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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성 경 공 부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1)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1)  

  미국 신문에서 보았던 기사의 내용이다. 어떤 젊은 여자가 10년간 자기 아버지에 의해 창녀로 팔렸던 고통에서 구출 됐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참으로 끔찍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고 간에 고통을 당하면서 산다. 신약성경 27권 중에도 고통과 어려움과 시련과 유혹과 갈등의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다. 신약성경 중에 어느 하나도 진공 속에서 기록 된 것은 없다. 모두가 인간의 삶을 소재로 기록됐다.

이와 같이 성경은 어려움과 죄와 유혹 등의 이야기가 계속 기록되다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2장에 와서야 모든 악과 고난과 죽음과 죄 등의 기록이 끝난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 그런데 주님도 사람들과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 그는 죄가 없으셨으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고난을 당하시면서 십자가까지 지셨다. 이것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히 5:9)

  성경에서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나 희생자(피해자)로 묘사하지 않았다. 또 근본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자로 묘사하지도 않았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존재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의 목적을 모태부터 희생자(피해자)로 묘사하고 있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인간을 책임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받고 살지만 인간은 무엇이냐가 문제(issue)이다. 인간은 죄인이냐 의인이냐가 문제이고 우리가 소망을 무엇에 두느냐가 문제이다.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느냐 아니면 물질에 두느냐,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느냐가 문제점이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의 전형(paradigm-모범)이 되신다.

이는 주님께서는 자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기꺼이 십자가까지 지셨다. 흥미로운 것은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의 능동적 헌신이셨다. 그는 오직 인류를 구원할 목적을 위해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시면서 자진해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희생(피해)의 행위가 아니고 자진하신 헌신이다.

  십자가의 주된 의미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이사야 53장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질문을 주는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누구를 의뢰하느냐. 하나님이냐 아니면 모래 위에 세운 "자신"이라는 우상이냐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냐?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한 사람이냐? 나는 반석이신 예수님을 피난처로 삼고 살고 있느냐. 아니면 무엇이 나의 피난처이냐. 이런 것들은 우리가 물어야 할 본질적인 질문들이다. 고통과 관련해서 근본적으로 알아야 할 질문들이다.

 

이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질문은: "네가 어떤 일을 당하고 살다 왔느냐?" "너에게 있었든 그 나쁜 일들에 대해서 나에게 말을 해 보라"가 아니라 "너는 네가 당한 일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 네가 누구를 섬겼느냐?  네가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을 내가 안다 그러나 네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했고 누구를 섬겼느냐"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하실 것이다.

  성경에서는 라는 말 보다 무엇이 더 중요하다. 무엇 즉 고통은 성경의 주요 내용(context)이다. 이 내용(context)에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의 믿음이 나타난다. 그래서 욥기에서도 욥의 고통이 주가 된 것이 아니다. 욥이 모든 것을 잃었어도 욥의 끝은 완전히 다르다: "내가 회개하나이다," "전에는 귀로만 들었더니 이제는 내 눈으로 하나님을 뵈웠나이다." 욥은 하나님을 알아왔다. 그러나 욥이 당한 고난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가까이 알게 했다. 고난과 고통에는 언제나 더 큰 뜻이 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해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고 했다. 즉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인간의 삶에는 갖가지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대인 관계에서 많은 갈등을 가지며 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다. 즉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신다. 이것은 내가 누구를 섬기느냐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불신자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할 줄 안다.

따라서 고통은 목적이 있다:
1) 고통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시험이다(신 8:2). 고통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들어낸다. 우리가

    누구를 섬기느냐를 들어낸다;
2) 또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

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벧전 1:7).
3) 고통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리를 정금보다 귀하게 만드신다.
4)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지를 알게 한다.

  요점은 우리는 모두 고통을 당하지만 본질적으로 희생자(피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인이다. 문제는 우리의 책임과 고통과의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 운동의 정체를 들어내는 핵심적 문제점의 하나이다. 즉 인간의 책임과 인간의 고난과의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 중에 큰 유행을 타고 있는 것이 심리이설의 내적치유이다.

 내적치유에서는 인간은 모두 수동적이요 피해자라고 말한다. 모두 수동적으로 고통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모두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요 파생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우리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는다는 말이다. 기독교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많은 상담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서점에서 판매하는 상담에 관한 책들의 몇 %가 이런 내용을 취급하고 있는지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상담에 관한 책의 최소 80-90% 이상이 이런 심리적 사상과 철학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이다. 인간은 수동적으로 고통을 받고, 죄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보상적으로 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의 내용들이다.

   나는 가끔 기독교 신문이나 인터넷 광고를 통하여 내적치유 세미나와 관련된 광고문을 종종 접하게 된다.  그들은 상담학계에서 상당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목사들이다. 나는 그 광고문을 보면서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면서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이러한 내적치유의 오류를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정확히 알고 우리의 마음을 항상 하나님을 향해 두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레미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 8:22).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처녀 딸 애굽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을 취하라 네가 많은 의약을 쓸지라도 무효하여 낫지 못하리라."(렘 46:11)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백성들의 응답을 기다리신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렘 17:14).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내적치유법을 찾지 말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도 우리의 치료자 되시며 길르앗의 유향되시는 주님께 달려가야 할 것이다.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2)

  
내적치유에서는 죄는 상처를 받은 보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고 한다. 또 죄는 다른 사람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심리라고 한다. 여기서 "필요"라고 하는 것은 주로 "사랑을 받는 것"을 말한다. 내적치유 운동과 통속 심리학(pop psychology)들은 이런 내용으로 큰 "북(drum)"을 만들어 그것을 두들기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런 경우에 그들이 묻는 기본적인 질문은 "왜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 는 질문이다. 내적치유의 모든 체계가 이 질문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으로 내적치유의 동기를 유발하고 또 내적치유의 기본적 활력을 얻으려고 한다.

  내적치유의 주된 문제점은 "상처"이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죄는 상처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가 많고 비합리적이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성년이 될 때 이미 성격의 일부가 손상돼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손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상처를 만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주장은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심리이설의 교활함과 미혹이 숨어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말들은 표면적으로는 틀린 것이 없고 전적으로 사실인 것 같이 들리지만 바로 여기에 신학적 이론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 질문한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 닥쳤던 일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나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고난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신학적으로 근본적인 오류를 들어내는 것이다.

  내적치유자들의 말은 결국 "죄"의 뿌리가 "상처"라는 것이다. 또 죄의 저변에는 꼭 상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자들의 신학이요 논리이다. 우리가 악을 행하는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전 미국 대통령 Jimmy Carter의 죽은 누이동생인 Ruth Carter Stapleton은 교회에 내적치유를 처음 도입한 사람으로 사람들이 깊은 내적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부적합한 삶의 반응을 한다 주장하였다. 지금은 David Seamands가 교계의 내적치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저서 상한 마음 치료하기(Healing for Damaged Emotions)에는 내적치유의 심리이설과 세상적 신학이 가득 차있다.

  
내적치유는 현재 교회에 물결처럼 들어와 있는 통속 심리학의 하나로 통속신학 사상과 같은 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같은 기법을 쓰지 않고 또 같은 말을 쓰지는 않지만 그들의 근본적인 구조, 즉 현실과 죄와 고난과 책임과 상한 내적 어린 아이 등을 보는 방법은 같고 이것들을 바로 내적치유의 주제들로 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성경적 상담을 한다고 해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가지 사건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이런 괴로움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있다. 성경적 상담은 이런 고통의 현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내적치유 운동이나 회복 운동 등에서는 고통과 책임을 둘러싼 이런 신학적 구조가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이 통속적인 심리학의 대부 Freud주의이기 때문에 그 주제는 언제나 어릴 때의 경험, 충격, 갈등 등이며 책임이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또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떨어지게 하고 있기도 하다.

  Dr. Robert Hemfelt 등이 공저한 사랑은 선택이다(Love is a Choice)에서도 사랑의 탱크가 비어 있다는 것이 전체 사상이다. 그러니까 내적치유와 똑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Larry Crabb의 "Unmet Yearnings for Love"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의 깊은 곳에는 부모(혹은 주로 돌보는 사람-primary care giver)에게서 받은 좌절 때문에 그리움이 있다는 것이다. Crabb는 상처받은 내적 어린아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의 기본 논리는 같다. 부모(혹은 주로 돌보는 사람-Primary care giver)에게서 내가 상처를 받은 것이 나의 현재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상담에 관한 대다수의 책들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이와 똑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과 삶과 마음을 위한 영적 싸움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행동과 삶의 압력과의 관계, 좌와 고통과의 관계, 개인의 책임과 이런 것들과의 관계가 우리를 형성하고 움직이고 몰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또 이것이 앞으로 내가 진리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서겠느냐 아니면 앞으로 교회를 휩쓸 다른 복음을 따름으로 저주를 받을 것인가(갈 1:8-9)를 결정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유주의의 전성기는 갔지만 보수주의가 계속 심리학화 되어가고 있다면 교회의 부흥의 바람을 그들에게서 기대하기는 힘들다. 보수주의가 진리의 깃발을 들고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서려면 "고통"과 "책임"의 문제를 정확히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보수주의가 고통을 부인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책임"과 "고통"에 대해 우리가 잘못 답변을 하면 우리는 다른 복음을 만들어 심리이설의 바람을 일으키는 거짓된 보수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싸움은 우리의 삶(practice)이다. 어떤 면으로는 이것이 더 큰 도전이다. 왜냐하면 내가 죄를 다루고 고난과 상처와 고통과 다른 사람들의 죄와 어려움과 고통을 다루는 방법이 모두 여기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적치유나 통속 심리학이 신학적으로 틀렸다고 지적할 뿐 아니라 그들의 오류까지도 지적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남에게서 피해를 받은 사람과, 곤경에 빠진 사람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 이들을 내적치유와 통속 심리학과 세상에서 말하는 회복운동(recovery movement)에서 구해낼 수 있어야 한다.

  
통속 심리학을 읽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자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거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꼭 자기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래 맞다, 내가 완전주의자이다, 그래 내가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 그래 나는 초 민감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이것들이 자기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느냐가 성경적 상담자에게 닥친 큰 도전이다. 결국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과,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에 관한 우리의 확신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데 필요한 지혜와 온유함과 인내력과 부드러움이나 공감 등과 결부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도전을 감당하려면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인내와 용기와 진리를 우리의 사역에 적용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런 주님의 성품과 사랑과 주님의 마음만이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을 믿고 또 성경은 이런 문제를 다루어 생명과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데 충분함을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3)  

   심리학자 Carl Gustav Jung에 의해서 내적치유가 교회에 들어왔다. 그리고 전에는 심리학과 정신과학과 새시대(New Age) 사람들만 하던 내적치유가 그의 제자 Agnes Sanford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기독교회에 더 깊이 뿌리를 박게 된 것이다.

  교회에 들어온 내적치유는 그의 기법인 "퇴행(regression)과, 심상법(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
(guided imagery)과 꿈의 분석과 게슈탈트(gestalt: 원시적 비명, 감정의 표출, 역할 대행 등)와 같은 기법의 하나 혹은 전부를 사용하면서 이것들을 성경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해왔다.

물론
  
인간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 발상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전한 정서를 갖기 원하시며, 분이나 시기, 질투와 같은 파괴적인 정서들은 버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갈5장 참조). 그래서 참다운 내적치유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개개인의 형편에 맞게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온 내적치유와 심리학은 성경에서 말하는 상담이나 권고나 권면이나 훈계 등의 성경적 사역과는 전혀 다르다. 간혹 성경적으로 상담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역을 "내적사역"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정서적 건강과 영적 건강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서적 건강은 성화의 과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마음에 믿고 영접한 다음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살게 하시는 결과라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적 치유가 필요 없고 계속 삶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바로잡아 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평생 의로 교육하는 것만 계속 하면 된다. 예수님의 삶을 바로 우리의 삶의 전형으로 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도록 해야 한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만 영적인 생명과 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교회는 이것을 분명히 충족해 주어야 한다. 심리적 기법은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도 영적인 생명을 줄 수는 없다. 따라서 내적치유란 말은 성경적 상담이나 신앙생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성경이 중심이 되지 않고 심리적 이론이 주가 되면 그것은 벌써 심리이설이다. 이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갈 2:8)고 하신 말씀대로이다.

  내적치유의 기본적 전제 중의 하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부정적인 경험을 하기 때문에 정서적 상처를 받고, 또 뿌리가 깊고 식별하기 힘든 상처는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이성이 발달하는 6세 까지 사이에 받는 상처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는 무의식 세계에 숨어 있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이유 없이 자기가 원치 않는 행동을 하게하고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정신적 결정론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운명론이기도 하다.

  내적치유는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자기에게 심리적 상처를 준 그 순간들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떤 내적치유자들은 전생까지 기억을 더듬어 전생에 받았던 상처까지도 다룬다고 주장하면서 진화론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참으로 회칠한 무덤이다. 이들은 이런 상처와 고통을 완화 시키고 치유를 하기 위해 환자들에게 "퇴행(regression)과 심상법(visualization)과 유도 심상법
(guided imagery) 등의 기법을 사용하며 또 이것을 환자가 혼자 해 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내적치유자들은 사람이 겉으로는 정서문제를 들어내지 않거나 또 상처를 받은 것을 생각해 내지 못해도 사람은 누구나 내적치유를 항상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누구나 상처를 받으며 심한 경우에는 아동학대를 당하기도 하고 또 자기도 모르는 난산의 고통 때문에 상처를 받는 등의 불쾌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적치유를 한다는 기독교인들은 내적치유는 성령님과 예수님을 돕는 일이라고 하면서 기독교라는 가면을 쓰려고 한다. 그리고는 내적치유를 성령님이 역사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얼마나 잘못되고 미혹적인 말인가? 첫째로 성령님은 심리적 기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이나 또 구약의 선지자들이 인간의 심리적 구성을 알고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그 분들이 내적치유와 같은 임상심리학의 기법을 사용한 증거는 성경에 전혀 없다. 둘째로 내적치유는 사람의 육신적 상상에서 얻는 인간의 힘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을 대치하려고 한다. 성경이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신 분명한 말씀을 그들은 무시하려고 한다.

  셋째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이나 교인들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은연중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우리의 기본적 욕구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물질이 필요하면 물질을 채워주시고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도 충실히 나가고, 성경도 매일 보고, 기도도 매일 하는데 왜 나의 욕구를 채워주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한다.

 

예수님을 나의 육신적 및 물질적 유익을 위해 이용하고 부릴 수 있는 분으로 착각한다. 나에게는 물질이나 건강이 필요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것들을 채워주실 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목적이 성령님께 쓰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살고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고전 10:31). 고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 욕심만을 가지고 하나님 대신 자기를 삶의 초점으로 삼게 된다.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은 교회에서 내적치유를 하게 되면 성령님과 예수님이 촉매 역할을 하는 상담자가 되기 때문에 치료가 쉬워진다고 하면서 내적치유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속의 참된 평강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게 드릴 때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던지 하나님께서 완전히 나를 주장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에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속에 충만해지고 우리의 육신도 건강해진다.

  또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이 내적 치유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유는 사람들이 용서를 못하면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은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용서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내적치유는 환자들에게 자기가 과거에 받은 상처를 다시 경험하게 해서 환자로 하여금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기를 임신 중에 아버지와 다투어서 내가 상처를 받았으니 그 어머니를 용서해 줄 필요가 있고 또 하나님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하나님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용서가 정서적 건강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 내적치유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도 하나님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기분을 돋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하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고 또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주장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내적치유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해주고 성경도 더 많이 읽고 싶게 해주기 때문에 내적치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분명하다고 내적치유자들은 주장한다.
내적치유를 받는 사람이 이러한 기분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분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알리는 표식 판이 될 수는 없다. 많은 이단자들과 새시대(New Age) 종파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보다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읽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느낌만 가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 망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의식 상태를 변화시키는 영적인 연습만을 해도 경험할 수 있다. 이단자들도 자기들의 생각으로 만든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에 대해 간절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묵상을 끝낸 동방 신비주의자들의 얼굴을 보면 기쁨이 충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충만해 있는가? 사실 새시대(New Age) 철학의 전재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으로 완전한 통일과 조화를 이룬다고 믿는다. 내적치유자들은 내적치유의 방법으로 인류를 자연과 "우주의 마음(Universal Mind)"에게 통합시키고 조화시켜 성경의 방법을 그것으로 대치해서 성도들을 성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고 분명한 심리이설이요 사탄의 역사임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4)  ? 현재냐 과거냐?

   내적치유는 인간의 기억을 치료한다는 심리적 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긍적적인 태도를 재확인하면서 부정적인 인간의 정서를 극복할 때 사용하는 기법이라고도 말한다. 내적치유는 주로 인간의 과거와 관계가 있거나 과거 때문에 생기는 죄책, 분, 두려움, 미움, 질투, 낮은 자신감이나 자존심 등의 부정적인 정서를 다룬다고 한다. 내적치유에서는 인간의 문제가 과거와 관련됐다고 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과거와 인간의 기억에 대한 것만을 다룬다.

  
피상담자는 누구나 과거를 갖고 있으며 그 과거는 흔히 현재의 생활과 관련이 있다. 또 상담자도 누구나 과거에 대한 견해 즉 과거와 현재와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견해나 이론은 말로 표현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상담자는 누구나 과거에 대해서 자기의 이론에 부합된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또 과거가 상담자에게 주는 문제들은 그 차원이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서 과거는 상담의 문제이다. 상담자는 누구나 피상담자의 과거를 다루게 된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항상 자기의 과거에 직면하게 된다. 결혼 생활의 문제로 상담을 받던 부부가 있다. 여자는 믿는 사람이고 남자는 불신자이다. 그런데 4번째 상담 모임에서 여자의 과거가 드러났다. 어려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그의 큰오빠에게 성적으로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상담자의 머릿속에 즉시 여러 생각들이 떠오르게 했다: "이 사건과 현재 남편과의 관계가 연관되어 있을까? 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할까?  만일 그것을 다루어야 한다면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등의 생각이다.

  또 다른 결혼관계의 문제에서는 남편이 간음을 했다. 부부가 모두 예수님을 믿는다. 남자가 회개를 했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용서했다. 그런데 부인은 말이 많은 여자이기 때문에 성경을 잘 알고 있어도 말을 많이 했다.

그러므로 용서는
(1) 상대에게 그 말을 다시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2)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다시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인 것도 알고 있었으며,
(3) 또 용서는 자신에게도 그것을 다시 상기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인 것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상담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주 강조해서 했다.


이 때 상담자는 생각을 했다: "저 여자는 믿음도 좋은 여자인데 왜 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가르침이 부족한가 아니면 훈계(훈련)가 부족한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다른 과거의 문제는 없을까?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이 문제 때문에 현재의 문제가 생긴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또 다른 한 여자는 "불안"의 문제로 상담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상담 중 그는 "저는 제가 네 살 때 한 친척에게 강간을 당한 기억이 가끔 순간적으로 나타나는데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다. 이런 것을 과거의 회상 장면으로의 전환하는 플래시백(flashback)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어떻게 하면 될까? 정말 억제된 기억이란 것이 있는가?" 하는 질문들은 상담자가 당면하는 과거에 관한 질문들이다. 그래서 과거는 상담의 문제가 되고 상담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과거의 문제를 다룰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한 "문화적"인 문제로서 현재 대단히 유행하고 있다. 교인이나 비교인이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보려고 과거를 더듬는다. 그래서 이제 "과거"는 그 자세가 당당하게 되었다.

 

"과거"와 과거 때문에 "피해"(victimization)를 보았다는 주장은 TV의 Oprah 등에서도 열을 올리는 프로들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의 행동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역기능 가족에 관한 문헌을 보면 미국 내의 가족 중 96%가 역기능 가족이라고 한다. 이것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사실은 미국 내 가족의 100%가 역기능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사람은 누구나가 죄인이기 때문에 역기능이 아닌 가족은 없다. 결혼을 해서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역기능가족 안에서 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도 죄인임은 틀림없다. 죄인이며 그 죄가 가족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자녀를 키우든지 그 자녀들은 부모에 대해서 불평이나 반항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역기능 가족의 문제는 모든 가족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과거가 현재에 끼친다는 영향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피해자(victims)이며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가족 때문에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돋구어 주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던지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을 하게 된다. 나의 가족이 역기능을 했기 때문에 나의 부모가 삶에 필요한 힘을 나에게 주지 못했고 그 결과로 나의 삶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의 행동이 중독적이 되어 나의 기능도 독소가 있는 병적 형태가 됐다는 것이다. 지금 나의 문제는 그 이유가 과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모도 형제도 심지어는 목사도 모두 불완전했으니 나에게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과거의 이론을 믿고 우리의 문제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드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J.I. Packer는 그의 저서 "Knowing God"(p. 74)에서 "오늘 날 사람들은 하나님도 인간들과 같은 인격을 소유한다는 말을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도 우리와 같이 약하고 적합하지 못하고 비효과적이며 좀 서툴게 보인다는 인상을 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의 역기능적 배경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여 우리와 같은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어 "하나님! 당신도 그렇게 대단한 분이 아니시군요.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칠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그 때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정말 당신이 하나님이란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도 우리와 같이 약하고 별 힘이 없으신 분이군요? 그러고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 나를 도와준다고 하십니까? 사람들이 나에게 준 상처를 고쳐준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거기 계시다면 말 좀 해보세요!"라고 말들을 한다고 했다.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을 보면 언제나 하나님을 왜곡하게 마련이다. 물론 우리의 경험을 하나님에게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도 하나님에게 가지고 가야 한다. 성경에서도 이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하나님을 왜곡하게 된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와는 반대로 가르친다. 즉 문제가 과거의 문제든 현재의 문제든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에게로 가지 말고 먼저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서 경험을 보고 그것을 다루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 정의를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함을 알게 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해서 축복이 되는"(롬 8:28)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문화 즉 "피해자(victimization)"의 문화를 반사하며 살고 있다. 무엇이나 잘못되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건을 지고 가다가 허리를 다쳐도 그 물건 위에 "이 물건을 들고 가면 다칠 수 있다"라는 경고문을 생산자가 그 물건 위에 부쳤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한 관리가 공금으로 도박을 했다가 실직을 당해 정부를 상대로 고소했다. 고소 내용은 "나는 도박을 하는 중독(병) 때문에 도박을 했는데 해직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승소를 하고 다시 그 직장을 찾았다. 어느 학교 선생은 항상 학교에 늦는다는 이유로 해직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교육부를 상대로 고소를 했다. 그는 "강박적 지각 증상(Compulsive Lateness Syndrome)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도 승소했다. 이제는 사람을 죽여도 얼마든지 무죄가 될 수 있는 것을 본다. 지금 우리는 "피해자(victims)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는 무엇을 해도 자기를 피해자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애들이 자기 방 정돈을 잘 못하는 것도 피해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쇼핑(shopping)을 너무 많이 하는 것도 "강박적 쇼핑장애
(compulsive shopping disorder)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무엇을 해도 피해자로 자신을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가 가져다 준 "피해자" 문화이다. 창조 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 중 하나가 인간의 "책임"성인데 그것이 지금은 어디론지 사라져가고 있소 눈에 보일까 말까 하고 있다.

 

 

내적치유의 성경적 비판(5)- 현재의 기억이냐 과거의 기억이냐

  과거는 성경적 상담자가 다루어야 할 뜨거운 문화적 토론이며 상담주제로 등장했다. "공동의존"의 문제나 "역기능 가족"들의 주제는 통속 심리학의 주제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와 그의 영향에 대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중요한 정신역학의 세 가지 이론을 알아야 한다.

  첫 째는 인간에 대한 Freud의 수력학적(hydraulic) 견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심리분석은 인간을 정서적 에너지가 가득 찬 뚜껑이 닫힌 용기와도 같다고 말한다.

사람 속에 있는 이런 에너지는 수력학적 액체와 같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으며 밖으로 스며 나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그 사람에게 행동을 가하면 그 에너지는 다른 곳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가하는 압력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Freud의 결정론의 원색적 이론이다.

  두 번째는 무의식의 개념이다. 무의식이란 말은 우리가 기억을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억 못하는 것들이 많다. 어떤 것은 평생 기억 못하는 것들도 있다. 심리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이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억압된 기억과 충동의 원시적 늪이다. 이것은 속에 깊숙이 잠겨있는 것으로 탐색하고 꺼내낼 수 있도록 훈련받은 분석가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무의식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말이다.

  셋 번째는 카타르시스(catharsis-정화법)의 개념이다. 의식할 수 없는 에너지와 정서는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네 살 때 나의 부모에 대해서 분을 가졌으면 그 분은 아직도 내 속에 들어있어 다른 방법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40세가 되어서 그 분을 다루려면 그것을 지금 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담이란 피상담자에게 자신의 정서를 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카타르시스란 표현되지 않았던 느낌을 표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분이나 공격적 감정을 표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수력학적 견해가 무의식의 개념과 합쳐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이 되는 카타르시스의 이론을 만든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떠나서 다른 모든 연구 결과는 이런 느낌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학문적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분과 공격을 많이 표하는 사람은 더욱더 분을 내며 공격적인 것을 모습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래서 카타르시스는 분을 감소시키지 못한다. 이런 연구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이론은 과거에 대한 견해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기를 원하실까? 기독교 심리치료자들은 피상담자의 부정적 경험으로 상담의 주요 내용을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적 상담에서는 상담의 시작을 성경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준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해서 과거를 기억하라고 하신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느낌과 생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히 10:32-34에서 우리에게 "전날에 너희가 . . .  것을 생각하라" 즉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했던 중요한 일들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기억하면 지금 나의 삶을 신실하게 사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 하나님을 위해서 산 다른 사람들과 사건들을 우리의 기억에 저장해 두어 기억하면서 삶에 도움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과거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하신 세 가지를 보면:

  첫 째로 하나님은 "너희는 출애굽과 유월절과 유월절의 기념물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성경에는 이런 기념물이 많다. 야곱이 세운 기념물, 요단강을 건넌 후에 세운 돌 기념물 이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쓴 나물을 먹고 (출 1:14) 그들의 괴롭던 생활과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은혜의 행적을 그의 백성들이 잊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그것들을 상세하게 기억하게 하셨다. 인간들은 잊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둘 째로 하나님은 주의 만찬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의 만찬은 우리의 기념물이다(눅 22:19).

셋 째는 고린도전서 10:1-13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의 어리석음을 기억해 교훈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 이는 과거는 언제나 현재에게 교훈과 권면을 준다는 말씀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과거의 기억은 그 해석에 따라 다른 뜻을 갖는다. 그래서 피상담자들이 상담에 갖고 오는 기억은 해석을 잘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들은 과거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방법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또 과거의 사건들은 현재까지 연결된다. 기억은 향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과거는 하나님을 위한 현재의 삶을 위한 것이다. 과거는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현재의 우리의 삶을 위한 것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과거의 이야기는 현재의 우리의 기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내용(context)를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죄는 역사가 있다. 거룩함과 좋은 은사도 역사가 있다. 과거는 무수한 방법으로 현재에 영향을 준다. 나에게 와서 도움을 청하는 피상담자는 어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도 역사가 있고 내용(context)이 있다. 누구나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려서 된다. 음성이 크고 거칠고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이 걸려 그렇게 된다. 만족하며 사는 사람도 만족의 비결을 배운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내용(context)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 각자의 이야기는 모두 독특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 속에 계심을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주신다는 말이다. 모세의 생을 보면 안다. 하나님도 모세를 오랜 세월 안 준비시키셨다. 애굽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을 준비하셨다.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세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셉의 이야기를 보자. 요셉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과 그의 꿈의 이야기로 형들의 미움을 사자 그의 형들이 그를 애굽으로 팔아 형무소 생활을 했다.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됐다. 그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을 보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 . ." 하나님이 그의 이야기를 쓰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을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즉 우리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서 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하셨기 때문에도 중요하지만 과거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그의 내용(context)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성경으로 충분하다

교계에서는 기독교 상담을 할 때 정말로 성경만으로도 충분한가 하는 문제로 많은 논란이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 상담자들이 성경의 영감설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상담에서 피상담자를 대할 때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말을 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다.

  어떤 분들은 상담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 상담을 세상의 기법이나 방법으로 하려고 하고 성경으로는 하려고 하질 않는다. 이런 일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받은 교육의 성격이나 상담의 환경 때문일 수가 있다. 또 상담에서 종교를 배제하려는 압력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피상담자에게 그들의 간증을 성경적으로 해주면서도 실제 상담을 하는 태도나 방법은 기독교적 관점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상담을 성경과 심리학을 통합한 방법으로 해야한다고 말하고, 또 이것이 상담을 기독교적으로 하는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또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권장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분명히 성경적상담자라고 자신있게 소개하고 그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면서 성경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 상담에 관한 책을 보면 성경적으로만 하는 상담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글들을 많이 본다. 성경적상담을 기도만 하라는 방법이라고 한다든지, 혹은 금식과 기도만을 권장하는 방법이라고 한다든지, 또 안수만 해주는 방법이라고 한다든지 하면서 성경적상담을 무시해 버리려는 경향이 심리상담자 간에 많이 있다. 혹은 성경만 가지고 어떻게 상담이 되느냐고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심리학과 성경으로만 하는 상담은 지금까지 서로 가까이 갈 수 없는 관계가 되어 왔다. 이들은 상담의 기본적 전제가 서로 정반대로 다르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삶의 문제에 대한 인간의 견해와 인간의 해결방법을 기초로 하고 있는 반면 성경적상담은 인간과 인간의 삶의 문제를 성경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적상담은 사실 심리적 상담이나 심리이설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아주 다른 길이다. 처음부터 신학적 및 철학적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충분성을 보는 견해가 완전히 다르다.

  사실 기독교 심리학이란 모순 어법(oxymoron)이고 사이비 과학(pseudo-science)이다. 이는 성경의 충분성에 관한 논쟁이란 처음부터 성경과 심리학의 논쟁이기 때문이다. 또 심리학도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상태와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내적 갈등의 치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이란 원래 인간의 영혼에 관한 학문을 말한다. 왜냐하면 Sigmund Freud 전에는 심리학이란 주로 영적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Freud는 심리학을 인간의 행위를 말하는 학문으로 고쳐 만들어서 그것을 새로 정의했다. 그래서 옳고, 그른 것, 도덕, 부도덕, 순종, 불순종 등의 개념을 억압, 퇴행, 자아형성 등의 용어로 대치해 버렸다. 심리학자들은 의식적인 행위보다는 무의식적 정신을 탐구해서 환자들을 분석하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경적 분석과 분류를 자기들과는 전혀 무관하거나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버려버렸다.

  이래서 성경과 심리학 사이에 전쟁이 시작됐다. 비기독교 심리학자들이 실질적으로 종교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Freud는 종교를 신경증, 노이로제로 이름 부치고 자기는 무신론적 유대인임과 소망이 없는 이방인이라고 불렀다. 그 후 Freud는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리고는 현대문화의 심리학화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희생자라는 주제는 국민 정서와 사상에 파고들어, 가장 심한 범죄까지도 부모나 친구나 사회나 가해자의 내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종교의 잘못으로 그 책임을 전가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개인의 행위는 부수적이고 지엽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사회는 악의 원인보다는 결과에 초점을 두어야만 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간의 책임보다는 국가의 생활 보조(welfare)가 주 사업이 되었다. 그래서 무료 낙태 병원이 더 많이 생기고, 무료 콘돔이 더 많이 지급되고, 미성년 자녀에 대한 국가 보조가 더 많이 지급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회개나 절제(금욕)나 도덕 등을 주장하지 못하고, 소위 정치적으로 잘못됐다는 반대를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이런 갈등 속에서도 교회는 30년간 이상을 심리학과의 사랑을 맺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심리치료에 의해 엄몰되고 있는 형편이다.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잘못되면 장기간의 심리치료를 받아야 되는 줄 생각하고 치료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유행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삶의 문제를 보는 심리학적 통찰(방법)을 교회로 가지고 들어왔다. 왜? 그 이유는 신학부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런 심리적 통찰을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비평도 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받아 들이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20세기 교회가 성경을 개인이나 가족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20, 30년 간 교회에서는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가정문제나, 이혼문제나, 독신생활이나, 성화나, 죄 등에 대한 설교를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심리이설자들이 이로 인한 공백을 메우려고 했다. 이런 결과로 "기독교 심리학"이나 "기독교 상담"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심리학자들이나 기독교 상담자들이 하나님은 교인들의 영혼뿐 아니라 교인들의 정신(psych) 까지도 돌보신다는 사상을 유행시키고 대중화시켜 신학과 심리치료를 통합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가 상담의 방법에 대해서 고심하게 됐다. 이럴 때 Jay Adams 목사가 신학적 훈련을 받은 상담자들에게 공백을 메꾸라고 호소했다. 이에 대해 Larry Crabb은 오히려 인간의 상한 정신 즉 정서를 고치려면 신학 이상의 것이 필요하고 더 나은 심리학적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Paul Meier나  Frank Minirth는 기독교 정신의학을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그후에는 중독을 회복시킨다는 심리치료의 모델들이 교회에 퍼지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많은 기독교 상담자들이 자기들이 해주는 상담을 제3자인 보험회사에서 상담료를 받기위해서 전문적 면허를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독교상담 운동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각처에 전문적인 기독교 상담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책들이 서점을 채웠고 목사와 교인들의 서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독교 상담 운동이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기본 문제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즉 만일 성경이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면 왜 심리학이 필요한가? 또는 만일 심리학으로 충분하다면 왜 하나님이나 성경이 필요하단 말인가? 소위 성경과 심리학을 통합하려는 사람들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염려되는 것이 있다. 현대의 기독교 전문인들 - 상담자, 의사, 목사, 교육가, 지식인들 -의 사고 방식이 그들의 삶 속에서 현대화되어 그렇게 훈련 받아왔고 받아오고 있다. 신학자 John Murray가 여기에 대해서 참으로 지당한 말을 했다: "현대사상을 지배하는 상담의 사상구조를 조심하지 않으면 기독교도 그런 사상을 받게 되어 머지 않아 그의 패턴과 전제가 기독교의 것이 되고 말것이다."(Manner of Truth, p. 22)

  현대교회는 성경과 심리학에 대해 벌써 이분론을 주장하고 있다. 즉 성경의 무오설을 믿지만 성경은 믿음과 삶의 문제들을 위해서 충분치 않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주일에는 강단에서 성경의 무오설을 주제로 설교를 하지만 주중에는 심리이설자들을 데려다 각양 삶의 문제들을 위한 세미나 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미나 강사들은 전혀 성경에는 근거도 없는 말을 하면서 삶의 문제들을 돕는다고 한다. 이러한 세미나에서는 강의 시작에 성경구절을 한 두 개는 읽는다. 그러나 강의 내용은 읽은 성경 본문과는 전혀 다른 것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바로 미혹이요 심리이설이다. 이것이 강단과 세미나 강사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이분론이다.

  또 다른 이분론은 교회가 성경의 무오설을 가르치고 성경이 교인들을 의롭게 하는데는 충분하다고 말은 하지만 성화를 위해서는 충분하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거의 모든 심리이설적 기독교 상담자는 이런 딜레마(궁지)에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 조명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적용을 위해서도 충분하다. 사람들이 자유함을 받기 위해서 진리가 필요하면 성경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자유함을 주는 유일한 진리이고 하나님의 방법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경이 천국에 입성하는 방법으로만 필요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데는 진리가 못된다고 하는 것은 미혹이요 이설이요 비진리이다.

  이 문제는 상담의 학파가 누구냐와, 혹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관점이 중요하냐, 또는 어느 신학적 견해가 중요하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내가 상담을 할 때 성경대로 나의 상담이론이 짜여져 있느냐, 또는 성경이 나의 상담의 방법을 결정해 주었느냐가 중요하다. 상담에 관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성경에 기준을 두었느냐가 문제이다. 즉 우리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그의 말씀을 통해서)이 직접 관여하시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도 변화될 수 없고, 변화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어려운 결혼문제에 처한 사람들이나 동성연애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게 된다.

  요는 삶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삶을 해석하는데 성경이 충분하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분열증 환자나 동성연애자의 삶을 해석하는데 성경이 충분하냐 하는 문제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을 도와 그의 행동을 변화시켜 그가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도록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성경은 생화학자나 유전학자가 일을 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는 생업에서 일을 하든지 성경이 최고로 위대한 지침서가 되는 것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담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기독교의 성경적 전통을 굳게 잡고 성경적 진리 속에서 성경적 상담의 이론과 실제를 굳게 세울 것을 간절히 요구한다. 일시적 유행이나 이론은 왔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행을 따라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따라 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감동된 말씀으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벧후 1:3)고 하셨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충분하던지 그렇지 않든지 양자 택일이다.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이 아니고, 충분하냐 아니면 불충분하냐가 우리가 택할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