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적 믿음을 계승한 교회의 각성
유다서 1장 20-21절
송영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1. 교회사에서 유다서의 위치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교회 시대의 공식적 출범을 알린 사건이었다. 오순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큰 일'을 찬양하는 시편 등을 함께 모여 하나님께 찬양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날 제자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의식이 분명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 찬송하고 있었다(김홍전). 이러한 방법을 통해 성령님은 이제부터 새로운 일을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 가실 것을 만방에 알리셨다.
그 자리에는 15개 나라에서 온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서 모인 당시 전 세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이한 성령 임재의 현상을 통해 그날에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역사가 일어남으로써(행 2:41) 이제부터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 나갈 왕국은 전혀 새로운 왕국이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바로 그 새 왕국은 모든 민족이 참여하는 '교회'였다.
교회 시대의 출범은 교회가 안팎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교회는 ①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핍박을 대항해야 했으며 동시에 ② 내부에서 발생한 이단 사상들로부터 교회의 기틀이 되는 복음을 건실하게 보존해야 했다. 더불어 교회의 기초가 되었던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갈 즈음 이러한 도전들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주후 64년을 전후해서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세 명의 대표자들이 순교로 일생을 마쳤다. 그들은 바울과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였다. 이들은 최초에 있었던 사도회의에서 당시 알려진 교회의 대표자들이었다(갈 2:9).
그 결과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이 인물들과 함께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교회들은 특정한 지역들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Leonhard Goppelt).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라는 미명 아래 불경건한 사기꾼들이 교묘하게 침입해 들어와 무분별하고 불안전한 사람들을 유혹해서 하나님을 멸시하도록 조장하고 있었다(J. Calvin).
이러한 현상들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이 세대의 대격변을 통한 종말에 대한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기보다는 연기되고 있다는 관점이 작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도 시대가 끝나가고 교회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에서 교회는 또 다른 사명을 확인해야 했다.
그것은 ①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교회의 복음을 보존하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확고하게 하는 일과 더불어 ② 사도적인 신앙이 그릇된 믿음에 대한 절대적으로 확실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정립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 공헌한 서신이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성경 해석의 정당성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자신의 고별 메시지를 통해 확고하게 교회에 전달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동요시키는 거짓 교사들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계의 대격변적인 종말의 확실성을 증거하였으며 공교회의 교의를 떠나 성경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반박했다(Jhon N. D. Kelly).
같은 취지에서 유다서는 교회 공동체에 침투한 이단들에 의해서 야기된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회중들의 믿음을 지키도록 권면하며, 잘못된 가르침에 붙잡혔거나 그럴 위험성이 있는 신자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기록되었다. 이런 점에서 유다서는 신자들에게 믿음을 위하여 싸워야 할 것을 격려하기 위해(20-23절)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한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과거에 동일한 사례들 속에서 행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 가르침을 무효화시키고 심판하실 것을 확신시키고 있다(8-16절).
아울러 유다서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신자들을 지적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깨어서 그것들을 피하도록 독려하면서 사도들의 가르침에 순종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17-19절).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잘못된 가르침이 있을 때 ①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이 올바르게 지켜지도록 하고 ② 그 믿음에서 떨어져 나갈 위험에 처해 있는 신자들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I. Howard Marshall).
2. 온전한 믿음 위에 서 있는 성도들
유다서의 권고는 사도적 신앙을 공유한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다(3, 17절). 미래의 심판에 대한 예언들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옛 본보기들은 거룩함을 버리고 불경함으로 돌아선 거짓 교사들이 처할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까지 확장한 구원을 저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미혹된 사람들 중 일부를 되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22-23절).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을 정죄하면서 성도들은 정죄받고 있는 자들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언함으로써 성도들이 자신의 편에 서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다. 성도들은 ① 성령으로 하는 기도, ②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③ 주 예수의 긍휼을 바탕으로 강화될 수 있는 거룩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20-21절).
그러나 긴급히 대처해야 할 위협으로 인하여 유다서는 성도들이 믿음을 위해 싸우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 이 서신의 결말은 성도들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22-23절).
유다서에서 성도들은 예수를 구원의 기초로 인식하고 있으며(1, 25절),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있으며(4, 17절), 하나님을 삼위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인식하고 있다(20-21절). 또한 성도들은 사도들이 마지막 때에 대하여 예언하였음을 알고 있으며(17절), 신실한 자들이 들림 받은 예수의 영광을 공유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다(24절). 성도들의 이러한 사상은 사도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간주되는 예언에 근거하고 있다(18절).
유다서는 '흠 없는 자들'과 '더러운 자들'을 대조함으로써 거짓 교사들을 피하도록 성도들을 권면한다. 비록 이 거짓 교사들이 베드로후서의 경우와 달리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도전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어찌했든 유다서의 일차적 관심사는 거짓 교사들 자신과 논쟁하는데 있다기보다는 그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연약한 신자들의 믿음을 회복시키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21-23절).
이런 이유에서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을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으며, 짐승의 혼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성령이 없는 자들이며 권위를 업신여긴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묘사에 나타난 그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도록 독려하고 있다.
이처럼 짧은 서신에서 이처럼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본 서신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도리를 온전히 제시하고 있다. 본 서신에서 구원이란 심판 때에 있을 예수의 강림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며, 예수를 주로 섬기기 위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하여 부름받는 것을 의미한다(1절). 이러한 교훈은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제시된다(18절).
유다서는 신자들이 부름 받은 결과로 성령을 받았음을 천명하고 있다(19절). 이것은 부도덕, 정욕의 노예, 이기적인 아첨 등을 들어 거짓 교사들을 일관되게 비난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며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야말로 진지한 도덕적 변화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있다. 대신에 그러한 거룩한 삶을 버린 자들은 심판의 때에 정죄받을 것을 경고하고 있다.
특별히 본 서신에는 교회 공동체의 삶에 대한 몇몇 암시들이 등장하고 있다. 성도들은 애찬이라 불리는 공동식사를 거행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또한 교육과 기도를 위해 모여야 하는 경우들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모임들을 통하여 교회 공동체에 있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이 강화되었을 것이 확실하다(20절).
이러한 모임을 통해 신자들은 믿음을 보존하고 강화하게 된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에 의해 미혹된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러한 모임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자들은 믿음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책임이 신자들 모두에게 주어져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3. 사도적 믿음을 계승한 교회의 각성
유다는 본 서신을 마치면서 신자들의 행동 강령을 제시함으로써 거짓 교사들의 행동과 대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다는 교회가 유산으로 받은 사도적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할 것을 제시한다. 그것은 곧 성령으로 하는 기도(엡 6:18)와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으로 성취될 수 있다.
이에 유다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20-21)고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다는 성도들에 대한 교훈으로 믿음, 기도, 사랑, 소망을 제시하고 있다.
1)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사도들에 의해 전수된 기독교 계시를 가리킨다(3절). 이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운다'는 것은 사도들의 교훈을 연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행 2:42; 20:32)이 분명하다(Michael Green). 이 믿음이야말로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다.
성도들은 믿음을 위해 싸우는 그 이상을 해야 한다. 즉 성도들은 사도적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야 한다. 사도적 믿음은 성도들이 회심할 때 그들의 영혼을 의탁한 기초였다. 그리고 죄인된 성도들을 깨우쳐준 그 가르침이 또한 성도된 그들을 성장시킬 것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할수록 성도들의 삶의 형태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고 권면한 바 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믿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그 '믿음'이 내포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자신의 삶에 양심적으로 적용할 때 그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성도들은 스스로 멸망하는 거짓 교사들(10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2) 성도들이 사도적 '믿음'의 이해 안에서 성장함에 따라 항상 기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거짓 교훈과의 투쟁은 논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고후 10:3-5). 아울러 사도들의 교훈과 기도를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를 송두리째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은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성도들은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고 말한 바 있다.
확실히 성령이 없는 자들은(19절) 성령으로 기도할 수 없지만 모든 신자들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기도 생활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있다. 때문에 기도와 거룩한 믿음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진리의 길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Albert Mac Chaine).
3)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성도들을 최초로 하나님께 이끈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1절). 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도들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에서 등을 돌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유다는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을 지키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성도들이 그 사랑의 관계에 스스로 기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성도들이 자신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 경계를 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나 사랑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2-14)고 말한 바 있다.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끊어지고 필연적으로 사람들과의 사랑의 관계에서도 끊어진 것은 그들의 불순종 때문이었다.
4) 성도들의 소망은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소망은 현재의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흠없이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그것을 포기하도록 유혹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에 유다는 신실한 성도들의 시선을 최후의 날에 고정시키고 있다. 성도들은 그 날을 기대함으로써 인내할 수 있으며 절망하지 않게 된다. 특별히 성도들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그리스도의 긍휼을 통해서 갖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J. Calvin).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삼킨 바 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다. 성도들이 영생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긍휼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죄인들이 긍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긍휼에 근거하여 성도들은 이미 그들 안에서 시작된 새 시대의 생명인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
따라서 성도들의 시선은 거짓 교사들이 더 이상 어지럽히지 않고, 인간의 실패가 없으며, 영생의 완전함을 누리게 될 날에 고정되어야 한다. 이 소망은 결코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며 낙심케 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서 가장 큰 결점은 그들이 아무 소망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긍휼, 즉 영생의 참된 완성은 성도들이 마지막 날 그분 앞으로 끌려 올려질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소망한다. 이것이 거짓 가르침에서는 찾을 수 없는 복음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차별성이다.
4.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흠 없는 교회
거짓 교훈이 난무하고 부도덕이 유혹하는 풍토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항상 위험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환경으로부터 사람들을 복음으로 구출하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불 가까이로 너무 접근하게 되면 화상을 입게 된다. 육체의 정욕에 빠진 이들을 가까이로 너무 접근하게 되면 더럽힘을 당하게 된다. 그럴 때라 할지라도 교회는 구출의 손길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주님의 능력으로 강력하여져서 악의 세력들을 거스려 돌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존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이에 유다는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유 24-25)이라고 마지막 송영으로 화답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다는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실 분을 충심으로 경배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본문에서 '보호하다'( )란 말은 마치 단단한 벽에 붙어있는 것처럼 신자들이 주님께 가까이 붙어 있을 때 신자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거침이 없다'( )는 말은 평평한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주님에 대한 신뢰 위에 서 있을 때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이것은 교회를 보호하시는 능력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규명하고 있다. 또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교회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악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Pheme Perkins).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은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흠이 없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흠이 없는 분(벧전 1:19)에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흠이 없다'( )란 말은 제사 용어로 하나님에게 적합한 흠없는 제물에 대해 사용되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들을 흠없는 제물로 자신의 얼굴 앞에 세워주신다. 이것이 성도들이 누리는 즐거움, 즉 지극한 기쁨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 기쁨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도들이 참여하는 성찬을 통해 미리 맛보게 된다(Michael Green).
이런 이유에서 유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과 권력과 권세에 대해 송영으로 찬양을 드리고 있다. 이 찬양은 만세 전부터 천사들에 의해 찬양되었던 내용들이다. 하나님의 권세는 창조의 질서에서 나타났으며, 하나님의 심판은 태고부터 실행되어 왔었다는 것이 앞서 유다가 강조한 내용이었다.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사악한 자들과 거짓 교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는 옛적부터 정해진 그대로이다(4절). 심판의 날에 그 정죄가 선언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비방하고 훼방한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찬양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치는 말
유일하시고 인격적이시고 거룩하시고 사랑을 그 본질로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고 유지하신다.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속하시고 세상 속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벧전 4:11).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영원한 구속 성취를 통해서 모든 영광과 주권과 권력과 권세가 하나님께 돌려지게 된다. 따라서 영광과 주권과 권력과 권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항상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 이 사실에 대한 최종 확인으로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하게 된다.
유다서에서 유다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늘의 궁정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한다. 말할 것 없이 성도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흠 없고 거룩하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영원한 권세와 위엄은 하나님께서 이 신실한 신자들을 그러한 영광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Pheme Per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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