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 나름대로 의롭게 살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가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땅에서 과연 우리가 의를 행하면서 살수 있는지에 대해서 한번 고민해보시고 이런 말씀들을 하는지에 대해서 저는 솔직히 많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는 그 순간 우리는 아무짓이나 해도 구원받을수 있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무짓이나 하면 무지막지한 매질이 있을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니 아무짓이나 하고 살아도 무방합니다. 쉽지 않은 삶입니다. 그렇게 살면 많이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사랑해서 때렸구나....라고.....
아무짓이나 하고 싶어도 할수 없는것이 바로 우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제가 구원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설명할때 의를 행하지 않아도 구원얻는다고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박영선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라는것은 두번째 문제인것입니다. 첫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느냐? 못받았느냐 거듭났느냐 거듭나지 못했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좋은 밭을 가진 사람들이라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냐 아니면 돌짝밭이나 가시떨기밭을 가져서 은혜는 입은사람처럼 보이는데 열매가 없는 사람이냐? 하는 문제에서 걸리는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거듭나서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거듭난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가 바로 의를 행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성령의 열매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것입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과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에서 우리는 많은 혼동을 겪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많은 일들을 합니다.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헌금을 내고 그런데 보이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하는일이 거의 없습니다.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세벽부터 저녁까지 제단을 쌓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고 전도를 함으로서 무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웃을 향해서는 우리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의 태도가 조금 불량하면? 더이상 줄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받는사람들이 양이 적다고 더 달라고 하면 주면 더달라고 한다면서 더이상 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예수님께서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고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한 말씀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주고 나서 더 원하는 분들을 향해서 그것으로 만족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부족한 사람들은 더 필요한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 손을 더 내밀어서 더 주고 싶지 않다고 인상을 찌푸립니다. 여러분들중에 그러지 않는 분들 계십니까? 그럼 신입니다.
의를 행해야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받고 구원을 얻을수 있다는 분들 과연 의를 얼마나 행하고 있습니까? 님들이 생각하는 의의 개념은 어떤것입니까? 솔직히 딱 부러지게 말할수 있습니까? 의의 개념이 너무나 어렵고 힘듭니다. 그것을 보여주신것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의의 개념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목숨까지 내주는 사랑인것입니다.
의를 행해야? 라고 말씀하시는 분!! 당신들은 목숨까지 내줄수 있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런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할수 있습니까? 할수 없다면 침묵하십시요!! 그것을 행한 예수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겸손히 받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십자가를 지는 삶까지 자라시고 그때까지 성장하십시요!!
제가 왜? 의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강조하고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그 자녀로서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아직도 내 자신이 내 자신을 불살라서 이땅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해서 목숨까지 던질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라는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의를 행할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 뿐입니다. 우리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의를 행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붙어서 예수님의 의를 우리가 행하게 되는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의를 행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왜 우리에게 의롭다 칭해준것입니까? 우리가 의로와서 의롭다고 불릴수 있는것입니까? 천만에 만만에 콩떡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것은 바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인해서 우리가 의롭다고 불리게된것이지 우리가 의를 행해서 그렇게 된것이 아닙니다.
이 의미를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면 님들은 의를 행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셔야 할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쓸모가 없는것이 바로 고리도 전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사랑장 우리가 너무 좋아하는 사랑장이지만 우리는 그 사랑장을 행할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가능한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8가지의 축복이 주어지고 9가지의 열매를 맺을수 있습니다. 8가지의 축복은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받은 축복입니다. 그 축복이 뭔지 아십니까? 그 복을 따로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지만 한번 열심히 읽어보십시요!!
가난해져야합니다. 요즘은 부를 말하고 축복을 받으면 부자가 될것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한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비천에도 처할수 있었고 부에 처할수 있었던것은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됬지만 마음은 여전히 가난하여 이웃을 향해 베풀수 있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움켜잡고 그것을 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가진것을 내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웃을 향해서 나누어 줄수 있는 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축복을 받았기에 가능한것입니다. 이것을 할수 없는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것보다 천국에 들어가는것이 더 어려울 것입니다.
애통해야합니다. 애통해야 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땅을 보고 슬퍼할줄 알아야합니다. 안타까운 이들을 향해서 마음으로 애통하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향한 마음의 애절함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여기에 의미는 너무 광활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온유해야하고.....의에 주려야하고 긍휼히 여겨야하고 마음이 청결해야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청결합니까?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마음이 청결해지는 복을 받았는데? 과연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마음이 청결해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우리들은 늘 이땅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자들이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로 인해서 이땅은 화평치 못하고 불화가 끊임없습니다. 예수님이 칼을 주러 왔다고 해서 불화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는분들 님들이 예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 복을 누리지 못하면? 예수님의 형제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없습니다.
핍박을 받아야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의를 행하다가 받아야할 정당한 핍박입니다. 불의를 행하다가 받는 핍박은 복이 아닙니다. 가끔씩 기독교인들이 전도하다가 핍박받는걸 가지고 의를행하다가 핍박받는것으로 생각하시는데....전도하시는 분들의 삶이 의로운 삶이라면 말이 되겠지만 그 동네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면서 전도하다가 핍박받는것 욕먹는것을 가지고 의를 행하다가 핍박받는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이 이런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복을 나누어 주고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미 의를 행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의를 행해야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까? 그러면 이땅의 아무도 구원얻을수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장 24절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말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할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사도님이 말씀하고 싶은것은 우리는 의를 행할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을 행하게 된것을 감사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우리의 의로는 결코 의를 행할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행할수 있는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 말할때 우리가 행하는것은 의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행한 그 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는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때 자녀가 할 일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것이 자녀로서의 본분인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의를 행할것을 말하지 않고 순종할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할때 그 순종함으로 인해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게 될 일이 있고 핍박을 받게될일이 있고 고통을 받게될일이 있을지라도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복은 우리가 지금 받지 못할지라도 나중에라도 크게 받게될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것입니다. 그는 죄가 없으시지만 순종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자기가 할수 있는것이 많이 있지만 아버지의 뜻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려고 이땅에 오신것입니다. 자기가 할일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신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것은 바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라는것입니다. 그 순종은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우리의 의를 행하는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것으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를 행할때 우리에게는 자랑할것이 생기지만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할때는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칭찬이 있는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할수 있도록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성령님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그 자녀는 바로 성령님의 열매를 맺게되는것입니다. 순종의 열매가 바로 성령의 열매인것입니다.
요즘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해서 선지자/사도 이런 말들을 하면서 기적과 능력을 행할것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삶에서 얼마든지 나타날수 있는 보통의 삶입니다. 인격에서 나오는 향기입니다. 이것이 나의 의를 통해서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뒷구절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로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를 나타내고자 할때는 분쟁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왜 서로 격동하고 투기합니까? 성령으로 행하는데 왜 질투하고? 왜 서로 싸웁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내 의를 가지고 의를 행하고자 하기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이미 죽은자이고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산자라면.....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를 행한다고 하면서 서로 투기하고 질투하고 격동하여 싸우는것은 바로 나에게 자랑할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미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의를 행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헛되이 죽게 만든것입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았다는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우리의 의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하고 우리의 의를 행하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럼 님은 그리스도를 헛되이 죽게 만든 자인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는것도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것도 거의 불가능할정도로 힘든것입니다. 우리는 이 힘든싸움을 지금 이땅에서 하고 있는것입니다. 이웃의 멸시와 천대를 받아가면서 우리는 자랑할것이 없는 사랑과 의를 행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른뺨을 맞으면 왠뺨을 대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하면 속옷까지 줄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웃을 훼방하고 이웃에게 나쁜 소리 하지않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것을 다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것을 우리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축복을 받았으니...그렇게 살아야 하는것입니다.
이 삶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살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이 바로 우리의 전 인생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이것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말하는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자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흰머리가 될때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이삭을 제단에 바칠수 있는 그 경지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환도뼈가 골절되어 늘 절뚝거리면서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고백하는 날이 오는것입니다. 온갖 고초와 고생을 겪으면서 결국 총리가 됬을때 아버지의 뜻이 나로 하여금 우리의 백성들을 살리려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행하려고 의를 행해야 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요!!! 거기는 시기와 분쟁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리스안에서 새롭게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로운것처럼 우리도 의롭다 칭함을 받은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한것처럼 우리의 전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며 살아야 할것인가를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했던 그 씨름을 하면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제가 복음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말하거나 자녀의 신분으로서 구원을 잃지 않는 부분만을 강조한다거나 박영선 목사님이 한번 구원을 얻으면 영원히 그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초보중에 초보신앙이고 더 나아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것을 강조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의를 행해야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초보중에 초보가 아니라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초보도 아니고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초보를 벗어나 아버지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순종의 자리까지 자라가는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 야하는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야곱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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