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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알 파 코 스

[스크랩] 빈야드 운동에 대하여 /기독넷에서 펌

1. 질의요지
순천노회장 박양석 씨(순노 제 77-46호, 1995. 9. 12.)가 본 노회에 속한 지교회(황천중앙교회)의

담임목사가 빈야드 집회에 참석하고 그 교리와 예배 행위를 그대로 모방 시행하여 물의를 야기시키고 있으며

또 다른 교회도 영향을 받고 있어 빈야드 교리와 그 행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질의하오니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① 빈야드의 정체에 대하여
② 빈야드의 교리에 대하여
③ 빈야드의 이단성에 대하여
④ 빈야드에 대한 총회의 입장에 대하여
⑤ 지교회에 지시할 내용에 대하여
⑥ 기독공보(2049호) 광고게재 시정에 대하여

2. 연구결과


가. 빈야드 운동이란?


최근에 "제3의 물결" "빈야드 운동" 혹은 "토론토 축복"이라 불리워지는 운동 등이 있는데

그것들이 "빈야드"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애나하임 (Anaheim, California)에 있는

 "빈야드교회 (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이끄는 죤 윔버 (John Wimber)를 비롯해서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형성한 단체가 "빈야드 교회 연합 (Association of Vineyard Churches)"으로서

이제는 일종의 교단처럼 되었기 때문이고, "토론토 축복"이라 함은 죤 아노트 (John Arnott)가 개척한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언론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빈야드 운동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권능주의와 성령체험의 감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감정주의의 두 관점이 강조되는데 능력전도를 주장하는 죤 윔버의 경우는 권능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고,

감정적 경험을 중시하는 죤 아노트는 감정주의적인 면이 강하다고 하겠다.
죤 윔버는 권능(혹은 능력)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 능력이란 초자연적인 능력이요,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로서 병자를 치유한다든지, 귀신을 내어쫓는다든지, 예언을 한다든지, 혹은 지식의 말씀이라고 하는

 은사를 사용해서 전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토론토의 죤 아노트는 신앙 체험에 있어서 감정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다분히 감정적으로 해석한다. 그가 로멘스(romance) 감정(emotion)

느낌(feeling)이란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는 것과(John Amott, "The Father's Blessing" Orlando, Florida:Creation House, 1995, pp.16, 21, 23, 25, 59, 89.), "하나님은 너와 더불어 깊고 감정적이며 의미 있는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시며,

그는 또한 네가 그런 관계를 다른 사람들과 갖게 되기를 원하신다"("The Father's Blessing" p.14)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는 감정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감정적으로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다.

감정은 우리의 창조주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감정적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는 우리를 감정적으로 사랑하기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그를 온 마음과 생명과 뜻을 다해 감정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The Father's Blessing" p.26)라는 말이 이를 입증한다.

현재는 죤 윔버(John Wimber)가 이끄는 "빈야드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중심한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과 죤 아노트(John Arnott)가 이끄는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한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은 분리되었다.

나. 빈야드 운동의 문제점들


1)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이해가 치우쳐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다양하다. 성령의 은사는 기적적인 것도 있으나,

기적적인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있다. 또한 그런 은사들은 각 사람이 모두 다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사명과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에서는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능력, 그리고 신비 현상들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특정한 은사들이나, 격렬한 감정의 분출 현상이나 이적들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성령의 역사의 다른 중요한 측면들이(즉 말씀, 사랑의 삶,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

사회에 대한 책임적 행위에 관련된 성령의 역사) 간과되거나 약화될 수 있다.

웬일인지 최근에 윔버는 이 점에 있어서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사람들에게 그가 미친 영향은 결국 초자연적 능력을 매우 강조하여 열광주의에 빠지게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 거룩한 웃음, 떨림, 쓰러짐, 짐승 소리 등의 현상은 비성경적인 현상들이다.
빈야드 운동이 사람들의 혐오감을 유발하는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들 가운데서 많이 일어나는 떨림, 쓰러짐, 거룩한 웃음 등의 현상 때문이다. 또한 이런 현상들이

실질적으로 이 운동의 특성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들의 집회의 분위기는 그런 현상들을

암시적으로 격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짐승 소리는 토론토 교회의 현상으로서 죤 아노트가 그런 현상들과 특히 짐승 소리를

정당화하는 성경적인 증거로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묘사한 계시록 5장 5절이라든지

하나님이 사자같이 부르짖으신다는 아모스 3장 8절등을 인용하여 정당화하고 있는데

("The Father's Blessing" pp.172-173), 이는 억지스런 해석으로 위의 본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과 은유로 묘사한 것이지 실제적인 짐승 소리나 괴성을 정당화하는 말씀은 아니다.

또한 은혜를 체험하고 쓰러지는 현상은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 이들은 쓰러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에스겔 1장 28절과 다니엘 8장 17절을 근거로 에스겔과 다니엘의 쓰러짐을 말한다.

그러나 에스겔이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스스로 앞으로 부복한 것이지,

빈야드의 경우와 같이 은혜의 체험으로 뒤로 넘어진 것이 아닌 것을 볼 때 전혀

성경적으로 합리화할 수 없는 현상에 속한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이 넘어진 것(요18:6),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이 넘어진 것(마28:4) 등을 열거하지만(John Wimber, Kevin Springer,

 "능력치유" 이재범 역, 서울:도서출판 나단, 1991, p.359), 성경의 그러한 예들은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넘어진 것이 아니므로 성경적 근거가 결코 되지 못한다. 그리고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쓰러진 것이라든지(행9:4), 요한이 밧모 섬에서 쓰러진 일(계1:17) 등은 주님 자신의 직접적인 출현에 직면한 것이었다.

거룩한 웃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웃음(창17:17, 21:6)과 같은 것을

예로 들지만("능력치유" p.362),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웃음은 어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광적으로 웃는 웃음이 아니다.

또한 떠는 현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사야 66장 5절이나 예레미야 5장 22절,

마가복음 5장 33절, 누가복음 8장 47절, 사도행전 16장 29절, 고린도전서 2장 3절,

고린도후서 7장 15절, 빌립보서 2장 12절, 히브리서 12장 21절 등을 인용하지만("능력치유" p.356),

거기에 나타난 것들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혹은 어떤 두려운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서,

두려워서 떠는 의식적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빈야드 운동에서 처럼 주체할 수 없는 주관적이며

잘못된 신비적인 감정이 아니다.


3) 위와 같은 현상들은 격렬한 종교적 감정의 표현으로

그런 현상들 자체가 강조되고 격려되는

분위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감동된 사람들이 격렬한 감정 속에서 그러한 현상이 수반되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들이 격려되고 장려되어 은혜 받은 표적으로 정형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위험스럽다.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소용되는 성령의 선물이며 능력이다.

은사들은 구체적인 유익, 특히 타자를 위한 유익을 가져온다(고린도전서 14장, 에베소서4:11).
빈야드 지도자들은 간혹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느냐 아니냐는 관건이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하면 문제는 성령의 은혜로 삶이 갱신되고, 새롭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며,

새로운 사역의 능력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The Father's Blessing", p.166; "능력치유" p.358).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각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무언가 그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기도를(그들은 이런 것을 soaking prayer라고 부른다) 하는 경향을 보인다("The Father's Blessing" p.96). 그럴 경우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지 말고 온전히 수동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심지어 방언도 하지 말도록 권한다고 한다("The Father's Blessing").

그런 경향은 암암리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현상 자체를 중요시하고 사모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런 체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 어떤 차별이 생기게 되고,

특정 체험이 표준화되며, 오히려 성령의 포괄적인 역사를 제한하게 된다. 이점에 관하여는 토론토 측이 더욱 문제가 된다.

특히 절제하지 못하여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극단적인 감정의 분출 현상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경우에라도, 그런 것은 드러내고 공개하고 격려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현상들은 사람들에게 의구심과 혐오감을 일으키기 쉽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공개석상에서 방언하는 것에

대하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배려를 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런 현상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유익을 경험했을지라도,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특히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지 않고, 오히려 혐오감을 주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런데 빈야드 운동에서는 특히 토론토 측에서는 그런 현상을 드러내고, 심지어 집회시 강단에서

간증할 때에도 나타나도록 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비디오 테이프 "Catch the Fire: God's Love, Bottom Line" by John Arnott, Toronto Airport Vineyard).


4) 예배를 무질서하게 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찬양과 예배의 갱신은 그들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요점이기도 하다. 그들은 형식에 얽매어

 역동성을 상실한 예배를 자유롭고 무형식적인 예배를 통해 갱신하고자 한다.

무형식적인 예배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따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면에서

항상 똑 같고 형식적인 예배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형식 속에서도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빈야드가 아무리 무형식이라고 해도 거기에 이미 나름대로의 어떤 형식이 자리잡게 된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긴 찬송 시간, 설교, 각 사람을 위한 기도 시간 등은 이미 하나의 형식이다.

사실상, 윔버 자신도 어느 정도 질서와 조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Wimber & Springer, "능력전도" pp.57-58).
전통적인 형식들도 많은 경우 그 근원에 있어서 고대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각 사람이 무질서하게 각각 자기 원하는 식으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하는 것은 여럿이 모였으되, 각각 자기 문제를 위해 기도할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예배는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교류하며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예배는 엄숙하고 질서 있게 드리고,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은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을 것이다.


5) 수용하는 이들의 신학적 목회적 비성숙성이 더 문제를 확대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많은 목회자들이 빈야드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자기 교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시도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경우 기존 신앙생활의 모습을 고수하려는

이들과의 사이에 마찰과 분열이 야기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의 무비판적인 수용은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히게 된다. 본 교단 소속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성령님의

여러 가지 놀라운 은사들과 역사를 받아들이고 추구하되, 성경이 가르치시는 바에 따라

 건전하고 덕스러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3. 연구결론
빈야드 운동은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이해가 치우쳐 있고,

거룩한 웃음, 떨림, 쓰러짐, 짐승소리 등을 정당화하기 위한 그들의 성경 해석은 올바르지 않으며

또한 무질서한 예배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므로 본 교단 소속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빈야드 형식의 예배를 무분별하게 도입하여

들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삼가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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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쓰러짐의 현상

“성령안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표현은 성령은사 집회시 사람들이 뒤로 쓰러지는 현상을 묘사한 것이다.

종교사회학의 원리에서 보면 “성령안에서 죽임을 당하는것”은 “어떤 영에 사로잡혀 황홀경에 빠지는것”이다.

소위 “성령안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주장하는 카리스마 운동의 전체 과정은 주님께서 승인한것이 아니라

마귀가 승인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들이 넘어지는 것을 사탄이 매우 즐거워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번은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주님께 말하기를 “ 주님, 제 아들이 간질병으로 몹씨 시달리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아이는 가끔 불속에 뛰어 들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마17:14, 15.) 라고 했다.

마귀에 걸린 바로 그 사람은 예수님께 오자 또 넘어졌다.

“그들이 아이를 예수께 데려 오자 악령이 예수를 보고는 곧 아이에게 심한 발작을 일으키게 했다.

그래서 아이는 땅에 넘어져 입에서 거품을 흘리며 딩굴었다.” (공동번역성경:막9:20)고 했다.

그런데 마귀에 의해 넘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칠경우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막5:42)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눅8:55) 고 말씀 하시고,

결코 빈야드 운동자들 처럼 병자를 고치기 위해 쓰러 뜨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이로 보건대 분명히 ‘빈야드적 체험’ 이나 ‘오순절적 체험’은 결코 하나님께로 부터 온것이 아니다.

귀신학(鬼神學)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들도 위의 빈야드 체험이 사탄의 도구중 하나라고 기록했다.

특히 쿠르트 코흐는 “나는 성령안에서 죽는 이 현상(즉 입신)을 성령의 선물로 받아들일수 없다.”고 말한다.

메릴 엉거는 “ 유명한 병고치는 자들과 카리스마 지도자들은 이런 능력들을 성령의 참된 선물로 오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사실 그들은 그런것들을 부인해야 한다. ....

오늘날 교회내에서 계속 팽창하고 있는 카리스마적 혼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그런 현상들은 사람들을 매우 미묘하게 실제적인 형태의 신비주의로 데려 가려는 사탄의 가장 큰 계략이다.”18) 라고 말했다.

*쓰러지는 경우는 집단 암시 의 최면요법.
스위스 취리히 의 지(紙) 의 편집 기자요『사이비종교』(송순섭역. 홍성사 간(刊))의 저자

위고 슈탐(1949년생)은 그의 저서에서 “ 암시는 구원론의 허구 세계를 가상 현실로 변화 시킨다.

사이비종교 추종자들이 암시로 얻은 경험이나 인식은 현실이자 진리가 된다.......

집단 암시 방법은 주로 사이비종교, 복음주의적이고 카리스마적인 모임 , 구루운동, 신비주의 모임등에서 사용된다.

집단 암시의 표현으로 ‘방언’이나 ‘자동기술’ 등을 예로 들수 있다.

치유 예배를 드릴때 신도들이 차례로 쓰러지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집단암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당사자들은 성령이 임했다고 굳게 믿는다.

신비주의 모임에서 사용하는 방법들도 집단 암시에 해당된다.”고 밝히고 있다.19)

『마지막 시대의 저자』김종일은 “서울에서 귀신쫏기로 유명한 교회의 모 목사도 ‘귀신 쫏기’를 할때

뒤로 넘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유형이 최면술과 유사하고 소위 은사 집회에서 방언은사를 받기 위해서는

 귀신을 쫏아야 하며 귀신이 나갈때는 뒤로 자연 스럽게 넘어져야 한다고 암시를 주는등 최면술과 관련된

기법들이 교회안에 많이 침투해 들어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20)

특히 인도의 마하리쉬에 의해서 창안된 ‘초월 명상’ (T.M -Transcendental Meditation)이

 ‘영적 부흥 운동’(S.R.M)이라는 이름하에 보급된것임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알라바드 대학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하던 마하리쉬는, 구르텝이라고 부르는

인도의 유명한 성인 브라마 난다 사라스와티 가 잠시 알라바드에 머물고 있을때,

그를 만난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지식을 전수 받고,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되어 히말라야의 깊은 동굴에서

침묵의 생활로 3년을 보낸바 있다.

1956년 세상에 나온뒤 전 인도를 여행하며 TM을 보급 하면서 TM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1959년에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TM을 보급하고 영적 부흥운동(S.R.M)을 위한 영속적인

국가센타를 세운 다음 뉴욕을 거쳐 유럽으로 가서 TM을 보급 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영적 부흥운동(S.R.M) 이라는 이름하에 TM을 보급 하였던 것이 1960년에는

국제 명상 협회(I.M.S) 로 발전 하였고 1965년에는 학생국제 명상협회(SIMS)를 설립하여

젊은 이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21)

라즈니쉬의 전속 카메라맨과 경호대장을 지내다가 이탈한 휴밀톤은 그의 저서

『타락한신』(최승규 역(譯) 도서출판 여러분 刊)에서 “ 라즈니쉬는 청년기 부터 이미 호흡법.

마술. 최면술 등의 실험에 매료 되어 있었다. 그는 늘 친구들을 실험대에 올리고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서 무엇이 일어나는 지를 관찰했다. 헤엄도 칠줄 모르는 사람을 물속에 떨어뜨려

보기도 하고 머리를 강제로 물속에 쳐박기도 했던 것이다.” 라고 폭로하고 있다.

특히 크리쉬나 무르티를 만나 라즈니쉬에 대해서 한말을 들은 디크샤 라는 여인의 말을 전하고 있다.

즉 “ 이 사나이는 ‘범죄자’ 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확실히 이해 해야만 합니다.

그가 영성이란 미명하에 사람들에게 행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입니다.” 라고 비판 했다는 이야기다.22)


2.빈야드 영적 체험 비판.
우리는 웸버가 주장하는 현상들이 성경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웸버는 그의 주장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지만 그의 성경 인용은 대부분 적절하지 않다.

웸버는 넘어지는 현상이 은헤 체험의 현상 이라고 말하면서 에스겔 1:28을 인용한다.

그러나 에스겔이 엎드린 것은 성령이 임해서 넘어진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고 스스로 엎드린 것이다.

또 꼬꾸라지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를 잡으러온 군사들(요18:6),

무덤을 지키던 파수군(마28:4), 귀신이 꼬꾸라진것(막9:20)을 제시 하였지만

 이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이었 으므로 성령의 증거와 무관한 것이다.

조난단 에드워즈는 은사주의 운동을 교회 몰락의 징조로 간주하였고,

이러한 은사 주의로 인한 신앙적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1744년 『신앙과 정서』

(Religious Affection)이라는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는 이책에서 참된 신앙의 정서는 격정이나 흥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감동과 감화를 통해

오기 때문에 육신에 나타나는 반응이 참된 정서의 기준이 될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꼬꾸라지는 현상,

술취한 듯한 현상, 몸부림을 치는 행위, 웃거나 슬퍼하는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비록 이것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의 은혜로운 정서에는 가짜가 끼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주 한일 신학교 에서 있었던 빈야드 집회에서 어떤 목사님이 마구 잡이로 웃는 사람에게

다가가 “사기 치지마!” 라고 말하며 뺨을 야무지게 때렸더니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화를

내며 달려 들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목사가 “성령받은 사람이 왜 화를 내느냐”고 따지자

그 장면을 목격한 주최자가 슬며시 사라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탠립 젭은 하워드 브라운의 비디오 테잎프를 본적이 있다고 한다. 그 테잎에서 하워드

브라운은 30분간이나 자신의 “축복”(富)을 정당화하고 예수님은 부자셨다고 주장한후

 반 강제적으로 헌금을 거두었으며 헌금을 거둔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넘어 뜨렸다.” 고 보고하고 있다.

놀라운것은 토론토 공항 빈야드 교회의 부목사인 롱(Steve Long)은 “귀신에 의한 일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고 1995년 5월 9일자 『크리스챤 위크』지(紙)에 보고했다는 사실이다.

3.빈야드 운동의 문제점들.
빈야드 운동의 문제점에 대해서 예장(통합) 제82회 총회 보고서는 「토론토 축복의 잘못된 관행」7 가지로

① 상처와 악습과 무능으로 부터 해방 시킨다는 사역시간의 안수.

② 은사 집회에서 환자를 지명해 불러내어 기도해 치료한다는 치유집회.

③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병을 유발시키고 죄를 짖게하는 책임을 귀신에게 돌리는 점.

④ 농촌, 도시, 국가 가 지역에 있는 특별한 지역 영(靈)에게 지배를 받는 다는 지역 영들에 대한 교리.

⑤ 지상 교회가 실패와 수치로 퇴보 할수밖에 없다는 세대주의적 사고방식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만인구제설.

⑥ “ 이것(註: 성경)을 이해 하려고 마시오 여러분은 육체 속한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몰라요 ? ”

라고 말한 한 목사의 선언의 결과 말씀의 기근이 있을수 밖에 없는 점.

⑦ 바닥에 눞는 것은 예사이고 마귀에게 붙잡힐때에 일어나는 현상과 은사추구가 있다.

그리고 비기독교적 현상 5가지로는 흔들고

뛰는 발작, 쓸어짐의 현상, 거룩한 웃음,

술취한 행동, 짐승 소리들 을 열거하고 있다.

『빈야드 운동의 실체』의 저자 정동수 교수는 「터론터 웃음예배의 10가지 잘못」으로

1. 모든 예배와 영적 훈련에 참가하는 사람이 의식과 함께 知的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점.

2.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영적 훈련이나 경험.

3. 사람의 기분을 만족시키려는 욕망.

4. 대규모의 최면.

5. 더욱더 놀라운 일들을 믿도록 하는 부추김.

6. 거룩함에 이르는 지름길에 대한 약속.

7. 복음을 흐리게 만들며 에큐메니칼 일치를 촉진시키는 점.

8. 생명과 회개 대신 즐거움과 쾌락을 조장하는 점.

9. 자신들의 능력과 은사를 자랑하며 가장 무레한 방법으로 성령님을 주관 하려는 점.

10. 비정상적인 행동과 우수꽝스러운 광기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 부터 조롱받게 되는점을 열거하고 있다.

 



4.빈야드 운동과 이교적 요소.
빈야드 운동은 과연 성서적인가 ?

많은 목회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가운데 ‘영적 체험의 현상’ 들이 이교(異敎)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모른채 깊이 빠져들고 있다.

그 실예를 아래에 열거해 보려고 한다.

*라즈니쉬니즘의 역동적 명상

라즈니쉬는 인도에서 자이나교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을 마친후 사우갈(Saugar) 대학의 대학원에서

철학 분야의 석사 학위를 받고 10여년간 교수 생활을 한바 있으나.

그후 1966년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인류에게 깨달음을 일깨워 주고

명상을 통한 해방을 가르치는데 여생을 보낼 결심을 했다.

라즈니쉬의 공식적인 전기에 의하면 그가 처음 종교적인 삼매경을

경험한것은 일곱살 때 였다고 하나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대학원생 시절인 스물 한살때라고 한다.

라즈니쉬가 영적 스승을 넘어서 살아있는 신(Bhagwan-바그완)

 그 자체로 떠 받들여 져서 라즈니쉬즘(Rajneeshism) 이라는 종교의 숭배의 대상이 된것은,

그가 인도 푸나(Poona)에 세웠던 교당을 떠나서 1981년 미국 오레곤주

안티로푸에 64,000 에어커에 달하는 거대한 땅을 사들여 추종자들을 위한

 독자적 도시를 건설 하면서 부터 였다고 본다.

이 라즈니쉬의 가르침에서 핵심이라고 할수있는 것은 ‘깨달음과 명상을 통한 해방’ 이였다.

그는 다양한 명상법을 전수하고 또 스스로 개발해 냈다. 특히 거제프의 춤이나 방법이나

선(禪)이 목표로 해왔던것 등을 골고루 포함하여 나름대로 새롭게 소화시켜 왔다.

그중에서도 1970년 독자적으로 창안해낸 “역동적 명상법”(Daynamic Meditation) 이라는

것이 가장 독특하고 중요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대개의 명상법들이 조용한 가운데 정적인 깊은 사고를 뜻하는 것과는

달리 매우 시끄러운 동적(動的) 인 행위를 의미한다.

즉 역동적 명상법에서 ‘역동적’이란 노력(effort)을 뜻하고

 "명상법“은 고요함 즉 노력없음(no effort) 을 의미 하므로 결국에

이 둘사이의 일종의 변증법적인 명상을 뜻한다고 라즈니쉬는 설명한다.

이 역동적 명상법은 새벽 5시에 시행되는 것으로, 사회적 심리적으로

억압 되어온 지식인들을 위해 고안된 기술이다. 따라서 이것은 비명지르기,

거칠게 추는 춤, 옷벗기등 아주 괴상해 보이는 강도 높은 행위들을 포함한다.

역동적 명상법의 실제는 4 단게로 구성된다.

*크리쉬나의 쓰러짐
인도의 성인으로 알려진 라마 크리쉬나는 매일같이 “샤마디”(Samadhi)라 불리는 황홀경에 빠졌는데

그때마다 그는 넘어져서 의식이 없는 무아지경과 같은 상태(사마드히. samadhi)로 빠지곤 하는데 이때

그는 몇시간씩 또는 몇일간씩 쓰러져 있는다. 이 사마히드는 ‘아름다운 환상들과 별나라의 영상이 수반되는

의식을 초월하는 완전한 행복의 상태(아난다.-ananda)라고 하는데, “종종 억제할수 없는 웃음이나

울음이 동반 되기도 한다.” 그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머리나 가슴에

손을 얹음으로서 간단하게 이런 상태에 들어가게 할수있다.33)

*힌두교 요가 수행
위와 유사하게 흰두교의 종교가이자 요가 수행자인 스와미 바바 므크난다(Swami Baba Muktananda )도

샤키파트(Shakipat) 즉 신체적 접촉을 통해 자신의 추종자들을 소위 ‘도사의 자비’(guru's grace)라고

칭하는 상태로 옮길수 있다고 한다. 이 ‘도사의 자비’라는 상태는 “쿤달리니를 점차적으로 깨어나게 하고,

이렇게 깨어난 쿤달리니는 억제할수 없이 웃거나, 야수같이 으르렁 대거나, 개같이 짖거나,

뱀처럼 쉿쉿 소리를 내거나, 울부 짖거나, 몸을 흔들거나 하게 한다.

어떤 광신적 신봉자들은 벙어리가 되거나 의식을 잃기도 한다.”34)

*아프리카 부쉬맨 추종자
매우 기묘하게도 유사한 결과들이 아프리카 칼라하리 쿵(kung) 이라는 부쉬맨 부족중에서와

키공 얀 신(Qigong Yan Xin)이라는 자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샌프란 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이라는 신문은 얀 신이 말을

시작한후 몇분안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얼마되지 않아서 장면은

오순절 기도 집회와 비슷해지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팔을 흔들고 이해 할수 없는 소리를 냈다.”


*쓰러짐의 현상은 영적 허탈 상태

대한 예수교 장로회(?) 빌립교회(송파구 소재 ? ) 한인환 이라는 목사가 지은『임상 목회학』이라는 책에보면

그도 “쓰러짐의 현상” 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는 “ 영혼도 무형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질병으로

병약 해지며 허탈 해져서 무기력해 질수가 있다.” 고 주장하면서 “영혼 이 허탈상태나 병약해 있을때는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 하시는 집회나 예배에 참석하게 될때 기도 중에나 말씀을 받을때 앉은 자리에서 뒤로 쓸어지게 됩니다.

이때 뒤로 쓰러진 사람들은 영혼의 허탈 상태에서 충격을 받고 쓰러지게 된다.” 하며 “ 영맹인 강사들은 영혼의 형편은

분별해 보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는 것만 보고 ‘내집회에’ ‘내가 안수했더니’ 입신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다고 자랑합니다.

엉터리 부흥사들 샐러리맨 부흥사들의 외침에 우리는 신경 써서는 않됩니다.

영혼의 허탈 상태에서 쓰러진 성도들을 입신한것처럼 공언하게 되면

그 사람은 마귀의 침입을 당하게 된다.” 고 주장 하기도 한다.

그는 영혼의 허탈상태에 대해서 “인간의 영혼을 위한 양식은 인간의 마음의 양식이나 육체를 위한

양식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성별된 양식인데 이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허약해 지고 허탈 상태에 빠지게 되어 마침내 그영혼이 병약해 진다는 것이고,

이렇게 영혼이 허탈 상태에 이르거나 병약해지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악령들이 육체속으로 침입하여 잠복한 상태가 되고 인격성에 악령이 잠복하게 되면

점차적으로 착상하게 되는데 이착상은 악령이 집을 지은상태” 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분석 평가할 필요가 있으나 쓰러짐의 현상에 대한 또다른 해석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빈야드”(Vineyard)란 우리말로 옮기면

“포도원”이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빈야드 운동을 포도원을 세우자는 운동으로 파악 할수는 없다.

예장(합동)제 82회 총회 보고서는 ‘빈야드 운동’을

우리 한국 교회가 선교 110년이 지난 21세기의 문턱에서,

전통적 신학 방향에 대한 긍지와 열심이 식어 회의를 겪고 퇴조하는 현상까지 보이고 있는데,

 

그런 현상 가운데 하나가 소위 ‘빈야드 운동’ 이라고 규정하고,

우리가 이운동을 좌시할 때에는 교회의 세속화와 거짖 부흥 운동에 속아 넘어가는

사탄의 전략에 굴복하고 말것이라고 우려하면서, “목회자들은 교회성장 이라면

모든 것을 불사하는 자세이기 때문에 자연히 비성경적이라 해도 일단 실험해 보자는 자세를 가지고 임하니

문제를 발생 시킨다.”고 지적 하면서

“참된 부흥도 오래가기 힘드나 그 열매가 남는 반면 거짓 부흥은

쓴 뿌리들만 남기고 교회를 할퀴고 지나간다.”고 보고하고 있다.

 출처:기독넷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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