼탁해서 타협해서 그대로 내가 나아 가면서 먹고 마시겠느냐.
여러분 우리 생활 가운데에는 많은 희생을 요구치 않고 조금만 타협하면 아주 생활을 부드럽게 하고 부요하게 살 길이 때때로 오는 것이오. 아마 그럴 수가 있는 것이오. 우리 생활에는 그런 경험을 때때로 해요. 조금만 타협해 주면 그것 뭐 별로 문제가 없는 게요. 그러고 남보기에 도무지 아무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이 다 그렇게 가버리고 그러더라도 세상이 조금도 비난할 필요가 없는 것이오. 사실은. 다만 자기 자신이 어디 섰느냐에 따른거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그건 중요치 않은 것이오. 만일 내가 고고한 높은 자리에서 하나님과 더 가까운 자리에 살려 할 것 같으면 남이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나도 동일한 보조를 취하고 그만 같은 레벨에 살면 된다 그런 생각하면 안된다 그말이오. 남이야 비난을 않고 남이야 그것 당연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못한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은혜 주셔서 나는 마음이 그걸 용인 못하겠다 하고 자기가 길을 취하고 나가요.
이래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꾸 들어 가는 것이오. 이런 것은 무슨 희생도 아무 것도 아니오. 당연히 취해야 할 길을 취하는 것이오. 무슨 자기가 큰 희생을 하는 것같이, 또 그런 괴상한 공로감을 가질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오. 내가 저리로는 못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식으로 나를 지금까지 이만큼 길러 놓으셨는데 이만큼 길러 놓으시고 하나님은 나한테 그런 치욕을 받아서 되겠느냐? 나는 이리로 가겠다. 다른 사람을 기른 것을 표준 삼아서 내가 일을 결정하는 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됐든지 그 사람은 그만큼밖에 안 컸으니까 그 생각 못하겠다 하지마는 나는 그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그거요.
여러분, 이렇게 해서 우리는 때때로 조그마한 타협에서 훨씬 자기의 물질 생활이나 육신 생활이나 사회적인 명망이나 활동하는 범위가 유리한데도 그 놈을 막아 가면서 좁은 길을 자꾸 향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오. 이것이 먹고 마시는 것이 없는 것 아니나 먹기는 먹는다, 가난하게 먹어도 좌우간 가난도 좋다, 할 수 없지 않느냐, 그렇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가장 유효한 길이니깐 내가 이 길을 취할 밖에 없다. 그렇게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첫째하는 일이오. 성경 말씀에 “나를 높이면 내가 저를 높일 것이오.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그랬어요.
“저가 나를 높였은즉 내가 저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다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의 옷을 입혀 주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높은 경계로 올라가는 중요한 단계가 되는 것이오. 보상이라는 생각보다는 내 마음에 무슨 행복이라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의 경계 가운데 내가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고 그것을 나타내느냐? 하나님을 높여야 하는 것이오. 어떤 두 길이 있는데 그 두 길 가운데 어느 길이 하나님을 더 높이고 어느 길이 나에게 더 유리하냐 할 때, A라는 길은 나에게 더 유리하고 B라는 길은 하나님을 더 높이는 길이라면 나에게 불리할지언정 B라는 길을 선택하고 들어가는 것이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오. 나는 당연히 나는 자진해서 그리로 간다 그것이오. 그 마귀는 항상 그렇게 조그마한 것 가지고 자꾸 타협하려고 문제를 내 놓는 것이오. 문제 안 내는 건 아닙니다. 마귀는 가장 교묘하게 문제를 제시할 것이오. 우리는 우리의 생을 낭비해서 아니되고 우리의 생을 남비(濫費)해서는 안되요. 우리는 낭비를 않는다고 할지라도 때때로 내가 함부로 쓸수가 있는 것이오. 순전히 오로지 해서 전체를 순결하게 하나님 앞에 다 드려버려야 하는 것이오. 부분만을, 어느 부분을 조금만 할인해서 내가 쓰면 참 부드럽겠다 하지만 그렇게 않는 것이란 말이오.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높이는 자를 버리시는 법이 없는 것이오.
오늘은 우리 이만큼 공부합시다. 다같이 기도 하시지요.
기 도
거룩하신 주님이여, 저희들 마음 가운데 성신님으로 충만한 은혜를 주셔서 마귀의 속임수가 어떻게 교묘하여 주님의 거룩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을 조그마한 타협으로 그 은혜의 경계에서 떨어뜨리려고 하는 일이 또 많은 것을 이제 생각하고 마귀가 잘 통재돼서 가장 교묘한 방식으로 그 무서운 일을 할 때 저희가 자칫 저희 스스로 자기의 지혜나 자기의 신앙을 믿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가지 아니할 때 그만 미끄러지고 그 올무에 빠져 들어가기가 쉬운 것을 또한 생각했사오니, 성신님 저희를 주장하시고 모든 경우에 간절한 마음으로 주를 높이고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의지하게 하시고, 주께 의지하면 주님께서 모든 걸 권고하신다고 하였사오니 권고하시는 은혜 가운데서 저희의 생이 가장 유효하게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게 합소서.
이리하여 주께서 주시는 음식을 먹고 주께서 주시는 곳에서 살며 주께서 입히시는 옷을 입고 주께서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가는 이 생활이라는 것이, 이렇게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서 주를 높이는 생활의 길에서 얻는 것들이 우리에게 올 때에 실현되는 걸 믿나이다. 주여 저희가 저희의 꾀로, 주께서 주신 지혜와 재주와 은사를 기회로 자기의 행복을 증장시키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가져다 쓴다는 일이, 얼마나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가져다 쓴다는 일이, 얼마나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남용하는 것인지 도용하는 것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순순히 사용해야 할 것을 알고, 주께서 저희를 들어서 영광을 위하여 쓰시는 그 길로 일생 변함이 없이 순결히 마음을 오로지 하여 전심으로 주를 의지하고 나가게 합소서. 전심으로 주께 맡기고 살아 가게 합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마귀에 대하여
제4강
엡 2:1-22
마귀의 속임수라 하는 것과 또한 우리들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길에 관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는데 그건 뭐냐하면 우리가 예를 들어서 주로 예화에서부터 혹은 비교에서부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조시대를 우리가 바라볼 때 우리들의 선조들이 다 살고 지나온 그 시대 올시다. 1392년에서부터 이조의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고려에서 빼앗은, 그래서 나라의 새로운 국기(國基)를 세우고자 연 그해, 나라 이름은 물론 조선이라고 했어요. 화령이라는 이름과 조선이라는 이름 둘을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서 어떤 것이 좋으냐 물으니까 명나라에서 조선이라는 데 점을 찍어서 보낸 까닭에, 화령(和寧)이라는 나라 이름은 없어지고 조선이라, 그래 이씨 조선 500년을 누린 것인데, 1910년 경술년 일본 사람들이 와서 합방(合邦)을 해버려서 나라를 망치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그러니까 햇수로 볼 것 같으면 사실 500년이 넘었지요. 518년이나되는 셈이지요. 1392년에서 부터 519년간 이나 되는 셈이오. 1910년까지 그랬으니까. 10년까지.... 그 다음에 많은 세월이 흘렀고 519년, 근 520년 이란 세월 동안 나라를 세운 다음에 유교 입국이라고 할지 유교를, 그것도 유교에 있는 모든 사상, 중국에서 들어온 모든 사상이나 유교적인 사상을 전체로 다 보여주는 것보다도 주로 공맹지도(孔孟之道)를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주석한 방향을 취하여서 가르친 것이다 그 말씀이오. 그래 정주학(程朱學)이 주가 돼요.
그래서 그 학문에 그 주석을, 그 해석을 떠날 때에는 사문난적지대(斯文亂賊之代)라 해가지고서 이 글을 흐트러뜨리는 도적과 같은 자들이라고 해서 아주 나라에서 용인 못할 죄인으로서 정죄했던 것이오. 그런데 그 유교 입국의 대강이라는 것이 물론 사람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프로그램에 의해서 仁義禮智信을 목표로 하고 밀고 나가는 것이지마는, 이런 것이 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형식주의적인 도덕국가를 건설한다는데 치중했어요. 가장 그 방면에 삼대지치(三大之治)라고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왕도정치를 구현해 보려고 애를 쓴 사람의 하나가 가령 조정암(趙正岩) 같은 사람일텐데, 중종 때 조광조(趙光朝)가 그러한 그 유교적인 이상을 가지고 삼대지치를 해 보려고 애를 썼다고 할지라도, 그 때에 우리 한국이 가지고 있는 생활 감정의 폐단은 형식주의적인 겉치레 도덕과, 또 무엇이 시국의 대본인가에 대한 것은 자칫 잘못하면 공리공론(空理空論) 가운데 빠져서 예문(禮文)을 중심삼은 한 의식과 제전에 치중하는 결과를 또한 낳게 해서 인생의 중요사라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인생의 중요사라는 것은 유교에서 가르친 바 여러가지 그 예식을 예문을 신중하게 행해서 그것으로써 자기는 가장 인간다운, 군자다운 선인(善人)의 도를 바로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일려고 하는 강한 경향, 그런 습관들이 경향(京鄕)간에 퍼져 나갔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러기 까닭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삼강오상(三綱五常)을 가지고 개인뿐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나 제 국가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모두 삼고 생활한 까닭에 항상, 삼강이라 군신간에와 부자간에와 부부간이라는 관계를 군신유의(君臣有義)하고 부자유친(父子有親)하고 부부유별(夫婦有別)하고 이렇게 나누어서 그 다음에 둘을 더 보태면 오상(五常)혹은 오륜(五倫)이 되는데 장유유서하고 붕우유신하다 이렇게 하는 것이오. 그래서 군신간에는 의가 있고 군신유의하고, 부자유친이오 부자간에는 친이 있고, 부부유별이라 부부간에는 서로 구별이 있는 것이고, 장유는 질서가 있는 것이고, 붕우간에는 서로 믿음이 있는 것이다. 붕우유신이라- 삼강오륜이 있지요? 그래 군신지간, 부자지간, 부부지간이라는게 삼강이오. 오륜은 그 관계, 군신과 부자와 부부와 장유 즉 나이 많은 이나 나이 적게 먹은 사람이나, 그 다음에 붕우(朋友) 이것은 서양식 친구(friend)는 아니오. 꼭 자기가 붕우로 삼은 사람 이렇게 해서 개인의 생활도덕도 군자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행을 많이 하지만,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남에게 보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볼 것 같으면, 가령 관혼상제와 같은 예(禮)를, 예식, 제전(祭典)들을 아주 중요히 여겼다 말씀이오.
그래서 부모를 위해서 자식이 순절을 하고 많은 세월을 좌우간, 부모가 별세를 하면 애곡하고, 부모 살아있는 동안 부모공양하고 부모를 하나 먹이는 데다가 전력을 다 기울인다 하는 것을 가장 극진한 일로 여겼다 그 말씀이오.
그래 부모가 돌아가시면 부모의 무덤 곁에서 삼 년 동안 세수도 않고 손톱도 안 깍고 머리도 안 빗고 그러고서는 아침 저녁으로 밤낮 무덤 앞에 가서 곡을 하고 슬퍼하기를 삼 년 동안이나 하면서 슬퍼하기를 마지아니하고 시묘(侍墓)를 하는 것이오. 시묘살이라고 묘 옆에다 묘막을 짓고 있는 그것이 시묘요. 그게 효자요. 출천대효(出天大孝)라고 부모가 돌아 가시려고 하면 자기의 손을 단지(斷指)를 해 가지고 피를 흘려서 입에다가 넣고 그래서 되살리고, 그것이 출천대효라고, 그래 효자정문(孝子旌門)을 다 내리는 것이오. 그렇게 하고서 부모의 소상, 대상 같은 때에는 자기의 집에 있는 재산을 몽땅 털어서라도 길게, 잘, 참 체면을 잘 유지하고 남에게 수치를 받지 않을 만큼 그런 데다가 다 집중해요. 음식을 많이 장만하고 동네사람 다 오시라고 해 가지고 부모 생전에 부모와 친하게 지내던 어른들을 다 모시고 후하게 잘 대접하고, 부모를 생각하는 정이 극진한 나머지 부모의 흔적이나마 나도 부모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에게까지라도 그 마음 가운데 그리움을 표시한다는 그런 뜻이올시다. 참 그렇게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산다는 것도 멋은 있을 것이오. 그것도 다 생활의 방식이니까 그런 것이 참 중요한 일이오. 그 다음에는 관(官), 관 쓰는 것. 그 뭐냐하면 이제 성관례(成冠禮)를 한다든지, 나이가 성인이 될 것 같으며는 성인이 되는 의식을 하는 것이오. 그 다음에는 혼사 지내는 것, 그 다음에는 장례식 지내는 것, 제사지내는 것, 그래서 관혼상제라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나이 이십이 되면 비로소 관을 쓰게 되는데, 이십 세 전에 암만 장가갔어도 관을 함부로 못 쓰고 패랭이나 쓰고 초립이나 쓰고 지내다가 스물이 되면 인제 스물이 왔다고 머리를 끌어 올려 가지고 상투를 꼽고 망건을 쓰고 그 다음에 갓을 떡 씌어줍니다. 아직 갓 쓴지 얼마 안 되면 밤낮 약관이오. 약관이라는 게 나이를 의미하되, 갓 쓴지 얼마 안됐다고 해서 약한 약(弱)자 약관(弱冠)이라해요. 약관이란 말은 사실은 스무 살인데 요새는 약관이란 말을 20여세 근 30세까지라도 약관이란 말을 쓴다 말이오. 30이면 10년이나 관을 썼는데 왜 약관이오?
이런 것들이 한국 사회에는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어서, 또 계급의 차가 심하고 직업의 귀천이 자별해 가지고 직업을 따라서 사람의 가치를 이렇다 저렇다 모두 다 논하게 됐어요. 남자들은 가장 고귀한 일이라는 것은 글을 읽되 위대한 학자나 위대한 시인이나, 위대한 예술가나 위대한 저작자나 이런 것으로써 목표를 삼는 것보다는 글을 지어 가지고 과거를 봐가지고서 과거에 등과를 해서 급제(及第)를 하든지 참방(參榜)을 하든지 해서 등과를 해가지고 문호(門戶)를 글로 일으켜 가지고, 그래서는 일대의 영화를 누리겠다는 데가 대체로 목적이 있는 것이오.
이런 식의 생활을 한 우리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는, 19세기말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기독교의 새로운 영향을 다소 받았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적인 사상의 깊이가 사회의 전반의 문제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냉철히 비판하고 비판만 할 뿐아니라 무엇이 그리스도교안에 있어서의 가장 실천적이고 가장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체계있는 사상을 별로 수집해서 준 일이 없는 폐단이 있으므로, 따라서 한국에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란 것이 과거 이조 500년 동안 가지고 있던, 흘러 내려오고 흘러 내려왔던 그 무력한 전통과 폐습과 그러한 사회제도의 파생이라는 것이 기독교 사회든지 아니든지, 지배하고 나오면서, 기독교회가 선지 벌써 반세기가 훨씬 넘고 지금(1967년)은 70년이나 넘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기독교 사회가 적극적인 기독교적 철학과 정신과 사상에 입각한 사회의 제도를 스스로 낳지를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그것을 그대로 여행(勵行)하지 못한 까닭에,
물론 그것을 할 자는 교회인데 교회에서 그것을 못하는 까닭에, 무엇을 낳느냐 하면 이런 이교적인 여러 폐단, 그것이 처음부터 폐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좋은 일도 시간이 자꾸가면 여러 폐단, 그것이 처음부터 폐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좋은 일도 시간이 자꾸가면 폐단이 거기 붙기 마련인데 이교적인 누습과 고식적인 전통의 폐단, 폐습, 폐단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생활 감정 가운데 그냥 들어가서 아직도 몸은 교회에 있은지 10년, 20년, 30년이 될지라도 일단 사회상, 풍속상 일반적인 인간 생활상 문제에 접하게 되면, 곧 과거의 전통적인 의식과 흘러 내려온 누습의 영향, 그것을 탈각(脫殼)지 못한 대로 다소 현실의 문제와 타협을 해가면서, 방향은 항상 그 방향을 취하고 나아가는 것이 우리 한국에 있는 많은 크리스챤들의 하는 일로서, 이런 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들 생활에 많은 낭비와 공연한 심려를 끼치는 일들이 되는 것이올시다.
마귀의 그 올무와 마귀가 가두어 놓는 그 암매라 하는 것들은 사실상 어디에 강하게 있느냐 하면, 세상을 세상대로 지키고 있으라는 데 있다고 그랬어요. 그것이 어떠한 스타일의 생활방식이었든지 그 스타일을 지키고 있어라 그것이오. 그것이 유교적인 생활 방식이었다면 유교적인 생활 방식을 수백 년 동안 고수해 왔던 우리에게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생활 감정이 뒤따라 있어서, 그런 생활 감정을 용이하게 탈각을 못하는 것이 유행어고, 그런 걸 탈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것의 비(非)를 지적할 뿐 아니라 그것을 대치 할 훨씬 우수한 그리고 가장 이론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다른 목표를 향한 프로그램들이 다른 생활 습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생활태도를 제시해야 할 것인데, 그런 것이 막연 할 것 같으면 필연적으로 과거의 전래된 누습과 폐풍이 누습인줄은 다소 느끼기는 하면서라도 체면상, 사회통념상 버릴 수가 없어서 그대로 그것을 끌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는 거요.
그리고 그걸 그대로 끌고 나아가려고 그러니까 걱정이 가득하니 마음에 쌓이는 것이라 그 말씀이오. 걱정이 쌓이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마음에 걱정이 가득히 쌓이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다 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지만, 진실로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해결해 주시려고 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누습에 젖은 암매한 정신으로써 이것은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고 하는 자기가 느끼는 그 필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대신 다 채워주시라는 기대가 되기가 쉬운 것이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걱정을 다 맡아 주신다 할 때,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연 그렇게 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 과연 사람의 욕심대로 사람이 만들어 놓은 누습대로 그 필요를 그냥 채워 주시겠나? 사람의 누습으로 만들어진 여러 필요라고 하는 일반적인 습성과 습속에 의한 요구는, 그것이 엄격하게 하나님 나라의 도리와 사상에서 구별해 볼 것 같으면 그것이 사실 부정당한 것도 많이 있는 것이오.
부정당한 것도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부정당을 그대로 유지해 주시되 하나님이 친히 기적적인 방법으로 내 걱정 받아서 유지해 주십시오 하는 식으로 된다면 우리들 생각에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대로 유지해 주시는 것이 정의일까요, 부정당하고 그릇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암매 가운데 젖어서 요구할 때 그것을 파쇄하고 새로운 프린시플(principle)과 새로운 스타일(style)과 새로운 상태를 제시하시면서 친히 그것으로 대치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는 많은 걱정 가운데 상당한 부분은 꼭 필요해서 하는 걱정이 아니라 누습에 젖어서 인간의 습성과 전통과 폐풍에 젖어서 그것을 헤어나지 못한 까닭에, 나의 암매 때문에 그것의 가치와 필요에 관한 명확한 판단이 없는 데서 나오는 걱정인 것이오. 마귀는 그런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 자꾸 그것을 타파해서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해서 싸우려고 할 때에는 우리의 가지고 있는 생활 습성이나 생활 제도나 생활 역사까지라도, 그건 다 가만 놔두고 부도덕적인 일반적인 문제에 향해서만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가지고 있는 많은 생활 습성이나, 혹은 전래된 역사나, 주위의 그런 암매에 젖어서 움직이지 않는 이 사회의 현실 앞에 대해서까지라도 감연히 도전을 하고 감연히 파괴를 하고 그 대신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는 데 우리의 싸움이 있는 것이올시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싸움은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개혁(reform)이 되는 것이오.
그런고로 참된 개혁 신앙(reformed faith)이라는 것은 동시에 사회에 대한 한 개의 개혁의 선언이 되는 것이고, 개혁의 정신의 고취가 되는 것이라 말씀이오. 마귀는 그런 것을 참 싫어하는 것이오. 우리는 과거의 누습에 젖었던 이교적인 암매한 사회에 대해서 개혁을- 그것이 목표가 아니었을지라도, 개혁의 신앙을 가지고 마귀와 더불어 싸움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다보니, 그런 것에 대한 개혁의 선포를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오.
따라서 누습에 의한 우리의 중하(重荷), 무거운 짐과 많은 걱정이라는 것은 필요없는 걱정이 되는 것이오.
예를 하나들면, 옛날 혼인을 하든지 뭐 다른 걸 한다든지 하면 꼭 날짜가 정해지면 할 수 있어요. 장사를 지내는거야 3일장 아니면 5일장, 대소상(大小喪)이야 꼭 그 주기가 돌아오면 하는 것이니까 할 수 없지만 혼사 같은 것, 또 관례 같은 것을 하는 것을 보면 날짜를 정해요. 길일(吉日) 일을 반드시 택해요. 길일을 택할 뿐 아니라 심지어 풍수설에 감염 받은 한국 사람으로는 혼인을 하는 방위(方位)까지라도 다 정하는 것이오. 어디서 하는 것이 좋으냐 - 방향을 바로 잡아서 바로 세우고 함부로 베풀어지게 하는 것이 참 안됐다 하는 거와 같이하는 것이오. 그러면 이것이 뭐냐하면 그것이 사람들 마음 가운데는 한개의 부담을 느끼는 것이오.
또한 서로 약혼이란게 없었고,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보내지요? 사주라는 것은 생년 생월 생일 생시에 대한 육갑(六甲)으로 쳐서 딱 딱 맞추는 것 아닙니까? 호랑이띠니, 개띠니, 말띠니 모두 해 가지고 모두 무슨생, 무슨생 하지요? 그런 것 갖다가서 생년 몇일, 보통 호랑이라 할 때는 제가 호랑이띠인데 이름이 보통 갑인생이니까 갑인년 호랑이라해서 갑인이 생년이오. 그 다음부터는 다른 것은 기억을 못해요 내가 기억해 본 일도 없고, 알아보려고 한 일도 없고 음력으로 쳐야 하니까, 양력으로 쳐서는 그 귀신들은 양력하고는 비상(砒霜)이니까 꼭 음력으로 따져야 해요. 그렇게 이교귀신들은 음력으로 제사도 찾아 먹으러 다니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날 수를 잘못 짚으면 안 되니까 이제 음력으로 꼭 따져서 제삿밥이라도 해 놓았다가, 젯밥 해 놓았다가 숟갈 꽂아서 잡수시오 하고 준단 말이오. 그런 것이 다 부담이오.
적빈여세(赤貧如洗)해서 쌀 한 톨 없는 사람이 소상은 가까오고, 동네 사람한테 소상을 지낸다고 했고 대소상을 지내야 할텐데 어떻게 할까 해서 그냥 매일 가난 속에서 쌀을 한 숟갈씩 떠서 봉지에 담아 둬가지고 일 년 동안 저축한 것을 가지고 소상을 지내고 일 년 저축해서 대상을 지내고 그 오직 불쌍한 얘기입니까? 그게, 없는 것을 미리 고지를 내다가 동네사람 다 퍼먹인다 말이오. 고지내는 것 알아요? 고지? 고지가 무엇인지 모르지? 고지를 내 봤어야 알지. 그러고서는 비싼 고지로 내다 먹으면 나중에 고지를 먹었으니깐 그 고지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 고지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가서 불쌍한 사람들이- 불쌍한 이 고지 먹은 사람들이 대소상하고 번듯이 잘 지내고 그러고서- 가서 죽겠다고 몇 달씩 품을 팔아 줘야 하는 것이오. 공짜 일을 해줍니다. 왜냐하면 이자가 장리 빚이라는 것이거든요.
벼를 갖다가서 얻어다 먹으면 논농사 짓고 살던 한국사람이야 다 그렇지요. 심지어는 자기의 딸자식을 그 집으로 갖다가 종 비스름하게 갖다 두고서는 일이나 시키라고, 다 그게 공짜로 갖다가 줘. 이런 불쌍한 생활을 하는 것이 이교적인 한 제도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바 인생의 참 목적은 무엇이냐 하는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향해서 바로 전진케 할 때, 인생의 목적은 이렇고 그런고로 이런데서 이렇게 하는 건 낭비다 하는 확실한 철학적인 근거, 즉 가치철학이 딱 바로 서면 그따위 것이 낭비다 해 가지고 그놈을 할 수 없이 폐쇄하는 거요. 그런고로 대소상 지내려고 고지 먹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됐다 그 말이오. 그런데 대소상을 지내야 겠는데 귀신 앞에 절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겠지만, 그날 모아 가지고 모두 앉아서 밥이라도 나누고 그래야 할 테니까 그러려면 돈들기는 마찬가지요. 귀신이 뭐 얼마나 많이 먹는 건 아니니까 귀신은 사실은 주빈(主賓)이 못 돼요. 사람들이 주빈이지. 사람들 먹는 데는 귀신은 찌끄러기 조금 먹어도 상관 없거든요. 그런다고 귀신이 불평하지도 않고, 밥 한상 잘 차려 가지고 잘 갖다가 들여 놓았다가서는 귀신 잡수셨습니까 하고 그냥 도로 갖다가 다 먹어버리니까 결국 사람 먹자는 것뿐이오. 그 이야기가, 그러니 결국은 들어가는 부비는 마찬가지요.
그럼 여기 어떤 예수 믿던 사람이 대상이 가까왔는데 이제 동네 사람한테 체면유지라도 하고, 효부 노릇하고, 효자 노릇 한다는 소리를 꼭 듣기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패역한 놈이다, 저놈은 불효막칙하다는 말이라도 안 들으려면 그런 면댐이라도 해야겠다. 면댐이를 할려면 돈이 암만 냥은 있어야 하겠는데 이 돈이 어디가 있느냐?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한테 돈 암만 냥을 꿔 주셔야겠으니 그것을 주셔서 이번 대상을 그저 면댐이나 좀 하게 지내게 합소서.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그저 욕이라도 안 먹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래도 체면이라도 유지하게 되지,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 저놈, 부모도 모르고 부모 조상도 모르는 저런 불효막측한 놈이라고 이런 소리를 들어서 어디 쓰겠습니까 하고, 하나님한테 자기의 이론과 자기 철학을 가지고 설복을 한다음에 제 철학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주시라고, 그 “네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는 말도 있으니까 염려를 주님한테 맡긴다, 주께서 그 대상(大喪)을 그렇게 자기식으로 잘 지내게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지내게 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다 이럴 수가 있는 것이지요? 분명히. 믿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 것이오.
이것이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가 지금 빤히 양쪽을 다 아니까, 하나님이 그런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그 사람의 그것이 참 어리석다는 것도 알고,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것 참 꿈같은 얘기니까 그게 우스운 얘기지만,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 생활 가운데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늘 직면하고 사는 생활 가운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참 많은 것이오. 그러면서 걱정하면서 하나님 이것이 있기는 있어야겠는데 이래서는 참 큰일났어요 하는 것이 “나 보기엔 그런 것 때문에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네가 목적을 바로 세우고 네 철학을 바로 세우고 네가 하나님 나라를 바로 이해했더면 왜 그런 걸 걱정할 게 있느냐?” 이럴 일이 많이 있는 것이오.
요컨대 마귀라는 것은 가급적 그 사람이 세상에서 받은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오. 왜 우리는 걱정을 하느냐 하면 이 세상적인 풍속, 세상적인 방식으로 살려는 데서 걱정을 하는 것이오. “그 때에 너희는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지금 역사하는 신이라”(엡 2:2). 이 세상 풍속을 좇는다든지, 이 세대를 좇는다든지 하는 말이 그런 것이오. 롬 12:1-2절에도 특별히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요.
왜 우리는 걱정을 하느냐 하면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누가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가지고 잘 얘기하면 과연 그렇다고 이론적으로는 수긍을 하는데 우리에게 큰 문제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우리의 생활 감정이 뒤를 안 따라가는 것이오. 얼른 이론적으로는 수긍하는 것이오. 하지만 일단 이 사회에서 내가 그 문제를 딱 맞닥뜨리면 지금까지 30년을 꼬박 꼬박 대소상을 잘지키고 시제를 잘 지내고 모든 것을 다 지냈던, 즉 구시대적인 제도하에서 살아오던 사람보고 어느날 기이한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와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과 생활의 방향과 생활의 방식에 대해서, 성신님의 역사에 대하여 배웠다고 하십시다. 몇 달을 배웠어요. 이제는 과거에 살던 이 방식이 안됐구나 혹은 일대 혁명을 해야 할 판인데, 그러자마자 이제 무엇이 닥쳐오는고 하니 꼭 차려야 할 문제가 닥쳤다 말이오.
차려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차려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면, 인아족척(姻娥族戚)은 달려들어서 그가 큰집이고 종가(宗家)니까 차리는가 어떻겠는가 하고 부조까지도 해서 보내고, 이거 안 차릴 수도 없고 차릴 수도 없고 혼자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이오. 세상을 자기 있는 힘을 다 해 가지고서 가지만, 영치기 영치기 하고 도로 끌고 들어가려고 그러고 그 뒤에는 이 세상 임군 마귀가 끌고 들어가는 것이오.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을 시켜서 그가 깨달음 가운데 이르지 못하게 할 뿐더러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깨달은 것을 단행해서 새로운 세계로 썩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 그 단말마(斷末魔)적인 방해를 하는 것이다 그거요. 좀처럼 그게 쉽지가 않아요. 무엇이 막히고 무엇이 막히고 자꾸만 막아져요. 이렇게 해서 사람의 생활 감정이 좀체로 얼른 뒤따라 가지 않고 우리는 조그마한 것에도 그래요. 우리 자신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도, 될 수 있는 대로 과거의 무슨 습관이라고 할지 또한 풍속이라고 할지 그런 것을 그냥 후닥닥 뜯어 고치고 변하고 제멋대로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오.
가급적 남에게 비소를 안 듣고 남보다도 유별나게 별나게 무엇을 해 보려고 할 것 없이 가급적 이편순속(利便順俗)이라서 내가 이 세계에서 살면 세계의 풍속을 그대로 좇고 살아야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오. 이러는 데서 우리는 자칫 마귀의 세력권에서 못 벗는 위험이 있는 것이오. 우리의 생활제도를 보면, 우리의 생활제도가 이게 무엇이냐 할 때 현재의 우리의 생활제도는 어디식도 아니오. 지금 20세기식 한국식이라고 할는지요. 그것은 한국식도 아니오. 왜냐하면 제가끔이니까. 서양에는 서양식이 있어요. 생활제도가 동양에는 동양식이라는 게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서양식도 아니고 동양식도 아니고 반거충이로 중간에 딱 걸려 가지고 있는 그런 경우가 참 많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신구의 두 세대가 막 한꺼번에 뒤섞여 살면서 구세대(old generation)는 우리에게 강경하게 보수주의를 요구하고, 신세대는 개화를 하려고 하는 거요.
이 진통이 19세기 말부터 시작해가지고 지금도 계속하는 것이오. 19세기 말에는 개화꾼 대 보수꾼(수구꾼)이라고 해가지고 정치, 경제, 사회 일반에 거대한 진통을 겪어서 할 수 없이 그건 밀려갔지만, 그건 심지어 어디까지 일어나는고 하니 한쪽에서는 머리의 상투를 끊으려고 하고 한쪽에서는 차두(此頭)는 가단(可斷)이언정 차발(此髮)은 불가단(不可斷)이다. 목아지는 끊어도 머리는 못 끊는다. 그 무슨 고집입니까? 그게 충성도 그만 저만한 충성이 아니오. 그 지극한 충성이오. 천도교를 하고 가서 머리를 싹 깍고 왔더니 누구한테 매를 맞느냐 하면, 젊은이는 머리를 깍고 오면 할아버지한테 매를 맞기 꼭 안성맞춤이오. “이놈이 집안 망할 자식 이놈의 자식, 네가 성현의 도리를 버리고 제 조상에게 제사하는 소중한 머리를,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손이 효지시야인데, 어쩐 말이냐!” 당장에 신체발부이니까 터럭 발(髮)자요. 이것은 신체, 몸뚱이하고 체형하고 이 터럭하고 피부라는 것은 부모님한테 다 받은 것이라서 그것은 함부로 훼손지 않는 것이오. “함부로 끊지도 않는 게고, 함부로 헐지 않고, 함부로 흠을 내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이놈아, 효의 시작도 모른단 말이냐”, “이놈 당장에” 그럽니다. 입신행도(立身行道)하고 양명후세(揚名後世)해서 이현부모(以顯父母)가 효지종야(孝之終也)라. 사람이 입신을 하고 도를 행하고 이름을 후세에 전해 가지고서는 부모를 나타내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다 하는 것이오.
효가 그것이오. 그런데 효의 시작이라는 신체발부의 중요한 발(髮)을 갖다가 제멋대로 싹둑 자르고 왔으니 종아리 맞았으면 그건 적게 맞은 것이오. 몽둥이로 두들겨 패가지고 내쫓는 일이 많았다 그 말이오.
그런데 어떤 젊은 사람들은 참 가상스럽고 효자라놔서 출천대효(出天大孝)라서 “차두는 가단이언정 차발은 불가단이라” 해가지고서는 학교를 다니는데, 아직 서울서 그 때는 보성 학교라고 학교가 있어서 거기를 다니는데, 보성 학교를 다닐 때는 처음에 갓을 쓰고 갓에다가 이렇게 문패 같은 큰 학교 모표를 붙였는데 - 문패같은 모표를 붙였어요. 그렇게 하고서는 인제 걸음을 걷되 그냥 보통으로 걷지를 않고 학도 걸음을 걸어야 해요. 그래서 왼쪽 다리를 내놓을 때는 왼팔을 내놓고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걷는다 말이오. 그러면서 무슨 노래를 부르느냐 하면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학도야 벽상의 괘종을 들어 보시오. 한 손에 두 손에 가는 것 보니 인생의 백년이란 춘몽 같도다. 그거 다 배우는 것이오.
그런데 요새 영감님들 보고서 “그 상투를 자르시죠” 물으면, “자, 그것 뭐 그렇긴 하지만 지금까지 하던 걸, 내 하던 걸 죽으면 그만이지 뭐, 싫다” 지금 그렇게 대답을 하지 “예끼, 그럴 수가 있니!” “차두는 가단할런정 차단은 불가단이다”하지 않아요. 그 사람 자신에게는 충성이라는 위대한 도덕을 발휘할는지 모르나 인생의 거대한 조류로 볼 때 그 참 무의미한 도덕이오. 인생의 도덕 가운데는 그렇게 무의미한 도덕이 있어요. 신구의 그 교체 가운데 이런 싸움이 생기는데 19세기 말로 20세기 초까지는 그러한 싸움이 있었지만,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생활 주변에도 아직도 우리 자신을 낭비케 하고 우리로 하여금 탄식을 하게 하는 그 신구의 문제라는 것이 여전히 있다 그 말씀이오. 신구의 문제가 여전히 있어요.
이것은 단순히 역사론적으로만 보더라도 그래요. 그리스도교를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시대의 새로운 사상의 조류와 보수주의적인 조류가 탁 엉켜 가지고서 사회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가령 가족제도라든지 또 가정이란 것에 대한 해석이라든지도 이 구식 생각과 신식 생각이 굉장히 대립되어 가지고 있어요. 층(層) 하나를 만들어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그래서는 구식 양반들은 강하게 구식의 그 도리를, 성현의 도리를 지금도 강요를 하고 신식은 그까짓 것 상관 없다고 해요. 그런데 그까짓 것 상관 없다 그러면 간단히 선언 한마디 하고 다 나가버리면 편안할텐데 그렇게 돼 있지도 않거든요. 거기 뭣이 있는고니 사회에서는 옳다 그르다 하고 자꾸 지복을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없는 여러 경제적인 현실적인 난문제가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이런 현실적인 난문제 앞에서 어떻게 하느냐? 불가 부득이 그 살지마는 옳게 살았으면 피차에 양해를 하고 살 수 있어야 하는데, 구세대는 구세대대로 강경하게 구세대의 원리대로 그냥 그 철학을 요구를 해요. 강요를 해요. 그러면 그것이 부정당한 철학인 줄 알면 아는데도 불구하고 재하자(在下者)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는 예전말로 옛날에야 재하자들 유구무언 아닙니까? 재하자는 유구무언이라.
아래있는 사람아, 인아족척이 층층대로 앉아 가지고서는 무엇이 사돈의 팔촌의 콩나물 대가리까지 와서 꽉 누르고 있는데 무슨 며느리가 무슨 입이 있은들 말이 있습니까? 말을 못하는 것이오. “예, 죽어 잡아 잡수시요.” 무엇해서 삼년, 무엇해서 삼년, 무엇해서 무엇이 되더라고. 무엇해서 삼년이지요? 눈멀어서 삼년, 벙어리되어서 삼년, 귀먹어서 삼년이지요? 재하자 유구무언이오. 그것이 뭐 먼 세대 얘기가 아니오. 우리 세대에도 있는 거요. 다 그게 이렇게 전체로 구세대라는 게 양보를 하려고 않는 거요. 여기에 시대의 큰 충돌이 있는 거요.
그런데 그걸 시대의 역사론적으로만 볼 뿐 아니라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그걸 바라볼 때 하나님 나라의 스타일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목표가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방법이 있어요. 그 하나님 나라의 방법이 이 세상의 방법과 충돌을 하는 때가 많은 거요.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 방법대로 밀고 나가야 할텐데, 이 밀고 나가려면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러고 자기가 각성할 뿐 아니라 용단하고, 그 용단이라는 것은 박해를 각오하고 시작해야 해요. 원, 개화운동을 하는데도 박해를 받았는데 말이오. 얼마나 개화운동을 하는 데 박해를 받았고, 개화운동의 기수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을 했는가 여러분 잘 아시죠? 우리 한국 같은 작은 사회에서라도 신문화, 소위 개화, 그걸 개화라고 그러지요? 그래서는 세상 지팡이 하나 짚고 다니는 것도 옛날 노인들은 노인이니까 지팡이를 짚고 다녔지만, 젊은 사람이 양복을 척 입고 다음에는 불란서 루이시대의 그 본을 따가지고 루이식 양복을 떡 입어요. 아, 그 때는 그것이 또 유행이니까. 그러니까 그 모자도 실크�, 모자를 탁 이렇게 쓴다면 반듯이 뭣이 하나 있어야 한다 말이오. 단장이, 단장을 턱 잡고, 그걸 보고 뭐라고 그랬지요. 개화장이라 그랬다 말이오. 모두다 개화꾼들이 들고 다니니까 개화장이라. 개화장 들고 간다. 보자 개화꾼들. 이렇게 해가지고 떡 한번 뽐내고 다녔다 그 말이오. 이게, 인제 소위 개화 바람에 있어서도 신구가 충돌을 해 가지고 싸움을 하니까 개화의 선봉에 선 사람들은 옷만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으로 시작을 안 했어요.
첫째는 사회적으로 강연을 하고 돌아다니고, 강연을 했어요. 안도산(安島山) 같은 이도 굉장하게 그 민족이라는 제목으로 민족의 각성을 해야겠다는 강연을 했지만, 그것이 강연 내용 가운데 사회제도의 개혁이라는 것을 많이 또 강연 했단 말씀이오. 도산이 강연을 많이 하고 돌아다녔지요? 평양 대성 학교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남들은 다 잠자는데 우리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지금 노래 부르도다’ 하는 노래를 모란봉 올라가서 늘 부르고 그러지 않았어요. 우리 개화 운동 때 개화 봉화를 들고 그래 가지고 여기 저기서 신문화 운동이 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개화, 개화”를 다 역설하고, 그러고서는 처음에 나온 소위 문화의 선수들은, 기수들은 소설로, 시로, 시보다는 소설이오.
막 써 내깔렸다 그 말이오. 여러분, 이광수씨도 그 때는 소위 개화시대의 출신인 까닭에 가장 열렬하게 그 때의 개화의 선봉이 돼 가지고서는 계몽사상, 선구자 운동을 했고, 나중에는 그런 소설도 쓰고 그런 글도 막 쓰고, 지도자론이라 써놓고, 그렇지 않으면 개척자라 하고 소설을 쓰고, 개척자 소설을 오늘날 보면 우리에게는 참 심심한 얘기이오. 그러나 그 시대성을 생각하면 그 시대에 이런 소리 했으니까 욕을 얻어 먹었겠다, 이건 정신 빠진 놈이구나 하고서는 미친놈이라고 욕먹었겠다 하고 생각이 듭니다. 민족 개조론이라 이런 것 다 썼다 말씀이오. 이래 가지고 투드려서, 이렇게 한 쪽에서는 박해를 하고 그러니까 이광수가 몇번이나 혼난 것 다 아시죠.
민족 개조론을 쓰고, 그 때 당주동에 살았는데, 장정들이 그 집으로 가서 “이놈, 나오면 때려 죽인다”고 하고서 모두 옛날, 요새같이 그렇게 격심하지 않은 시대인데도 그 집을 포위하고서 “나오너라! 이놈 나오너라”하고 소리지르고 야단을 내서, 나중에 그 대표자 장정 셋이 떡 들어가서 이광수하고 맛대면을 쳐가지고서 얘기를 해보니까 얘기야 뭐 이기지요. 뭐, 이쪽이 주먹이나 세었지. 뭐 말할 줄 아나, 머리가 모자라니까! 그러니까 나중에는 냉수 가져오라 해가지고서는 냉수만 세 그릇 먹고 나왔어요. 이것 뭐 생각도 않은 얘기를 지금 하는데 이렇게 단순히 한 민족이 새로운 사상 하나를 도입하려고 하더라도 이렇게 박해가 있는 거요. 시대의 선구자로서의 박해라는 것이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땅 위에다 세우려고 할 때에는 단순히 시대의 선구자에 불과한 정도가 아니오. 마귀의 강력하게 틀을 짜고 있는 이 세계에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침입을 해 들어가는 까닭에 반드시 반격을 맞는 거요. 그래서 아주 치열하게 되는 것이오. 그런데 그러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 각성을 하는 거요.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 -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또 그 목표에 도달하는 분명한 방법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하고, 생활 전반에 대해서 어떤 비판을 가할 수 있고 무엇이 원칙적이냐, 무엇이 바르냐 하는 것을 제시 할 수 있는 선구자로서의 길을 늘 다 들어가야 하는 것이오. 우리 교회가 앞으로 우리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는 확실한 태도를 더 명료하게 취한다면 취한 만큼 선구자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오. 선구자라는 말을 옛날 히브리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는 그냥 선구자가 아니고 선지자이오.
그건 또 언제든지 예언자(預言者)라 그 말이오. 말씀을 바로 맡아서 자기 자신에게 말씀이 확실히 사실인 것과 진리인 것을 믿을 뿐 아니라, 자기는 거기에 의해 살면서 그것을 민족에게 하나님의 산업에게 전파해 주는 대선지자인 것이오. 선지자의 길을 걷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우리들 자신이 생활 감정까지 거기에, 우리의 전신이 거기에 빠져들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와 생활 감정 가운데, 정서 가운데 들어갈 수 있을 만치 열렬하게 타올라가야 하는 것이오. 하나님 나라의 깊이를 깨닫고 열렬하게 타올라가야 하는 것이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해요.
첫째는, 그러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것이 둘째는 확실히 진리라 해서 그대로 의지하고 밀고 나가보는 것이오. 그러면 제세째번으로 따라오는 것은 생활 감정이오. 내가 기분이 처음부터 그리로 다 쏟치고 썩 좋다 하고서 처음부터 그렇게 할 걸 기대할 것 없는 거요. 이것이 진리라 하면 언짢고 좋고 할 것 없이 좌우간 밀고 나가는 거요. 나가면 나중에는 자기의 감정도 과연 그랬더니 통쾌하고, 그랬더니 기쁨이 있고 그랬더니 하나님이 위로를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지, 마음이 기뻐서 가기까지 기다리려면 그것은 한이 없는 말이오. 누가 진리를 처음부터 기뻐하고 받나요? 또 마음이 기뻐서 받는다는 이 감정의 수락, 혹은 감수 이것은 사실 위험한 것이 많은 거요. 돌짝밭에 떨어진 씨라는 것은 기쁨으로(씨를) 받는 사람들이오. 마음이 기쁨으로 받았을지라도 결실 안 할 수가 있는 것이오.
문제는 기쁨으로 받는 거기다가 치중할 필요 없는 것이오. 그러나 그것은 따라 오고야 마는 거요. 결국 내가 진리를 알았다 그러면 나는 그리로 간다하면, 감정이라는 것이 다를 수가 없는 거요. 감정 혼자 나중에 자꾸 반대는 못하는 거요. 나는 그 길로 가고 있는데야 뭐. 지적 감정이라는 것은 바른 것을 바른 것으로 인식했을 때 따라다니는 거요. 바른 것을 내가 했다는 양심의 안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는 것이오. 나는 진리를 하다가 손해를 보면 여한이 없다 그 말이오. 잘못하다가 손해보는 거야 뭐 한이 많겠지만, 나는 진리를 하다가서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로 물질상 자기 생활상 손해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바른 걸 하다가 손해를 본 것이니까 뭐 여한이 있느냐? 이렇게 해서 자기는 안심하는 것이오.
이러니까 우리의 생활 감정이 이 누습에 젖어 있는 이 세상, 이 세상의 풍속 그대로에 젖어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놈을 반발하고 그것을 비판하고 그렇지 않는 길로 걸어가려고 하니까 필연 우리는 항상 외로운 길을 가게 되고, 개혁이라는 사실을 낳아야만 하고, 또 적을 만나는 것이오. 그러나 적을 만날지라도 외롭지 않은 것은 주께서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사실이 거기 있어요. 주께서 같이 계시므로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 않는다, 주께서 나와 항상 같이 계신다,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는도다! 위로해 주시는 것이오.
마귀의 중요한 방식이라는 것이 이렇게 이 세상과 동맹이 돼 가지고 세상에서 큰 세력을 갖고 있어서 세상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끌고 들어가게 돼 있어요. 마귀의 역사에 대해서 또 한군데 우리가 잠깐 열고 볼 것이 있는데 역대하 18장을 찾으시지요.
우리는 이 얘기를 볼 것 같으면 마귀가 어떻게, 혹은 어느 때 하나님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명령하에서 움직이는가? 천사가 직접 거짓말하는 영이 돼서 들어갔다는 것보다도, 원래 거짓말하는 영이 거짓말을 자꾸 말하게 해 거짓을 하는 자는 원래 마귀요. 거짓의 아비도 돼고 거짓말 하는 자도 되느니라, 이건 대체로 한 주전 800여년 전의 얘긴데, 그 때 유다왕은 여호사밧이고 이스라엘 왕은 아합왕인데, 유다 왕 여호사밧은 다윗왕으로 볼 것 같으면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암, 아사, 여호사밧 제육대째라 말씀이오. 그러고 이스라엘 왕은 그 동시에 여로보암을 지나서 나답, 바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그리고 아합 그래서 칠대째요.
그 사람들은 자꾸 죽이고 죽이고 가면서 자꾸 왕이 됐어요. 그런데 그 유명한 이 아합이 스스로 팔려 가지고 항상 죄를 범하는 그 자인데 여호사밧과 서로 연혼이 돼서 서로 혼사를 맺게 된 까닭에 친하게 지냈다 말씀이오. “두어 해 후에 저가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여호사밧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아합에게 갔더니 아합이 저와 그 여호사밧과 그를 따라온 수행원들을 위하여 우양을 많이 잡고 함께 길르앗 라못 치기를 원하더라.” 라못으로 갔단 말씀이오. 가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가 물어보자 하니깐, 아합 선지자 400명을 모아놓고 저희에게 뭐라고 했는고니 우리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니까,
저희가 하는 말이 “하! 왕께서 그렇게 얼마나 성덕이 훌륭하신데 안 가시겠습니까? 나가서 싸우소서. 하나님이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여주실 것이올시다.” 그 때 유다 왕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말을 여출일구(如出一口)로 다하는 것을 곧이 듣지를 않고 철저히 더 물어보자, 아무래도 이게 어떻게 되는지 모르니까, “이 밖에 또 물어 볼 만한 선지자가 있습니까?” 하니까, 이스라엘 왕 아합이 하는 말이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고 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저는 항상 나한테 길한 말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해요.”
“어디 그럴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을 받아서 말하는 사람의 말이야 길하든지 흉하든지 들어야 할 것이지 흉하니까 않겠다며는 그러면 뭐하려고 선지자한테 물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 말씀 마시고 데려다 물어 보십시다.” 그래서 미가야로 속히 오라고 아합이 자기의 신복을 보냈더니, 그가 이르니까 그때 아합과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 보좌를 턱 높이 실시하고 거기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 이 대표적인 거짓말하고 아첨을 잘하는 예언자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라는 사람이 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 뿔들을 가지고 아람 사람들을 찔러서 진멸하리라고 말씀 하셨어요 하고 크게 용기를 북돋고 마치 하나님께서 그 뿔을 왕에게 상징으로, 승리의 상징으로 주는 것 같이 얘기를 했단 말씀이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람이 가만히 미가야를 찾아서 하는 말이 “지금 다른 선지자들의 말이 다 여출일구해서 다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이 왕에게 길한 얘기를 했으니까, 청컨대 선지자님 당신도 저희 중 한 사람처럼 길한 말만 하십시오.” 그러니까 선지자 미가야가 하는 말이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 것 곧 그것만 내가 말할 것이다.” 그러고서 이제 미가야가 왕에게 이르렀단 말씀이오. 그래 왕이 그를 보고 묻는 말이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갈 것이냐 말 것이냐” 그러니까 “아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시죠 저희들은 다 왕의 손에 붙이신 것이 아닙니까?” 떡 이렇게 말을 쉽게 해 버리니까,
진정으로 대답 않는 것을 알았다 말씀이오. 자기 마음에도 자기의 다른 선지자들의 말하는 걸 안 믿었다 그 말이오. 그러기 까닭에 미가야가 다른 선지자와 꼭 같이 한마디 하니까 안 믿고, “야, 내가 몇번이나 너보고 진정으로 말하라고 맹세를 시키데? 다시 진정으로 얘기해 봐라.” 그러니까 미가야가 그 때는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왕을 거기다 두어 놓고 지금 왕에게 목자 노릇을 못한다 그 말이오. 지금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라 하셨나이다.”
주인이 없으니 어디로 따라갈 것인가 각각 집으로 돌아가서 안정하고 살아라. 무슨 싸움을 하려고 모일 것 있느냐 그러니까 아합왕이 여호사밧, 그 유다 왕 한테 하는 말이 “보십시오 저 사람이 나한테 뭐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한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니까 미가야가 다시 크게 예언하기를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시옵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주욱 모시고 섰는데,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서 그로 하여금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나님이 아합을 길르앗 라못 전쟁을 하러 가도록 하시고, 전쟁을 하고 싶어서 저가 뛰어가게, 거기 가서 죽게 하시는 거라 말씀이오.
하나님이 벌써 정한 거라 말이오. 정하되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평소에 마귀의 유혹을 받고 꾀임을 받아 다니는 그인 까닭에 마귀의 꾀임에 의해서 거짓말하는 귀신의 꾀임을 받아 가지고, 잘 되리라, 승리하리라고 믿고 한 거요. 승리하지 않고 참패할 줄 알고 죽을 줄 알면 안 갔을 거요. 억지로 저가 싸움을 하러 갈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누가 가서 그 놈을 그렇게 죽이게 할꼬 하니까 어떤 신이 나와서 저는 이렇게 이렇게 하겠어요, 또 하나는 저는 이렇게 이렇게 하겠어요 할 때 어떤 신 하나가 쑥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제가 저를 꾀이겠어요. 제가 저 아합을 꾀이겠어요.” “어떻게 하겠느냐” 여호와께서 물으시니까 “제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돼 가지고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너는 능히 꾀이겠고 또 그것을 성취할 것이다. 나가서 그렇게 해라” 하셨은즉, 그러면 이것은 아직 그림과 같이 그런 얘긴데, 척 하늘에서 어느 때는 사탄도 여호와 앞에 때때로 서서 여호와의 명령을 받아가지고 가서 무엇을 하라고 하는 명령을 받은 것을 우리는 욥기에서 보는 것이오.
크게 말할 때 사탄이나 사탄 아래 있는 모든 휘하의 모든 영들이 세상에 와서 악을 행하고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해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비취지 못하게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직접 원수로 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천군 천사들이 둘러싸여 있는 곳에 때를 따라서 그가 부르시면 올라가서 한 일을 보고할 뿐 아니라, 그의 명령을 받들어서 전체로 이 전 우주와 만상과 인류와 역사를 통치 하시고 통제하시며 한 가지라도 관계치 아니 하시는 것이 없는 그 여호와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종노릇 하는 거요.
악한 자를 다스릴 때 여호와 하나님은 천사만 가지고 하시는 게 아니라 마귀와 그 종자들을 다 데려다가서 악한 것에 꾀임을 받고 악한 것에 그만 접촉을 받아가지고서 그걸 좋아하는 사람을 다스리시는 것이오. 그래서 악한 자는 악한 귀신에게 이끌림을 받아서 악한 날에 악하게 된다는 것도 역시 여호와의 통치하에서 되는 것이다 말씀이오. 여기 이 큰 도리가 이렇게 가르쳐 주는 것이오. 그러므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가지고 “제가 그 아합의 모든 영들, 아합의 모든 선지자들 그 입에 있어서 아합에게 거짓 예언을 하겠어요.”“ 지금 아합왕이시여, 당신의 선지자들이 하는 것이 이렇게 거짓말하는 영이 와서 시키는 것이니 왜 모릅니까”하고 일러주는 것이오. 일러주지만 아합은 어쨌느냐 하면 바른말하는 미가야의 말을 들은게 아니오.
그 다음에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그러니깐 아까 그 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서 “이것이 승리의 상징이올시다. 이걸 가지고 가서 저 아람 군대를 치라고 했어요” 하고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지어 내서 하던 자들이 막 발현적색(發現赤色)을 해 가지고, 화가 나 가지고서는 쫓아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면서 하는 말이 “여호와의 신이 나를 떠나서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을 그렇게 하더냐? 여호와의 신은 내게 있었는데” 하면서 서로 “내가 여호와의 신을 받았다 네가 언제 받았느냐” 하면서 말하자면 권위(authority)를 다투는 문제이오.
“내가 진리다 네가 먼저 그 진리를 뺏아갔느냐?” 그 얘기이오. “미가야가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신의 감동을 받아서 이 사실을 얘기 한다는 것을 네가 알 날이 있을 것이다.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볼 것이다.” “아합이 이제 죽고 참패를 하고 막 이스라엘 군대가 몰릴 때 그만 모두 무서워서 사방으로 도망할 때 너는 골방에 들어가서 그 때는 알거다.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볼 것이다.”
그래 아합이 “이스라엘 왕 아합이 화가 나가지고서는 명령하기를 이 미가야란 놈을 잡아서 부윤(府尹)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거라.” 그러니까 미가야가 대답하는 말이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실텐데 여호와께서 나로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아니 하셨을 것이니이다. 너희 백성들아 다 들어라” 하고서는 그 자리에서 “백성들아 너희들은 증언으로 이제 들어봐라.” 조금 있으면 결과를 알 거란 말씀이오.
과연 이스라엘 왕하고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갔어요. 그 때 아람 군대 장관이 명령을 해가지고서 사람이 높고 낮고 간에 사람, 다른 사람 잡지 말고 이스라엘 왕 하나만 잡아라 하고서는 막 그리로 집중해서 지금 쳐들어 가려는 참이오. 옛날 알렉산더가 다리우스하고 싸움할 때에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 않고 막 다리우스를 향해서 돌진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 가지고서는 탁 창으로 찌르려고 하니까 다리우스가 큰 소리치고 막 도망하는 그런 벽화도 있지요? 여기도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합은 그걸 정보를 통해서 알았든지 알고 군졸과 같이 변장을 하고 슬그머니 군사 속으로 들어가고, 지금 여호사밧을 꼭 마귀같이 살살 꾀어 가지고서 전쟁을 하러 나가자 해놓고, 저도 같이 총사령관의 복색을 하고 나가지 않고, 저는 군졸과 같이 변장을 하고 여호사밧만은 총사령관의 복색으로 턱 그냥 전장에 출전을 했다 말씀이오.
그러니까 아람 군대가 보니까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총 지휘를 하고 있으니 그게 왕이구나 하고 막 그쪽으로 집중을 해서 막 쳐들어 갔다 말씀이오. 하니까 그때서야 멍청구리 여호사밧은 깨닫고서는 막 큰 소리를 쳐서 “내가 아합이 아니다 나는 여호사밧이다 나는 유다 왕이다” 하고서는 아닌 것을 자꾸 얘기를 하면 도망을 하면서 일방 자기 군대가 호위를 해가지고서 죽지 못하게 하고 하니까 아람 군대가 가만히 보니까 이게 아니다 그 말이오.
가짜이오. 아! 이게 잘못됐구나 그러면 어디가 있는가? 이제는 그 다음에 다시 물색을 하는 중이오.
물론 여호와께서 저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 아람 군대 사람을 감동시키사 이 여호사밧을 떠나가게, 고지(告知)를 듣게 했다 그 말씀이오. 전쟁터에서 고지를 들으려면 듣고 말려면 마는 것인데 고지를 듣게 했어요. 그래서 병거의 장관들이 저를 이스라엘 왕이 아닌 것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어요. 그러는데 아합은 제 재주껏 모면하려고 재주껏 저는 안 죽을려고 군중 속으로 들어갔는데 우연히 활을 대 가지고 군대를 막 쏘아 대는데 그 흐르는 화살에 아합이 맞았다 그 말이오.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했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군중에서 나를 좀 내보내 다오,가서 어디로 얼른 가서 빨리빨리 치료를 해야겠다 해도 어떻게 싸움이 맹렬했는가 막 그냥 혼전이 돼가지고 있어서 나갈 틈이 없었다 그 말이오. 틈이 없는 새 피를 자꾸 줄줄줄 흘리다가서 마지막에 그 날 왕이 병거에서 스스로 부지하며 저녁때까지 아람 사람을 자꾸 막고 싸움해 가면서 지내다가 마침내 해가 질 녘에 죽어버렸어요. 이렇게 미가야의 예언이, 여호와의 신의 감동으로 한 예언이 그대로 바로 맞았다 그 말씀이오.
이런 걸 보면 거짓말하는 영이 돼서, 거짓말로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을 예언하는 사람, 그 사람들 속에, 그런 선지자들 속에 들어간다.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할 때 “거기 화가 있고 거기 곤란이 있고 거기 타락이 있고 거기 이제 나가면 죽는다” 하는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교회는 잘되고 이렇게 하면 융성하니, 자 이대로 그냥 갑시다”하고 밀고 나간다 말씀이오. 이대로 나가고 오히려 다른 사람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쫓아가서 마치 이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뺨을 치듯이 박해를 한다 말이오. 진리를 막을 때는 박해를 해 가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받고 우리가 정통이지 네가 언제 정통이냐 그거요. 우리가 정통이다.
언제 여호와의 신이 나로 좇아 나가 가지고 어디로 말미암아 너한테 들어가더냐? 우리야말로 여호와의 신을 받았지 않느냐? 우리는 종주권을 가졌고 우리는 정통이고, 우리는 바르지 않느냐라고 해요. 거짓말하는 자들은 항상 자기가 바르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오. 더욱이 그것을 진리라고 하면서 거짓을 전파하는 것이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을 멸망시키시려고 할 때 거짓을 믿고 항상 마귀의 휘하에서 마귀의 올무 가운데에서, 마귀의 세력에서 벗어나기를 거절하고 세상 풍속을 좇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믿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오.
이건 하나님의 참 무서운 심판의 하나인 거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한가지는, 죄를 계속적으로 짓되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게 그냥 암매 가운데 가두어 두시는 것이오. 어거스틴 선생의 말과 같이 사람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이 많은데, 이 땅 위에서 사람이 사는 동안에도 형벌을 많이 받아요.
영원한 형벌은 반드시 받지만 영원한 형벌 말고 이 땅 위에서 많은 형벌을 받는 것이오. 사람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사람들, 그 공로를 참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다시는 형벌이 없는 것이오. 무슨 일을 잘못하고 네가 지은 죄값으로 이런다고 죄값이라는 것을 받는 게 아니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죄값을 자꾸 받는 거요.
그러고 그것이 죄값의 전부는 아니오.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고도 나머지가 얼마든지 있는 거요. 그것을 땅 위에서도 때때로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공의의 거룩한 속성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거룩한 영광을, 공의의 통치의 영광을 때를 따라서 적당한 분량으로 깨트리지 않고 땅 위에 증시하시기 위해서는 때를 따라 인류를 심판도 하시고 어떤 사회를 심판도 하시고 어떤 한 부분을 심판도 하시고 한 개인을 치시기도 하시는 것이오. 치실 때 어떠한 방식으로 치시느냐 하면 저들이 평소에 좋아하고 평소에 거기서 헤어나기를 거절하고 거기서 살기만 원하려고 간절히 바라던 그 세상을 그냥 그들에게 둘러씌워서 세상의 속임을 그냥 믿고 세상의 영화에 그냥 눌려서 유혹을 받아서 그냥 따라 죽게 만든다 그 말씀이오.
이것이 말하자면 “내가 저기 저 자들을 오늘날 징벌을 해서 땅 위에서 큰 앙화를 내리고자 한다. 누가 이걸 하겠느냐?” 할 때 마귀는 나가서 하나님 앞에 “제가 하겠어요. 원래 그 자는 저하고 가까이 있어서 저하고 친숙한 자인 까닭에 그런 자는 제가 가서 얘기하는 것이 제일 편할 것이올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제 말을 잘 들었어요.” “너는 가거라. 너는 가면 능히 이루겠고 또한 반드시 결과가 있을 것이다. 가거라” 하면 마귀는 휘익 돌아 내려와 가지고서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 가지고서 “이걸 믿어라 저걸 믿어라, 그것이 합리주의다, 그것이 바르다, 그렇게 하였더니 번영하더라, 그렇게 하니까 성공하더라” 하면 그걸 따라가다가서 뻥 떨어져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속에 들어가고 마는 것이오. 그렇게 마귀라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림을 받는 것이오.
하나님의 자녀가 선한 싸움을 싸우려고 할 때, 대적이 돼서 하나님의 자녀의 가지고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힘을 증거하는 시험대로만 쓰이는 건 아니오. 욥기는 마귀가 시험대로 쓰였던 사실이오. 욥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 즉 인내라는 큰 덕을 아주 강하게 실증을 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욥은 하나님의 싸움을 대신 싸워서 마침내 인내로 싸움을 싸워서 이겼고, 마귀에게 대해서 “네가 적이 돼 가지고 욥하고 싸웠지만 이겼느냐?” 나중에 마귀는 “저는 졌어요”라고 그랬다 그 말이오. 마지막에.
그러나 마귀의 휘하에 있어서 이 세상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벗어나기를 거절하고 세상에 항상 살고 세상의 풍속과 전통에서 벗어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거룩한 도리를 감연하게 도입해 가면서, 세상에 대해서 도전하기를 거절하고 적당히 세상식으로 함께 끌려 가면서 살면서 일방 예수 믿어서 천당도 가고 일방 괴로운 일 있을 때 의지할 것도 있고 이 양면, 두 다리 걸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마귀는 “하하, 하나님을 믿고 찬송은 합니다마는 아직도 제 수하에 아직도 있으니까 그런 건 저 한테 맡겨 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때때로 그럴 거요.
그래서는 사탄의 꼬임 가운데 빠져 들어가서 아무 평안이 없는 데도 평안하다 평안하다 이렇게 전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에는 이 마귀의 거짓말에 그냥 꼬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예레미야의 그 울면서 통곡하면서 가르치는 소리를 안 듣고 평안이 없는 데도 평안하다 평안하다는 거짓 선지자들과 꿈과 허탄한 소리들을 그냥 자꾸 믿고 바벨론 왕이 자꾸 중대해 가지고 지금 큰 세력을 구축해서 머지 않으면 쏟아져 와 가지고서 때릴텐데, 머지 않으면 쏟아져서 때릴 그 세력이 지금 커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자기하고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고, 그걸 보고 그것이 자기에게 얼마나 큰 위협을 준다는 것을 볼 눈이 없었다 그 말이오.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의 징벌로서 내리는 화라는 것을, 화의 근원이 되는 세력을 한쪽에서 아주 큰 역사로 장성을 시켜도 화받을 사람은 그것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 말이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한테 죽을 참인데, 포로로 잡혀갈 참인데 말이오. 바벨론의 그 세력이 그 아버지 나보폴라살부터 차례 차례 착착 착착 막 커가지구서는, 앗시리아의 일개 군장에 불과하던 사람이 나중에는 뛰어가지구서 바벨론을 차지해 가지구서 황제가 돼 가지구서 세우는 그 사실을, 그 역사를 자기하고 상관 없는 것 같이 생각했다 그 말이오. 그것이 저 동방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거기 대해서 무관심했어요.
오늘날도 수다한 많은 사람이 장차 큰 화의 막대기가 될 큰 사실들이 인류 사방에서, 세계 사방에서 자라나고 있겠지마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좋아하고 마귀의 그 은폐 가운데, 눈가림 가운데 딱 같혀 있어서 눈 앞에 있는 세상의 번영만 뵈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와 그 빛에 의한 세상의 위험을 안 보는 사람의 눈에는 안 뵈는 것이오. 자기하고 같이 자라나더라도 안 뵈고 있다가 나중에 큰 다음에는 와서 홍수와 같이 덮칠 때 꼼짝 못하는 거요. 이 이스라엘 백성의 암매는 얼마만큼 암매였는고 하니 그것이 그냥 몰아 들어오는 그 시간까지라도,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그랬다 그 말이오. 참 평안이 없는데도 거짓 평안을 자꾸 예고 했어요. 예레미야는 일어나서 그렇지 않다 할 때, 예레미야를 잡아다 가뒀다 그 말이오. 왕궁 시위대 뒷뜰에다가 가둬놓고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그렇지 그래 그래 하고서는 평안을 곧이 들었다 말이오.
이렇게 마귀의 큰 역사라는 것은 때를 따라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막대기가 돼가지고, 그 심판을 할 때는 거짓말을 그냥 믿게, 그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거짓말을 조작하고, 숨기고, 그것으로 유혹하는 유혹자 노릇을 다하게 방치해 버리시는 거라 말씀이오. 그 암매 가운데 그냥 둬두는 것이오. 캄캄한 데서 어딘지 모르고 자꾸 방황하는 속에다 그냥 내둬버리시는 거라 말이오. 이건 하나님의 심판의 한가지이오. 하나님의 형벌하시는 방법의 한가지이오. 그것은 안 믿는 사람에게만 그러는 거 아니오. 믿는 사람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도리의 깊이를 알려고 하지 않을 때 그 완패는 반드시 그런 형벌을 받는 것이오. 사람이 완패하고 완고하고 사람이 구틀을 벗지 않고 자기식 종교를 가지고 자기식 기독교를 가지고서 끝까지 고집하고 나가면, 자기 종교 가운데 마침내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의 채찍과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의 매때림을 못 면하는 것이오.
그래서 이 세상이 하나님 앞에는 죄의 형벌을 받을 때 그 형벌을 형벌로는 안 받을지라도 좌우간 같은 아픔을 나누는 것이오. 그 때, 마귀는 그렇게 요동을 하는 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도 잘 알아야 하지만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서, 마귀가 어떻게 속이느냐 하는 것도 잘 알고, 그것보다도 더 잘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정신과 그 방법은 무엇이냐? 정신과 방법을 바로 체득해서 그것 이외의 다른 것으로 이 세상의 풍속으로 그것을 대치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밤낮 예수 믿어도 세상의 풍속에서 못 벗어나고 일단 무슨 긴급한 인간 생활의 사태가 있을 것 같으면 그냥 세상 풍속대로 생각하고 또 걱정하고 또 거기에 불들려 매달리고 또 그식으로 가려고 그러고, 이렇게 밤낮 도로아미타불식으로 하는 것, 이게 완패하고 완고한 인간들이 하는 짓이오. 이것이 참으로 신령하지 못할 때 그러는 것이오. 평소 조용할 때는 평안할 때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일단 위기가 오고 일단 유사하고 일단 결정해야 할 문제가 오면 그냥 세상식으로 돌아가 버려요. 이게 사실상 마귀의 큰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이오. 그런 것은 사실은 마귀를 대적해서 싸우는 게 아니오. 그런 것은 사실은.
다 같이 기도 하시지요.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들은 아버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를 더 깊히 알게 하시고 그 나라의 여러 가지 상태를 다 잘 알고, 그 나라의 거룩한 목적을, 그 목표를, 우리가 행진해야 할 이 목적지를 분명히 알게 하시고, 또 어떻게 가는 것이 정당하며, 어떻게 하는 것은 부정당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인생의 낭비요, 어떻게 하는 것이 존절히 쓰는 것인지를 바로 알아서 주께서 주신 시간과 생명과 정력과 우리의 물질을 낭비하지 않게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의 그 영광을 위해서 참으로 열매있는 데다가 우리의 전 생활을 늘 바로 넣고 사용하게 하사, 세상에 들어왔을 때는 세상식으로 생각하는 악습을 버리게 하여주시옵고, 우리가 세상식으로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는 마치 이 세상일을 치르지나 못할 것과 같이 항상 위협을 받고, 마귀의 그 거짓된 위협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암매가 있는 까닭에 이렇사오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저희로 하여금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합소서.
하나님의 준비가 얼마나 더 완전하고 충분하여 이 세상식으로 생각하지 아니하면 살 수 없으리라는, 이 거짓을 믿는 것이 어떻게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주님이여, 세상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간의 필요, 자자 영영한 우리 의식의 생활이나 교육의 문제나, 가정을 인솔하고 나가는 문제나, 어떠한 일을 정해나가는 문제의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무 준비도 없고 막연히 하나님만 믿으라고 공소한 관념만 주는 분인 것 같이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가지는 반면, 그런고로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구체적인 착실한 방법을 취해야겠다고 하는 이 마귀의 속임수 가운데 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마귀의 그 위협을 곧이 듣는 이 태도를 저희에게서 온전히 버리게 하시고 이 깜깜하고 멍청하고 암매한 것을 저희에게서 벗겨주시옵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모든 걸 맡길 뿐 아니라, 맡겼을 때 하나님의 주시는 것이 지혜요, 주시는 바 그 지혜는 모든 문제를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대로 선한 열매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생활을 통해서 중험해서 알게하여 주시고, 우리의 가진 여러 가지 인간 생활의 걱정이라는 것들이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빛이 비취어서 원칙적으로 불필요한 것이고, 군더더기고, 그릇된 전통과 누습과 폐풍에 의해서 무리하게, 암매한 가운데에 완고히 보존 하려고 하는 일 같으면, 그것을 단연코 포기하고 파쇄하고, 그대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서 원하시고 규정하시고 세우신 그 양식대로, 바르고 아름다웁고 유효한 것들로 바꿀 수 있게, 주여 저희에게 지혜를 주사, 참으로 세세한 인간 생활의 각 방편에 대해서 투철하게 지혜가 있고, 투철하게 하나님의 원칙과 그 나라의 법칙을 잘 아는 사람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리하여 우리들 생활 자체가 선지자다운 생활로서 분명히 참되게 하여 주시고, 선구자로서의 시대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양태를 우리의 생활의 면면과 세세한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나타내는 사람들이 되게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아버님! 마귀의 여러 가지 속임수가 많아서 때때로 죄악의 큰 심판을 하실 때에, 형벌을 내리실 때에 항상 거짓을 믿고 마귀와 접촉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결국 마귀가 하나님 앞에 자원하여 그들을 맡아서 앙화의 도구가 될 수가 있사옵나이다. 주님이여, 주를 믿노라 하면서도 세상의 풍속과 마귀의 큰 세력권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밤낮 매달려서 생각이 그쪽으로 돌아가는 이 속되고 인간적이고, 그리고 완고하고 그리고 캄캄한 암매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생활에 때때로 마귀는 화의 도구 노릇을 하고, 하나님의 징벌과 무서운 정책의 채찍 노릇을 하기도 하나이다. 주여, 이와같은 사실들이 다 무서운 사실이요 심히 고통스러운 사실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평안이 없고 그러한 심판과 그러한 징벌이 때때로 목첩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든 원인들이 거기서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평안한 줄 알고 이대로 나가면 그대로 잘될 줄 알고, 여전히 그 어둠 가운데 깜깜한 가운데, 멍청한 가운데 밀고 나가는 수많은 사실들 앞에서, 저희는 이렇게 멍청한 사람들 되지 않고, 저희는 눈먼 짐승과 같이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이 밀고 나가는 사람들 되지 않게, 항상 밝히 보고 밝히 깨닫는 사람들이 되게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였사옵나이다. 아 멘.
마귀에 대하여
제5강
요 16:1-33
사탄에 대하여 우리가 좀더 공부하면서 우리가 인류 사회에서 행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바른 관찰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무엇보다도 속이는 자인데 그가 속이는 목적은 자기의 가지고 있는 본성 그대로 나타내는 까닭에 그 본성은 악한 것이오. 또한 사탄을 악한자라, ‘그’라는 관사를 일일이 붙이지는 않지만 악한 자라, 골 1: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는데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사탄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오. 권세자든지, 사탄은 큰 권세를 가진 자요. 그런고로 사탄이 피조물이라, 창조된 자라 하는 것은, 가령 하늘에 있다고 할지라도, 저 공중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사탄도 귀기본(歸基本)하면 근본을 자꾸 따져보면, 궁극적으로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오. 그러나 그 악한자예요. 다만 악한자, “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악한자는 창조를 해서 무얼 하겠느냐?” 물론 하나님께서 절대 선하시고 완전하시고 의로우신 까닭에 창조하신 맨 처음부터 그렇게 악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어요. 창조했을 때 처음에는 그게 선미하게 창조되었겠지만 고귀하게 창조된 까닭에 사람이 마치 타락하듯이 사탄도 타락한 것이란 말씀이오. 그렇지 않고 사탄은 처음부터 악하게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셨다는 이론이 되는 것이오. 즉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부족하신 하나님이다. 부족하시기에 부족한 것이 나왔다. 그래서 악이란 게 존재한다 이런 이론이 돼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걸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고귀하게 창조하사 자유로운 의지를 주신 까닭에 자유로운 의지를 행사하되 그릇되이 행사해서 그로 말미암아 악이라는 것이 그에게 붙어서 그 악이 사탄의 성격이 되어 그가 얼마만큼 하나님 앞에 타락했는가 하면 철저하게, 철두철미하게 악하다 그 말씀이오. 사탄의 성격은 한마디로 악한자요. 사람은 악한 사람이 악한 일을 할지라도 거기에 일푼의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승인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된다 말이오. 가장 흉악한 사람들이 하는 짓의 악한 일일지라도 가만히 다 얘기를 차례 차례 들어보면 거기 조그만치라도 동정의 여지가 있는 인간적인 데가 있는 것이오. 그 소위 인간적이라는 것이. 사탄은 인간적이 아니라 사탄적이오. 사탄적이라는 것은 악하다 그 말이오. 순전히 악한 것. 그러나 어떤 것을 위해 그러느냐? 악을 위해서 그렇게 행하는 것이오. 악하기 때문에 완전히 절대로 선하신 하나님께 대해서는 반항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래서 그걸 악한자라 이름을 붙였어요. 마 13:19절에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막 4:15절에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오. 마태복음에 ‘악한자’는 여기 막 4:15절에는 사탄이고 또 누가복음에 있어서는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오.” 이 마귀, 그런고로 마귀는 사탄이오. 곧 악한자올시다. 그 ‘악한자’라는 말, 요일 5: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그 악한자 안에 처한 것이며” 악하자 안에 누워 있다. 호 코스모스 홀로스 엔토 포네로 케이타이(ό κόσμος όλος έν τώ πονηρώ κείται). 여기 악한자는 마귀올시다. 온 세상이 그 팔에 누워 있다.
악한자는 악을 자꾸 발생하는 까닭에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통칭해서 악에서 구해달라는 말씀이오. 총체적인 그 마귀에게서 구해달라는 뜻도 되고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통칭한 모든 악에서 그가 끼치고 있는 그의 영향으로 또 그의 올무로 또 그의 세력을 떨치는 결과로 나타난 마귀 아닌 악들, 그 악한자 아닌 악들, 그 인간적인 모든 악들, 그런데서 건져줍소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맹세하지 말라고,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오느니라.” 물론 여기도 그 악한자라는 뜻이 전연 없는 건 아니나 그것보다는 악이라, 너희 속의 악으로 말미암아서, 악으로 말미암아서 그런 것이다. 사탄은 그 악한 자가 성격이고 인격적인 존재로서 궤계를 가진 자요. 엡 6:11-12. 마귀는 그 궤계를 가지고서 일대 국가를 만들어 놓았어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엡 6:11-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라는 한 인격이 곧 어두운 자란 말이오. “이 세상 주관자 곧 그 어두운 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고후 2:11절에도 “그 궤휼을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니로라” 그랬어요. 궤휼, 왜 그런고 하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휼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네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8-11). 궤계를 가지고 사람을 교묘하게 계략, 모략을 가지고 사람을 넘어뜨리는데, 어떻게 하면 모략에 걸리느냐 하면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품성을 안 가지고 사람의 욕심과 옛사람적인 품성 가운데 살면 그 모략의 궤계에 넘어 들어간다 말씀이오. 그러니까 여기서도 사도 바울 선생은 그리스도적인 심성을 이렇게 이렇게 나타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않고 내가 옳다고 하고 경우만 따지고 바른 체 하고 하면 사실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사탄이 그런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궤계를 모르는 것 아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적 심성을 떠나 가지고서 제가 스스로 잘난 체 하고 제 스스로의 이론 가운데 빠져 들어갈 때 사탄의 궤계에 걸린다.
또 둘째는 가장(假裝)을 하는데 고후 11:14절에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사단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요. 여기 이 얘기를 볼 것 같으면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料)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다.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지만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한 것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고후 11:8-9). 지금 고후 11:10절을 읽어요.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함이로라 저런 사람들은 거짓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0-15). 거짓 사도들이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도 하고 바울이 하는 일을 여러가지로 방해를 하고 했는데 그것 다 이상한 것 아니다. 원래 마귀라는 것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을 잘하는 자인데 마귀의 일군도 사역자들도 또한 의의 사역자로 가장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저희의 행한 대로 마침내 되고 마는 것이다. 마귀가 그렇게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는 것이오.
마귀는 광명한 천사로 자기를 둔갑만 할 뿐 아니라 사람에게 어떤 생각을 불어넣는 것이올시다. 요 13: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생각을 넣는 마귀의 역사가 있는데 또한 이번에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스스로 들어가 가지고 하는 것이오. 요 13:26-27절에 “예수께서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게 마귀가 하는 일이오.
그 다음에 마귀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있는 그 곳에 가라지를 심는거요.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리는 사람과 같으니,” 이것이 마 13:24-25. 계속해서 28,39절에 띄엄띄엄 있는데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더니”(25절),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28절),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39절). 여기 그 밭은 어디냐 하면 밭은 세상이오, 38절에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니”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밭에는 원래 좋은 씨만을 심으려고 한 것이오. 인자께서는 좋은 씨만을 뿌리셨지만 마귀가 거기다가 가라지를 덧뿌렸다 말씀이오. 그 어디냐면, 그 밭은 어디냐? 이 세상이라 그 말씀이오. 밭은 세상이오. 꼭 교회라고 지목하지 않고 우리 주께서는 해석하실 때 “밭은 이 세상이오” 그랬어요. 물론 교회도 세상 속에 있으니까 세상의 한 부분일거요. 교회에도 그런 일 있어요. 그러나 이 비유가 광범위로 하는 얘기는 다시 한 번 잘 생각할 것은, 이 세상에는 좋은 씨가 뿌리워 있는데 그 좋은 씨만을 뿌리는 이는 인자인데, 거기에 또 좋지 못한 씨, 불신자라는 말이 아니라 가라지를 덧뿌렸단 말씀이오. 좋은 씨와 꼭 모양이 같으나 좋은 씨가 아닌 것을 뿌렸다 그 말씀이오.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에 대한 얘기는 없어요. 여긴. 그걸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고로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알곡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는 가라지 그리스도인이다. 알곡 그리스도인은 인자께서 땅 위에 심으신 자들이오. 가라지 그리스도인들은 즉 알곡이 아닌 가짜,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같이 꼭 흡사하게 뵈고 행동하는 사람들, 그것은 악한자, 마귀가 심은 것이오. 원수가 심은 것이오. 악한자의 자식들이오. 원수의 자식들이오. 마귀의 자식이라 그 말씀이오.
이 세상에 예수를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자기의 철학에 의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오. 그러나 그 사람들보다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가운데 진짜가 아닌 가짜, 가라지 그리스도인들은 현저하게 마귀의 자식이다 그 말이오. 여기서는 그런 거룩한 도리를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이오. 그러므로 이 가라지, 좋은 씨와 가라지에 대한 비유를 우리가 늘 잘 상기하셔서 이 가라지의 얘기는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오 가라지는 악한자의 아들들이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끝이오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리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7-43).
이 가라지 비유에 대한 해석을 우리 주께서 했는데, 가라지 비유를 볼 것 같으면 다시 한번 생각할 건 이 세상에 우리 주께서 천국의 자식들을 뿌려놨어요. 세상에서 잘 자라서 튼튼하게 열매를 맺으라고. 그런데 거기에다 가라지를 덧뿌렸단 말씀이오. 그 밭에다가. 이 세상에 가라지를 그 위에다가 또 뿌렸단 말씀이오. 그런고로 가라지를 알곡과 함께 뒤섞어 놓았어요. 세상에는 진짜 그리스도인들과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말씀이오. 생활 근거도 같고 교회도 함께 다니고 그래요. 이런 일에 있어서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다 그 말이오. 여기서는 교회 안에는 가라지가 있는 것이니라고 그렇게 명문(明文)으로 쓴 것이 아니고, 밭은 오히려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밭에다가 인자가 좋은 씨를, 좋은 씨만 나도록 뿌렸는데 가라지를 덧뿌렸으니 세상의 한 부분으로서의 교회를 또한 의미한다 그것이오. 그러나 이건 세상에 있는 진짜 기독교인과 사이비 기독교인의 공생, 더불어 공존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오. 진짜 그리스도인은 천국의 아들들이지만 사이비 기독교인은 악한자의 아들들 즉 마귀의 자식들이오. 현저하게 그건 마귀의 자식들이오.
그건 뭔고하니 이 세상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그랬어요. 누가 넘어지는 거요? 넘어지는 것은? 진짜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오. 그 하는 일을 보고서 그것이 기독교인 줄 알고, 중생을 했으되 아직 거룩한 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그냥 따라가는 것이오. 그러니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이 가라지 때문에 넘어지는 일이 많아요. 그리스도인 같이 다 모양을 하고 다 살고 하지만 거기 진짜가 아니라 말이오. 진짜가 아닌 까닭에 자기 속에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오. 그게 뭐냐 하면 마귀의 자식들이오. 마귀가 이와같이 자기의 자식들을 이 세상에다 뿌려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면 그 일을 모방해 가지고 그와 같이--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천사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을 하니까 사탄도 마치 하나님이 그 거룩한 사역을 제가 맡은 것처럼 가장을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속게 하려는 것이오.
광명한 천사라, 광명한 천사, 하늘로부터 온 사자, 광명한 사자인 것 같이 사탄이 한다 그 말씀이오. 그냥 천사라고 할 때는 우리 눈에 늘 뵈는 것 아니니까 그것이 조금 관계가 먼 것같이 생각되지만, 천사라는 말이 원래 사자(使者)라는 말과 꼭 같은 것이오. 멧신저(messenger), 광명한 사자로 턱 가장을 하는 거란 말씀이오. 하늘의 사자로 가장한 것이오. 그러고 가라지를 덧뿌려 놓고 가는 거요. 가라지를 덧뿌리고 광명한 사자로 가장해서 그것이 이 세상에서 함께 사자인 체 하는 사탄과 그 자식들과 하나의 큰 세력을 만들어 가지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늘 해치는 짓을 하는거요.
마귀의 그 국권조직이라는 것이, 큰 권세를 가진 조직이라는 게 신과 신들과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오. 그렇게 하면서 땅 여기저기를 두루 다닌다 말씀이오. 벧전 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욥 1:7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두루 다녀요. 사탄이 가지고 있는 인격자로서 이와같이 일을 하는데 이번에는 저 혼자 하는게 아니고 큰 인격과 높은 지위, 큰 권세가 있어요. 행 26:18절 보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거기에 사탄의 권세라는 것이 있어요. 사람이 암매해서 어둠 가운데 있을 때 사탄의 권세가운데 처해 있는 것이오. 엑쑤시아(έξουσία), 높은 권위, 지위를 가졌어요.
유다서 9절에도 “천사장 미카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적이지만, 높은 권세를 가진 까닭에 함부로 말을 않는다 말씀이오. 대군 미카엘도 그래요. 천사장 미카엘도 사탄을 대해 가지고서 모세의 시체 때문에 서로 변론할 때도 사탄보고 네 이놈, 개놈, 쇠놈 그렇게 욕을 않고 “주께서 너희로”, 오히려 말을 점잖하게, 훼방하는 판결을 함부로 못 썼다 그 말이오. 네 이놈, 네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게 아주 모욕적으로 말하는 그 말을 함부로 못 쓰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너 하는 일이 악하다.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사탄보고 이놈 저놈 자꾸 함부로 말하는 것이 그렇게 썩 좋은 일이 아니요. 적이지만 높은 권세를 가진 자인 까닭에 적의 왕인 까닭에, 그 권세가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요.
그는 어떻게 큰 권세를 가졌느냐 하면 이 세상을 자기 팔에 누이고 있고 이 세상에 의해서 권세를 가지고 흔들고 있어요. 엡 6: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 주관자들 곧 이 어두움의 권세자들과 공중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 세상 주관자들이라고 그랬어요. 사탄의 휘하에 있는 이 조직체, 잘 조직돼 있는 사탄의 휘하에 있는 자들 곧 정사자, 권세자,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 코스모크라토르(κοσμοκράτωρ), 세상의 주관자, 그런데 그것은 어둠에 있는 자라 그 말이오. 공중에 있는 악의 영들, 엡 6:12절. 이것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라 그거요. 싸움의 대상이 사탄 하나가 아니오, 사탄과 사탄의 그 휘하에 있는 많은 군대와 더불어 싸운다 그거요.
우리는 사탄을 공부하니까, 사탄이 하나면 다 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니까 왕이고 큰 왕이고 굉장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 말씀이오. 엡 2:2절에도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대의 풍속을 좇고(공중의 권세 잡은자) 공중의 권세 잡은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라는 영이라.” 여기 공중의 권세 잡은자라는 이 말은 공중에, 공중에서 집권하는 자들의 주관자, 즉 공중에서 집권하는 자들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대표적인 단수를 쓴거요, 복수인데.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들이오. 공중에서 권세를 잡은 자들이오. 그런 자들의 주관자, 그 주관자들을 너희가 따랐다 그 말이오. 온 세상은 그 악한자 안에 처한 것이다고 요일 5:19절에 말했지요? 단 10:12-13절 보면 파사국군이라, 파사국의 프린스(prince)라, 이건 이제 해석을 해보면 사탄이라 말씀이오. 파사국의 대군이 영광의 천사를 스무하루 동안 막았었다는 얘긴데, 이 파사국 군(君)이라, 임군이라, 싸-르(דשׂ), 히브리말, 싸-르 말� 파라쓰(סרפ תכלמ רשׂ), 파사 나라의 싸-르라, 이 프린스, 싸-르라는 것은 물론 그 위에 있는 최고의 대통치자라는 건 아니나 군장이라 그 말씀이오. 한 임군이라 말이오. 싸-르라는 것은. 미카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썼어요. 군(君)이라 해서 대군 미카엘이라. 파사국의 대군, 큰 임금이라 말이오. 파사국의 대군은 누구냐, 미카엘을 수년 동안 못 오게 막은 그렇게 큰 권세, 큰 능력을 가졌다 그 말이오. 요컨대 그 때 파사국에서 잡아 흔들고 있던 사탄인데, 하나님의 백성의 수호자로서 큰 권세를 맡아 가지고 다스리고 있던 미카엘을 그가 다니엘에게 가서 모든 것을 가로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큰 오묘한 도리를 전진 시키려고 하는 것을 막았다 말씀이오. 그런데 그 미카엘에 대하여 말하기를 미카엘 아카드 하싸림(םילשׂח דכא לאכימ), 싸-르의 하나라. Michael one of the chief princes, 하리쇼님(םינשׁאר ), 그러니까 미카엘 곧 대군들 가운데 하나요. 그런데 여기 그런 싸-르가, 파사국의 싸-르가 있다 그 말이오. 그리고 말� 파라스, 파라스라는 나라의 싸-르, 대군(大君)이라 말이오. 같은 계위(階位), 같은 싸-르라 그 말이오. 싸-르라고 이름 부르는 prince라 말이오. 왕위, 군주.
셋째로 우리가 생각할 건, 그러면 사탄은 잘 통재된 국가를 가지고서 큰 조직체를 가지고 움직인다 하는 사실이오. 그 나라가 있는데 눅 11:18절 보면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희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해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얘기 했어요. 막 3:23-26절,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마 12:26절에는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 낸다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희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사탄이 나라가 있다는 걸 이렇게 예수님은 여러 번 분명하게 말씀했어요. 사탄의 나라가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분쟁하지 않는 나라라는 걸 가르치는 거요. 저희들끼리 서로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내쫓느냐?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이 사탄을 안 내쫓는다. 그러면 그 나라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 어떤 나라든지 그렇죠? 어떤 나라든지 임금이 자기를 스스로 내쫓지 않는다 그 말이오.
그런데 이 사탄은 제 나라의 왕인 동시에 또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세상, 이 세상의 왕이오. 그냥 세상, 온 세상이란 말보다, 그냥 세상이란 말보다도 이 세상, this world, 이 말을 아주 주의깊게 썼어요. 이 세상의 왕이오. 온 세상은 그 악한자 안에 처하여(κεϊται)있다. 누워있다 그 말이오. 세상이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에 팔에 이렇게 누워있듯이 누워있는 것이다. 세상이라고 하는 건 그렇다. 요 12:31절에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나니 이 세상 임군이 쫓겨 나리라”, 요 14:30절에도 “내가 이후에는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물론 마귀가 순식간에 예수님을 시험할 때, 눅 4:6절에 “마귀가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당신에게 드리리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런 소리를 했어요. 이 세상은 자기 팔에 뉘여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가 원하면 줄 수 있다 하는 소리를 했다 말이오. 제가 소유한 건 아니니까, 제가 주고 말고 할 건 없지만, 적어도 그 말이 거기에 속임수에, 또 일말의 사탄이 이 세상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것이오. 과연 온 세상은 그 팔에 누워 있으니까 자기가 강탈을 하고 혹은 강제로 혹은 무리하게 제 소유가 아닌 것을, 이 참람한 짓을 하는 거요.
요 16:11절에도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이 세상이라고 그랬어요. 이 세상, 호 알콘(ό αρχων), 호 알콘 투 코스무(ό αρχων τοΰ κόσμου), this world, 또 이 세상이라고, 혹은 이 세상 신이라고 그랬어요. 이 세상, 이 세상 신이라는 말은 사실은 이 세대의 신이란 말이오. 고후 4:4절, “이 세대의 신이 믿지 않는자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의 영화로운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하느니라”하는 것은 이 세대, 투 아이오노스(του αϊώνος), 이 세대, 그 아래 아주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건 거라사 지방에 그 군대 사귀들렸던 사람의 얘기를 보면 알아요. 막 5:9절,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군대니이다”, 레기온(λεγιών). 신약에서 레기온이라는 것은 어떤 몇 사람이라든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많은 수, 그래가지고서는 수천 명, 옛날 로마에서 한 레기온은 로마의 군대 편성에서는 6,000명을 가지고 한 레기온을 만들었다고 그래요. 한 사탄을 6,000명으로도 만들고 만 명으로도 만들고 전시에는 편성은 대체로 같으니까. 군대라,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군대라는 말은 영(營)이라는 말하고 비슷해요. 같은 말이오. 마 26:53절에 “내 아버지께 구하여 열두 영(한 군이오, 한부대,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지 않겠느냐” 그런 말, 영(營)이라는 말. 그는 공중에서 권세를 잡고 있다고 그랬어요.
엡 2:1-2절,“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이 세상의 세대를 좇고” 그 말이오. 풍속이란 말은. ways of this world. 카타 톤 아이오나 투 코스모 투투(κατα τόν αϊώνα του κόσμου τουτου), 이 세상의 세대를 좇고, 즉 이 세상의 시대상에 의거하고 그 말이오. 세상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들의 머리, 즉 지금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들의 그 머리를 너희가 따랐으니 그 말씀이오. 이게 다 대표적인 단수를 썼어요. 복수의 내의(內意)를 다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대함이라” 이런 말을 했는데, 우리가 씨름을 한다, 팔레(πάλη), 막 손과 손을 잡고서 막 밀고, 맞잡고, 둘 중에 하나가 죽게 단병접전(短兵接戰)하듯이 들어붙어 가지고 그러는 거요. 정사, 알카스, 공중에 권세잡은 자라는 말과 비슷한 알카스, 여기에 공중의 권세 잡은자, 알콘타(άρχωντα), ruler, 알카스, 권세, 엑쑤시아, 권세들이라 그 말씀이오. 정사들, 권세들,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즉 세상 사람 주관자들, 코스모크라토스란 말이오. 코스모크라토스 투 스코투스(κοσμοκρατωρ του σκοτους), 즉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란 그 말이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더니 이제는 빛이라.
예수님께서도 눅 22:53절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의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골 1:13절에도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그 말씀이 있는데 흑암의 권세, 어두움의 권세 가운데 죄인들은 처해있던 것이오. 여기 알케(άρχη), 정사자들. 그 다음에 엑쑤시아, 권세자들. 알케는 정사라, 엑쑤시아는 권세자, 알카스 알카이이, 영계에 있는 프린스란 말이오. 엑쑤시아, 엑쑤시아는 권위자들이다. 마귀의 궤계는 뭐냐하면 엡 6:11절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하여” 했는데, 그 12절 이하의 영계에서 일대 국권조직으로써 빛의 나라를 대적하는 것이 그들이오. 이에 대전하기 위하여 우리는 씨름을 하되, 씨름처럼 서로 손을 움켜쥐고 발로 걸어서 넘어뜨리는 것이오. 먼거리의 사역이 아니라 그 말씀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 우리가 이제 곧 보면 여기서 이제 하나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결론은 뭐냐하면 마귀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어서 권세도 혼자 쥐고 있는 게 아니라 큰 국권 조직을 가지고 있고, 그 국권조직을 가지고 있는 큰 사탄국의 휘하에, 마귀의 휘하에는 정사를 잡은자들, 마귀의 정치를, 큰 프린시스 마귀의 제후들 혹은 분봉왕들이 있고 또한 권세를 맡아가지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는 자들이 있고, 또한 어둠의 세상을 주관하는 자들이 있고, 공중에 있는 악한 영들이 있고, 이런 것이 마귀의 큰 조직체계 가운데 있는 것들이오.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을 땅에다가 뿌려서 땅에 있어서는 현저하게 그리스도인인 것같이 확실히 보이고 그런 영역을 가지고 있으나, 진짜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의 거대한 국권조직의, 강한 마귀의 촉수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항해서 싸우는 데 중요한 분자들로 늘 처해있다 그 말씀이오.
이것이 우리가 보는 마귀의 거대한 조직체인데 그런 이 모든 조직체와 종들을 자유롭게 구사를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해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역하려고 하는 것들을 가지각색의 방향, 방법으로 못하게 하는 데 가장 유효하고 능력있는 방법이 물론 속이는 것이오. 속이는 것, 그 일에 생각을 불어 넣기도 하고 자기의 종들 속에서 귀신들이 들어가서 일을 해 가지고 사람들이 마음 가운데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그릇된 교훈을 퍼뜨리기도 하는 것이고, 귀신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있지요. 또한 사람의 마음을 가리워서 복음의 영화로운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하는 캄캄한 어둠을 가지고 택하신 자들을 할 수만 있으면 어둡게 해서 진리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중요한 방식이고, 마귀의 화전이 있어서 화전을 가지고 쏴서 믿음이 연약한 자나 믿음의 방패를 튼튼히 가지지 못한 자에게 불질을 해서 불을 일으키고 그가 불에 타서 인간의 정욕과 분노와 인간적인 옛사람적인 불이 활활 타올라서 그래서 하나님의 역군으로서의 충실한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고 악마적인 고통을 맛보게까지라도 하는 거요.
그뿐 아니라 자신은 구원의 말씀을 사람의 속에서 될 수 있으면 빼앗는 일을 열심으로 하는 것이오. 만일 말씀을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기지 않고 한 귀로 듣고 들은 정도로 넘겨만 두면, 한 개의 직관으로 넘겨두면 마귀는 와서 공중의 새가 길가에 있는 씨를 딱 쪼아 먹어 버리듯이 마귀가 와서 곧 빼앗아 갈 거요. 말씀을 들을 때의 태도도 정성을 들여서 그 말씀을 꼭 간직해 가지고 저 속 깊이 잘 심어서 충분한 자양을 가지고서 장성케 하려고 아니한다 할 것 같으면, 말씀에 대해서 방관적인 태도, 비판적인 태도로 냉정한 태도를 취하면 한가지 사실은 분명해요. 그 사람이 예수를 아무리 잘 믿었든지 못 믿었든지 간에 마귀가 와서 싹 집어가 버린다 말씀이오. 그게 마귀가 하는 일의 하나요.
그리고 누구한테 하느냐하면 자기 손 앞에 걸려 있는 사람만 싹 그러고 마는게 아니라, 그 큰 지혜와 그 큰 신속한 능력을 가지고 이 땅을 어디든지 두루두루 돌아 다니면서 어디 오늘 내가 삼킬 자가 있는가 하고 훌떡 집어 먹을 자가 있는가, 내 수하에 들어갈 자가 누군가 재빨리 찾는 것이오. 마귀가 그렇게 찾으니까, 왕이 그렇게 하니까, 그 휘하에 있는 귀신들도 될 수 있는 대로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들어갈 곳을 찾고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이오. 사실상 마귀는 하나뿐이오. 하나인 까닭에 무소부재(無所不在)하지는 못해요. 어디든지 다 있는 건 아니오. 마귀가 있는 자리에 있으면 다른 데는 없는 거요. 마치 사람이 한 군데 있으면 다른 데 없듯이. 그러나 마귀는 공중에도 가고 땅 위에도 있고 또 마귀의 휘하에는 수 없이 많은 악한 영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또 땅 위에서의 인생 가운데는 특별히 가라지라는 마귀의 자식들이 있단 말이오. 그래서 그것이 어디든지 퍼져 있고, 어디든지 이 귀신들은 돌아다니는 까닭에 실지로 총사령부에서 명령일하에 전군이 손과 발과 같이 움직이듯이 움직이는 것이고 전체에 대한 보고를 신속하게, 군대가 전쟁에 나갈때 곧 전선을, 전신(電信)을 이용해 기지고서 후방에다 전황을 보고해 오듯이 속속 보고를 하게 되니까 마귀는 큰 능력과 큰 지혜를 가진 자로서, 사람과 같은 것이 아닌 까닭에, 2,000년 동안 죽은 일이 없고 죽어진 일이 없고 계속적으로 공작을 하는 그런 신인 까닭에 참 귀신같이 알고 앉았는 거요. 마귀는.
때를 따라서는 광명한 천사인 체 하고 나타나는 데 아무 데라도 쏙쏙 나타나지는 않아요. 광명한 천사를 바라고 천사와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에게는 광명한 천사인 것으로 나타날 것이고, 천사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것 효과 없는 얘기요. 다만 광명한 천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도 영광의 사자들, 복음의 사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진다 할 것 같으면 그거야말로 마귀는 광명한 천사인 체 하고 스스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자기의 가라지들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과 자기의 일군들을 의의 일군인 체, 의의 교역자들인 체 해서 내보내는 거요. 거기 의의 집단인 체 혹은 의의 일군인 체하는, 일군이란 말은 집사라는 말로도 됐고, 교역자란 말이오. 의의 교역자, 즉 그걸로 거기에 영향을 받고 그와 관계를 하는 사람에게 늘 나타나는 것이오. 관계없는 사람에게 괜히 나타나서 떠들지는 않아요. 가장 유효하게 일을 하는 게 마귀요.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유대인의 회라 하지만 실상은 사탄의 회라” 하는 말과 같이 하나님을 공경하기로 모인 회라고 하면서 모여 있는 것은 사탄의 카알(להק)이라 그 말이오. 묵 2:9절과 3:9절에 그 사탄의 예배회가 있어요. 예배하는 회, 종교회요. 종교의 회요. 예배하는 회인데, 교회인데, 사탄의 교회란 말씀이오. 유대인의 회란 말은 synagogue란 말이고 그런 유대인들이 예배하는 교회란 말이오. 유대인들. 유대인의 교회라고 하지만 실상은 사탄의 회가 있다. 그런 걸 보면 사탄의 교회가 있다 말씀이오.
그뿐 아니라 그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예수를 잡아 줄 뜻을 가룟유다의 마음에 두듯이 어떤 생각을 집어 넣어주는 것이오. 쏘삭쏘삭하니 생각이 일어나게 한다 그 말씀이오. 이것이 가장 유효한 방식의 하나요. 유효한 방식. 생각을 넣어준다 그거요. 전연 자기가 생각지 아니한데도 생각케 한다는 것이 가장 무서운 방법인 것이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해 가지고서만 악을 행하는 게 아니라, 마귀의 생각을 받아서 기묘하고 기발한 생각을 내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크게 해를 끼치는 수가 있는 것이오. 그는 지금 불순종하는 자들 속에서 역사하는 영들을 다 거느리고 있는 까닭에, 엡 2:2에 불순종하는 자들의 속에서 지금 역사를 하는 영들이 다 있다 말씀이오. 역사한다는 말은 에네르게오(ενεργεω)라 그랬지요? 에너지를 공급한다, 능력을 자꾸 부어넣어 준다. 자기 자신이 불순종하는 자들 속에서 역사, 힘을 공급하는 영을 거느리고 있을 뿐 아니라 가르침을 준다 그 말씀이오.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딤전 4:1-3에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다는 말이 거기 있어요. 귀신들이 다 가르치게 만들었다 말이오. 가르치는 귀신도 있어요. 하나님의 가장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사탄이 밀 까부르듯 그 사람을 얻어서 까부른다 말씀이오. 눅 22:31절, 밀 까부르듯이 까부른다 말씀이오. 어느 때는 사람의 병이, 사실상 사탄의 그 큰 올무에 있는 사람에게서 병까지 생길 수 있는 것이오. 모든 불행을 사탄이 그 어두움으로 꽉 막아 놓으면 어두움 가운데서 제가 스스로 자꾸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면서 자빠지고 넘어지고 해서 불행을 스스로 사는 거요. 그래서 “사탄의 권세에 눌려 가지고서 앓는 사람도 있다.” 여기보면 귀신들려 앓는 사람도 있지만, 직접 귀신들려 앓는 사람도 사탄의 권세하에서 앓는 사람이오. 행 10:38 볼 것 같으면 “저가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치셨으니”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셨다. 병고쳤다 그 말이오. 어떤 병은 이렇게 마귀에게 눌려 가지고 나는 병을 고쳤다 그 말이오. 또 사탄에게 매인, 18년 동안 매인 자라해서 눅 13:16절에 있지요? 귀신들려 앓고 꼬부라져 못 일어난 사람도 있다 그 말이오. 그리고 죽음의,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요. 히 2:14절. 또 하나님의 거룩한 산업이고 그 백성을 대적하여 서는 자요. 대상 21:1절 말씀. 그는 사람을 시험하는 자요. 언제든지. 시험하는 자가 와서, 눅 4:2, 마 4:1. 올무가 있어요. 잘못하면 그 올무에 사람들이 걸리기 쉽게 올가미를 놓았다 그 말이오. 마귀의 올무에 걸리라고. 딤전 3:7, 딤후 2:26.
그 사탄이 그 마음에 정신을, 생각을 불어 넣는 점에 있어서는, 자기가 그게 사탄의 생각을 지금 고취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아주 미미한 것 같은데 큰 일을 일으키는 것이 많이 있어요. 그 대표적인 예 하나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얘기요. 행 5:3절을 보세요. 행 5:3절을 보면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그 간단하게 속이는 것 하나가 사탄이 가득하여 속였다고 그랬거든요. 이것은 “사탄의 세력이 가득하여” 그 말일텐데, 사탄의 그 큰 세력이 네게 가득해 가지고 그러느냐? 이젠 그런 용법이 히브리적 용법이니까, 성신의 충만이라 할 때 성신이 가득하니 들었다 그말보다는, 성신의 능력으로 충만했다는 말과 같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를 잠깐만 우리가 보고 넘어갑시다. 행 5장,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신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 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다 아시는 얘기요. 거기에 주동적인 일을, 아나니아가 그와같이 한 일의 장본인은 누구냐 하면 사탄이오. 그런데 사탄이 얼마만큼 일을 했느냐 하면 아나니아를 결국은 혼이 떠나서 죽을 만큼 일을 했는데, 그 한 일의 결과를 사람의 눈으로, 세상의 눈으로 가만히 볼 때는 대단한 일은 아니오. 이런 사람 지금 뭐 수두룩벅적해요. 그런데 이 수두룩벅적한 사람들이 할 만한 일 밖에 안했는데도, 이런 것이 사탄이가 하는 일이라 그 말이오.
사탄이 하는 일이 휘황찬란하고 굉장한 악을 행하고 하는 것을 사탄이 하는 일같이 생각하지 말라 그거요. 아주 평범하고 시시한 것 같은데, 문제는 그 평범하고 시시한 것의 효과는 거룩한 눈으로, 베드로에게 충만하신 성신님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 나라에 크게 해를 끼치는 일들이라 그 말이오. 우리는, 사람 보기에 시시하고 미미한 듯한 일이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 굉장히 해를 끼치는 일이 있어요. 터널을 저쪽에서 뚫고 이쪽에서 뚫는 사람이 조금만 비뚤어지게 뚫으면 나중에 절대로 만나지 못하고 딴 데로 뚫고 들어가는 것이오. 요렇게 처음에 조금만 비뚤어 놓는거요. 이게 사탄이 해 놓는 것이, 터널 뚫으려고 앞에다가 봉을 딱 놓고서는 방향을 정하고 나가는데 그 놈을 획 돌려 놓은 것 아니오. 조금만 각도를 비뚤어 놨어요. 그것만으로 넉넉해요. 처음에는 그놈이 조금만 비뚤어 놓으면 나중에 얼마든지 비뚤어지는 거요.
미국의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장난을 심하게 하는가 그 미국 거리에 보면 여기는 무슨 street 여기는 무슨 street 이렇게 썼거든요. 무슨거리 무슨거리 이렇게 해 놓았어요. 이건 어디로 가고 이건 어디로 간다고, 그런 팻말이 사방에 붙어 있어요. 그런데 그 놈을 아주 단단하게 시멘트 콘크리트에다 깊이 쇠말뚝을 해 박아 가지고 쇠판으로 해서 하얗게 칠질을 해가지고 딱 도장 박듯이 박혀 가지고서, 구조돼서 가령 Spruce street라든지 이렇게 딱 쓴다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써놓은 팻말을 미국애들이 힘자랑한다고 이것 빼서 저렇게 돌려놓고 저것 빼서 이렇게 돌려놓고 해놨어요. 그러니 길을 찾는 사람들은 밤낮 차타고 돌아다녀봐야 찾을 길이 없는 거요. 딴길이 되어 버렸거든요.
처음에 서울 온 사람이 화신 앞에서, 이리가면 종로고 저리가면 남대문인데 그렇게 한 놈을 획 돌려 놓으면 남대문이 종로가 되고 종로가 남대문이 될 거라 그 말이오. 요렇게 획 돌려놔두면. 그러니까 종로에서 그 집을 찾으려고 남대문통에서 암만 찾아봐야 못 찾는 거란 말이오. 있는 일이오,흔히. 미국에서 장난꾼들이 그래요. 그랬는데 사탄이는 그렇게까지는 안해요. 그건 그래도 굉장하게 험악하게 한번 적어도 90도나 돌려 놓은 것 아니오? 90도 돌려 놓을 것 없어요. 10도도 못 되게 조금만 비틀어 놓아요. 조금만, 조금만 비틀어 놓으면 먼길을 가면 갈수록 갈수록 호리지차(毫釐之差)가 천리지차(千里之差)가 되는 것이오. 여러분 교회에서 분쟁이 나는 문제를 볼 때 교회에서 제일 처음에 의견이 갈리는 걸 보면, 진리와, 확실히 역사적인 진리와 그렇지 않은 방면주의라는 것이 처음에는 조그만 차이로 서로 갈라져 뭐 그게 나쁘냐 하고 이론을 다 해 보면 둘다 다 좋은 것 같이 생각돼버려요. 그러나 하나는 한사코 나쁘다 하나는 좋다하고 이제 갈라지고 보면 처음에 시작할 때는, 갈릴 때는 뭐 도무지 호리지차요. 일푼도 못 돼요. 일리 밖에 안 돼요. 그래 호리요. 조그마한 터럭만한 그런 이해의 차가 생겨요. 그러면 넘나들고 보면 뭐 크게 다를 것 없지요. 아주. 그러나 3년,4,5,6,10년 지내면 하나는 요렇게 비틀어져요. 이렇게 저렇게 타락하는 거요.
미국의 북장로교가 타락할 때 얼마동안에 타락을 했느냐면 말이오. 1925-6년대까지라도 아주 열렬하게 보수정신이었어요. 오늘날 미국 북장로교회가 다 훌륭한 지도자라고 모시고 있고 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금(1967)부터 40년 전에다가 갔다 놨으면 말이오. 1927년에다 갔다 놨으면 노회에서 전부 출교시켰을 거요. 그 때 노회로는 그 노회 자기네가 지금 있는 노회예요. 그때는. 왜냐하면 해리 에머슨 포스딕을 그 노회에서 출교시켜버리고 아주 그냥 파문을 시킨것이 1924년인가 되는데, 그 해리 에머슨 포스딕보다 더한 사람이 오늘날 북장로교회 신학교 교장 노릇도 하고 총회장도 하고 모든 걸 지도하고 앉았거든요. 그대로. 신학교 교수 노릇도 하고, 불과 40년 동안에 굉장한, 40년까지도 가지 않았어요. 사실. 30년 동안에 그렇게 변했는데, 30년 동안, 처음에는 조그만 차이로 논의를 했거든요. 조그만큼 오늘 일보를 양보하고 그 다음에 가서 조그만큼 그 자리에서 조금 양보를 해줘. 이렇게 해 가지고서는 차례차례 비끄러지더니 오늘날에 와서는 전연 자유주의로 돼버렸어요. 그래도 1967년은 미국북장로교회 연합 장로교회가 기념할 해요. 왜 기념할 해인지 아시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장로교회 신조로 붙들고 살았는데 이제는 신조를 새로 기초를 해야겠다고 오래전부터 기초 위원들을 내고 연구 위원들을 내고 연구시킨 결과 총회에서 결정을 해서 기초를 해라 해서 기초를 해 놓은 놈을 내놓았다 그 말이오. 총회에다가. 총회에서 의논을 해가지고 65년에 의논을 해가지고, 67년부터 이것을 유효하게 하자 해서 1967년 신조라고 이름이 붙었다 그 말이오. 아주 1967년 이라는 그 햇수까지가 붙어있어요. 금년이 그 해요. 그건 종래에 가지고 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없애버린 건 아니오. 그 사람들이 없애나요. 사도행전도 없애지 않았는데 왜 신앙고백서를 없앨거요? 다 그대로 두는 건 역사적인, 일단 자기네 교회가 경과했던 고백서로서, 표준문서로 두어두고, 1967년 것을 가지게 됐어요. 그거 가지고 그와같은 일은 호리지차가 천리지차로 변한다는 것이오. 신앙고백서가 변하기까지 인제는 자유롭게 총회는 완전히 “전통과 묵은 것이라는 것은 의미없다.” 포기할 수 있게 됐다 그 말이오. 이게 지금부터 30년 전이면 생각이나 할 일이오?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오. 그런 사람 막 내쫓느라고 볼일 못 봐요.
그러나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브로드웨이 교회의 목사가 전통과 복음을 막 강렬하게 주장한다고 뉴욕 노회가 모여서 거금 40년 전에는 자유주의를 말한다고 쫓아내던 그 노회가 이 사람 복음주의 한다고 해가지고 쫓아내 버린 걸 여러분 아시죠? 그러니깐 교회가 막 들고 일어나 가지고서는 싸움을 하는 얘기가 한참 타임잡지에 났어요. 그 귀결이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그러나 노회에서는 파문해 버렸어요. 쫓아내 버렸어요. 너하는 것이 법에 어긋났다 그거요. 그 때 1935년, 6년, 7년대든가 닥터 메이첸, 그레샴, 라봇 딕 윌슨 박사나 이런 이들이 일어나서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로, 명교수로 있으면서 신학교가 이제 부패해가지고 그릇된 것을 자꾸 도입하고 그릇된 사상을 자꾸 학생들에게 전파하게 되니 이러면 안 되겠다 하고서는 들고 일어났어요. 일어나니까 어떻게 했지요? 결국은 옥신각신한 끝에 교회에서 왜 잠잠하라 하는데 잠잠하지 않고 끝까지 항의했다고 왱왱거리느냐? 나가거라. 끝내 결국은 내쫓아 버리지 않았어요? 내쫓아서 그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서 새로 교회를 조직해 가지고 아메리카 장로교회라 하니깐 미국 북장로 교회에서 그것도 고발했네, 이름이 꼭 북장로 교회하고 같다고. 영어로 할 것같으면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그러면 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해 놓으면 USA가 곧 아메리카이니깐 이것은 혼동되어서 안 된다. 그렇게 이름 도용하면 안된다. 그러니까 메이첸 그룹이 깨끗하게 그러면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우리는 정통 장로교라고 이름을 딱 고쳐 버렸다 그 말이오. 그러고서는 필라델피아에 와서 거기 어떤 부자집 하나를, 개인이 살던 집을 사가지고서 그 놈을 개조해 가지고 신학교를 만들어 가지고 이름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라, 지금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그렇게 된 것인데, 만들었지요. 그 사람들이. 그래 그 때 찰스 어드만같은, 과거에는 명성을 날리던 총회장하고 하던 사람, 그런 이들이 아주 강경하게 메이첸을, 그가 정통을 한다고 내버린게 아니라 법을 어긴 까닭에 내보냈다. 뭣 때문에 법이 존재하느냐 하면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바로 전파하기 위해서 법이 존재하는 것이오. 교회의 법은 그런 의미를 안 가지면, 자체의 존립과 존재만을 위한다면 의미 없는 것이오. 그러나 바로 전파하고 바로 세우자 하는 사람을 내쫓아 버리고 법을 지키겠다고 자체를 잘 유지하겠다고 하더니, 유지는 잘 하는데 자꾸 큰 단체가 되는데 자꾸 다른 것과 합병해가지고 그 대신 속속들이 썩어 들어간다 그 말이오. 처음에 시작한 때는 아주 미미한 데서 시작해요. 교회 부패도 그런거요. 그래 가지고 쭉 흘러내려가는 거요.
사탄이가 어떤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서 그 마음을 주장할 때 그 사람이 환장한 사람만이 되는게 아니라 가장 미미한 반응, 가장 미미한 차이를 일으키는 때가 있어요. 별 것이 아니오. 그러나 초대교회와 같이 순결하고 순수해서 완전히 일치돼 가지고, 사도의 가르침하에서 이제 비로소 모든 것의 전통을 수립하는 시기요. 모든 것의 패턴을, 모든 것의 전형을 지금 세워주는 시기요. 그런 데서 헌금하는 것 하나만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이 와서 이렇게 하면 아, 그 사람 꾸짖어서 그렇게 못하게 하고 전형만 새로 세웠으면 될 것 아니냐 하지만, 만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냥 용서를 받든지 책망만 받는 정도에 그쳤으면 많은 교인들이 그로 말미암아서 유혹을 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이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라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대단한 것 없어요. 돈을 더 벌려고 한 일도 없고 자기 이익을 별나게 따볼려고 한 것도 없고, 요구했다는 것은 명예 하나 얻으려 한것이오. 나도 전부 안 내놓고 전부 내놓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나 받을려고 한 것뿐이오. 그것도 뭐 대단한 것 아니오. 뭐 칭찬 받아 가지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있는 전장(田粧)을 팔아대서 내놓으면서 지금 하는 일이거든요. 하나님 앞에 내놓는데 거룩한 것으로 생각지 못하고 마치 제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서 명예를 살려고 하는 것 같은 태도는 그것은 헌금의 본보기에서는 천리나 만리나 멀리 떨어진 것이거든요. 그것이 마치 하나님과 무엇을 교환하려고 내놓는것 같은 그런 태도, 그것 아주 절대로 불가한 것이오. 왜냐하면 헌상이란 것은 거룩한 것이오.
거룩한 것이라고 할 때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consecrate한다, 하나님이 잡아서 쓰시기에 아무 구애가 없이 완전히 내놓는 것이라는 뜻이고 전부를 내놓는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히 내놓는다 그 말이오. 있는 것 다 바쳐야만 헌상이 되는 게 아니라 가령 돈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 놈을 완전히 내놓는 것이고, 둘째는 있는 그대로 내놓는 것이오. 이것이 consecrate하는 거요. 이렇게 돼야 하나님께서 바로 쓰실 수 있는 거요. “주여 이것이 쓸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이렇게 너절 합니다. 이렇게 부족이 많습니다. 이렇게 심히 미약합니다. 하지만 있는 이대로 내놓습니다.” 이것이 인제 거룩하다는 것의 초보인 것이오. 그런데 그걸 속일 때는 안 되는 것이오. 이걸. 저는 있는 대로 내놓습니다 그거요. 그러고 거기다가는 자기에게 있는 정성이나 정신을 거기다 담아 가지고 내놓는 것인데, 과부에게 있는 그 피천 한 잎을 내놓을지라도 자기 마음에 있는 정성을 전체를 거기다가 대표해서 담아서 내놓는 것이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있는 그대로를 안 내논 것 뿐이오. 말하자면, 한마디로 말하면 그거 부정직하다 그거요. 명예를 탐하는 나머지 그저 아닌 것을 그런 것으로 가장을 해서 내놓았다. 있는 것으로 가장했어도 교회에 그것 때문에 손해될 것이 없지요? 내놓았으면 내놓은 만큼 유익아니오?
오늘날 서울 장안에 있는 큰 정통 교회에다 대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이 있어서 자기의 큰 재산을 대부분 팔아가지고 그 중 어떤 부분을 자기네가 먹고 살려고 놔두고 대부분을 내놓았다 할 것 같으면 그러면서 이것이 나는 있는 것 전부요 하고 내놓았다면, 그것 있는 것 전부냐? 하고 따질 목사 하나도 없을 거요. 감사합니다. 참 고맙습니다 두 손 합장하고서 받을 거요. 받고서 하나님 축복을 만 번이라도 빌고 그럴 거요. 거룩에서 벗어나는 일이라 말이오. 자기 자신이 거룩한 것을, 거룩한 걸로 그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돈으로 사겠다고 생각한 거요. 모독하는 거요. 어떤 사람이 임금을 보고, 임금님 그 임금님 자리 나하고 좀 바꿔 앉읍시다. 내가 돈 천 냥이나 있는 사람이니까 가장집물(家藏什勿) 내가 팔기라도 해서 내가 드릴테니 그놈을 받으시고 그 임금님 자리를 나하고 좀 바꿔 앉읍시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님 옆에다가 돈좀 받고 앉혀 주십시오. 만일 엄정하고 바른 임금이었다면 괘씸하다고 생각했을 거요. 이놈이 돈을 가지고 정승판서의 자리를 사려고 한다고. 부패하고 타락한 국가는 그것도 하는 거요. 나중에 허다하게 돈가지고 매관매직 다 해버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와 같은 일이 사탄이가 사주를 해가지고, 미미한 일 같지만 항상 큰 결과를 사탄은 노리고 하는 까닭에, 아나니아가 이게 제가 저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사탄이가 저 속에다 생각을 잔뜩 넣어가지고 다른 여념이 없이, 이렇게 하면 무엇이 된다는 것을 비판하거나 생각할 여지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오. 그것이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했다 하는 말 뜻이오. 비판할 여지가 있고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아, 이래서는 안 되겠는데,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내놓는 것이지, 누가 지금 강제로 내놓는 사람도 없고, 밭을 내가 팔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내놓기 싫으면 안 내놓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니오? 밭 팔았을 때는 네 것 아니냐 그 말이오. 대체 누가 너한테 강제하더냐 그 말이오. 밭이 그대로 있을 때는 내 밭이고, 팔았을 때도 내 것이다. 다 팔았으면 판 돈은 내 것 아니냐? 아, 그런데 뭣 때문에 내가 내 것을 가지고서 자유롭게 못하고 무엇에 내가 지배를 받아 가지고서 이거 딴 소리를 하느냐? 아, 내 것 가지고 내가 왜 거짓말을 하느냐? 판 돈이 이것 뿐이다고. 판 것을 이것 뿐이라고 거짓말하게 된 데는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서 자유롭게 하는 그 자유가 없어졌다 그 말이오. 다른 것 하나가 지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게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는데, 왜 자유롭게 않고 마치 아닌 것을 긴 것 같이 이렇게 말하느냐? 아, 아닌 것을 긴 것 같이 말할 이유가 어디가 있느냐? 그럴 까닭이 뭐냐? 대체. 아 내가 판것의 10분지 9를 여기 내놓습니다 했으면 그게 더 좋지 않느냐? 그랬으면. 그런데 왜 10분지 9를 내놓는다고 말 않고서는 10분지 9를 가지고 10분지 10이올시다 이렇게 말하느냐?” 그것 뿐이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그 죄는. 다른 것 없잖아요? 여기. 다른 죄를 자꾸 나열하려고 억지로 만들 것 없어요. 또 베드로가 책망한 것도 그 밖에 없어요. 밭이 그대로 있을 때도 네 밭이고 팔았을 때도 네 것이다. 그러니 내놓을 때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느냐? 내놓고서는 내놓은 것은 이만큼이다 하고서 내놓았으면 그만 아니냐? 그런 사람이 계속해서 서있어 가지고, 그건 뭐냐하면 죄 가운데 극형이면 사형 아닙니까? 교회에 해를 끼치는 일 가운데는 교회의 생명에 저해를 줄 수 있는 까닭에 사형이라 그 말이오. 아나니아의 한 일은 미미한 9칸을 가지고서 10분지 9를 가지고 10분지 10이라고 열이다 하나다 말한 것이겠지만 그 죄의 값이 얼마냐? 절대 공정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비춰 볼 때는 살인자는 대사(代死)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귀는 귀로요. 목숨은 목숨으로요. 아나니아는 목숨으로 바꿀 죄를 지었다 그 말이오. 그건 뭐냐하면 그 교회, 이것은 모든 죄가 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지만, 그러나 이 경우에 아나니아가 영원히 형벌을 받았다는 그것을 여기 얘기할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고 이렇게 정할 건 아니고, 다만 그 삶의 한 행동, 그것이 징벌이라고 할지라도 육신의, 세상에 있어서의 육신의 목숨이 거기서 떨어져 버릴 만한, 내외가, 육신의 목숨이 떨어져 버릴 만한 그러한 중대한 작죄를 했다하면 그 작죄가 무엇이냐? 그 죄의 정도가 뭐냐하면 교회에 대해서 목숨을 던지는 일이라 그 말이오. 눈은 눈이라 그 말이오. 교회의 눈을 뺐으면 아나니아의 눈이 빠질 게고 교회의 목숨을 건드려서 죽이려고 했으면 아나니아가 죽어야 한다 그 말이오. 살의를 품었으니까 살인했다 그 말이오. 살인했으니까 대살(代殺)당하는 거란 말이오. 이건 하나님께서 보이신 거룩한 법 아니오? 사람을 죽인자는 용서없이 죽일지니라 그랬다 말이오. 오살(誤殺)을 한 게 아니고 고의로 죽였으니 마음에 사탄이 가득해 가지고서 아나니아가 한 그 가장 미미한 일 하나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면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키는 일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말이오. 사실상 교회의 생명을 목을 조를려고 한 일이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너는 그 대신 목숨이 떨어져라 그거요. 그게 공정하지 않아요? 그게 구약의 법 아니오? 율법에 의거해서 정당하게 목숨이 떨어지려면 목숨이 떨어질만한 생명형을 당하는 것이오. 교회의 생명을 해치려고 할 때. 그러면 거기서 돌아가서 아나니아의 한 일이 뭐 얼마나 대단하기에 교회의 생명을 해치는 일인가? (끝부분 녹음 테이프 없음).
마귀에 대하여
제6강
<<우리의 사명과 장애>>
딤후 3:1-17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알고 따라가고 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 교회가 이 시대에 가진 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각성하고 그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며 우리의 향하는 목적 혹은 목적지, 목표는 무엇이고 그리로 향하는 길에 장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상고해 나가는 길인데, 우리의 행진에 장애를 일으키는 마귀나 이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주의해야만 할 것을 생각해 나가는 것이올시다.
마귀라 할 것 같으면 항상 하나님의 자녀를 향해서 그 자녀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혹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목적을 향해 전진하는 것, 진행해 나가는 것을 저해하는 데 주력을 하는데, 우리가 교회로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명을 각성하고 목표를 세우고 전진한다 할 것 같으면, 목표를 세우고 전진해 나아가는 데 필연적으로 여러가지 마귀의 장애와 시험, 올무가 있을 것이며 우리의 정도에 따라서 그것은 교묘한 궤휼로 또 어느 때는 광명한 천사인 체 하는 가장을 하고 나타날 것이므로 그런 때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명확히 간파해서 적의 모든 궤계를 파쇄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올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영광과 권능을 구체적으로 이 땅위에서 이것이다 하고 증시하고 나아가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함에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시대에 처해 있는가와 그 시대의 성격과 그 성격으로 말미암은 우리에게 향한 도전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 거기에 대처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시대에 처해 있고 이러한 도전을 받는 사람들인 까닭에 어떻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뜻과 그 나라의 사명을 좀더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가르치게 되는 것이올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그 나라의 목표와 거기에 향해서 나아가는 사명의 행진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일반적인 말씀의 거룩한 뜻이 우리들 자신의 발 앞부리, 한 발을 떼려고 할 때 거기에 적용해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어떤 방향을 취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행진의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오.
지난번에도 우리가 상고한 바와같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 때 막연한 이야기가 되지만 구체적으로 한 발을 이제부터 앞으로 디디려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할 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일반적인 그리고 기본적인 원칙을 가지고, 한 발을 디디려고 하는 내 발 앞뒤의 현실들을 잘 정사(精査)해서, 정밀히 검사해서 거기에 대하여 어떻게 태도를 취하고 행하는 것이냐 할 때, 나 자신의 적극적인 태도와 행진이 거기서 자생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오.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거요. 이렇게 해서 나는 어디로 갈는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막연히 앉아서 “하나님 나에게 뜻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앉았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와 계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는 태도가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막연히 앉아서 게으름피우는 사람이나 속수무책으로 그냥 막막히 호천망극(昊天罔極)하는 사람이 모든 걸 다 알 수 있게 보여주시지 않는다 하는 것을 우리는 배웠어요.
그런 이유는 우리를 지으시되 우리가 이성이 없는 짐승으로 혹은 다만 사람으로 지으신 게 아니고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변화된 영혼의 기능의 발휘는, 즉 우리에게 발생한 여러가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의 발휘라는 것은, 이 믿는 사람만이 아니고, 가령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사고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또 분석할 수 있고 그래서 가치를 판단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까닭에 누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바로 보고 깨닫고 느끼고 아, 이렇다 하고 확실한 목표를 정하고 하는 것이 사람의 가지고 있는 그 특권이고 사람의 인간 본성의 구체적인 발휘라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자식은 하나님 자식으로서의 또한 다른 말로 말하면 명철이라는 말 그것이 혹은 철학자들은 오성이라 하는 말을 많이 썼지만 그 하나님 자식으로서의 명철을 필연적으로 발휘해야 한다 말씀이오.
이렇게 하나님의 자식으로서의 명철을 발휘해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를 알아볼 뿐더러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와 여러 가지 내용이 나의 처해있는 곳에서 나를 통해 나를 쓰셔서 또한 나타내시려고 할 때에는 나라는 건 누구냐? 나는 어디에 처해 있느냐? 나는 어떤 시대에 처해 있느냐? 하는 것을 잘 알아서 내가 처해있는 곳이나 시대나 또한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나 나의 전체의 존재의 가치라는 것을 항상 비추어서 거기서 ‘아,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이것을 나타내시려고 하는구나.’ 그 사람의 가치와 그 능력의 발휘라는 것이 꼭 정확하게 동일하지 아니한 까닭에 사람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마음 가운데 자기의 사명이라고 느끼는 점이 같지를 아니하고, 거기에 따라서 그가 신념을 가지고 움직이는 일도 같지 아니하고 따라서 그의 향방이 같지 아니한다 말씀이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좀더 확대해서 생각하면 교회가 전체적으로 다같이 공동으로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해야만 할 거룩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알기를 원하시는 바가 있어서, 그것을 교회가 공동으로 처해있는 처지와 시대에 비추어서, 자기 앞에 있는 여러가지 사실들에 비추어 그것을 자세히 미루어 살피고 판단하여 확실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전진한다는 점에 있어서 교회적 사명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말씀이오. 그런 까닭에 이런 점을 주의해서 우리 교회가 처해있는 역사적인 한 시대(period), 거기에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기 위해 지금 우리의 주위에 있는 것과 내 앞에 있는 것과 내가 일보 발을 디디려고 할 때 눈 앞에 뵈는 것들이 갑자기 발생한 것들이 아니고, 생겼다가 곧 없어지는 것들만이 아니고, 오히려 거기는 연원이 있고 깊은 생각을 가져서 역사를 통해 흘러온 여러가지 사실들이 많이 있어서, 사실상 하나님 나라의 진행과 우리의 사명수행에 장애를 일으키는 자는 그런 것들이라고, 중대한 장애를 놓는 건 그런 것들이라고 분명히 구별해 내어야 하는 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그것의 근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불의와 암흑과 또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영광의 발휘를 저해하는 가장 강한 근원이 되는 마귀 혹은 사탄에 대해서 먼저 바로 알고, 둘째로 그것이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오늘날 우리에게 손을 미쳤는가, 즉 수천 년을 통해서 어떻게 손을 뻗어가지고 밀고 나와서 마침내 오늘날 우리들이 사는 이 시대에까지라도 손을 뻗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동안 서로 의논하고 생각하고 상고한 나머지 우리가 사탄에 대해서 여러 시간을 공부를 했는데, 이제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사탄이 어떠한 자, 어떻게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큰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잘 조직된 국권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사탄의 휘하에 있는 많은 정사나 권세 혹은 흑암의 세상 주관자 또한 공중에 있는 악한 신들 그뿐더러 세상이라는 밭에다가 뿌려놓은 가라지, 곧 악한 자의 자식들 그것들이 다 일대 진용을 구성하고 조직해서 항상 구체적으로 조직적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서 그것들도 힘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을 땅 위에서 구체적으로 능력있게 증시하고 나아가려고 하는 일을 대립해서 항상 싸워 나가는 것이다 말씀이오.
사탄이 자기 휘하에 있는 수많은 인생들을 데리고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아니해요. 인생들은 그의 올무 가운데 있고 그의 권세 아래 있어서 헤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필요한 때에는 그가 자기의 원하는 자에게 가장 큰 효과 또한 가장 큰 작용을 해서, 사탄의 걸작도 있고 사탄의 쓰는 자들도 있고 사탄이의 도구로 많은 해악을 인류와 사회와 역사 위에 끼치는 자들도 있는 것이지만, 일반 인류 대중이라는 것은 대체로 사탄이 자기 휘하에 놓고 자기의 소욕, 즉 자기가 대처하고 대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과 그 자녀들의 정당하고 바른 목적을 향한 진행을 늘 저해하는 데다가 필요한 대로 이용하고, 필요한 대로 같이 마주서서 저항해 나가는 것이오.
까닭에 우리의 대적은 하나의 인격자를 생각할 때는 사탄이지만 그러나 적의 진용이라는 것은 사탄을 왕으로한 대 진용이고 그것은 동시에 사탄의 휘하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큰 세력의 일부라는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한 개의 중요한 장애의 요소로서 늘 존재해요. 그건 인류가 선한 일이라든지 의로운 일을 구체적으로 고의로 장애를 하려고 나서서 그러는 것보다는 부지불식간에 사탄의 팔에 누워서 그의 의사대로 움직이는 점에 있어서 그렇단 말이오.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그 악한 자에게 처하여 있는 것이다.” 그 팔에 누워 있어서 그가 안고서 멋대로 한다 그 말이오. 이렇게 온 세상이라고 할 때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화나 기구 또 가지고 있는 모든 가능성, 가동성을 의미하는데 사탄이 사실상 하나님이 직접 통재하셔서 쓰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대립해서 세상을 별달리 쓴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크신 그 신비한 거룩한 뜻 안에서 사탄은 또한 그것을 자기가 쥐고 흔들게 되었다 말씀이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사탄을 그냥 방치하신 것은 아니오. 가장 세세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녀의 머리터럭 하나까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시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탄이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왜냐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고,- 그것을 자기의 그 악의 목적, 분명히 악한 그 목적을 위하여 마음대로 남용하고 혹은 사탄의 눈으로 볼 때는 아주 유효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역시 하나님께서 용허한 사실이오. 하나님의 절대 대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오. 그러나 그럴지라도 즉 사탄이 하나님과 대립된 이원적인 상태를, 이원적인 무슨 처지를 얘기하는 건 아니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탄의 존재와 사탄의 사역을 어떤 한계 안에서 용허하신 까닭에 사탄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지금도 계속적으로 공작을 하고 우리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말씀이오.
이렇게 사탄이 이 거대한 대적이라는 것, 왕왕이 흔히 교회에서나 다른 데서 말하듯이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은 늘 하나님 당신에게 증오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거역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도리가 아니지만, 우리가 중요히 생각할 문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곧 사람,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계획대로 진행하는 그 사람이 가장 큰 사탄의 공작과 대적의 대상이 된다 그 말이오. 결코 하나님이 사탄의 대적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것같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오. 어찌됐든지 우리에게는 그만큼 사탄의 대적이라는 건 적극적이고 크고 위험하고 능력적이라는 것을 바로 인식하고 깨닫고 있어야 할 것이오. 그의 높은 지위라든지 그의 권세가 마침내 이 세상 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고, 이 세상 왕으로서 우리 자신에게 항상 올무를 놓고 속이고 넘어뜨리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바른 목적을 향한 행진을 늘 그르치려고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올시다.
사탄이 하는 공작의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고 할 때 그 속임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이미 배웠는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서 상고한 것같이 사탄은 사람에게 악을 권한다든지 착하지 못한 것을 권해서 속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권하고 착하지 못한 것을 권할 때는 누구든지 그것이 악이요 착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저항하게 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사탄이 위험하게 수단을 쓸 때 항상 선과 미덕과 훌륭하다는, 가치있다는 일로 사람을 권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위해 시간과 정력을 사용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거룩한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 말이오.
그런 점에 있어서 그의 속임이라는 것은 항상 어디에 주의해야 하느냐 하면 가치있고 선하고 아름답다 하는 일들을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오.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와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악이 나에게 와서 유혹한다 할 때, 불의가 유혹한다고 할 때에는 강하게 대처하고 저항하려고 하지만, 사탄은 자기 휘하에 있는 귀신들과 혹은 그 가라지들이나 자기의 종노릇하고 있는 수많은 도구들을 사용해서 사람에게 가지각색의 방법을 다 써서 자빠뜨릴 수가 있는 것이오. 반드시 어떤 한 방법만 쓴다고 우리가 단언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악이라는 것의 유혹도 안 받는 건 아니오. 악은 악일지라도 거기에 미가 있다든지... 소위 탐미주의자의 유혹이라는 게 주로 그런 것이오. 그게 악이라든지 선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따질 게 아니라 그것이 미냐 추냐를 따져서 가령 곡할지라도 미가 있으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란 말이오. 그러나 그건 악으로써 유혹했다는 것보다는 미라는 것을 가지고 늘 유혹하는 것이오.
그러면 사탄이 여러 가지 방식을 쓰겠지마는 우리가 항상 경성해야 할 점은 그의 거짓이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 착한 것, 의롭다고 하는 것들이 나타날 때 주의해야 할 것이오. 다른 말로 사이비(似而非)진리라든지 사이비 선이라든지 하는 것이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사이비 진리라든지 선이라든지 의라든지 하는 말은 거기에 진리나 선이나 의라는 확실한 표준이 선 이후의 이야기요. 그것이 안 섰을 때에는 사이비라고 말을 붙일 것이 없어요. 그것도 진리요. 그것도 선이오. 그것도 미라는 것이오. 이처럼 미가 아니라는 확실한 크라이테리아가 섰을 때야 비로소 사이비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이것이 절대적이고, 이것 이외에는 아니다 하는 주연(周延, distribute)된 사상이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닌 것이오. 모든 것이 미라 할 때 이것은 미가 아니다 하는 주연된 사상, 주연된 판단을 할 수 있으려면 그런 확신이 있는 만큼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표준과 거룩한 도리에 상당히 깊어야 할 것이오. 가령 우리가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어떤 말을 단정적으로 즉 절대적인 용어, 소위 논리학상 주연된 용어를 가령 ‘이것이 미고 이것은 미가 아니다’ 이렇게 말을 하려면, 첫째는 그 정의(definition)라는 것이 분명해야 하고 그 정의는 필연적으로 어떤 조건들 즉 요소(element)들을 명확하게 듣고 나서야 하는 것이오. ‘미라고 하면 이러이러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미라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미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논리를 세운 다음에야 하는 것이오. 그런데 ‘이러한 크라이테리온(척도)으로 이 미를 재보았더니 길고 짧고 부족하니까 이것은 미가 아니다. 이렇게 하면 비로소 이것은 사이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아름답다 한다. 그러니까 이건 사이비다’ 이렇게 말을 할 것이오. 그렇게 하자면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그 지식에 의한 확신을 준비시켜야 하고 그것을 가져야 마땅한 것이오. 그런데 사람들의 세계에서 반드시 그것이 사이비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오. 사람들이 이것이 진리다, 선이다, 미다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바 선이라는 것이 참 많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바 참된 선이라든지 미라든지 그건 뭐냐? 이런 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야 해요. 마귀의 시험, 거짓으로 말미암은 올무에 걸려들지 아니하려고 할 것 같으면 무엇보다도 어떻게 생긴 것이 참된 것이며 어떻게 된 것이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이냐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해요. 마귀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가 철두철미 거짓이다 하면 그건 되지 않는 말이오. 사람들을 속이려면 거짓만 가지고는 못 속이는 것이오. 거기에 다분히 진실을 허위와 뒤섞어 가지고 던지는 데에 항상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말이오.
사탄이 스스로 변하여 광명한 천사인 체 하는 이 때, 사탄의 모양 가운데 광명한 천사의 모양이 있고 사탄이 빛을 발할 때 광명한 천사와 같이 빛을 발하고 사탄이 얼굴을, 혹은 태도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취하고 할 때 천사인 것같이 취하는 점에 있어서 천사의 요소를 상당히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천사와 같이 빛이나고 천사와 같이 옷을 입었고 천사와 같이 얼굴을 곱게 대하고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말을 하고 천사와 같이 부드러운 손을 대었다면, 천사라는 것이 또한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오. 그런고로 사이비 천사라 할 때는 그것이 사탄은 철두철미 천사의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다 그런 말은 아니오. 거기는 천사의 여러 가지 것을 많이 가지고 있을지라도 긍극적으로 천사가 천사된다는 가장 주연(周延)되고 가장 특권적인 즉 독점적인 요소가 항상 빠지는 점에 있어서만 사이비가 되는 것이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사이비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엄격하게 논리를 하자면 사이비라고 하는 것보다는 완전하지 않다 그 말이오. 사탄은 항상 불완전한 천사요. 사탄은.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해서도 사이비 진리라는 말, 그건 무슨 말이냐 하면 진리라고 할 때는 이러이러한 것이어야 할텐데 곧 진리가 될 독점적인 요소가 결핍된 그 여타의 진리에 준한 허다한 다른, 가령 선천적인 논식에 부합하는 이론이라든지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생활 경험을 통해서 얻은 바 일반 생활의 진실이라든지 생활의 공리(公理), 원칙(axiom)이라든지 그런 것이 섰을 때 그걸 누가 진리가 아니라고, 이건 절대 사이비라고 그렇게만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오.
철두철미 아닌 것을 긴 것 같이 가장하는 점도 있다고 하겠지만 가장한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가장한 부분만은 진짜의 것을 모방한 것인 까닭에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말이오. 엄격하게 말하면 옛날 헬라 철학자들의 말과 같이 “흰 말은 말이 아니다” 하는 말로 자꾸 따진다면 결국 모든 것이 아니면, 절대로 요것만이 아니면, 그것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아니라. 그러니까 흰 말은 흰 말이지 어째서 말이냐 하는 말이 될거요. 백마는 비마(非馬)라 하는 말. 그렇게 궤변을 자꾸 하기로 하면 한이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흰 말도 검은 말도 노랑 말도 말은 말인 것이오. 그런데 다만 그것이 흰 말이 아니다 그것뿐이오.
그러니까 사탄의 이론도 이론은 이론이고 그것은 논식에 맞는 것이고 어필(appeal)하는 것이고 그만큼 이론적으로 수긍할 데가 있는 것이오. 예를 하나 들어서 가령 신학상 이론이라고 합시다. 사탄이 위에서 사주해서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다는 말, 오늘 우리가 읽었는데 가령 귀신의 가르침을 좇아서 만든 신학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상당한 정도의 수긍할 만한 이론, 그 논리 자체는 항상 수긍할 근거가 있는 것이오. 거기에 논리(logic)라는 것이 없었다면 수긍할 수가 없는 것이오. 만일 거기에 논리라는 게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거기는 수긍할 만한 논리적인 결과, 또한 논리적인 결과인 까닭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후천적인 논식에 의하면, 사고의 형식에 의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말이오. 이런걸 가지고서 호소하고 들어오는 것이오.
여러분은 근대 18세기 이래로 일어났던 성경 고등비평이라든지 신학상 소위 자유주의라 해서 떠드는 여러가지 이론들도 만일 그것을 자세히 읽고 주의해서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허황한 말, 신빙할 수 없는 말, 건달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니오. 그 사람들도 재주있는 사람들이고 공부한 석학들이고 시간과 정력을 들여서 궁구해서 살펴 노력해서 만들어 내놓는 이론인 것이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모든 사람, 누가 보든지 일견(一見)에 그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같이, 도깨비 이야기같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말이오. 도깨비 얘기와 같은 부분이 없는 건 아니오. 왜냐하면 그 독일 사람들 벨하우젠(Wellhausen), 그라프(Graf)학파가 자꾸 이론을 해나가는 것이 소위 추정(inference)이라는 것, 추리 위에다가 자꾸 전제를 세워 가지고 그 전제 위에서 그 다음에 논리의 결론을 자꾸 추출해 나가는 까닭에, 결국 그 가지고 있는 전제라는 것이 한 개의 추리(inference)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것이 결국 밑둥어리가 없는 집과 같고 기초가 없는 집 같아서 무너지는 것이다 그 말이오. 발코니에다 집을 지은 것이오. 그러나 그 발코니까지는 볼 것이 아니고 그것을 교묘하게 은폐를 해 놓아서 보통 사람이 봐 가지고 모르는 것이오. 그냥 봐 가지고서는 거기 아주 다분히 수긍할 만한 여러가지 내용이 있지 그 근거까지를 드러낼 만큼 투철히 꿰뚫어 볼 수 있는 기능자 아니면 모르는 것이오.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론이라는 것이 기초가 없는 집과 같아요. 그 체계라든지 그 논식에 의한 이론의 전개든지는 아주 번듯해요. 그리고 문학적으로서도 훈련이 된 사람들이고 유능하고 재주있는 사람들이라 말을 구사하는 데도 퍽 용의있게 하고 조리가 있게 어느 때는 그것이 이치적으로도 찬탄할 만하게 잘 쓰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가 항상 대단히 미약한데, 그 근거를 따지려면 거기 표면에 얼른 나오는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통 눈을 가지고서 생각할 때는 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논리의 형식에 의존해서 일을, 사물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오. 우리의 가지고 있는 이 판단의 작용이라는 것은 우리의 가지고 있는 심리의 작용인데 그것은 가령 선험적(先驗的)이라고 할지라도 논리의 형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 논리 형식(logical form)이라는 것이 주로 작용하는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의거해서 그것이 아니다라고 할 때, 진리라고 할 때에는 진리라는 건 저절로 그것을 누가 건드릴 수 없이 존재하는 건 아니오. 진리라는 것은 그것이 이론이라 혹은 어떤 이치라 하지만 이치는 그것이 틀림없이 운용되고 성취된다는 점에 있어서 반드시 힘을 전제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힘이라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지 않으면 진리라는 건 존재 않는 것이오. 진리란 말은 그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라는 말이고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은 사실이 존재하게 하는 에너지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오. 이 힘이라는 것은 모든 진리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오. 하나님의 이름도 역시 ‘엘로힘’(םיהלא)이라고 하는데 여기 엘(לא)이라는 말은‘힘’이란 뜻인데, 힘이라는 것이 먼저 있어요. 그리고 힘은 어떤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작용한다 할 때 그 일정한 법칙이라는 것이 항상 목적적이고 의도적인 까닭에 목적과 의도를 가진 구체적인 인격의 발휘라는 것을 상상케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근원이 반드시 힘이 있는 그리고 이지(理知)를 가진 어떤 한 인격자에 의해서 흘렀다는 것을 상상해야 하는 것이오. 그런데 그런 근거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이론을 쌓아올려 가지고 이론의 결론으로서의 한 실재론, 리얼리즘(realism)이라 하는 한 이즘(-ism)에다 근거를 두었을 때 그건 신은 아니오. 그건 하나의 관념이지 인격자는 아닌 것이오. 그런고로 한 개의 아이디어(idea)에다 근거를 두고 나온 이론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논리의 형식에 대단히 어필(appeal)한다고 할지라도 자체가 진리성은 안 갖는 것이오.
우리는 흔히 이론(理論)으로는 그런데 실제(實際)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를 해요. 왜 이론과 실제가 다르냐 하면 힘의 작용은 그렇게 안 되더라는 말이오. 지내보니까 이론으로 추리한 데까지는 우리가 지실(知悉)하고 그런데 우리가 추리한 이상의 다른 원인과 다른 프레미스(premise)가 있는 모양이오. 그래서 실제로의 작용은 그렇게 안 되 더라 하는 말인데 이론은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은, 이건뭐냐 하면 항상 이론은 곧 진리가 아니다 그 말이오. 이론 그것 자체가 반드시 진리가 되는 건 아니오. 그런고로 이 근대의 신학자들이 얘기하는 여러 가지 내용이 논리의 형식에 찬란하게 부합하고 위대한 논리의 지능을 표시한 것만큼 찬란할지라도 그것은 훌륭한 이론은 될지 몰라도 진리가 아니다 그 말이오. 왜냐하면 힘을 수반하지 않는다 말이오.
왜냐하면 예를들어 동정녀 탄생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보통 말할 때 가장 이성적(rational)인 것이오. 가장 합리주의적이오. 이론으로는 그것이 수긍될 만한 얘기요. 동정녀 탄생했다는 얘기는 오히려 이론으로 볼 때, 사람의 논식으로 볼 때는 억설이 될 것이오. 그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하지만 이론은 그런데 실지로 동정녀 탄생을 예수께서 하시지 아니했다 하는 것을 진리라고 한다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모든 것의 근거인 주된 원인이 무너지는 것이오. 그러면 별다른 기독론(christology)을 가져야 하는 것이오. 우리가 별다른 christology를 가지고 사실상 그런 부인이 강하게 사방에 퍼져가지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별다른 관념을, 별다른 이유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 말씀이오. 미국의 유명한 연합 장로 교회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과거에는 그것을 강렬하게 옹호하던 그 신학과(科) 같은데서 오늘날에는 공공연하게 그것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사람이 지금 프린스톤(princeton)에 많다 말이오.
그러면 그것을 부인하고, 부인한 것을 그대로 받아서 그것을 그대로 품고 그 나머지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퍽 궤변적인 것들을 신학이라고 배워가지고 교회를 먹이고 수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한 그 사람들이 한 개의 교회를 형성했든지 혹은 많은 신자들이 됐든지 가정하고, 그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역사를 통해서 동정녀 탄생을 믿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역사를 운전하던 신앙 진리를 위해서 의를 위해서는 감연히 나가서 목숨을 바치면서 활동해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를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힘들이 과거의 100년은 벌써 더 지났는데, 이와같은 이론이 100년 동안 이런 일이 있느냐? 100년 동안 그런 일이 있느냐 그거요. 그동안 기독교의 핍박이 없어서 그랬나?
그러면 그런 이론이 가장 많이 발생했던 곳이 독일인데, 독일의 그 관념주의 철학자들의 영향과 그 독일이 가지고 있는 합리주의(rationalism)라는 것이 강하게 일어났는데 그 독일에서 기독교 핍박이 없었느냐 말이오. 여러분, 독일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중심삼아 히틀러의 괴악한 태도라는 것은 진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생활 태도를 취한 까닭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거기서 망명을 하든지 타협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됐어요. 사실상 거기에서 진리를 버티고 끝까지 확립하고 있던 신자들이 많이 있었더면 수많은 순교자가 날 만한 일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독일은 벌써 그 이전에 수세기 동안이나 점점 부패하고 타락한 까닭에 감연히 일어나서 히틀러와 더불어 싸울 만한 사람들도 아주 희소했다 말이오.
거기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어떤 목사가 히틀러에게 감금당해가지고 어쨌네 하지만 대단한 투쟁이 아니라 말이오. 그것만 보더라도 그 이전에 독일 전체가 가지고 있는 소위 힘의 철학에 의한 새로운 독일 민족, 게르만 민족의 대편성이라는 큰 역사적인 사실 앞에서- 그런 역사의 사실을 비판하고 일어난 사상가가- 세계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라는 것이, 게르만 민족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힘의 철학의 구현의 이상과는 어떻게 상충이 된다는 걸 하나나 말한 일이 있는가 여러분 기억해 보시라 그 말이오.
적어도 윌리암 I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프러시아 군벌을 중심삼아 게르만 민족의 대동단결을 만들어 가지고서 제국을 형성하고, 그 다음에 프레드릭 니체의 강한 영향을 받아 가지고 힘의 축적이라는 것과 힘의 구체적인 발현을 위한 고도한 도략을 계획해 나가던 그 독재주의, 세계 제패주의 그리고 침략주의, 그런 제국주의를 무인지경을 가듯이 탄탄하게 막 밀어 나가려고 할 때, 누가 일어나서 사상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의 목표를 가진다는 것은 국민에게나 국가의 존재의 의미로서는 대단히 미약한 것일 뿐 아니라 괴악한 것이다 하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신국적인 사상으로 비판이 한 번이나 일어 났었느냐 그 말이오. 이렇게 사상적으로 빈곤했다는 것은 벌써 부패 가운데 그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이러한 사실은 벌써 무엇을 증명하느냐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소위 그 합리주의(rationalism)라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무력하게 하고 시세에 아부하게 하고 어느 때는 아주 안이한 생활을 취하게 하였는가를 역사의 현실에서 보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의 이론이 옳다고 따라 간다면, 이 세상에 있는 강렬한 모든 비신국적, 반신국적 요소 앞에서 하나도 비판하거나 투쟁하거나 싸울 사람 없는 것이오.
그리고 나는 예수 믿는다고 예배당에나 열심히 다니고 찬송부르고 종교 행동만 몇 가지, 종교 의식 가운데 자기 스스로 탐닉하고 스스로 자기도취 가운데 빠져 있으면 그만일 것이오. 사탄이 요구하는 것은 그런 존재일 것이오. 스스로 자기도취 가운데 빠져서 나는 예배당 간다, 나는 환상을 본다, 나는 신과의 신비한 교제를 한다 하고 하나님 나라는 생각지 말라는 것이오. 역사 앞에서 증거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능력의 계시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 없다. 이러한 것들이 사실상 따져 볼 것 같으면 그 근원이 사탄의 뿌린 씨 가운데 물들은 까닭에 그렇다 말이오.
그런 까닭에 진리가 진리되지 못한다는 건 벌써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이오. 단순하고 소박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예수가 비로소 참 그리스도라는 바른 기독론(christology)이라는 것이 역사를 통해서 세계를 움직이고 세계에다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고 나갔다면 이제 역사적인, 이 역사론적인 기독교를 그냥 쥐고 있으려면 끝까지 그 간단한 얘기지만 그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오. 그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비로소 능력을 발휘했다 하는 점에 있어 우리의 진리인 것이오.
그러나 우리는 그 능력의 측정이라는 것을 관견(管見)해서는 안 된다 그 말씀이오. 때때로 신비주의자들의 발광적인 상태, 광신주의 자들의 열광 상태가 자기의 가정 기물이라도 팔아서 척척 내는 것이 마치 무슨 큰 능력의 발휘와 같이 보일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얘기 아니오. 내 자신의 몸뚱이를 팔아서 내놓는 것이 능력 있는 것 아니오. 문제는 사람이 먼저 역사의 성취에 대한 자기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알 뿐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하던 일들을, 즉 그의 역사적 족적을 볼 때는 자기 같았으면 못 움직일 것을 움직이면서 나갔다는 사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그와 같이 있다는 사실 이것이 진리, 즉 능력의 증명이 되는 것이지 그 능력이라는 것은 이론에 붙어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이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미 배운 것같이 하나님 말씀은 말 그 자체는 개념 전달에 불과한 것이오. 거기에 신통력이 붙어 있지는 않아요. 진리라고 하더라도 어떤 이론이 신통력을 스스로 내함(內含)하고 스스로 능력을 들고 다니는 건 아니오. 진리라면 그것이 일반적인 원칙하에서든지 특수한 원칙하에서든지 성신의 거룩한 능력이 동시에 작용한다는 점에서 진리, 진리성이 있는 것이오. 그런고로 항상 중요한 것은 말씀과, 이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쿰 베르보, cum verbo)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가 함께 한다 이것이 중요해요. 이러한 사실을 진리라는 확실한 테두리, 혹은 확실한 정의를 세운 다음에 그런 관점에서 그렇지 못한 걸 볼 때 거기에 이론의 요소와 논식에 부합하는 요소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른바 사이비 진리라 그 말이오.
진리라는, 한 이지적(intellectual)인 관점에서의 관찰로 한 예를 들었지만 가령 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요. 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결국 결론으로는 사이비라는 말을 쓸 수가 있는 것이오. 사이비라는 것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은 아니오. 거짓 선지자라도 양의 옷을 입었다 그랬어요. 양의 옷을 입은 까닭에 옷은 양의 것이오. 양과 똑같은 거라 그 말이오. 그런 점에 있어서 거짓 선지자도 양의 어떤 요소, 즉 옷이라는 부분에 있어서의 요소는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즉 형식에 있어서, 형태에 있어서, 혹은 형성해 나가는 것에 있어서만은 양과 다른 것이 없다 말이오.
이런 점에 있어서 거짓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가 가짜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항상 진짜인 것을 내함하고 그것을 가지고서 나타내고 진짜의 친화력(affinity)을 가진 사람들에게 늘 호소해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상 그 이름이 가르치는 바 가장 절대적이고 있어야 할 그 기본적인 요소가 결핍되었고 그 요소라는 것이 최후에 한마디로 능력이 결핍돼 있는 것이다 그 말이오. 마귀의 꼬임이라는 것은 항상 이러한 식에 있는 것이오.
어떠한 일을 이룰, 즉 하나님 나라를 거기 구현할 만한 능력이 거기 있느냐 하는 문제요. 마귀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에게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구현해라 하고 그 목적을 변경시키지 않고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방법을 교묘하게 제시할 것이오. 그러나 그 방법에는 능력이 뒷받침을 해주지 않는다 말이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거룩한 방법, 추리라는 것은 그건 추리인 동시에 반드시 능력을 전제로 하고 서있는 것이오. 이런고로 우리는 오늘날 마귀의 여러가지 속임이라는 점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들은 마귀가 속이되 사람 보기에 선하고 아름다웁고 혹은 참된 것들을 비슷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사실상 그런 것들의 상당한 부분을 자기가 갖다 뒤섞어 가지고서 드러내면서 취하라고 하는 것이오. 이런 데서 우리가 그것을 냉현히 바로 보려할 것 같으면 먼저 하나님 말씀의 거룩한 진리를 바로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이오.
그런고로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 바르냐, 무엇이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냐 그걸 분간해야 한다 말이오.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비어있지 않고 바른 것, 정당한 것, 마땅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 그렇지 아니한 것이 어떠한 형태로 왔든지 그걸 일일이 비판해서 어디가 그렇지 않다고 꼬집지 않을지라도 분간한다 말이오. 그리고 바른 것인 이상 또 다른 것을 우리가 수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오. 이것이 첫째 우리 교우들에게는 먼저 중요한 것이오. 우리는 마귀를 보고서 마귀의 작해라는 것을 비판해 나가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는 마귀가 어떤 일을 제시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일은 이렇지 아니한데 왜 이렇게 나오는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 나에게 마땅히 알기를 원하시는 것, 이것들을 먼저 가지고 있는 것이 기본적인 것이지 이런 것 없이 덮어 놓고 돌아다니면서 이건 마귀다, 이건 마귀가 아니다 할 시간이 없는 게고 허다한 많은 것, 변화무쌍한 것들을 자기가 일생 구별해 내려 하더라도 다 못하는 것이오. 그러니까 언제든지 무엇이 진리냐? 이것을 바로 가지고 있을 때 그것 이외의 것이 나를 꾀일 때라도 나는 상관할 것이 없는 것이오.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 교회가, 우리의 처해 있는 이 시대의 여러 상에 대해서 하나씩 더 배워 나갈 것인데, 배워 나갈 때도 항상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사상을 가졌으며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이것을 탐구하는 것이지 재미있는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오. 또 무슨 문명를 비판하자고 이 시대를 비평하자는 것도 아니오. 가령 시대를 비평하든지 문화의 성격이나 형태를 우리가 얘기하고 비판해 나간다고 할지라도 항상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경과 여건하에서, 상황하에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그것을 찾자는 것이오. 나에게 요구하신 것은 무엇인가? 결국 무엇을 내가 해야 할 일인가?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이 필요한 일인가를 바로 알기 위해 다만 도움이 되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찾아보자는 것이오. 기도하십시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이 시대에 여러 가지 사이비가 횡행하고 또한 우리들 시대의 처해있는 환경이나 주위에 있는 여러 가지 상태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고자 아버님께서 경성하기를 요구하시는데, 이런 일에 대해서 항상 주의를 하고 이런 일에 속속들이 깊은 것을 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떻든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잡다하고 착잡하고 혼돈하고 절망적이고 괴악하고 반신적인 반신국적인 여러 현실과 사실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그 나라를 역사위에 구현하려는 확실한 의도와 사명을 가진 저희들로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즉 아버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를 요구하시는지를 바로 알기 위하여 아버님께서 알려주시고 생각하게 하는 것들을 생각하고자 하오니, 성신님 저희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또한 공연한 길로 방황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늘 필요한 것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어서 아버님께서 저희들, 이 교회에 요구하며 알기를 원하며 또한 이 교회를 쓰시사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서 저희들이 알지 못하고 막막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고, 분명히 알고 각성해서 목적을 향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바로 전진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주여, 저희를 세우신 거룩하신 보람이 저희에게 있게 하시고 저희를 내시며 저희를 불러내신 거룩하신 아버지의 크신 뜻이 저희에게 체득되고 증험되게 합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귀에 대하여
제9강
<<마귀와 인간의 대결의 역사>>
에베소서 6:10-2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0-13). 여기 대적해야 할 대상은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해 전신갑주를 취하는데, 이 전신갑주를 취하고 직접 부딪쳐서 싸워야 할 자는 정사(τάσ άρχάσ)라, 알케(άρχή), 정사 잡은자, 즉 영계(靈界)의 존재자로서 지배권을 가진 자요. 영어의 magistrate라는 말과 같은데, 통치하는 자, 어떤 정치를, 행정을 잡은 자라. 그 다음에는 권세라, 이것을 영어에서는 principality, 이 말은 prince(국, 國)라 그 말인데 원래 한 prince가 지배하는 나라요. 옛날 봉건사회에 있어서 황제가 있고 그 아래 여러 공국(公國)들이나 혹은 분봉 왕들이 있어서 통치하는 지역들이 공국으로, 동양식으로 말하면 제후의 나라가 있고, 이것이 principality요. 그 다음에 권세는 권세자들 엑쑤시아스(Έξουσιασ)라는 말, authorities, potentates라는 말이오. 그러므로 권위, 권위자들, 유력자, 그것대로 자기 지역에서 주권을 가진 사람들, 또 정사와 권세와 그 다음에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라. 투스 코스모크라토스(τουσ κόσμοκράτοσ) 이렇게 했는데, 코스모크라토르(κοσμοκράτωρ)란 단어는 코스모스(κόσμοσ)란 말과 크라테오(κρατεω:점령한다)라는 말이오. lay hold of, 꽉 쥔다, 파악한다. 즉 이 세상의 군주(monarch)라, worldly prince, 불경건하고 불신의 세계에 있어서 현저한, 아주 쌓여 있는 power란 말이오. 힘이란 말이오. 그 다음에 공중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 프로스 타 프뉴마티카 테 포네리아스 엔 토이스 에포라니오이스(πρόσ τά πνευματικά τή πονηρίασ εν τοίσ επουρανίοισ). ‘에포라니오이스(επουρανίοισ)’를 다른 말로 하면 ‘타 프뉴마타 타 포네리아’(τά πνευματά τα πονηρία), 악의 영들이라, 영어로 evil spirits, 공중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악의 영들. 그걸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전신갑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신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기 좀더 적극적인 문제와 또 그 자신에게 구유(具有)해야 할, 그를 스스로 무장시켜 주기는 주나 좀더 적극적인 것, 그 무장 자체가 공격을 또는 적극적인 태도를 anticipate, 즉 예상한 것이 있고 그것보다는 자신의 단속만을 의미하는 것이 여기 있는데, “진리로 너희의 허리띠를 띠고”, 진실함으로 허리띠를 띠라, 참으로, 참된 것으로 허리띠를 띠라. 이건 사람이 죄가 있어서 부진실, 허위라는 것이 있을 때 진실이라는 것이 필요한 거요.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사람에게 죄가 전연 없다, 무죄하다, 아무 범죄한 일이 없고 순결한 인격자라고 할 때에는 특별히 이 문제가 논란이 되지 않을 거란 말이오.
아담의 경우,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경우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진실이라는 문제는. 왜냐하면 그때는 아직 허위가 없을 때요. 그것이 첫째고 여기 진실한 것, 진리라고 했지만 사실은 진실한 것이라든지 참이라든지 또 “의의 흉배를 붙이고”, 의(義)라, 아직 범죄하기 전까지는 당위(當爲)를 향하고 있는 아담으로서는 의의 문제가 간절한 문제로 되어 있지는 아니했을 거란 말이오. 불의가 있는 사회에 비로소 의라는 것이 문제가 늘 되는 것이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평안의 복음’이라 할 때 여기에 어떤 부분이 필요하고 어떤 부분으로서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같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오. 우리가 복음의 내용으로 필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속죄, 구속, 또 죄의 권세에서의 해방, 이런 것들이 다 필요 없는 것이오. 아담이 죄 짓기 전 같으면 아직 속죄를 요하는 상태가 아니오. 죄를 짓기 전 아담에게 있어서는 속죄할 죄가 없는 까닭에 그렇다 말이오. 아직 죽음이라는 것을 자기가 취하지 않은 이상 누가 대사(代死)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아직 아담에게는.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것을 그 때 요구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 말이오, 그 때는. 속죄라는 점에서만 그래요. 그런고로 불안하거나 요동하는 괴로운 상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오. paradise에 있고 가장 평안한 가운데 있었을 거요.
그 다음에 복음의 내용으로서 또 한가지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니까 다시 사심이 필요하다 하는 문제로 부활이란 것이 생겼지요? 그러나 부활의 증거라는 것은 죽음이 있었으니까 부활이 있은 건 사실이나, 가령 죽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이 그를 잡지 못하는 생명이라는 것을 증거했다는 점에 있어서 그 생명은 독특한 생명이라는 것을 보이는 것이오. 죽음이라는 게 있어 가지고 비로소 그 생명의 본질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걸 증명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이 없었겠는가 할 때 부활이라는 현상은 없어요. 죽음이 없으면. 안 죽었으니까 부활할 턱이 없다 그 말이오.
그러나 부활을 하게 한 그 생명, 부활을 요한 그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은 죽음이 있고 없고 간에 늘 있었던 것이오. 그리스도적 생명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부활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바 은혜는 우리의 부활이오. 동시에 죽음 가운데 있던 우리의 죽음에 해당한 죄악의 형벌, 죄책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씻었다는 이 복음의 크신 사실의 한 부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부분의 터 위에서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그 부활을 요(要)했던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복음의 또 한 부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오.
그런데 여기 보면 복음의 그 전반이라고 할 속죄라든지 죄에 관한 문제와는 큰 상관이 없는 게 화평이오. 화평은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할 때 그 복음의 한 부분, 즉 그리스도적 생명, 부활을 요하고 부활이 반드시 와야 할 그러한 그리스도적 생명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건 아담에게도 다같이 적용되는 얘기요. 그런고로 자기의 신을 신은 것과 같이 그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있어야겠고 생명으로 말미암은 행보가 필요하다는 것은 아담에게도 이제 필요한 얘기요.
다음 문제,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믿음의 방패’라는 것이 필요했겠는가? 믿음의 방패라는 게 필요했겠나 하는 문제요. 이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믿음의 방패가 필요했겠습니까? 아담에게. 믿음의 방패가 필요했겠나? 아담에게 무슨 화전이 있었겠는가 말이오. 악한 자의 화전이 있었나 없었나? 악한 자의 공격이라는 게 있었냐 말이오? 죄없는 아담에게. (있었죠). 분명히 있었죠? 아주 처음부터 그 화전이라는 건 필요한 것으로 나와 있어요. 그러자면 그 화전을 막아내는 무엇은 하나 있어야 겠다. 그러면 무엇으로 막아내야 하는고 하니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라고 했는데, 아담에게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라, 이것이 이제 중요한 요체(要體)의 하나요.
믿음의 방패라는 것이 언제든지 아담에게도 필요했다. 하와에게도 늘 필요했다. 저들에게는 평안의 복음 가운데 복음의 내용으로서의 그리스도적 생명이 늘 필요한 것과 꼭 같이 믿음의 방패는 늘 필요했다. 이것은 가장 요소적(crucial)인 문제였어요. 믿음의 방패가 있고 없는데 대해서 악한 자의 화전은 자기를 쏴서 맞힐 수도 있고 전연 자기에게 안 맞을 수도 있고 그런 것이오. 이것이 우리가 이 창세기 3장에서 나타나는 시험에 대해 해석을 할 때 중요한 표준의 하나요. 이런 걸 놓고 criteria를 가지고 늘 비추어 봐야 해요. 믿음의 방패라는.
또 “구원의 투구와”, 구원이란 게 필요했나? 큰 관점으로 볼 때 이상형의 인간상 가운데 도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아담도 그 목적을 향해서 가야 하는 것이오. 그런 의미로서는 필요해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는 의미로서 범괄적인, 총화적인 그런 의미는 아니오, 여기서는. 우리는 구원이라고 할 때 속죄라는 걸 크게 생각하는 것이오. “구원의 투구와.” 그러나 구원의 투구라는 것은 그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거와 같이 전부를 요하지 않을지라도 그의 Essence, 즉 인간의 생의 목표와 최후에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경계에 대한 필요는 아담에게도 절대로 있었다 그 말씀이오.
“성신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신의 검이 필요했습니까? 절대로 필요했지요. 왜냐하면 모든 무장 가운데 성신의 검이 가지고 있는 unique한 성격이 뭐지요? 검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격은 공격의 무기지요? 공격의 무기로는 그것 이외에 무엇이 있어요? 또 적극적으로 공격할 때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무기라는 점으로 이것 이외에 또 무엇이 있어요? 다른 것은 공격을 간접적으로 도울지언정 직접 공격하는 데는 검 이외는 없지요? 방패를 가지고 전쟁을 하기는 하는데 공격은 못하지요. 공격을 해 들어가는 데 돕기는 해도. 최후의 공격에서 최후에 적을 제명을 하려면 공격할 무기가 최후에 필요하다 말이오. 그건 검이오.
여기 방패는 buckler가 아니라 그랬지요? 여기는 shield요. 로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shield. 여기서 바울 선생이 생각하고 있는 방패는 shield라고 하면 큰 방패요. 굉장히 큰 방패요. buckler라고 하면 손방패인데, 둥그럼한 것. 여기서 쓴 용어는 shield, 넉 자에 두 자 반이나 되는 큰 놈으로 거기다 몸을 숨긴다 말이오. 그러면서 전진해 나가는 것. 그러니까 공격해 나아갈 때 악한 자의 화전이 빗발치듯이 나를 공격해 오면 막는 것이 이것이오. 이 방패를 가지고 막아낸다는 거요.
이 방패로 막아내는 것은 막아내 가면서 도망하는 것 아니오. 앞으로 가기 위해서지. 그러니까 방패도 항상 전진을 예상하는 거요. 전진을 상징해 주는 것이오. 전진을 상징해 주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최후에 직접 레슬링을 할 때 그 단병접전(短兵接戰)을 할 때- 우리의 씨름이라는 말을 쓰는 이 레슬링, 이 씨름이라는 말이 뭐 썩 좋은 말은 아니오. 우리는 씨름이란 분명히 스포츠에 불과해요. 스포츠 이외에 다른 씨름은 없지만. 혹시 옛날 우리 한국말로는 그 씨름한다는 말이, 갈등한다는 말을 씨름한다는 말로 한다 말이오. 말로 다툰다는 말이지. 그리고 그 일을 가지고 그이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씨름을 했네, 이렇게 말하는 건 그 사람하고 오랫동안 갈등하고 참견했다 그 말이오. 혹이 옛날말로서는 씨름이라는 말을 그렇게도 쓰는데 오늘날에는 말의 한 connotation이 점점 없어져서 씨름이라고 하면 스포츠를 먼저 생각하는 거요. 그러나 이것이 옛날에 씨름이라는 말을 쓸 때, 레슬링하는 것은 탁 치고 자빠뜨리고 밀고 이런거요- 단병접전을 하면서 손과 손으로 잡고서 싸우는 거란 말씀이오. 기독도가 골짜기에서 Apollyon(악마)을 만나 가지고서는 싸움을 하다가 어떻게 됐어요? 그냥 막 붙들고 싸우다가 나중에 그놈한테 다리걸려 가지고서는 막 아래로 깔려버리지 않았어요? 레슬링이오, 그게. 거의 죽게 되었다고.
그러면 이 방패라는 것이 역시 전진해 나아갈 때 이것이 최후에 늘 필요한 것인데, 이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전진해 나아가다가 최후에 싸움을 하게 될 때는 방패를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놓고서는 칼을 쥐고서 들어가 이제는 화전을 못 쏠, 쏠 수 없는 그 근접 거리, 가까운 거리에 들어가서 붙들고서 싸움을 하는 거라 말씀이오. 모든 것을 이렇게 자세히 꼭 싸움하듯이 참 신령한 전투의 코스가 다 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단언하기는 어려운 것이오. 모든 것은 한 개의 비유이니까, 비유를 쓸 때는 비유의 어떤 aspect, 어떤 면만을 늘 인용하게 하지 그것 하나하나 그냥 콩이야 팥이야 다 놓고서 얘기하는 것은 아니오. 그렇게 해석하는 건 또 좋은 성경 해석법이 아니오.
그러나 여기서 생각건대는 이 방패를 가지고서 전진한다 혹은 칼을 가지고 찌른다 하는 점에 방패와 칼이라는 것, 또 여기 구원의 투구라는 건 물론 구원의 그 높은 이상,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와 또 최후의 그 이상적인 지표 그것을 내가 머리에다 마치 투구를 쓴 것 같이 다른 어떤 ideology가 와서 나를 지배하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못하게 막아내야 한다는 이 구원의 투구라는 게 또한 필요하다 말씀이오. 이것이 또한 아담에게도 필요한 말씀이오.
그러니까 지금 아담에게 적극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신, 그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는 신이라. 거기 복음의 한 부분이 더 필요하다 그 말이오. 즉 그리스도적 생명이라는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행동한다. 생명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전진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구원이라는 ideology가, 구원이라는 principle이 항상 자기 머리를 전적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그릇된 관념론(ideology)에 영향(influence)이나 세력의 침입을 늘 막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적극적으로 오는 시험을, 저 마귀의 화전을 막아내는 데는 첫째는 방패요, 믿음이라는 방패요. 또 최후에 그 마귀를 대적하는 데 있어서는 “마귀를 대적하라”하는 말, 그 대적하는 데 있어서 검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검, 성신의 검이 필요하다. 그걸 우리가 이제 생각하고, 이제는 다시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지요.
창세기 3장 이전에 2장 16절, 17절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18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그 다음에 19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 때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거기까지 보는데, 2장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지금 사람과 마귀의 제일 처음 대결이라는 문제를 우리가 어제 저녁에 introduction으로 시작을 했는데, 이 대결이라는 점을 좀더 상세히 보고 그 다음 scene으로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여기서는 모든 것의 prototype(원형)이라고 할 것들, 이것은 그 후 역사를 통해서 늘 반복되고 그것은 또한 중요한 principle로 우리에게 파악되어야 할 문제인 까닭에 이것을 특별히 주의해서 보고 넘어가자는 것이오. 이 점을.
처음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거기 두셨는데 두신 순서가 어떤가요? 아담을 지으시고 두신 순서가.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두셨지요? 순서로는 어떻게 두신거요. 누가 먼저? (아담을 먼저).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두셨다 그 말이오.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두신 후에 아담이 인간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활동하기 전에 그에게서 갈빗대에서 취하여 여인을 만들어 여인을 주셨나요? (아니오). 아담에게 사명을 주시고 아담은 사명을 받을 뿐 아니라 또 아담은 어떤 활동을 했나? (이름을 지었어요). 이름을 지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거요? (인격적인 활동이오). 인격적인 활동이오. 말하자면 동물로서 혹은 생명체로서 존재에만 불과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인격적인 활동이라.
그러면 그 인격적인 활동이란 것은 누구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오? (하나님). 그렇지요? 아담이 이름을 지었다는 그 작위, 그 작위라는 것은 무슨 활동이었나요? 크게 말할 때는 인격적인 활동이지만 주로 그 사람의 심리활동의 부분을 다 적용해 볼 때는? (사고). 응, 사고의 활동이 물론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지적인 활동. 지적인 활동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름을 짓는다면 얼른 어디 예술적인 활동으로서 짓는다면 무슨 활동이오? (창작 활동이오). 창작 활동이지요. 창작 활동이라는 것은 무엇을 먼저 요구하여야 하는 것이오? 단순한 사고,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직관(intuition), 그 다음 반성(reflection)이 있고 판단(judgement) 그리고 연상 그런 것들로 인하여 수집해 가지고 만든 것들로 활동은 끝나나요? 그렇게 해 가지고 창작이 돼나요? 창작이 되려면 무엇이 되어야 해요? 창작이 있으려면 예술계에서 말하는 것 무엇이 먼저 있어야 해요? (영감). 즉 영감이 먼저 있어야지요? inspiration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움직여야지요?
inspiration이 사람에게 움직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 가치 철학으로 볼 때는 무엇을 의미하는 거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고귀한 가치를 가졌다는 증거의 하나는 inspiration 아니오? 동물에게도 inspiration을 찾을 수 있어요? inspiration이라는 건 보통 사람의 경지에서부터 좀더 높은 차원에 접촉하는 것을 의미하는거요. inspire했다고 하니까 영감이라고 하잖아요? 어떤 프뉴마(πνευμα)에 무엇 하나가 새로 왔다 그 얘기요. 이런 데에서 이제 그 창작 활동이 생기는 것인데, 아담은 그런고로 단순한 이성의 존재자라는 것만이 증명될 뿐더러 전인격이 위대한 창작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오.
오늘날 말하는 바 진화론(進化論)이라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요. 유인원이, 한 유인원 비슷한 그런 거, 그 유인원 비슷한 어떤 원시인, 원인(原人)말이오. 원인이 사람이 됐다. 되지도 않은 Pilt-down man까지 다 들어 가지고 얘기하지 않아요? 맨 처음에 prehistory를 배울 때 그렇게 배웠지요. Neanderthal인도 배우고 자바인도 배우고 북경인도 배우고, 그런데 나중에는 Pilt-down man까지 다 나오지 않아요? 그러나 Pilt-down man이라는 건, 우리 한국에는 더러 대학의 책에서는 나오긴 하지만 없는 거란 말이오. 사실은, 아주 야마시(せまし)라 말이오. 어떤 학자가 야마시를 한 것이라 말이오. 그런 주장을 하고 야단을 내고 어느 때는 그 mass media를 통해서 선전도 해 가지고 Neanderthal man의 그 상태 발전, 생태라는 것을 한 번 끄집어냈으면 그것 다 수용할 수 없는 얘기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은 고귀한 이성의 소유자로 충분한, 훌륭한 인격의 발휘자로 그건 원시인으로서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라 현대의 어떤 사람을 놓고 보더라도 그 inspiration의 작용이라는 것, 대체적으로 역사를 보아서 inspiration이라는 게 발달하는 겁니까? 예를들면 바하 같은 위대한 작품이, 그런 inspiration이 오늘날도 나오는가 말이오? 400년 동안 과학이 발달을 했는데 그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나와야 할 것 아니요? 위대한 인물이 나오는가? 안 나오는거요. 그 창작이라는 점에 있어서 사람의 창조적인 능력의 발휘라는 점으로 볼 때는 시대라는 것이 그 사람의 가진 창조적인 능력의 발휘에 그만큼 더 과학적 발견의 전진성을 줄 것 같은데 전진성을 절대로 주는 법이 없잖아요?
그런고로 사람이라는 게 과연 발달하는 거냐 하는 문제를 question하기 시작할 때 과학적인 발달을 보고 발달이라 하지만, 사람의 창조적 능력이란 그만큼 발달하는 것이냐 할 때 사람의 고귀한 본성에 있는 고귀하다는 부분들이 발전 않는 것이라면 사람은 변화하는 것일 뿐 발전은 않는 것이 아니냐 하는 거요. 결국. 아담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inspiration과 그로 말미암은 훌륭한 창조, 창작적인 능력은 무엇을 imitate(모방)하느냐 하면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인격적인 존재성과 그 창조적인 활동을 imitate하는 거라 말이오, 이게. 아담이 한 것은.
그러면 그런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셨고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주셨어요. 그 사명에 대해서는 다른 성경에서, 후에 성경 여러 기록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고, 그가 받은 이 때의 사명의 내용으로서는 첫째, 제 일보적으로 먼저 그의 상태에 관계된 얘기요. 그는 어떠한 상태로 지어졌느냐 하면, 우리하고 유사한 어떠한 상태는 어떠한 점에서 유사한 것이오? 우리와 같이 모든 생명의 기관과 감각의 작용이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지요? 그런데 또 그 사람의 생리의 생성이라든지 그 작용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영양을 취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요구한다 하는 것, 그 점이 우리와 유사하지요?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식음(食飮)을 해야 한다. 또 아담이 여기 잠들어 있지요? 잔다든지 먹는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아담은 먹어야 해요. 먹어야 살게 되어 있지요? 지금 죽음, 죽음의 위험은 없지요? 그러나 먹어야 살게 그 기계를 만들어 놨다 그 말이오. 그 도구를.
그러면 먹을 때는 먹어야 할 것들이 있어야 해요. 식품이 있어야 한다 말이오. 식품에 대해서는 무엇을 주었는고 하니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먹되” 그랬어요. 마음대로 먹어라 그 말이오. 마음대로 먹어라 했으면 먹어야 할테지요. 안 먹고 사는 건 아니죠? 이건. 먹으려면 먹고 말려면 말아라는 것은 없어요. 다만 선택은 자유롭다 그거요. 여기 이제 아담의 한 의무가 있는 것이오. 생리적인 의무인 거요. 너는 먹어라 그거요. 먹지 않을 수 있습니까? 먹지 않을 가능성이 있느냐 말이오? 아담은 전연 먹지 않을 가능성이 도무지 없어요. 즉 먹는다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의지의 control 바깥에 있는 문제냐 말이오? 재채기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의 control 바깥에 있는 문제요. 이상하게 무슨 조건이 되면 ‘에취’하고 재채기를 하면 그건 내가 재채기 안 하려고 하다가도 결국 ‘에취’해 버리는 것이오. 안할 수 없게 된다 그 말이오.
먹는 것도 그러냐 말이오? 먹는 건 어때요? 사람이 먹는다는 것은. 배고프면 먹어야 하는 것이지 배고프면 먹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배고파도 먹을 게 없으면 먹나요? 그렇게 되면 세상에 굶어 죽은 사람 하나도 없을 거요. 오늘날 하루에 2만 명씩 굶어 죽어요. 세계의 식량 사정으로 보면. 그 사람들은 왜 굶어 죽나요?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것이지요? 그거요. 먹을 게 없으면 못 먹는 것이지요. 결국 사람은 먹고 안 먹는 것은 어느 정도 만큼 자기 의지의 control 가운데 있는 거요. 또 단식해서, 어떤 사람 금식한다고 산에 들어가서 며칠씩 40일도 금식했네 떠드는데 그 할 수 있는겁니까? 4시간도 금식할 수 없는 겁니까? 금식할 수 있는 것이오. 그러면 먹는다는 문제는 자기의 의지의 관할하에 들어가는 문제요. 자기가 의지적으로 도저히 어떻게 관할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지요?
눈을 깜짝깜짝한다는 것 말이오. 눈 깜짝거리는 것은 시간의 길고 짧은 것은 있어도 눈을 안 깜작거리고 사흘이고 나흘이고 버티고 있을 수 있나요? 그렇게 버틸 수 없지요. 나는 특별히 더 못해요. 나는 눈을 더 빨리 깜작거리니까. 사흘은 그만두고 단 3분을 못 견디는 사람이오. 그러면 눈을 깜작깜작하는 것도 자기 의지의 control 이외에 있는거요. 얼마만치 제압을 할 수가 있으나, 두번 깜짝거릴 것을 버티고선 한 번만 깜짝거리고, 나중에 열 번을 더 깜짝거릴지언정, 그렇게 미리 마이가리를 하든지 하는 식으로 할 수는 있어도 그 나머지는 안 된다 말이오.
그런데 먹는다는 문제는 그것하고는 다른 거요. 그래서 소위 단식을 할 수 있는 거요. 그런데 여기 아담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먹을려면 먹고 말려면 말고 굶어 죽으려면 죽고 그건 아니죠? 아담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리고 죽음이라는 건 그 때에 상상 못하는 때요. 죽음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안 먹으면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런 점으로 볼 때 아담은 먹어야 한다는 자기의 의지의 분명한 태도의 결정, 그러한 것이 여기 먼저 예상되는 것이오. 자기 의지적 태도가 난 먹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먹지 않고 굶어서 굶음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라는 이상이 생기고 만일 열흘이고 스물이고 백 날이고 안 먹는다면 나중에 영양 공급이 안되고 영양 실조가 되고, 실조만 되지 않고 나중에 피가 공급이 안 된다 할 것 같으면 죽는 거라 말씀이오.
그런 것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말씀이오. 아담이 만들어진 이 상태라는 걸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담이 죽음이란 건 전혀 없었지만, 죽음이라는 위험을 전혀 안 느꼈지만 그렇지만 아담이 죽을 수가 전혀 없었다는 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런데 아담이 먹어야 할 것을 안 먹고 단식을 백 날이고 이백 날이고 했더면 죽을 뿐이오. 아담은 이백 날 단식하더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몸으로 만들어 졌습니까? 그런 생리 조직이었느냐 말이오. 아담은 이백 날 단식하더라도 죽지 않을 생리 조직으로 되었는가? 그렇다면 먹을 필요가, 먹는다는 게 절대적인 문제로, 절대적인 필요로 그에게 있지 않았다 하는 이론이 성립할 거요. 안 먹더라도 그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 성립한다면. 그러나 안 먹으면 죽을 수 밖에 없이 만들어진 기계다, 그것이 아담의 그릇이다 한다면 아담이 그 생리(生理), 그 몸뚱이다, 용체라 한다면 그가 먹는다는 것은 자기의 의지로 control할 수 있는 문제다. 또 그런다면 말이오. 결국 그는 자기의 의지가 언제든지 먹고 언제든지 생을 유지한다 하는 의무를 하나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이것이 또한 아담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무요.
아담은 먹고 살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 의무를 자기가 위배할 때에는 죄요. 죄인 까닭에 죽는 거요. 이 점을 우리가 주의해야 해요. 아담이 자기의 의무를 위배했을 때는 죄고, 죄이면 죽음을 incur, 죽음을 가져오는 거란 말씀이오. 그러나 먹는다는 게 아담에게 고통이 될 까닭이 없어요. 오늘날 아무에게도 정상적인 건강체에게 먹는다는 게 큰 고통이 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요. 아담이 죽음이라는 것을 도무지 받을 위험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담은 먹음으로 말미암아 고통이라는 것이 없을 것을 가르치는 것이오. 그 말은 뭐냐하면 그 의지가 하나님이 내신 거룩한 규정에서, 규범에서 제멋대로 일탈(逸脫)하지 않는다. 그건 생각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아니올시다.
우리가 보통 normal한 정상적인 건강체라면 걸어서 한 십 보를 간다는 것이 고통이 되지 않는 것이오. 그러면 자기 집을 지을 때 집을 다 짓고 여기다 식당을 만들고, 2층에 떡 앉아서 공부를 하다가 밥시간이 되면 아래에서 종을 치든지 진지 잡수시라 그러든지 먹는 시간이 되면 그 때는 이제 2층에서 천천히 걸어 밥을 먹으러 내려오는 것이 오히려 유쾌한 일은 될지언정 고통스러운 일이 되지 않는다 말이오. 이와같이 우리는 자신이 보통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몇 가지의 방식이라는 것이 성인에게, 건강체에게 고통이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 안하면 죽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 말이오. 2층에서 내려와 가지고 밥 먹는 것이 도무지 고통이 될 것이 없지만 2층에 앉아서 절대로 아랫층에 안 내려가려고 밥을 전혀 안 먹는다면 나중에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와 같은 것이오. 아담에게 있어서 죽음의 위험이 도무지 없었다는 것은 그가 안 죽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당연히 해야 할 것들을 한다고 해서 하나도 고통이 되지 않는다 그 말이오. 고통이 되지 아니할 뿐더러 그것은 그에게 한개의 쾌락을 주었다 그 말이오. 오늘날 우리가 아름다운 음식을 먹을 때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이 그 인류에게 쾌락이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문제는 아담이 지어진 상태와 아담이 가지고 있던 생존을 위한 의무가 뭔가 하는 점이올시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는다는 문제와 마귀의 시험을 받았다는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는 까닭에 이것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한 거요. 우리는 선악과라는 걸 너무 평면적으로 해석하기가 쉽고 간단하게 생각해버리는 우려가 많은데 마귀의 시험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오. 교묘하게 들어오는 거요. 예수님께서 땅 위에 계실 때 당신의 죄로 죽으셔야 할 일이 없었지요?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아담 빼놓고는 이젠 예수님만이 무죄하신 인생이었다 말이오. 완전한 인간으로 계셨을 때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오. 또 동시에 하나님을 보류한 게 아니고 그와 동시에 완전하신 인간이었어요. 하나님의 면을 그 때 생각지 않고 인간적이라는 면을 생각할 때는 예수님이 모든 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같이 고생을 하셨습니까, 아니하셨습니까?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꼭 같이 고생했지요? 모든 점에 있어서 친히 모든 사람의 고생을 다 짊어지신 까닭에 모든 사람의 고생을 다 진다는 것이 예수님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왜 고생을 하셨느냐 하면 그건 죄로 말미암아 이지러지고 불의하고 악하고 앙화를 받은 세계에서 사는 까닭에, 그런 사회에서 사신 까닭에 받으신 고생인 거요. 어떤 사람이 병이 들어가지고 받는 마음의 고통이나 육신의 아픔이 있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꼭 같이 고통을 받으셨으나 죄만 없으시니라 그랬지요? 예수님이 아파서의 고생을 받아 봤겠어요? 예수님이 아파서의 고생을 안 받아 보았겠어요, 받아 보았겠어요? 십자가 상에서 지독한 아픔의 고통을 다 받아보시지 않았어요? 병도 그런 병은 아니오. 그게 보통 무서운, 생각 못할 지극한 고통을 다 받으셨어요. 십자가 상에서 뿐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눌리는 그 죄, 죄의 힘으로써 눌리는 그 고통이라는 게 심히 두려워하고 무서워 하셨다고 그랬어요. 땅에 계실 때 통곡하면서 막 그랬다고. 예수님이 피곤이라는 고통을 맛보셨겠습니까? 피곤이라는 것 맛보았지요? 죄가 없는데 피곤이라는 걸 맛보신 것 아니오? 이것은 환경이 나빠서 피곤한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의 신체상 문제입니다. 이 환경으로 말미암은 고통은 마음에서 오는 고통이겠지만 악한 사람들의 악을 보고 불의를 보고 살륙을 볼 때 마음에 고통스럽고, 또 예수님을 향해서 불의하고 악하게 대하는 걸 볼 때 받는 그 마음의 고통이 많지만, 예수님 혼자 애를 쓰고 일을 하시고서 그 피곤이라는 것을 맛보셨느냐 하면, 그러면 그건 사람이 죄로 부패한 것으로 예수님에게 주는 고생은 아니지요? 예수님이 피곤이라는 고생을 맛보셨다, 졸음이 온다는 상태를 예수님은 겪어 봤겠어요? 노곤해서 자꾸 졸음이 온다는 것, 보았나요? 안 보았나요? 예수님은 안 주무셔도 도무지 잠 안 오는가요? 맛보셨지요? 그러니까 배에서도 그 풍랑을 만났는데도 그렇게 떠억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원체 피곤하셨으니까, 그날 일을 많이 했으니까. 예수님은 하루에 백 리를 걷고 또 이튿날 또 계속 걸으면 나중에 피곤해서 쉬어야 할 그런 생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안 가지셨습니까? 다 가지고 있었지요? 이게 무죄한 예수님이 가진 몸이오. 죄 있는 몸이 아니오. 그 무죄한 예수님의 몸과 같은 몸을 죄 없다는 점에서 가졌다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아담 밖에 없는 거요. 아담, 하와가 죄 짓기 전에.
그러면 우리가 아담을 생각할 때 신비한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지 말고 아담도 이건 우리와 같은 생리적인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까닭에 죄로 말미암은 고통이나 죄의 형벌로 말미암은 고통이나 저주로 말미암은 고통이나 죄의 오염으로 말미암은 이것은 없을지라도 그 생리상 가지고 있는 조건들은 다 있지 않느냐 그 말이오. 그러니까 배도 고플 수 있을 것 아니냐 말이오. 예수님이 배고픈 고생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주리신지라 그랬지요? 40일 동안 아무것도 안 잡수시니까 몹시 주리셨다 말이오. 40일 동안 안 잡수시고 주리신 것은 누가 못 잡수시게 했습니까? 당신이 금식하신 게 아니요? 그것은 환경이 악한 것 때문에 하는 건 아니지요? 순전히 자기 심리상 고통 때문에. 즉 생리의 조직 때문에 안 잡수시면 주리게 되어있다 그 말이오. 그 완전한 사람이오. 아담은 완전한 사람입니까, 반절은 신(神)입니까? 완전한 사람이지요. 아담이야말로 사람이지요? 신이 아니오.
아담의 무죄 상태를 생각할 때 반절 신이나 천사와 같이 생각하는 건 안 돼요. 사람이오, 그건. 지금 공격한, 마귀가 공격한 대상은 사람인 걸 알아야 해요. 거기에 이런 무슨 handicap이라고 할지 조건들이 있느냐 하면 배고프면 주린다는 조건이 있는 사람이오. 피곤하면 자야한다는 조건을 가진 사람이오. 그리고 밥을 안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생리의 당연한 원칙을 적용 받는 사람이오. 그러니까 아담이 밥 안 먹으면 죽는다는 생리적인 원칙을 가진 사람이오.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프다는 건 궁극적으로 가면 결국 안 먹고 안 먹고 하면 죽는다 그 말이오. 그러나 아담에게는 죽음이라는 위험이 없었죠, 지금? 왜냐하면 죽음은 죄 때문에 온거니까. 죄가 없는 그 당시에는 죽음이 없었다 그 말이오. 그 점에 있어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요. 예수님은 당신이 죽음을 취하기 전에는 죽음이란 게 있을 까닭이 없는 분이오. 그러나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배가 고팠어요. 심히 배가 고팠어요.
아담에게 그와 같은 상태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아담은 먹어야 살죠?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은, 즉 아담이, 사람은 밥을 먹으면 살고 안 먹으면 죽지요? 아담도 밥을 먹으면 살고 안 먹으면 죽는 거요. 사람은 계속적으로 안 먹으면 안 먹을 수 있지요? 안 먹어 가지고 굶어 죽을 수가 있지요? 아담에게도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 말이오. 굶어 죽을 수가 있겠는가 그 말이오. 굶어 죽을 가능성이 없는 거요. 아담은 절대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오. 아담의 의지가 그리로 움직이지 않게 돼있다 그 말이오. 굶는 사람이 밥을 안 먹고 자기 고집 쓰고 굶어서 죽는 것은 죄의 부패로 말미암아 죽음을 취하는 거요. 즉 죽음이 있은 다음에 죽음과 굶음이 연결됐다 그 말이오. 아담에게는 굶음이 있을지라도 죽음이라는 건 연결이 안 돼있다 그 말이오. 죽음이라는 건 죄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오.
그러니까 그 말은 밥을 끝까지 안 먹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생리적인 원칙 가운데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데 이르지 않게 된다는 것은 아담의 의지라 말이오. 밥을 먹고 안 먹는 건 자기의 컨트롤에 의지한다 그랬지요. 아담의 의지라는 건, 요건 잘 늘 생각해 두세요. 즉 여기서 보면 아담은 먹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어요. 우리도 먹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아담은 먹어야 사는 것이오. 사람은 밥먹는 것이 하나님 앞에 신성한 의무다라고 별로 안 해요. 이것 안 먹으면 나는 죽으니까 먹는 거요. 항상 죽음이라는 위험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은 그래요.
아담에게 있어서는 내가 이걸 안 먹으면 죽는다는 죽음에 대한 위협과 공포를 당하지 않게 돼 있어요. 그것이 그의 의지란 말이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이상 아담에게 있어서는 어떤 제한이 있은 건 아니오. 자기 의지의 컨트롤이 어떤 정도인지 나머지는 하나님이 컨트롤 해준다는 그런 제한이 있었다는 말은 아니오. 끝까지 자기가 control해 가지고 끝까지 자기가 안 먹으면 죽고 먹으면 다 살게 돼 있는 점에 있어서는 우리와 꼭 같지만 아담의 의지가 거기까지 움직이지 않게 돼 있다 그 말이오. 아담은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죄가 없는 까닭에 그런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 말이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떤 일에 대해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이오. 예를들면 참으로 신령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칼을 가지고 남을 찔러 죽이는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오. 그런 의지가 움직일 까닭이 없는 것이오. 사도 바울보고, 그게 죄인이지만 바울보고 칼 가지고 사람들을 찔러 죽이시오 하면 찔러 죽이겠는가? 전에 예수를 안 믿었을 때는 막 살기 등등해 가지고서는 사람을 죽였던 사람이지만, 사람 죽이는 데 가담했었지만 중생한 다음에 성신이 충만한 다음부터는 도저히 그것 가능성이 없는 거요. 이와 같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의지가 다른 사람에게서 움직이는 방면에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다고 그 사람이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오. 다만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자유가, 남에게 큰 불의를 행할 수 있는 그 자유가, 그에게 있어서는 다른 것으로 그의 마음의 인격에 다른 조화로 말미암아 움직이지 않게 돼 있다 그 말이오. 아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 도저히 죽어야겠다든지 죽음을 향해서 내가 밥을 안 먹어야겠다든지 하는 생각을 꿈에라도 할 필요가 없고 할 수 없게 됐다 그 말이오.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오. impotent하다는 말도 아니고, 다만 하지 아니했다 그 말이오.
여기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어요. 또 하나 예를 드는데 참으로 중생한 사람이 성신을 훼방, 말로 훼방을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수가 없지요? 그런 말을 하려면 articulate 안 된다 말이오. 말이 발음이 안 된단 말이오. 그런 말이 발음이 안 된다는 것 아니지요. 발음하려면 다 할 수 있지요? 그 발음. 발음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것을 알죠? 도저히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절대로 못한다는 것이오. impotent한 것입니까? impotente한 것은 아니지요? 무기능도 아니지요? 그렇지만 않는 것이오. 절대로 않는다 그 말이오. 그것이 그렇게 돼있어요. 왜? 하나님의 성신께서 그를 지키시므로 그런 생각을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오. 꿈에라도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이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자유의 제한이 아니고 우리의 속에 있는 인격의 장성의 코스가 원체 그것과는 평행돼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한 fact는 우리 인격의 장성과는 평행, 영구한 평행선인 것이오. 안 되는 것이오.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오.
이와 같이 아담도 자기가 굶어서 죽어야겠다는 의지의 발동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있어서는 영구한 평행선이오. 자기의 의지에 있어서만은. 그래서 안 되는 것이오. 그렇다면 아담은 언제든지 먹는다, 먹는다 그 말이오. “나는 먹고 살아야겠으니 먹어야 겠다, 안 먹으면 죽겠으니 먹겠다” 그런 논리는 없지요. 그러나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한 것이므로 먹는다, 신성한 의무로서 그에게 존재했다 그 말이오. 예수를 참으로 믿는 사람에게 먹는다는 것은 하나의 신성한 의무인 줄 아는 것이 참 중요한 것이오.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먹는다는 것 보다는 하나님께서 나를 기르시고 나를 살리사 영광을 위해서 저기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것을 주셨으니 아담에게 그 동산에 모든 좋은 것을 주심과 같이 나에게 주신 것을 내가 먹는다. 그 말하자면 sacred food요.
전에 제가 여기서 여러 번 아담은 먹어야 할 의무를 가졌다 하는 말을 썼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이오? 그렇게 생각하면 아담은 먹어야 살게 됐다 하면 좋겠지만, 먹어야 할 의무를 가졌다 하는 것은 먹지 않으면 죽을테니까 먹어야 한다는 그런 논리하에서 한 말은 아니오. 죽음이라는 건 없지만 그는 죽음이라는 것이 위협해서 그 의무가 비로소 확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한 명령을 하신 까닭에 하나님은 요컨대 그를 먹여서 장성하고 생존하게 만드신 까닭에 그는 먹고 생존하면서 사명을 행하게 하신 것이오 이것이 Christian으로서 duty인 것이오, 의무인 것이오. 그것은 참된 생명으로 영원한 승화의 경계, 이상형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그렇게 됐다 그 말이오. 다시는 먹을 필요가 없는 경계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렇다 말이오. 다시는 먹을 필요가 없는 경계에 도달하기까지는 계속적으로 먹어야겠다 그거요.
왜냐하면 시험이 마귀의 공격이 꼭 먹는 데서부터 이제 들어왔으니까 먼저 먹는다는 것이 아담에게 있어서는 무슨 의미를 가졌느냐는 것을 우리가 보자 그 말이오. 먹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신성한 의무로 존재하면서 또한 그의 생리상 당연히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먹지 아니하면 배가 고팠고 때가 되면 그는 먹기를 원해서 먹고 그랬어요. 안 먹어도 상관없고 먹어도 상관없고 먹는 건 사치로 그냥 가도 괜찮고 와도 괜찮고 꼽아도 괜찮고 빼 내버려도 괜찮고 그것이 아니라 말이오. 먹는 것은 그에게는 또한 의무요. must, 해야만 한다 그 말이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 때문에, 죽음이 무서워서 먹은 건 아니오. 그건 자기에게는, 생을 그렇게 해서 유지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오. 아담은. 그렇게 아담의 생리 조직은 조직된 거라 말씀이오. 안 먹으면 배고프게 조직됐다 그 말이오.
그런데 그 아담에게는 아담이 살고 있는 에덴 동산에 특이한, 아주 특이한 두 개의 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요, 또 하나는 9절에 생명 나무라 그랬지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 다음에는 강들이 흐르는 얘기, “그런고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안 먹으려면 관둬라 먹으려면 마음대로 먹어라 그 말입니까? 임의(任意)로 먹되, 그 무슨 말이오? 이 말 뜻을 생각해 보세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임의로 먹되”가 무슨 뜻이오? 임의(任意)란 말이 무슨 뜻이오? 마음대로 먹어라 그 말이지요? 마음대로. 그건 “임의로 먹되” 하는 건 마음대로 먹으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먹기 싫으면 관둬라 그것입니까? 먹는 것은 must죠? 당연하고, 그러나 네가 어떤 놈을 선택해서 먹는 것은 네 마음대로다. 그랬지요? 안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으려면 안 먹어도 좋다는 조건은 아니지요.
아담에게 있어서는 안 먹어도 좋다니까 나는 먹으려면 먹고 안 먹으려면 얼마든지 안 먹어도 상관없다 그런 권리는 없지요? 지금. 그는 먹는다는 당연, 하나님이 내신 그의 당연한 요구가 있는 것이오. 하나님은 생리조직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먹도록 만들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안 먹는다 할 때 하나님이 내신 그 인간의 생리의 기능, 생리의 요구를 자기가 거부해 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안 돼있다 그 말씀이오. 아담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더구나 그래요. 먹는다는 것만은. 그러니까 ‘임의로 먹되’는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는 말은 아니지요?
그 다음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이건 먹지 말라 그랬지요? 반드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 그거지요? 그 다음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그랬어요? (정녕 죽으리라.) 정녕이 뭐요? (꼭.) 꼭 죽는다. 뭐 빈틈없이. 뭐 다른 어떤 choice가 없어요. 다른 길이 없이 꼭 죽고 만다는 거요. 죽음이라는 게 필히 온다 그 말이지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 죽어요? (먹는 날). 먹는 날에 죽는다.
그러면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그랬어요. 여자가 뱀에게 대답한 말, 인제 꾀임, 뱀에게 꼬임을 받아가지고 대답한 말, 뱀이 묻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 같이-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당장에 고쳐 가지고 말을 했지요? 뱀이. 당장에 고쳐 가지고. 고쳐 가지고만 말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고쳐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을 했느냐 하고 문의를 했습니까, 그 말에 무슨 저의를 분명히 보였습니까? 사람에게 말을 할 때. 무슨 뱀이 가지고 있는 저의가 있지요. 참으로(יכ ףא). 이렇게 히브리 말로 두 마디 말을 썼어요. 아트 키 아마르(רמא יכ ףא). 이 말을 썼는데, “과연”이란 말, 좀더 나가서 말이다. 그냥 갑자기 묻는 말이 아니고 좀더 나가서 그러면 좀더 나가서 furthermore, 과연 그랬느냐 말이죠? 예, furthermore 혹은 과연 그러냐요.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해요. 보통 아트 키(יכ ףא)라는 말이 ‘또한’ 이라는 말도 되고 갈대아 말로 아람 방언으로는 이것이 ‘또한’, ‘좀더’, 말하자면 ‘과연’ indeed 혹은 moreover. 좀 더 나가서 얘기하자 그 말이오.
이 말 יכ ףא라는 말의 뜻은 오늘 우리가 참으로 이렇게 말하면 조금 빈약할 수 있지만 갑자기 “얘, 참으로 그러더냐”하고 전연 그냥 뚱딴지같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쑥 나와서 말을 할 수가 있겠지만, 만일 히브리 말로 יכ ףא 이런 말을 써넣는다면 그건 전연 상대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고 이편하고도 아무 그런 문제의 거래가 없을 때 쓰는 말은 아니다 말이오, 이건. 우리말도 그렇지요? ‘사실, 참으로’라는 말은 그 문제에 대해서 전에 피차간에 아무 얘기 없었는데 “얘! 참말로 그렇게 됐나?” 이렇게 묻기는 어렵다 그 말이오. 피차 다 같이 알고 있다하는 관점에서만 얘기요. 너도 알고 너나 나나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서로 그런 이해가 있으려면 ‘참으로’ 라는 말이 유효하다 말이오.
그런데 יכ ףא라는 말은 더군다나 그렇게 유효하다 그 말이오. 좀더 지금까지 얘기했던 데서 또 한 번 좀더 나가서 어디 서로 reasoning해 보자. 추리를 해 보자. 논리를 해보자. 과연 그러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그러니까 이 말이, ‘참으로’라는 말이 전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 공동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전제로 하는 것이오. 이 공동의 지식을 어떻게 가졌겠나? 뱀하고 여인하고 공동의 지식을 어떻게 가졌겠느냐? 공동의 지식을 가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런 문제에 대해서 서로 얘기를 할지라도 그것은 전에 다같이 아는 문제니까 얘기할 수 있는 대상이다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야 그런 얘기를 하는 거요.
여기서 이 말이 중요한 까닭에 우리가 이런 말을 중요히 생각해야 하는데, 만일 어떤 친구가 갑자기 나한테 와서 “아! 참으로 그것이 그렇게 됐나”하고 갑자기 어떤 문제, 나도 알고 자기도 아는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물을 수 있어요. “참으로 그렇게 됐나” 할 때는 그 사람에게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 몇 가지의 전제 조건이 있는 것이오. 그 사람하고 나하고 그 문제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조건이 하나 붙는 것이오. 토론할 수 없는 사람이 와서 딱 그 말을 물으면 그 무슨 상관이기에 내가 그 얘기를 하겠느냐 말이오. 상관없는 얘기를 할 수가 없어요. 그 사람하고는 얘기를 할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이오. 그 사람하고 적어도 나하고는 그런 문제를 가지면 그건 공동의 문제로 같이 토의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 말이오.
대상이 서로 토의할 대상일 때만 그 말을 자기에게 와서 물어도 그 말이 통하고 둘째는 너하고 나하고 토의할 대상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끼리 서로 회화를 나누어서 미리 그것을 공동의 지식을 안 가졌을지라도 어디서 섭취했다든지 각각 그 지식은 가지고서 얘기할 때에는 다같이 서로 알았으니 그 문제는 미리 서로 회화를 해 가지고서 서로 안다 공동의 지식을 가진다는 점은 생략해도 괜찮다 하는 그런 친숙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이게 좀 까다로운 해석 같아도 꼭 그것이 필요해요. 그렇지 않을 때는 얘기 않는 거란 말이오.
친구가 하나 와서 나를 보고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참말로 그가 그랬을까?” 어느날 신문을 보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의 얘기가 났다 말씀이오. 불행한 얘기가 났어요.
그런데 나만 잘 알 뿐 아니라 나의 가장 어떤 친한 친구도 잘 아는 사람이라고 가정하십시다. 그러면 그 친구가 갑자기 찾아 와서 “아, 참말로 그 사람이 그렇게 했을까”하는 건 오늘 아침에 나도 신문을 보고오고 해서 너나 나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식을 다 가지고 있다 하는 전제하에서만 그 말을 묻는 거란 말이오. 만일 내가 신문을 아직 못 봤으면‘ 뭔 얘긴데?’ 해 가지고 얘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요. ‘참으로’라는 말을 금방 가지고서 던졌던 그 문제에 대한 문답은 안되고 말아요. 그런 것은 안되고 아, 무슨 얘긴데 하고 지식이 아직 없으니 그 지식을 나한테 나누어라 나눈 다음에 그 얘기를 해라, 나눈 다음에 얘기를 해가자 그 얘기요.
그러나 나도 신문을 보고 알고 그 친구도 지금 신문을 금방 보고서는 그 신문을 들고 와서 아, 참으로 이 사람이 이랬을까? 이렇게 하고 나한테 가령 묻는다면 내가 그 사람이 전연 이 친구하고도 상관없고 나하고도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냉담하게 쳐다볼 밖에 없는 것이오. 그건 뭐 신문에 났더라도 말이오. 신문에 났으면 그거야 보편화한 것인 공동의 재료니까 신문에 난 일 가지고서 혼자 말 안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그랬다고 할지라도 내가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상관없는 것 아니오? 그러나 문제는 그 사람에게도 친한 친구고 나한테도 친한 친구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다면 아, 참으로 이 친구가 이렇게 했을까 하고 나한테 물으면 글쎄 말이야 하고선 나도 언제 거기에 대한 얘기를 할거란 말이오. 그러면 첫째는 그 말하는 대상은 서로 공동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 그리고 같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즉 같이 서로 토의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오.
그건 혹시 또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와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미 공동의 지식을 터득했다. 그리고 서로 공동의 지식을 터득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요. 서로 알고 있다 그거요. 친구가 나보고 참으로 이 친구가 이랬을까 하는 건 나도 신문을 봐서 알았으리라는 전제하에서만 묻는 거요. 그러니 ‘참으로’라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쓰이는 건데, 셋째로는 ‘참으로’라는 말을 그 사건에다가 개입시킬 때는 나는 그것 의심스럽다 그 말이오. 그 말이 의심스럽다. 과연 그랬을까? 이것 고대로 곧이가 안 들린다 그 말이오. 그러면서 나만 의심스럽다는 걸 표시하는 게 아니라 너는 안 그러냐고, 내가 대화를 하면서 ‘참으로’라는 말을 던졌으니까 너에게도 의심스럽지 그렇지 않느냐 하는 동의를 요구하는 태도인 것이오.
여기서 지금 마귀가 뱀의 그 tool을 사용해 가지고 도구로, 뱀을 도구로 사용해 가지고 좇아와서 물을 때의 태도가 그렇다 말씀이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고 물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그 뱀하고 여자가 그렇게 상관이 없는 처지라면 너 무슨 상관있기에 이런 일개 미물이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탁 튕길 수 있는 것이오. 그런데 더구나 이것은, 현상은 괴이한 현상이거든. 뱀이 친구는 아니오. 뱀은 뱀이지 사람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런데 사람 아닌 뱀이 무엇을 말했든지 말을 했다 그 말이오. 그렇다면 그 말을 한 그것에 대해서 의문을 일으켰어야 하는데 의문을 안 일으켰다면 거기는 안 일으켰다는 그 자체가 대단히 이상한 거요. 어째서 의문을 안 일으키느냐? 왜. 여인이 의문을 안 일으켰다는 그 사실 자체가 대단히 이상해요.
그러나 이상할 것이 또한 끝이 없는 것은 거기에 해결이 하나가 있어요. 의문을 안 일으켰다면 의문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는 얘길 텐데, 아, 뱀이 말을 해도 그것이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그 말인데, 뱀이 말을 해도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는 것은 뱀이 전에도 이야기를 했다는,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뱀이란 놈이 사람의 말을 할 뿐 아니라 그냥 말만 할 뿐 아니라 사람의 사고와 같은 사고를 가지고 이론을 한다 그 말이오. reason해 나가는 거요. 이론을 해 나가는 것이오. 즉 추리를 하고, 말하자면 그의 복잡한 심리의 모든 과정이 한 인격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을 그대로 나타냈다는 그걸 이상스럽게 하나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에 여인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거론치도 않았다 그 말이오.
뱀아! 네가 무엇이기에 일개 미물의 짐승인데 말을 하느냐? 말을 하되 마치 사람이 생각을 하고 말하듯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와서 나한테 얘기를 하고 그리고 그 문제를 논리적으로 차례차례 얘기하느냐 안 그랬지요? 여기 뱀을 보면 아주 논리적으로 얘기했어요. 왜냐하면 문제에 문답을 했거든. 여기 뱀과 여인과의 그 문답한 내용을 보면 오직 친숙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답한 사실 이외에는 서로 서름서름한 사람끼리도 이렇게 문답할 수가 없다 그 말이오. 또 문답이라는 것이 뱀이 앵무새같이 말한 게 아니고 다음, 다음 그래서 거기에 대답에 대해서 쭉쭉 대답을 한 것 보면 이것은 뱀이 말을 했다는 점만이 이상한 게 아니라 사고를 하고 있었다 그 말이오. 생각을 했다는 것 아니오?
그 뱀이 말을 하되 사고를 하고 했다면 말만 하더라도 그거 이상할 텐데 그는 생각을 하고 생각한 것을 자기가 토하고 그리고 내 말을 알아듣고 알아 들을 뿐 아니라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하고 대답을 한 건 아주 reasonable한 아주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을 해요. 서로서로 말이 서로 성립돼 나가는 대답을 한다 말이오. 사람도 지식 정도가 다를 때에는 말을 하면 말이 서로 동문서답하는 거요. 그야말로 동쪽에서 묻는데 서쪽에서 대답하는 그것밖에 안 된다 그 말이오. 때때로 그런 사람 많이 만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어떤 것을 떠억 놓고서 얘기한 다음에 알아들었는가 하고 물으면 뭐 뚱딴지 딴소리 떠억하고 앉았거든. 못 알아 듣거든. 당초 무슨 말인지. 사람도 그 지식 정도가 몹시 서로 다를 것 같으면 동문서답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말이 아주 잘 reason돼 나간다 그 말이오. 이것은 그들의 이해가 같다 그 말이오 서로. understanding, 그들이 가지고 있는 understanding. 그런고로 한 마디로 이 소위 철학자들의 말을 빌린다면 뱀에게는 human understanding이라는 건 말이오. 인간 오성이라는 것은 여기 있어서는 하와와 동일한 plane위에서 동일한 flat위에서 동일한 지대 위에서 level 위에서 지금 얘기를 하고 동일한 level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의견만 아니라 사고를 교환하고 있다 그 말씀이오.
이것은 대단히 기이한 사실이 아닐 수 없지만 거기에 대해서 일호의 question을 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그것이 기이한 사실일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기이한 사실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있었었느냐 하면 필연적으로 전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기이하다는 것은 벌써 해결했다, 기이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봤다 그 말이오. 즉 전에 벌써 여러 번 접촉을 해서 여러 번 말을 하고 여러 번 서로 교통을 하고 여러 번 서로 대화를 해서 저 뱀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도 가장 영물로서 모양만 다르지 우리 사람과 꼭 같이 사고력을 갖고 사고를 하고 그 사고를 또한 우리가 쓰는 인간의 용어를 가지고 표시하는 이성적인 그런 존재자다 하는 것을 이미 승인했다 그 말이오. 그러지 않고는 question을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 아닐 뿐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일인 거요.
하와가 멍청해서 question을 안한 것 아니오. 하와가 멍청하다고 생각할 것도 없는 거고 또 한 가지는 암만 멍청한 사람도 이건 뭐 얘기 안 되는 거요. 멍청해 가지고서는 그 question을 못 한다든지 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이오. 이성이 있는 사람 같으면 놀랄 얘기라 말이오. 그러니까 뱀에 대한 이 얘기는 뱀이 그와는 벌써 이만한 대화가 벌써 있었고, 그 대화는 무엇을 빚어냈느냐 하면 하와와 뱀 사이에 친숙성을 빚어냈어요. 서로 친교를 빚어냈어요. 그러기 까닭에 “아 근데 참으로”하고 말할 때 서로 공동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표시하는 거요.
이렇다며는 우리가 십분 짐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그건 뭐냐하면 공동의 지식은 어디서 가졌느냐 하면 둘이 많은 대화 가운데 가졌을 거란 말이오. 많은 대화 가운데에서 뱀과의 대화 가운데에서 동산 나무의 얘기도 하고 생활에 대한 얘기도 하고 하나님 얘기, 하나님에 대한 얘기도 하고 아, 그러냐 그러냐 하고 처음에는 절대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아주 순조롭게 얘기하고 지냈을 거라 말씀이오. 아무것도 올무에 걸려들 것이 없이 얘기했다 그 말씀이오. 요때요. 아주 이 crisis에서 이 critical point 에서 비로소 올무에 걸으려고 뱀이 의도를 가지고 나왔음을 볼 때에는 “아, 이전에 그 한 말이 있지, 우리들이 전에 얘기를 많이 했지만 아, 참말로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이렇게 얘기했다 그 말씀이오.
“참말로 그랬을까” 이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러실 리가 없지 하고 어느 편, 하나님을 옹호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 하나님을 굉장히 의심하게 하는 거란 말이오. 하나님이 그러셨을 리가 있는가? 거 얼마나 교묘한 태도냐 말이오, 그게. 마치 하나님이 그렇기나 하신 것 같이 동정하는 듯, 변호하는 듯하면서 사실은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분 아니겠는가?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 참말로 그랬을까?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다는, 요컨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건 아니오. 그럴 수도 조금 있었겠다 하는 심정이니까 참말로 그랬을까 하고 묻는 거란 말이오.
그럴 때 여인이 대답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임의로 먹으라 그랬지 먹을 수 있다 이렇게 안 했지요? 먹을 수 있다 만일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만일 그놈 안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그러면 안 먹을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다는 그 말인데 먹을 수 있다는 건 허가요. 그놈만 먹으라든지 그놈을 꼭 먹으라는 건 아니고 그러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먹을 수 있다, 이를테면 안 먹어도 그만이다 하는 말이오. 허가라는 것은 특권인 것이오. 이 특권을 내가 준다. 그 특권을 취하지 않으면 또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좇아 다니면서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어떤 provision이 있어야 할거요. 사람으로 뭘 먹고살아야 하느냐, 뭐 먹을 게 다른 데가 있는데 다른 데서 먹을 것이지만 이 나무 여기 있는 실과 나무들도 다 먹을 수 있다, 그 말하자면 특혜를 주는 거란 말이오. 그렇게 특혜를 준 건 아니오. 너는 이것 먹어라, 먹는다는 한 의무를 줬다 그 말이오. 다만 임의라는 건 너는 선택의 자유는 있다.
그런데 여기에 대답이라는 것은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뱀의 물음에 대해서 “먹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임의로 먹으라고 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여인의 대답은 먹을 수 있다, 먹는다는 것은 자기의 의무라는 말보다도 하나님의 권리하에 허가로 맡은 것 뿐이다.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을 제한하고 어떤 것만을 허가해 주셨다 하는 그 의사를 표시할 때는 이런식 발음을 이런식 표현을 해요. 여기서 이 문장에서 우리가 catch할 것은 글쎄 뭐 그게 하와가 가지고 있는 그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 그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그 여운, tone이라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하와의 가지고 있는 understanding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내신 그 tone과는 별다른 데 있었다는 것을 이 말 한 마디 속에서 느끼는 것이오. 그렇지요?
하나님은 동산의 각종 모든 실과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네가 임의로 먹어라 그런데 그것은 그 안에다 하나 더 붙였다 그 말이오. 임의로 먹어라. 그렇지요? 이 얘기는 먹되, 먹되라고 번역했든지 문제는 뭐 원문대로는 먹어라 그런데 그렇다 말씀이오. 하지만 영어로만 당장에 쓰더라도 당장에 임의로 먹어라로 딱 sentence가 떨어지는 거요. 거기서는 그러나 이렇게는 안 쓴단 말이오. 그러면 임의로 먹어라 하나님이 하셨는데 하나님이 먹어라 하신 그 말과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말이 어떻게 달라요? “임의로 먹어라, 그러나 요건 안 된다. 우리는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 그러면 같은 꼭 같은 sentence를 만들어 보세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는다, 그러나 이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하와의 대답은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달라요?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세요. 그건 인제 이 문장이라는 게 교묘해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교묘한 문장 이렇게 세밀하게 분석을 해서 이 세밀한 데서 하와가 어떻게 해서 시험을 받았나, 즉 마귀는 어떻게 공격을 했냐 왜냐하면 마귀가 지금 공격을 해 가지고 최초에 지금 최초의 우리가 보는데 조금 움직이면 바로 움직인다 하고 믿기 시작하는 거라 말이오. 조금 움직인 것을 보려면 이 말에서 조금 일보 움직였어요. 일보도 아니오. 그냥 퍽 소리만 조금 막 죽을힘을 다해서 밀어 보니까 픽하고 조금 밀리는 것 같은 거요. 이게, 그게. 자, 그러니까 이런 데서 마귀의 공격 시험이라는 게 마귀는 어떻게 해서 걸고 들어오는가 마귀의 전쟁이 맨 처음에 어떻게 해서 걸고 들어왔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필요한 거요.
여러분 영화 속에 “삼손과 들릴라”라는 영화 보셨어요? 그 마지막 scene에서 블레셋 그 신당에 다곤의 신당에서, 막 삼손을 메달아서 놀리고 욕을 할 때 나중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삼손이 데릴라를 보고 나를 기둥을 붙들게 해 달라고, 기둥을 붙들게 했죠? 한 다음에 막 그 영화에서 보면 기둥을 막 힘을 다해서 밀어 보잖아요. 그 돌기둥 큰 놈을 암만 밀어도 꼼짝도 않다가 나중에 조금 밀려 나가잖아요. 조금 밀려 나가니까 다시 막 그냥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가면서 밀어 재치니까 나중에 픽하니 밀려나서 막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하잖아요. 마귀가 이 하와를 밀어대는 판인데 그냥 죽을힘을 다해서 밀어 보는 건데 조금 밀리는 소리가 여기서 난 것이오. 말 한마디 틀렸는데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나는 임의로 먹는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쓰면 하와의 말이라는 건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를 표시하는 거요. “너희가 임의로 먹어라” 하니까 그 말을 알아듣기를 “우리는 먹을 수 있다” 그랬다 말이오.
성경을 하나 해석하려니까 이제는 문학자도 됐다 시인도 됐다 문장가도 됐다 말의 용법에 대해서 기묘하게 생각을 했다 그거요. 왜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뭣 하려고 다른 말을 써야 해? 그대로 가지고 있지. 꼭 같은 말을 뭣 하려고. 말이 다를 때는 반드시 말이 다른 만큼 의미가 다른 거요. 꼭 같은 말을 다른 것으로 표현, 꼭 같은 뜻을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으로 표현했으면 다른 것으로 표현한 만치 차이가 있는 것이오. 늘. 여기는 그런 것이 필요해요. 개괄적으로만 생각할 때 그렇게 생각하지. “임으로 먹는다”. 할 수 있다는 말과 한다는 말하고 무엇 달라요? 그것이 다르죠? 지금. 하와는 “너는 임의로 먹어라” 먹는다, 먹어라, 먹는다, 한다는 말이오. do란 말이죠? 어디 영어 잘하시면 do란 말하고 can do라는 말하고 무엇이 달라요? 여기는 할 수 있다는 I can do it. can이라는 말하고 do라는 말하고 무엇이 달라요? 조동사에서 무엇이 달라요? 한다 하는 말과 할 수 있다 하는 말과, ね,てきろ 무엇이 달라요? 무엇이. 그건 can이라는 말이고 do는? 임의로 먹는다.
그러면 임의로 먹는다는 말에는 왜, 먹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왜 너를 임의로 먹어라 했느냐? 아까 제일 먼저 전제적으로 해석한 말이 하나 있어요. 먹는다는 건 아담에게 있어서 무엇이었는가? 의무요. 그러니까 그 의무를 행한다 그거요. 자기가 당연히 행하여야 할 것을 행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생존하고 생존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내신 그 사명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건 내가 먹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하나님께서 그의 그 생존의 의미, 생활의 목표를 분명하게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필요한 걸로 준비하신 의무로 주신 거라 말이오. 반드시 필요로 주신 거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나는 행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세상에 나게 하시고 그 다음에 생활의 목표를 주시고 목표를 향해서 가게 하셨다. 그러므로 나를 하나님께서 지지하시려고 먹게 하셨다. 저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로 주셔서 나는 반드시 취하여야 할 것이다. 그건 의무요. 말하자면 행하여야 할 거란 말이오. must. 내가 해야 한다 그렇지요? 해야 할 것인가? 그런고로 단순히 단순한 작위에 불과한 게 아니라 의무가 붙는 것이오. 당위. 나는 마땅히 행한다 그 말이오. 그거요. 그러나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거요.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주어진 권리니까 이 권리는 내가 쓸 수 있고 안 쓸 수도 있다는 거요. 말하자면 그렇다고 해서 안 된다는 말도 아니오. 지금. 않겠다는 말은 아니오. 하와가.
다만 강조를 어떤 점에다 놓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너는 이것을 먹어야 한다. 먹고서 생존해 가면서 네 생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다 이런 신(scene)에다 track에다 놓고 가르치신 것이고, 하와로서는 자기는 그걸 할 수가 있다 그러면 그건 무엇 하나가 거기서 빈약하냐 하면 하와 자기 자신의 사명에 관련된 식사라는 것 사명과 관련돼 있는, 즉 생의 목적과 관련돼 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 식음이라는 것 이것하고 상관을 붙여서 얘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리의 어떤 부분을 나에게 이양해 줬다 그건 무엇을 우리에게 상상하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못하게 항상 막았는데 어떤 부분을 열어 줬다 해서 항상 하나님의 제한 가운데 있던 어떤 사실이 나에게 주어져서 나는 권리를 얻었다 그 얘기죠? 하와는 어떤 면에서 받는고 하니 그것은 자기의 권리인 것같이 생각한 거요.
하나님은 그에게 명령된 의무다 하고 주신 것이오. 권리와 의무가 바뀌어 가지고 생각됐다 그 말이오. 생각을 이런식으로 했다 그 말이오. 의무라고 할 때에는 생의 목표와 하나님이 내신 사명이라는 것이 늘 붙어 다니는 것이고 권리라고 할 때는 그런 것은 상관없이 내가 취하려면 취하고 또 안 하려면 안 할 수 있다는 거요. 사명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신성한 의무의 선에 있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취했다 그 말이오. 하나님의 말씀이, 즉 먹으라는 말씀이 그에게 그 사명과 어떻게 심각하게 관계되었다는 것을 생각을 안 할 때는 단순히 이것은 자기에게 권리요. 쾌락을 위한 권리다. 자기 자신이. 여기서 하와의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심히 불분명하다 하는 것을 자꾸 느끼는 것이오. 하나님이 왜 그걸 주셨는지 아나, 그런데 거기에 대한 인식은 없지 않느냐, 거기에 대한 인식은 없어요. 적어도 그 일에 대해서 거기에 대한 인식에 대한 아무 표현이 없지 않느냐 그거요.
그리고 이 문제가 묻는 물음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참말로 먹지 말라고 했냐 엉뚱하게 마귀가 물을 때에는 어느 점에다가 emphasis를 줬어요? 강조를 했어요? 아, 참말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했냐? 어떤 점에다가 강조를 한 것이오. (먹지 말라). 적극적으로 먹지 말고, 하나님이 못하게 한다든지, 즉 하나님이 당신의 권리로 꽉 막아 놓은 것 아니냐, 참말로 그랬느냐 즉 하나님이 무엇을 못하게 했다는 것을 지금 인상을 주려는 것 아니오? 하나님, 하나님이 어째서 너희가 지금 에덴 동산에 살면 에덴 동산에 있는 것을 너 자신은 취할 권리가 다 있을 텐데 그걸 못하게 했을까, 하나님이 뭐 어째서 하나님이 거기다가 아직도 하나님의 그 종주권을 거기다가 주장하고 네게 맡겼으면 너한테 딱 맡겨 버리고 딱 잊어버리고 결과나 바라고 앉았지 않고서는 앉아서는 시비 시야 비야 간섭하려 한단 말이냐, 하나님은 왜 제왕 노릇을 하느냐, 그리고 너는 밤낮 그 식민지 백성 노릇 하느냐 그런 얘기요. 거의 생각하는 것이 마귀의 말이라는 건 그러한 track에다 놓고 그러한 방향에다 놓고 얘기를 한 것이오.
즉 하나님이 뭐를 자꾸 금한다, 금하는 하나님 아니냐, 참말로 그것 다 금했느냐, 마치 하나님은 그럴 수가 없는데 어째서 그랬단 말이냐 그 얘기요.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다 금하셨단 말이냐, 그거 못하는 것 아니냐, 어떻게 말하면 하나님이 너무나 독재를 하신다든지 하나님이 너무 권리를 많이 가지고 전담을 하신다 어디 그럴 수가 있느냐 하는 말로도 들릴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실텐데 그렇게 독점하실 수가 없는데 아, 그렇게 당신 혼자 다 차지할 리가 없는데 참말로 그럴 수가 있는가 하니깐 아니 하나님은 그러시진 않았어. 하나님이 동산에 있는 실과는 먹을 수 있게는 했지. 그렇지만 저건 못 먹게 했어 하면서 하와가 대답한 건 역시 마귀가 말 할 때의 그 tone, 항상 하나님이 뭘 금했다는 데다 저도 같이 emphasis를 놓고 들어갔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주신 큰 동산에 있는 나무의 실과에 대한 문제는 금한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까? 먹으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까? 항상 먹으라는 것이 중요한 거요. 적극적인 것이 더 중요한 거요.
여기 기독교에 대한 그 인식과 동양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과의 차이가 거기 있어요. 항상 소극적인 문제에 중점을 두는 게 동양 종교요. 항상 적극적인 것에다 항상 중점을 두고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거요. 이것이 참 중요한데 좀 금식하고 항상 수도하고 절제하고 뭐 않고 뭐 않고 하지 말라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이 동양 종교에서 사람을 형성해나가는, 도인으로 형성해 나갈 때 중요한 계율(戒律)이 되는데, 계(戒)가 되는데 기독교에서는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 다 얘기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해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에 강조를 두는데 그것이 전부다, 그런고로 성경에서도 항상 그 가르치는 강조한 점이 무엇 하라는 것에 두었느냐? 하나님의 품성을 행하고 살아라 그거요. 하나님의 사명을 맡아 가지고 나가거라. 뭐하지 말아라. 뭐하지 말아라, 이런 데다 자꾸 중점을 두지 말아라 그거요. 뭐하지 않는다 그리고선 아무것도 안하고 요러고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든지 나중에는 혼자 갇혀 있든지 그거 의미 없지 않느냐? 너는 가거라 하는 것이 중요하지 넘어지지 말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오. 가거라 죄우간. 가다가 넘어지면 또 일어나라 이것이오. 이것이 참 중요한 거요.
여기서도 그래요. 하나님께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어라, 먹고서 너는 살고 살아서 내가 네게 주는 그 은혜의 거룩한 목적을 향해서 자꾸 나가거라. 그리고 있노라면 그 생명 나무 있지 않느냐 그걸 먹어라 그거 먹어 가는데 도중에 너 꼭 touch하면 안 될 것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그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다 그걸 touch말아라. 그건 먹지 말아라 그거요. 그것은 네가 먹으면 안 된다. 그러면 죽는다 어떻게 말하면 그건 하나님께서 어디가 위험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거요. 어디에 test case가 있다는 걸 가르치는 것뿐이오. 그러면 그건 먹는 생활을 하게 만들고 먹는다는 생활 가운데 있는 test case인 거요. 그런고로 먹는다는 걸 전제로 하고 먹는 문제를 가지고서 하나님이 그 금단을 내리신 거요. 먹는다는 것.
사람이 안 먹어도 괜찮게 처음부터 만드셨으면 먹는다는 의무가 없이 만들었으면 이것이 시험이 되지 않는거요. test라는 것이. 사람이 꼭 먹어야만 하겠는데 무얼 먹어야 할 것이냐?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넉넉히 먹고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안 먹는 것이다 그 말이오. 오늘도 마찬가지요. 하나님이 네게 주셔서 먹게 하신 것을 너는 먹고살면서 하나님의 나라 일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을 가지고 네가 가서 따먹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아주 지혜를 얻게 할만큼 탐스런 나무라고 해서 따먹고 살아봐라 뭣이 되는가? 안 되는 것이다 그 말이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요.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먹고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해라 그것이오. 네 사명을 그렇게 수행해라. 먹으려면 따먹으러 다녀야지 가만히 앉아서 입 벌리면 떨어지는 건 아니오. 그러나 적어도 따먹을 것이 있었고 그래서 따먹으러 다니게 만들었어요.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따 먹으러는 다니는 것이오. 그러나 하나님이 따먹게 하신 것을 따먹는거요. 아무 것이라도 가서 덮석덮석 다 따먹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먹지 말라는 데다 중점을 둔 것같이 마귀는 늘 negative한 데다 중점을 두고서 이야기를 한단 말이오. 이 교묘한 방식이라 말이오.
마귀가 이렇게 할 때 여인이 거기 꾀임에 들어간 것은, 첫째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이해 못한 까닭에 그렇다 그 말이오. 하나님이 먹으라 하신 본의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을 해야 할텐데 그 말씀의 뜻을 해명치 않고 그냥 들었다 그 말이오. 이건 자세히 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그 말이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바로 연구하고 자기가 바로 해명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구나 하고 확신을 하는 것이오. 그 확신이 있을 것 같으면 이런 짓 않는거요. 그에게는 그런 확신이 없어요. 지금 하와에게는. 왜냐하면 확신이란 건 허위의 터 위에서, 부진실, 거짓의 터 위에는 안 서는 거요. 거짓말의 터 위에는 안 서는 건데 하와 자신은 지금 정당하게 정확하게 인식을 않고 있는 까닭에 그런 불분명한 인식이나 그런 공허한 터 위에 신앙이란건 서지 않는 것이오.
우리는 신앙의 요소라는 걸 배웠어요. 그동안. 신앙의 요소의 제일 첫째 가지는 그 상당한 양의 바른 지식이라 그랬어요. 바른 것, 바른 걸 알아야 한다 그 말씀이오. 바로 알고 있어야 참된 믿음이 생기는 것이지 거짓말 알고 있고도 거기서 무슨 믿음이 생기는 그럴 수가 없는 거라고. 자기는 믿는 줄 알지만 그건 공허한 감정인 것이다 그 말이오. 참 구원의 신앙이라는 기본적인 요소의 첫째 가지가 지적인 요소, 혹은 바른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말씀이오. 바른 것을 알아야 하는데 하와가 첫째 바른 것을 충분히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이오. 그 알고 있는 것이 빈약했고 또 알고 있는 것의 해명이 부족했다 그 말이오. 빈약과 부족이라는 것, 알고 있는 양이 부족하고 또 그것이나마도 대단히 빈약한 상태에 있었다는 그건 그에게 그만큼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고 이 확신이 없었다는 건 마귀가 쏜 화전을 맞았다 그 말이오. 마귀가 쏜 화전을 막아 내려면 무엇이 필요해요? 믿음이라는 방패요. 믿음이 없으면 맞는 거란 말이오.
그래서 아까 믿음의 방패라는 건 아담에게나 하와에게 필요하다는 걸 우리가 제일 처음에 생각한 거요. 마귀하고 싸우려면 처음에는 마귀는 화전을 가지고 쏘니까 쏘는 놈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야 하는데 그 믿음의 방패란 게 뭐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고 말씀에 대한 확신은 말씀에 대한 바른 해명과 인식에서만 생기는 것이지 해명도 없고 인식도 없는데 신앙이 저절로 안 생긴다 그 말이오. 즉 공허한 종교 감정을 신앙으로 오해하는 것은 그릇된 이야기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다 하는 말은 믿음의 요소들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 말이오. 그래서 믿음이 성립하는 것이오. 믿음이란 것이 따로 그냥 갑자기 믿어진다 갑자기 믿어진다 하고서는 이상하게 자기 심리 상태가 괴상하게 변명하는 그런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오. 믿을 만한 심리의 과정, 영혼의 기능의 과정을 반드시 요하는 것이다 그 말이오. ‘믿음을 주옵소서, 믿음을 주옵소서’ 해 놓고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밤낮 기도하면서 그 믿음을 가지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여기 분명히 하나님이 내게 주셨는데 그건 자기가 공부하지도 않고 연구하지 않고 해명하지도 않고 풍부하게 가지지도 않고 그저 믿음만 달라고 갑자기 마음 가운데 뜨근뜨근해지긴 바라고 뭐 이상한 심정이나 생기기를 바라고 그런 이상한, 개괄한, 그냥 막 통으로 삼켜먹는 그런 것 되지 않는 것이오. 실지로 교회가 믿음이 있다 하는 것도 믿음의 요소가 분명해야 하는 것이고 그건 풍부한 해명과 정확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오. 그런데 그것이 하와에게는 첫째 부족했다 그래서 부정확하게 인식했다면 그건 필연적으로 그릇된 방향을 늘 취하고 있었다 그 말이오.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나 말씀이 내리신 바 그 거룩한 계시가 무엇이었는지 말씀의 tone을 이해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이오. 여기에 하와의 큰 약점이 첫째 있었어요. 마귀가 공격을 할 때 처음에 방패를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를 보는 것이오. 마귀가 천리안을 가지고 무소부재하는 것 아니오. 마귀가 그렇게 굉장한 것이 아니라 말이오. 마귀도 모르는 것이 많고 마귀도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심하는 것이 있고 다 그렇게 제한이 있는 거요. 피조물인 까닭에 피조물이 받는 모든 제한을 다 저도 가지고 있는 것이오. 그러나 사람의 상태를 알 때는 사람을 모두 끄집어내어서 시험을 해보는 거요. 그걸 교묘하게 잘 해요. 아주.
하와가 얼마만큼 이 화살에 대해서 응수를 해 줄 것인가 할 때 처음에 화살을 하나 탁 쏘아보니까 척 받아내야 할텐데 믿음의 방패라는 것이 없고 슬금슬금 들어간다 그 말이오. 아, 요것 됐구나. 그 다음에는 막 사정없이 쏘아 잦혔어요. 그 다음 문제는 사정없이 쏘아 잦히니까 그냥 넘어간 거요. 마귀가 화살을 이 때 처음으로 쏜 것은 아니겠지만 다른 데서는 쏴도 안 됐지요? 서로 대화도 해 보고 얘기도 해 보고. 그런 마귀한테 친숙성을 가졌다는 것이 이제 큰 화근은 화근이오. 글쎄. 어쩌려고 이렇게 뱀이 얘기를 하고도 뱀하고 친하게 지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오. 뱀하고 친하게 지냈다는 말은 안 썼지만 이 말 하는 것 보면 친하게 지냈다 말이오. 그 성경이 그렇게 자질구레하게 안 쓴단 말이오. 특히 모세의 문장은 그런 걸 자꾸 약(略)해요. 그 사실(fact)만 딱 내놓으면 realism의 fact만 reality하게 딱 내놓으면 나머지는 거기 붙어 나오거든요. 그러나 그걸 약하고 뭐 지지한 소리 한국 사람 소설 쓰듯이 소설 쓰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얘기를 알면 해석할 길이 없어요.
여기에 숨어있는 얘기 안 쓰더라도 설명을 이 표현을 일일이 않고 explain을 않더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진리에 대해서는 다 생략해 버리는 거요. 마귀는 하와하고 친숙하다는 건 당연히 볼 수 있는 사실이오.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 친숙해졌나 어떻게 말을 하는 데도 사람의 말을 하고 사람의 생각을 하고 사람의 사고의 과정을 가지고 제안을 하는데도 거기에 대해서는 단 일호의 의문을 안 붙였나.그런 것 보면 굉장히 친했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를 안 삼았구나. 안 삼을 만큼 친하게 됐다 안 삼을 만큼.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다가 자꾸 가까이하니까 나중에는 친해지게 됐구나.그래서 그 마귀의 그 사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자세히 연구를 안 해보았다 그 말이오. 아마 속였는지도 몰라요. 뱀이. “아, 난 원래 그렇게 만들어 졌어”하고 막 속여먹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것도 모든 뱀이 다 그렇게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나하시(שׁחנ) 이놈 하나가 특별히 와서 그렇게 하니까 그것 참 이상한 것이 하나 있구나 하고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인데, 그리고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돌아다니니까 “아, 우리 에덴 동산이 참 좋기는 좋아도 괴상한 것이 하나 있어” 하는 것을 내외간이 얘기를 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잘 만들어 주셨지마는 저것은 무엇인지 모르겠어” 그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나님이 무슨 사명을 줬어요? 아담에게. 그 짐승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했어요? 다스리라 그랬어요.
다스릴 놈을 다스리지 못하고 무엇인지 모르고 정신 모르고 앉았으니 그것도 사실은 의무의 태만인 것이오. 적극적으로 다스릴 것을 다스리는 대신 친구 삼아 가지고 있었단 말이오. 여기 아주 큰 약점이 있어요. 이러한 것들이 먼저 아주 큰 약점이오. 이런 것이 적극적으로 죄에 시험에 빠졌다는 것은 아니나 시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그것을 수단으로 쓰고 들어오는 것이다 말이오. 가까이 와서 근접한 거리에서 쏜다 말이오. 쏘기에 가장 유리한 자리를 점령하는 것이오. 마귀가. 최초의 인류와의 대결에서 마귀는 자기의 기반을 굳혔어요. 자기의 자리. 쏠 자리라는 것은 하와와 친숙하다는 자리요. 그게 가장 유리한 잘인 줄 알았어요. 그 유리한 자리에 들어 왔어요. 언제든지 마귀는 그래요. 언제든지 자기의 어디가 가장 유리한 자리인가, 자기의 진지를 딱 굳히는 것이오.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들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제 이 제일 처음 인류의 타락의 그 scene을 지금 저희들이 상상해 가면서 말씀에 의거해서 그 때의 있었던 일들을 여러 가지를 추리를 할 때, 성신님 저희를 주장하시고 거룩한 빛으로 비추어 주셔서 그릇된, 잘못된 생각이 들어오지 아니하게 하시고 확실한 근거, 저희의 논리의 발전이나 이 추리의 과정에 튼튼한 힘을 주셔서 정상적이고 정당하고 건강하게 전진케 하시고, 전적으로 그릇된 곳으로 빠져들어가는 일이 없게 주께서 붙들어 주시며, 이러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성신님으로 계시하시는 깊은 사실들을 저희들이 깊이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고,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오늘날 어떻게 실용되며 어떻게 이것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검을 쥔 것같이 능력 있게 나아가서 싸울 수 있을까를 바로 생각하게 하옵소서. 주여, 이것을 저희들이 이렇게 가지는 것은 성신의 검으로서의 이 말씀을 우리가 가져야만 앞으로 올 싸움을 싸우겠기에 아버님께서 저희에게 요구하시는 바 이 검을 가지기 위해서 이렇게 하오니 성신님 저희에게 충만히 역사하시고 이 거룩한 도리를 바로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귀에 대하여
제10강
벧후 2:1-22
우리는 지금 마귀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는데, 최초에 마귀와 인생의 대결에 있어서 결과는 참패, 사람의 참패인데요, 어찌하여 사람은 참패했느냐? 그 참패한 그 결과로서는 무한한 비극을 인류의 역사 위에 가져온 것인데, 이런 무한한 비극이 다가올 그 무서운 참패, 그런 가장 중요한 싸움에서 그 후에 오는 인간의 마귀하고의 싸움은 거기에 비할 때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오. 맨 처음같이 그렇게 아주 결정적인 모든 영향을 전 인류 사회에 끼칠 수 없는 것이오.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참패했느냐 할 때 여기서 우리가 이제 중요한 것을 배우고 넘어가야 할 것인데, 그 참패한 역사 혹은 참패한 경과를 조금 생각해 보지요.
하와의 상태, 하와는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에덴에 있었어요. 하와는 에덴에 있었는데 마귀와 대결해서 시험에 떨어져 참패하는 시간까지 하와의 상태는 어땠느냐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첫째 공부할 중요한 문제요. 하와는 에덴에 있었지요? 그때 에덴은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였는가? 참으로 거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그런 세계였지요. 거기에 불의가 그 세계에 마귀를 빼놓고는 없었지요. 거기에 부조화도 없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고 그랬어요. 사람에게 있어서는 고통스러운 일도 없고 부조화가 없다는 것은 안정하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요. 거기에 분명 마귀가 있다는 것은 특이한 사실의 하나요. 거기에 마귀라는 하나님께 대해서 반심을 품고 사람을 어떻게 하든지 시기해서 넘어뜨리려는 악의를 품은 자가 있다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것도 아직 노골적으로 제 마음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처지는 아니지요. 마귀도.
그런데 한가지 여기서 중점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좋다든지 아름답다든지 평안하다든지 하는 파라다이스(Paradise)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고 제일 중요한 문제, 사람이 어떠한 환경에 가 있든지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어요. 내가 어떤 환경에 가 있든지 평안한 사회 또 즐거운 사회, 안정한 사회에 가 있을지라도, 괴롭고 불안한 사회에 가 있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겠나 하면 나를 중심삼고 생각할 때는 나에게 무엇이 가장 유리한 사회냐 하는 것을 보통 생각하지만, 모든 생각하는 방식이 그래서는 아니된다 하는 것을 우리가 다 배웠어요. 모든 생각하는 방식은 누구를 중심삼고 생각해야죠? 늘? 하나님. 하나님 나라. 그렇지요?
그러면 결국 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하나님을 늘 중심삼아 가지고 그 나라를 생각해야 할 것인데,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강한 성격은 그 아름답다든지 평안하다든지 그런 겁니까? 그것 이외에 더 강한 성격이 있느냐 하면, 그것 외에 더 강한 성격이 하나 있는 것입니다. 그건 뭐냐하면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사실이 더 제일 중요한 문제요. 아름답지 아니했든지 아름답든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의 대권이 강력하게만 작용하고 있으면, 그게 그때 사람이 보기에는 고통스럽고 불안스러울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란 말씀이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의 정도에 따라서 어떤 세계가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름답지 않은 세계인 거요. 어떤 세계가 다른 한 사람에게는 평안하지만, 갑에게는 평안한 사회가 을에게는 불안한 사회일 수가 있는 것이오. 예를 하나 들면 질서가 정연하고 치안이 잘 유지된 사회에는 정직하고 공명한 시민에게는 그것이 의지할만하고 평안한 사회지만, 도적놈들한테는 그것이 불안한 사회인 것이오. 도적놈들은 도적질한 일이 있는 까닭에 경찰의 기찰이 심하고 또 불의한 것을 탐색해 내는 그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공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기쁘고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불안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항상 불안해서 혹여나 지은 죄가 발각돼 가지고 붙들려 가지 아니할까 그런 것이오.
그런고로 죄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은 결코 평안한 통치가 아닌 것이오. 죄가 많으면 많을수록 죄에 대한 형벌에 대한 공포가 강해지는 것이오. 그런 까닭에 그건 공포와 전율, 불안 이 속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오. 평안한 사회는 아니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니까 사람들의 그 타락과 부패한 상태에 기쁨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늦추고 그저 사람에게 거져 모든 사람에게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다 평안만 줘야겠다 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 그 말씀이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되 평안을 주시기 전에 조건으로는 죄를 가지고 죄 가운데에 평안을 누리게는 안 하신다 그거요. 죄 문제를 해결해 버리고 즉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을 가지시고 죄를 회개하고 죄 문제를 낙착을 짓고 주시는 바 평안에 함께 올라 오라는 그것이지, 죄 있는 자는 죄 있는 데서 그냥 평안함을 얻으라는 것은 아니라 말이오.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강한 성격이라는 것은 평안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그런 사람의 정도, 사람의 몸뚱이, 사람의 생각에 접촉해 가지고 어떠냐 하는데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얼마나 강력하게 그것을 통치하고 계시느냐. 이 말은, 통치하고 계신다는 이 말은 다른 말로 말할 때는 통치를 받는 사람과 통치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하냐 하는 문제요. 긴밀한 관계를 가질수록 그게 잘 통재되어 있는 것이오.
그러면 에덴의 가장 아름다운 상태라는 것은, 에덴의 가장 특이한 성격이라면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이 세계에서는 맛볼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실재가 생생하고 현현하다는 사실이오. 즉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그 이상 더 가까울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상태에 있었고, 그 사이에 개재할, 그 사이를 가려놀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 그것이오. 그렇지요? 또한 둘째는 단순히 사람이 오늘날 우리와 같은 상태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니오. 사람이 아직 죄를 경험하지 못한 순수한 상태에서 가까웠다 그 거요. 죄를 경험하지 못한 순수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해서 그 이상 더 가까이 할 수 없는,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무엇이 현저하게 그 마음 가운데 중요한 사실로 있겠는고 하니, 하나님은 그 마음에서 압도적으로 지배하신다는 사실이오. 하나님은.
둘째는 하나님은 압도적으로 지배하신다는 사실은, 동시에 아담이고 하와고 누구고 하나님께 대해서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다는 말씀인 것이오. 오늘날 우리들은 이 사실이 참 중요하니까 아주 중요히 그걸 줄을 쳐 보세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는 그 환경이었다 말이오. 왜냐하면 의심을 품을 경험을 갖지 아니했어요. 의심을 품을 만큼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의심을 품을 이유가 없는 거요. 오늘날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많이 의심을 품고 있어요. 첫째 하나님이 계시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것이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하나님이 과연 그렇게 사랑하시느냐, 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다면서도 하나님은 세세한 문제까지 과연 돌아보시느냐, 거기에 대해서 다 의심을 품는 것이오.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보고도 그 사람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 대해서 의심을 전혀 안 품는, 절대 의존하고 사느냐고 하고 물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극진히 사랑하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돌아보신다고 믿으면서도 일단 유사해서 꼭 그것을 믿지 아니하면 아니될 크라이씨스(crisis)에 딱 임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렇게 자세히는 돌아 보실 수 없다는 그런식 이론하에서 행동하는 수가 있는 것이오. 그렇게 자기가 절대로 고백도 않고 그렇게 말을 안 해요. 어디 그렇게까지 과연 하나님이 계시느냐? 그렇게까지 생각을 않는다 그 말이오. 그렇게까지 치밀한데까지 하나님은 이제 보시고 주장하시고 권고하신다까지 그렇게 생각해 가면서 않는 일이 훌륭한 신자 가운데도 많은 것이오. 이것도 일종의 의심인 것이오. 하나님이 과연 돌아보시느냐고 말을 내서 의사를 내야만 의심은 아닌 것이오. 의심이라는 것은 그 마음,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빈틈없이 의지하지 않으면 그건 의심이라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살면서 그렇게 의심을 하게 되느냐 하면 이유가 있어요. 속아본 경험이 많은 까닭에 그런 것이오. 또 과거에 신뢰한다고 신뢰해 봤다가 그 신뢰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을 여러 번 생애를 통해서 경험한 까닭에 그런 것이오. 비교적 그런 것이 적은 것은 어린아이들이오. 아직 속아본 경험이 많지 않으면, 더군다나 좋은 가정 환경에서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어렸을 때는 참 순진한 것이오. 아주 환경이 나쁜 데에서 자란 아이들하고, 같은 나이라도 하나는 아주 그냥 먹다 남은 쑥맥같이 순진해 난(生) 그대로 있는 것이오. 순진해 버리는 것이오. 왜나햐면 속아보지 않았거든. 부모한테도 속아본 일이 없고 그 주위에서 한 번도 속여 먹지를 아니했거든. 신실하게 다 대해주었거든. 그러니까 세상이 다 그렇게 신실한 줄로 생각하는 거요.
예수께서는 그런 아이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의 마음이라고 가르쳤어요. 돌이켜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랬어요. 순수해야 해요. 있는 그대로 가장 자기를 겸비해서 딱 의지해 버리고 걱정할 것 없이 생각하는 그런 심정을 취하게 해 주신 거요. 그런고로 아동을 다스리고 다루는 사람들도 다 어린아이가 너무 일찍부터 패 가지고, 일찍이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면 못쓴다 그 말이오. 애가 너무 제 나이에 지나게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사람을 요리조리 눈치만 보고 앉았고, 달고 앉았고 그러면 그 뭐냐하면 분명히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지 않았다는 표시인 것이오. 순전하게 아주 솔직하게 딱 의지하는 이것이 없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요러고 의심만 하고, 겉넘어 집기만 하고, 고 깜찍해서 볼 수가 없는 거요. 흔히 고아 같은 애들 보면 그렇게만 하는 게 아니라 속이기까지 하는 거요. 엉뚱한 거짓말까지 싹하고 안 그런 체하고 앉아 있고. 그것 왜 그러느냐 하면 속아본 경험이 많아서 그래요. 그 자기가 신뢰하고 믿을 대상이 없었다는 그런 것들이 그런 데서 생산되는 것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듣고 와서 그것 참말로 그랬을까 하고 말할 때 그 말을 탄하지 않는 거요. 의심하는 것도 용혹무괴(容或無怪:혹시 그럴 수 있더라도 괴이할 것이 없음)다. 의심을 하는 것도 의혹을 하는 것도 무괴(無怪)다. 무괴한 일이다. 괴이(怪異)치 않은 일이다. 왜? 이 세상에는 의심할 만한 일이 하도 많은데, 그 세상에 살면서 모든 것을 곧이 곧대로 곧이만 듣는 것은 먹다 남은 쑥떡 아니냐? 그러니까 그저 의심하는 것도 그렇게 괴이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의심을 일단 한 번 해보라고까지 잘 가르친다는 푼수의 하는 것이란 말이오. 모든 것을 다 다루고 재어보고 이러는 것이지 그만 딱 곧이 들었다가 어떻게 사기꾼한테 넘어갈지 아느냐? 그렇게 자꾸 사회 생활할 때는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그러니까 참말로 그랬을까 하는 것을 탄할 수가 없지만, 에덴에서 사람이 아직 죄를 범한 경험이 없고 하나도 실망한 경험이 없고 의심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가진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의심을 한다면 그건 굉장한 타락인 것이오. 무엇 때문에 그랬겠느냐? 여러분, 그럼 그것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한 말과 그 말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랬다 하더라” 이렇게 생각했는데, 마귀가 “아,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먹으면, 먹는 날에는 하나님같이 되어서 눈이 밝아 가지고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겠기에 그런 것이다” 하는 이 말을 할 때, 그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곧이 곧대로 그냥 딱 곧이 들었으면 그런 말이 들어갈 빈틈이 없을 참이오.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곧이 곧대로 딱 곧이를 못 듣고 마음이 해벙덩해 가지고 그것을 부인하는, 반명제를, 부인하는 말을 용인했다 그 말이오. 부인하는 말을.
우리가 좋은 가정에서 자라난 순진한 어린 아이를 일곱 살이나 여섯 살이나 먹은 어린 아이가 모든 것을 제 어머니 아버지에게 딱 의존하고 어머니, 아버지가 한 번도 그 아이에게 실망을 주지 않아서 어머니의 말이라면 그냥 뭐 팥으로 메주를, 콩으로 메주 쑤는 것을 모르지 모르기는, 아이들은.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까? 밥이 금방 변해가지고 그러면 물이 된다고 그러더라도 곧이 듣겠다고 하지요. 그런 아이를 보고 어머니가 “아가, 내가 조금 있다가 너하고 같이 저기 시내에 나가서 너 이것 사 줄테니까 기다리고 있어라. 응! 아가, 그래!” 그러면 꼭 그대로 기다리고 앉아 있지, 조금 있다가 저가 원하던 것을 사줄테니까 어머니가 오기만 기다리고 앉아 있지 올련가 안 올련가 이런 것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 아니오? 그런데 누가 뚱딴지, 딴 사람이, 엉뚱한 사람이 와서 “네 어머니 이제 절대로 안 온다. 올 수 없어. 어디 괜히 너를 돌려 놓고서 지금 당신 일보려고 도망갔어. 야, 안 와.” 그러면 어떻겠어요. 그러면? 그 애가 그 말을 곧이 듣겠는가 안 듣겠는가? 그 말, 그런 말하는 소리가 들어오지도 않을 거라 말이오.
그런데 그냥 딱 (어머니의 말을) 곧이 듣는 것인데, 하와의 경우는 어땠어요? 그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의지한 것만큼만, 의지할 만큼 상태가 순조로왔는가 그보다 더했는가 하면, 그보다 더한 상태요. 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태요. 하나님과 그렇게 가까울 수가 없이 가까운 시대, 또 한번도 남에게 속아본 일이 없는 시대, 그런고로 속임이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대. 그냥 그대로 순진한, (태어)난 그대로 하나님만 딱 의지하고 있는 시대요. 아, 그런데 무엇이 어찌했기에 하와는 그 마귀가 와서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죽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엄포다. 하나님의 말이야 죽는다고 했지만,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될까봐서 못 되게 하려고 그런거야” 하고 그런 말로 아주 악질적인 말로 말할 때, 대체 그 말을 그렇게 쉽게 곧이 들었다는 것이 도무지 너무나 이상한 이야기요. 그 말. 이건 뭐 먹다 둔 쑥떡도 그렇게 못할 텐데 무슨 일이냐? 굉장히 어디가서 밤낮 넌 속아본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하나님도 날 속이지.” 그렇게 혹시 그렇지 않을까 하고 엉뚱하게 생각하고 있다가서 마귀가 와서 “그것 봐라. 하나님이 널 속이는 것이다” 하니까, “옳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저것 못 따먹게 하려고 일부러 나를 속인 것이지” 하고서 따먹은 푼수가 되었다 말이오. 이러한 하와의 마음 상태라는 것은 여기 창 3:1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이런 하와의 마음 상태라는 것은 대체 어째서 그런 상태에 이르렀을까요? 여기서 무슨 이유가 하나 있을 거요. 그런고로 3:1이하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이 이야기는 말이오. 1-6절까지의 이 상태는 하와의 마음에 아무 준비 없이 일어난 상태가 아닌 것이란 말이오. 하와의 마음에 찍으면 넘어지게, 찍혀 있는 아무것도 없던 튼튼한 나무가 아니라 그 말씀이오. 도끼를 찍어놓고 한번 탁 찍으면 넘어가게 되는 거요. 대체 그 짐승이 말을 하는 것도 의심을 안 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알 수 없는 이야기지만, 여기 이 상태라는 것은 더 의심스러운 이야기요. 대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었을꼬.....!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못했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직접 이렇게 에덴과 같이 가질 길이 도저히 없고 한 까닭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없다 그러고, 하나님의 사랑도 의심하고, 하나님이 돌아보시는 것도 의심하고 그러지만 하와야 하나님을 의심할 이유가 없어요. 왜? 조금 있으면 이제 하나님이 불러내실 참이거든. 조금 있으면 하나님 목소리인 줄 알고 의심할 여지 없이 “네” 하고 대답하고 가는 거고. 하나님을 의심할 여지가 있었습니까? 부를 때 의심할 여지없이 대답했거든요. 조금 있으면. 이렇게 긴밀한 관계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그 다음에 곧 들으면서 어째서 하와는 하나님께 대해서 그렇게 의심을 했나?
그러면 의심을 한다고 할 때, 의심한다고 할 때는 문제가 여기 하나 있어요. 어떻게 하면 갑이라는 사실을 내가 믿었다가 그걸 의심하고 을이라는 사실을 취하게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일반적인 경우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 신뢰했던 갑이라는 것을 의심하고 그 대신 을을 믿게되는가? 사람이 말을 곧이 들었다가 그 말을 곧이 안 듣고 그 다음에 오는 다른 말을 곧이 들을 경우에는 반드시 어떤 관계, 조건하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 조건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람이 말하길래 “아, 그런가” 했는데 그 다음에 누가 와서 “그것, 안 그렇다” 그러면, 안 그렇다고 하는 말을 내가 곧이 들으려면 안 그렇다고 말한 그 사람을 내가 더 신뢰해야 하는 것이오. 그렇지요? 더 신뢰해야 해요.
그러면, 안 그렇다고 하는 말을 더 신뢰하려면 그건 무엇에서 더 신뢰하게 되느냐 하면, 그와의 관계가 먼저 말한 사람 갑과의 관계보다 더 깊어야 하는 것이오. 둘째번에 와서 안 그렇다고 부인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더 깊어야 한다 말이오. 그래서 그 부인하는 사람, 이 을이라는 사람에 대한 나의 신뢰가 더 깊어야 한다 말이오. 그의 말을 먼저 말한 사람의 말보다 더 곧이 들을 만큼 깊은 관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내가 갑이라는 사람에게 긴밀한 관계, 이 어떤 사람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면 이 갑이 한 말에 대해서--갑이 어떤 사람인가를 다 알고 있을테니까--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오. 안 믿을 것은 안 믿고 믿을 것은 처음부터 믿는 것이고, 한번 믿은 다음에 그것을 뒤집지는 않는다 그 말이오. 그렇지요?
그러나 믿었던 것을 뒤집으려 할 때에는 첫째는 내가 그 곧이 들었다는 대상, 그 사람과의 관계가 희미한 데가 있어서 그 사람이 거짓말도 하기는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그를 잘 모른다 그 말이오. 그 정체를 잘 모른다 말이오. 그 대신 여기서 그것 아니다 하고서는 그놈을 뒤집어 가지고서는 이야기 하는데도 이 말을 곧이 들으려면, 이 사람은 지금까지 나를 속이지 않는다 하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이오.
그러면 그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여기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여기 마귀가 와서 말하는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마귀가 부인할 때 부인하는 마귀의 말을 곧이 듣게 되었다면, 지금까지 믿었던 하나님의 말을 부인해 버리고 오히려 자기가 안 믿고 그리고 부인하는 마귀의 말은 곧이 듣게 되었다 할 것 같으면, 거기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때 뱀과의 관계보다 소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하나님께 대한 신뢰할 만한 요소가, 즉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인식이 뱀에 대한 인식보다 훨씬 옅었다 하는 이야기요.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나님은 의심할 만한 분이냐? 그 잘 몰랐다 그 말이오.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속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만의 하나라도 속일 수 있을 거라는 그러한 정도로 인식한 신관(神觀)이었다 그 말이오.
그 대신 뱀과는 관계가 훨씬 더 깊어서 뱀의 한 말에 대해서는 하! 과연 그렇구나 하고 신뢰할 만큼 가까웠다. 이건 뭐냐하면 더 줄여서 깊이 들어가서 말하면 하나님게 대한 사랑보다 뱀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그 이야기요. 하나님과의 사랑보다 하나님과의 fellowship(교제)보다는 뱀과의 교제가 더 깊었다. 뱀의 말이라면 그 뭐라고 하더라도 믿을 만큼 깊어졌다 말이오. 이 사실이 아주 결정적인 사실이오. 결국 뱀과의 교제가 그렇게 깊었구나. 다른 누구의 말 보다도 뱀의 말을 곧이 듣는구나. 왜? 비록 하나님이 하신 말씀까지라도 뱀이 부인할 때에는 부인하는 쪽으로 따라갔다 그 이야기요. 부인한 편을. 하나님께 대해서도 부인했는데도......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할 문제는 하와가 이 금령을, 선악과에 대한 금령을 받기는 직접 하나님께 받은 건 아니겠지요. 선악과의 금령은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아담을 창조하고 주신 거라 말이오. 2:17절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리고서는 이제 18절 보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까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그 다음에는 중요한 문제냐 하면, 여기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는, 하와는 이 금령을 아담에게서 들었으리라는 것이오. 아담이 이 금령을 받았지요? 그런 다음에 하와가 창조되었지요. 그러니까 하와가 창조되어 가지고서 하와가 떡 생겨난 이후에는 아담이 하와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을 거란 말이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어야 한다. 그 당연히 먹어야 한다.” 이 먹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저 실과는 먹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 줬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하와는 아담한테 이걸 배웠을 것이오. 아담한테 배웠는데, 그것이 자기네에게 중요한 문제인데 그 때는 그만 그만큼 들어 두고 말았겠지만 뱀이 와서 이런 말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할 때는, 만일 아담과의 관계가 훨씬 긴밀하다면 아담한테 와서 “뱀이 와서 이렇게 이렇게 그 금영을 먹어도 안 죽는다고 그러던데, 당신 그것 들었다는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분명히 그렇게 된 거요?” 하고 한번 물어봄직 할 것 아니오. 그런데 한번 물어보지도 않고 뱀의 말을 딱 곧이 들었다면 남편이 가르쳐 준 것도 그렇게 대단치 않았다는 문제가 돼요. 여기서 보면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남편을 통해서 들었는데 남편이 하나님의 가르치신 것을 전해 주었는데도 그것에 대해서 주의를 안 했다면 이건 단순히 남편에 대한 그의 애정이 옅었다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 보다도 의미는 다른 데가 있어요. 남편에 대한 애정이 중요는 하지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을 듣고 하와에게 가르칠 때는, 단순히 남편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을 맡은 자로서 전해준 것이오.
이 사상은 이후의 히브리 역사 가운데 아주 중요하게 나타난 까닭에 여기서 우리가 미리 아주 선입관을 잘 두어두는 것이 좋아요. 제사권이라는것, 제사장의 직위라는 것, 이것이 발전해 나오되 처음에는 족장, 가장(家長)으로 발전되었어요. 그런고로 그 후에 볼지라도 아담도 제사를 드리고 그래서 그 때는 제사장이 따로, 직위를 가진 사람이 따로 어디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가족 안에서는 가족의 제일 가장되는 이가 그가 가장인 동시에, 가족 관계로 보면 가장인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아담은 하와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전하는 선지자요. 선지자. 제사장으로까지는 지금 필요 없어요. 지금 제사를 드릴 무엇이 없으니까. 죄 속죄할 만한 내용이 아직 없는 때니까. 그러나 속죄가 필요없는 세계에 있어서라도 하나님의 계시는 필요한 거요.
그런고로 계시를 전하는 사람, 기관(機關) 그가 곧 그 때는 선지자란 말씀이오. 선지자는 언제든지 제사장 보다 앞서서 나오는 것이오. 먼저 더 필요하다 말씀이오. 제사장은 어느 편이냐 하면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사람의 죄를 속하고, 고하고, 그 속함을 위한 기관으로서 먼저 일을 하고, 그 다음에 그 속한 결과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서 그 복을 전하는 축복의 기관이 되는 것이지만, 선지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선택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주신 것이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먼저란 말이오. 그러니까 선지자가 앞서야 하는 것이오.
그러면 아담은 남편으로 아내에게 살림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로 하나님의 사람에게,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하와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맡았다가 전해준 사람이라 그 말이오. 그런 점에 있어서 소홀했다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해요. 가정에서 그것이 소홀했다. 단순히 자기 가정 안의 가장으로만 생각했는지 몰라도 제사장으로서 그에게 대한 당연히 지불해야 할 자기의 존경이나 마땅한 태도, 경건한 태도, 말씀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가지지 아니했었다 하는 거요. 이것이 중요한 결핍으로 먼저 존재하고 있어요. 하와에게는, 만일 하와가 아담을 단순히 남편만이 아니오. 선지자라고 확신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자로 알고 그에게 말씀을 명확하게 배우고 깨닫고자 했을진대 어째서, 사람도 아닌 생물이, 짐승이, 들 짐승이 말을 해 가지고 가까이 와서 친숙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것을 논한다고 그 말에 올라타고 그 말을 그냥 곧이 듣고 뒤따라 갔다는 그 사실은 발생 안했을 거라 말이오. 그렇지 않은 데서 인제 발생한 것이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소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의 소홀, 그 말씀으로 말미암은 확인, 확증하는 태도의 그 소홀이라는 것이 결국 이런 일을 빚어낸 것인데, 하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만큼 소홀히 했는가를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 이상 더 가까울 수 없을 정도의 에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직접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직접 가질 수 있는 이 상태에서. 누가 더 이렇게 가까이 더 어떻게 할 수 없이 가까운 시대요. 아무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시대에서 의심이란 것이 발생했다는 것은 하와 자신이 얼마만치 하나님께는 멀리 있었고 그 대신 짐승, 미물인 짐승, 뱀과는 늘 가까이 교제를 했던가 하는 것을 여기 보이는 것이오.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하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 성경의 기록대로 보면, 혹은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러니까 멀었다. 멀어서 하와는 그저 남편을 통해서나 겨우 하나님을 알았지 직접 하나님은 몰랐다 이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건대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없을 것이오. 여기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3:13절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했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꾐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러면 하와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하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능이 있었고 듣는 사람이었어요. 하와는 하나님 말씀이 어디서 소리나는지 무슨 소린지 모르고 우뢰 소리같이--사울하고 같이 갔던 다메섹 노상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우뢰 소리 같은 소리만 들었다고 그랬는데--그렇게 들리는 것은 아니란 말이오. 하와는 분명히 그 위에 아담에게 하는 소리도 듣고 있었고, 그러니까 저도 그 대답이 아주 논리적으로 차례차례 나왔다 말이오. 순서를 따라서. 그러면 여기보면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니까 여자가 그렇게 대답을 했다. 핑계까지 했다 말씀이오.
그러면 하와는 ‘결코 자기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나 거룩한 교통이 없었다. 그러니까 몰라서 남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뱀이 와서 꾀니까 아마 남편보다는 뱀을 더 독이 들어서 넘어간 것 같다’ 하는 것은 억설인 거요. 아까 맨 처음에 드린 말씀과 같이 하와는 그때 상태는 지금 어떤 인류, 어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가장 좋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상태 가운데 있던 의심할 아무 여지가 없는 상태, 의심해야 할 필요도 없는 상태, 아주 가장 호조의 상태요. 거기 무절제도 없고, 거기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도 없었고, 질서가 정연했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늘 가까웠고, 그런 데서 그가 실패를 한 것이오.
그렇다면 그 책임이 중하고 경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그 중요한 원인이란 것은 한마디로, 너무나 그 (뱀의 관계가) 뱀과의 관계가 깊었다. 너무나 뱀에게 대해서 가지지 아니할 접근성을, 친화성(親和性)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 뱀과의 친화성이라는 것은 그 뱀이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문과 부인을 일으킬지라도 곧이 들을 만큼 뱀을 깊이 생각했다. 그러면 어떠한 친화성이냐 할 때 그 뱀을 신뢰하는 친화성이다 그 말이오. 신뢰하는, 보통 예뻐해 준다든지 좋아해 주는 정도가 아니고 믿어주는 것이오. 존경했다 그 말이오. 하와는 뱀을 존경했다 말씀이오. 존경 안 하면 암만 예쁘다고 해 주지만, 여러분 정치가들이 술을 먹고 너덜기면서 기생을 예뻐해 준다고 야단내지만 기생을 존경해 가지고서 그한테 정치의 깊은 이야기를 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실패한 정치가요. 그런 정치가는 없는 것이오. 그건 다 노류장화(路柳墻花:누구든지 꺽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는 뜻으로 ‘노는 계집’을 가리킴)라고 접어 내깔리고 자기 일은 자기가 엉뚱한 데 따로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런 것인데 하와는 뱀에게 대해서 자기의 애완동물로 이렇게 친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
그런고로 이 관계는 이 펠로우쉽(fellowship)이라는 것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 대한 깊은 fellowship을 의미하는 것이오. 깊은 관계. 그건 말하자면 존경하는 fellowship을 의미하는 것이오. 존경하는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지 단순히 애정이라든지 친숙하다든지 그런 정도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오. 뱀의 말을 곧이 들을 만큼 뱀을 신용했다 그 말이오. 신용하면 그 인격이 신뢰에 해당하다는 인격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오. 즉 존경하지 아니할 자를 존경했다. 높이지 아니해야 할 자를 높였다 그 말이오.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는데 높일 자를 높여야 할 텐데, 엉뚱한 딴것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면 전쟁에서 실패하는 이 과정을 보면, 전쟁에서 이 마귀와 인간이 처음 대결했을 때, 이 전쟁에서 결국은 참패해 가지고 사로 잡혀 가지고서 큰 저주를 받게 되는데, 이 실패하는 코-스를 볼 것 같으면 맨 처음에 시작이 그거요. 뱀이 가까이 하와에게 접근했을 때 뱀의 정체에 대해서 자세히 미루어 살펴 주의해서 무엇인가를 파악하지 아니했다는 점이 첫째 큰 실패의 원인인 것이오. 뱀이 무엇이냐? 저게 대체 뭐냐 하는 것을 바로 조사해서 정체를 파악하려고 했어야 할텐데 그것이 없었다 말씀이오. 아, 없었기에 그만 그렇게 속아 넘어 갔지요. 그 때 신뢰하지 못할 자를 신뢰했다 그 말씀이오. 둘째는 정체만을 파악지 못했을 뿐더러 무관계하다든지 무관심했다든지 하지를 않고,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깊은 관심하에서 그에게 신뢰와 존경을 주었다. 그래서 깊은 교제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 뱀과 여인과의 관계를, 가만히 문답한 것을 볼 것 같으면 무엇에 제일 흡사하냐 하면, 가장 신뢰를 받는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첫째요. 그렇게 뵈어요. 거기 보면. 왜냐하면 문답한 내용이라는 것이 어떤 심오한 철리(哲理)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이야기요. 그 계시에 대한 이야기를 토의할 때 뱀이 하는 말을 딱 곧이 듣고 “아! 그렇습니까” 하고 순종하고 그 말을 곧이 듣고 그 말을 신뢰하고 그 말에 의해서 자기가 행동한 것을 보면, 선생 아니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 아니오? 단순히 이게 뭐 연인이라든지 친구라든지 정도는 아니오. 차라리 뱀을 자기의 지도자와 같이 여기는 그런 흔적을 여기서 볼 수 있어요.
이건 그런고로 인간의 애정의 관계라고 절대로 볼 건 없어요. 또 애정의 관계로 가질 내용이 없어요. 거기 보면 아무것도 그 애정을 서로 주었다 하는 그런 관계가 없어요. 엉뚱하니 뚱단지 같은 사람은 뚱단지 같은 소리를 잘 하지만 그런 것은 여기 없어요. 한 마디도 그런 걸 비취는 데가 없어요. 또 상대가 미생물이오. 미물이오, 짐승이오. 사람이 아닌 이상 사람아닌 어떤 것과 애정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이오. 그런고로 이런 것을 그렇게 괴상하게 해석하는 것은 아주 그릇된 생각인 것이오. 제일 무엇 같으냐 하면, 그가 하나님의 말, 즉 심오한 그 하나님의 원칙, 계시, 철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할 때, “아 그렇지 않다. 이것이 이렇다, 이렇다” 하고 이야기할 때, 마치 먼저 가지고 있던 자기의 철리가 오해구나, 아무래도 이 스승이 가르치는 것이 이것이 바를 것이다 하고, 과연 그러지 않을까 하고 그 방향을 취하고 나갔다 말씀이오. 그 방향을 취하고 나가서 심지어 선악과를 따서 먹을 만큼, 결단을 할 만큼 강하게, 그러면서 방향을 적극적으로 취했다 그 말씀이오.
이런 것을 보면 뱀에 대한 그의 태도는 거기에서 말하자면 영감을 훑어내고, 거기에서 영감을 길어서 내고, 거기에서 자기의 지도를 자기의 갈 길에 대한 계시를 받고 나갔다 그런 것이오. 이게 무서운 사실이오. 그를 더 자기의 마음 가운데 높이고 사모했다 하는 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오. ‘더’란 말은 하나님보다 더 했다 말씀이오. 남편보다 더 했다는 정도가 아니오. 왜냐하면 남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들은 것이 아니라 처음에 계시나 금령은 남편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겠지만, 그러나 여인이라고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곧 알아들을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능이 없었다 하는 것은 여기 안 가르쳐요. 그러므로 사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능이 있었다고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 그거요. 그러므로 여인은 직접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하나님이 여인을 직접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지 여인을 사람 이하에다 두지 않았어요. 사람이오. 동등한 한 사람으로 꼭 만들어 놓았어요. 뱀이 나를 꾀었다고 직접 핑계하는 것 보더라도 여인도 아주 굉장히 빨리 생각을 한다 말씀이오. 그러면 하나님과의 그런 관계를 가져서, 그런 관계를 의심해야 할 아무런 요소도 없고 의심해야 할 아무런 위험을 안 가졌던 이 시대에 하나님 말씀을 그만큼 희미하게 의심하고 즉 말씀을 전폭으로 신뢰하지 않고 뒤집어서 여기서 달리 가르치는 다른 스승의 말을 좇아갔다 하는 이 사실은, 다른 아무것 보다도 다른 스승을 더 존경하고 더 가까이 하고 더 사모하고 있었다 그것이오.
그러면 그러할 만큼 역사가 흘렀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요. 그 시간이 흘렀다. 즉 뱀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어떤 기이한 인격자, 기이한 스승이 그의 가르침에는 그 말을 지금까지 자기가 가까이 교제하고 있는, 교섭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신뢰할 수 있을 만한 가까운 교제가, 그 계시에 관한 교제, 적어도 이 지혜의 소통이 있었다 말이오. 정(情)의 소통보다도 지혜의 소통이 있었다 그 말씀이오. 이런 것이 참된 의미에 있어서 심오한 의미의 사랑이라는 것이오. 지혜가 소통된다는 것, 서로 지혜를 나누고, 서로 생각을 같이 하고, 필요를 같이 이야기하고.
여러분, 사람과 사람끼리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생의 중요한 문제, 즉 모든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서로 지혜를 자꾸 나누잖아요? 사랑하니까 지혜를 빌리는 것이거든. 빌리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거든. 무슨 일이 있으면 아, 이것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면 되겠는가 하고 소위 걱정해 준다는 말로 표시되지만, 사실은 가지고 있는 best 최선의 지혜를 가지고 나누어 주는 것이거든. 그게 다른 걸 나누는 것 보다도 중요한 일의 하나요. 서로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큰일난다”든지 서로의 지혜로서 나누어 가지는 것이오.
여기 이 지혜를 나눈다는 그런 점에 있어서 사랑이오. 참된 의미의 숭고한 사랑. 말하자면 이지적인, 이성적인 그런 사랑일 텐데, 그런 것을 하나님께 대한 것 보다는 뱀에게 대한 것이 더 깊었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런고로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인이 뱀이라는 기이한 동물, 아주 번쩍번쩍하고 빛나는 동물일지라도 결국은 자기 수하에서 자기가 다스려야 할 생물인데도, 피조물인데도 불구하고, 짐승인데도 불구하고 그 동물에 대해서 그런 굉장한 애착과 존경과 신뢰를 가졌다 하는 것은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있어요. 적어도 뱀은 대등한 인간으로 생각지는 않았다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오. 뱀을 또 자기 발 아래 있는 미물로만 생각지 않았다. 찬란하고 화려한데 그것이 사람의 말을 할 뿐 아니라 그것이 말을 이론적으로 하고 그것이 무엇을 생각해서 말하는 것은 자기보다 훨씬 훌륭한, 존경할 만한 것이라고 자기가 감탄하고 자기가 거기 경복할 만큼 됐었을 거란 말이오. 그러기 까닭에 자기가 교제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보다도 더 곧이 듣게 된 것이오.
그런데 그 어째서 뱀이란 것에 대해서 그렇게 경복을 했느냐 하면, 자기 앞에 뵈는 사람 아담은 자기와 같은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사람과 같이 늘 나타나 뵈고 이러지는 안했을 거란 말씀이오. 그런 까닭에 아담 이외 자기가 모든 것은 낮게 보지마는, 높이 볼 대상은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은 형상이 없고 그 형상이 무엇일는지 자기도 모른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의 형상 아닌 뱀의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자기가 아주 낮추어보든지 높여보든지 둘 중에 하나 할 수 있는 상대인 것이오. 그런데 뱀은 그냥 뱀이었다면 낮추어 볼 생물이지만 이지와 사고와 인격을 발휘하고서는 움직이고 그리고 신비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와 명령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토론해 나가는 것을 볼 때에는 자연히 그것을 숭엄하게 신과 같이 높이 보았을 거란 말이오. 이래서 뱀에 대한 신뢰가 생겼을 것이오.
요컨대 하나님이 형상을 가지시지 아니한 까닭에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뱀의 형상을 가진 어떤 신이 이야기 할 때, 그 신의 숭고성이라는 것을 즉 사람 이상의 숭고성이라는 것을 또한 느꼈을 것이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오. 그러기 까닭에 뱀이 말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어요. 뱀이 말을 하지만 이것만은 특별한, 숭고한 한 인격자로서 나에게 철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자다 하고 이렇게 생각했을 거라 말씀이오. 그럴 때 단순한 한 개의 뱀으로 생각지 아니했을 거라 말이오.
인간들은 원래 신이라는 것을, 이런 흔적이 그 후의 인간의 마음 가운데 그냥 존재해 가지고 내려와요. 이 흔적이. 하와의 신관의 이런 흔적이, 즉 인간 이상의 신관의, 인간 이상의 어떤 실재, 그것이 인간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있는 어떤 숭고한 별다른 형태를 취했을 때도 신은 신이다 하는 이 신관이라는 것은 나중에 범죄한 이후의 인간 가운데, 인간의 마음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어서, 부패하고 타락한 까닭에 부패하고 타락한 형식으로 여전히 그대로 그것을 나타낸다 말씀이오. 그런고로 최초의 뱀은 하와에게 신이었지만 그 후의 역사를 통해서 뱀을 숭배하는 뱀 종교라는 것이 존재할 뿐 아니라, 뱀에게 한정하지 않고 짐승들의 형상이 신화(神化)한 일이 참 많다 말이오. 소를 신으로 섬기기도 하고 물고기를 신으로 섬기기도 하고, 괴물, 용 같은 것, 사람이 생각도 못하는 용의 형상을 놓고 신으로 섬기기도 하고, 그러고 어떤 데는 호랑이, 사자, 이런 것들을 다 신으로 섬겼어요.
그것을 신화해서 생각하는 그 부패한 인생의 종교는, 허다한 우상 종교라는 것은, 소위 물활론이라고 할지 애니미즘(Animism)이라는 것, Animism이란 데에서 아주 널리 보편적으로 한동안 발달했던 것이오. Animism이라고 할 때는 물활론이란, 물건이란 물(物)자 하고, 생활한다는 활(活)자 하고, 또는 활령론(活靈論)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것이 주의(-ism)가 되어 어떤 물체, 특별히 생물, 생물이 신이다고 섬겨 나가는 이런 태도란 말씀이오. 그래서 주로 그 짐승, 동물들을 신으로 섬겨요. 우리 한국에도 물활론에 젖어 있던, 지금도 뭐 안 젖어 있다는 것은 아니오. 큰 사당을 만들어 놓고 귀신을 섬기는 사당에 굉장히 큰 구렁이가 그 추녀 밑으로 요렇게 휘감고 갈 것 같으면 구렁이라고 깜작 놀라지만 그게 업구렁이라고 섬긴다 말이오. 한국이나 일본의 전설 가운데는 구렁이 한테 여자를 갖다가 바쳐서 잡아 먹게 한 이야기도 많고, 구렁이한테 먹을 걸 잘 갖다가 놓고서 빌고 한 그런 예가 많이 있어요. 꼭 동남 아시아로 가야만 하는 것 아니오. 구렁이가 있는 사회 어디든지 구렁이나 뱀을 신으로 섬기는 흔적이 있다 그 말이오.
그리고 나중에 그 놈을 좀더 이상화한 상태가 구렁이가 인제 더 커지고 서는 나중에 용이 되는 것이오. 그래서 용이라는 건 뭐 알 수 없는 것이오. 하지만 용의 형상이 꼭 구렁이 형상이거든. 몸뚱이는 꼭 구렁이고 발이 달리고 아마 이것은 최초의 나하쉬(שׁחנ)인지도 몰라요. 발이 달리고 사방으로 불을 뿜어 가면서 막 입으로 불을 뿜어 가면서 획 돌아가고 하는 것. 그런데 용의 이야기는 단순히 동양에만 있는 것 아니오. 서양에도 용 이야기는 흔히 있어요. 그리고 용이라는 것은 영물이고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옛날 이야기 가운데 그림, 영화에도 그 큰 한즈(Hans)가 나중에는 용을 퇴치하러 가잖아요. 용의 굴로 들어가 가지고 용하고 막 싸우고 용을 퇴치하는데 입에서 불을 훨훨 뿜는거라. 용의 사상, 용에 대한 사상이란 것은 이 때만 있은게 아니고 옛날에도 있어요. 고대에도 수 천 년 전에도 있어요.
그런데 묵시록에서는 분명히 용이라는 것을 한개의 상징으로 썼거든요. 그 용, 곧 옛뱀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는 사탄이라 해 가지고서는 묵 12장에는 용 이야기를 쓰지 않았어요. 용이라는, 이 어떤 여인이 낳는 아이를 삼키려다가, 아이를 난 여인을 핍박을 해 가지고서 그 여인이 광야로 가니까 막 그 여인을 빠쳐 죽이려고 입으로써 물을 강같이 토해나간다고 하는 아주 굉장히 무슨 영화, 큰 영화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아주 그래픽(graphic)한 묘사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놓지 않았어요? 그게 뭐냐하면 옛뱀, 옛날 하와를 꾀이던 뱀이요. 마귀라. 그 옛날에는 그런데 그 용을 신으로 해 가지고서는 굉장히 섬겨 가지고, 아 심청전은 다 용왕한테, 서해 용왕한테 심청이를 갖다가 바치려고 사간 그런 절세의 효녀가 다 생겨나고, 용왕 이야기가 없었으면 심청이가 효녀가 될 뻔 했는지 어쨌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렇게 유명한 역사가 생겼을는지. 그 용궁에 가 가지고서는 황후가 되고, 서임 황후가 되고 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꼭 사가지고서는 한번씩 갖다가 용한테 가서 제사를 지냈다 말이오.
이렇게 사람의 정신 가운데는 용이라 하는 이상화한 뱀을 신으로 섬기고 나갔다는 것이 역사에 뚜렷한데,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있었는데, 최초의 시작은 하와에서 시작된 거요. 하와가 자기에게 이야기하는 이 뱀이라는 것 나하쉬(שׁחנ)-찬란하고 화려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하던 그 자가 가장 교묘하게 정교하게 지어진 그것을 턱하니 높이고, 높여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대신해서 덮어 씌우기까지라도, 그걸로 막아내게까지라도 할 만큼 신뢰를 했다 그 말이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얼마나 신화했는가 말이오, 용의 말을. 이것이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중요한 문제요.
그런고로 하와의 타락은 어디가 있느냐 하면 그 용의 말을 곧이 들었다 하는 것, 즉 뱀의 말을, 어째서 뱀의 말을 더 곧이 듣게되었느냐 하면 뱀을 그만큼 더 숭상했다 그 말이오. 왜 이런 여지를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그만큼 하나님으로 전부 차 있지를 아니했다 말이오. 최초의 문제로 돌아가면 그거요. 사람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압도하시고, 전부 하나님으로 차 있지 아니하는 동안에는 반드시 무엇 다른 것이 대치를 하려 들어갈 수 있는 것이란 말이오. 보통 때는 없다가 일단 유사할 때 어떤 문제를 가지고서 탁 걸고 들어가는 것이다 말이오. 마음에 빈틈이 있다 그 말이오. 하나님으로 전부를 삼고, 하나님으로 압도를 당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을, 용인을 않는 그런 마음의 강력한 단속이 없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심정이 항상 빈자리가 있어서, 이건 즉 하나님께 대해서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잘 모르고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을 잘못 믿고 나아갈 때 생기는 것이오.
어째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그렇게 빈 마음을 가지게 되느냐? 하나님께 대해서 왜 빈 마음을 가지게 되는가? 왜 다른 것이 들어올 여지가 있는가 말이오. 왜 마음에 여지가 생기느냐? 그 이유가 있어요. 사람은 매일 매일 장성해 가는 것인데 장성의 분량에 해당하도록 그 신관이라는 것이 장성해야 하는 것이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이해, 인식과 이해라는 것이 장성해야 하는 것이오. 그것이 정체하고 있으면 빈 것이 들어오는 것이오. 그게 정체하면. 하나님께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을 가득하니 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늘 그것이 자기에게는 만조와 같이 팽팽하게 있어야 하는 거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그러나 매일 매일 커가는 데 따라서 조금씩 더 아는 것이오. 그리고 그 아는 것은 그냥 아는 것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확신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중요한 조건과 내용으로 되가는 것이오.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걸 예를 들면, 전에 그걸 몰랐을 때에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과 권고를 믿었다가 그런말을 배워서 알았으면 아,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신다. 아주 훨씬 더 생생하게 알아가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그 다음부터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하나님인 까닭에 오늘도 나에게는 이러 이러한 마음의 부담이 있고 짐이 있습니다. 주여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짐을 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이렇게 그것을 주님께로 곧 금방 적용해서 알아야 한다 그 말이오. 그런데 그것이 없을 때, 그렇게 매일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우리의 움직임이 없을 때에는 그건 정지하면 후퇴하는 것이오. 정지하면 후퇴하는 것이오. 하와는 그런고로 매일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전진해 나아가는 것이 미미할지라도 빠르지 않을지라도 죄우간 전진해야 하는 것이오. 매일 전진하는 게 없을 때는 그만 당하는 것이오. 아무리 높이 올라갔더라도 자꾸 올라가지 아니하면 그 다음부터는 도리어 마귀가 와서 수작질을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하와가 지금 마귀와 대전한, 최초의 인류와 마귀의 대전한 상태에 있어서는 어떤 것이 제일단의 제일 초보에 제일 먼저 나타난 그 하와의 실패의 현상이냐 하면, 지금 말씀드린 하나님을 향한 그의 지식과 신뢰가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장성해야 하는데 (그것이) 현저한 그런 장성의 자취가 없이 비교적 정체한 데서 마귀가 틈탈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하는 것이오. 정체한 데에. 그건 그 다음에 하와가 대답한 말을 분석해 볼지라도, 하와의 그 마귀에 대한 대답을 분석해 볼지라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불철저하고 불 분명하고 단편적이고 모호했느냐 하는 것을 확실히 드러내는 것이오.
하나님은 “임의로 먹어라.” 하와의 대답은 “먹을 수 있다.” 간단한 말인데, 그 얼마나 그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주신 것에 대한 해석 태도가 다른가 그거요.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해라.” 하나님은 “네가 해야 할 것이니라. 당연히 함으로써 그것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목적을 위한 너의 생활의 진행이 있어야 겠다.” 하와는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랬어요. 즉 나에게 준 특권이다. 내가 행사하려면 행사하고 안 행하려면 또 안하고. 어느 편이냐 하면 그것이 자기의 의무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고 할 수 있다는 것이오. 조그마한 차이에서 벌써 차이를 냈어요. 그 이해의 태도가, 해석의 태도가 이렇게 달랐다 그 말이오.
그러기 까닭에 이와 같은 해석 태도와 생활 태도를 취하는 이 하와의 그 정신은 벌써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떨어져 있다, 빈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표시하는 것이오. 인류가 빠져 들어간 이 거대한 비극, 그 후에는 다시 이렇게 큰 비극이 있을 수 없는 전체적인 이 대 비극의 시작은 자세히 알고 보면 미미한, 하와가 당연히 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매일의 장성과 매일의 이해의 깊어갈 그런 사실, 즉 인류가 당연히 가야 할 길을 전진하지 아니했다 한 데 있는 것이오.
여기서 둘째로 그러면 거기서 나온 중요한 이론은 뭐냐? 인생은 무엇을 위하여 창조됐느냐 할 때 인생의 그 이상적인 인간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창조됐다 하면 이상적인 인간상이란 어떤 상태냐, 영화된(glorified) 상태라 말이오. 영화의 상태라는 것은 어떠한 상태를 보고 영화의 상태라고 하겠는가 하면 사람이 눈에 보기에 번쩍번쩍 빛나는 상태라는 그 말 보다는, 즉 제한이라는, 여러 어둠이라는 그 인간적 Category라는 것들의 세계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오. 이건 제한이라는, 암매라는 혹은 인간적 Category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category라는 것은 육신을 통해서 인간의 영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발휘하기에 가장 적당한 몸이냐 하면 적당한 몸이 아니다 하는 것이오.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장 충분하게 발휘하기에 유효하고 적당한 몸은 무엇이냐? 그것이 영화의 몸이다 그 말이오. 이것이. 그런고로 그 영이 구애가 없이 모든 것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가장 아름다운 이상적인 몸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가 몸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그의 전 인격이, 그의 전 생명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적으로 화(化)하라는 것인데, 그것이 목적인데 거기에 어둠이 없는 밝음의 상태라는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그가 가질수 있는 최선과 충만이 그 자신의 그릇에 충만하게 지식을 가진 상태인 것이오. 지적으로 말할 때는 늘 그래요.
그런고로 신령한 사람이라 하는 말을 어디다 표준을 두었느냐 하면 신령한 사람이라는 말 표준은, 그가 모든 것을 판단한다, 자세히 정밀히 검사해서 안다는 데다 두었지요. 영적으로 분별한다는 데다 늘 두었어요. 그 신령한 사람이 거룩하고 구애가 없을 때 그게 영화의 상태가 되는 것이오. 거룩하고 구애가 없는 상태, 육신의 아무 불행이 없는 상태, 즉 영화로운 몸을 입었다는 상태인 것이오. 그건 뭐냐하면 하나님께 대해서 그의 분량으로는 충만히 알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오. 그러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 이상적인 인간상을 향해서 행진 한다는 것이면 매일매일 그 이상적인 인간상을 향해서 장성해야 하겠다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첫째 그가 하나님께 대한 그 지식과 깨달음이 매일 전진한다는 걸 가르치는 것이오. 이것이 인간의 피조의 중요한 목적의 하나요.
우리가 우리들 개인으로나 교회로 존재하면서 우리의 존재의 목적의 하나가 그것이오. 무엇이냐?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매일 더 알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오. 매일매일 더 지식을 얻는다. 지식을 얻어서 무얼 할거냐? 지식이 충만해서 즉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에 대한 지식을 구애없이 충분히 터득하는 그 경계가 영화의 경계인 것이오. 그리로 향해 가는 거요. 매일 우리가 무엇을 세상에다 한다든지 전파한다든지 하는 것은 이건 둘째의 이야기요. 항상 사업이란 것은 우리의 자신의 장성이 중요한 것이오.
그런고로 모르는 것보다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존재의 의의를 훨씬 더 밝게 해주는 것이오. 사람은 지식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기 위해 얻는것 같이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란 것은 어디다 사용하기 위해서만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그 인간을 충족시키는 것이오. 인간의 존재의 의의를 만들어 주는 것이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그 자체를 인간의 존재의 의의를 좀더 첨가시켜 주는 것이라는 것은 무얼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참 지식이 있으면 있는만큼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의 내용이 풍부해지는 것이오. 사람의 존재의 가장 위대한 경계는 뭐냐하면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통을 가지는 데 있어요.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통, 그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것은 왔다 갔다 서로 이야기하고 하는 그런 정도만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까 여기서 또 한가지 볼 것은 그것이오. 하와가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을 가졌느냐? 당연히 가졌어야 하는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아까는 이야기 않고 넘어간 중요한 것의 또 하나 이제 제시할 적에 또 도달하는데 그건 뭐냐? 하와가 하나님과 교통을 가진다면 어떠한 상태로 가지는 것이냐? 우리는 이제 생각할 때 동산에 여호와께서 날이 서늘할 때 거니시면서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부르시니까 아담이 숨었다가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하니까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런 말을 했다 그랬지요?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기의 이 scene을 볼 때 그 이야기 자체를, 이 이야기를 인제 딱 꺼내 가지고 얼른얼른 이 이야기 내용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언제든지 해야 할 것이 있어요. 우리가 옆에서 한번 방관(傍觀)을 해보세요. 옆에서. 어떤 가정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어떤 가정에서 아버지가 그 자녀를 불러낸다 그 말씀이오. 아버지가 자녀를 불러내 가지고서 무슨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어떤 집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여러가지로 할 수 있지요. 정답게 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엄격하게 묻기도 하고... 그러나 거기서 무엇 한 가지는 우리가 공통으로 다 느끼는 것이 있어요. 아, 저건 아버지가 아들을 데려다 놓고 불러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구나. 가정에서 그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다는 것을 내가 알면, 그래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저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둘째는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 이야기요.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서 나무란다면 다른 사람이 나가서 “예, 나무라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하고 이렇게 해서 상관할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 불러서 하는 이야기니까. 자기네끼리 하는 이야기니까 이렇게 다 느끼잖아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불러서 하와를 불러서 이야기를 척 하는 것을 볼때 이야기를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둘째로 치고라도 이야기를 하셨다는 그 자체가 한 개의 교통인 것이오.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 나무라도 그게 교통인 것이오. 교통을 하니까 나무라는 것이오. 서로 교제를 하니까 나무라기도 하고 나무람도 쓰고 큰 소리도 하고 적은 소리도 하고 하는 것이지 아무 교제 없으면 뭐 이야기할 것이 없는 것이오.
문제는 어떻게 하와가 하나님과 교통을 했었느냐 할 때 그 교통의 제일 완전하고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형식이라는 것은 항상 무엇인지 의논하는데 있는 것이오.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무엇인지 의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무엇인지의 의논이라는 것은 항상 좀더 엷은 데서부터 깊은 것을 자꾸 이야기해 나가는 데 더 그 교제가 긴밀해지는 것이오. 우리는 친구끼리라도 교제가 약한 사람은 일반적인 천기 이야기나 하고 지나가는 이야기나하고 신문에 난 공동의 이야기나 제목이나 가지고 이야기하고 하는 정도에 끝나는 것이지만, 긴밀한 사이일수록 긴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오. 요컨대 그 사람하고 나하고 사이가 가깝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하느냐? 다른 것으로 증명하는 것 보다도, 이야기를 어떻게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서로 하고 지내는가 하는 것에 있어서 잘 알 수 있는 것이오.
그런고로 하나님과의 그 긴밀한 교제, 심오한 교제라는 것은 매일매일 처음에는 일반적인 이야기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교제가 깊어질수록 점점 나중에 깊은 이야기를 개인적인 이야기, 살림이야기 또 가정에 관한 이야기까지라도 서로 나누는 것이오. 이것이 아주 친해가면 친해 갈수록 더하는 것인데 그러고 또 그런 걸로 봐서 그 사람들 친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오. 그러니까 처음부터 당장에 자기에게 있는 속에 있는 것 다 털어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 없지요? 맨 처음에 만났을 때는 서로 인사하고 그 세상 이야기, 일반적인 이야기로 서로의 교제라 하는 정도로 그건 뭐 그저 구실로 이야기해 두는 거요. 천기 좋은 줄은 다 알지만 “아 오늘 날 좋습니다” 날 좋은지 다 아는 거요. 그렇지만 말 한마디 해 보는 거라. 그게 말 한마디. 그리고서는 아 서로 대화를 한번 했다 그 거요. 괜히 핑계 없이 날에다가 핑계하는 거요. 천기에다가 핑계하고 “아, 이것 비가 와서 안됐습니다.” 괜히 비에다가 핑계하는 것이오. 안된거야 다 안됐지만 괜히 한번 해 보는 거라. 그래 가지고서는 문제는 비를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천기가 좋다고 좋아한다는 그것 보다는 그와는 이제 그걸로 첫째는 교제하지만, 그리고 얼마 지난 뒤에 여전히 “아 날이 오늘 참 좋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십년을 지내도 그렇다면 저 사람들 친하지 않구나, 그저 그만하구나, 물에다 물탄 것 같구나 이럴 거라 말이오. 그렇지만 일 년 전에는 서름서름 했는데 일 년 후에 가만히 보니까 그때는 천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같이 저기좀 가자고 둘이 이야기를 하면서 뭐라고 의논해 가지고 둘이 가기도 하면 참 상당히 친해졌구나 그럴 것 아니오? 친할수록 퍽 그 교제의 내용은 그 마음에 있는 힘, 신비함, 저 오의(奧意), 가슴의 깊이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오.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의 깊이라는 것은 깊어갈수록 하나님의 비밀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오. 하나님의 오의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오. 하와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어떻게 가졌었느냐? 아담도 그렇고 하와도 그렇고, 매일매일 그가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의 가슴 속을 더 깨닫고 안다는 그것이오. 이것이 인생의 생존의 중요한 의미인 것이오. 가치인 것이오. 우리는 그런고로 하나님을 더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갖기 위해서 하나님의 깊은 속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열어 주신 것을 알아 보는 것이오. 우리가 그렇게 더 깨달아 아는 거요. 알고 그 아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터 삼아서 이제 하나님 앞에 무슨 말도 하고 하는 것이오.
전에는 하나님 앞에 연보를 드릴 때는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알기를 하나님은 연보를 많이 잡수시면 많이 주시고 조금 잡수시면 조금 주시는 하나님으로 아니까 나는 하나님한테 많이 주었습니다. 아, 많이 드렸으니 많이 주십시오. 약소하니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저 하는 정성을 보시고 주시옵소서.” 그게 뭐냐하면 옛날에 덕적산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이렇게 적은 것을 드렸지만 소례(小禮)를 대례(大禮)로 받으시고 우리가 이것을 준비하느라고, 장만하느라고 낮에는 동동걸음을 치고 밤에는 새우잠을 잤소이다. 그러니 소례를 대례로 받으시고 또 입히신 덕도 많지만 새로 새 덕을 입혀 줍소사 하고 살살 빈다 말이오. 그 무엇이 다른가 말이오. 교제가 그런 정도요. 나는 낮에는 동동걸음을 치고 밤에는 꼬부리고 새우잠을 자고서 그리고서는 이렇게 차려 놓았으니 소례를 대례로 받으시고 얼마나 입히신 덕이 많은지 모릅니다만 새로 새 덕을 또 입혀 줍소서 하고서는 자꾸 하는 것이오.
그런 정신이 그대로 형식을 달리해 가지고서 하나님, 십일조를 내면 우리 곳간에 부을 데가 없을 만큼 주신다고 안 했습니까? 하니까 그 약속을 내가 믿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거짓말 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내가 믿습니다. 엉뚱한 데다가 하나님의 신실성을 들어붙인단 말이오. 이 엉뚱하다 말이오. 자기가 받으려고. 하나님의 신용이 그렇게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신용을 내가 믿습니다. 자기가 믿어야 할 때는 안 믿고 그런 데는 엉뚱하게 믿는다 그 말이오. 그러던 상태 이러한 상태가 1년가도 그만 3년가도 그만 그러면 그게 무슨 교제요? 좌우간 그 교제 별거 없구나. 밤낮해도 고만하고서, 보면 “안녕합쇼?”하고 지내는 그런 교제다. 그게 무슨 소용있어요?
그러나 그 교제가 자꾸 깊어진다는 것이 더 차츰차츰 깊어지면 아, 하나님 전에는 내가 생각을 그따위로 했는데 하나님 그러니 저 보시기에 얼마나 비위상스럽고 구역질나고 우스웠습니까? 지금은 생각을 다 고쳤습니다. 지금 생각이라도 이후에 십 년 후에 내 생각이 또 얼마나 고쳐질는지 그 때 생각하면 지금 생각도 하나님 보시기에 비위상스럽고 구역질 날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깨달은 것이 이만한 정도니 용서하시고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저희들이 바로 깨닫고 알게하소서. 그런다고 그 다음날 후닫닥 다 아는 것 아니오. 매일매일 자꾸 알아가는 것이오. 이런 것이 충만하게 충만하게 이르러서 가득하니 도달하는 시간이 그게 이상적인 시간이란 말이오.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것이오. 이것이 아담을, 하와를 그것은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는 것이오. 무엇이 가장 인생에게 존재의 가치와 의의를 가지느냐 하면, 하나님과 교통을 하고 산다는 것이 존재의 가치와 의의를 가지는 것이오.
그러면 하와가 어째서 자기가 시험에 떨어졌느냐 할 때, 인생이 제 사명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서 떨어진 거란 말이오. 하나님을 매일 더 알고 더 알고 더 알아서 충만한 경계 가운데 도달해야 하고, 나중에는 그 생명을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생명과를 먹어서 그리스도적인 영원한 생명 가운데 들어가서 충만한 영광 가운데 들어가야 할 것이오. 그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런 것이 없었다 그 말이오. 그러지를 않고 마음에 빈자리가 있었다 말이오. 마음에 마귀를 신화해서 기묘한 용이, 기묘한 뱀이 기묘하게 사고하고 말하고 의사를 전달할 뿐 아니라 이론을 하고 그러고 지시를 하고 할 때 그 지시를 떠받았다 그 말이오. 아,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알았지만 그것 아니구나. 만일 하와가 하나님께 대한 그 금령 선악과에 대한 지식이 그렇게 유치하고 천박했던들 하나님한테 가지고 가서 좀더 알고 깨달아서 “아, 내가 이걸 잘못 알았구나. 우리 남편이 가르칠 때 그런 의미로 안 가르쳤는데 내가 이해를 잘못했구나 이제는 달리 해야겠구나.” 만일 그동안에 그 놈을 잘 이해했더면 말이오. 그 동안에 시험을 받기 전까지 딱 이해했더면 넉넉히 잘 맞이했을 거라 말이오. 마귀가 시험을 했어도 그렇게 시험을 못 했을 거라 말이오.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마귀의 시험한 것을 보면 하와의 그 몰이해한 점에서 쳐들어 왔다 그 말이오. 잘못 알고 있는데, 선악과의 의미라는 것을 잘 모르고 오해하고 있는데 들어왔다 말씀이오. 선악과의 의미를 오해한 것은 즉 하나님께 대해서도 아직 제대로 잘 몰랐다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이 마귀와 최초의 인간이 대결할 때 인간이 가지고 있던 이 약점, 위약성이 이런 데가 있었어요. 그 때 싸움을 할 수가 없는데 싸움까지 아니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말이오.
그러면 여기서 또하나 우리가 주의해서 오늘 저녁 볼 것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준비했든지 아니했든지 그것이 장차 올 인류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일지라도 말이오. 인류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이니까 준비 안 했을 때는 조금 멎었다가 막 싸움을 했어야 할 텐데 싸움은 자기가 먼저 걸고 나아가는 것 아니라 그 말이오. 마귀가 걸고 들어 왔어요. 마귀가. 마귀는 적극적으로 인생을 시기해서 넘어 뜨리려는 것이 그의 본의인 까닭에 언제고 인간이 아직 준비가 모자라서 아직 맞이할 수 없을 때 쳐들어 오려고 하는 거요. 그러면 그것이 그 다음에 오는 전 인류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일으킨 것인지도 사람은 잘 몰랐겠지만 사람은 그러한 운명이, 그러한 운명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귀는 쳐들어 왔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중요히 배울 것은 우리가 준비를 잘 했든지 아니했든지 그래서 준비 안 함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시험을 받아 가지고 넘어가면 그것이 굉장한 영향을 다른 사람에게 오는 후대까지 미칠 일일지라도 그것 때문에 참아 주지는 않는다 말이오. 그냥 쳐들어 오는 것이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 오늘이라고 하는 동안에 부지런히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을 끊임없이 더 계속해서 나는 매일 매일 장성한다. 즉 매일매일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과 그 오의(奧意) 가운데 자꾸 더 진입하는 거요. 더 깊이 들어가는 거요. 밤낮 그만한 정도에서 돌아다니지 않고 자꾸자꾸 더 깊이 들어간다 말이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참으로 마귀가 틈탈 여지를 안주는 것이오. 자꾸 깊이 들어가요. 깊이 들어가면 나는 부족할지라도 주께서는 늘 시험을 이길 수 있게 언제든지 여유를 내 주시는 거요.
참으로 가만히 생각을 하면 불쌍하고도 가련하고 애석한 일이오. 전 인류가 큰 불행을 다 당할 이 큰 일 하나를 여기서 이 시조 할머니가 무엇이 어쨌다고서 제대로 할 것을 않고 있었다 말이오. 그런 까닭에 그것이 최초의 적극적인 범죄는 아니라 그 말이오. 범죄, 커미션(commission)은 아니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줍소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 준 것같이 하는 말을 배울 때, 배운 죄의 두 가지 성격이 있다고 그랬지요. 하나는 커미션(commission), 하나는 오미션(omission) 즉 하나는 적극적으로 범하는 것, 하나는 해야 할 것을 않는 것. 해야 할 것을 않는 것을 누가 죄라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안 해야 할 것 해야 죄가 되지.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해야 할 것을 안 하는 것이 죄가 된다 그 말이오.
하와가 실패한 큰 원인은 해야 할 것을 않고 있었다 하는 이야기요. 마땅이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끊임없이 가져야 할 그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잠시 정지를 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의 존재의 의의를, 그건 뭐냐? 첫째는 하나님과의 교통은 시간이 갈수록 교통이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께 대해서 더 안다는 것이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더 알면 아는 만큼 하나님 앞에서 더 깊은 교제를 가지는 것이오. 하나님을 모르고서 더 깊은 교제를 못 가지는 것이오. 밤낮 그만해 가지고서는 못가지는 것이오. 우리는 사람끼리도 친구끼리도 교제를 깊이 하려면 친구에 대해서 내가 알 만큼은 알아야 하는 것이오. 처음에는 맨 먼저 만났을 때는 서름서름해요. 그렇지만 그 다음에 만났을 때 좀더 알고, 더 알고 사람이란 것은 그 깊이가 한이 없는 것이니까 얼마만큼 지나면 대강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거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렇게 모르는 거요. 하나님께 대해서 한 달만 교제하면 다 아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오. 일생 교제해도 하나님의 깊이를 다 모르는 거요. 그렇기 까닭에 일생 하나님 앞에 더 깊이 들어가라는 것이오. 그러면서 나는 더 풍부해지는 것이오. 하나님과의 사랑, 사랑의 교통이라는 것이 깊으면 깊을수록 산 보람이 생기는 것이오. 왜냐하면 결국 사람의 목적이 최후에 가서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에 대한 내가 알 수 있는 데까지는 충분히 다 아는 거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다 알아버리는 것은 아니오. 피조, 어떤 피조물도 다 아는 것 아니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는 한에서 충분히 안다 그 말이오. 나로서는 더 여지없이 아는 그 영화의 상태가운데 도달하라 그 말이오. 그것이 사람을 만드신 중요한 목적인 거요. 그럴 때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충만하다. 이사야서에는 그것을 강조했어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바닷물이 넘칠듯이 넘치는 거라 말이오. 이 경지에 도달해야 해요.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우리가 배운 것 가운데는 우리가 늘 준비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지식을 매일매일 터득한다는 사실이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준비가 없다 하더라도 마귀는 언제든지 시험한다는 것, 하와가 최초에 타락한 제일보는 당위를 안 했다는 거요. 해야 할 것을 안 했다는 거요. 안 해야 할 것을 한 것은 그 다음에 오는 거요. 선악과를 안 따먹을 걸 따 먹은 것은, 해야 할 것을 아니한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요. 즉 omission에서 시작해 가지고 나중에 commission으로 들어갔다 말이오. 무엇을 생략한 데서 시작해 가지고서는 나중에는 과오를 하는 데로 넘어갔다 그 말이오. 이것이 죄요. 하와는 어디서부터 죄를 지었느냐?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에서 비로소 죄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면 안 돼요. 죄는 속에서 시작하는 거요. 해야 할 것은 안했다는 omission에서 시작했다 그 말이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랬느냐, 무엇때문에 하와가 해야 할 것을 안했나? 사람에게 자유가 있는 까닭에 자유를 가지고 그릇된 지혜를 얻었다 그것이오. 자유에 따라오는 신성한 의무에 대해서 태만했다 그거요. 어째서 그렇게 하와가 생겼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오. 다만 다 인생들이 불쌍하게 되려고 그렇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매일 이 장성해야 할 것을 않는 것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오. 이제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우리들도 매일 하나님께 대해서 더 터득하고 하나님이라고 그럴 때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는다고 그랬으니까,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는 건 궁극적으로 모든 지식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 모든 참된 것은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영광이 세세토록 그에게 있을 것이다. 그런고로 참 하나님 한 분을 알기 위해서 또 모든 것을 우리는 자꾸 알게 되는 것이오. 무엇을 우리가 자꾸 안다면 아는 목표, 최후의 골(goal)은 결국 하나님 한 분을 알자는 데 있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아는 것은 신론만 안다는 그 말은 아니오. Theology만 한다는 그 말은 아니오.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아는 거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큰 사실을 더 깊이 알아야 하는 것이오. 하와의 타락의 맨 처음 상태를 보면 참 애석하고 불쌍한 일이오. 그렇게 하나님과의 교제는 생략하고 뚱딴지, 아니해야 할 뱀은 신화해서 숭상하고 신뢰했다 그 말이오. 그것이 결국 그의 떨어진 원인이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가 맨 먼저 가져야 할 바른 지식을 매일매일 더 축적한다는 것이 만사에 중요한 것이오. 그리고 또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차지할 수 없다는 데 늘 주의해야 한다는 것,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을 세워놓고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아라. 그 모든 죄의 근원이, 나 이외에 다른 신은 절대 네 앞에 두지 말아라.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 첫째 중요한 것이오. 물론 그 다음에 계속해서 우상도 만들지 말고 형상을,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아라.
최초의 인생과 마귀와의 대결에 있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큰 사실은 이런 거요. 이건 요컨대 그 대결에서 사람이 실패한 원인을 자꾸 규명해 올라가니까 결국은 나오는 게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요. 결국은 하와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그 목적에 준해서 매일 전진해야 할 것을 전진 않고 있었기에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결국 우리가 여기서 알게 되는 것이오. 그렇다면 허다히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정당하게 인식을 가지지 않고 있을 때 무엇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오. 그러고 있으면서 저 사람은 무엇이 되는가? 교회는 밤낮 서고 예배당은 밤낮 짓고 사람들은 많이 모이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드시고 새로 지으시고 세우신 거룩한 목적이 무엇이냐? 그런고로 거기에 준해서 내가 행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를 정당하게 인식하지 아니했을 때는 뭣이 나오겠는가?
또 여기 하와의 그 다음의 중요한 문제는 하와 자신은 신화(神化)하기를 원한 거요. 원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오.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다 그 말이오. 하와 자신은 그런고로 신화한다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오. 즉 인간의 어떤 목표가 자기에게 없는 것은 아니오. 아무 목적도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 말이오. 목적을 하나 가졌다 그 말이오. 요구 혹은 이상이라고 할 것, 이상적인 욕망이 하나 있었다 그 말이오. 이상적인 자기의 그 소망이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숭상하고 자기가 신뢰하던 뱀의 형태를 가진 어떤 신이 자기에게 가르치니까 그러니까 그 말을 듣고 그렇게 했다 그 말이오.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코-스를 취하지 않고 지름길을 취하려고 했어요.
마귀가 항상 시험을 할 때 어떤 선의 목적을 자기의 방법으로 도달하라 하는 것이, 중요한 시험을 할 때 어떤 선의 목적을 자기의 방법으로 도달하라 하는 것이 중요한 그 시험 태도라고 그전에도 이야기했지요. 목적을 변경 안시키되 방법을 이렇게 해야 네가 도달한다. 왜 사람은 그런 지름길인 방법을 취하느냐 하면 태만하며는, 그 잃어버린 손실을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이 더러 든다 그 말이오. 그런 데서 그런 시험도 받는 것이오. 내가 삼십 년을 세상을 헛 살았다. 이제는 바로 살아야 할텐데 남은 30년 동안 다 컸는데 내가 언제나 그러느냐? 나는 나하고 같이 연가세로 벌써 30년 전에 그 사람은 주를 알고 도리를 알고 바른 목적을 향해서 전진했는데 나는 삼십 년 뒤 떨어졌구나. 이제 언제 해야 하느냐? 무슨 빨리가는 길만 있으면 그리로 가야겠다 하고, 누구든지 어디 가는데 친구와 같이 가다가 먼저들 다 가버렸으면 나도 될 수 있는대로 빨리 뒤 좇아가서 잡을 생각이 있다 말이오. 아마 그런 생각이 있어서 그런 지름길을 취했는지도 몰라요. 마귀는 그런데 영락없이 지름길을 뵈어요. 이렇게 하면 빨리된다. 이렇게 하면 빨리 된다. 꼭 신화하려고 애쓸 것 있느냐? 빨리 돼야 한다.
이 마귀의 이와 같은 시험 태도는 이후에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같은 태도를 취했어요. 산에 올라가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려고 “자 이것 전부 가지고 통일하면 그만 아닌가, 그러려고 온 것 아닌가, 메시아 아닌가?” 마귀야 말로 잘 알았어요. 예수님의 목적을. 그러면 가져라. 지금 가지면 되지 않느냐? 예수님이 그 때 가지시려고 한 것이 아니오. 물론, 미리 가지고서는 오고 올 불행을 갖다가 수천 년 동안을 내가 핍박을 할 텐데 수천 년 동안 수 많은 사람이 순교하고 고생을 하고 고통을 하고 죽을 텐데, 예수 이름 때문에 그것 왜 사랑하는 사람을 다 거기다 넣을 필요가 있나? 받으라 할 때 목적을 전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취하라 그말이오. 요것이 하와에게도 썼던 고전적인 방법이오. Classical method요. 하와에게도 신화한다는 사실은 네게 있어야 할 일이다. 네가 먹으면 신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얼른 지금 안 주시려고 그런다 하고서는 충동까지 했어요. 그런 것이 있어요. 여기.
또 하나님을 그윽히 훼손했다 그 말이오. 하나님은 독재자요, 독점주의자로 너에게 권리를 나누어 주기를 참 아끼시는 까닭에 그것 하나님은 못먹게 해 놓고 당신은 혼자 그 놈을 그 권리르 딱 쥐고 그 성역(sanctuary) 만은 당신이 유지하려고 그런 것이다 그거요. 그 성소만은 당신이 유지해서 다른 사람은 함부로 거기 못 오게 하려고.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그런 수법이 마귀의 선동인 것이오. 아주 악질적이오. 물론 그 선동이, 그러나 그런 말을 그렇게 딱 빤히 들여다 뵈는 말을 딱 곧이 듣고서 그 말대로 나갔으니 그것이 딱한 이야기요. 딱 곧이 듣고 나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그만큼 소홀했다. 이 소홀이란 것이 요컨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을 저는 제 나름대로 자기의 진행의 정도에 따라서 그 보조에 따라서 늘 일심(一心)하고 그러고 의지하고 나아갔어야 할텐데 그러지 아니한 까닭에 그렇게 되었다 그 말이오.
요컨대 하나님께 대한 인식의 불철저라는 omission, 그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아니했다는 그 공허, 경미, 생략으로 말미암은 결핍, 당연히 터득해야 할 지식을 생략함으로 결핍되었다. 그걸 알지 아니하므로 결핍되었다. 이 결핍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숙명적인, 시험에 빠지는, 유혹에 빠져서 아주 딱 넘어가는 중요한 원인들이 돼 가지고, 그러고 그런 것들이 벌써 그에게는 그 마음 가운데 죄를 만들어 놓았다 말이오.
그러니까 이제 이런 과거와 최초의 마귀와 인간과의 이 최초의 대결에 있어서의 거대한 실패라는 사실에서 그 다음에 창 3:15로 들어가서 마귀의 한 무서운 신비한 운명, 숙명의 선언이 하나 생기는 것이오. 그 다음에 생기는 것이 하나님이 데려다 놓으시고 하나씩하나씩 심판을 하시는 장면이오. 사람에게 무엇을 주셨나, 마귀에게는 무엇 주셨나 하는 사실이오. 그런데 여기서 보신 대로 사람에게는 자기가 할 노고를 결국 이마에 땀이 흘러서 근본된 토지를 갈아서 먹되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을 향해서 능력있게 전진하지 않는 것은 아니오. 다른 생활보다는 생존 자체를 위해서 이제부터는 네가 자연과 더불어 늘 살 수 밖에 없다. 내가 너를 평안하고 튼튼한 곳에 두고 당당하게 마귀를 쳐 물리치고 싸워 가면서 이겨가면서 승리의 기쁨을 가지고 제 자신도 훈련하고 너 자신도 믿음 기르고 네 자신도 더 여물어서 그래서 이상적인 인간상에 도달하게 나가기로 했는데, 그 싸움을 네가 게을리하더니 이제는 너는 싸움은 해도 보람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것은 네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자연과 더불어 싸워야 하고 너희 주위와 더불어 이제 사회에서 싸워야 하고 네 자신을 향해서 싸워야 한다. 아주 이건 자기의, 이제 투쟁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오.
하와든지 아담이든지 이상적인 인간상을 향해서 올라가려면 무엇이 필요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지식의 실증이란 것은 어디서 나타나느냐 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공허한 관념이 아니고 실재이시며 실존이시라는 사실은 능력의 발휘에서 나오는 것이오. 최후에 가서는 능력인 거요. 하나님이란 말 뜻의 엘로힘(םיהלא)이란 말 뜻이 이게 엘(לא), 힘이란 말이오. 엘호하(הולא)의 복수인데 힘있는 분이라 그 말이오. 힘을 늘 상징하는 거요. 모든 것의 가치는 힘이라는 데 있는 거요. 어떤 데에서 힘을 과시하느냐 하면 A라는 힘은 Anti-A에 대해서 파쇄할 수 있을 때 그것을 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오.
그렇기 까닭에 그 힘의 즉 하나님의 힘의 발휘라는 것을 역력하게 실증해서 보이려 할 것 같으면, 여러분 칼이 잘 드는 것을 보이려면 칼로 뭘 베어야 할텐데 “아, 이 칼은 굉장히 잘 듭니다” 하고서는 그 칼 잘 든다는 것을 보인다하고서 무우나 갖다 놓고서 탁 썰면서 잘 든다고 그러면 그것 뭐 묵댕이 칼로도 무는 베면 잘 드는 것이오. 이 칼은 얼마나 잘 드는고니 이렇게 보통 칼로는 쪼개지지 않는 이런 단단한 나무라도 괴목이라도 이 칼로 한번 치면 쫙 쪼개진다 하고 다른 칼로 그냥 딱 때려봐도 꼼짝않던 괴목을 놓고 잘 든다는 칼 가지고 딱 치니까 쫙 쪼개진다 그 말이오. 그 뭐냐하면 항상 어떤 것의 힘은 그 반대의 세력을 놓고야 사람에게 인식을 하게 하는 것이오.
이러므로 생생하게 그의 하나님께 대한 중참한 지식을 실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라 말이오. 마귀의 존재는 하나님의 주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또 하나님이 가지시고 있는 그 초연한 모든 능력이 그 반대의 흑암의 세력을 놓고서 그 놈을 파쇄해 나가면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 말이오. 이렇게 해서 아담과 하와는 마귀가 있을 때 마귀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의 실험대를 의미하는 거고, 그 실험은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아담이나 하와라는 그릇을 쓰셔서 자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가 봐라. 어떻게 내가 너와 직접 관계하는가 봐라, 어떻게 너에게 깊은 지식을, 능력을 주는가 봐라. 하고서는 마귀에게 딱 뿌리쳐주면 마귀가 깨져 달아나는 것, 마귀의 힘이 깨지는 것을 볼 때 제가 한 것도 같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까이 하시면서 자기를 갖다가 쓰시는 걸 보면, 아 이게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이런 것이로구나. 아무런 그런 것이 없으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것 아니오. 그러나 사람에게 그걸 분명히 보여주실 때는 마귀가 필요한 것이오. 그래서 에덴에 그 상태에는 안티(anti) A라는 반명제가 하나 있었다 말이오.
왜냐하면 명제의 능력성을, 능력이라는 성격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A라는 명제에 대한 반명제를 거기에다 또한 설치하신 거라 말이오. 이렇게 해서 사람이 마귀와 더불어 투쟁한다는 것은 고생을 하고서 지낸다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더불어 싸워가지고 마귀의 능력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지고 무너지고 하는 것을 아담이 자신의 생활을 통해서 경험케 하기 위해서,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하나님이 우주를 통재하시는 절대의 대권이 아니라 그건 뭐 필요가 없는 거요. 나를 쓰시는 능력, 나에게 주시는 능력이 어떻게 크냐, 즉 나는 어떻게 큰 능력의 그릇이 돼 가지고 있느냐? 그래서 그 이상적인 인간상이라는 것은 요컨대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충만하게 존재하는 인간상이라 그 말이오.
아까는 지식이란 점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한 것을 가리키는 건데 결국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능력이 지혜든지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힘이든지 가지고 있는 의지력이든지가 충만하게 발휘하는 것이오. 즉 그 싸움이라는 것은, 능력이라 할 때는 지혜를 가지고 싸울 때는 지혜의 능력인 것이오. 지식을 가지고 싸울 때는 지식의 능력이라는 것이오. 그것이 아주 잘 드는 칼이, 그것 아주 썩 훌륭한 칼이 아주 굉장히 튼튼한 것도 탁 치면 갈라지는 이런식으로 베어진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시험은 필지(必知)인 것이오. 시험이라는 건,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에 접촉돼 가지고 있으면 시험을 대 쪼개듯이 착 쪼개고 나갔으면 얼마나 훌륭한, 아름다운 그런 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실한 체득과 또 그로 말미암은 보상으로, 만일 먹으면 죽으리라 그랬으니까 안 먹은 것 때문에, 먹은 것을 거절한 것 때문에 그러고 물리친 것 때문에 받을 새생명이라는 것이 그들의 것이 됐을 거라 말이오. 최소한도로 시험은 필요 해요. 최소한도로.
왜냐하면 전진하려면 좌든지 우든지 가야 하니까 죄로 안 갔으면 우로 이젠 나가야 할 거란 말이오. 힘을 줬다 말이오. 이리로 가든지 저리로 가든지 해라. 저쪽에서 잡아당겼을 때 그놈을 탁 반대했으므로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공평 가운데, 공의 가운데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으므로 죽는다. 그렇지만 만일 네가 그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을 때에는 적극적인 태도니까, 안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다는 적극적인 태도니까, 명령을 준수하는 자에게 주는 상을 받는다 그 말이오. 그것이 있었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그러는 거요. 즉 비약하기 위해서 이 Spring board가 필요했어요.
그런고로 그의 투쟁이란 것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오는 것이었고, 그것은 생명을 위해서 필요했는데, 자, 타락한 다음에 아담은 어쨌느냐 범죄해서 죄인이 된 후의 아담은 투쟁을 하되 의미 없는 투쟁을 하기 시작했어요. 전연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오. 그러나 전에 에덴에서 가지고 있던 그 위대한 일과는 다르다 그 말이오. 이제는 생존 자체, 최초의 기초 level 자체를 유지하려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허무하게 됐다 그 말이오. 불쌍하게 됐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너를 건져내지 아니하면 너는 네 일생 이렇게 도로(徒勞)하고 낭비하다가 흙으로 돌아가고 허무하게 되고 만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이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사실은 이렇게 의미 없는 존재, 즉 실존 철학에 있어서 아무런 가치와 능력을 발휘 못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오.
그는 싸워야 해요. 그러나 왜 싸우느냐? 생의 본능을 유지해서 생의 본능에 의해서 생을 유지한다는 그것 하나 때문에 싸우는 것 뿐이오. 그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싸울 수 있게 됐는가? 지금은 없어요. 아직은 그런 것, 참 불쌍하게 됐어요. 그것만이 아니오. 그는 왜 그렇게 싸워야 하느냐 하면 그 모든 적들은 일단 타락을 해서 잡히니까, 마귀에게 잡히니까 잡힌 상태에다가 꽉 묶어두게 하려는 거요. 그런 큰 갈등을 하고 애쓰지만 옥에 갇힌 죄수가 옥을 깨치고 나와 보려는 갈등과 같은 것이오. 자유인이 자유롭게 목적지를 향해서 훨훨 자기가 진행하는 그 진행이 아니고, 옥에 갇힌 자가 우선 옥에서 나와 가지고는 이젠 자유를 해야겠다는 그의 출발의 이 Starting point로 들어가려는 싸움이라 그 말이오. 물위에 떠 있는 사람이--땅 위에 있는 사람이 제길을 제 마음대로 가는 그것이 아니라--어떻게 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이 겨우 물 위에서 이젠 땅 위로 올라가려고 허우적거리는 이 싸움을 일생 해야만 하게 되었다 말이오. 이것이 낭비라는 것이오. 거대한 낭비를 하게 되어요.
거기다가 마귀는 적극적으로 두개의 큰 목표를 가지고 활동을 하게 되었다 말이오. 첫째, 잡았으니까 인생을 자기의 종 된데서 놓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단속하는 사실이오. 이건 마귀가 한 번 잡은 것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오. 그건 어디든지 그래요. 둘째는 그러나 그 신비한 하나님의 선언 때문에 저도 아주 어떤 신비한 운명을 지금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괴상안 눈을 휘둘러 가면서 그것을 막아내려는 거요. 그건 뭐냐? 여인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할 것이니라 하는 무서운 선언이 하나 있어요. 그 선언이 자기에게 큰 저주의 선언이오. 이 무서운 선언에 대해서 내 머리를 장차 상할 자가 하나 나온다. 그게 누굴까 알았으리라고 생각 마세요. 아직. 그가 전지(全知)가 아니오. 다만 여인의 후손이니까 인생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인생의 누구다 그거요. 인생의 누구다. 될 수만 있으면 여인의 후손을, 씨앗을 다 없애려고 하겠지요.
그렇지만 인생이 누군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부터 인제 마귀의 기이한 역사가 인류 역사 가운데 인제 차츰차츰 발전해 나가는 것이오. 그것이 소위 인제 죄있는 죄인들의 최초에부터 역사의 starting point로 말하자면 출발점이고 시작한 상태요. 에덴은 그건 벌써 한 차원을 달리한 세계의 이야기니까. 타락하고 만거고,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요. 이것이 인제 인류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는 거요. 여인의 후손이 나온다. 내 머리를 상한다? 자! 그 여인의 후손이 누군가? 여인은 나에게 원한을 가지는 건 분명하지. 내가 타락시켰으니까. 그러나 내가 일생 원수가 되겠다. 여인과 원수가 되겠다는 말도 무의미한 이야기가 아니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인이 자기가 타락한 사실을 안 이후에는 마귀에 대해서는 강하게 적의를 가질 거란 말이오. 어떻게든지 싸우려 그래요. 말하자면 옥에 내가 갇혔을지언정 옥에서 그놈을 기어이 어떻게든지 꺼꾸러뜨리고 나와야겠다고 지금 거기서 갈등하는 거요. 그러니까 그냥 방치해두고 가만 있을 수가 없는 것이오. 아무 기력 없다는 것 아니오. 거기서 살아 보려고 애를 쓴다 말이오. 어떻게든지 자기가 얻어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오. 인류의 가장 강한 노력의 하나, 첫째는 생존을 위한 노력이지만 또 하나는 자유를 위한 노력이 있는 것이오.
어떻게든지 자유를 얻어야겠구나 즉 그것이 자유를 위한 노력이라는 것은 일종의 상태라는 것을 또한 반증하는 것이오. 이 자유, 생존과 자유를 위한 노력이라는 것. 그러니까 먼저는 생존(life). 그 다음에는 자유(liberty) 그러고 행복의 추구화(pursuit of happiness). 그래서 이상향을 간다 이거요. 그 자유를 위한 노력이 여기서 굉장한 투쟁인 것이오. 이것이 인류 역사를 인제 금을 긋는 것이오. 여인이 원수가 된 것같이 생존을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인류를 인제, 이 말은 계속적으로 하나는 노예를 삼는거고, 노예에 향해서는 반세력이 일어나고 자유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거요. 계속적으로 하나는 죽이려고 그러고 하나는 살려고 애쓰는 거요.
이런 데에서 또한 제삼의 노력은 이 마귀라는 것은 항상 의심스러운 눈으로 불안한 마음으로 누가 내 머리를 상하게 하려고 하는 놈이 있을까? 여인의 후손 가운데 있으리라고 그랬다. 그 여인의 후손이라면 사람이오. 사람. 여인의 후손이란 건 사람이 여자에게서 다 나오니까 여인의 후손이라고 할 밖에 없는 것이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의미로만 사용되었나, 여인의 후손이란 건, 나중에 그것이 신비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 별로 생각 안해요. 사람의 자손으로 그냥 난 자, 남자? 보통 인간의 혈통에서 나지 않고 단순히 여인에게서 나왔다는 특이한 사실이 앞으로 발생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인의 후손이오. 왜, 하필 사람이면 사람이지 여인의 후손이라는 말을 붙여야 하느냐? 예수님이야 말로 남자 없는 여인의 후손인 것이오. 그러니까 여인의 후손, 이 특이한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지만 그런 말하자면 동정녀 탄생이란 하나님의 화육(化肉), 성육신이라는 육신을 입으신다는 이 사실을 지금 이 마귀에게 뭐 알려주시는 건 아니오. 마귀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 하나님의 그 언약이, 계시가 발전하는 까닭에 발전한 계시에 의해서 나중에 깨닫게 되지요. 깨달아 가지고는 나중에 적극적으로 그리로 향해서 최후에는 그렇게 향해가요. 이건 인제 그 역사가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오. 여기서 인류 역사에 있는 거대한 동인, 움직이는, 왜 역사는 이렇게 움직여 나가느냐 그 원인들을 여기서 보아 나가는 거요.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자유를 위해서,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크신 사실의 진행을 하기 위해서 마귀와의 접전 이런 것들이 인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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