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프랜드에서 펌
알프레드 깁스
제9장
우리는 지금까지 네 가지 주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Ⅰ) 거듭남이 아닌 것, (Ⅱ) 왜 사람은 거듭나야만 하는가? (Ⅲ)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Ⅳ) 사람이 언제 거듭날 수 있는가?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면서, 이 책의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Ⅴ. 사람이 거듭난 결과는 무엇인가?
어쩌면 독자의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의 삶 속에서 무엇으로 이 거듭남의 여부를 알 수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곱 가지 정도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새로운 생명을 가리켜 우리는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 영생을 얻기까지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영생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영생이라는 선물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in Him)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1-12).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 속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자신이 영생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을 소유할 때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갈 수가 있습니다(벧후 3:18). 영적인 생명이 없이는 성장이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가 없이는 영적인 삶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거듭남은 새로운 본성, 곧 신의 성품을 받은 결과이다.
(1) 새로운 본성의 사실
성령께서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인격적으로 각 신자 개인적으로 내주하실 뿐 아니라, 이전에는 결코 소유할 수 없었던 새로운 본성을 또한 주심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신의 성품의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벧후 1:4). 이렇듯 성령님과 새로운 성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서로 전혀 다릅니다. 이 새로운 본성에 능력을 덧입히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함으로써, 신자는 이제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실제를 이해하고, 맛보며, 또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욕구를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신자에게서 "육"이라고 부르는 옛 본성 혹은 천연적인 생명을 제거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자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결코 그것을 뿌리 뽑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바는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그 속에 두 가지 독특하고, 서로 대립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이라고 불리는 옛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육은 개선되거나, 또는 개선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 무능력합니다. 신자는 영생을 소유함으로써, 이제 "영"으로 불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늘 하나님 편에 서며, 악을 행하는데 무능력합니다.
(2) 두 본성, 곧 육과 영의 충돌과 대립
이러한 두 본성의 소유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신자 속에 있게 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육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하나님께 속한 일에 대한 욕구나 마음이 없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기회가 주어지게 되면, 신자의 삶 속에서 이기적인 마음과 시기와 게으름과 세상적인 마음과 못된 성질과 악한 생각과 나쁘게 말하는 버릇과 깨끗지 못한 삶과 그밖에 "육체의 일"이 그 특징을 이루는 온갖 더러운 일들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갈 5:19-21). 한편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주를 위한 봉사와 그리스도를 전파함과 찬양과 예배와 선한 행위 등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갈 5:22-23).
이러한 두 가지 본성과 서로 다른 욕구에 대한 사실이 닭장에 오리와 암탉의 알을 서로 섞어서 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병아리들은 어미 닭 가까이 있고자 하지만, 새끼 오리들은 어미 닭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떨어져서 가까운 개울에서 자기들끼리 노는 기회로 삼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어미 닭 편에서는 자기 새끼들이 이러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설명해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오리는 본성적으로 물을 좋아하며, 따라서 그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떠나도록 강요하는 암탉의 모든 소리에 대해 전적으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거듭났음에도 이와 유사한 곤경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신이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거듭났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육신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아, 여전히 악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동일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의 경험을 로마서 7장 15-25절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3) 육신의 지배로부터 건지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
거듭난 사람은 이처럼 두 가지 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둘이 서로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으므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이에 대해 가능한 간결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a) 우선 첫 번째로, 신자는 이렇듯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 정직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영적인 사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영적인 어둠 가운데서 방황하면서 혼돈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의 구원까지 의심하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육신을 개선시키고, 또한 훈련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늘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리를 훈련시켜서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물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는 일과 같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두 본성은 서로 섞일 수 없으며, 서로 혼합되는 일 없이 별개로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육은 오직 악 외에 아무 것도 낼 수 없습니다. 영은 오직 선 외에는 아무 것도 낼 수 없습니다. 육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성격이 개선되거나,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도록 훈련되지도 않습니다. 육은 부패하여 고칠 수 없으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b) 두 번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육신에게서 조금의 선도 기대하지 않으시며, 전적으로 정죄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죄(sin)"와 "죄들(sins)"의 차이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속에 있는 이 악한 원칙, 혹은 본성을 가리켜 "죄"로, 또 그 죄의 열매는 "죄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일서 1:8-9에서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sin: 여기서 죄는 우리가 '육'이라고 부르는 죄악된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음)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리고 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sins)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sins)를 사하시며." 하나님은 악한 본성의 열매인 죄들을 값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본성의 뿌리에 해당하는 죄는 용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악한 본성에 대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곧 정죄하시는 일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시기하며 질투하기를 잘하는 기질로 인해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 욕하는 것은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을 일으킨 질투나 시기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투와 시기는 그러한 열매에 해당되는 죄악된 말을 내뱉도록 한 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악한 뿌리에 대해서 다만 정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8장 3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게 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죄)하사(죄에 대한 희생 제사를 통해서)."
이것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행한 것들(우리 죄들)을 위해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우리의 죄악된 성품)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범한 죄들을 없애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타락해 있던 상태, 또는 타락한 인류로서 연관된 우리 자신을 없애기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거룩한 대속주의 죽으심을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보시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보실 때, 대속주 되신 예수님 안에서 모두 죽은 자로 여기십니다. 과거에 육신과 관계되었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십자가에서 끝난 존재들입니다. 육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정죄되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었으며, 다시 살아난 자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새 생명으로 연결된 자들로 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부르는 것입니다(고후 5:17).
(c) 세 번째, 신자는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대로,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십자가의 역사로 전적으로 무익하고, 개선의 여지가 없었던 "육신에 죄를 정죄하신"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제 하나님 편에 서서, 함께 육신을 정죄하며, 육신에게서 조금의 선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대로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을 좇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것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것이지만, 경험적으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사실로 단순히 받아들이고, 죄에 대하여는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주로 말미암아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신자 속에 있는 육이 발동하거나 외부로부터 어떤 유혹에 반응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에 대해 하나님이 보시고 여기시는 이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죄나, 혹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에 대해서 "나는 나의 대속주 되신 주님 안에서 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노라", 또는 "이 악한 마음의 갈망은 육에 속한 것이고, 이 육은 이미 정죄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미 하나님 앞에서 끝장이 났다. 하나님은 나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나도 이 악한 정욕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노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유지되는 한, 신자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새로운 본성에 능력을 더해 주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속에 내주하셔서 능력을 주시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근심하시며,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고도 불순종하게 될 때, 소멸될 수도 있고,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 성령님의 역사가 제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엡 4:30, 살전 5:19, 시 78:41). 이 일은 결국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통을 상실케 하고, 성령님을 근심케 한 죄가 정직하게 자백이 되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기까지는 이러한 교통은 회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가능한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단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즉각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마음의 변화를 받도록 해야 하며, 그러할 때, 하나님과의 교통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근심하시며, 소멸되거나, 또는 제한 받으신다는 사실이 물론 신자의 영원한 안전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신자를 "구속의 날까지" 인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신자가 연합하는 일이 있고, 또 이 연합을 유지하는 일이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의 기쁨을 가리켜 "교통(communion)"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d) 네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 안에 그 무엇도 확신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연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빌 3:3) 성경적인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에 대해 판단하신 것이 또한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육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4:22). 나쁘고 못된 성질이 "의로운 분노"라고 하는 그럴듯한 명분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남의 흠을 잡는 못된 버릇도 "솔직하고 정직한"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댈 수가 있습니다. 육신은 참으로 우리의 가장 거룩한 순간에도 침투해 들어오곤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지속적으로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부패한 본성의 유혹의 욕심에 이끌려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경각심을 갖고, 은연중에 자신을 너무 확신하는데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e) 다섯 번째로, 신자는 그 악한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개입하거나 혹은 그러한 곳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육신은 반드시 굶주리도록 해야 하며, 억제시키고, 지속적으로 죽음에 위치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새로운 본성은 반드시 먹이고, 격려해야 하며, 또한 개발해야 합니다. 육신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외치며, 또한 먹여달라고 아우성을 칠 것입니다. 육신은 그 유혹의 욕심을 만족시킬 만한 책을 읽기를 원하고, 어떤 장소에 가고 싶어하며, 볼거리를 찾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또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를 위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죄악된 생각을 품거나, 문제가 될 만한 습관에 빠지는 것은 단지 육신으로 하여금 우리의 영적인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일에 육체의 정욕에 힘을 실어줄 뿐입니다(벧전 2:11).
예를 들어, 신자가 어떤 류의 책을 읽게 되면 육신의 악한 정욕에 불을 붙이게 되기 때문에, 그 책 읽기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책 읽기를 고집한다면, 결국에는 육신이 활개를 치고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준 자신을 정죄하는데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원칙을 우리가 듣고, 보고, 또한 생각하는 모든 일에 적용해보면,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이 없으면, 욕심은 그것으로 끝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신자는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성령님을 위한 일에는 최선을 다해 굳세고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난 갓난아기는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벧전 2:2). 이는 이로 말미암아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본성은 양식을 얻게 되며, 힘을 얻고, 또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 신앙을 고취시키는 찬송과 예배와 기도는 다 신자의 신령한 삶의 큰 부분을 형성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삶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성한 본성은 함양이 되고, 그리스도인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구주와 주님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벧후 3:18).
(f) 여섯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결연히 육신을 부인해야 하며, 악한 소욕을 자극할 만한 그 어떤 일도 허락해서는 안되며, 온전히 거절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권면하시며, 또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라고 말씀하십니다(딛 2:12).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죄로부터 단호히 돌아서도록 또다른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육신의 통제 아래서 살 수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성경에서는 "육신에 속한 자" 또는 "신령하지 못한 자"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고전 3:1-4 참조). 때때로 이러한 육신적인 모습이 너무 강할 때, 이러한 육신적인 신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아무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평안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값은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지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신자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인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과 읽고자 하는 책들과 하고자 하는 말과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훈련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육신이 좋아할 리 없지만, 풍성한 영적인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이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가 그 유명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혜롭고 경건한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오락인지 그 여부를 판단하고자 할 때, 이러한 원칙을 따라서 판단하도록 해라. 너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든지, 너의 양심을 무디게 한다든지, 영적인 것에 대한 맛을 잃도록 한다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는 감각을 흐리게 한다든지, 또는 네 육체(몸)가 네 마음(정신)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죄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다니엘은 그가 행한 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자아와 죄와 사탄에 대해 지속적으로 "안돼(No)!"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정욕이 자기 삶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결연히 부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g) 마지막으로 신자는 자기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들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또한 로마서 6장 13절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은 단순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과 그 몸의 모든 지체를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며, 손과 귀와 눈과 발과 입 등을 지극히 귀하고 귀한 보혈로 자신을 사신 주님의 처분에 완전히 맡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게 되면, 기쁨이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통이 이루어지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며, 하나님께 유용한 사람으로 사는 삶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지독하게 악한 삶을 살았지만 극적으로 거듭나게 된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구세군에 들어가서, 그 입고 있는 빨간 스웨터 앞에 "피와 불"이라고 써서 다녔습니다. 그에게 이 단어들은 자기 삶 속에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데 불충분해 보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어떤 건물에 걸려있는 간판을 보고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에게 가서, 이 간판의 문구를 노란색 글자로 크게, 자신이 입고 있는 빨간 스웨터에 수를 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큰 거리로 나갔는데, 그 가슴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새로운 경영진이 경영관리 중."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이제 자기 삶의 주님이 되시고, 성령님은 내주 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능력을 주시며, 이를 통해 자기 동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십니다.
다음과 같은 권면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곧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한 희생 제사를 드린 때문이라.
영과 혼과 몸, 모두가 다 주의 것이니
자기 것으로 영광 돌리시려
그 거룩한 보좌를 삼으시리라!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화답해야 할 줄로 압니다.
나의 것이 아니네, 오 주님,
내 가진 모든 것, 당신의 소유입니다.
내 모든 것 다 주께 드리니
주께서 온전히 다스리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심으로
의로운 삶으로,
봉사의 삶으로 기쁨의 삶으로, 또한 자유의 삶으로,
주께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여기까지 공부해 오는데 많은 시간을 드렸지만, 신자 속에 두 가지 본성이 있는 것과 또한 위로부터 거듭난 모든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죄의 권세와 통치로부터 구출을 받는 방법 등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분명히 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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