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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운동/관 상 기 도

관상기도는 신비주의 자아 최면 행각

관상기도는 신비주의 자아 최면 행각
이교도 명상 도입에 기독교형의 탈을 쓴 비성경적 방법



한국 개신교계에 2007년 봄 뜬금없이 관상기도(마음기도, 향심(向心)기도, 침묵기도, 묵상기도, 숨(호흡)기도 등)라는 폭풍이 거세게 불어 닥쳤다.

교계의 일부 젊디젊은 목회자들과 소위 엘리트층의 성도라 하는 사람들은 관상기도(높은 경지의 성숙한 기도)를 그동안 찾지 못한 보배로 생각한다. 그들은 종교개혁 이전부터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전통(기원 3, 4세기경 안토니우스가 광야에서 수도원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속에서 찾아냈다며 감격에 찬 환희를 부르고 있다.

성남시 분당 G교회는 관상기도 세미나를 주최하며 선전 문구에 ‘여러분을 성경적 관상의 영성으로 초대 합니다’라고 광고하면서 안토니우스가 ‘침묵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말로 관상기도를 표현하기도 했다고 소개한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정당성을 부여 받았는가?

또한 관상기도를 ‘무엇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기도’라고 하면서 언어적 유희(말장난)를 늘어놓고 한국의 기독교계를 미혹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을 비롯한 기타 이교도 내의 도인들이 도를 닦으며 시도하는 관상기도와 차별화된다고 억지 주장하며 G교회에서 하는 관상기도를 마치 성경적인 것인 양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전통을 복음주의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관상기도는 이 세대 영성의 새로운 모태가 될 것’이라고 선전하며 ‘성경적 관상(觀想)기도 세미나’에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초청하고 있다. 대형 교회인 G교회의 담임목사 L이 국내외(중국·일본·미국 등)에 관상기도를 매우 성경적인 것처럼 선전선동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기에 신도들이 더욱 신뢰하며 추종하고 있다고 한다.

평신도가 쉽게 도달하기 힘든 관상기도(?)

관상기도 세미나를 선전하는 성남시 분당 G교회를 방문하여 그 교회의 일부 직원과 교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일부 다른 사람들은 관상기도를 시작했으나 자신들은 아직 그 높은 경지의 관상기도를 할 단계가 아니라서 보류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평신도들이 쉽게 도달하기가 힘든 것이라 하면 이교도들이 하는 높은 단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도사 수준의 기도와 무엇이 다를까?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툭하면 “기독교 영성에서도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적 영성은 필요불가결하다”라고 주장한다. ‘구도적’ 영성이란 아직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영성을 늘 가리킨다. 그렇다면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아직도 구원의 길을 얻지 못했다고 스스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이방인들이 찾아가는 대상인 그 신과 지금 거듭난 성도 속에 계신 성령을 혼동하고 있다.

거듭난 성도는 죄인이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 만나 뵙고 그 영(성령)을 자기 속에 모신 사람들이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고 그분과 친교하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친교를 잘 하지 않는 데 있지, 대상을 못 찾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관상기도 같은 구도적 영성은 비신자들에게만 ‘필요불가결’한 것이다.(김삼 목사의 관상비판론의 글 일부 인용)

이미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한 거듭난 사람들이라 하면 자아와 구별되어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그것이 입술로 부르짖든, 마음속으로 부르짖든)를 하며 그동안 하나님과 나 사이에 쌍방향성 기도를 어렵지 않게 했다. 이것이 곧 성령 충만한 기도인데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느냐는 것이다. 혹시 성경에 더 있다면 방언기도에 관하여 언급한 것 외에는 없지 않는가.

그리고 묵상은 기도가 아니고 ‘말씀의 내용을 갖고 집중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적용하는 마음의 몸부림’이다. 그런데 마치 성경적인 것인 양 위장하기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성경 몇 구절만 주문 외우듯이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다가 아무 생각도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기 위해 묵상(소위 명상이란 단어가 그들에게는 더 낫겠다)한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안식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관상기도의 범주에 묵상의 행위를 넣으려는 시도는 옳지 못하다.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이 이미 깃들어 있는 성경말씀을 갖고 우리가 지켜 행하려는 삶 즉 실천적이며 열매 맺는 삶을 위해 사전에 고뇌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말씀의 내용을 갖고 깊이 고뇌(마치 되새김질의 소화 작용을 하듯이)하면 전인적으로 역동하는 통찰(insight)이 일어난다. 그러한 묵상을 성경(수 1:8~9; 시1:1~3)은 신앙인의 필수코스로서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을 복 있는 자로라고 한다. 사실 한국교회는 QT(Quiet Time) 등이 등장했지만 이러한 묵상 훈련이 너무 약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그 묵상을 관상기도의 4단계 중 2단계라고 주장한다. 개신교는 그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이미 깃들어 있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지켜 행하고(수 1:8), 입술과 마음으로 크고 깊게 부르짖는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여 왔으며 늘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삶(Coram Deo)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복음과 상관없는 관상기도

그런데도 관상기도 운동가들은 일반적으로 개신 교회가 그동안 부르짖어온 기도는 ‘무엇을 구하기 위한 기도로서 아주 낮은 단계의 저급한 수준’으로 취급하며 관상기도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기도’ 즉 드디어 높은 경지에 오른 깊은 기도처럼 소개한다.

한국 개신 교회에 관상기도를 도입하기 위해 G교회 목사 부부가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부터 미국의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적 수도원에 들락날락하며 관상기도수련을 받았던 점과 그들의 영성을 멘토하였던 영성가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발견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www.chptp.org 에서 미국 뉴욕의 김삼 목사가 쓴 ‘관상기도는 진리의 사각지대’, ‘관상기도를 즐기는 님들에게’를 참고 바람)

G교회 목사부부를 ‘영적으로 지도한’ 문제의 샬렘 인스티튜트(www.shalem.org)는 종파를 막론하고 ‘성직자’들과 신도들의 관상영성을 보급해온 단체다. 표면상 그럴듯한 기독교단체 같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종파’만이 아닌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초월한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김삼 목사의 ‘관상기도는 진리의 사각지대’에서 일부 아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관상 담론에서 유의할 것 한 가지는 관상영성은 신교 관상가들의 입바른 주장과는 달리 성경 진리 즉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 복음을 초월하여 하는 묵상 형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기독교로부터 가톨릭·정교회·불교(티벳불교·일본불교·선불교 포함)·도교·힌두교 등 종파·종교 간 대화 및 에큐메니컬리즘의 촉매가 되고 있다.

관상기도의 텃밭에서는 모든 종파, 더 나아가 모든 종교가 허물없이 어울리는 게 상식화 돼 있다. 따라서 성경 진리와 영적 분별을 염두에 두면서 관상에 호기심을 갖거나 탐닉하는 성도의 복음 정신은 관상 추구에 방해가 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예컨대 20세기 관상의 선구자 토머스 머튼이 은둔해 있던 겟세마니 수도원에 티벳불교의 수장, 달라이 라마까지 와서 머튼의 무덤에 참배를 하고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등 아무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관상은 복음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유형이라는 점에서 현재 신교계의 관상기도는 복음에다 억지로 끼어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금치 못한다. 신교계 관상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관상은 복음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따라서 신교계 관상가들이 교회와 복음을 이용하고 있다는 논리도 피해 가지 못한다.

관상을 강조하고 즐긴다는 점에서 토머스 머튼, 존 메인, 리처드 포스터 등 종교다원주의자들이나 한국의 L목사, 미주의 K목사나 아무 차이가 없다. 더욱이 비슷한 형태의 기도를 해온 힌두교도·불교도·도교인·유교인들도 별 부담 없이 한데 어울린다는 것이다.”

선불교 요소 첨가된 관상기도

2006년 11월 4일 메릴랜드 세인트마크장로교회에서 실시한 프로그램의 제목은 ‘관상 실천으로서의 선(禪, zen)-정의의 길’. 프로그램 소개문엔 일본 불승 바수이 토쿠쇼의 말까지 곁들였다. “그대의 참 본성을 깨우칠 때 그대의 많은 고유의 덕목들을 나타내고 남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삶에 혜택을 주게 된다.”

명색이 장로교회 워크숍에서 선불교(zen buddhism)의 관상을 소개하고 참여자들 전원이 가부좌 자세로 좌선 실습, 걷기 명상을 한 뒤, “선(禪)이 우리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온정적 행위를 구현할 수 있는 한 삶의 길을 보충해 줄 수 있음”을 가르쳤다. ‘선(禪)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은 불교의 자연신과 별 다름 없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소개문은 또 가톨릭 사제인 라벗 케네디의 책, <선 정신, 기독교 정신: 기독교 삶에서의 선(禪)의 위치>에서 다음 글을 인용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승 아래서의 선(禪) 실천이 기독교 삶에 결합될 수 있음을 체험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도 체험을 심화시키고 우리의 신심을 우리의 머리만이 아닌 우리의 전인에 뿌리박게 해줄 수 있다.”

이 홍보문은 “우리 다함께, 이 선의 요소를 통해 그런 결속을 기르도록 힘써 봅시다”로 매듭짓고 있다. 독자는 무심코 읽을지 모르지만 필자의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불교식 좌선을 하면, 불도의 영이 속에 찾아들기 때문이다. 그 영이 성령이 보내시는 선한 영인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도 성남시 분당구 G교회 L목사 부부는 바로 이런 단체의 ‘영성 지도’를 따라 ‘경건한’ 휴가를 보냈다. L목사는 이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보낸 시간의 정적이 태고의 고요 속에 영혼의 평안을 회복시켜줬고, 주변의 모든 낯선 얼굴들이 넉넉한 우정의 샘물이 됐다고 미사여구를 동원해가며 한껏 관상 홍보(?)를 했다.

그 후 L목사는 카자흐스탄의 발 빠른 일정에도 불구하고 전에 없던 변화의 하나로 전혀 피곤을 느끼지 않았는데 그것이 마음의 여유와 평온을 찾은 ‘관상의 은총’ 때문이라는 것.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관상의 은총’이라. 다원 종교적, 진리 방임적 관상영성은 이런 ‘치유’도 해준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함이 우리의 힘이요, 독수리 같은 스테미너 회복의 길이라는 성경 말씀(시 103:5; 느 8:10)의 교훈과는 대조적이다.

결국 관상기도 추종자들에게 ‘우리는 하나다’란 의식부터 작용하기 때문에 가톨릭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다. 가톨릭 수도원도 자유롭게 출입하는 한국 개신교 관상기도 추종자들에겐 가톨릭의 터전도 ‘나의 장’이지 ‘남의 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세계 종교를 하나가 되도록 할 수 있으며, 마침내 개신교를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에 동참하게 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 누군가가 탁월한 웅변술로 주장하고 설교한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자아적기도요, 자기 확신일 뿐이다. 그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쌍방대화가 아니고 자아를 향한 깊은 자아 최면 상태에서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확신으로서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또 다른 신비주의이며 인본주의적 기도다.

내 속에 계신 하나님과 나라고 하는 자아는 분명히 다르고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관상기도를 자아가 의식하는 사고 즉 자기 마음과의 대화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하며 그 사고 자체를 하나님 안에서 얻는 안식이며 높은 경지에 이른 기도라고 한다.

그래서 관상기도는 최면 상태에서 자기 마음과의 대화라고 하는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비성경적인 기도관이다. 자아의식을 향한 자아 최면은 소위 도인들(힌두교, 불교, 가톨릭 등)이 실행하는 인본주의적 행태이다.

이제 개신교가 관상기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왜 위험한 도박이고 한국교회를 망치는 지름길인지 확연히 드러난 이상, 관상기도에 대해 비상경계령을 발효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

하지만 솔직히 한국 교회들도 자성해야 한다. 그동안 입술로만 부르짖는 기도는 열심 내어 왔지만 마음으로 부르짖는 깊은 기도와 묵상(묵상은 기도가 아님, ‘말씀의 내용을 갖고 집중적으로 깊이 생각하여 지켜 행하려는 마음의 몸부림’, 수1:8)의 훈련은 너무나 전무하여 무게감(중량감과 고상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기도에 관하여 성경적인 개혁과 변화를 시도해야만 한다.

임헌원/ 한돌교회 목사·명지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