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 (증경총회장, 한국기독교학술원장)
2천년의 교회 역사를 네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교회예배의 형성기인 1세기부터 5세기까지 예배의 모형은 바울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의 목적(고전 10) 구성(고전 11) 성례전(고전 11) 교회생활(고전 14) 영적 기초(엡 2) 조직(엡 4) 등이다. 초대교회는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에 의하여 대체로 다음과 같은 생활을 가졌다. 일정한 장소에 무시로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 동안에 믿는 형제자매들의 소식을 교환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상기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믿음을 다짐하면서 서로 격려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성경과 찬송가가 없었기 때문에 일정한 예배형식은 없었다.
1세기 후반부터는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가 보이지 않으므로 일정한 조직체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 때부터 시편 낭송과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바울이 가르친 교회제도와 간단한 신앙 고백문을 만들어 믿음의 내용을 정리했다. 예배는 유대인의 회당의 예배형식의 영향을 받아 토라(율법서) 대신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어록을 읽었다. 찬양은 시편중에서 찬송시를 뽑아 약간의 곡을 붙여 읽었다. 이것이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로 발달되었다. 성경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의 증언과 바울의 편지를 중심한 내용을 읽고 묵상했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성찬식을 거행했다. 제 5세기에 이르러 교회의 예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시편 낭독,성서봉독,설교(감독,목사),기도,가난한 사람을 위한 헌금 등이었다.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약 1천년 동안은 천주교의 독재시대였다. 처음 5백년 동안은 별 활동이 없었으나 11세기부터 5백년 동안은 로마천주교회의 전성시대가 이어졌다. 그동안 스콜라주의가 교회신학을 지배하면서 교회생활은 매우 강한 율법주의로 정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신성제국의 이름으로 전 유럽을 지배했으며 종교적으로는 로마천주교회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를 완전히 지배했다. 따라서 매우 경직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이 강요되었다. 초대교회의 생동력 있는 신앙생활은 사라지고 웅장한 교회당을 경쟁적으로 건축하고 그에 상부한 교직제도를 구축하고(교황 추기경 감독 신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통제했다.
특히 고해제도를 창안하여 교인들을 철저히 통제했다. 예배에 있어서는 교인이 중심이 아니라 성직자가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 여러 가지 예배행사를 교인들은 보고만 있어야 했다. 성서는 성직자들의 독점물이며 찬송은 성가대가 대신 불러주고 기도는 감독과 신부들의 독점물이었다. 이와 같이 중세교회는 참여하는 예배가 아니라 구경하고 듣고 복종만 하는 예배였다. 초대교회의 교회와는 거리가 먼 예배형식이었다.
루터와 칼빈은 이와 같은 예배의 내용과 형식을 완전히 변경했다.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서를 라틴어에서 알기 쉬운 일상용어로 번역하여 예배시에 낭독했다. 성가대의 전유물이었던 찬송을 모든 교인이 함께 불렀다.
설교는 성서에 근거한 내용으로 했으며 교인도 자기의 음성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듣고 보기만 하는 예배가 아니라 듣고 보고 음성으로 동참하는 예배였다. 칼빈은 예배시에 신자들의 눈을 어지럽게 하는 성직자들의 요란한 가운을 버리고 흑색가운에 아무 장식물이 없는 가운을 착용했다. 이것을 '제네바 가운'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장로교회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예배 가운이다. 이러한 예배형식이 19세기 경건주의 운동과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표준적인 가운이었다. 특히 칼빈은 교회 안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세워 놓고 박수치는 것을 엄금했다. 고린도전서 10장31절의 정신에 반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대교회에서도 20세기 중반까지 프로테스탄트의 예배형식은 루터와 칼빈과 웨슬레의 예배형식을 답습했으나 간혹 부흥사들이 형편과 분위기에 따라 가운을 입지 않거나 부흥성가를 만들어 열정적으로 찬송을 불러 예배 분위기를 감상적으로 증폭시키기도 했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교인중심으로 또는 감정촉발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변화(paradigm shift)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찬송가를 편곡하여 부르거나 악기도 파이프오르간이었던 것이 일반 음악회에서 쓰고 있는 현대 악기를 많이 쓰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일부에서는 민속 악기를 쓰면서 교인들의 토착적 감정을 촉발시키고 있다.
앉아서 정숙하게 설교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성가대의 찬양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다.
미국에서 20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고 있는 침례교회와 펜테코스탈교회와 부흥회 중심의 교파의 예배에는 인간중심의, 감정충동적인 그리고 샤머니즘적인 예배가 유행하고 있다. 일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예배가 아니라 병 고치는 순서에 더 큰 비중을 가지는 교회도 있다. 미국과 브라질과 한국교회는 칼빈과 루터가 가르친 개혁자적 예배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감정을 촉발한,인간중심적 예배양식이 유행하고 있다.
모든 종교가 믿는 신은 인간의 생각과 체험에서 만들어진 신이나 기독교의 신은 신 자신이 인간에게 계시된 신이다. 이 신을 절대자요 구주라고 부른다. 교회의 예배는 이러한 절대자인 신과 상대자인 신자와의 신비적 관계가 형성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음에 이렇게 나타난 예배에 대한 신학적 뜻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예배의 가변적 요소와 불가변적 요소
예배에는 가변적 요소와 불가변적 요소가 있다. 먼저 불가변적 요소를 지적한다면 말씀선포(설교)와 성례전과 기도와 신앙훈련(칼빈)이 있다. 말씀선포의 내용은 신구약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돌보심과 예수의 재림이다. 이 사실을 신자들이 모일 때마다 선포하므로 신자들은 구원을 확신하게 된다.
성례전이란 세례와 성만찬이다. 세례는 신자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그에게 신비적으로 합일되는 것을 체험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성만찬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으로 흘리신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내가 완전히 구원받았음을 체험하는 사건이다.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계속적으로 은혜 속에서 살도록 부탁하는 행위다. 그리고 칼빈이 주장하듯이 이 세 가지 사건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믿음의 훈련이 필요하므로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신도들을 훈련해야 한다.
예배에는 또한 가변적 요소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예배시에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한다. 이 찬양은 이스라엘 백성이 엄수하던 예배형식이요 초대교회에서도 널리 시행되던 형식이다. 이 찬양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포함한다. '야웨' 하나님은 우리들로부터 찬양받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다. 또한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배시에 큰 소리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한다.
둘째, 성도들의 교제를 증진하는 일이다.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조항이 있다. 이 신앙고백은 어느 종교단체의 고백서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기독교 특유의 신앙조항이다. 성찬식에서는 예수님과 신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비적인 접붙임이 있는가 하면, 교회 예배 전체를 통하여 교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룩한 사건을 체험한다. 예배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하나 되는 체험이 사회에 나가서 선교하는 일에나 신국을 건설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 큰 기적이 나타나게 한다.
셋째, 신자들은 교회생활을 통하여 영의 양식을 충분히 받아먹고 신앙인으로서 자라난다. 이러한 뜻에서 키프리아누스 교부는 교회를 모든 신앙인의 어머니라고 했다. 구원을 받고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훌륭하게 하고 하늘나라에 가는 일에 필요한 모든 양식을 교회로부터 받기 때문에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며, 그 양식을 교회의 예배시간에 충분히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자들이나 교회에 속하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신령한 힘을 가지지 못한다.
넷째, 예배로부터 신학이 양육되었다. 그리스도론은 니케아 회의에서 신학적 논쟁이 벌어지기 전에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서 한 서신설교(書信說敎)에서 훌륭하게 체계화되었다.(빌 2:5-11) 바울은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의 사역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 그 내용을 빌립보교인들에게 설교의 형식으로 써 보낸 것이다. 이 사실을 다른 말로 말한다면 "예배가 신학형성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예배는 십자군의 교실이다. 그 시간이 복음의 군인으로서, 십자군의 부대로서 어떻게 무장하며, 구체적인 전술은 무엇이며, 군가를 어떻게 부르며, 최고 지휘관은 누구이며, 무기사용법은 무엇이며, 용기는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를 설교를 통하여 가르쳐 준다. 이렇게 볼 때 키프리아누스와 칼빈의 말처럼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요 예배를 통하여 모든 신령한 무기와 양식을 보급 받는다. 이러한 가변적 요소를 예배시간을 통하여 깨닫게 된다. 또한 훈련을 받아 지상풍습과 권세로부터 오는 모든 종류의 시험과 도전에 대비하여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승리와 영광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예배를 더이상 타락시키지 말라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특징은 이신득의적 신앙, 복음적 성서이해, 신언선포로서 설교의 중요성 강조, 세례와 성찬례의 준수, 목사와 장로의 직무 분담, 신앙교육 강조 그리고 세계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과 교회 행정을 선교사들로부터 배워 우리는 지난 1백20년 동안 이 땅에서 장로교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한국 장로교회에는 신앙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매우 걱정스러운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신학적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정통주의-근본주의-세대주의와, 성서적 복음주의적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토착화 신학을 주장하는 교회가 그것이다. 이들은 다같이 칼빈의 신앙과 신학에 따른다고 하나, 실제로는 아전인수격으로 칼빈의 신학을 오해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칼빈이 엄하게 경고한 잘못된 성령운동이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를 강조했으나 그것은 병 고치는 일이나 방언이나 환상을 보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건심을 촉발하고 경건의 능력이 우리의 심신의 병을 고쳐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장로교회 안에도 성령의 감동을 빙자하여 부흥사들과 목회목사들과 자칭 영성집회 인도자들에 의하여 설교단이 크게 오염되고 있다. 그렇게도 설교단의 거룩성을 강조한 칼빈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설교단을 사람의 말로 오염시키고 있다. 이것은 예배의 타락을 의미한다. 특히 일부 젊은 목회자들이 새 목회방법을 도입한다고 하면서 설교단을 없이하고 즉흥적으로 설교 아닌 설교를 하는 예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장로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번째, 교역자를 양성하는 교육에 난맥상이 나타나 자격미달의 교역자가 양산되고 있다. '부실 목사'라든가 '가짜 목사'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어 사회에 대한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세번째, 교회당은 하나님께 드리는 신성한 예배의 장소라고 예수님이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의 선배 목사들이 그렇게 지켜왔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공간은 우리 교단을 포함해서 사람을 위한, 사람이 중심이 된 각종 축하회로 오염되고 있다. 말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전적으로 목사와 장로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드리는 장소가 되고 있다.
네번째, 예배를 드리는 신자들의 마음은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우애와 협력하는 마음이어야 하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 선출이나 책임 부서의 책임자를 선출할 때 너무나도 부끄럽고 비신앙적인 사건이 터지곤 한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서 주어지는 직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괴술과 금권으로 적임자를 뽑으려 한다.
다섯번째, 한국 장로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중 가장 분열이 심한 교파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병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미국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나 이같은 현상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 분열의 병폐는 교회 안에서 배양되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진실된 예배를 드리지 못한 데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년에 천주교회는 극적으로 증가하나 개신교회는 감소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으나 그 이유는 교회분열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칼빈의 충성된 후예라고 하는 장로교회가 1백50개 이상의 교파로 분열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예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현상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말로는 천국을 향하고 있다고 하나 사실은 방향감각을 잃고 있다.
한국개신교회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특히 장로교회는 한국교회 전체를 바르게 이끌어 갈 책임을 지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몇 가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인간의 흥취에 맞도록 타락해 버린 예배를 하나님 중심의 예배로 환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선포의 방향으로 대전환해야 한다.
둘째, 모든 재직들(장로 권사 집사)은 의무적으로 신앙과 신학에 관한 응분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셋째, 새 시대의 새 생활관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을 위한 새 예배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현재 대다수의 중대형 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예배 프로그램은 인간중심적 동기에서 작성한 내용, 예를 들면 교회당의 설교단 장식이나 성가대의 합창 후에 박수를 치는 일은 전적으로 잘못된 일이기 때문에 시정해야 한다. 또한 설교자의 박사 가운 착용도 하나님과 교인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시정해야 한다.
넷째, 장로들은 장로직이 목회자와 동등한 직분으로 착각하여 목회자의 목회권에 간섭하고 있으나 이 일은 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목사와 장로간의 기 싸움은 버려져야 한다.
다섯째, 설교의 내용이 개인구원에만 치중되어서는 안된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인류의 총체적 구원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통전적 구원에 관한 설교라야 한다. 교회의 사역도 세계구원에 더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2006. 12. 13. 한국기독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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